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국 <칼럼니스트>
이 나라 젊은이들이 삶의 터전을 찾아 눈에 불을 켜고 동분서주한다는 소식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선 짧은 세상살이에도 벌써 지쳐 버렸는지 새파란 청춘들이 죽을 곳을 찾아 그것도 생판 모르는 사람과 함께 동반자살을 하고 있다는 어이없는 소식이 종종 들리고 있다.
세상을 다 준다 해도 바꾸기 싫은 게 청춘 아닌가.
그런데도 청춘을 헌신짝처럼 버린다면 그 사연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는 데 이들의 눈에는 세상이 개똥만도 못해 보였을까?
아니면 개똥같은 사연이 청춘을 묻어버린 것은 아닐까? 살아있는 순간이 얼마나 기쁜 일인데. 그래, 청춘의 앞길을 막은 것은 분명 그놈의 개똥같은 사연 때문일 게다.
산다는 것은 길을 가는 것이다.
가다 보면 만나고 헤어지면서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겪는 게 바로 인생이다.
그러나 인생의 길은 끝이 없다. 그 길을 가다가 멈출 때까지 가는 것이다.
삶의 행진은 영원한 것이요 삶의 멈춤은 순간이다. 결국 사람은 영원히 살 것처럼 계획하고 순간순간을 넘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생명은 순간에 달려있다는 말이다.
살면서 엮어진 사연들이 슬픈 일이 되기도 하고 기쁜 일도 된다.
태어난 순간부터 울면서 시작한 인생은 가만히 있어도 슬픔이 찾아온다.
가만히 있으면 있을수록 슬픈 순간의 고리는 길게 이어지고 점점 질겨진다.
순간순간에 찾아오는 슬픔을 참는 것은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것과 같다. 그런 슬픔을 간직하고 인내하려는 것은 스스로 생지옥에 머물고자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 어리석음으로 인생이 슬픔으로 가득해지면 삶의 무게를 견디기 힘들어지고 가야할 길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워진다.
슬픔으로 가득한 인생은 하루도 길고 기쁨으로 가득한 인생은 100년이 짧기만 하다.
사람의 마음에는 방이 둘이 있어 기쁨과 슬픔이 따로 들어 산다.
‘만족할 줄 알면 즐거워지고 탐하기를 힘쓰면 걱정이 된다(知足可樂 務貪則憂)’고 했다.
만족할 줄 알아야 기쁨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이다. 만족하려면 자기 수중에 있는 기쁨부터 찾아내고 자기 힘으로 얻지 못할 기쁨은 깨끗이 버려야 한다.
“만약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면 전 세계를 다 준다 하더라도 불만족일 것이다”라는 ‘세네카’의 말처럼 사람의 욕심으로 인한 불만족은 슬픈 만남의 시작인 것이다.
슬픈 마음으로 가득한 육신을 향해 “인간의 생명은 둘도 없는 귀중한 것”이라고 말해봐야 현재 처지가 괴로워 그저 귀찮게만 들릴 뿐이다.
마치 앓는 이빨이 고통스러운 가운데 누가 “이빨은 인간의 오복 중 하나다”라고 해봐야 그 고통은 후회와 더불어 더 심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한때는 자신의 생명을 바칠 만큼 기쁨에 겨웠는데 그 대상으로부터 도리어 슬픔을 받은 자에게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것 중에서 삶보다 더한 것은 없다”고 말해봐야 그의 증오심만 되살리고 그는 고통의 순간을 넘기 위해 자학의 늪에 더욱 빠지고 싶어 할 게다.
그것도 순간이다. 그 순간을 넘으면 새로운 행진을 할 수가 있다.
그 순간을 넘으려면 슬픔에 머물러 뒤적거리지 말고 슬픔을 앓는 이 뽑듯이 빼버려야 한다.
소중했지만 이제 쓸데없는 잡동사니로 변한 것들, 자신의 생활공간만 좁혀오는 것들을 내다버리자.
때로는 슬픔을 잊지 못해 잠 못 이루며 뒤척이는 밤에 들려오는 시계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 기차 지나가는 소리만큼 크게 들려도, ‘째’와 ‘깍’ 사이의 순간에서 창가에 비치는 별빛마저도 눈앞을 하얗게 만들어도, 그 슬픈 사연을 개똥처럼 여기고 언젠가 잊혀 질 그 순간을 기다려보자.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개똥같은 사연을 인생의 약이라 생각하여 나서서 찾으려 한다면 아마 그런 사연을 좀처럼 만나기는 힘들 것이다.
젊은 청춘들이여! 슬픔을 던져버리고 살아있는 순간의 기쁨을 느끼며 거침없이 나아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