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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시선을 동해로 돌려라" 6ㆍ25 장사상륙작전 재조명

이상인기자
등록일 2009-06-19 20:40 게재일 2009-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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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군은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양동 작전인 장사상륙 작전으로 희생된 전몰용사의 호국정신을 추모하는 승전기념공원 조성사업을 추진한다. 군은 국난극복의 현장을 기록·보존하는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상륙작전의 현장인 남정면 장사리 일대에 승전기념공원을 조성하는 것.

군은 지난달 25일 국가보훈처에 2009년 제1회 현충시설심의위원회에 사업기본계획을 설명하고 240억원의 예산을 통과시켜 사업추진에 활기를 찾고 있다.

사업내용

-현충시설(1만320㎡) = 위령탑 및 위패봉안소, 우국청년의사추모탑, 전시교육관, 맥아더친필석, 상징·참배·승리의 광장, LST문산호 침몰지점 추모상징 조형물설치, 상륙작전 상징조각공원, 영혼의 분수, 벽천 등

- 휴양 및 전쟁체험시설(4천870㎡) = 전망대, 서바이블게임장(탱크, 전투기, 재래식 무기체험 등)

- 편익 및 관리시설(1만8천740㎡) = 생태연못, 보행육교, 주차장, 화장실, 관리사무소

- 녹지시설(7만3천10㎡)

장사상륙작전

6·25전쟁의 교착상태에서 새로운 돌파구인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기 위한 양동작전이었다. 당시 미국 군사전문가들조차 성공확률 ‘5천분의 1’로 점치며 만류했던 20세기 마지막 상륙작전이다.

1950년 8월 24일 대구를 중심으로 모집된 772명을 주축으로 8월 27일 밀양에서 이명흠 소령을 대장으로 육군본부직할 독립제1유격대가 창설됐다. 이 부대는 8월 31일까지 밀양에서 기초적인 교육을 받은 후 1950년 9월 8일 부산 육군본부 청사로 옮겨 9월 11일까지 기본적인 유격교육을 받으며 상륙작전에 대비했다.

1950년 9월 10일 정식으로 장사동 상륙작전명령 제174호를 받았다. 9월 13일 2천700t급 LST인 문산호(선장 황재중)에 승선하고 부산항을 출발, 장사로 향했다.

당시 이 일대는 북한군의 가장 정예부대인 ‘무정군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아군은 계획상 상륙일인 9월 13일 새벽에 첫 상륙을 시도했으나 심한 파도와 풍랑으로 하루를 연기, 14일 새벽 4시께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그 당시 장사지역 해역에는 짙은 안개와 거센 파도로 풍랑이 극심했으며 북한군은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부경리 200고지와 부흥리 125고지에서 문산호를 향해 박격포를 비롯한 집중포화를 일제히 퍼부었다.

약 두 시간에 걸친 적의 집중포화가 문산호의 뱃머리를 강타해 배가 한쪽으로 기울었고 상륙부대원들은 상륙할 엄두도 내지 못 했다.

비오듯 쏟아지는 적의 총탄과 집어삼킬 듯 일렁대는 파도를 뚫고 맨 먼저 바다에 뛰어든 사람은 5중대 부관이었던 박계담 소위였다. 박 소위의 ‘돌격’소리와 함께 부대원들은 넘실대는 바다 속으로 뛰어 들어 수많은 익사자를 냈다.

학도병들은 수없이 쏟아지는 적의 총탄을 맞아가며 밧줄을 타고 하나둘 장사리 해안으로 상륙하기 시작했다.

옷이며 배낭이며 모두가 젖은 채 겨우 부대를 정돈한 후 아침 8시께 아군의 함포지원과 공군의 지원폭격을 받으며 고지점령에 나서 낮 12시께 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날 밤 북한군은 4대의 탱크를 앞세우고 3면에서 다시 공격을 가해오기 시작했고 600여 학도병들은 결사사수의 정신으로 일주일간을 버티며 고지를 사수했다. 이같은 학도병들의 선전에도 불구, 작전에 투입됐던 문산호는 좌초됐고 수많은 동료마저 잃었다.

결국 20일 오후 전사한 전우들을 시체도 수습하지도 못한 채 눈물을 삼키며 부산항으로 귀환했다.

상륙작전 시 산화한 300여명을 제외한 나머지 대원들 일부는 3사단 32연대에 편입되고 일부는 뿔뿔이 흩어졌고 그해 12월 19일 ‘한성여중’에서 해체되고 말았다.

장사상륙작전은 학생들이 단일부대로 참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전투이기도 했다. 장사상륙작전에서 대부분 중학생인 학도병 600여명이 참전했다.

군사 작전 개념상 상륙작전은 최정예부대가 담당하는 것이 상식인데 왜 이런 어려운 작전을 훈련이 미숙한 ‘학생부대’에 맡겼는가 하는 것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사전 지원약속이 되었다던 포항부근의 3사단에는 사전 통보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지는 등 상륙작전과 관련한 많은 의문은 여전하다.

6·25당시 입은 영덕지역 피해를 보면 전사 69명, 사망(민간) 563, 부상 233, 납치 81, 학살 73, 행방불명 603명이다. 특히, 장사상륙작전에서의 피해는 전사 139, 부상 92, LST문산호 1척으로 전사에 기록됐다. 인천상륙작전에는 전사 29, 부상 219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장사 승전기념공원

아직도 장사상륙작전 희생자들에 대한 예우와 명예회복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세계전사적으로 우뚝선 인천상륙작전의 제1성공요인이었던 장사상륙작전 성과를 재평가하고 참전용사 및 유족의 명예회복과 호국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며 역사적 사건을 보전해 국민정신교육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군은 이에 따라 승전기념공원 조성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와 함께 이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1990년부터 매년 9월 위령제와 추모음악제를 개최해 오고 있다.

군은 오는 9월 14일께 해병대사령부(해병1사단)와 협조해 장사상륙작전 재연행사를 추진할 계획이다.

학술세미나 개최

영덕은 6·25전쟁때 인천상륙작전의 양동작전으로 감행된 장사상륙작전에서 희생된 충혼들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역사적 기록으로 재조명하기 위해 오는 6월 2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장사상륙작전 학술 세미나를 개최한다.

이번 세미나는 전국방부장관인 김장수 국회의원의 기조강연을 시작으로 국방대학교 허남성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다.

양영조(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박일송(육군사관학교교수), 김희곤(안동대학교 교수)의 논문 발표가 있다.

이현수(전 육군사관학교 교수부장), 허남성(국방대학교교수), 구자문(한동대학교 교수), 김성회(현충시설심의위원,조각가), 이중섭(영덕군 재향군인회장), 이형주(국가보훈처), 송경창(새경북기획단장) 등이 참여해 ‘장사상륙작전의 전개과정과 성격’, ‘장사상륙작전시 지상적전의 의의’, ‘장사상륙작전의 기념사업 방안’을 주제로 열띤 토론을 펼친다.

/이상인기자 silee@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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