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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그들’이 있었기에 존재한 신라와 월성

지금 월성은 없다. 흔적과 터만 남아있을 뿐 실체는 시간의 안개 저편에 있다. 월성의 최후에 대해서도 견훤이 불을 놓았다는 기록과 몽골 기병이 황룡사를 태웠다는 기록이 엇갈린다. 아무래도 신라 패망 후 방치되다가 화재로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그런데 전화위복이요 새옹지마라 할 만하다. 추정대로 월성이 몽골이 침입했을 때 화재에 의해 일시에 사라진 것이라면 오히려 현재까지 땅속에 상당한 유물이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1970년대 말 월성 내부 시험 발굴에 나섰다가 지하에 너무 많은 유물이 매장되어 있어 당시 기술로는 도저히 발굴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대로 덮어버렸다”는 말이 경주 지역 문화재 관계자들 사이에 전설처럼 내려왔다니. 월성은 이제부터 차근히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비밀과 신비도 봇물처럼 터져 나올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많을지니, 마음의 눈을 뜨고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할 테다.매일 짐을 풀고 싸는 대신 한곳에서 머물며 여행하다 보면 시나브로 그 동네의 특성을 파악하고 ‘로컬’의 분위기에 젖게 된다. 경주에서 유식하며 월성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닥치는 쫓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유물과 유적보다는 사람, 지난 시간 속의 사람들과 현재의 사람들이 궁금해졌다.월성은 결국 사람이 지은 성이고, 사람이 살았던 성이다. 월성의 주인이 누구보다 중요하지만 그들과 어우러져 살았던 월성 바깥의 사람들도 무시할 수 없다. 신분과 처지는 달랐을지언정 그들 모두 자기의 운명을 힘껏 살았던 사람들이다. 너무 땅속만 들여다보고 지난날만 더듬으면 허무감이 깃들기 마련이다. 어제로부터 오늘까지, 어떤 환란에도 영영 사라지지 않은 사람들의 향기를 쫓아본다.21세기에 들어 처음 실시한 2000년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본관별 인구 순위 1위는 김해(가락) 김씨, 2위는 밀양(밀성) 박씨, 3위는 전주 이씨라고 한다. 그리고 4위부터 6위까지가 바로 경주를 본관으로 한 김씨, 이씨, 최씨의 순이다. 가락국의 수로왕이 시조이고 김유신이 중시조인 김해 김씨까지 포함하면 인구수 상위 성씨의 절반 이상이 신라를 뿌리로 하는 셈이다.물론 지금의 본관이며 성씨가 삼국시대를 비롯한 과거와 같은 의미일 수는 없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성씨 자체가 없었다가 이후 일부 계급에게만 주어졌다. 포상이거나 표식의 의미가 더 강했던 본관과 성씨는 계급 사회의 변동에 따라 ‘만인의 것’이 되었지만, 그 또한 부계의 전승으로서 핏줄로만 따지면 절반의 징표에 불과하다.1990년대 후반부터 ‘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이 시작되었을 뿐더러 법제까지도 부계 성씨 계승 대신 부모의 성씨 중의 선택으로 변화하려는 즈음에, 새삼 본관 따지고 성씨 따지는 것이 고리탑탑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뿌리 찾기’에 흥미를 느끼는 편이다. 고구마줄기처럼 혈연으로 이어진 나의 뿌리가 과연 어디에 닿아있는지 궁금하다. 그것은 지나간 일로만 여기는 과거를 현재의 일부로 인식하고 회복하는 작업이다. 내가 흘러왔고 흘러갈 물에 가만히 손을 넣어보는 일이라 할까.‘삼국유사’에서는 “신라의 전성시대에 서울 안 호수가 178,936호(戶)에 1,360방(坊)이요, 주위가 55리(里)였다”고 했다. ‘17만 호’에 대해서는 이를 호구수로 보고 5(명)을 곱하면 85만여 명이 되는데 경주의 면적을 감안하면 이 인구를 모두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이를 호구수로 보지 않고 인구수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이다(이병도,1959).그러나 ‘당평백제비(唐平百濟碑)’에서 백제 멸망 당시 인구가 620만이라고 언급한 점을 감안하면, 신라 왕경의 인구를 85만명 정도로 추측하는 것이 결코 타당성 없는 주장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이기봉,2002).족보 전문사이트 ‘뿌리를 찾아서’에서 검색되는 경주(혹은 안강, 월성, 계림)를 본관으로 한 성씨는 89개에 이른다. 그중 ‘월성의 시대’에 있었던 성씨는 9개쯤으로 짐작된다. 우선은 왕을 배출한 박·석·김씨가 있고, 고조선 유민으로 진한 땅에 자리 잡은 6부 촌장들을 원조로 하는 알천 양산촌 이씨, 돌산 고허촌 최씨, 취산 진지촌 정(鄭)씨, 무산 대수촌 손씨, 금산 가리촌 배씨, 명활산 고야촌 설씨 등이 있다.경주시 탑동 양산 아래 자리잡고 있는 ‘양산재’는 6부 촌장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1970년에 6촌장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는데, 가보니 문이 잠겨 있고 주변은 썰렁하다. 대문 틈으로 빼꼼 들여다보니 깔끔하게 정비된 모습에서 후손들의 손길을 느껴진다.양산재에 들어가 보지 못한 아쉬움을 바로 아래 나정에서 달랜다. 나정과 양산재가 이어지다시피 자리한 것이 당연하지만 흐뭇하다. 알에서 탄생한 박혁거세를 신라의 왕으로 추대한 이들이 바로 6부 촌장이다. 원래 이들은 각자 자식들을 데리고 알천언덕에 모였다. 자기 자식을 왕으로 세우고픈 마음이(본능이) 없지 않았으련만, 그들은 저마다의 욕망을 꾹 누르고 혁거세를 지도자로 옹립한다. 마음 맑고 눈 밝은 이들이 알아보지 못한다면 영웅이고 위인이고 없는 것이다. 6부 촌장 중에서도 두 사람의 이야기가 도드라진다. 촌장들의 리더 역할을 했던 고허촌장 소벌도리와, 그 또한 하늘에서 바위로 내려왔다는 표암(瓢-) 전설의 주인공 양산촌장 알평이다. 경주 최씨와 경주 이씨의 성을 가진 그들의 자손은 호부견자 없다는 말을 증명하듯 명문가를 일구어왔다.월성의 서편, 월정교를 보러 온 관광객들과 주차장을 같이 쓰는 교동마을은 경주 최씨 후손들의 삶터다. 일명 ‘최부잣집’으로 알려진 고택을 중심으로 한옥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달걀이 가득 든 ‘교리김밥’도 유명하다. 고택 사랑채의 주춧돌이 월성에서 나온 돌이라는데, 이 돌이 그 돌 같고 그 돌이 이 돌 같아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다. 시간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들의 진정은 마을 한편 향교에서도 느껴진다. 경북에서 가장 큰 향교라는 것 외에도 원래 신문왕이 ‘국학’을 지은 바로 그 자리에 세웠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학교의 자리에 학교가 생겨나는 건 그곳이 가장 공부하기 좋은, 조용하고 안정적인 터라는 뜻이렷다.경주 이씨가 이씨의 대종(大宗)으로서 수많은 공신과 학자를 배출한 것을 자랑삼는다면, 경주 최씨는 ‘최부잣집’으로 대표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표상이라 할 만하다. 단순히 돈만 많은 게 아니라 세계관과 인생관이 함께했기에 경주 최씨는 일제강점기에 지사들을 배출하며 진정한 명문가로 거듭난다. 벌써 몇 번째 방문했지만 최씨 집안의 가훈은 볼 때마다 깊은 울림을 준다.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높은 벼슬에 올랐다가는 분쟁에 휘말려 화를 집안으로 불러올 수 있다.2. 재산은 만석 이상 지니지 마라.-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 1만석 이상의 재산은 이웃에 돌려 사회에 환원한다.3.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누가 와도 넉넉히 대접하여, 푸근한 마음을 갖게 한 후 보낸다.4.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말라.- 흉년에 먹을 게 없어서 남들이 싼값에 내놓은 논밭을 사서 그들을 원통케 해서는 안 된다.5.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혀라.- 내가 어려움을 알아야 다른 사람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다.6.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특히 흉년에는 양식을 풀어라.그 땅의 지기(地氣)는 결국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기운이다. 땅이 사람을 닮고, 사람이 땅을 닮는다. 경주에 머물며 여행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연구자와 작업자 등 월성 발굴조사에 참여하는 분들과의 인터뷰도 그랬지만, 일상적으로 길이나 유적지나 식당이나 택시에서 만나는 ‘경주 사람’들이 매우 인상적이었다.내 고향도 관광지라면 관광지라 할 수 있는 해변 도시인데, 우리 동네 사람들은 아무래도 배타적이고 무뚝뚝한 편이다. 고향사람들끼리야 거친 말투와 태도 이면의 정서를 이해하지만, 타지 사람들이 보기에는 불친절하고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테다.경주는 오래된 관광지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친절하고 다정하게 느껴졌다. 물론 내가 운이 좋았을 수도 있지만, 자신들의 터전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뜨내기’이거나 ‘호구’로 여겨서는 보일 수 없는 태도다. 시장의 상인부터 게스트하우스의 주인까지 물으면 정성껏 답해주고 무어라도 도와주려고 애를 쓴다.무엇보다 놀랍고 감동적인 부분은, 고도(古都)의 주인답게 품격과 지성을 지닌 분들을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주에서는 흥미가 있고 마음만 먹으면 무료이거나 최소한의 경비만으로 참여할 수 있는 탐방과 체험 프로그램이 연일 이어진다. 단체를 운영하는 데는 지자체의 보조를 받겠지만, 거의 자원봉사나 다름없이 활동하며 경주와 신라를 알리는 문화 해설사들도 많이 만날 수 있다.남산 삼릉코스를 이끌며 구석구석 숨은 보물들을 가려보여준 ‘경주남산연구소’의 김원자님은, 견훤에 의해 즉위해 마침내 고려에 투항한 ‘경순왕’을 신라의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듯 꼬박꼬박 ‘김부’라고 부르는 자존심과 결기가 인상적이었다. 쪽샘 유적 발굴관에서 신라 고분의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들려주신 ‘신라문화원’의 박근자님은, 황룡사지에서 태어났다는 내력으로 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들의 조근조근 작은 목소리와 반짝반짝 빛나는 눈은 참으로 ‘신라인’다웠다. 자원봉사도 시간과 건강이 허락되어야 가능한 일이지만, 문화재 해설은 그에 더한 열정이 없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폐허에서 폐허 너머를 보는 상상력이 아니고서야 공허한 일일 수밖에 없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당연한 이치에 하나를 더 얹는다. ‘상상한 만큼 느낀다.’ 그리고 ‘사랑하는 만큼 기억한다’고.월성을 걷는 시간은 신라를 기억하며 경주를 여행하는 시간인 동시에 ‘신라의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이었다. 그들이 있어 서라벌, 그리고 월성이 있다.끝

2019-06-02

신라 월성, 천년의 폐허를 노래하다

열흘 붉은 꽃은 없다던가? 천년은 영화, 그리고 다시 천년은 폐허였다. 신라의 패망으로 더 이상 왕성일 수 없는 월성은 고려의 지배하에 3백 년 동안 방치된 채 잊혔다.한때 ‘황금의 나라’의 왕궁으로서 휘황했던 궁궐은 햇빛과 눈비와 바람과 이슬에 바래고 삭아갔다. 그럼에도 어쩌자고 흔적조차 말끔히 사라졌단 말인가?이에 대해 고고학계는 자연 풍화와 함께 몽골이 침입해 황룡사를 불태우면서 인접한 왕궁과 왕성이 모두 불타 소실됐을 것으로 추정한다.1238년 고려 고종 25년, 몽골이 3차 침입했을 때 몽골 지휘관 탕고는 의주에서 서경(평양)과 남경(서울)을 지나 동경(경주)에까지 닿는다. 몽골의 기병은 바람처럼 빨랐다. 철제 갑옷이 없어서가 아니라 전광석화 같은 기동력을 위해 그들은 춥든 덥든 가볍게 입고 유라시아 대륙을 휘저었다.몽골군은 적이 저항하거나 복수전을 펼칠 때는 노인부터 아이까지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학살했기에, 칭기즈 칸의 군대가 휩쓸고 지나간 13세기에 3천만에서 6천만 명에 달하는 세계 인구가 줄었다고 한다. 그들은 정복하는 대신 약탈하고 떠난다. 무주공산의 경주는 그 무도한 말발굽 아래 맥없이 무너졌다.몽고병이 동경에 이르러 황룡사탑을 불태웠다.-‘고려사’고종25(1238) 윤4월몽고의 병화(兵火)로 탑과 장육존상과 전우(殿宇)가 모두 불탔다.-‘삼국유사’ 탑상편고지도 중 월성이 표기된 가장 오래된 것은 17세기 ‘동여비고 경상도 중부’ 지도다. 지도에서 월성은 산 아래 또렷이 자리잡고 있다. 금성과 만월성, 명활성 등은 때에 따라 빠지거나 심지어 위치가 조금씩 달라지는데 월성만은 대동여지도에 이르기까지 경주 지방을 그린 조선의 지도에서 빠지지 않고 존재감을 나타낸다.하지만 자세한 풍경을 찍은 사진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야 볼 수 있고, 1914년 도리이 류조가 제1차 월성 조사 당시 찍은 월성의 전경은 논밭이 된 성안과 둔덕으로 남은 성벽뿐이다.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보이지 않는 것들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노래가 바로 문학이다. 월성이 불타거나 침식해 사라진 후에도 월성을 노래한 문학은 남았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천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첨성대는 반월성에 우뚝 서 있고옥피리 소리는 만고의 바람을 머금었구나.문물은 이미 신라와 함께 다하였건만슬프다. 산과 물은 고금이 같구나.월성에 대한 가장 오래된 시는 ‘포은집’(1439)에 실린 정몽주의 ‘첨성대’다. ‘포은집’은 세종 21년 정몽주의 두 아들이 아버지의 글을 모아 펴낸 문집이다.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 정도전조차 ‘도덕의 으뜸’이라고 찬했다는 고려의 충신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수하에게 암살당하기 전 언제쯤인가 경주를 다녀갔나 보다. 그때도 첨성대는 우뚝이 남아있으나 문물은 간데없고, 신라의 쇠망이 남의 일 같지 않음에 정몽주는 한숨처럼 슬픔을 읊는다.국운이 쇠퇴하는 시기가 아니더라도 폐허가 된 월성의 풍광은 여행자들을 애상에 젖게 했다.외로운 성 약간 굽어 반달을 닮았는데가시덤불은 다람쥐 굴을 반쯤 가리웠구나.-이인로 ‘반월성’(‘동문선’, 1478)아득히 지난 일을 물어볼 데라곤 없으니모든 것이 쓸쓸하여 흥망이 서글퍼지네.흐르는 물은 일천년 오래된 나라와 같고찬 연기는 마흔여덟 왕의 무덤과 같네.첨성대 위에는 배 주린 까마귀가 모여들고반월성 곁에는 들 송아지가 올라가 있네.분황사 가에는 붉은 사립문이 닫혀 있고겨울 다리를 석양에 중이 혼자 건너가네.-이유원 ‘회고시-동경회고’(‘임하필기’, 1871)페이소스가 짐짓 감상적으로 흐르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조선시대 시가에 드러난 월성의 모습은 고고학적 발굴과 과학적 조사가 진행되는 현재도 참고할 만한 데가 있다.조선조 내내 월성은 말 그대로 ‘빈 동산’이었다. 궁전은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새는 제멋대로 정적을 깨며 지저귄다. 우거진 풀숲에서 사슴과 노루가 뛰어다닌다. 무지렁이들은 월성의 흙을 파다가 농가의 벽을 바른다.이처럼 ‘땅도 늙고 하늘도 황폐해 다만 능곡뿐(조위 ‘반월성’(‘속동문선’, 1518))’인 궁터 앞에 서면 절로 인간사의 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히브리의 ‘시편’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자가 어디 있으며, 누가 저승에서 자기 영혼을 빼내겠는가?”고 묻고, 신라의 월명사는 ‘제망매가’에서 “삶과 죽음이 여기 있으매 두려워, 나는 가노라 말도 못다 이르고 가느냐”고 탄식한다.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오래된 잠언은 시작이 있으면 끝 또한 있음을 상기하며 삶의 오만함을 경계한다.그래서 월성의 폐허 앞에서 살아생전 부귀영화의 무상함을 깨닫고 속세를 떠났다는 최치원을 떠올리는 시가들도 종종 눈에 띈다. 최치원의 호는 고운(孤雲)과 해운(海雲)이니, 당나라 유학파인 신라의 천재였으나 6두품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절감하고 경주를 떠나 부산 해운대에 머물다 가야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고운 학사는 바로 시선이었기에천재에 높은 명성 만인에게 전해 오는데어젯밤 꿈속에 분명히 서로 만나 보았네.계림의 숲가 반월성 변두리에서.일찍이 해운대에 올라 사방을 조망하면서고운을 부르려다가 한번 웃음을 지었지.듣자 하니 그는 이미 청학 타고 떠났는데동문을 깊이 잠그고 돌아오지를 않는다네.-서거정, ‘꿈에 계림을 유람하다가 학사 최치원을 방문하다’(‘사가집’, 1488)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기억하며 산다는 것은 괴롭기도 하려니와 어려운 일이다. 어리석은 자들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처럼 여기며 죽음을 말하는 것 자체를 터부시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영생불멸까지는 아닐지라도 죽음을 깜박 잊고 살기에 그토록 치열하게 싸우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심을 다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한 어미 자식도 아롱이다롱이려니, 때로는 천년 월성의 천년 폐허 앞에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계림 숲 우거진 반월성은그야말로 옛날 왕성 터이지.천년 왕업 낙엽처럼 진 뒤화류가 한창 분분히 번성했지.그대 좋은 계절에 돌아가니농염한 미색이 눈길 빼앗으리.꽃구경하다 여가가 있거든귀찮더라도 자주 소식 전해주오.이행의 ‘임소인 영남으로 돌아가는 도사를 전송하다’에는 조선시대 경주의 또 다른 풍경이 등장한다. 이행은 조선 중기 연산군-중종 때의 문신으로, 사후 문집 ‘용재집’(1589)에 실린 이 시가는 관찰사와 함께 지방을 순력하고 규찰하는 임무를 담당하는 도사(都事)인 벗을 만났다 헤어지며 지은 것으로 보인다.기쁘게 보내는 환송이 아니라 서운해 보내는 전송이라 그랬을까, 중앙 관리에 비해 홀시되는 지방 관리로 떠나는 벗이 안쓰러워서였을까? 분명 이별 파티에 거나하게 취했을 터, 술김인지 홧김인지 화류며 미색이며 유학자의 시에는 좀처럼 등장하기 어려운 날것의 욕망이 쏟아진다.패망과 폐허의 끝에는 부패와 타락이 똬리를 트는 법! 조선시대 경주는 생뚱맞게도 화류항으로 유명했나 보다. 문득 주워듣기로 신라 귀족들의 묘역인 쪽샘 지구가 1960-70년대 요정 100여 곳이 성행하는 유흥가로 이름을 날렸다니, 그 또한 기이하고 유구한 역사랄까.문학 속에 남은 월성은 흰 재와 검은 그을음의 폐허뿐이다. 고려와 조선을 거치는 동안 신라는 까마득한 과거로 밀려났다.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개혁군주라기보다 보수주의자에 가까운 정조 임금이 ‘월성에 있는 신라 시조왕의 사당에 올리는 제문’(정조16, 1792)을 지어 바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집’(1814)에 실린 제문의 시가는 폐허의 송가(頌歌)요 그 나마의 위로다.동해의 모퉁이 양산의 언덕에 복숭아꽃과 박 잎의 이야기는 아득한 옛적의 제해였네.신인을 독생하여 육부의 진한에 사로국을 건국하니 왕호는 거서간이었네.육십일 년의 평생에 무성하게 거친 초목을 제거하니 수자리엔 야경꾼의 딱따기 소리가 없어 잠자리가 편안하고 들에는 뽕나무 가지가 잘 자라 의식이 풍족하였네.세대를 점치니 천년인지라 멀리 주 나라의 역년(曆年)에 이르니명활산과 금성에서 아직도 처음의 자취를 기억하겠네.아, 우리 열조에서 높이 보답하기에 허물이 없었으니사당에 위패를 봉안하고 왕릉에 비석을 세웠다네.돌아보건대 내가 광세(曠世)의 감회가 있어 문득 이날에제관을 보내어 정성을 드리게 하노니 멀리 잔을 드림이 있나이다.그러나 불 탄 자리에도 새로운 생명이 돋나니, 세월과 기억 속에 지워진 월성이 천년 왕성의 아름다운 위엄을 되찾는 날도 언젠가 오고 말리라.

