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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 소리패권 장악한 판소리계의 전설 - 여류명창 이화중선

관리자 기자
등록일 2008-02-19 16:14 게재일 2008-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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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요절해서 더욱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다.

그렇게 보내버린 그네들의 예술혼들 앞에 죄송스럽고 못 다 이룬 이승의 회한에 삼가 명복을 빈다. 대학시절 명창 안행련의 짧은 생애를 듣고 직접 나의 귀를 통해 천부적인 소리임을 체험하면서 이럴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아쉬워한 적이 있다.

흉내 낼 수 없는 소리. 맑고 청아하면서 울림이 있고 여운이 아스라한….

슬픈 대목은 슬프게 기쁜 대목은 기쁘게 들려왔다. 오늘의 우리는 좋은 선생들을 잃고 힘들어하는지도 모르겠다. 국악계는 할일이 너무 많다.

이화중선. 판소리계의 전설이다. 최초의 여류명창 진채선 이후 여류명창 시대를 여신 분이다. 이화중선 선생께서 미색이 아니셨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경주에서 국악원을 다니던 시절 문정 이말양 선생님께서 ‘이화중선’을 떠올리시며 인물이 없는데 목이 좋아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고 하셨다.

이화중선 선생의 생애에 대한 재조명의 움직임이 있는데 반가운 일이다. 생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돈다. 1898년 부산에서 출생하시어 1943년 재일교포 위문공연 중 연락선에서 스스로 짧은 생을 마감하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부친이 갓을 만드는 분이셨다고 한다.

17세에 전라북도 남원군 수지면 호곡리 홈실 박씨 집에 시집을 가셨다가 이 마을에 협률사가 들어와 3일간 공연하는 것을 보고 소리에 뜻을 두고 밤에 집을 나와 남원으로 가서 그길로 소리 선생을 찾았다고 한다. 수소문 끝에 무당집에서 소리를 배우시다가 원하는 소리공부를 할 수 없으므로 당시 남원의 소리꾼이었던 장득주 선생을 찾아갔고 수업료가 없던 터에 그 선생의 동생에게 시집을 가 제수씨가 되어 소리를 배웠다고 하니 집념이 강하셨던 면모를 보여준다. 그 후 서울로 가서 조선권번에 적을 두고 당대 최고의 명창이었던 송만갑 선생과 이동백선생에게 사사하면서 일취월장했다고 한다.

1923년 조선물산장려회가 주최한 전국판소리경연대회에서 심청가중 ‘추월만정’을 불러 장내를 박수의 도가니로 만들면서 일등을 하였다고한다. 당시 심사위원이던 가왕 박기홍 선생은 감탄하여 그 자리에서 화중선이란 예명을 주셨다고 한다.(꽃 중의 선녀라는 의미다.

남보다 늦게 소리를 시작하였으나 1920년 후반부터 조선 최고의 명창이 되셨고 음반도 가장 많이 내신분이다. 장안의 소리패권을 장악하신 선생은 서울 장안의 풍류객들 사이에 가장 사랑받는 소리꾼이 되셨고 라디오 방송이나 레코드 녹음에도 단연 압도적이셨다. 그 소리가 쇄옥성으로 성량이 크고 음역이 넓고 맑은 음색을 구사하여 춘향가 중 ‘사랑가’를 부를 때면 모두 감탄하였다. 조선성악연구회에서 활동하셨고 1943년 대동가극단 활동을 하시며 일본 규슈지방으로 위문공연을 갔다가 유명을 달리 하셨는데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분분하다. 연락선에서 투신하였다는 설과 밤중에 다른 공연장소로 이동하시던 중 풍랑에 유명을 달리 하셨다는 설이 있는데 그즈음 선생께서는 몸이 쇠약하고 신병이 있으셔서 괴로워 하셨다고 한다. 만정 김소희 선생께서도 이화중선 선생의 소리를 듣고 감동하시어 판소리를 시작하셨다고 하고 만정이라는 호도 그분의 장기였던 ‘추월만정’에서 온 것이라니 그분의 영향이 얼마나 치명적(?)인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선생의 회고에도 통영에 이화중선 명창이 와서 공연을 하셨는데 ‘흰 치마저고리를 입고 사뿐히 무대 위를 움직이시면 동작자체가 하나의 예술이요 그 소리는 계곡의 청수가 바위 둑을 넘쳐서 흘러내리는 것 같았고 만들어내지 않고 저절로 나오는 소리였다’고 구술하셨다.

서울음반에서 이화중선 전집이 나와 있고 동생 이중선과 함께 녹음한 남도잡가 등이 음반으로 나와 있는데 생생히 그분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매 이것이 우리의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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