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은 우리나라 길의 역사를 다른 어느 지역에 비해서도 온전하게 보존해 온 곳이다. 새재와 계립령 등 오래된 길과 그 문화가 보존돼 온 건 익히 알려진 일이고 새재 초입에서 만나는 조령 원 터와 유곡 역(驛)의 유물·유적 등은 우리나라 길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역(驛)을 알면 조선시대 사회상이 보인다.’는 말이 있다. 이 조선시대의 교통과 유통 중심이었던 역 가운데 세세한 운영기록까지 남아 있는 곳은 유곡역이 유일하다.
몇 년 전, 유곡 역에 관한 사료가 발굴돼 이를 바탕으로 역의 제도사를 집대성한 ‘한국 근세 역제사 연구’가 출간되기도 했다. ‘유곡록’으로 이름 붙여진 이 자료는 18세기 말 유곡(幽谷:지금의 문경시 유곡동)역에 관한 것으로 역의 관리 책임자인 찰방(察訪)이 기록한 3년간의 일지로 역의 운영방식은 물론 사신접대와 말의 관리, 역에서의 일상생활 등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유곡역은 언제부터 설치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문헌상 고려시대에 역원제도가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이때부터 유곡에는 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의 역제는 초기의 6과(科)-147역(驛) 체제에서 성종∼문종 이후 22역도-525속역 체제로 발전되면서 확립되었다. 유곡역은 아마도 성종 14年 이후 문종 21年 사이에 확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22역도(驛道)-525속역(屬驛) 체제의 하나인 상주도(尙州道)에 소속된 역으로 처음 등장한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유곡역도로 승격되면서 주변 의성과 예천 안동 청송·군위 등지의 원을 관리했다.
역은 단순히 교통과 유통의 중심지에 그치지 않고 사신 왕래의 거점 역할을 하고 각종 군사 정보를 전달하는 등 중앙과 지방의 커뮤니케이션 기능까지 담당했던 곳이었다.
조선시대에는 50리를 기준으로 역(驛)을 두고 30리를 기준으로 원(院)을, 10리를 기준으로 하여 참(站)을 설치하였다. 이 길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이용자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표시하기 위해 30리마다 큰 장승을, 10리마다 작은 장승을 세우고 5리에는 크게 자라는 나무를 심어 쉼터를 만들고 방위와 거리를 표시하여 이정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거리는 요즘의 택시 미터기와 흡사한 거리측정 수레인 기리고차(記里鼓車)를 이용해 정확하게 산출한 것이었다. 역(驛)은 마을이 있는 곳에 설치하였고 원(院)은 마을이 없는 곳에 30리를 기준으로 설치해서 원주(院主)를 두어 관리하며 숙박을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
역(驛)과 원(院)은 오늘날의 숙박업소와 같은 시설이다. 예전에는 식당과 숙소를 별도로 하지 않고 숙식(宿食)을 함께 제공했다. 요즘 호텔에서 먹을 것과 잠자리를 함께 제공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역과 원은 주로 공무(公務)중인 관리들이 주로 이용했으나 민간인들도 일정한 사용료를 받고 숙식을 제공했다. 조선후기에는 일반 상업목적의 보부상과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물류 이동이 많은 장시(場市)지역과 포구(浦口) 등지에 숙식을 제공하는 주막들이 성업을 이루면서 역관(驛館)의 기능을 분담하게 된다.
원은 큰길(大路)에는 다섯 가구 이상이 모여 살며 관리하게 했고 중간길(中路)에는 3가구, 작은길(小路)에는 2가구의 원주들이 관리토록 했다.
영남대로가 시작되는 관문인 유곡 역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아무리 그 중요성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문경시에서도 이점은 충분히 인식해 지표조사와 함께 연구결과물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유곡 역 복원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은 없는 것 같다. 유곡 역을 복원해서 우리 옛길에 대한 현대인들의 교육장소로 활용하고 요즘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마필산업육성 분위기에 맞춰, 이곳에 가면 말을 타고 옛길을 달릴 수 있다는 입소문이 나면 새로운 관광 상품으로도 충분할 듯하다.
예천 삼강 마을의 조그마한 옛 주막집이 복원된 이후 관광객이 줄을 잇고 있는 것은 이를 충분히 뒷받침한다. 유곡 역은 낙동강을 오가던 옛 뱃사공들의 쉼터보다 관광객을 더 많이 유인할 수 있을 건 분명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