2019-05-26

그 옛날 신라의 길을 찾아

경주에서 십여 년 동안 택시를 운전했다는 기사님도 처음 가보는 곳이라 했다.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찍고 지칫지칫 좁은 길을 달려갔다. 로드뷰에도 나오지 않는 진평왕릉은 시내를 벗어나 한적한 마을의 허허벌판에 있다. 겨울이라 더욱 그렇겠지만, 인터넷에 멋들어진 사진과 함께 소개된 산책지로 좋다는 말만 믿고 왔다가는 ‘뭥미?’ 할 것 같다.진기하고 보배로운 것도 너무 많으면 평범하고 대수로울 수 있다는 것을 경주 여행을 통해 새삼 깨닫는다. 그렇다고 진기함과 보배로움이 사라질 것은 아니지만, 귀히 여기며 간직하기가 쉽지 않아진다. 진흥왕릉과 진지왕릉으로 전해지는 무덤을 보고도 그랬지만, 진평왕릉도 기대보다 작고 초라해서 실망이라기보다 안타깝다.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무덤의 주인 3명이 ‘미실’이 색공을 바친 ‘황제’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정복군주인 24대 진흥왕, 황음하여 왕좌에서 쫓겨난 25대 진지왕, 그리고 신라의 국운을 펼친 것으로 평가받는 26대 진평왕은 각각이 특별한 이야기를 지닌 왕이다. 진평왕은 무엇보다 13세에 왕위에 올라 69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54년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월성의 주인이었다는 점이 이채롭다. 98세까지 살아서 79년을 재위한 고구려의 장수왕에는 비할 수 없으나, 53년을 재위한 백제의 고이왕과 조선의 영조에 비견할 만하다. 무엇보다 신라 천년의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왕이었고, 그 시간만큼 업적도 많다.“내제석궁(천주사)에 행차하였는데, 돌계단을 밟으니 세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이 좌우의 사람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 돌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어, 후세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도록 하라”했다.”‘삼국유사’에 나오는 진평왕의 일화는 키가 11척(약 3.5미터)이나 되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과 더불어 권력과 지배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의미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진평왕은 진흥왕의 손자지만 그의 아비는 임금이 되지 못하고 죽은 동륜태자다. ‘삼국사기’에 나와 있지 않은 동륜태자의 사인이 ‘화랑세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아버지 진흥왕의 후궁인 보명궁주와 몰래 정을 통하다가 보명궁에서 기르는 개에게 물려죽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개죽음이다. 이 대목에서 영조와 사도세자와 정조의 트라이앵글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거의 강박적으로 노력했던 것처럼, 진평왕은 삼촌인 진지왕이 폐위하며 행운으로 오른 왕위를 허투루 여기지 않는다.콤플렉스를 품은 이들은 소리 없이 맹렬하다. 진평왕은 26세가 되던 해에 남산성을 쌓고 이어서 명활산성을 고쳐 쌓았다. 서라벌에 대한 경계를 확실히 하는 한편 백제와 고구려에 대항해 한판 벌릴 준비를 한 것이다.진평왕의 시절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칠숙과 석품의 반란을 비롯한 내부의 반란들 또한 그를 위협했다. 하지만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기어이 버텨서 마침내 이긴 진평왕은 지혜로운 딸 선덕여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 무덤 속에 누웠다. 여기서 멀지 않은 낭산 기슭에 선덕여왕릉이 있으니, 바람결에라도 부녀의 정담을 흔연히 나눌 수 있을 테다. 부디 고단했던 삶을 모두 잊을 만큼, 평안하시기를.‘월성 뚝방길’이라는, 이름 하나에 홀렸다. ‘비담과 김유신의 일화로 유명한 명활산성에서 보문들판 속 고즈넉한 진평왕릉으로 이어지는 뚝방길’이라는 설명도 그럴 듯했다. 물론 ‘월성 뚝방길’이 경주시 월성동에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우리의 월성과 너무 멀어서 의아했다. 확인해 보니 ‘월성 뚝방길’이라는 이름이 무리했는지 명칭을 ‘숲머리 뚝방길’로 바꾼 것 같다. 명활산성에서 숲머리 남촌마을 신라 제26대 진평왕릉까지 약 2km 구간의 둘레길이다.이름이야 어찌 되었든 나선 김에 걷기로 했다. 전국 어디를 가도 일종의 트레킹 코스인 ‘둘레길’을 만날 수 있다. 제주 올레길이 여행자들을 불러 모으고 북한산 둘레길이 화제가 되면서 각 지자체에서 경쟁적으로 둘레길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지리산 둘레길, 서울 두드림길, 충남 아라메길, 전북 구불길 등이 등장했고, 제주 올레길의 성공에 영감을 얻은 일본에서 로열티를 주고 수입해 가져가 큐슈 올레길을 만들었다.근래에 들어서는 둘레길이 남발되면서 지역의 관광자원을 개발한다는 명분으로 토목공사를 벌인다는 비판도 받지만, 자동차로 휙 돌아보는 관광이 아닌 도보여행 코스가 생긴다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프랑스의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루통은 ‘걷기 예찬’에서 이렇게 주장한다.“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한다는 것이다.”“걷기는 사람의 마음을 가난하고 단순하게 하고 불필요한 군더더기들을 털어낸다.”“걷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모든 것과 다 손잡을 수 있는 마음으로 세상의 구불구불한 길을, 그리고 자기 자신의 내면의 길을 더듬어 간다.”이렇게 좋은 일을, 어찌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월성 뚝방길’, 혹은 ‘숲머리 뚝방길’은 지자체의 사업이 아니라 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정비했다고 한다. 그 사실이 나름의 의미를 갖긴 하지만 자원봉사자들의 청소와 전정 작업으로는 산책로 정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진평왕릉에서 명활산성까지 약 1킬로미터 정도까지는 그럭저럭 산책할 만한 길의 꼴을 갖추고 있지만, 나머지 1킬로미터는 생활쓰레기와 마구 자란 나뭇가지들을 헤쳐가야 한다. 아무리 길은 걸어가면서 만들어진다지만 앞선 사람도 뒤따를 사람도 보이지 않으니 이게 과연 길인가 싶다.어쨌거나 길 끝에는 명활산성이 있을 것이다. 자비마립간 18년(475)에 월성에서 옮겨와 소지마립간 10년(488)에 다시 월성으로 돌아갈 때까지, 약 13년 동안 왕이 거주했던 성이다. 월성의 다른 이름을 재성(在城)이라 하는 것은 왕이 머무르며 거주했다는 뜻이니, 명활산성도 잠시나마 재성으로서 왕성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명활산성을 언제 지었는지는 정확치 않다. ‘삼국사기’에 첫 등장이 실성이사금 4년(405)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인 것으로 미루어 그 이전에 축성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명활성이 월성의 동쪽에 있으며, 돌로 쌓았고 둘레가 7,818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왕이 다급히 옮겨가야 했던 성, 머무르며 지켜야만 했던 성, 명활산성은 여전히 복원 공사가 한창이다.‘뚝방길’이 끝나고 보문단지로 건너가기 전에 오른편에 흰 돌무더기가 나타난다. 동절기 작업 중지 기간이라 빈 성에 운 좋게 들어가 보았다.입구 쪽 성벽을 작업하는 중이라 안쪽에 동네 주민들이 텃밭을 일군 흔적까지 고스란하다. 원래 명활산성의 축성 방식이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하는 신라 초기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더니, 과연 성벽에는 크기와 모양이 다른 돌들이 서로 맞물려 쌓여있다.아래서는 정확한 성의 모양새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산을 타고 올라가 임시로 터놓은 산길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명활산성의 쓰임새가 무엇인지 확연해진다. 산 아래 성 바깥에서 보는 모습과 산 위 성안에서 보는 모습이 확연히 다르다. 누군가의 공격에 방어하고, 또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해 지어진 성이 분명하다.자비마립간이 월성을 비우면서까지 명활산성으로 몸을 옮긴 것은 백제 개로왕이 아차성에서 고구려 장수왕에게 살해된 사건과 관련된다. 이후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하고, 고구려는 죽령과 동해안으로 더욱 바싹 위협해온다.명활산성은 신문왕의 ‘호국행차길’과 이어지고, 호국행차길은 다시 동해로 이어진다. 문무대왕이 죽어 용이 되어서라도 지키고 싶었던 길, 그곳은 왜구의 침범 루트이기도 했다. 땅을 지키고, 왕국을 지키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령을 지키기 위해 이 가파른 성이 지어진 게다. 치열한 전투 속에 수성의 깃발을 놓치지 않고 천년을 견딘 게다. 생각이 그에 이르자 마음이 아릿하다. 살아가는 것이 살아있는 것들의 본능일지니!명활산성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비담과 김유신이다. 선덕여왕 14년(645) 상대등으로 승진한 비담은 2년 후(647) 정월에 염종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더니 반란의 명분도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그런 여자 임금한테 벼슬을 받을 때는 언제고!).선덕여왕은 월성을 지키며 방어하고, 비담의 반란군은 명활성에 주둔해 대치한다. 밀고 밀리는 공격과 방어가 10일 동안 이어지다가, 한밤중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비담이 반란군에게 말했다. “내가 듣기로 별이 떨어진 아래에는 반드시 피 흘림이 있다고 하니, 이는 여자 임금이 패할 징조로다!”비담의 선동에 반란군은 사기가 충천해 환호를 지르니 그 소리가 천지에 진동했다. 선덕여왕이 공포를 느끼며 괴로워할 때 김유신이 상황을 역전시킬 묘안을 냈다.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여 연에 실어 날려 보내니 마치 별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다음날 사람들이 길가에 서서 이상한 이야기를 수군거린다. 어젯밤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김유신이 여론 조작을 위해 풀어놓은 사람들이었다. 김유신은 흰 말을 잡아 별이 떨어진 곳에서 신에게 제사를 바치며 빈다.“…하늘의 위엄으로 사람이 하려는 것에 따라 선한 이를 옳게 여기고 악한 이를 미워하시어 신(神)으로서 잘못을 하지 마시옵소서!”충격과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었던지, 선덕여왕은 반란이 진압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그로부터 아흐레가 채 지나지 않아 반란 괴수 비담이 잡혀 목이 잘린다.비담의 난에 대해서는 상대등의 왕위추대운동이라는 설, 화백회의가 국왕에게 퇴위 요구를 하자 김유신을 위시한 선덕여왕측이 일으켰다는 설, 동륜태자 계열이 진지왕계에 대한 반대운동이라는 설 등등 숱한 추측이 있다.그 후로 세월이 흘러 월성은 사라지고 명활산성은 돌무더기로 남았다. 선덕여왕의 고통과 비담의 역심, 그리고 김유신의 충심이 어떤 빛깔이었는지도 시간 속에 흩어진 비밀이 되었다. 다만 힘껏 싸우고 힘껏 살았으니, 오로지 차곡차곡 쌓인 돌들만이 진실을 기억할 것이다. 사람이 기껏 할 수 있는 일은, 애당초 그리 많지 않은지도 모른다.

