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施連칼럼- 부처님의 땅 경주 남산

등록일 2006-06-13 19:10 게재일 2006-06-13
스크랩버튼
경주 남산, 남산의 바위마다 새겨진 80여 위의 돌부처는 신라 돌 미술의 결정체들이다.

남산 삼릉 계를 중간쯤 오르다 보면 서 너 질은 족히 될만한 바위 면에 부조된 부처님은 세상의 허망함에 대해 한마디 말없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천년이나 머금고 있다.

선정에 이른 이 미소는 남에게 보이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향해 드리우는 심오한 깨침의 웃음이며 깨달음의 세계를 완성한 순애 한 모습들이다.

선정에 잠긴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무한한 부드러움과 자비로움이 가득한 이 돌 선(線)들은 딱딱한 화강암에서 해탈한 신라 석공(石手)들의 불심 가득한 예술혼(藝術魂)에 의해서 세상에 태어났다. 불상이나 탑을 조성하는데 써진 경주 돌은 석 질이 강하고 결기가 넘친다.

그 표면에 끌과 정을 다스리는 석공의 손길이 조금만 서툴러도 갈라지고 부스러진다. 이 돌들을 떡 주무르듯 했을 백제나 신라 석공의 손길이 얼마나 부드럽고 섬세했을까. 가늘게 뜬눈이나 큰 눈망울, 적당히 볼록한 뺨, 보일 듯 말 듯한 미소여서 지금도 더운피가 흐르는 것 같다.

남산을 돌아보면 7~8세기 서라벌 여인의 미인상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신라 석공들이 남긴 서라벌 여인의 미인들은 모란꽃처럼 살이 찐 얼굴에 조금은 굵은 몸매를 하였을 것임이 분명하다. 여유 만만한 생활상을 배경으로 하였을까?

애잔한 역사가 숨어 있긴 하지만 포석정의 풍류 적 인 멋 또한 대단하다. 경주 문화재 연구소가 몇 년 전 곡선의 포석정에 물을 채워 흐르게 하고 술을 담은 잔을 띄워 본 결과 수로 길이 22m를 흐른 시간은 10분30초, 사발 형 큰 잔은 8분이 걸렸다 하니 그만하면 시에 익숙한 신라인들이 시한수를 짖고도 남았을 것이다.

민속학 쪽으로 조망해 보면 큰 느티나무 아래에 술잔을 흐르게 한 돌 선은 성(姓) 신앙을 믿었던 신라 사회에서 여자의 내밀한 곳을 조형했다는 속설도 있다.

무심한 돌과 씨름하는 신라 석공들, 무료한 시간을 깨려는 몸부림이 이 같은 아름다움으로 나타났는가?

절로 웃음이 나온다. 지금도 이러한데 신라 당시에는 어떠했을까. 장엄하고 진리를 찾는 불적은 경주의 남악을 채웠을 것이고 청아한 범종 소리, 운판의 긴 여운은 산을 가득 메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지금도 진신 석가가 현신 했던 그 계곡(溪谷)은 물론 수도승(修道僧)이 거처하였던 석굴(石窟)이나 영험(靈驗)이 서린 바위 자락마다 어김없이 촛농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장육 삼존불 광배까지 차고 오르는 외씨 버선발 무녀의 신들린 춤사위가 등산객을 잠시 기웃거리게 만든다.

3백 여 군데에 이르는 불적에다 바위산 솔 향에 이끌리어 보내는 계절마다 오르내려도 싫증나지 않는 명산중의 명산이지만 풍수지리설에 무참히 짓밟혀 동, 서 남산에 써진 2만 여기의 분묘가 명산의 모습을 흐려 놓고 있다. 칠불암 향내음을 뒤로하고 고위산에 오르면 내면 깊숙하게 숨어 있던 불성이 천년 고암 백운암 스님 앞에서 스스럼없이 합장으로 나타난다.

이 길을 수없이 오르내리면서 한의 세월을 보냈을 설잠 김시습의 싯귀인 “용장사”는 이즈음 더욱 가슴 저미게 한다.

용장 골 깊으니 오는 사람 볼 수 없네/ 가는 비에 신우대는 여기 저기 피어나고/ 작은 창가에 사슴 함께 잠 들었으라/ 낡은 자리엔 먼지만 앉았는데

깰 줄 모르는 구마 억새 처마 밑에서-

소유욕(所有慾) 무명(無明)에서 벗어나 허망(虛妄)한 세상을 등지고 참 나를 찾아가는 불자나 되어 볼까! 이토록 아름다운 산! 신라로 통일한 화랑들의 혼과 흔적이 흐르는 경주 남산이 있음이 이같이 자랑스러울 수 있을까.

- 권오신 (객원 논설위원)

종합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