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밭머리 흐느적대는 눈 먼 바람만이
학소대 갇힌 물소리를 진양조로 풀었다.
세월의 뒤안에서는 석탑마저 안거(安居)에 드나
법당 안 딛은 발을 내 차마 꺼내지 못하고
말없이 청산을 넘는 구름법문(法問)을 듣는다.
유사(遺事)의 어느 상류, 희미하게 떠돌다 가는
큰스님 발자국 곁에 젖은 신발을 벗으면
뿔 고운 기린 한 마리 장경(長徑) 속을 걸어 나오고.
- 정경화 시조집 ‘풀잎’(동학사·2007)
경북 군위에 있는 인각사에 가보셨는지요? 그곳은 고려 말 일연스님께서 노구의 몸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를 한 줄 한 줄 엮어나가던 성스러운 곳입니다. 일연의 ‘三國遺事’가 아니었더라면 우리 민족의 옛 모습은 영원히 망실(亡失)되어버렸을 테지요. 생각만 해도 섬뜩한 일입니다. 그동안 폐허같이 방치되었던 인각사가 최근 여러분들의 노력으로 새 모습을 갖추어나가고 있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닙니다. 대구의 젊은 시조시인 정경화가 오래전 인각사를 다녀온 모양입니다. 그곳을 다녀온 소회를 아름답고 감동적인 세 편의 시조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첫수에서는 황량한 인각사의 풍광을 슬픈 진양조 가락으로 풀어내고 있고, 둘째 수에서는 화자가 법당에 들어 구름법문을 듣는 것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물론 그 법당은 단순히 현재의 법당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사(遺事)가 서술되던 그 역사 속의 법당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셋째 수에서는 화자가 유사의 상류에 젖다가 현실로 되돌아 나오는 장면인데, 재미있는 것은 장경 속을 걸어 나오는 기린 한 마리를 데리고 온 것입니다. 저 기린 한 마리는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요? “걸어 나오고.”라는 시의 마지막 종결부를 미완의 형태로 처리함으로써 유사(遺事)가 계속 씌어지고 있는 듯, 독경이 계속 들려오는 듯 신비스럽고 또 경외감 넘치는 풍광이 계속 펼쳐지게 하고 있습니다.
해설<이종암·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