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옥산서원·독락당

이용선기자
등록일 2008-06-06 16:19 게재일 2008-06-06
스크랩버튼

조선 성리학의 巨人과 만나는 시간여행

천년 왕국 신라의 중심 경주.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도시 전체가 신라의 유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경주는 신라의 중심에서 수많은 유산을 남겼지만,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변방의 도시로 밀려나 신라 이후의 유적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한 경주에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상인 성리학의 중심에 있었던 회재 이언적과 관련된 유적이 있다. 바로 이언적이 살았던 독락당과 그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된 옥산서원이 그것이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년∼1553년)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성종 22년에 경주부 양좌 촌에서 아버지 이번(李蕃)과 어머니 손씨 부인 사이의 2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복고(復古)이고 호는 ‘회재’이다. 이름을 ‘적’이라 했으나 31세 때인 중종 16년에 임금이 ‘언’자를 내려 더 붙이게 했다.


이언적은 성리학을 정립한 선구적인 인물로서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확립한 학자이다. 그는 27세 때 당시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과 조한보 사이에 토론되었던 성리학의 기본쟁점인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에 뛰어들어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에서 손숙돈과 조한보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면서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퇴계 이황에게로 계승되는 영남학파 성리설의 선구가 된다.


그가 여기에서 벌인 태극의 개념에 관한 논쟁은 조선조 성리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개념논쟁이라 할 수 있고, 만년에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구인록’, ‘대학장구보유’, ‘중용구경연의’, ‘봉선잡의’ 등 큰 업적이 되는 중요한 저술을 많이 남겼다.


회재는 하늘(天心)과 백성(人心)에 순응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에 힘쓸 것을 중요시하는 도학적 수양록을 경세의 근본으로 삼고 있으며, 조선조 도학의 학문과 실천에 모범을 보인 선구자였다. 후대에 이황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와 함께 그를 동방사현(東方四賢)으로 추모하였다.



독락당은 옥산서원에서 약 700m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회재선생이 중종 27년(1532년)에 김안로의 횡포를 막고자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면서 그의 고향인 양동마을 인근의 자옥산 기슭에 지은 집이다. 집은 ㅁ자형을 하고 있는 살림집 공간인 안채와 사랑채 공간인 독락당과 계정, 사당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2007년에 회재선생의 유물전시관이 준공되었다.


독락당은 집은 낮고 담은 높은 느낌을 주는데, 이는 세상사와 담을 쌓고 살고 싶었을 회재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할 수 있다. 담장과 함께 집 전체를 막아버리는 역할을 하는 큰 대문을 들어서면 하인들이 지내던 공수간(供需間)이 있고, 몇 겹의 담으로 둘러져 있는 안채는 은밀히 숨어 있다. 그리고 독락당은 안채에서 쪽문으로 통하는 사랑채이고, 그 뒤로 계정이 있다. 회재는 그가 머물던 골짜기의 북쪽 봉우리를 도덕산, 남쪽 산을 무학산, 동쪽 산을 화개산, 서쪽 산을 자옥산이라 이름 짓고 계정 앞에 펼쳐진 계곡의 바위들 가운데 다섯 곳을 골라 관어대, 영귀대, 탁영대, 징심대, 세심대라 이름 붙여 4산 5대라 부르며 자연에 의미와 질서를 부여하면서 자신의 심리적 주거공간을 자연으로 확장하였다.



옥산서원은 회재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20년 후인 1572년(선조 5년)에 경주부윤 이제민과 권덕린 등 도내 유림들이 뜻을 모아 그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가 거처하였던 독락당 부근의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에 서원 자리를 정하고 묘우(廟宇)를 건립하였고, 다음해에 서악의 향현사에 있던 위패를 모셔왔으며, 같은 해에 관찰사 김계휘가 청하여 1574년에 ‘옥산’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시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중의 하나로 하인들이 200여명에 이르렀을 정도의 큰 서원이었다. 서원의 건물 배치는 전면에 강학처소를 두고 후면에 사당을 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취하고 있다.


서원의 주요공간인 강학공간과 진입공간만을 놓고 본다면 하나의 중심축으로 연결되어 있고, 좌우가 대칭을 이루는 정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서원의 강학공간은 무변루.구인당.민구재.암수재 등 4개의 건물이 마당을 가운데 두고 ㅁ자형을 이루면서 구성되어 있다. 제향공간인 체인묘는 역락문에서 이어지는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가장 높은 위치에 배치되어 유교적인 위계와 엄격한 질서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옥산서원의 구성은 철저한 위계적 개념 하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서원의 정문인 역락문 우측에서 바라 본 무변루(사진 상)와 구인당에서 바라 본 전경. 정면에 보인는 건물이 무변루이다(사진 하). 무변루(無邊樓)는 강당인 구인당과 함께 옥산서원의 가장 독특한 구성을 보여준다. 전면 7칸으로 되어 있는 무변루는 구인당에서 보면, 양 단부의 기둥이 동재와 서재에 의해 가려져서 건물 양측에 툇마루가 있는 5칸 건물로 보이고, 양측면의 마루를 제외하면 축소된 구인당의 평면 형태가 된다. 무변루는 구인당과 함께 강당의 기능까지도 겸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보이며, 외부에서 뿐만 아니라 서원내부에서 외부로의 시선 또한 강하게 차단하면서도 양 단부를 개방된 누마루로 처리함으로써 내부의 폐쇄성을 완화하고 있어 내·외부의 폐쇄성이 달라지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종합 기사리스트

더보기 이미지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