2019-05-19

월성, 세월을 따라 흐르다

명리학에서 말하는 무토(戊土) 일간이라 그런지 땅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낯선 동네를 지날 때면 주거지와 상가의 앉음새를 유심히 보고 인터넷 부동산사이트에서 시세도 살펴본다.애석하게도, 부동산에 관심이 많은 것과 투자 능력이 있는 건 다르다. 하지만 관심을 가지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그래서 집값이 높은 ‘좋은 동네’의 특징 정도는 찾아낼 수 있다.근대 이후, 특히 근래에 들어서는 학군이나 인프라(이를테면 지하철역과 가까운 ‘역세권’이라든가, 공원과 가까운 ‘숲세권’ 같은 조건) 등 자연 외적 조건이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도시 생활에 적용되는 이런 현대적 요소보다, 학교도 지하철역도 공원도 없었을 때 옛사람들이 정한 삶터에 더 눈길이 간다.오래 된 동네는 사람들이 살기 좋은 자연 환경을 갖고 있다. 물과 볕이 좋고 바람이 잘 통한다. 산세가 안정적이고 주변의 마을과 잘 연결된다. ‘양택(陽宅)을 잘하면 당대가 성하고 음택(陰宅)을 잘하면 만대가 성한다’는 옛말이 있다. 살아있는 사람은 잘 살게끔, 죽은 사람은 잘 쉬게끔 만들어주는 터가 좋은 곳이다. 그래서 집터 위에 집터가 있고 무덤자리에 무덤이 들어서는 게 관습이었다. 왕궁 터인 월성에 켜켜이 왕조의 터전이 자리 잡은 것도 같은 이치다.산업 구조가 재편되어 농촌이 무너지고 도시집중화와 개발 바람이 불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무덤을 밀고 아파트를 짓고, 왕궁으로 추정되는 자리에 공장을 지었다. 삶과 죽음이, 성과 속이 뒤엉켰다. 그곳에는 오직 하나의 힘과 그가 세운 질서가 존재하나니, 돈, 돈뿐이다.형산강을 따라 경주로 들어오면서 경주의 물길이 궁금해졌다. 선사유적이 있는 암사동이 한강 유역에 자리한 것처럼 물이야말로 사람살이의 기본 중 기본 조건이다. 물이 없으면 사람은 살 수 없다. 먹고 씻고 농업용수로 쓰기 위해 고대 도시들은 자연스럽게 큰 강을 끼고 형성되었다.서라벌 또한 18만 호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살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했을 테고, 천년의 수도로 존재할 만큼 충분한 수량이 보장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가며 살펴본 경주 도심의 하천은, 겨울이라는 계절적 조건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빈약하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만 검색해 보아도 경주의 물 부족을 염려하는 기사들이 쏟아진다.일설에 의하면 덕동댐과 보문호가 생기면서부터 이런 현상이 시작됐다고 한다. 주요 하천의 흐름을 막는 댐이 상류에 2곳이나 생기니 경주 도심의 하천이 건천이나 다름없어졌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북천에 퇴적물이 쌓이면서 흐르는 물이 부족해졌다고 한다.북천, 남천, 서천 등이 합류해 북쪽의 형산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경주는 결코 물이 부족한 도시가 아니었다. 큰비가 내리면 하류가 범람하는 일이 빈번했다.‘삼국사기’에는 아달라 5년(158), 알천(북천)의 물이 넘쳐 금성의 북문이 저절로 무너졌다는 기록이 있다. 유례이사금 7년(290)에는 여름에 큰 물난리가 나서 월성이 무너지기까지 했다.이외에도 ‘홍수’에 대한 기록은 차고 넘친다. 물난리에 민가가 떠내려가고 백성들이 표류하니 피해를 줄이기 위한 갖가지 방책이 동원되었다. 7세기 진흥왕 이후 천주사, 봉성사, 인용사, 분황사, 임천사, 동천사 등의 사찰을 천변에 건축한 것도 부처님의 염력으로(혹은 제방의 성격으로) 수해를 막아보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근대까지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비보숲은 풍수적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하는 숲이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경상도 71개 군현 가운데 비보숲이 가장 많은 곳이 현재의 경주 시내였다. 그리고 그 15곳 중 7곳이 수해방지용으로 북천 주위에 집중되어 있었다.당연히 생활용수도 풍부했다. 지금까지 경주 지역에서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우물은 230여기에 이르는데, 그중 신라 우물은 60여기 정도라고 한다. 애당초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가 ‘나정(蘿井)’에서 탄생했고, 혁거세의 부인 알영 또한 ‘알영정’, 즉 우물에서 태어났다. 그만큼 우물은 신성한 곳이었고 왕조 대대로 제사를 바치는 장소였다.월성 안에 보존된 우물은 숭신전지 부근의 것이 유일한데, 연꽃과 안상(眼象:코끼리 눈 모양)이 새겨진 사각 우물이다.(월성 우물은 수풀 속에 있어서 일부러 찾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나 또한 직접 보지 못하고 자료로 확인했다) 이와는 별개로 동궁과 월지의 동쪽 우물에서는 4구의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제례의 인신공양이라기보다 고려시대에 신라와 관련한 사람이 희생(어쩌면 살해)되어 매장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물 소비가 많았을 월성은 물론이거니와 주거지의 집집마다 깊은 우물이 발견되는 것은 서라벌에 물이 풍부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오랜 세월 물의 도시였다가 이제는 물 부족 도시가 되어버린 경주, 그 안타까운 목마름으로 월성의 물길을 더듬어본다.월성의 해자는 말라있다. 아무리 수로(물길) 형태의 여느 평지성 해자와 달리 수혈(웅덩이)이 배치된 것이라 해도 웅덩이 역시 흔적뿐이다. 북천, 남천, 서천의 세 물줄기를 끌어안은 월성을 직접적으로 휘감아 도는 것은 남천이다. 토함산에서 발원해 불국사와 월성을 지나 남산 밑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본래는 월성에서 형산강까지 물길이 3㎞, 폭이 70m였다는데…. 지금은 하천이라기에 심히 민망한 개천이다.천소영 교수가 쓴 ‘물의 전설(2000, 창해)’에서는 남천을 ‘사랑이 흐르던 시내’라고 표현했다. 물의 흐름이 급해 자갈이 많은 북천에 비해 흐름이 완만해 모래가 많으니, 금빛 모래가 반짝이던 남천을 건너며 수많은 사랑의 이야기들이 싹텄으리라는 것이다.“궁궐 남쪽의 문천(蚊川) 위에 월정교(月淨橋)와 춘양교(春陽橋) 두 다리를 놓았다.”‘삼국사기’ 경덕왕 19년 기사에 등장하는 두 다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속칭 느릅나무다리(楡橋)라고도 불리는 월정교는 복원되어 2018년 하반기부터 개방되었다. 복원에 대한 논란과 비판만 숱하게 듣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월정교를 건넜다. 일단 눈으로 보는 모습은 상당히 낯설다. 다리 양쪽의 문루와 지붕으로 이어진 회랑 등이 지금껏 보던(혹은 상상하던) 다리들과 사뭇 다르다.일일이 설명하기엔 지면이 좁지만, 월성과 황룡사 등 발굴조사를 거쳐 언젠가 복원을 논의할 유적들이 모두 거칠 수밖에 없는 논란이다. 그림이나 도면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상상으로 ‘복원’을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논란의 원인을 제공하는 셈이다.차라리 눈을 감고 그려본다. 태종무열왕 때 원효대사가 이 월정교를 건너다가 물에 빠져서 다리 건너에 있던 요석궁에 젖은 옷을 말리러 간다. 이두를 만든 신라의 천재 설총이 태어나는 전설이다. ‘찬기파랑가’를 지은 충담사도 남산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월정교 부근에서 경덕왕을 만나 왕의 요청으로 ‘안민가’를 짓는다. 형체가 사라지면 이야기가 도리어 선명해진다.춘양교는 다른 이름이 많은데 일정교, 효불효교, 칠성교, 칠자교, 어미다리 등으로도 불렸다. 춘양교를 찾으려고 월성 동쪽 기슭부터 경주박물관 사이를 헤매고 다녔다. 텃밭과 쓰레기장이 뒤엉킨 가운데 박물관 맞은편 동네 골목에서 ‘춘양교지’ 표석을 발견했다. 지금의 집터가 그때도 집터였다면 춘양교는 백성들이 자주 이용하는 다리였던 듯, 민간의 야릇한 전설이 깃들어있다.남천 건넛마을에 홀어머니와 일곱 아들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부터 어머니가 밤마다 몰래 나가 새벽에 돌아왔는데, 알고 보니 애인을 만나기 위해 남천을 건너갔다 오는 것이었다. 일곱 아들은 추운 겨울 차가운 강을 건너는 어머니가 안타까워 편히 다녀오시라고 다리를 놓았다. 어머니를 위한 일이니 효도겠으나 죽은 아비에 대한 불효인 셈이니, 다리의 이름은 ‘효불효교’였다.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이야기다. 전설에는 아들들이 놓은 다리를 보고 어머니가 잘못을 뉘우쳤다는 사족이 따라붙긴 하지만(당사자가 아닌 오지랖 엄숙주의자들이 붙인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아들들은 어머니의 부도덕을 탓하기보다 시린 발을 걱정한다. 결국 도덕과 윤리를 뛰어넘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일지니, 수풀더미 속에 버려진 춘양교가 화려한 어느 다리보다 진한 여운을 남긴다.금장대에 서니 물의 도시 서라벌, 일렁거리고 출렁였던 신라가 비로소 느껴진다. 형산강의 절경 금장대에서는 건너편 경주 시내로 흐르는 북천이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진다. 신라 때 금장사가 있던 금장대는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의 배경이자 석장동 암각화가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금장대 옆으로 돌아 들어가는 길에는 선사시대 부족민들이 그린 삼각형과 원형 등 기기묘묘한 문양을 만져볼 수도 있다(훼손될까 봐 만지지는 않았다. 사라져가는 ‘울주 반구대 암각화’를 생각하니 보호 장치가 없어 좀 불안했다).강은 바다와 또 다른 느낌을 준다. 바닷물이 먹을 수 없는 물이라면 강물은 먹는 물이라서 그런지 훨씬 친숙하다. 아들이 울주에서 발원해 영일만으로 흘러나가는 형산강은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강이라고 알려준다. 우리나라의 강이 대부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데 비해 특이한지라, 풍수지리의 신봉자들은 후발주자인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까닭이 북으로 흐르는 형산강의 기운 덕택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신라시대 알천으로도 불렸던 북천은 선덕왕 때 왕위 계승 서열 1위였던 김주원이 신라의 왕 대신 나의 40대조 할아버지가 된 빌미를 제공한 하천이기도 하다. 선덕왕이 승하하고 왕위 결정을 위한 화백회의가 열릴 무렵 갑자기 내린 비로 순식간에 북천의 물이 불어 다리가 떠내려갔다. 북천 건너편에 살던 김주원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니 왕의 임종을 지킨 김경신이 원성왕에 올랐다.‘삼국사기’에서는 혹자(아마도 김부식의 생각이겠지만)가 말하길, “임금은 큰 자리라 본디 사람이 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폭우가 내린 것은 하늘이 김주원을 세우고 싶지 않음이 아닐까?”라고 했단다.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외가인 명주로 왔으니 후손인 나도 태어난 게다. 옛날 옛적 조상의 권력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우스울지나, 그보다는 불어올라 넘실대는 북천을 바라보며 손아귀에 들어온 파랑새를 날려 보내는 김주원 할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한다.그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더한 욕심을 부렸다면 돌아오는 것은 피바람뿐이었을 것이다(물론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과 손자 김범문은 미련을 떨치지 못했던지 후일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한다),흐르는 물소리를 듣는다. ‘물의 뜻’이 곧 ‘하늘의 뜻’이라는 소박하고도 염결한 가르침에 귀를 기울인다.

2019-05-12

개의 이빨처럼 맞물려 있던 시절의 ‘신라·고구려·백제 왕성들’

도무지 불혹(不惑)할 것 같지 않았던 미혹(迷惑)의 마흔에 문득 “지금껏 피하고 꺼리던 일을 해보자”며 백두대간 종주에 도전했다. 청계산과 관악산에 둘러싸여 이십 년을 살고도 단 한 번 스스로 산행을 결심해 본 적 없는 ‘평지형 인간’ 주제에 첫걸음이 백두대간이라니! 첫 번째 산행 길에 일찌감치 깨달았다.“이건, 미친 짓이다!”내 발등을 내가 찍었다는 후회를 수십 수백 번 곱씹으면서, 2년 동안 지리산 천왕봉부터 진부령까지의 백두대간 남한 구간을 완주하고야 말았다. 지금 돌이켜 봐도 참으로 미련하고 무모한 짓이었을 뿐더러 일생에 다시 못할 뿌듯하고 용감한 일이었다.그때 얻은 족저근막염과 무릎 통증으로 지금은 험산이나 오랜 시간 산행을 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더 이상은 오르기 전부터 두려움에 떨지 않는다. 산은 글자부터 속성까지 삶을 닮았다. 결국, 삶은 두려워하지 않는 자의 것이다.2차 산행은 전북 남원 운봉읍에서 시작해 통안재에서 사치재를 넘어 복성이재에서 마루금이 끝나는 총 16㎞의 코스였다. 재로 이어지는 구간인지라 산보다는 완만했지만 그때만 해도 울트라 왕초보 산객이었던 내게 힘들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날 사치재에서 북진하다 781m봉을 지나 복성이재로 이어진 길에서 이끼 낀 커다란 돌무더기로 남아있는 아막산성을 만났다. 아막산성은 백제와 신라가 주도권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다.백제 무왕은 즉위 3년(602·진평왕 24년)에 신라의 아막산성을 공격했는데, 그 전투에서 백제군이 평상시에 유지하는 전체 병력 6만 중 3분의 2에 달하는 4만을 상실하는 대패를 당했다고 한다. 승리한 신라군 역시 귀산과 추항이라는 장수를 잃었다. 잠시 스틱을 내려놓고 장갑과 무릎 보호대를 벗은 뒤 석벽에 기대어 쉬노라니 당시 그 무섭다는 중2였던 아들아이와 친구들이 엉두덜거렸다.“그냥 산만 타도 이렇게 힘든데, 어쩌자고 여기까지 기어 올라와서 싸움질을 한단 말이야?”아무래도 4만이 전사할 정도의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엔 비좁고 가파르다. 해발 680m 지점에 2m 이상의 성벽을 쌓으려면 고생이 만만찮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인들은 필사적으로 성을 쌓고 목숨으로 고개를 지켰다.이때의 정세를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삼국사기’에 나오는 견아(犬牙), 개의 이빨이라는 뜻이다.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가 ‘개 이빨처럼 서로 맞물려 있던’ 시절, 그 돌무더기 고개가 바로 피가 흐르고 불꽃이 솟는 승리와 패배의 격전지였던 것이다.실로 고대사는 먼 하늘의 달무리처럼 흐리마리하다. 남아있는 금석문은 많지 않고 문헌은 혼돈스러우며 유물유적은 외세에 약탈당했거나 전란에 소실되었다. 게다가 고구려의 땅인 북쪽과 신라와 백제의 땅인 남쪽이 분단되어 학문적 교류마저 단절된 채 세월을 흘려보냈다.그나마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현대 장비를 이용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조금씩 비밀의 실마리가 풀리고 있어 다행이다.여전히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지만 이런 수수께끼라면 얼마든지 즐겁다. 좀 더 호기심과 인내심을 발휘해야 마땅하다.‘삼국시대 고고학개론1-도성과 토목 편’(대한문화재연구원·2014)을 살펴보면 삼국의 도성 조영이 각 나라의 흥망을 좌우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왕도 서라벌은 건국부터 패망까지 전 시기를, 왕성 월성은 101년부터 935년까지 834년 동안 50대의 왕을 거치며 건재했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의 사정은 신라와 달랐다.고구려는 3번에 걸쳐 도성을 옮겼다. 환인 지역 졸본에서 압록강 가 국내성으로, 그리고 다시 대동강 유역 평양으로 천도했다(평양에서도 처음에는 시가지 동북쪽에 머물다가 586년 현재 평양 시가지에 자리 잡았다). 백제는 크게 한성에서 웅진(공주)로, 웅진에서 사비(부여)로 이동했다. 한성에서도 처음에 한강 이북 하북위례성에 있다가 온조왕 때 한강이남 하남위례성으로 옮겼고, 근초고왕 때 한산(漢山=한성)으로 이도했다고 추정된다.구글(Goole) 이미지에서 ‘우뉘산(Wun Mountain)’을 검색하면 가히 신비롭다 할 만한 풍경과 만날 수 있다. 해발 8백여m의 산 정상에 1백m가 넘는 수직 절벽이 깎아지른 듯 솟구쳤고, 그 위에 거짓말처럼 성터가 있다. 바로 고구려의 첫 번째 왕성으로 비정되는 오녀산성이다.고려 후기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전집’ ‘동명왕편’에 “7월에 검은 구름이 골령에 일어나서 사람들이 그 산은 보지 못하고 오직 수천 명 사람의 소리가 토목 공사를 하는 것같이 들렸다. 왕이, 하늘이 나를 위하여 성을 쌓는 것이다, 하였다. 7일 만에 운무가 걷히니 성곽과 궁실 누대가 저절로 이루어졌다. 왕이 황천께 절하여 감사하고 나아가 살았다.”는 대목이 절로 떠오른다.고구려 시조 주몽이 건국 직후 골령에 성곽과 궁실을 조영했다는 사실은 ‘광개토대왕비’를 통해서도 확인되는데, 과연 하늘의 도움을 받는 영웅이 정치적 권위를 과시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웅장한 풍경이다.하지만 중국이 관광지로 조성해 개방한 오녀산성 내부를 들여다보면 일상적으로 거주하기에는 쉽지 않은 조건임을 확인할 수 있다.차마가 다닐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십팔판은 938m의 끝없는 돌계단으로, 정상까지 열여덟 굽이를 건너야하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산상(골령) 성곽인 오녀산성을 의례 공간이나 군사방어성으로, 평상시 거주한 홀본(졸본)은 오녀산성 바로 동쪽의 혼강 연안에 위치했다고 본다(여호규). 다만 이 지역은 환인댐 수몰지구로 물속에 잠겨 있어 유물유적을 확인하기 어렵다.고구려의 도성은 이후 국내성과 평양으로 천도하고도 졸본에서처럼 이중구조를 보인다. 평상시와 비상시가 분리된 구조는 결국 전쟁에 대비한 것이다. 고구려는 삼국 중에서도 가장 많은 전투를 치른 나라다. 북으로 부여, 거란, 전연, 북위, 수, 당 등의 대륙 세력들과 갈등하면서 수도가 국내성에서 평양까지 남진했으며 이후 백제, 신라와 맞섰다. 전쟁 같은 삶, 삶의 전쟁. 고구려의 수도가 여러 번 바뀐 데에는 절박한 대내외적 요구가 있었다.백제도 마찬가지였다. 한성 백제의 도성은 평상시의 풍납토성(북성)과 비상시의 몽촌토성(남성)이 정궁-별궁 양궁성제로 운영되고, 인근에 왕릉구역(석촌동-가락동고분군)이 위치하며 그 외곽에 일반 취락(하남미사동유적, 서울암사동유적 등), 산성 등이 분포하는 양상이었을 것이라고 본다(김낙중). 고구려의 한성 함락으로 백제는 갑작스럽게 웅진으로 천도하고, 웅진기 도성도 왕궁 위치, 축조 시기, 나성의 존재 여부, 도성 내부 등등이 논란 중이지만 일단 웅진성은 현재의 공산성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구려에게 밀리고 신라에게 치이며 백제는 필사의 발버둥을 한다. 백제의 마지막 도성인 부여 사비성은 이런 절박함을 드러낸다.사비도성은 부소산성과 이곳에서 연결되는 나성으로 둘러싸여 있다. 즉 도성을 두르는 나성과 청마산성 등의 외곽 방어시설이 사방에 포진된 형태다. 경주에는 나성이 없다. 대신 사방에 산성이 배치되어 있어 도성을 방비하는 방어시설의 기능을 한다.부소산성의 내부 시설은 조사가 미흡하고 나성 또한 마찬가지다. 부소산성은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22세기를 위해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되었고 낙화암의 일출 또한 그토록 장관이라지만, 낙화암의 본래 이름이 떨어질 타의 타사암(墮死巖)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스산한 기분이 든다. 부여 또한 더 많은 이야기가 묻혀 있는 땅이다.고구려와 백제의 도읍지 변천과 도성의 형태를 살펴보노라니 월성의 존재가 더욱 유의미하다. 신라는 삼국 가운데 유일하게 천도(遷都)가 없었던 나라다. 후발 주자로 척박한 지역에 터를 잡았지만 먼저 건국한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외부 세력과의 갈등이 상대적으로 적었다.고구려의 고국원왕이나 보장왕, 백제의 개로왕과 책계왕과 침류왕과 성왕처럼 전쟁터에서 전사한 왕도 없다. 정복전쟁의 격전장에서 사령관과 근거지를 잃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승기를 잡을 조건이 충분했다.‘삼국사기’에는 689년 신문왕이 “도읍을 달구벌(대구)로 옮기고자 하였으나 실현하지 못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하지만 그것은 달구벌의 새로운 세력을 통해 서라벌의 진골 귀족 세력을 견제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이지 외부의 압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도읍을 옮기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일인가? 현재도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신도시 건설만 생각해 봐도 후보지가 결정되면 토지 수용부터 인프라 조성까지 쉬운 일이 하나도 없다. 기득권 세력의 저항은 물론이거니와 전부터 살던 주민들의 반발과 강제 이주에 따른 갈등도 만만찮다. 낯선 곳에 적응하고 뿌리를 내리기까지의 스트레스와 시행착오는 또 어떤가?신라는 이런 과정에서 소모되는 에너지가 없었다. 그래서 에너지를 비축해 또 다른 곳에 쓸 수 있었다. 월성은 5세기 후반 성벽 축성한 뒤 삼한 통합을 기점으로 궁궐을 대대적으로 개보수와 궁역을 확장한다. 왕궁을 중심으로 왕경은 점점 넓어진다. 도로가 정비되고 재개발과 신축이 차근차근 진행된다. 서라벌이 계획도시로 조성된 것은 6세기 중엽 진흥왕 때부터이며, 신라 도성이 가장 확장된 시기는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홍보식).‘개의 이빨’의 시기를 지나며 서라벌을 중심으로 외곽으로 확장하는 방어체계를 구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영토 확장에 따라 방어체계는 여러 겹으로 확대되었고, 성곽의 경우 점차 규모가 커졌으며, 하천이 교차하는 핵심 거점에는 성벽 규모가 큰 성을 구축했다(조효식).새로운 도시의 건설은 인구 증가와 토목 기술 발달의 증거일 뿐더러 왕권강화를 위한 정치적 행위이기도 했다. 천년 도읍 서라벌과 천년 왕성 월성은 신라의 터전이고 국력이었으며, 신라 그 자체였다. 깊은 강은 멀리, 그리고 오래 흐른다.

