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원 < 북부취재본부장 >
산나물이 한창인 계절이다.
지금쯤의 산나물은 야산지역은 거의 끝나가고, 깊은 산에서 자라는 향기 짙은 산나물이 난다.
산나물은 이른 봄, 낮은 산에서 시작하여 높은 산으로 올라가면서 자란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산나물과 들나물을 구분해서 표현하기도 한다.
들나물은 봄을 제일 먼저 알리는 냉이와 씀바귀, 쑥, 등이 있고 야산 나물로는 쑥부쟁이와·원추리·개미취·참취·두릅 등이 있다. 또 높은 산으로 올라가면 참나물과 모시대· 곰취· 박쥐나물·병풍취 등 200여 종의 산나물이 있다.
요즘 나오는 산나물 가운데는 산과 들이 아닌 인가 근처에서 자라는 참죽나물이 있다. 참죽나물은 두릅이나 개두릅처럼 나무순을 따서 먹는 나물로, 생으로 먹거나 고추장에 장아찌로 담가 먹으면 독특한 향이 있어 애호가들은 이 나물을 꽤 귀한 나물로 꼽는다.
농가 주위나 밭두렁 등에 주로 심었던 참죽나무는 경상도와 전라도 일부 지방에서는 가죽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표준말의 가죽나무는 개가죽나무이다.
가죽나무 또는 개가죽나무는 참죽나무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역한 냄새가 나서 먹지 못한다. 가죽나무의 한자 이름은 가승목(假僧木)이고 반대로 참죽나무는 진승목(眞僧木)이라 고하는데 이 때문에 가중나무 또는 참중나무 라고도 한다.
참죽나무는 중국이 원산지로 고려말 판도판서 겸 대제학을 지낸 정이(鄭怡) 선생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처음 가지고 와 우리 땅에 심었다.
정이 선생은 필자의 22대 방조로 청주 정씨 문헌록에는 이분이 참죽나무를 가지고 와서 지금의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옥수마을에 처음 심고, 인근에는 유상곡수를 만들어 노년을 지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참죽나무가 군락을 이루며 자라고 있다. 처음 이 나무를 들여왔을 때는 나무 이름도 분명하게 지어지지 않은 듯하다.
고려말 익제 이재현 선생이 익제난고 가운데 역옹패설에서는 이 나무를 목죽(木竹)이라고 표현했는데, 나무를 묘사한 내용이 “곧아서 지조가 있고 머리에는 먹을 것을 이고 있으니 더욱 좋지 아니 한가?”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참죽나무를 이른 게 분명해 보인다. 이후 진승목, 중나무, 참죽나무, 가죽나무, 쭉나무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어 오다가 근세 이후부터 참죽나무로 제대로 된 이름 하나를 얻었다.
이 나무는 순을 먹을 수도 있고 속성수로 20m 정도는 쉽게 자라는데다, 재질이 연해 가구용재 등으로 널리 쓰이면서 전국으로 널리 전파된 것이다.
그러나 이 나무는 가구 이외의 목재로는 어딘가 모자라는 점이 많다. 이 나무와 구분이 쉽지 않고 재질이 비슷한 가죽나무를 두고 도종환 시인은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내가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
내 딴에는 곧게 자란다 생각했지만
어떤 가지는 구부러졌고
어떤 줄기는 비비 꼬여 있는 걸 안다
그래서 대들보로 쓰일 수도 없고
좋은 재목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다만 보잘것없는 꽃이 피어도
그 꽃 보며 기뻐하는 사람 있으면 나도 기쁘고
내 그늘에 날개를 쉬러 오는 새 한 마리 있으면 편안한 자리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중략
기대에 못 미치는 나무라고
돌아서서 비웃는 소리 들려도 조용히 웃는다.”
참죽나무는 귀한 듯하나 모자라고 야물고 튼실하지도 못한 나무이기는 하다, 그러나 인가 주변에 자라면서 새로 나오는 순 뚝뚝 꺾여 주고, 내 몸의 가지 하나라도 필요로 하는 이 있으면 선뜻 내어주는 그 모습이 영락없이 우리의 착한 이웃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