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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도

김순희 시민기자
등록일 2023-04-11 19:38 게재일 2023-04-12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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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도 실물이 5월 4일에 공개된다.
경주에는 고분이 한눈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 중심인 황리단길에 155호라 불렸던 무덤이 있다. 이곳이 ‘천마총’(天馬塚)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건 그림 한 점 때문이었다. 꼬리를 세우고 하늘을 달리는 듯한 흰색의 천마, 다리 앞뒤에 마치 고리 모양 같은 돌기가 있고, 입은 혀를 내민 듯하다. 흰색의 천마가 동물의 신으로, 죽은 사람을 하늘 세계로 실어 나르는 역할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

천마도는 말의 안장 양쪽에 달아 늘어뜨리는 장니에 그려진 그림이다. 장니는 말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가죽 같은 것을 말안장 양쪽에 늘어뜨려 놓은 기구를 말한다. 5∼6세기 신라 시대에 그려진 천마의 모습 및 테두리의 덩굴무늬는 고구려 무용총이나 고분벽화의 무늬와 같은 양식이다. 그러므로 신라 회화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 그림이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와 달리 고분에 벽화를 그리는 문화가 없었다. 그렇기때문에, 천마도는 몇 안 되는 신라의 회화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거의 유일한 작품으로 그 가치가 크다.

경주를 찾는 여행객이라면 대부분 찾는 곳이 천마총이다. 한 해 100만 명 이상이 방문한다고 하니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한 번쯤은 이곳을 거쳐 갔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만큼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고 인기 있는 유적지이다. 그러나 정부가 고려한 발굴 대상은 천마총이 아니었다. 당시 정부가 마련한 종합계획은 경주 고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무덤인 98호분 즉, 황남대총을 발굴한 뒤 이를 복원해 내부를 관광객에게 공개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고고학계에서는 그 정도로 큰 신라 무덤을 발굴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규모도 거대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발굴 조사를 해본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전에 경험을 쌓기 위해 ‘좀 작은 고분’을 선택한 곳이 바로 천마총이었다. 일종의 ‘시험 발굴’인 셈이다. 김정기 당시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실장을 단장으로 꾸린 조사단의 성과는 실로 놀라웠다. 간단한 위령제를 올리며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한 이들은 12월까지 약 8개월간 신라 금관을 비롯해 금제 관모, 금제 허리띠, 팔찌, 유리잔 등 1만1천526점(보고서 기준)의 유물을 찾아냈다. 각종 유적과 유물을 발굴할 때 ‘실측’이라는 개념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계기도 천마총이라는 게 학계 중론이다. 발굴 이듬해인 1974년 11월 470여 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펴낸 점도 놀라운 일이다.

문화재청은 발굴 50년을 기념하기 위해 올해 국립문화재연구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국립경주박물관, 경상북도, 경주시 등 관계기관 5곳과 협력해 총 12건의 행사를 선보인다. 4월 6일에는 당시 발굴에 참여한 조사원들이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좌담회가 열렸다. 9일에는 KBS ‘역사저널 그날’ 방송 프로그램에서 천마총 발굴 50년 역사를 소개했다. 5월 4일 천마총 발굴 50년을 기념하는 비전 선포식을 열 예정이다. 같은 날 국립경주박물관은 ‘천마, 다시 만나다’ 특별전을 열어 천마도 장니 실물을 공개한다. 천마도 장니 실물이 공개되는 것은 2014년 특별전시 이후 약 9년 만이다.

이 시기 대릉원 일원을 찾으면 화려한 미디어아트도 볼 수 있다. 9월에는 발굴 50년 기념 학술 포럼이, 10월에는 국제 학술대회가 각각 진행된다. 11월에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돌무지덧널무덤 즉,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을 축조·복원하는 실험을 공개한다. 12월께 ‘천마총 50년사’(가제) 책자도 발간할 계획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천마총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다 함께 되돌아보고 미래 100년 신라 문화의 가치 확산과 향유를 위한 메시지를 전달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김순희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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