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6시에 일어나 몸의 균형을 가늠해보니 훨씬 좋아졌다.
하얀 새벽에 창을 열고 에베레스트를 맞았다. 정상 부위에 엷은 띠모양의 구름이 맴도는 것을 실컷 보고도 싫지가 않았다.
7시 아침식사를 하고 일행 모두‘곰파(사원)’에 가서 참배를 했다. 무사산행과 행운을 기원하며 기도를 올렸다. 사원 앞 한 켠 천막 속에서 수십 명 승려들이 불경을 외우며 기도하고 있어 강석호 회장이 대표로 큰스님을 친견하고 절도 하고 나왔다.
곧바로 임자체등반팀 환송식이 있었다. 이용숙 부회장이 대표로 무사히 갔다오겠다며 다짐의 인사를 하고 강석호 회장도 다시 한번 안전을 당부했다. 9명 등반팀 중 홍일점인 ‘우리들의 한비야’원혜주씨가 남은 여성회원들과 뜨거운 포옹으로 마무리했다.
원혜주씨는 트레킹 도중 마음을 고쳐먹고 등반팀에 합류한 당찬 여자다. 꼭 성공하길 바라며 등반팀을 보내고 9시에‘텡보체’를 출발했다.
내리막이라 마음이 가벼웠다. ‘풍키텡가’까지 다운(Down)하며 2시간 남짓 내려왔다. ‘풍키텡가’에 도착할 즈음 3천400m지점에서 사고가 생겼다.
큰 산길을 내려오다 오른쪽 소로가 지름길 같아 그 길로 빠졌는데 뒤따라 오던 집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놀라 뛰어 올라가니 주저앉아 꼼짝을 못하는 것이었다. 왼발이 돌부리에 걸리면서 큰바위에 앞 정강이를 심하게 부딪힌 것이다.
직감적으로 골절사고라 판단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스틱 두 개로 다리밑을 고정시키고 사람들을 부르러 뛰어 내려갔다. 후미 일행을 만나 사고소식을 알리고 다시 뛰어 올라왔다.
3천400m 고산에서 뛰어 오르내리는게 힘든 일이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이인 이사, 김대우 국장, ‘파상’이 올라오고 티엔씨 박대리와 이재백원장도 올라왔다. 응급조치로 스틱 세개로 부목을 대신하고 스카프와 스포츠타월 등으로 환부를 감싸고 업었다. ‘파상’이 내려가 말을 몰고 왔으나 길이 험해 ‘풍키텡카’까지는 업고 내려왔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할까 지금까지 순조롭던 이번 트레킹이었다. 강석호 회장을 비롯한 일행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풍키텡가’에서 응급조치를 보완했다. 붕대로 환부를 감싸고 널빤지로 부목도 대었다.
일행들은 일정대로 ‘사나사’에서 점심을 먹고 ‘쿰중’으로 이동해 숙박키로 하고 나는 집사람과 함께 ‘쿰중’ 옆 ‘쿤데’에 있는 산간병원으로 이동키로 했다.
‘파상’과 함께 부상자 수송을 위한 수송팀으로 포터 3명을 구했다.
판자로 앉을자리를 만들어 한사람이 업고 한사람은 다친 다리를 꺾이지 않게 들어주며 교대로 수송한다는 계획이다. ‘파상’이 진두지휘해 ‘사나사’까지 오르막길을 비호같이 올랐다.
나와 김대우 국장이 숨이 차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고산 포터들의 위력은 대단했다.‘사나사’에서 만난 일행들보다 먼저‘쿰중’으로 향했다. 1시간 정도 걸려 ‘쿰중’에 도착해 산간병원이 있는‘쿤데’로 이동했다.
‘까미 템바 세르파’(Dr.Kami Temba Sherpa)라는 자그마하고 다부진 체격의 네팔인 의사가 포터벌 X-레이 촬영기로 환부를 찍었는데 정갱이 큰뼈와 작은뼈가 골절된 것으로 판명났다.
요즈음은 사용하지 않는 석고 기브스를 하고 진통제 주사도 놨다. 하루 입원하고 내일 떠나라는 의사의 말에 따라 집사람을 입원실에 두고 ‘쿰중’의 롯지로 가는 도중 걱정을 하며 올라 오는 이경수 원장을 만났다.