2019-04-28

월성 에밀레종소리와 대왕암 피리소리 더듬으며 그 길을 거닐다

반짝이는 것들이 모두 보물은 아니다. 그러나 보물, 진정 드물고 귀한 가치를 지닌 보배로운 것은 기어이 반짝이게 마련이다. 세월의 먼지를 들쓰고 땅속 깊이 묻혀도 훼손되지 않는다. 훼손될 수 없다.(신문)왕이 행차에서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하였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는 개며,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이를 만파식적(萬波息笛)으로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삼국유사’ 기이 편에는 신라의 보물을 보관한 월성의 보물창고가 나온다. 이름 하여 천존고, 하늘에서 내린 신물(神物)을 보관하는 곳이다. 백률사 조에는 신문왕이 신적을 얻어 현금(玄琴)과 함께 내고(內庫)에 간직해두었는데, 효소왕 때 부례랑이 도적들에게 붙잡혀가자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를 덮으면서 창고 안에 있던 거문고와 피리 두 보물이 없어졌다고 했다.일단 천존고와 내고는 월성의 보물창고로 같은 곳을 지칭하는 듯하다. 부례랑 혹은 실례랑이라 불린 국선은 부모가 백률사에서 기도를 바친 덕분에 보물과 함께 돌아와 재상에 해당하는 대각간이 된다. 만파식적은 다시금 기이한 보물로 추앙되어 만만파파식적이라는 이름을 얻는다(693).이 피리가 백 년 조금 못 미처 원성왕 때(786) 다시 등장한다. 아버지 김효양에게서 만파식적을 전해 받은 원성왕이 보물을 빌려달라고 조르는 일본 왕의 요청을 물리치고 만파식적을 내황전(內黃殿)에 보관한다. 내황전이 월성에 있던 천존고와 내고와 같은 곳인지 새로운 보물창고인지는 알 수 없다. 어쩌다가 김효양이 대대로 만파식적을 물려받아 간직하고 있었는지도 확실치 않다.김부식은 ‘삼국사기’ 중에서도 음악 편에 ‘만파식 설화에 대한 고기 기록’을 썼다.‘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신문왕 때 동해 가운데 홀연히 한 작은 산이 나타났는데, 형상이 거북 머리와 같았다. 그 위에 한 줄기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갈라져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베어다가 적(笛)을 만들어, 이름을 만파식이라고 하였다” 한다. 비록 이런 말이 있으나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유학자의 붓은 냉정하다.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단다. 냉소로 입아귀를 비트는 김부식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어느 편도 쉽게 들고 싶지 않다. 과연 역사는 이성과 감성, 냉정과 열정, 사실과 신비가 만나는 지점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첫 번째는 황룡사지, 그 다음은 감은사지! 꼭 가보세요!”개인적으로 황룡사지에 이어 ‘강추’하는 명소는 감은사지다. 그 두 개만 보고와도 경주 여행은 만족스러우리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추천한다. 황룡사지와 감은사지에서 느끼는 감흥은 좀 다르다.황룡사지가 시(詩)적이라면 감은사지는 산문에 더 어울린다. 감은사지의 동과 서 삼층석탑 앞에 섰을 때,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서 고흐의 그림 ‘오베르 교회’를 보았을 때와 같은 감흥을 느꼈다. 그 푸른 빛, 코발트블루의 어두운 하늘과 교회의 창은 어느 도록에서도 보지 못한 빛깔이었다. 초록과 노랑이 뒤엉켜 흐르는 듯한 길, 그것도 사진이나 인쇄물로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다. 미술관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 경비원이 등을 떠밀 때까지 나는 ‘오베르 교회’ 앞에서 떠날 수 없었다.세상이 좋아서 안방에 앉아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자기 발로 찾아가서도 도저히 볼 수 없는 것들까지 볼 수가 있다. 때로 영상이나 모사가 실제보다 세세하고 생생하다. 그러다보니 눈이 높아진 건지 본디 그다지 대단한 게 없었던 건지, 정작 실물 앞에 서면 시시하고 맹맹하기 십상이다.그런데 ‘오베르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감은사지 삼층석탑’이 그랬다. 숨이 턱 막히고 한동안 말을 잃었다. 오직 내 발로 다가가 그 앞에 서야 한다. 천년 전과 다를 바 없을 바람과 햇살을 맞으며 목을 꺾고 쳐다봐야 한다. 눈부시다. 아무리 좋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도 이처럼 압도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균형감으로 아름다운 삼층탑 뒤로 감은사 터가 자리한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구들 구조를 가진 금당 앞에 털끝이 쭈뼛 선다. 이것은 사람의 집과 길이 아니다. 신성한 용(龍), 용이 된 왕을 위해 뚫어놓은 것이다.이번에 월성과 신라 역사를 공부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인물이 문무대왕과 신문왕이다. 그들은 격동기의 영웅이자 신라 중대(中代:29대 태종 무열왕∼36대 혜공왕·8대 127년간)의 핵심이다. 특히 문무왕의 일대기를 살폈을 때는 울컥 감정이 치밀었다. 영웅에 대한 존숭이라기보다 인간에 대한 연민, 그리고 요즘 식으로 표현해 ‘리스펙트(respect)’의 심정이었다.문무왕 김법민은 김춘추와 김문희의 아들이다. 김춘추는 진골로 처음 왕위에 오른 태종무열왕이고 김문희는 김유신의 둘째 동생으로 언니에게서 ‘오줌 꿈’을 샀던 바로 그 여랑이다. 법민은 아버지와 외삼촌과 함께 통일전쟁에 뛰어든다. 그의 평생은 치열한 전투, 또 전투였다. 왕위에 오른 후로도 백제의 부흥운동을 진압하고,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으며, 고구려 무너진 뒤 대당독립전쟁을 벌여 한반도에 욕심을 드러내는 당나라를 물리쳤다.더군다나 문무왕의 시기에 중국을 지배한 것은 피의 여제, 측천무후였다. 황제가 되기 위해 자신의 아들까지 죽였던 측천무후의 공포정치에 대응해 문무왕은 두뇌게임으로 교묘한 외교전을 벌인다. 마키아벨리의 말처럼 “덫을 식별하기 위해 여우가, 늑대를 물리치기 위해 사자가” 된 것이다.그토록 고단한 일생을 보내고도 그는 마지막까지 ‘상징’으로 남기로 한다. 죽어서도 동해의 용으로 신라를 지키겠다며 수중 장례를 치른다. ‘대왕암’으로 불리는 문무왕릉의 구조는 감은사 법당의 구조와 유사할 것으로 짐작된다.1940년에 미술사학자 고유섭이 펴낸 ‘고려시보’에 실린 ‘경주기행의 일절’을 다시금 떠올린다.“경주에 가거든 문무왕의 위적을 찾으라. 구경거리의 경주로 쏘다니지 말고 문무왕의 정신을 기려보아라. 태종 무열왕의 위업과 김유신의 훈공이 크지 않음이 아니나 이것은 문헌에서도 우리가 가질 수 있지만, 문무왕의 위대한 정신이야말로 경주의 위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니, 경주에 가거들랑 모름지기 이 문무왕의 유적을 찾으라.”문무왕과 그의 유훈을 받잡은 신문왕의 발자취를 좇아 ‘왕의 길’을 걷기로 했다. 아버지를 동해에 수장한 아들은 절을 짓고 누대를 쌓는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행차해 아버지를 추모하는데, 용이 바친 흑옥대를 얻고 만파식적을 만들 대나무를 구한 것도 이 길에서였다. 2012년 경주시가 함월산 국립공원 내에 개설한 길의 정식 명칭은 ‘신문왕 호국행차길’이다. 모차골 입구에서 기림사까지 약 5.9㎞에 이르는 길인데, 문제는 자동차를 가지고 갈 경우 돌아오는 차편이 없어 고스란히 왕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은 수렛재까지 가보려고 나섰는데 초입에서 100m쯤 지난 후부터 여의치 않다. 지난 태풍의 후유인 듯 돌과 나무가 뒤엉켜 길을 지우고 있다. 수북이 쌓인 낙엽을 헤치고 걷자니 더욱 힘겹다. 모차(마차)골, 수렛재, 말구부리 등의 지명을 통해 신문왕이 수레를 타고 지났던 길임은 분명한데, 지금은 사람이라도 일렬로 지나야 한다. 산행을 포기하고 돌아서 기림사를 향했다. 반대편의 형편은 낫지 않을까 했던 건데 결과적으로 아주 잘한 선택이었다.신문왕은 감은사에서 자고, 기림사 서쪽 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는다. 월성을 지키고 있던 태자(효소왕)가 말을 달려와서 신문왕이 가져온 흑옥대를 살펴보더니 “이 옥대의 여러 쪽들이 모두 진짜 용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한쪽을 떼어 시냇물에 던지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못이 되었다. 그래서 그 못의 이름이 용연(龍淵)이다……기림사는 단청 없는 대적광전을 보물로 품은 아름다운 절이다. 기림사 쪽에서 반대로 호국행차길을 오르니 오래지 않아 용연이 나타난다. 포기하고 지나갔으면 후회할 뻔했다. 한겨울에도 시원한 물줄기를 쏟아내는 폭포와 맑은 연못, 그리고 묘하게 쪼개진 듯한 바윗돌이 신비롭다. 던져 넣은 허리띠가 용이 되어 승천했다고 해도 순진한, 혹은 신심 깊은 사람들은 믿을 만하다.기실 이 길은 문무왕의 장례 행렬이 지난 길이었고, 신문왕이 부왕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갔던 길이었으며, 수백 년 동안 신라를 괴롭혀온 왜구의 침범 루트이기도 했다. 그러니 자주 행차해 걸어주고 정비해야 마땅했을 것이다. 더하여 아버지의 분투를 가장 곁에서 지켜보았을 아들이, 왕관을 쓰기 전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고독을 제 것으로 곱씹으며 걸었을 길이기도 하다.감은사와 대왕암이 함께 보이는 원래의 이견대 자리는 아니지만, 아쉬운 대로 길가의 이견정에서 대왕암을 바라본다. 푸른 물결과 흰 포말 사이로 한 줄기 행여 피리소리가 들릴까 귀를 세운다.성낙주는 ‘에밀레종의 비밀(2008·푸른역사)’에서 황수영이 발표한 ‘신라종 양식과 만파식적’을 발전시켜 에밀레종의 만파식적 기원설을 주장한다. 또한 만파식적과 흑옥대 등 안정기에 돌연히 출현한 새로운 신기들을 정치적 수단으로 해석한다. 만파식적 설화 중 후일 효소왕이 되는 태자가 등장하는 ‘흑요대’ 부분은 후대의 가필로, 부례랑이 납치되고 천존고에 보관 중이던 만파식적과 현금이 사라진 것은 효소왕대의 정치 불안을 상징하는 것이다. 얻기에 어려우나 지키기는 더 어려운 이치가 그곳에도 있다.문무왕은 문(文)과 무(武)를 아우르는 이름으로, 길고 고단한 전쟁이 끝나고 마침내 평화의 시대가 펼쳐지길 기원하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김부식은 비하하듯 만파식적을 ‘삼국사기’의 ‘음악’편에 실었지만, 경계 없이 멀리 가는 만파식적의 피리소리는 음악을 통해 세상을 교화한다는 유교적 ‘예악’의 이데올로기와 닿아 있다. 에밀레종의 종소리는 ‘일승지음’, 부처님의 음성을 닮아 목숨들을 피안의 낙토로 실어 나르는 커다란 수레가 되길 기원하는 것과 연관된다.월성 안에서 에밀레종 소리를 듣고, 대왕암을 바라보며 피리소리를 더듬는다. 이름부터 멋진 천존고는 아쉽게도 월성 안이 아닌 불국사 가는 길에 출토 유물 보관 건물로 개관했지만, 보배로운 마음은 애초에 창고든 전시실이든 가둘 수 없는 것이다. 문제적 인간 김법민, 물결을 덮고 잠드신 문무대왕의 마음을 바람결에 가만히 헤아려본다.

