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지역과 관련된 최초의 지명으로 대체로 이견이 없는 것은 ‘삼국사기(三國 史記)’에 나오는 조문(召聞)으로, 이는 이 지역에 존재하였던 소국(小國)의 국명 이었다. 북방 선진문화유입의 중심통로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조문국(召文國)은 185년 (벌휴왕2) 신라에 의해 정벌되었으나 조문이라는 지명은 ‘조문성(召文城)’의 예에서 보듯이 삼국 통일 무렵인 문무왕대 까지도 사용되었다. 이를 통해 볼때 문무왕대(661∼681)까지 이 지역은 조문으로 지칭된 듯하다.
삼국통일 후 신라 경덕왕(742∼764)이 관제(官制)를 비롯한 지명(地名)을 중국식으로 고칠때(757년) 조문을 문소(文韶)로 고쳤으며 문소는 통일신라시대 군(郡)에서 부(俯)로 승격되면서 지명도 문소에서 의성(義城)으로 바뀌었는데 이 때 처음으로 의성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의성은 그후 조선시대에도 변화없이 사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즉 고려초 이래 ‘의성’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었지만 ‘문소’로 조선후기 까지 동시에 사용되었다.
삼한시대 부족국가 ‘조문국’의 도읍지인 현 의성군 금성면 일대 2천년 역사를 지닌 문화유적이 최근 재조명 활동이 활발해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김복규 의성군수는 ‘군민 자긍심 되찾기 차원에서 외지에 반출된 조문국 유물반환운동을 벌이고 유적보전사업으로 지난해 66억4천만원의 예산으로 고분군정비와 녹지공원을 조성하였고, 또 150억원으로 2010년까지 유물관 건립계획을 세우는 등 소왕국 복원에 앞장서고 있다.
김군수의 뜻을 반영하듯 1960년 이후 봉토 확인 결과 고분 130여기 대리리 40여기 등 미확인 고분까지 합하면 380여기가 넘는 고분이 산재되어 있고, 국보급 유물도 금동관외 166종이 출도되어 경주를 제외한 신라의 지방고분군 출도유물 중 최상급인 것으로 자체 평가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조문국(召聞國)
조문국을 삼국사기 가운데 당시 정치문화적 성격에 비해 벌조문국(伐召文國)에 대한 삼국사기 권 제2신 ‘라’본에 실린 원본 문안은 「벌휴(伐休:一作發暉) 이사금(泥師今) 이년(二年) 춘정월(春正月) 친사시조묘(親祀始祖廟) 대사(大赦) 이월(二月) 배파진찬구도(拜波珍飡仇道) 일길찬구수혜(一吉飡仇須兮) 위좌우군주(爲左右軍主) 벌조문국(伐召文國) 군주지명(軍主之名) 시어차(始於此)」로 마흔일곱(47)자다. 아직도 의성지방에 조문국의 이름을 이어받아 금성면에 조문마을이 남아있다.
▲2000년전 조문국왕의 금동관(金銅冠) 출토
미국 하버드 엔칭학사의 발굴비 보조로 지난 1960년 11월 28일부터 한달에 걸쳐 국립박물관 김재원, 김원룡, 윤무병 임천 김정기를 선정하여 오전 9시 부터 곽의 밑바닥 부분의 유물층에 대한 조사를 개시 먼저 동남쪽에서 청동색의 녹이 쓴 관이 나타 났다. 녹물이 주위에 번져 파랗게 물든 관속에서 황금의 금색이 군데군데 찬란하게 빛났다. 관 주의에 세운 장식이 마치 공작새의 꼬리처럼 생겼으며 종전에 보지 못하던 매우 특이한 형식의 금동관이다. 또 관 밑에서 검출된 금제 귀걸이에도 방울 3개씩 달아서 만든 보기 드문 종류였다. 여러 날 동안 고생한 보람이 이제야 이루어진 것 같아서 조사자들 입에서 저마다 탄성이 터져 나왔다. 누구가 어떤들 우리 조문국 옛터전 고분에서 왕관인 금동관이 2000년간 긴 잠에서 깨어나 세상에 찬란한 금빛을 뿜었다.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의성 탐리 출토 금동관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신라지역에서 출토되는 금관 또는 금동관의 모양은 정형화 되어 있다. 모양의 테두리 위에 나뭇가지를 간략하게 도안한 산(山)자 모양의 장식을 3단으로 겹쳐 세움 장식을 3개 세우고, 뒷 쪽에는 사슴 뿔 모양의 장식을 세우고 있으나, 탑리고분 곽에서는 전형적인 신라의 관과는 다른 금동관에는 띠 모양의 테두리 위에 가장자리를 가늘게 자른후 이를 꼬아서 새의 깃털 모양으로 만든 세움장식 3개를 부착 했다’.