롯지에 도착해 강회장과 일행들에게 현재 상태를 전하고 짐을 챙겨 다시 병원으로 왔다. 내일 목적지인 생보체까지 병원에서 30∼40분이면 충분하고 ‘쿰중’에서 1시간정도 걸린다고 해 안심이 됐다.
당초 일정이 ‘쿰중’에서 자고 ‘생보체’에 도착해 헬기로 카트만두에 귀환토록 돼 있어 일정에 큰 차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쿰중’은 3천800m 넓은 분지의 ‘세르파의 본향’으로 쿰부히말라야 일대 마을 중에는 가장 부유한 마을이고 꽤 큰 곳이다. 영국의 에드먼드 힐라리경(卿)이 이곳에 힐라리학교를 세워 운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셀파대장‘파상’의 고향집이 있으며 그의 아버지가 이곳에 살고 있어 오랜만에 부자(父子)상봉을 하리라 예상했는데 사고로‘파상’은 기꺼이 그 감격을 포기했다. 얼마전 KBS방송에 세르파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파상’ 부자간을 대상으로 방영돼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세르파 가족이다. 미안하기 그지 없었다.
산간병원이 있는 ‘쿤데’ 롯지에서 자고 내일새벽 바로 생보체로 이동해야 한다며 부자상봉을 포기하고‘파상’은 저녁으로 삼계탕까지 끓여왔다.
이국인들에게 정말 가슴 뭉클한 정(情)이 느껴졌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트레킹단원들과 스태프들에게 큰 죄를 지은 것 같아 그 송구한 마음을 이 글로나마 인사하며 많은 위로와 안부에 감사할 뿐이다.
3천830m ‘쿤데’산간병원 입원실에서 밤을 꼬박 새웠다.
새벽 6시‘파상’이 병원으로 왔다.
병원 들것에 집사람을 눕히고 네명의 포터들이 들었다. ‘까미’의사의 고마운 마음을 기념하며 사진도 함께 찍었다.
출발한 지 40분 만에 ‘생보체’에 도착하니 다른 일행들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한참후 ‘쿰중’에서 출발한 일행이 도착, 집사람 상태를 묻느라 정신이 없다.
1시간여를 기다려 24인승 헬기를 타니 러시아 조종사에 네팔여성 부조종사다. 우리를 태운 헬기는 낮은 고도를 유지하며 설산의 허리를 가로지르며 카트만두로 내달렸다.
고봉들 사이사이를 헤집고 1시간여를 날아 카트만두 국내선 비행장에 도착, 원정 첫 날 묵었던 하이얏트호텔에 10시30분에 다시 들었다. 12시 30분까지 2시간 여유를 주고 그동안 제대로 씻지 못한 오지에서 묵은 때를 털고 새로운 모습으로 만나기로 했다.
산속에서의 5박6일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하얀산 위용과 푸른하늘, 티없이 맑은 고산 사람들의 눈망울이 잊혀지지 않는다. 집사람의 사고만 빼고 정말 좋은 장면들의 연속이었다.
대자연과의 만남이 신비로웠고 헌신적인 봉사로 우리를 감동시킨 셀파와 포터들의 마음이 아름다웠으며 산간병원의 휴머니티가 밝은 세상의 미래를 보여주는 듯 했다. 모든 것이 물질의 가치만을 따지는 각박한 일상과는 먼 거리에 있는 동화속 나라를 다녀온 것 같았다.
다들 말끔한 모습으로 다시 모여 카트만두 시내에 있는 네팔 전통음식점 ‘락루’에서 점심을 먹었다. ‘시들렛’이란 철판구이 일종의 음식이 나왔는데 먹을만했다. 종업원의 동작이 좀 느린게 탈이었지만.
점심식사 후 우리 부부는 현지 여행대행사 사장인 ‘안 까르마 세르파’ 안내로 병원에 들러 간단한 진료소견을 받았다.
다른 일행들은 카트만두 최대상권인 ‘타멜’로 이동해 쇼핑을 했으며 우리는 호텔로 돌아와 쉬었다.
일행들은 한국원정대가 즐겨 찾는 ‘빌라 에베레스트’에서 저녁을 먹었다. 이 곳 주인인 ‘안 도로지 세르파’는 한국에도 몇 차례 왔고 포항에도 온 적이 있어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세르파인으로서는 상당히 성공한 케이스다. 한국말도 곧잘 한다.
