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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도산면 출생 이육사

윤희정기자
등록일 2008-02-15 16:25 게재일 2008-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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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초월한 저항정신 '민족혼'을 지켜내다

이육사(1904∼1944)는 한마디로 일제에 저항한 민족시인이다. 안동시 도산면 원천동 출신인 그는 당당한 민족혼과 의로운 기세를 고스란히 시작(詩作)과 독립운동으로 승화시킨 몇 안 되는 민족시인이다.


이육사는 1943년 일본 형사대에 붙잡혀 해방을 일 년 남짓 앞둔 1944년 1월 북경의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무려 열일곱 번이나 옥살이를 했다.


이육사가 문학에 투신해 시쓰기를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30에 이르고 난 부터다. 초기에서 중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는 반제투쟁(反帝鬪爭)과 다소간의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어느 시기까지 그는 역사, 현실의식에 얽매이지 않는 시를 썼다. 그 대부분은 사적인 세계를 그린 것이었고 개인적 심경을 노래한 것들이었다. 이런 그의 작품세계에 한 전기가 온 것은 일제 식민지시대의 막바지에서였다. 구체적으로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육사는 우리 사회나 민족의 명맥이 단절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힌 듯 하다. 그 나머지는 순수, 또는 보편적 차원의 세계를 포기했다. 이때에 제작된 몇 편의 시에서 그는 그 뿌리가 민족적 현실과 역사, 상황에 닿은 목소리를 담았다. 이것으로 그는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민족을 위한 투쟁과 시를 병행시키고 그것을 일체화해낸 희귀한 시인이 된 것이다.


이육사의 이같은 작가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안동시는 지난 2004년 육사 탄신 100년이 되는 해, 생가터가 있었던 도산면 원촌리에 이육사 문학관을 지어 그의 올곧은 삶의 자취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문학관은 민족정신 교육과 문학사상 연구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주변의 도산서원과 한국국학진흥원, 왕모산성과 연계해 관광명소로 활용되고 있다.



▲이육사의 생애


이육사는 1904년 음력 4월4일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에서 6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이육사의 처음 이름은 원록(源祿), 두 번째 이름은 원삼(源三)이고 스스로 활(活)이란 이름을 지어 불렀다. 그는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할아버지 이중직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엄한 유교적인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라며, 형제가 모두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 소학을 배웠다. 12세부터는 보문 의숙, 백학 서원을 거쳐 일본 유학길에 올라 새로운 학문을 익혔다.


1910년 육사의 나이가 일곱 살에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고, 1919년 그의 나이 열여섯 살에 3·1운동이 일어났다.


이육사는 1923년 봄, 일본으로 건너가 약 1년을 있다가 왔다. 귀국해 1925년 독립 운동 항일 독립 운동 단체에 가입했다. 1926년에 북경에 갔다가 귀국한 이육사는,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용의자로 검거돼 2년 7개월 형을 선고받는다. 이 때 그의 형 원기, 동생 원일, 원조 등 4형제가 투옥하게 됐다.


이육사의 사형제가 함께 피검돼 1주일 만에 나왔다가 3일 후 다시 위로 삼형제가 재검돼 사건의 주모자로 투옥됐다. 그 뒤 육사 형제는 의거의 주인공인 장진홍 의사가 검거되기까지, 미결수 상태로 감옥에서 2년 가까운 세월을 보낸다. 1929년, 진짜 폭탄 투여자였던 장진홍 의사가 체포돼 육사 형제의 투옥이 일본의 조작임이 드러났다.


이 일 이후, 그는 40년 생애 동안 17차례나 감옥을 드나들게 되고, 당시 그의 죄수 번호 264로부터 ‘이육사(李陸史)’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육사는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청년 지도와 지하 활동을 했고, 조선 교육 제도 개정에 힘썼다. 1932년에는 북경 조선군관학교 국민 정부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 반에 입교해 6개월의 교육 과정을 수료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정리된 육사의 문학작품은 시 35편, 소설 3편, 평문 17편, 수필 14편, 방문기 2편, 기타 서간문 5편 등 총 76편에 이른다.