▲최초의 노적봉(露積奉)은 조문국에서
삼한시대 조문국은 2000여년전 의성의 왕족 조문국에서 한국에서 유일하게 최초의 노적봉이 현재까지 의성 금성산과 비봉산 사이에서 우뚝히 우람하게 자리하고 있어 우리들 의성인들의 긍지를 한껏 심어주고 있다.
신라 9대 벌휴왕이 즉위하여 사신을 조문국에 보내어 항복을 강요하니 조문국왕은 군신을 화합하고 대책을 모의하니 한 사람도 대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끝내 교전하기로 결정하고 신라사자 이인을 참살하니 신라왕은 크게 성을 내어 그 다음해 김장군이 2천명의 병을 거느리고 조문국을 침공할 때 조문왕은 금성산 주위 구천일백척과 높이 십삼척의 석성을 구축하고 왕이 여기에 주필(머무름)하면서 묘한 계책을 세워내니 성중의 작은 산에 볏집을 덮어서 곡물을 저장한것 같이 하여 방전의 준비를 햇더니, 신라병은 가음방면으로 진공하여 조성을 포위하고 도전하니 조문은 성을 굳게 지켜 응전하니 신라의 강함으로도, 용이히게 격파하지 못했다.
▲ 조문국의 흔적 봉유대(鳳遊臺)
영조36년(1760) 전국 읍지를 종합 정리한 여지도서가 발간됐다. 그곳에 여헌 장현광(1544-1637)선생이 병종 36년(1608) 50세에 의성 현령으로 재임중 봉대에 대한 그의 가문에 남겨둔 기록이 여지도서에 실려 있어 부분발취하여 옮겨본다. 문서의 금성산 서쪽에 흐르는 물을 하천(下川)이라 하고 하천의 상류에 한 석벽이 있는데 봉대(鳳臺)라고 한다. 높이는 수장(數丈)이고 길이는 높이에 비하여 10배나 된다. 하천의 위 · 아래로 각 30리 사이에는 기승처(奇勝處)가 전혀 없고 근처의 사람들이 이석벽을 제일의 승경지(勝景地)로 삼고 있다. 이 석벽에 새겨진 봉대라는 기록보다 다르게 봉유대라고 석각되어 있다. 이 석벽이 한곳의 승지(勝地)로서 봉이 그 위에서 놀고 즐거워하는 곳으로 해서 드디어 봉대라 하고 봉조가 이땅에서 즐겨 날아갈 뜻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절을 만들어 두었다 한다. 이들 백장령·오동령 가음마을 등의 이름이 나라가 명망한 뒤에도 고쳐지지 않고 봉대라는 명칭이 아울러 전하고 있다.
▲조문국의 조문금(召文琴)
조문국 비봉곡은 그 시대에 발달 된 문예중 미요로서 으뜸으로 인구에 회자 된 것은 비봉곡 이었다. 이 비봉곡은 일본 및 지나(支那)까지 전파 되었다. 그 곡조를 타기 위해 이종의 독특한 악기를 발명하니 12현의 조문금이라 원래 이 비봉곡은 시대의 표현이요 외문이란 것이다. 외문이라 함은 기와판을 굽기 전에 그 판에 문자나 그림을 그려 굽는 것인데 외문도 대단히 유행되어 나라 사람이 자기의 소유지라 던가 분묘 등에 매각되어 그 후에는 여인들의 문예상의 중심이 됐다.
조문국에서 ‘조문국’과 비봉곡이 2000년 전에 있었고 1천500년 전에 우륵의 가얏곡에 의성의 음악과 미지악, 미지무가 있었음을 문화와 문명이 깊게 젖은 조문국이요 문소군이다.
