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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과의 거리

none 기자
등록일 2007-08-22 22:43 게재일 2007-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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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희 포항여성회장

오랜만에 후배와 저녁식사 약속을 했다. 그는 금방 다시 전화하겠다고 전화를 끊었는데 1시간 반이나 지나서 집 앞이라며 전화를 했다. 그를 만나 설명을 들어보니, 접촉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신호대기 중 차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줍다 밟고 있던 브레이크 페달이 풀려 정지했던 앞차를 박고 말았단다. 앞차 운전자는 흔히 접촉사고 때 일단 취해보는 액션으로 차에서 내렸다 한다. 즉 뒷목 덜미에 손을 받치고 목을 뒤로 한껏 제친 채 말이다. 정지상태의 두 차였고, 그 간격이야 1m도 되지 않았을 것인데 그는 접촉사고 때 빨리 취해야할 행동지침(?)을 잘 숙지하고 있었나보다. 범퍼의 작은 흠집과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하며 30만 원을 요구했다고 한다. 후배가 겪은 접촉사고 이야기가 낯선 이야기인가? 아마 누군가는 한번 씩 경험하기도 듣기도 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집집마다 차를 소유하고 나의 어린 시절 적잖이 의심을 품었던 마이카(My car)시대는 도래했다. 그러나 그 꿈같은 이야기는 현실로 다가왔지만 그 꿈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카오스에 빠진 듯하다. 자동차에 압도당하고 그 차로 인해 타인과 나를 철저히 구분할 뿐이다.

자동차는 말 그대로 인간의 삶을 보다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도구이다. 예전 음식을 차가운 우물에 보관했던 것을 냉장고가 대신해주고, 빨래판을 열심히 문질러야했던 여성들은 세탁기로 인해 삶이 편해졌다. 자동차는 두 다리와 자전거가 감당하지 못하는 신속한 이동을 보장한다. 그런데 인간이 만든 자동차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유린하며 비이성적인 이상행동을 유발하고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자동차가 대중화가 되지 않던 시절, “마누라는 빌려줘도 자동차는 빌려주지 않는다”란 말이 있었다. 그 말의 야만성을 다시금 언급할 생각도 필요도 없지만, 도대체 자동차가 뭐기에 얼마나 엄청난 것이기에 저런 소릴 다 하나 의아해 했다.

이젠 그런 소릴 하는 사람들을 만나보진 않았지만, 그런 자동차에 대한 숭배는 여러 다른 형태로 남아있다. 주류세계의 남성들 사이에서 자동차는 또 다른 자신의 신분이다. 검은색의 대형 자동차는 웬만한 자리에 있는 분(?)들의 아이콘이 되고 있다. 광고에서나 볼 수 있었던 외제차도 길거리에서 만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자동차만을 보면 우리의 생활수준은 높아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우리의 자동차 문화는 저급하기 짝이 없다. 10여 년 전 신혼여행을 다녀온 부부가 자동차에서 살해당했는데, 범인을 잡고 보니 신혼부부가 탄 자동차가 자신의 자동차를 앞질러 끼어들었기 때문이라고 밝혀져 듣는 이들을 경악게 했다. 스피드로 쓸데없는 경쟁을 하기도 하며 초보운전자들의 서행운전을 그냥 봐주기가 힘들다. 신호 바뀜과 함께 동시에 출발하지 않으면 지체 없이 클랙슨이 울려 댄다. “이 멍청아, 뭐하느냐”라고.

자동차를 타기만 하면 자동차 안의 사람들과 밖의 사람들은 철저히 분리되어, 운전대를 쥐면 다른 모든 운전자는 경쟁자이고 배타적 타인이다. 무리하게 앞지르기도 하고 염치없이 끼어들기도 한다. 그 순간 운전대를 잡은 나의 욕구만 채우는 데만 몰두할 뿐 그 외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 타인이 나의 소유물에 조그만 흠집을 냈을 때는, 철저히 그것을 응징한다. 가끔 억대의 외제차와 접촉사고 냈다가 기천만 원을 물어줘야 하는 사연이 인터넷에서 주목을 받기도 한다. 범퍼에 흠집이 났다고? 당연히 범퍼를 교환해야 한다. (사실 교환을 빌미로 돈을 받아낼 뿐이다) 작은 충격에도 목덜미를 잡고 허리를 잡고 병원에 입원한다. (부끄러움도 없이 환자복을 입은 채 술집을 들락거린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너무 뻔한 명제다. 사회는 나 혼자가 아니라 타인과 함께 만들어 가는 세상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은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나는 항상 타인의 ‘타인’이 될 수 있기에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고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다. 제발 타인과의 그 거리를 좁혀가자. 나의 배려가 또 다른 큰 배려를 만들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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