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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머꼬

권오신 기자
등록일 2009-05-05 21:14 게재일 2009-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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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신<객원논설위원>


올해 부처님 오신 날 행사 표어는 ‘나누는 기쁨 함께하는 세상’이다.


사찰마다 난치병 어린이를 돕기 위해 3천배를 올리고 희망의 등을 밝혀 석존의 초기 정신처럼 중생의 어려움을 살피기로 했다.


자비가 곧 부처의 생활이다.


조금 덜 가지고서도 나누고 사는 무소유적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지만 한국사회 지도자들은 재(財), 색(色)의 탐욕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육신의 젊음과 아름다운 용모, 사회적 지위, 평생을 긁어모은 재산 등은 언젠가는 사라지는 ‘무상(無常)’이다.


이에 비해 ‘덕’은 결코 늙지 않고 ‘진리’는 썩지 않는다.


‘진리’에 발을 딛는 것을 두고 2553년 전에 태어나신 석가세존은 ‘불사(不死)’라고 표현하셨다.


낮에도 밤에도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명은 늙고 사라지고 더는 돌아오지 않는다.


걷고 있어도 멈춰 있어도 수명(壽命)은 낮에도 밤에도 사라져 갈 뿐 멈추는 일이 없다.


이글거리는 생사(生死)의 고통을 받지만 인간의 수명(壽命)은 개울물이 흐르는 이치와도 같다.


현실세계에서는 과거에 존재했었던 어떠한 사람이었건, 미래에 출현할 어떠한 사람이건 살아 있는 것은 모두가 떠난다.



선(禪)이 갖는 정신세계



석존은 불로불사(不老不死)의 마법 같은 이치를 말한 것이 아니다.


선(善)한 현자의 덕(德)은 늙어 썩는 일이 없으며 선한 사람들 간에는 진리를 서로 설함으로써 무명(無明)의 세계를 밝음으로 이끌어가는 것.


석가모니 부처가 들어 올린 연꽃 한 송이로 시작된 것이 선(禪)이다.


여러 제자들 앞에서 연꽃을 들어 보이자 그 뜻을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짓는 가섭에게 가사를 전했다.


말과 글이 아닌 마음으로 스승과 제자기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선이 커다란 정신세계를 이루기까지는 9년간의 면벽수행과 화두(話頭)를 남긴 달마의 공이 절대적이다.


물론 신라 승 무상이 체계를 세워 중국 한국과 일본불교에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


현실공간을 다녀가신 부처들은 탐욕과 어리석음을 버리는 즉 마음을 닦는 방법으로 화두 선(禪)을 권했다.


선(禪)이란 “나만 잘 살겠다”, 남을 딛고 올라가겠다는 쓰레기 같은 생각을 없애는 길이다.


조금 집중하면 남과 어울려 사는 새로운 생명의 온기가 넘쳐 흐른다.


더러운 물, 맑은 물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여 짠 맛을 내는 바닷물과 같은 이치다.


정신의 공해를 제거하면 정치· 경제의 부정부패도 종교· 학문의 위선도 사라지게 된다.



빈부의 양극



남아프리카 빈민가에 사는 바로통족은 아침기도를 통해 모든 신(神)에게 자신의 처지를 알린다고 한다.


“저는 굶주린 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저는 허기진 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식사를 했습니다.”


그렇다. 세계는 지금 3억 명의 어린이가 매일같이 허기진 배를 안고 잠자리에 들고 있다.


연간 9천 명의 어린이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비극이 아시아·아프리카에서 일상처럼 되풀이 되고 있다.


예방 가능한 질병과 허기진 배를 채우지 못해 세계는 지금 하루 2만5천 명이 숨지고 있다.


이중 맑은 물만 먹을 수 있었다면 숱한 생명이 살아 움직이는 지구촌의 좋은 이웃이 되었을 것이다.


크게 버림으로써 크게 얻는 것이 출가정신이다.


세속인이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살기는 어렵겠지만 먹는 것, 입는 것, 여자(남자)욕, 자식욕에 벗어나 조금만이라도 나눠보자.


석탄일의 정신처럼 “나의 존재는 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어질고 부드럽고 아름답게 살고 나누어야 할 가치관을 찾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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