우리 국토의 70%가 산이니 걷는 곳만은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6천 미터의 산이라면 명함도 내밀지 못할 히말라야가 아니다.
사람이 운동 삼아 오르내리고 걷기가 그만큼 편리한 곳이 지천으로 널려 있어서`텐징 놀가이`가 말한 티베트를 찾지 않고도 정상에 설 곳이 너무 많다.
산속에서 은거하는 도인을 두고 옛사람들은 방외지사라고 했다면 지금은 고정관념을 깨는 사람이 곧 그들이다.
산은 시간이 고무줄이지만 하산만 하면 어망 그물코처럼 시간계산이 촘촘해진다. 산은 걷는 것 그 자체가 명상이고 꿈을 갖는 자유로움이 항상 뒤따르며 위아래가 없으니 구속받는 일도 돈을 내는 일은 더더욱 없다.
걷는 것이 그만큼 좋다는 의미다. 걷기는 곧 말하기로 단정하는 작가도 있다.
걷는 사람의 몸매와 눈빛, 팔다리, 엉덩이 움직임, 옷매무새에서 그 사람의 신분까지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실제 인디언들은 모래에 찍힌 발자국만 보고 나이나 남자 여자, 심지어 무기를 가졌는지를 짐작한다는 것.
위대한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나는 걸을 때만 명상에 잠길 수 있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고 <고백론>과 <에밀>에서 쓰고 있다.
산 가운데로 난 고갯길을 넘는 재미는 더 쏠쏠하다.
한국인이 고개를 넘는다는 것은 새 삶으로 가는 지름길로도 비유된다.
망자가 내를 넘을 때는 이승의 시름을 풀고 가지만 그만큼 고단하다는 의미가 깔려있다.
고갯길은 살아 있는 사람의 몫이어서 내를 건너는 다리와는 틀린다.
달래고개, 하늘재, 박달재는 민중의 삶을 처연하게 이끌어내는 통과의례처럼 전설이 붙어다니니 음미하는 맛이 배나 된다.
걸으면서 누구나 흥얼거리는 “아리아리 아리리오”는 실체는 없지만 정신세계를 부르는 간절한 염원이기도 하다.
내가 지금 사는 이 땅은 해고와 실업자가 건국 이래 가장 많은 시기이기도 하지만 세계에서 오너 붐이 가장 길게 가는 국가와 국민이다.
원유 값이 배럴당 100달러를 넘겼을 때도 100m의 거리조차 걷기를 싫어하고 마구 달리고 아무 데나 차를 세워두는 국가국민이 사는 곳이다.
한국인은 하루 평균 얼마나 걸을까. 한국인의 하루 평균 걸음 수는 전업주부가 3천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회사원이 5천 걸음쯤인 반면 내근만 보는 자가운전사원은 5백 걸음도 안 됐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하루 평균 45.9km씩 자가용(2006년 교통안전공단 조사)을 운행, 일본인(27km)들보다 1.7배를 더 탄다. 또 국토가 크고 범죄가 많은 사회 여건상 가장 주행거리가 긴 미국의 52km에 근접한다.
그만큼 팍팍하게 산다는 뜻일까.
“나는 이대로 무너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대로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하나뿐인 육신과 정신마저/ 이대로 망가지게 내버려둘 순 없기 때문이다”라고 박노해는 산길을 오르내리는 이유를 말했다.
갈수록 인생살이가 쉽지 않다. 40대는 사오정을 걱정해야 하고 50대는 오륙도를 근심하는 것은 이미 사치가 되어 버린 것 같다.
둘 건너 한 사람씩 만나는 비정규직은 비정규직대로 살려달라고 아우성이다.
이태백이가 부지기수로 늘어나니 너나없이 살아가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었지만 인생살이에는 여러 길이 있다.
하늘에 나는 새도 눈먼 공중에서 입을 벌리고 있으면 얻어지는 것이 도이니 무엇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산길을 걸으면서 건강이나 튼튼하게 만들면서 기다리는 것이 최고다.
여산여수(如山如水)라 했지 않나. 산을 닮고 물을 닮아 느긋하게 세상을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