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억압ㆍ편견으로 희생된 평범한 사람들의 애환
‘칠수와 만수’는 1986년에 문성근, 강신일 주연으로 무대에 올랐던 연극이고, 1988년에는 안성기, 박중훈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작품이다.
‘칠수와 만수’내용은 미군 기지촌 출신의 칠수와 시골 출신의 만수가 서울에서 옥외 광고물 페인트 공으로서 사회의 밑바닥 인생이 겪는 애환과 울분, 그리고 사회의 억압과 편견으로 희생당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연극의 전반부는 칠수와 만수가 어떻게 해서 서울의 밑바닥 인생을 살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후반부는 별다른 생각 없이 건물 옥상에 올라갔다가 사회 불순세력으로 몰려 희생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지배세력과 소통하지 못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연극 ‘칠수와 만수’는 비극적인 결말-죽음-을 맺지만 코미디다. 잘난 척, 똑똑한 척 하는 인간들과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사회의 밑바닥 인생이지만 열심히 사는 칠수와 만수는 어쩌면 사회에 대한 불만, 가난에 대한 불만,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옥상에 올랐는지도 모른다.
단순히 소변을 보기 위해 옥상에 오른 두 주인공을 부조리한 우리 사회의 대표인 기자 1과 2, 그리고 전문가는 엄청난 압력으로 그들을 바닥으로 밀어 버린다.
두 주인공에게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하고 싶은 말을 전해 주겠다던 기자1과 2는 칠수와 만수의 처지에 대한 이해도 없이 그들을 궁지로 몬다.
칠수와 만수를 살려 주겠다던 전문가도 자신의 똑똑함으로 두 주인공을 비정상적인 인물로 만든다.
1986년과 2009년, 23년이면 우리의 현실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지배층은 서민들을 변두리로 몰아내고, 여전히 서민들은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1986년 극 ‘칠수와 만수’가 초연 될 당시, 대한민국 사회는 군부 타도, 민주화 투쟁 바람이 극에 다다를 시점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군부독재가 종결된다고, 지도자 하나 교체로 민간정부로 이양된다고, 한국사회 내부의 고질적인 악순환이 끊어진다는 보장은 없었고, 그것은 지금까지 더욱 악화되어 흘러가고 있다.
정권이 바뀌어도 사회 비정규직자들의 인권과, 사회내의 휴머니즘 그리고 다양성이 바탕 된 질적 향상은 항상 논외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두 페인트공, 다시 말하면 이 사회의 두 비주류 노동자들의 시선으로 본, 거대 자본 세력들이 모든 사회를 지배하는 이 자본주의의 해악은 이미 80년대 사회를 거쳐 지금까지도 유효한 자화상이라 볼 수 있다.
집단이나 조직의 압력에 의해 투신도 할 수 있고 영웅도 될 수 있는 오늘의 모습이 그런대로 처연하게 비쳐진다.
실제와는 아무 관계없는 일들이 실체를 파괴하고 못쓰게 만드는 일들은 많이 있다.
필요 없이 증폭된 목소리, 활성기만 듣는 귀, 진정을 볼 줄 모르는 눈들이 충만해서 이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성에는 안차지만 간접 방법으로 증오를 껌처럼 씹는 사람들과, 간접살인이 벌어져도 죄의식마저도 들 필요없도록 무신경해진 사람들의 면모가 그려지는데도 ‘칠수’의 노는 짓이 재미있어 시종 웃기만 하게 되는 연극이다.
극장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쯤에 이르러서야 스스로 비정한 방관자임을 깨닫고 고소를 머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