육사는 문단의 어느 유파나 동인에 가담해 작품 활동을 한 자취는 찾아볼 수 없다. 육사의 문학 활동은 중국에서 귀국하기 전부터 시작된다. 처음에는 주로 중국의 정치 동향과 농촌 문제를 다룬 시사평론을 활발하게 발표했다.


1935년, 위당 정인보가 주도한 신조선(新朝鮮)에 ‘황혼(黃昏)’을 비롯한 시 7편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일본의 감시로 인한 고초와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하면서도 시와 수필을 발표했고, 그의 작품에서는 독립 운동에 대한 열망과 외로움, 의지가 드러난다.


1943년, 국내 무기 반입 계획을 세우고 북경에 갔다가, 모친과 형의 제사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했다. 그 때 육사는 헌병대에 체포돼 북경으로 압송됐고, 그 다음해 조국 광복을 1년 앞두고 감옥에서 숨을 거뒀다.


▲이육사의 시세계


시의 순수성이 민족의 현실과 결합해 예술로서 승화되는 것이 육사 시의 두드러진 장점이다. 그러기에 이육사의 시는 향토색 짙은 순수성과 함께 민족의 수난을 채색해 끈질긴 민족의 염원을 시화한 양면성을 지닌다. 부단한 옥고와 고난으로 이어진 삶 가운데에서 오직 조국의 독립과 광복만을 염원한 육사는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내 곬방’에서 항시 쫓기고 있는 불안한 마음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빼앗긴 조국에 대한 망국민의 비애와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을 그의 시에 새겨놓았다.


이육사의 시작(詩作)은 ‘조선일보’ 1930년 1월 3일자에 ‘말’이 발표되면서 시작됐다. ‘말’을 발표할 당시, 이육사는 사회활동을 주로 했으나 일제의 탄압과 감시에 그 한계를 느끼고 문필활동으로의 전환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의 행적을 보면, 이육사가 당시의 시대상황을 누구보다 민감하게 감지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시 속에는 당시의 시대상황이 잘 나타나 있으며, 그 시대 상황의 인식에 따라 자아인식과 저항의식도 잘 나타나 있다.


이육사는 시 표현에 있어서 상징적인 표현을 중시했다. 시형식에서는 짧은 시형태를 취했다. 이육사의 특질을 몇가지로 추출해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실향의식과 더불어 향토의 서정이 나타난다. 이러한 경향을 뒷받침한 시로는 ‘청포도’, ‘자야곡’,‘년보’, ‘초가’, ‘소공원’, ‘강 건너간 노래’ 등이다.


둘째로 민족의식과 저항의 특질을 들 수 있다. 그의 대표작 ‘광야’를 비롯해 ‘절정’, ‘꽃’, ‘교목’ 등이 있다.


셋째로 초인의식과 미래의 소망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좋은 예가 ‘광야’와 ‘청포도’이다.


‘광야’에서 나오는 ‘초인’과 ‘청포도’에서 ‘내가 기다리는 사람’은 그가 소망하는 삶이라 할 수 있다. 곧 그가 평생을 바쳐 염원했던 조국의 광복이다.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소망을 굳건히 믿고 그 의지를 끝까지 지켰다는 점에서 그의 초인 의식은 빛을 발하며, 후세의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이육사의 시가 갖는 현대시사적 의미는 몇 가지로 지적할 수 있다. 첫째로 1930년대 전반을 풍미하던 모더니즘의 비인간화에 대한 반동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점, 둘째로 고전적인 선비 의식과 한시의 영향으로 전통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점, 셋째로 한국 시에 남성적이고 대륙적인 입김을 불어넣었다는 점, 넷째로 죽음을 초월한 저항 정신과 시를 통한 진정한 참여를 보여 주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작가 이육사 연보


▲1904년 경북 안동 출생


▲본명은 원삼(源三)


▲1922년 영천 화북면 백학학교(원)에서 수학.