2019-04-21

아무것도 없이 텅 빈 황룡사지서 느끼는 꽉 찬 완전함

경주에 다녀온 뒤 만나는 사람마다 잡고 말했다.“경주에 갈 일이 있다면, 황룡사지는 꼭 가 보세요!”겨울이고, 저물녘이라 더욱 그랬을 것이다. 봄이나 여름이나 가을이고, 새벽이나 한낮이라도 나름의 정취는 고스란했을 것이다. 예술품에 ‘완벽하다’는 말이 쓰일 수 있다면 석굴암에 그러할 것이라 했는데, 폐허에 ‘완벽하다’는 말을 쓸 수 있다면 황룡사지에 그럴 것이다. 폐허가 완벽하다니, 짐짓 ‘형용모순’ 같기도 하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황폐한 터, 그런데 그 아무것도 없음과 텅 비어있음이 결함 없이 완전하다는 느낌을 준다. 나처럼 웬만한 풍광이나 경치에 눈도 꿈쩍 않는 시큰둥이 목석에게 이 정도의 감흥을 준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텅 비어있는데 가득 찬 느낌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무언가를 보고 만 기분이다. 막막하면서 먹먹하다. 문득 가슴이 뻐개지듯 저려와 눈물이 왈칵 솟을 듯했다. 천년의 시간이 천년의 공간과 만난다. 세계와 인간의 명멸과 왕조와 문화의 흥망성쇠가 한꺼번에 물밀어든다. 온갖 호들갑스러운 표현을 총동원해도 그곳의 그 느낌은 붓과 혀로 다할 수 없다.그냥, 가 보시라. 황룡사지, 그토록 완벽한 폐허.“(진흥왕)14년 봄 2월에 왕이 담당 관청에 명하여 월성(月城)의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황룡(黃龍)이 그곳에서 나타났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서 (계획을) 바꾸어 절로 만들고 이름을 황룡(皇龍)이라고 하였다.”(‘삼국사기’)“신라 제24대 진흥왕 즉위 14년 계유 2월 장차 궁궐을 용궁(龍宮:신라의 궁궐 이름으로 추정)의 남쪽에 지으려 하는데 황룡(黃龍)이 그 땅에 나타나서 이에 고쳐서 절을 짓고 황룡사(黃龍寺)라고 하였다. 기축년(569년)에 이르러 담을 두르고 17년 만에 바야흐로 완성하였다.”(‘삼국유사’)처음부터 절을 지으려던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월성이 좁았거나 다른 필요가 생겨 새 궁궐을 짓기로 결정했던 게다. 그런데 막상 궁궐을 짓기 위해 터를 닦으려던 차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문득 황룡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것이다.용은 상상의 동물이다. 몸은 뱀, 뿔은 사슴, 귀는 소 같고 비늘과 네 개의 발을 가진다. 용은 오방(五方) 오색(五色)의 다섯 형태로 나타난다. 동의 청룡(靑龍), 남의 적룡(赤龍), 서의 백룡(白龍), 북의 흑룡(黑龍), 그리고 중앙에 황룡(黃龍)이 있어 모두 오룡(五龍)이다. 한국에서는 오룡 가운데 청룡이 가장 많이 그려지는데, 청룡은 봄을 관장하며 기우제에 상징물이기에 농경 사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용일 수밖에 없다.그런데 어쩌다 황룡이 나타났을까? 왜 하필이면 청룡도 백룡도 흑룡도 적룡도 아닌 황룡일까?황룡은 동서남북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중앙을 의미한다. 왕조시대의 중앙, 세상의 중심은 왕이다. 따라서 황룡은 임금, 군주에게만 사용되는 특권적인 용이다. 진흥왕이 짓고자 했던 신궁은 왕궁이니 황룡이 나타남직하다. 또한 불교의 수호신으로 등장하는 다양한 용들 가운데 석가모니는 반드시 황룡으로 상징하기에, 불교를 국교로 삼은 신라에서 황룡은 특히 신성시되었을 것 이다.계획도시 건설 시기에 대한 이견은 있지만 삼국 가운데 유일하게 천도가 없었던 신라는 황룡사를 지은 5세기 중후반부터 도성의 확장을 시도한다. 문제는 황룡이 나타나는 바람에 궁궐을 지을 자리에 절을 짓게 된 것이다. 신궁 건설 계획이 무산된 이유로는, 용이 깊은 못이나 늪, 호수, 바다 등 물속에서 사는 동물이라는 데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황룡사지를 조사한 결과 일대의 저습지가 대대적으로 매립된 흔적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고층 아파트에 살면서도 수맥이 지나가네 마네 하는 터에 물이 고인 연못 위에 왕궁을 짓기는 어려웠을 것이다.황룡사지의 규모는 8만여㎡에 달한다. 신궁을 만들기 위한 지반 매립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지만 빈 터로 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월성의 주인들은 그 위에 신라 최대의 사찰, 국찰 황룡사는 짓는다. 13년 혹은 16년 동안 공사하여 완공하고, 아육왕(아소카왕)이 보낸 금과 철로 장육존상(丈六尊像)을 만들고, 금당(金堂)과 9층 목탑을 조성한다.황룡사는 신라 왕실의 상징이 된다. 변괴가 있으면 장육존이 눈물을 흘리고, 커다란 별이 황룡사와 월성 사이에 떨어지고, 큰 바람이 황룡사의 불전을 무너뜨리고, 벼락이 쳐 탑이 흔들린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황룡사는 단순한 사찰이 아니라 신라 그 자체다. 927년 3월, 황룡사 탑이 흔들려 북쪽으로 기운다. 927년 후백제의 침공으로 경애왕이 죽고,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견훤에 의해 즉위한다.황룡사지 한 귀퉁이에 있는 ‘황룡사 역사문화관’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건물이다. 3천 원짜리 입장권을 내고 들어가자마자 안내원이 건네주는 안경을 끼고 영상관에 들어가 3D 영상부터 본다. 황룡사의 건립부터 화재로 소실되기까지의 과정을 내용으로 한 영상이다. 나름 정성을 들여 만들었는데 아무래도 비장미가 과한 느낌이다. 몽골군이 황룡사를 공격해 불태우는 장면에서 승려들이 마치 소림사 무예승처럼 싸움을 벌이는데, 내 안의 민족주의가 자극되어 순간 울컥했지만 실제 역사와는 거리가 있다.삼국시대부터 승병의 역사가 있으니 무예를 하는 승려도 있었겠지만, 때는 신라 폐망 이후의 고려시대로 황룡사의 위상도 많이 퇴색했을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몽골군이다. 그들은 지배하지 않는다. 다만 약탈하고 유린하고 떠난다. 저항하는 자가 있으면 그 지역의 사람 전부를 죽여 버린다. 전 세계를 휩쓴 몽골군의 용맹 혹은 야만은 그들이 지나간 자리를 전부 폐허로 만들 정도였다. 아마도 황룡사는 조용히, 빠르게,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다. 거짓말처럼.영상관에서 나와 잘 꾸며진 목탑실과 역사실, 고건축실 등을 둘러본다. 전시물들은 황룡사 건립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고 그간의 연구와 복원계획까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황룡사는 여러 면에서 대단한 절이었다. 황룡사 지붕을 장식했던 치미를 복원한 모형만 보아도 그 거대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황룡사 하면 가장 유명한 것이 9층 목탑인데, 문화관 1층 전시장에 10분의 1로 축소 복원되어 있다. 이 모형의 10배가 되는 목탑이 저 들판 한가운데 서 있었을 것을 생각하면 아득하다. 탑의 높이는 약 80m, 아파트 30층에 가깝다. 1969년 서울 서소문동에 83m의 한진빌딩(KAL빌딩)이 세워지기 전까지 한국 역사상 최고 높이 건물이었다니 할 말 다했다.이 탑이 월성에서 덩두렷이 보였을 것이다. 불교의 탑은 석가모니의 진신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로 예배의 대상이니, 아무 때나 마음이 내키면 동쪽으로 몸을 돌려 기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남산에서도 보였던 게 분명하다. 일명 부처바위로 불리는 남산의 탑곡 마애조상군에는 부처와 보살, 승려와 비천(飛天)과 사자 등과 더불어 황룡사 목탑으로 짐작되는 거대한 탑이 조각되어 있다. 그러니 서라벌 어디에서도 보였을 것이다. 새벽에 눈뜰 때부터 밤에 눈 감을 때까지 보이고, 서라벌 사람들이 길 떠났다 돌아올 때 식구보다 먼저 맞아주는 게 황룡사 목탑이었을 것이다. 황룡사에 9층 목탑을 세운 사람은 신라, 그리고 삼한의 첫 번째 여왕인 선덕여왕이다. 선덕여왕이 목탑을 세운 것은 종교와 예술을 떠나 사뭇 절박한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고승 안홍이 편찬한 ‘동도성립기’를 인용해 말한다.“신라 제27대에 여왕이 왕이 되니 도(道)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구한(九韓)이 침략하였다. 만약 용궁 남쪽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곧 이웃나라의 침입이 진압될 수 있다.”자장이 중국에서 신인(神人)을 만나 들었다는 조언도 크게 다르지 않다.“지금 너희 나라는 여자가 왕이 되어 덕은 있으나 위엄은 없다. 그러므로 이웃나라가 꾀하는 것이다. 마땅히 속히 본국으로 돌아가라 (중략) 본국으로 귀국하여 절 안에 9층탑을 조성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여 왕업이 영원히 평안할 것이다.(하략)”우뚝 솟은 탑은 남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 하나가 없어 폄하되고 모욕당한 선덕여왕은 그보다 더 웅장한 탑으로 신라의 자존심을 지킨다. 선덕여왕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가 가장 높은 것을 우뚝 세웠으니, 모두 우러러 보라!”화려했던 과거를 되짚을수록 현재의 폐허는 허무로 깊어진다. 신라 최대 사찰이자 최고 건축물이었던 황룡사는 1238년 몽골의 침입으로 탑과 전각이 모두 불탔다. 장육존상과 금당 벽에 그려졌다는 솔거의 ‘노송도’도 모두 녹아내렸다. 말 그대로 잿더미가 되었다.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라! 허공을 꽉 채워 있음과 없음의, 과거와 현재의,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지운다. 역사문화관을 나와 다시 황룡사지를 걷는다. 강당지, 금당지, 서금당지, 동금당지, 목탑지, 경루지, 종루지, 중문지. 모두 사라지고 자리뿐이다. 거대한 초석들 위에 세워졌을 거대한 기둥은 온데간데없다. 사라진 영화, 사라진 신전 앞에서 머리를 조아릴 필요는 없다. 젊은 날 찾았던 이방의 유적지에서 문득 손을 모으는 내게 안내원이 말했다.“폐허는 숭배하지 않는 것입니다.”황룡사와 9층 목탑을 복원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있었다. 앞서 2035년까지 2천900억 원을 투자해 목탑을 복원하고 금당과 회랑과 승방 등 13개 동을 차례로 건립하겠다는 계획이 수립된 바 있고, 경주시는 2019년 주요업무계획에 1천200억 원이 소요되는 황룡사 9층 목탑 복원 계획을 포함시켰다.하지만 “지구의 복원은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복원은 완전하고 상세한 기록에 근거할 때만 수용될 수 있으며, 절대 추측에 근거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 유네스코의 ‘세계유산 협약 이행을 위한 운영지침’(86조)에 따라 황룡사 복원 계획은 무산될 가능성이 커졌다. 자세한 그림과 문헌이 없어 고증이 어려우니 애당초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목소리도 높다.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9층 목탑을 세우면 황금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찍어 SNS로 자랑하고 싶은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다. 어쨌거나 관광객 유치에는 확실한 효과가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폐허는, 그 완벽한 텅 빈 듯 가득함은 사라질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마음으로 보는 심안(心眼)의 복원은 불가능할까?몇날며칠 황룡사지 노래를 했더니 친구가 시를 만들어 보내왔다.너는내가 폐허처럼 드러누울 때마다황룡사지를 가보라 한다절이 앉았던 곳적록 단청이 색을 벗고 공즉시색 하는 곳9층 목각의 목을 부러뜨리고붕새는 어디로 날아갔을까건너편 산자락에끝이 찢어진 날개를 내려놓고우리가 익힐 수 없는 비천이 우리를 에워싸는가- 함태숙 시 ‘황룡사지를 청하다’ 중에서.

2019-04-14

신라가 불국토(佛國土)가 되기를 꿈꾼 월성의 주인들

나는 ‘믿는’ 사람이 아니라서 ‘믿음’의 경로를 잘 모른다. 하지만 믿음이야말로 인간의 고유한 마음이며, 그 마음이 지극해지고 신실해질 때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비를 발휘한다는 것은 안다.지금은 탑과 당간지주, 주춧돌과 장대석 등의 치석재로만 남아있지만, 신라시대 월성 주변에는 황룡사를 비롯해 분황사, 미탄사 등 사찰들이 하고많았다. 법흥왕14년(527) 스무 살을 갓 넘긴 청년 이차돈이 자신의 몸을 던져 서라벌에 꽃비를 뿌린지 17년이 지나자 “(서라벌에) 절과 절들은 별처럼 벌여 있고, 탑과 탑들은 기러기 행렬인양 늘어섰다.(‘삼국유사’)”월성의 주인들은 꿈꾸었다. 신라가 불국토(佛國土)가 되기를, 그들이 전륜성왕으로 남기를. 부처님의 나라, 부처님의 가르침이 넘치는 땅이 불국토다. 전륜성왕은 통치의 수레바퀴를 굴려 세계를 통일하고 지배하는 이상적인 왕이다. 신라의 왕들은 세속의 전륜성왕으로 자신의 나라를 불국토로 만들고자 하였다. 무력이 아닌 정의에 의해서만 천하를 지배하기에 괴로움이 없으며 지극히 안락하고 자유로운 세상을.종교적인 의미만은 아니었다. 폐쇄적인 씨족사회였던 신라를 개방하고 개혁하기 위해 새로운 믿음이 필요했다. 사회를 통합하는 통치 이념으로도 긴요했다. 하지만 사람을 강제로 울릴 수는 있어도 강제로 웃기기는 어렵다. 믿음은 쥐어짜는 눈물보다 터지는 웃음에 가까운 것이다. 불교가 정착하기까지는 이차돈의 ‘순교’가 필요할 만큼 토착 신앙의 저항이 컸다.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한 뒤 최초로 세운 사찰인 흥륜사의 절터가 굳이 신라인들이 신성시하던 천경림(天鏡林)이었던 까닭도 종교를 넘어선 정치 투쟁의 과정이었다.신라가 곧 불국토라는 불국토사상의 선봉은 선덕여왕12년(643) 당나라에서 귀국해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운 자장으로 일컬어진다. 자장은 신라의 원시 신앙인 오악숭배를 오대산신앙으로 도입해 신라인들에게 자부심과 긍지의 믿음을 심었다. 이후 원효와 의상을 거치며 불국토사상은 이상이 아닌 현실로 신라인에게 뿌리내렸고, 마침내 부처님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호국사상으로 발전했다.아무래도 마땅찮다. 불신자(不信者)의 손으로 쓰면 건조한 역사적 사실의 나열일 뿐이다. 1973년에 관광지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포장된 도로를 따라 불국사 주차장에서 석굴암 주차장으로 이동하는 방식으로는 그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월성의 주인들이 드나들던 사찰인 불국사에서 왕실의 신전과 같던 석굴암까지 오르는 데는 맨몸에 두 발이어야 마땅하다. 땀을 흘리며 허위허위 걸어 올라야 비로소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석굴암을 관람한 후 밝힌 소감처럼 “내 안에도 부처님이 계시구나!”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아, 정말 아름답다!”아들아이가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을 보며 환호한다. 대여섯 살 때쯤 가족여행을 와서 전 국민의 포토존인 청운교 백운교 앞에서 찍은 사진이 있건만 무릎 아래 기억 따위가 남아있을 리 없다. 연신 감탄을 터뜨리며 사진을 찍어대는 아들 곁에서 신라의 대표 효자 김대성의 마음을 생각한다. 불교에서 부모와 자식은 8천겁의 인연이라 했던가? ‘삼국유사’의 설화에 의하면 불국사는 그가 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석불사)은 전생의 부모를 위해 지은 절이다.김대성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경덕왕 때 국왕의 행정적인 대변자인 중시(中侍)로 임명되었던 김대정(金大正)과 동일 인물이다. 한편 절의 기록에는 불국사를 처음 창건한 김대성이 공사 중 죽자 나라에서 완성해 끝마쳤다고 하고, 조선시대 ‘불국사고금창기’에는 이차돈이 순교한 이듬해(528)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이 절을 창건하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기록이 상치되고 연대가 혼동된들 어쩌랴! 애당초 전생과 윤회를 비롯한 숱한 신비와 이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그저 신라인들의 신비를 믿고 싶은 마음과 이적을 꿈꾸는 열망을 되새기면 그만이다.불국사 정문 매표소 옆으로 길이 하나 있다. ‘석굴암 가는 길’ ‘불국사길’ ‘석굴암길’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2.2㎞에 이르는 산길이다. 이 길을 오르려고 굳이 무거운 등산화를 챙겨왔다. 물 한 병과 사탕 몇 개도 준비했다.“얼마나 걸릴까?”“산길에서 2킬로 한 시간이니까, 그 정도 걸리겠는데요?”아들이 등산화 끈을 힘껏 졸라맨다. 우리 모자는 백두대간 남한 구간 632㎞를 함께 종주한 동지이자 동료이다. 그때 질풍노도의 중2였던 아들은 예비역 복학생이 되었고, 마흔 고비였던 나는 지천명의 시기를 넘어섰다. 그럼에도 우리가 함께했던 대장정의 기억은 산을 오를 때마다 되살아난다. 문제는 아들이 오르막 내리막에서 힘에 부쳐 쩔쩔 매는 나를 그때의 쌩쌩한 젊은 엄마로 오해하는 것이다.“이 길은 너무 빨리 가면 안 돼. 사방을 살피고 하늘도 보며 천천히 가야 해.”입구에서 1킬로 남짓까지는 경사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평탄하다. 차량 출입은 금지되어 있지만 자동차도 너끈히 다닐 정도로 널찍하다. 길가의 나무들도 잘 다듬어져 있는데 겨울이라 마른 가지가 앙상하지만 안내판을 보니 불국사 청년회에서 심어 가꾼 단풍나무다. 가을에 오면 황홀하도록 아름답겠다. 봄이면 동자꽃, 은방울꽃, 물봉선화 등이 피고, 가을이면 작살나무, 범의부채, 누리장나무 등이 열매 맺는다고 한다.이 길이 월성의 주인들이 걷던 바로 그 길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자동차를 타고 불국사 주차장에서 석굴암 주차장까지 이동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석굴암에 닿는 길이 찻길밖에 없습니까?”1992년 한국을 방문한 영국의 찰스 왕세자는 석굴암을 관람한 후 안내자에게 물었다고 한다. 그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고행을 택했던 부처의 내력을 알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3백여 개가 넘는 화강암을 산꼭대기까지 운반해 쌓고 다듬어 장엄한 석굴사원을 지은 신라인들의 믿음 앞에 오체투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몸을 낮춘 산행으로 예의를 표하고 싶었나 보다. 숲길이 있다는 답을 얻어낸 찰스 왕세자는 이후 일정을 취소하고 불국사와 석굴암을 잇는 길을 걸어 내려왔다고 한다. 때마침 토함산 단풍이 한창인 11월이었다니, 먼 나라 왕세자의 걸음걸음도 울긋불긋 아름다웠을 것이다.1995년 석굴암과 불국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고, 불국사에서 석굴암까지 도보로 이동하는 관람객과 승용차로 이동하는 관람객의 동선이 분리 정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쉽고 빠르게 눈도장을 찍고 돌아서는 관광이 선호되는 듯, 우리가 불국사-석굴암-불국사를 왕복하는 동안 산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재미있는 것은 경주 현지인으로 보이는 등산객들이 아니라면 어떻게 알고 왔는지 신기한 서양인 여행자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이다. 때로 그들이 보는 것을 우리가 보지 못한다. 겉보기에는 멀쩡한 눈을 가졌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처럼, 익숙함에 속아 우리 곁의 보물을 놓치고 있는지도.절반쯤 지나고 나니 갑자기 경사가 가팔라진다.“좀 천천히 가자! 엄마 힘들다.”토함산은 암산(巖山)이기는 하지만 해발 745m로 그다지 높고 험한 편은 아니다. 그런데 너무 오랜만에 산행을 해서인지 오르막이 벅차다. 엄마의 체력 저하를 엄살이라 여기는 아들은 처음에 좀 기다려 주다가 이내 성큼성큼 앞서 나간다. 전생과 이생의 부모를 모두 섬긴 김대성의 효심을 녀석에게 기대하기는 어렵다. 현대의 부모는 자력갱생해야 한다.“와! 여기 전망이 정말 좋아요!”아들의 탄성에 고개를 돌려보니 발아래 경주평야가 진진하게 펼쳐져 있다. 석탈해는 토함산 정상에서 호공의 집이 있던 월성 부지를 발견했다는데, 아무리 산 정상에 올라도 월성이 보일 정도는 아닐 것 같다.체험한 바 평지 걷기와 산행이 다른 점은, 평지를 걸으면 생각이 돋아나고 산을 타면 생각이 지워진다는 것이다. 산행은 운동이라기보다 명상이다. 게다가 토함산은 오악 가운데 동악(東嶽)이라 하여 중사(中祀)를 거행하며 호국의 진산으로 신성시했던 산이다.그러니 신라인들에게 토함산 산행은 기도였을 것이다. 월성의 주인들은 불국사에서 석굴암까지 오르는 짬짬이 다리쉼을 하며 그들의 영지와 백성들의 삶터를 굽어보았을 것이다. 기도는 자연스럽게 일신의 복록을 비는 것을 뛰어넘어 나라의 태평과 안녕으로 번졌으리라. 사찰에서 신전까지, 이 길은 바로 ‘믿음의 길’인 것이다.길 끝에 석굴암 주차장이 있다. 매표소 앞에서 시간을 확인하니 딱 45분 걸렸다. 신라인들의 마음을 곱씹으며 걷기에 무리하지 않은 일정이다.석굴암은 언제 보아도 신비롭고 아름답다. 본존불 자체를 비롯해 광배와 백호와 주변에 둘러선 십대 제자들까지, 인간이 만든 예술품에 ‘완벽하다’는 말이 쓰일 수 있다면 석굴암에 그러할 것이다. 그토록 잘생기고 음전한 부처님은 싯다르타가 태어난 네팔에서도, 가는 곳마다 사원과 스투파(탑)가 널려있던 인도에서도, 일본이나 한국의 다른 어떤 사찰에서도 만나지 못했다. 아름다운 것이 주는 경외감 앞에 절로 머리가 수그러진다. 아들과 손을 모으고 삼배를 바친다.이전의 잘못된 복원으로 결로와 이끼가 심각해지면서 결국에는 완전 밀폐되어버렸지만, 본래의 석굴암은 석굴 안으로 들어가 본존불 주위를 한 바퀴 돌며 참배하는 방식이었다. 일 년에 딱 하루 부처님 오신 날에는 신자들에게 본존불 주변을 한 바퀴 도는 방식의 참배가 허용된다니 아쉽고 안타깝다.석굴암에서 불국사로 돌아오는 버스가 매시 정각 출발한다는데 시간을 맞추지 못해 놓쳤다. 무릎에는 좋지 않겠지만 내려오는 데는 올라가는 시간의 절반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참 좋다!”“참 좋네!”산속의 공기는 차갑고 무릎은 시큰하지만 마음만큼은 부듯하다. 지금 우리에게 그러하듯 신라 사람들의 삶 또한 마냥 평화롭고 행복했을 리 없다. 긴장과 갈등, 고통과 분노, 절망과 패배는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겪는 업보일지 모른다. 그토록 뜨거운 불의 집, 화택(火宅)에 살며 불국토가 현현하길 간절히 빌었던 1천2백여 년 전의 마음이 믿음을 모르는 어리석은 내게마저 아련히 느껴진다.

2019-04-07

풍류가 넘실대는, 어둠의 비밀과 빛의 신비가 함께했던 ‘아, 신라의 밤이여!’

