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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物議)를 이대로 둘 것인가

등록일 2016-10-07 02:01 게재일 2016-10-07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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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희룡<br /><br />서예가
▲ 강희룡 서예가

사람들은 대체로 뭇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평판에 민감하다. 외부의 시선에 민감한 까닭에 자신으로 인해 `사회적 물의`가 일어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한다. 물의란 여러 사람의 평판을 뜻하는 말로 물론(物論)이라고도 한다. 사람들이 물의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뚜렷한 실체도 없고 나타남과 사라짐의 지점을 포착하기 힘든 마치 유령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관료들도 이 정체 모를 물의를 다루는 데 상당한 공력을 들였으며 대의 앞에서는 두려움을 느꼈다. 다산 정약용도 세상의 이 물의 앞에서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의 형인 약현(若鉉)에 대해 그가 쓴 묘지명에는 `신유년의 화에 우리 형제 세 명이 모두 기괴한 화(禍)에 걸려서 하나는 죽고 둘은 귀양 갔다. 그런데 공은 조용하게 물의 가운데 들어가지 않음으로써 우리 문호를 보전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물의의 한가운데에 들어가면 자칫 목숨도 부지하기 어려웠던 것이 당시의 상황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니 당시의 지식인들은 당연히 이 종잡을 수 없는 여론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에 부심하였다. 윤휴(1617~1680)는 물의라는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삼자(三刺)의 계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첫째는 여러 신하에게 묻는 것이고, 둘째는 여러 관리에게 묻는 것이고, 셋째는 백성들에게 물어서 몽롱한 상태의 물의를 좀 더 명료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자세는 세간에 떠도는 중론이 과연 백성들의 여론을 얼마나 진지하게 반영하고 있는지를 밝히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윤휴의 삼자의 계책은 오늘날 정치권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법인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물의가 발생하면 더 크고 강력한 또 다른 물의를 터트려 앞선 물의를 물 타기하거나 덮어 버리는 태도와는 구별된다.

세종의 치세 기간 중에도 세간의 물의를 두려워하지 않는 겁 없는 고위관료들이 없어지지 않았다. 세종 11년(1429)의 기록에는 해주 목사로 제수된 인물이 매양 수령이 될 때마다 물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제 뜻대로 관물을 낭비하고, 오직 술 마시는 것만을 일삼으며, 권세가들에게 뇌물을 바치는 등 못 하는 일이 없는 자라고 혹평하는 내용이 나온다. 세간의 평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윗사람들의 비위나 맞추는 전형적인 탐관오리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사간원 좌사간이었던 유계문은 아예 국가에서 중요한 인선을 할 때에는 반드시 물의에 맞는 자를 택하여 임명할 것을 계청(啓請)하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되자 이제는 정치에 물의를 적절히 이용하려는 자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하였다. 정적을 억누르고 배척하는 데에 세간의 평판인 물의만큼 좋은 무기도 없었다. 누구는 세평이 흉흉하니 당상관으로서는 적임이 아니고, 어떤 인물은 물의가 없는 인물이니 중용해도 무방하리라는 진언이 잇달아 나타났다. 특히 사림파들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중종, 명종 대에 이르면 훈구세력과 사림세력 사이에서는 이 물의의 해석을 놓고 치열한 논전이 전개되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의 정치의 영역에서 관료의 비도덕성, 법의 허를 이용한 탈법, 무작위적 폭로, 모함 등 유령처럼 나타나는 이 온갖 치졸한 물의가 가져오는 부정적 영향은 심각하다. 유건휴(1768~1834)는 대야집에서 `복숭아꽃 오얏꽃은 말이 없으나 그 아래 자연히 길이 생긴다.(桃李不言 下自成蹊)`라고 적고 있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스스로 그걸 드러내려고 굳이 애쓰지 않아도 남들이 그 능력을 알아보고 추앙하는 법이다. 아무리 요즘이 자기홍보 시대라고는 하지만, 겸손이라는 최후의 덕목마저 외면한 채, 실력도 실속도 없으면서 자기 잘났다고 고개를 휘두르는 자들이 자리를 차고 앉아 있는 사회는 더 이상 미래의 동력을 잃고 제자리에 서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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