▲1923년 백학학원에서 교편 잡음(9개월 동안).


▲1924년 일본 유학, 도쿄 쇼오소쿠 예비학교, 니혼대학 전문부, 킨죠우 고등예비학교 1년간 재학.


▲1925년 1월 귀국, 대구 조양회관을 중심으로 활동, 이정기·조재만 등과 어울리며 베이징 나들이.


▲1926년 베이징에서 수학, 광뚱성 광저우 쭝산대학에서 후학기 수학(이활 이름 사용).


▲1927년 쭝산대학에서 전학기 다니다 여름에 귀국, 장진홍의거(10월18일)에 연루되어 구속됨.


▲1929년 5월에 석방(12월에 무혐의로 종결). 조선일보 대구지사 경영. 중외일보 기자.


▲1930년 첫 시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1월). ‘별건곤’에 이활·대구이육사 이름으로 ‘대구사회단체개관’ 발표(10월).


▲1931년 ‘대구격문사건’으로 구속(1월). 조선일보사로 전근. 대구지국 근무(8월).


▲1932년 베이징, 텐진에 머뭄. 베이징에서 난징으로 이동. 난징 근교 탕산에서 문을 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 학원으로 입교(10월).


▲1933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졸업(4월)하고 상해, 신의주를 거쳐 귀국(10월). ‘신조선’지에 시 ‘황혼’ 발표함으로써 시작 활동 본격화.


▲1934년 ‘대중’ 창간호에 평문 ‘자연과학과 유물변증법’ 게재(4월). 군사간부학교 출신 드러나 구속됨(3월). 기소유예 의견으로 석방(6월).


▲1935년 정인보 선생의 지도를 받다 신석초를 만나 친교, 다산 정약용 서세 99주기 기념 ‘여유당전서’ 간행에 참여, 신조선사의 ‘신조선’ 편집에 참여, 본격적으로 시 발표.


▲1936년 만주 목단강 쪽에 있다가 귀국하자 곧 피검되어 서울형무소에 구류. 포항 소재 동해송도원에서 휴양(7월).


▲1937년 ‘해조사’(‘풍림’ 3월호) ‘노정기’(‘자오선’ 제1집) 등의 시와 ‘질투의 반군성’, ‘무희의 봄을 찾아서’ 등의 산문 발표. 서울 명륜동에서 거주.


▲1939년 서울 종암동 이사. ‘절정’ ‘남한산성’ ‘청포도’ 등의 시와 ‘영화에 대한 문화적 촉망’ ‘시나리오 문학의 특징’ 등의 영화 예술 관계의 평론 발표.


▲1940년 ‘반묘’ ‘일식’ ‘교목’ 등의 시와 ‘청란몽’ ‘현주·냉광’ 등의 수필 발표.


▲1941년 부친 이가호옹 별세. 딸 옥비 출생. 성모병원에 입원(9월). ‘인문평론’ ‘문장’ 등의 잡지에 ‘파초’ ‘독백’ ‘아미’ ‘자야곡’ ‘서울’ 등의 시작품 발표. 수필 ‘연인기’ ‘산사기’와 ‘중국현대시의 일단면’ 및 중국 호적의 ‘중국 문학 50년사’를 초역해 소개.


▲1942년 퇴원(2월)해 요양차 경주 안강 기계리의 해산 이영우씨 댁에서 요양. ‘조광’지 1월호에 수필 ‘계절의 표정’, ‘매일신보’에 게재된 ‘고란초’를 끝으로 문필활동 종식.


▲1943년 한글 사용 규제 받자 한시만 발표. 베이징으로 감.(4월) 충칭과 예안행 및 국내 무기 반입 계획 세움. 모친과 맏형 소상에 참여하러 귀국(7월), 늦가을에 피검, 베이징으로 압송됨.


▲1944년 1월16일 새벽 5시 베이징 감옥에서 사망.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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