최치원은 난랑비의 서문에서 말하기를, “나라에 현묘한 도(道)가 있으니, 이것을 풍류(風流)라고 한다. 가르침의 근원에 대해서는 선사라는 책에 잘 설명되어 있는데, 실로 이는 유교 불교 도교의 3교를 포함하고 있어 뭇 백성들을 감화시킨다. 집안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서는 나라에 충성함은 노나라 공자의 가르침이다. 무위에 머물며 말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주나라 노자의 뜻이다. 모든 악행을 멀리 하고 모든 선행을 받들어 행함은 천축국 석가의 교화이다”라고 하였다.‘삼국사기’에 등장하는 ‘풍류’는 화랑도의 사상이다. 최치원의 뜻과 별개로 유학자 김부식의 손끝에서는 ‘엄(숙)·근(엄)·진(지)’하게 풀이된다. 유불선을 포함하되 유불선으로 환원될 수 없는 풍류도는 신라의 고유한 세계관이자 문화다.‘삼국사기’에 ‘풍류’라는 말은 한 번 더 등장한다. 김유신이 압량주 군주로 있을 때 백성들의 패기를 시험하기 위해 군사 일에 뜻이 없는 듯 술을 마시고 ‘풍류’를 즐기며 몇 달을 보냈다는 대목이다. 그러니까 ‘풍류’는 별생각 없이 편하게 먹고 노는 것이다. ‘삼국유사’에도 몇 차례 등장하는데, 제49대 헌강왕 때 성 안에 초가집이 하나도 없었으며 추녀가 맞붙고 담장이 이어져 있어서 노래와 ‘풍류’ 소리가 길에 가득 차 밤낮 그치지 않았다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풍류’는 노래하며 놀 때 터져 나오는 진진한 소리이기도 하다. 사전적으로는 ‘멋스럽고 풍치가 있는 일. 또는 그렇게 노는 일’로 풀이되어 있다. 어쨌거나 노는 일, 그런데 난잡하게 막 노는 것이 아니라 멋있게 잘 노는 것이다.네덜란드의 문화사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인간은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존재라고 밝혔다. 놀이는 문화적 현상이며, 경쟁 혹은 재현이고, 의례와 축제와 종교와 관계한다. 인간 사회의 법과 제도 역시 놀이적 성격을 지닌다. 소송과 결혼제도, 전쟁까지를 포함한다. 그러니까 하위징아의 주장은 한마디로 ‘모든 것이 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서는 삶이 놀이 같아야 마땅하다고.신라인들은 하위징아의 이론을 천년 전부터 실현했다. ‘풍류’의 연구자들은 자연스러운 놀이가 음악과 시와 종교 등과 만나 현실을 뛰어넘는 이상이 되는 과정을 밝혔다. 잘 놀다 보면 마침내 ‘하늘’과 만난다. 풍류객은 신과 하나 되어 누추하고 왜소한 자신을 뛰어넘는다. 경상도와 강원도 어디쯤 물 좋고 경치 좋은 곳에서 종종 발견되는 화랑도의 흔적은, ‘사다함이랑 무관랑이랑 모월모시 놀다 감. 우리 우정 영원히!’ 같은 놀이의 흔적이다. 풍류는 우정과 의리를 고양시켜 화랑도의 결속을 다지는 매개가 된다.어울려 풍류를 즐길 수도 있지만 혼자 풍류에 젖어들 수도 있다. 아취(雅趣), 고아한 정취나 그런 취미에 빠지면 홀로 풍류랑이 될 수 있다. 혼자 놀아도 외롭지 않고, 함께 놀아도 누군가 소외되어 괴롭지 않은, ‘풍류’야말로 독거와 혼밥의 시대에 다시금 북돋워야 마땅한 흥취가 아닐까?“아아, 신라의 밤이여!”유호 작사에 박시춘이 작곡하고 현인이 노래한 ‘신라의 달밤’은 신라를 추억하는 대표곡이다. 달과 밤을 빼놓고는 신라와 서라벌을 이야기할 수 없는 게다.월성은 반달을 닮은 터전 위에 지은 달의 궁궐이다. 풍류를 이야기하며 즐기기에는 쨍한 낮보다 어둑한 밤이 어울리는 듯하다.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던지, 경주에는 다른 도시들과 다르게 밤을 배경으로 한 행사가 많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빛의 궁궐, 월성’이라는 주제로 월성 발굴조사 현장을 야간에 개방하는 행사를 주최할 뿐더러, 매년 가을 사단법인 경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최하는 ‘신라의 달밤 165리 걷기대회’도 열린다. 165리면 약 66㎞, 황성공원에서 출발해 보문호수와 석굴암과 불국사를 거쳐 황성공원으로 돌아온다. 소요시간이 약 12~13시간이라니 밤을 꼬박 새워 경주를 돌아보는 흥미로운 행사다.사단법인 신라문화원이 주최하는 ‘신라달빛기행’은 여름밤과 가을밤을 즐기기에 맞춤하다. 월성 일대를 돌아보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코스가 있는가 하면 감은사지와 문무대왕릉을 포함하는 ‘감포·동해안권’, 선덕여왕릉과 보문사지 황금 들녘을 걷는 ‘가을들판을 거닐며’, 김유신묘와 무열왕릉 등을 돌아보는 ‘구절초와 함께하는 화통콘서트’ 등 다양한 코스가 있다. 참가비는 버스와 해설을 포함해 5천원인데, 투어를 마칠 무렵 서악서원에서 열리는 ‘고택음악회’와 서악동 삼층석탑에서 열리는 ‘구절초 음악회’가 눈길을 끈다. 밤과 음악, 그야말로 ‘풍류’의 향연이다.달 뜨는 시간에 모여 남산 일대를 둘러보는 사단법인 경주남산연구소의 ‘경주남산달빛기행’도 있다. 겨울을 제외하고 한 달에 한 번씩 개최되는데 참가비는 무료다. 달빛에 비친 바위 부처님을 바라보면 그야말로 ‘홀리(holy)’해서 없던 신심마저 돋아날 듯하다.민간 여행사에서 진행하는 ‘동궁과 월지 달빛 산책’이라는 야간투어도 있다. 어떤 코스로 진행되나 궁금해 숙소 카운터에 꽂혀있는 홍보지를 펼쳐보았다. 밤 7시 30분 첨성대에서 모여 출발해서 계림-월성-동궁과 월지까지 약 2시간 동안 도보 이동으로 이어진다. 문화해설사 비용과 동궁과 월지 입장료를 포함해 성인이 8천원, 소인이 7천원이란다.사실 여행지에서 ‘나이트 라이프’를 즐기는 편은 아니다. 외국에서는 안전 문제 때문에 그렇거니와 밤을 즐기는 건 아무래도 젊음의 몫인 듯하다. 밤눈이 어두워지면서 행여 허방이라도 짚을까 밤나들이가 꺼려진다. 그래도 귀차니즘을 간신이 잠재우고 길을 나섰다. 이미 낮에 돌아본 곳들이지만 밤의 월성을 보고 싶다. 풍류가 넘실대는, 어둠의 비밀과 빛의 신비가 함께했던 그곳을.쌀쌀하지만 청량한 밤이다. 월성은 순량한 초식동물처럼 어둠 속에 나부죽하다. 발굴조사 현장인 동시에 시민들의 산책로 역할을 하는 월성에는 LED등이 길을 따라 켜져 있어 천년 전의 횃불과 등롱을 대신하고 있다.“아름다운 궁녀들 그리웁구나. 대궐 뒤에 숲속에서 사랑을 맺었던가? 님들의 치마소리 귓속에 들으면서, 노래를 불러본다 신라의 밤 노래를.”‘신라의 달밤’ 2절과 3절 가사는 좀 야릇하다. 1절의 ‘고요한 달빛’ 사이로 울려 퍼지는 ‘불국사의 종소리’ 대신 아름다운 궁녀들과 버석거리는 치마소리를 읊조린다. 노래 가사 속의 ‘대궐’이라면 바로 월성이 아니런가? ‘신라의 달밤’이 노래하는 월성은 사랑의 공간이다.도덕주의자들에게는 그저 음란하고 방종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다른 한편으로 신라의 원기왕성한 생명력을 이해하는 근거가 되는 ‘화랑세기’가 떠오른다. ‘풍류’를 이야기함에 있어 ‘풍류도’라는 이름을 지닌 화랑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풍류도의 우두머리인 풍월주의 계보이자 연대기가 ‘화랑세기’일지니, ‘화랑세기’는 풍류의 역사책이자 해설서인 셈이다.그들의 삶과 놂은 매우 에로틱하다. 도덕과 제도를 훌쩍 뛰어넘으니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진위 논쟁과 별개로 ‘화랑세기’를 통해 드러나는 신라인의 삶을 단순히 에로틱하다거나 난삽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색공지신(色供之臣:색을 바쳐 왕족을 보필하는 신하)과 삼서제(三壻制:여왕이 3명의 색공지신을 둠), 마복자(磨腹子)제도(신라의 독특한 대부(代父) 풍습으로, 임신한 여자가 상위계급의 남자와 동거한 후 낳은 아들이 마복자) 등은 삼국 가운데 후발주자인 신라가 왕통을 잇고 사회적 통합을 이루기 위해 그들의 방식으로 발버둥질한 흔적이다. 실제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혈통을 보존하기 위한 왕실의 근친혼이 빈번했으며, 계급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계급상승의 사다리는 최소한이나마 보존해야 했다.세상이 좋아져 조상들의 절박함을 이해하지 못할 후손들을 예상이라도 한 듯, ‘화랑세기’에는 신라의 캐치프레이즈가 빈번히 등장한다. 중국이나 다른 어느 세상에도 없는 그들만의 고유한 사상과 문화를 주장한다.“신국(神國)에는 신국의 도(道)가 있다!”월성을 빠져나와 길을 건너면 동궁과 월지다. 난데없이 도로가 생기는 바람에 나뉘어져버렸지만 원래 동궁은 월성의 연장이다. 애초에 동궁이라는 명칭이 월성에 정궁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월성과 동궁을 하나의 왕성으로 치면 면적은 약 21만㎡에 이른다. 증축한 경복궁의 면적이 약 34만㎡이니 고대의 왕성으로 대단한 규모가 아닐 수 없다.삼한통합 후 월성은 물론 서라벌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유입 인구와 우대할 귀족들이 늘어나자 서둘러 확장과 증축 공사에 들어간다. 문무왕 19년(679) 월성 동쪽에 큰 연못을 가진 동궁을 짓고 연못을 월지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는 월지라 불렀으나 조선시대 기러기와 오리가 많이 논다고 안압지라 바꿔 불렀다.동궁과 월지는 1975년 정비 과정에서 우연찮게 유물 유적이 발견되면서 발굴조사로 전환해 큰 고고학적 성과를 거둔 장소다. 동궁과 월지가 이 정도일진데 과연 월성은? 이런 추측이 월성에 대한 기대를 더욱 크게 만든다. 단, 너무 큰 기대는 조바심과 성과주의를 부추길 수 있으니 조심조심해야겠지만.지금은 동궁이 월성보다 인기 있는 관광지다. 일찍이 발굴조사를 끝내고 복원한 동궁과 월지는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답다. 때마침 주말이라 표 사는 줄도 길고 화장실에서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동궁과 월지의 조명보다 먼저 눈을 쏘는 빛은 아이들의 손에 들린 야광 풍선이랄까 불빛 풍선이랄까, 심해의 해파리 모양의 장난감 풍선이다. 왜 아이들은 저걸 갖고 싶은지, 어쩌다 부모들은 저걸 아이에게 사주는지 잘 모르겠다. 달빛으로 모자라 인공조명을 비추고, 인공조명으로도 모자라 야광 풍선을 들고 다닌다. 어둠이 사뭇 희귀해진 세상이다.너희들 도시의 길은 너무 밝다! 너희는 별이 겁나느냐?너희 음악 소리는 너무 크다! 너희는 바람의 속삭임이 두려우냐?혹시, 너희는 너희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냐?멕시코 아즈텍족의 후예인 크소코노쉬틀레틀은 어둠과 침묵을 몰아내고 우쭐해하는 우리에게 묻는다. 어쩌면 마음을 비추는 듯한 별빛이, 진실을 전하는 바람의 속삭임이 겁나는 게 아니냐고. 혹은 어둠과 침묵 속에서 더욱 명백해질 스스로의 비밀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냐고.월성과 동궁 사이로 난 원화로를 걷는다. 별을 겁내지 않고, 바람의 속삭임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껏 생을 즐기며 힘껏 놀았던 사람들의 길을 걷는다. 아, 신라의 밤이여!