▲조문국 경덕왕(景德王)의 기록
조문국에 대한 문헌 자료는 삼국사기로 부터 고문헌사료 곳곳에 실려 있으나 경덕왕과 조문금 즉 음악에 관한 자료가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최초로 실려있다.
경덕왕분은 조문마을의 북쪽에 있다. 예무덤이 첩첩이 쌓여 얼마인지 알 수 없고 그 중 한 분(墳)이 가장 큰 무덤으로 마을 사람이 남몰래 몇번이나 그 속을 파헤쳐 보려함에 이웃에 사는 오극렴이 이것을 보고 놀라 꾸짓고 다시 수축하엿다. 그날 밤 극렴의 꿈에 의복치장에 이상스러운 한분이 시한절을 재삼 정녕하게 일러주는데 그시에
‘문소왕사여수론(聞韶往事輿誰論)
문소 내력을 누구와 의논 하리오
천재유존경덕분(千載有存景德墳)
천년이 지난 오늘 경덕분이 뚜렸하도다.
조문금거답난문(召文琴去沓難聞)
조문금 타던 그 소리도 지금은 묘연하구나’
지금 조문국 고분군을 새롭게 인식하여 아득한 시대 기원 전 후 위상을 찾고 우리 모두의 자긍심을 가지며 이러한 일에 동참하여야 할 것이다.
▲ 조문국의 음악
‘반뜩 반뜩 저별보소, 하나둘이 서이 너이 해어볼까 하였더니, 여기 번뜩 저기 번뜩’
미광(微光)향토사료 비사에 보면 부촌이나 빈촌이나 어디든 아이들이 밤이되면 위와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무사 태평의 단꿈을 꿧다.
조문국 경덕왕릉 향사때 불럿던 ‘영신곡’은 고국의 풍류줄이 끊어지고 비봉곡도 다 멀리 가버렸네 고국의 묘연함이 얼마이며 활홀한 옛꿈도 회포만이 새롭도다. 운예를 거느리고 어가가 래임하시니 나브동 못물은 출렁 출렁 넘치고 오동산 봉오리는 우뚝우뚝 솟아 왕덕을 사모함이 그지 없네 천년이여 만년토록 이땅을 볼살피며 영원히 무너짐에 없게하소 북을 울려 회무하고 시를 읊어 응율하니 영신께서 노니는듯 방불하게 보이네 패연한 비를 내려 물결이 출렁이니 옜날 부터 경사로움 끊이지 않으리라.」
김종우(의성문화원장)대표 인터뷰
-조문국 문화유산의 지리적 배경은?
▲ 의성군 지역 일대는 지리적으로 보아 조문국의 고지에 해당한다.
조문국은 경주에서 영천을 지나 북방 소백산맥의 죽령에 이르는 요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낙농강 북안에 위치한 소왕국으로 북방선진문화유입의 중심통로로서 찬란한 문화가 꽃핀 곳으로, 금동관 외 166종 국보를 비롯한 49점의 지정문화재와 유적 및 반출유물을 포함 1천500여점의 향토유물이 출토 됐다.
-조문국 관광개발사업의 추진 개요는?
▲전국 박물관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조문국 관련유물을 되찾아 의성지역에 박물관을 건립하자는 목적에서 2007년 4월30일 의성읍에 있는 궁전예식장에서 ‘다시 찾아야 할 조문국’이라는 제목으로 역사문화자원화 포럼을 의성군민들에게 조문국 역사의 중요성을 일깨웠으며, 의성군에서는 사적지공원화 사업으로 2007년도에 66억4천만원을 들여 고분군 정비와 녹지공원을 조성하였고, 또 박물관을 2010년까지 150억원 예산으로 건립할 계획을 세우는 등 조문국 관광개발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
-조문국 관광개발사업 추진 과정의 문제점은?
▲ 이 사업 추진중 군민의 관심을 높이고 사업효과의 극대화를 위한 규모의 대형화에 따른 사업비 증액을 중앙부처에 건의 하였으나 추가 지원이 되지 않는 등 사업 추진의 경직성으로 목표 달성이 미흡한 것이 안따깝다. 그러나 최선을 다한다면 해결의 실마리가 풀릴 것으로 본다.
/김상현기자 shkim@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