호텔로 돌아온 일행들은 오랜만의 자유에 흠뻑 젖었다. 청송 비봉산악회 김성광 회장이 호텔 로비에서 맥주로 나를 위로했다.
모처럼 휴식을 위해 내일 오전은 호텔에서 쉬기로 했다.
이곳 네팔은 토요일이 휴무일이다. 대부분 상점이나 사무실이 문을 닫는다. 그래도 우리를 도와주는 셀파, 쿡들은 끝까지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NO.3 맨’ ‘옹추’는 집사람의 부축을 위해 전심전력 노력했다.
오전에 카고백을 내어놓고 점심을 먹으러 한국음식점 ‘정원’에 갔다. 푸짐한 삼겹살에 소주도 곁들여 즐거운 점심을 먹었다.
나를 제외한 일행들은 카트만두 시내 관광에 나섰다. 힌두사원과 화장장, 전망대 등을 둘러봤는데 화장장에서는 직접 화장하는 모습을 봤다. 인생무상과 이 나라 풍습에 머리를 휘둘러야 했단다. 지옥이 따로 없었단다. 화장한 시신 잔해를 강바닥으로 쓸어내리고 그 강가에서 목욕을 하는 힌두교인들의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단다.
이인 이사와 나는 전날 못가 본 ‘타멜’에 갔는데 이 날 무슨 축제가 벌어져 골목마다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기념품도 구입하고 여기저기 구경도 했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한국인 여사장이 운영하는 ‘Guest House 네팔 짱’에 들렀다.
이름도 예사롭지가 않았지만 사장 명함이 웃긴다. 자신을 ‘산적’이라 소개했다. 조그마하고 땅달막한 떠꺼머리 총각 스타일인 여사장이 한눈에 보통내기가 아니다. 5년차가 됐다는데 이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했다. 배낭여행 오는 학생들이 주고객인데 모든 편의를 다 봐준다고 했다.
곧바로 카트만두 원주민 ‘네와르’족 민속공연과 식사를 함께하는 저녁식사 자리로 가니 이미 공연이 시작되고 일행들도 흥겹게 즐기고 있었다. ‘럭시’라는 전통주가 나오고 손가락으로 집어 먹는 요리를 ‘안 까르마’사장이 시범을 보인다. 저녁식사를 끝내고 계속 공연이 이어지는 사이 강회장과 나는 얼마 안 떨어진 ‘정원’에서 이인정 대한산악연맹 회장을 만났다. 인천-카트만두 직항로가 첫개설(KAL)돼 기념으로 카트만두를 방문했다는 것이었다.
다시 일행들이 식사하는 자리로 이동해 카트만두에서의 마지막 밤을 즐겼다.
흥겹고 즐거운 만찬을 끝으로 카트만두 공항으로 일행들은 이동했다.
공항에서 정말 아쉬운 작별의 시간을 가졌다. ‘파상’ 셀파, 쿡NO.2 ‘학빠’, 쿡 NO.3 ‘옹추’, ‘안 까르마’사장 등 현지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출국장으로 들어섰다. 밤 11시40분발 상하이행 네팔항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히말라야의 하얀산들처럼 순수하고 맑은 그들의 마음을 간직하며 네팔의 추억을 한 아름 안고 떠나간다. 우리가 만난 모든 네팔인들에게 고마운 마음의 박수를 보낸다. 특히‘파상 남겔 세르파’와 ‘옹추’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라마 스떼!’(신의 가호를 바라는 네팔 인사말)
지리한 기다림과 밤샘 비행, 상하이에서의 장시간 체류 등 지친 몸을 끌고 인천공항에 예정보다 1시간 늦게 도착한 시각이 19일 오후 3시.
주마등같이 지나간 8박9일이 고속도로의 불빛에 명멸되어 간다.
‘2006 경북산악연맹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 및 임자체봉(6천160m)등반’의 일단계 트레킹은 여기서 끝났다.
경북산악연맹 모든 회원들에게 트레킹의 즐거움과 신비로움을 글로 전하고자 했으나 졸필이라 그 감동을 생생히 전달하지 못해 죄송하며 앞으로 연맹에서는 지속적인 트레킹 사업을 추진하고자 한다.
이번 행사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도와주고 참여해 준 강석호 회장 내외와 김용운 명예회장, 이경수 박사께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함께한 모든 단원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함께 전하고자 한다.
또한 이번 트레킹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서울 티엔씨여행사 황석연 팀장과 박성종 대리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