2019-03-31

이쪽 끝에서 저쪽 끝 일부러 찾지 않아도 숱한 ‘망자의 집’ 왕릉과 무덤들

처음에는 날씨 탓을 했다. 월성과 경주 곳곳을 헤매며 느낀 쓸쓸함이랄까 공허함이 한겨울의 회색 하늘과 찬 공기 때문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희뿌옇게 번져가는 입김과 함께 퍼뜩 깨달았다. 유적지에서 느껴지는 공허함은 피와 살을 지닌 사람의 온기가 없기 때문이다. 삶이 불공평했을지라도 죽음은 만인에게 평등할지니, 왕후장상부터 필부필부까지 모두가 시간을 따라 사라져버렸다.죽음의 최후 단계는 해골화(skeletonization)다. 살이 썩고 뼈만 드러나는 것이다. 송장이 완전히 해골이 되기까지 온대 기후에서는 대략 3주에서 수 년, 열대 기후에서는 거의 몇 주 내, 극지방이나 툰드라에서는 수 년 이상 걸리거나 아예 미라 상태로 보존될 수 있다고 한다.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살아있는 모두가 죽으면 썩어 해골이 된다. 해골 자체로는 성별이나 나이를 분별하기 쉽지 않다. 그러니 그가 숨이 붙어 있을 때 어떤 삶을 살며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즐거워했는지는 도무지 알아낼 방도가 없다.남은 것은 약간의 기록, 그리고 그 행간을 파고드는 상상력뿐이다. 월성은 왕성이다. 그러니 월성의 주인은 ‘왕’이다. 지금은 텅 빈 언덕, 발굴의 현장인 월성에서 한때 살았던 ‘집주인’들을 찾아보기로 했다.56대 신라왕 중 경기도 연천에 묻힌 경순왕을 제외하면 55기의 왕릉은 경주 지역에 조영되었을 것으로 본다. 현재 확인되거나 추정되는 무덤이 36기, 나머지 19기는 알려지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그런데 알다가도 모를 일은 조선 전기까지 전승된 신라 왕릉이 11기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원래 11기뿐이었다가 조선 후기 족보 간행과 조상 숭배 사상이 확대되면서 뒤늦게 늘어난 것이다.1730년 경주부윤 김시형은 김씨 문중과 박씨 문중 사람들을 불러 모아 ‘대타협’을 시도한다.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능의 주인을 정하자는 것이다. 김씨와 박씨가 토론을 했는지 혈투를 벌였는지 제비뽑기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결과 남산 동쪽에 있는 것들은 김씨 왕릉이고 서쪽의 것들은 박씨 왕릉으로 결정했다는 게다. 이때 17기의 주인공이 새로 정해지고 이후 8기가 추가 되어 오늘날에 이르렀으니…경주를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오락가락하는 동안 일부러 찾지 않아도 숱한 왕릉 혹은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들과 마주쳤다. 삼릉, 내물왕릉, 원성왕릉, 신문왕릉, 선덕여왕릉, 태종무열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 진지왕릉, 진흥왕릉, 법흥왕릉, 문무대왕릉 진평왕릉 등등. 하지만 왕릉에서도 왕을 만났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앞서 말한 대로 신라의 왕릉 중 피장자가 확실한 것은 태종무열왕릉과 흥덕왕릉 2기뿐이고, 이러저러한 근거로 미루어 학계에서 인정하는 것은 선덕여왕릉 등 5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다 파보면 안 됩니까? 다 파서 확인해보면 될 것 아닙니까?”경주남산연구소에서 진행하는 유적답사에 참가했을 때 동서로 나란한 ‘삼릉’ 앞에서 누군가 해설자에게 따지듯 물었다(그 누군가는 원래의 신청자가 아니고 개인적으로 남산을 오르다가 우리 일행에 끼어 귀동냥을 하던 차였다). 아달라이사금, 신덕왕, 경명왕 등 박씨 왕 3인의 능으로 전하고는 있지만 앞서 말한 바대로 김씨와 박씨 후손 간 ‘대타협’의 결과이니 확신할 수는 없다는 해설을 들은 직후였다.경주에서 그 같은 ‘거친 열정’을 만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 모르는 게 너무 많으니 알고 싶은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집요하고 끈질기게 ‘다 파보자’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인내심 많은 남산 해설자가 끝내 한마디 퉁바리를 던졌다.“다 파봐서 뭐 합니까?”쪽샘 유적 44호분 발굴관에서 만난 신라문화원 해설사도 비슷한 뜻으로 말했다. 다 파봐야 알 수 있는 것이 없다고. 1921년 노서동 고분군에서 금관이 나온 이후 지금까지 모두 6개의 신라 금관이 발굴되었다.그런데 그중 주인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없다. 땅 파는 걸 일로 하는 두더지도 먹이를 얻기 위해 파고 또 판다. 100년에 걸친 연구로도 주인 하나 제대로 밝히지 못했는데 다 파서 또 무엇을 얻어 무엇을 밝히겠는가? 언젠가 내 무덤을 만들어 줄 아들에게 속살거린다.“내가 무덤의 주인이라면, 목적이 무엇이든 누가 내 무덤을 판다는 건 정말 끔찍할 거야!”무덤은 망자의 집이다. 주인의 허락 없이 무덤을 열고 저세상에서 쓰리라 했던 껴묻거리까지 꺼낸다면 주거침입죄에 절도죄를 물을 만하다. 후손이 벼슬이 아니고 시간이 면죄부가 아니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뒤엉킨다. 대체로 갈피를 잡지 못해 가리산지리산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취급되지만, 이런 경우엔 좀 더 오래 서성이며 헤매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숭배까지는 아닐지언정 예의는 반드시 필요하다.월성이 실질적인 왕성으로 기능한 것이 6세기 초 지증왕 때부터라고 학계에서 추정하는 바, 56명의 왕 중에서 월성의 주인으로 살았을 몇 분을 만나보기로 했다.대릉원의 천마총은 1973년 발굴해 1976년부터 무덤 내부를 공개해왔는데, 2016년에 40여년 만에 재정비해 2018년 7월 다시 개방했다. 무덤 안을 개방하는 경우는 간혹 있다. 나도 몇 번 돌아볼 기회가 있었는데, 모스크바의 레닌 묘는 줄이 하도 길어서 포기했고 하노이의 호치민 묘는 줄을 서서 들어갔다. 이른바 마우솔레움(mausoleum), 생전에 유명했던 사람의 장대한 묘에 방부 처리된 시신은 내 눈에 영웅이라기보다 불면증 환자처럼 보였다. 생전의 고단한 삶으로도 모자라 사후까지 잠들지 못하다니, 죽은 자의 모습을 보고픈 산 자들의 마음을 살아서도 잘 모르겠다.리모델링한 천마총은 처음이다. 서늘하고 깊은 집을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가만히 방문한다. 천마총에는 미라가 없고 육신이 걸쳤던 관모와 허리띠 등의 장식 모형만 남아있다. 그 주인은 소지마립간 또는 지증왕으로 추정된다.만약 지증왕이라면 ‘삼국유사’의 적나라한 이야기는 과장인 듯하다. 커다란 똥 덩어리의 주인인 연제부인과 혼인한 지증왕의 거대한 1자 5치의 음경은 실물이라기보다 강력한 왕권과 생산력의 상징이리라. 왕이라는 칭호와 신라라는 국호, 우경 도입과 순장 금지, 지방 제도 정비와 우산국 정벌 등등… 지증왕 시절 신라는 가장 많이 변화하고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천마가 말인지 기린인지 논쟁이 치열하지만 그 상서로운 동물을 잡아타고 훌쩍 도약하고픈 왕의 마음만은 고스란하다.지증왕의 아들인 법흥왕의 무덤은 경주 시내를 벗어나 있다. 신경주역으로 가는 길에 찾은 법흥왕릉은 소박하고 외로운 무덤이다. 주변은 논밭이고 부러 찾아오기엔 좀 썰렁하다. 그러나 법흥왕은 신라 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해 자비의 종교인 불교를 공인한 한편 율령을 반포하고 금관가야를 병합했다.‘삼국사기’에 의하면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조영했다는 법흥왕릉이 중요한 점은, 이전까지 월성의 북쪽 평지에 조영했던 왕릉을 서천 건너편의 산록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법흥왕은 죽어서도 일하셨다. 법흥왕릉의 위치는 계획적인 고대 도시를 건설하려는 신라의 움직임을 반영한다.진흥왕릉과 진지왕릉으로 알려진 무덤들은 문성왕릉, 그리고 헌안왕릉과 함께 서악동에 몰려있다. 무덤 앞에 서니 쓸쓸함을 넘어 얼마간 참담했다. 전날 법흥왕릉에 갔다가 ‘철덕(철도 덕후)’이기도 한 아들이 영천의 간이역을 보자고 졸라 시계(市界)를 넘었다. 도중에 야단법석한 절이 눈에 띄어 들렀는데 사찰이라기보다 장지(葬地)였다. 그곳을 장식한 수십만 개의 번쩍거리는 불상을 보고 나니 진흥왕릉과 진지왕릉이 더 초라하게 느껴졌나 보다.하지만 나에게는 이 무덤들이 특별할 수밖에 없으니, 무덤의 주인들이 졸작 ‘미실’의 중요한 등장인물이기 때문이다. 정복 군주로 살며 전륜성왕을 꿈꾸었던 진흥왕과 왕위를 빼앗기고 ‘살아있는 귀신’으로 유폐되었던 진지왕이 과연 이 작고 둥근 집에 갇힌 것인지, 삶과 죽음의 간극이란 너무도 아득하여 막막하다.선덕여왕릉은 사천왕사지에서 낭산을 따라올라 있는데 기록과 위치가 일치하는 왕릉 중 하나다. 선덕여왕은 드라마의 유명세보다 더 유명해져야 마땅한 왕이다. 삼국시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여왕의 존재 자체도 그러하려니와, 끝없는 도전과 저항에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맞선 선덕여왕의 지혜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중요도에 비해 무덤이 초라한 것을 법흥왕 때부터 소박해진 왕릉들을 통틀어 다르게 생각해본다. 거대한 고분으로 권위를 과시하는 대신 국고 낭비를 막고 애민(愛民)을 실천한 게다. 나라나 사람이나 자존감이 높고 자신감이 충만하면 스스로를 낮추는데 두려움이 없기 마련이니.태종무열왕릉은 경주고속버스터미널에서 서천교를 건너면 금세 나타난다. 시내와 가깝고 주인이 분명한 두 왕릉 중 하나라 조성사업이 한창이다. 무열왕릉 뒤로 줄지은 고분군은 김춘추의 조상들로 추측되는데, 어섯눈으로 보기에도 왕을 배출할 만한 명당이다.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우리 집안의 내력을 가르치며 태종무열왕 김춘추부터 이야기했는데, 명주군왕 김주원이 무열왕의 6세손이기 때문이다. 김춘추는 최초의 진골 왕이요 삼한통합의 영웅이지만 민족주의 사관을 신봉하는 이들에게 외세를 끌어들인 배신자(?)로 비판받는다. 하지만 ‘민족’이란 개념 자체가 20세기 이후 등장했다는 사실을 차치하고도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재단하는 것은 어리석다.642년 음력 8월, 지금의 경남 합천에 있던 대야성이 함락된다. 대야성주 김품석은 김춘추의 딸 고타소의 남편이었다. 성의 함락과 함께 김춘추의 딸과 사위는 죽어 유골이 백제의 감옥에 묻혔고 신라 백성 1천 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이때 김춘추가 받은 충격이 ‘삼국사기’에 생생하다.“춘추는 딸의 죽음을 듣고는 하루 종일 기둥에 기대어 서서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자기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개인의 역사와 거대 역사가 만나는 지점에는 대저 슬픔이 있다. 분노가 변화를 일으키고 고통이 새로운 꿈을 꾸게 한다. 그때의 사람들과 마음들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살았던 집은 이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흙으로 돌아가 버린 월성의 주인들, 그들의 영혼은 천오백 년을 건너뛰어 새롭게 발굴되는 생전의 집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 것인가?

2019-03-24

유물에 담긴 먹고 살기 위한 발버둥… 탄화된 쌀·콩으로 남아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만큼이나 오래된 질문이다. 누군가는 먹는 행위 자체가 삶의 목적이며 즐거움이라 하고, 다른 누군가는 삶의 최소 조건이자 구차한 일상이라 한다. 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욕망이기에, ‘먹다’와 ‘살다’라는 단어가 엄연함에도 ‘먹고살다’라는 단어가 따로 존재한다. 생계를 유지하다, 즉 살림을 살아나갈 방도를 보존하고 지탱한다는 뜻인데, 그야말로 삶 자체다.‘먹방’이 유행이 되다 못해 범람하는 세상이다. 고전적인 요리 프로를 비롯해 요리사들끼리의 경연, 맛집 탐방으로도 모자라 음식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꾸역꾸역 먹어대는 인터넷 개인 방송까지 등장했다. 한국의 특이한 사회현상의 사례로 외신에 소개되기까지 한 ‘먹방’의 원인으로는 1인 가구의 증가, 외로움, 불황 등이 지목된다.멍하니 ‘먹방’을 보노라면 마음이 편하다. 정치나 경제나 사회 뉴스를 볼 때와 같은 부담이 없다. 정보를 얻기 위해 보기보다는 ‘백색 소음’처럼 일상의 익숙한 배경이 된다. 먹는 일만큼 남녀노소 빈부귀천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통용되는 소재가 흔할까? 동서고금의 경계도 없을 터이니, 문득 월성의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 궁금해진다.경주로 가기 전 정보를 찾다 보니 다른 지역에 비해 ‘맛집이 없다’는 평이 왕왕 눈에 띄었다. 여행의 즐거움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식도락인데 맛집이 없으니 아쉽다는 것이다. 2014년에 홀로 훌쩍 여행을 떠나왔을 때는 맛집을 검색하거나 찾아다닐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시티투어버스에 실려 단체로 먹은 점심이 가격 대비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는 기억은 있지만, 단체 관광객을 상대하는 식당에 큰 기대는 무리다. 두부나 한우는 식재료이지 요리가 아니다. 정말 없는 건지 알려지지 않은 건지 모르겠지만 경주 하면 떠오르는 ‘향토 음식’이 없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평소에 맛집 탐방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마음먹고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녔다. 내게 ‘먹일’ 의무가 있을뿐더러 뭐든 가리지 않고 잘 먹는 아들아이가 동행한 덕택이기도 하다. 광고로 넘치는 인터넷 검색은 신중하게 가려 했고,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이나 택시기사 등 현지인의 추천을 구했으며, 가끔은 지나가다가 손님이 많거나 주차장이 꽉 차 있으면 불쑥 들어갔다. 유명한 가게나 지도를 찾아가며 어렵게 갔던 곳보다 불쑥 들어갔다 의외의 맛집을 발견한 경우가 더 많았으니, 우연은 참 즐거운 것이다. 관광이 아닌 여행의 묘미가 여기에 있다.첫날부터 성공한 선택이었다.숙소에서 가까운 중앙시장(아랫시장)에서 소머리국밥과 돼지국밥 골목을 찾았다. 둘이 메뉴를 하나씩 시키고 지역 소주인 ‘참’을 반주로 곁들였다. 첫맛은 옅으나 뒷맛에서 예전의 ‘경월소주’ 같은 쇳기가 느껴진다. 일단 내 입맛에는 별로였는데 현지의 술꾼인 H기자에게 듣자니 먹을수록 참맛이 있다고 한다. 후식으로 떨이하는 떡볶이를 샀다. 떡볶이는 특이하게 무가 들어있어서 시원하고 맛있었다.둘째 날엔 월성을 한 바퀴 돌고 성동시장(웃시장)에서 점심을 먹었다. 경주의 시장들은 특이하고 재미있는 구조인데, 중앙시장이 그렇듯 성동시장도 중심부쯤에 문을 막아 식당 공간을 만들었다. 성동시장의 식당은 아는 사람만 안다는 한식뷔페다. 말로 설명해서 그림이 그려질지 모르지만, 홀과 같은 공간으로 들어가면 여러 아주머니가 갖가지 반찬을 쌓아놓고 기다린다. 약간의 호객과 망설임 끝에 쭈뼛거리며 자리를 잡고 앉으면 아주머니가 마음껏 반찬을 골라 먹으라며 접시와 수저를 주고 밥과 국을 떠준다. 반찬 종류는 비슷비슷한데 서로 벤치마킹한 결과인 듯하다. 제철 나물과 옛날 소시지, 달걀말이와 시래기 국으로 한 끼를 든든하게 먹었다. 가격은 6천원, 요즘 흔치 않은 밥값이다. 혼밥이 어색하지 않도록 아주머니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재미도 쏠쏠하다. 나와 아들이 밥을 먹은 ‘숙이네’ 주인아주머니는 20년 동안 성동시장에서 한식뷔페를 하셨단다.그밖에 경주에서 먹은 인상적인 끼니는 불국사역 앞의 돼지갈비와 국수와 김밥 정식, 법흥왕릉에 갔다가 모량에서 먹은 손칼국수와 콩국수,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의 추천을 받아 황성동까지 택시를 타고 가서 먹은 경주 한우, 그리고 성건동의 닭갈비 등이 있다. 문무대왕릉을 보고 감포항에서 먹은 유명 횟집의 물회는 큰 감명이 없었고, 보문단지의 육회는 너무 유명해서 폐점 시간이 되기도 전에 재료가 소진되는 바람에 문지방도 밟아보지 못했다. 관광지의 음식점이나 인터넷 블로그에서 소개한 맛집들보다는 현지인의 추천이나 차라리 우연히 찾은 식당이 나았다. 그럼에도 끼니때가 다가올 때마다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열어 맛집을 검색하는 일을 반복했으니…. 그런데, 정말 우리가 경주에서 먹은 것이 월성의 사람들이 먹었던 것일까?앞서 밝힌 대로 지금까지 월성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약 40만 점에 이르는 유물 중 가장 많은 것은 기와다. 월성 내부 같은 건물지에서는 건물 지붕에서 눈비로부터 건물을 보호하거나 장식적으로 건물을 돋보이게 하는 기와가 주로 출토된다. 그중 C지구에서 출토된 기와에 새겨진 ‘전인(典人)’이라는 글자와 토기에 새겨진 ‘도부(嶋夫)’라는 글자는 기존에 볼 수 없었던 것이라 주목받는다. 전인은 기와와 그릇을 담당하는 관청인 와기전에 소속된 담당자를 가리키고, 도부는 토기를 만든 사람으로 추정된다.또 월성 해자에서는 정보 전달이나 글씨 연습 등의 목적으로 나무 조각에 글자를 쓰거나 새긴 목간(木簡)이 출토되었다. 특히 ‘병오년(丙午年)’이라고 적힌 목간이 7점 발굴되었는데, 법흥왕13년(526년)과 진평왕8년(586년)이 병오년이니 월성 해자에서 출토된 목간 중 최초로 정확한 연대가 확인된 것이다. 토기, 벼루, 어망추, 흙으로 만든 공과 가시연꽃, 복숭아, 자두 등 식물의 씨앗들, 그리고 소의 어깨뼈를 비롯해 개, 가슴, 곰을 비롯한 동물 뼈들도 나왔다. 그중에서도 곰은 신라 시대 유적에서 최초로 확인된 동물이니, 어떻게 서라벌까지 이동해 왔으며 곰의 뼈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가 수수께끼로 남았다.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지는 못해도 삶의 흔적은 타다 만 쌀과 콩으로나마 남았다. 먹고사는 발버둥은 그들과 우리가 다르지 않을지니 희로애락 또한 어금버금하지 않겠는가? 월성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바라보노라니 느꺼움과 허무함이 동시에 물밀어든다.경주 한국역사문화음식학교를 운영하는 차은정 박사가 ‘서라벌 신문’에 기고했던 ‘신라음식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어 보기로 한다. 삼국시대 초기부터 안정적인 농경 생활을 했던 신라의 식문화는 조리 기구나 시설의 발달로 변화된 조리방법의 차이를 제외한다면 ‘밥상의 구성 면에서 현재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을 것으로 짐작된다’는 의견에 근거해, 월성 사람들의 먹거리를 헤아려본다.콩잎, 재피잎, 가죽나무잎, 더덕, 도라지, 전복, 개암, 무, 땡감 등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장아찌감으로 치는 경상도의 식문화는 월성의 입맛과 닿아 있을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논란의 대상이 되었지만 선사시대부터 단백질 공급원이던 개고기도 빠질 수 없을 것이다. 대추는 가야의 황후인 허황옥의 결혼예물이었고, 경주 민요 ‘효행가’에 등장하는 잉어는 효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고급 보양제였을 것이다.‘삼국유사’의 ‘진정사 효선쌍미’에서 진정의 어머니가 솥을 시주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바 무쇠 솥이 일반화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무쇠 솥으로 익히기 좋은 잡곡 가운데 팥은 불교 의식에 사용됨과 동시에 민간에서 액운을 막는 상징으로 쓰였을 것이다. 중국의 고의서 ‘남해약보’에는 “신라인이 다시마를 채취하여 중국에 수출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다시마를 비롯한 해초 요리도 먹었을 것이다. 경주에서 ‘깨금’이라 불리는 개암열매는 미추왕과 문무왕,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위패를 모신 숭혜전에서 진설되기도 한 식재료였다.월성 사람들의 먹거리로 한정시키면 차은정 박사의 의견대로 약선(藥膳)요리를 떠올릴 수 있다. 약이 아니라 음식으로 병을 고치거나 예방하는 식치(食治)는 황제의 건강관리를 위해서 식의(食醫)제도를 도입했던 당나라 때부터 왕실 음식의 특징이 되었다. 음식만이 아니라 마시는 물, 그리고 소화와 배설에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것이 식치일지니, 배가 고프지 않아도 꾸역꾸역 먹고 마시는 허기는 사뭇 현대적인 경망일지 모른다.아랫시장(중앙시장)은 2일과 7일이 장날이랬다. 장 구경은 언제나 재미있고 괜스레 신난다. 날씨가 추워 평소보다 장꾼들이나 손님들이나 많지 않은 게 아쉽다. 그래도 여전히 벅적벅적한 시장 골목을 두리번거리며 휘돈다. 꽤 많은 동네의 꽤나 많은 장터를 돌아봤건만 날이 갈수록 지역적 특색이 사라지고 비슷한 풍경에 비슷한 먹거리뿐이다. 수입 농산물이 밥상을 점령하고 장터 대신 대형 마트를 찾는 발길이 늘어나니 아무래도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간식거리도 마찬가지다. 아들아이와 갓 구운 호떡을 하나씩 베어 물었지만 여느 호떡과 다를 바 없는 그냥 호떡이다. 황남빵, 찰보리빵 등 경주를 브랜드화한 간식거리들은 관광객들을 위한 상품일 뿐 ‘로컬 피플’의 입맛과는 별개인 듯하다.프랑스 미식가 브리야 사바랭이 했다는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 주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 주겠다”는 말은 이제 너무 유명한 잠언이 되었다. 음식은 우리의 피와 살을 만들고 에너지를 제공하는 동시에 우리의 개성과 존재 자체를 특징하는 매개임직하다. 개개인이 그러하거니와 지역이나 나라도 마찬가지다. 경주의 음식, 신라의 식문화, 월성만의 먹거리를 고민해야 한다.기어이 매의 눈을 뜨고 다른 지역의 장터와 구분되는 특징을 찾아본다. 경주 장에서 눈에 띄는 지역 농산물은 상주 곶감, 예천 땅콩, 청송 사과 정도다. 채소류로는 시래기와 버섯이, 수산물로는 가자미와 도루묵 등의 반건조 어물이 유달리 많다.“새댁! 이거 좀 사가시오!”아직도 나를 새댁이라 불러주는 고마운 할머니가 벌여놓은 난전에는 철 이른 냉이가 소복하다. 숙소에서 끓이거나 무쳐 먹을 방도가 없어 사고 싶어도 살 수 없지만, 생각해보니 경주에서 먹은 음식에 고명으로 냉이가 오른 것이 꽤 많다. 봄이 오면 밥상도 더 푸릇하고 풍성해질 테다. 다가올 봄을 기다리며 군침을 삼킨다.

