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르다를 서투르다로 잘못 읽었다 잘못 읽는 글자들이 점점 많아진다 화두를 화투로, 가늠을 가름으로, 돌입을 몰입으로, 비박을 피박으로 잘못 읽어도 문맥이 통했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네 살배기 딸도 그랬다 번번이 두부와 부두의 사이에서, 시치미와 시금치 사이에서 망설이다 엄마 부두 부쳐준다면서 왜 시금치를 떼는 거야 그래도 통했다
중심이 없는 나는 마흔이 넘어서도 좌회전과 우회전을, 가로와 세로를, 종대와 횡대를, 콩쥐와 팥쥐를, 덤과 더머를, 델마와 루이스를 헷갈려 한다 짝패들은 죄다 한통속이다
칠순을 넘기신 엄마는 디지털을 돼지털이라 하고 코스닥이 뭐냐고 하면 왜 웃는지 모르신다 웃는 육남매를 향해 그래봐야 니들이 이 통속에서 나왔다 어쩔래 하시며 늘어진 배를 두드리곤 하신다
칠순에 돌아가셨던 외할머니는 이모를 엄니라 부르고 밥상을 물리자마자 밥을 안 준다고 서럽게 우셨다 한밤중에 밭을 매러 가시고 몸통에서 나온 똥을 이 통 저 통에 숨기시곤 하셨다
오독이 문맥에 이르는 정독과 통한다 통독이 이러하리라
-‘와락’(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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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독특한 정끝별 시인의 시‘통속’이라는 시가 참 재미있다. 통쾌하다. 줄글로 되어 있는 그리 짧지 않는 시가 읽기에 조금도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흥이 난다. 나는 제목부터 잘못 읽는다. ‘통속적이다’의 통속으로 읽고, ‘통 속(안)’의 통속으로도 읽는다. 아무려면 어떤가. “서두르다를 서투르다로” 읽고 또 “화두를 화투로” 읽어도 통하는 게 우리의 삶 아닌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네 살배기 딸”의 “엄마 부두 부쳐준다면서 왜 시금치를 떼는 거야”라는 말이 시 읽기의 재미와 의미를 통쾌하게 끌어올리고 있다. “디지털을! 돼지털이라 하고” “그래봐야 니들이 이 통속에서 나왔다 어쩔래” 하시는 엄마의 말씀도 마찬가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너무 따지고 구분 지을 필요는 없다. 분별심이 마음의 고통을 낳는다. 굳이 자유로운 마음의 밭에 철책 울타리를 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오독과 정독을 같이 끌어안는 통속의 삶도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해설-이종암(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