2019-03-17

“온종일 흙만 팔지라도 역사를 찾는다는 자부심 가집니다”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아는 게 없어 할 말이 없고, 누군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 했던 적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천년의 잠에 빠졌던 월성의 속살을 가장 깊숙이에서 온종일 어루더듬는 사람들의 말이 어눌할지언정 어찌 헐후할까? 월성의 주인은 알에서 태어난 조상을 가진 왕족들이었지만, 월성을 만든 사람은 흙투성이 손을 두려워하지 않는 평범한 백성들이었을 것이다.처음에는 1970년대 황룡사지 발굴 때부터 40여 년간 일해 온 경주 문화재 발굴조사의 ‘산증인’ 최태환 씨와의 만남을 시도했다. 하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최태환 씨의 인터뷰가 여의치 않아, 경주문화재연구소 최향선 학예사의 도움으로 권세규 작업반장을 소개받았다.권세규 씨는 사설 기관을 통해 이루어진 작업을 포함해 10여 년을 경주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일해 왔고, 2014년 12월 월성 발굴조사 작업이 시작될 때부터 지금까지 작업반원이자 작업반장으로 일한 베테랑이다. 겨울철 작업 중단으로 휴가 중인 권세규(74) 씨를 성건동 자택 근처 찻집에서 만났다.- 현재 월성 발굴 조사 현장에서 일하는 작업반 인원은 얼마나 됩니까?△한 조에 약 20명 정도입니다. 월성 전체로 보면 7개 조, 약 140명 정도 됩니다. 날씨에 따라 너무 춥거나 더운 두세 달을 제외하고는 1년 동안 이 인원들이 출근합니다. 건강 문제라든가 집안 형편이라든가 개인적인 사정을 제외하고는 모두 상근하는 편입니다.- 작업반의 성별과 연령 구성은 어떻게 되나요?△연령별로는 작업반원 중 최고령자가 80세이고 최연소자가 50대 중후반입니다. 고령자들은 경력이 10년에서 20년 가까이 된 베테랑이고, 보통은 60대에서 70대가 가장 많습니다. 다들 연령대가 높은 편인데, 정년이 따로 없다가 올해부터 만75세 정년 규정이 생겼습니다. 성별로는 총 작업반원 140명 7개 조 가운데 여성이 1개 조 약 20명인데, 주로 물체질(water-sieving, water-floatation)을 맡고 있습니다. 물체질 조는 발굴 후 남은 흙을 체질해서 씨앗이나 토우 등을 낱낱이 건져내는 일을 합니다. 나머지 6개 조는 주로 남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부부도 서너 쌍 있습니다.- 월성 작업반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습니까?△조사하는 지구별로 구성됩니다. 성벽, 해자, 왕궁 건물지 등 3개 현장에서 각각 조별로 작업합니다. 지금까지 성벽에 2개조, 해자에 3개조, 왕궁 건물지에 2개조가 작업해 왔는데, 현재는 해자 쪽에 일이 많아져서 왕궁 건물지 담당 1개조를 그리로 보냈습니다. 각 조는 작업반장 1명과 조원 19명가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작업 현장을 총괄하는 학예사가 1조에 1인 또는 2조에 1인이 결합되어 있고, 연구원은 학예사 1인당 3~4인이 함께합니다. 연구원들은 작업반원들과 함께 호미질을 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일로 현장에서 바쁘게 움직입니다.- 역할이나 구역으로 작업반이 나뉘어져 있다면 각 분반의 일과를 알려 주세요.△조별로 맡은 구역의 발굴조사 작업을 진행합니다. 하루 일과는 유구 보호를 위해 덮어두었던 ‘갑빠’를 여는 일에서 시작해 각자 맡은 지구에서 발굴조사를 돕습니다. 마무리는 역시 ‘갑빠’를 닫는 일로 끝이 납니다. 일과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입니다. 12시에서 1시까지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작업 중간에 10분에서 20분 정도 휴식 시간이 있습니다.- 월성 발굴 작업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해자를 발굴 조사할 때 목간과 작은 토우, 씨앗 등을 건져냈던 일이 기억납니다. 해자의 펄을 걷어내는 작업이 꽤나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 펄을 모두 물체질 해서 자칫하면 놓칠 수도 있었던 작은 유물들을 빠짐없이 찾아냈다는 것이 보람 있었습니다.2010년 이집트 유적 발굴을 이끌고 있는 고고학자 자히 하와스는, 피라미드는 비참한 강제노동으로 노예들이 채찍질을 당하며 만든 게 아니라 자유로운 노동자 약 1만 명이 날마다 버펄로 21마리와 양 23마리를 식량으로 제공받으며 만들었다고 주장했다.하와스가 그 근거로 제시한 것은 왕의 무덤 주변에 노동자들의 무덤이 자리했을 뿐더러, 노동자의 무덤 벽에 자신들을 ‘쿠푸 왕의 친구’라고 쓴 낙서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란다.덧붙여 발랄한 일설에 의하면 노동자들이 피라미드 건설에 자원한 이유가 물질적 보상만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일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험하고 고된 노동일지언정 ‘의미’와 ‘재미’마저 없다고 치부하는 건 또 다른 오만일지 모른다.만약 허락을 받을 수 있다면 단 하루라도 작업반원으로 일해보고 싶었다. 발굴 작업마저 중단시킨 추위와 꽁꽁 얼어붙은 땅이 야속했다.- 만약 제가 경력 없는 초보자로서 월성 발굴 작업에 참여한다면, 작업반장님은 어떤 일을 맡기시겠습니까?△흙 나르는 것을 시키겠지요.(웃음) 초보자는 현장에서 파낸 흙을 나르는 작업부터 시작하는데, 경력에 따라 역할이 달라진다기보다 원하면 같은 작업을 계속하는 경우도 있고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흙 나르는 작업자는 5명당 1명 정도로 배정되니까 1개 조에 3~4명 정도 필요하지요. 그 외 호미질 하는 작업반원들이 다수입니다.- 월성 작업반에 취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젊은 사람들은 하지 않으려는 일인데 왜 그러시는지…(웃음) 보통 1년 계약직으로 결원이 생길 때마다 충원됩니다. 작업반원의 조건이라면 우선은 맡은 일을 해낼 만큼 건강해야겠지요. 2014년에 발굴조사를 시작할 때는 1945년생 이하라는 나이 조건이 있었습니다. 역할이나 경력에 무관하게 임금은 동일하게 받습니다.권세규 씨는 1945년생, 해방둥이다. 기림사와 감은사지가 있는 경주시 양북면에서 태어나 7세에 부모님을 잃고 형제들에 의지해 어렵게 성장했다. 성인이 되어 결혼한 후에는 아내와 함께 성건동에서 40여년 동안 한식당을 운영했다. 그러다 1995년 위암 수술을 받았고, 투병을 위해 식당을 접고 쉬던 중 건강이 얼마간 회복되면서 일거리를 찾다가 사설 발굴 조사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경주 시내는 개인 주택을 건축하거나 도로를 확장할 때 발굴조사가 필수라, 입찰을 통해 사설 업체에서 발굴조사 작업을 진행한다.) 6~7년 동안 사설 발굴조사에 참여하다가 2014년 12월 월성 발굴조사 작업이 시작되어 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작업반원들을 모은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원하게 되었다.- 2014년 12월 월성 발굴조사가 시작될 때부터 작업에 참여하셨다면 월성의 초기 모습을 기억하고 계시겠네요. 발굴조사의 시작은 어땠습니까?△ 초기에는 잡풀이 무성한 언덕이었지요. 발굴 작업을 시작할 때는 일단 포클레인 같은 장비를 사용해서 가능한 지역을 파냅니다. 그 외에 유구에 탈이 날 수 있는 부분은 삽과 곡괭이, 그리고 호미와 꽃삽으로 작업합니다. 조원 15~16명이 모두 달라붙어 그 일을 하지요. 저의 경우 2014년 12월부터 2015년 말까지 왕궁 건물지에서 일했고, 2016년 초부터 2017년 말까지 해자에서 작업했습니다. 그리고 2018년 초부터 지금까지 왕궁 건물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초기 1년은 최태환 반장 밑에서 일했고, 해자 지역으로 이동할 때 작업반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사설로 다른 지역 발굴에도 참여하셨다니, 월성 지역의 특이점이 있나요?△ 다른 곳과 달리 좀 더 시간적인 투자를 많이 해서 발굴조사를 진행하는 것 같습니다. 현장 관리도 철저하게 하는 편입니다. 여기는 사적(史蹟)이라 춥다고 해도 절대 현장에서 불을 피우지 못합니다. 또 연구자(학예사·연구원)들과 함께 일하니까 무작정 파고 진행할 수 없습니다. 중간에 뭔가 나오거나 의문점이 생기면 바로 작업을 멈추었다가 해결하고 진행하는 식입니다. 예를 들자면 성벽에서 유골이 나왔던 때처럼, 특이하거나 귀중한 게 나오면 작업반원들은 일을 중단하고 물러서고 대신 연구원들이 작업을 합니다.- 발굴조사가 아주 조심스럽게 진행되는군요. 작업반장님이 직접 찾은 유물들은 어떤 게 있나요?△ 사실 왕궁 건물지는 유물이 편(片)으로 나오지 완품은 드뭅니다. 주로 기와의 막새나 귀면 같은 것들인데, 완전한 건 없고 금가고 깨진 것이 대부분입니다. 건물지의 경우 뭔가 좋은 보물 같은 것을 찾는다기보다 삶터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더딘 작업을 하루 종일 하다 보면 좀 지루하기도 하실 텐데…. 그래도 작업에 어떤 ‘재미’를 느끼는 분들도 있나요?△ 물론 하루 종일 성과 없이 흙만 팔 수도 있습니다. 앉은 방석을 깔고 조금씩 움직이면서 땅을 팝니다. 가끔은 지루해서 옆 사람과 잡담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숙연한 분위기에서 진지하게 작업을 진행합니다. 뭘 찾는다고 보상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조금이라도 찾을까 싶어 눈에 불을 켜고 일하지요. 재미까지는 모르겠지만, 작업반원 중에는 농사를 지으면서 부업이자 취미로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천 년 전 왕성이었던 월성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상상해 보셨나요? 상상해 보셨다면 어떤 모습이었을 것 같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왕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곳이었으니 대단한 건물들이 가득하지 않았을까요?- 문화재 발굴 작업의 현장에서 일하며 느끼는 감정은 어떠십니까? 자부심이나 사명감 같은 것이 있으신지요?△ 저 역시 경주 사람입니다. 물론 밥벌이로 하는 일이지만, 내가 태어나 살고 있는 땅에서 선조들의 흔적과 역사를 찾는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2019-03-10

새끼손가락만 한 이방인, 작지만 선명한 존재감 그대로

미국이 멈췄다. 정당간의 협상 실패로 새해 예산안이 통과 시한을 넘기는 바람에 정부기관이 폐쇄되는 ‘셧다운(shutdown)’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미국은 물론 세계 경제를 강타한 사상 초유의 최장기 셧다운은 ‘반(反)이민정책’이라 할 만한 트럼프 대통령의 이민정책 때문이었다.트럼프는 후보자 시절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고, 그 비용을 멕시코가 내게 하겠다!”고 공약했는데, 농담처럼만 들리던 그 말이 ‘카라반(Caravan)’을 둘러싼 갈등과 대립으로 현실화된 것이다.미국-멕시코의 국경 장벽에 까맣게 달라붙은 카라반 즉 이민자 행렬은, 2018년 10월 온두라스의 도시에서 모였을 때만 해도 고작 160여 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과테말라를 거치면서 3천여 명으로 늘어났고, 멕시코에 들어설 무렵에는 7천여 명이 되어 있었다.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극과 극이다. 인권 보호와 온정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있는 반면 거부감을 넘어 혐오감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을 ‘탄생’시킨 반(反)이민 정서와 배타주의는 미국만이 아닌 세계적인 현상이 되어간다. 유럽과 남미 곳곳에서 인종과 문화의 충돌이 일어나고, 한국도 제주도에 예멘 난민이 입국하면서 더 이상 갈등의 무풍지대일 수 없게 되었다.본디 외부자, 이방인, 타자에 대한 내부자들의 심리에는 매혹과 공포가 뒤엉켜 있다. 선진 문물과 문화를 가졌을 때는 신성한 존재로까지 숭배되지만, 수준이 낮거나 빈털터리일 때는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약탈자로 경계의 촉수를 세우기 마련이다. 이러쿵저러쿵해도 곳간에서 인심 나는 법이다. 불황과 경기 침체로 ‘내 코가 석 자’인 지경에 숟가락 하나 들고 달려드는 밥그릇 싸움의 경쟁자를 환대할 리 없다.그렇다면 수도 서라벌에 35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고(‘삼국유사’), 모두가 기와집에 살며 숯으로 밥을 짓고 땔나무를 쓰지 않는다(‘삼국사기’)던 신라에서는 어땠을까?딱 새끼손가락만 했다. 신라월성학술조사단 수장고에서 만난 이방인은 작지만 선명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흙으로 만든 형상, 토우(土偶)다. 신라 토우는 1960년대 황남동 무덤에서부터 토기 뚜껑이나 항아리 장식용으로 확인되기 시작했다.가야금을 뜯는 임산부, 남녀의 성행위, 개구리를 물고 있는 뱀 등 신라 토우는 언제 보아도 재미있고 정겹다.과시하며 겉멋을 부리기보다는 소박하고 솔직한 신라인의 심성이 흙 인형에 고스란하기 때문이다. 2018년 2월에는 월성에서 나온 토우들을 장난감 ‘레고’와 조합한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는데, 레고로 만들어진 유물을 가지고 노는 동안 아이들은 따분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재미있는 놀이로 역사를 손끝에서 느꼈으리라.지금까지 월성 해자에서 출토된 토우는 총 32점으로 사람 형상이 19개, 동물은 12개, 그리고 정체를 확인하기 어려운 게 1개라고 한다. 그중 계림 남쪽에 자리한 월성 1호 해자에서 그가 나왔다. 깊은 눈에 오른쪽 팔뚝까지 내려오는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무릎을 살짝 덮은 옷을 입고 있었다. 팔소매가 좁고 허리가 꼭 맞아 활동성을 고려한 옷은 당나라에서 호복(胡服)이라 불리던 카프탄(caftan)으로 보인다. 그래서 월성 해자 속에 천년이 넘도록 잠들어있던 그는 소그드(Sogd)인으로 추정된다.소그드인은 중앙아시아의 이란계 민족으로 ‘스키타이’ 혹은 중국에서 ‘속특(粟特)’이라 불렸다. 상술이 능해 일찍부터 실크로드 요지에서 교역활동을 벌여 동서 문명교류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한다.특히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했는데 이를 통해 신라까지 진출했음이 유물로 확인된다. 이미 경주 지역에서는 유리공예품, 장식보검 등 다양한 서역산 유물이 출토되었다. 또 괘릉의 호인상(8세기), 용강동 고분 출토 호인상(7~8세기) 등 서역인의 형상을 한 조각물도 여럿 있다.월성 해자에서 출토된 터번을 쓴 토우는 6세기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지금까지의 발견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이방인이다.석굴암에 올랐다가 불국사역 앞에서 점심을 먹고 시내로 돌아오는 길에 괘릉을 들렀다. 돼지갈비와 국수와 김밥의 기묘한 세트 메뉴가 예상보다 만족스러워서 허허벌판의 무덤 앞에 서서도 헛헛함이 덜했다. 경주에는 보물이 너무 많아서 보물이 보물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매력이자 안타까움이다. 평일 한낮의 괘릉도 텅 비어 있었다. 서울의 조선시대 왕릉에는 주변에 CCTV와 함께 접근을 막는 사이렌이 설치되어 있는데, 여기는 없는 건지 보이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 적막지경에 무덤의 주인을 지키는 것은 뜻밖의 이방인이었다.신라의 왕릉 중 피장자가 확실한 것은 능비가 있는 태종무열왕릉과 비편이 출토된 흥덕왕릉뿐이다.이외 기록상 위치와 시대적 형식에 맞아 학계에서 인정하는 것이 선덕여왕릉, 문무왕릉, 성덕왕릉, 원성왕릉, 그리고 헌덕왕릉 등 5기다. 원래 연못이 있던 자리라 돌 위에 관을 걸었다는 속설이 있어 걸 괘(掛)자의 괘릉이라 불리는 이곳은 제38대 원성왕릉으로 추정된다.원성왕 김경신은 선덕왕과 함께 반란을 평정한 뒤 상대등이 되었다가 선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김경신은 자신보다 서열이 높은 김주원을 물리친 것으로도 유명한데,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김주원은 강릉 김씨의 시조인 명주군왕이 되었다.나는 그의 40세손이다. 시조 할아버지의 막강한 경쟁자이자 승자인 원성왕릉 앞에 서니 기분이 야릇한데, 그 야릇함을 더하는 풍광이 무덤 앞을 지키는 석물들이다.돌사자가 한 쌍, 문인석이 한 쌍, 그리고 무인석이 한 쌍인데…. 입구를 지키고 선 무인석의 생김새가 예사롭지 않다. 2m가 넘는 키에 부릅뜬 눈과 매부리코, 말려 올라간 콧수염과 주름진 옷이 이국적이다.그리스의 영웅 헤라클레스처럼 곤봉을 닮은 무기를 짚고 있다.허리를 살짝 비틀어 몸을 젖히고 단체 사진을 찍을 때 “파이팅!”을 외치는 포즈로 주먹까지 불끈 쥐고 있다. 한눈에 보아도 신라인은 아니다.여기까지는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흙으로 만든 서역인상인 호인용(胡人俑)을 본떴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명교류학자 정수일의 지적처럼, 오른쪽 옆구리에 차고 있는 지름 10㎝ 가량의 복주머니가 문제다. 한국의 고유한 장신구인 복주머니를 서역사람이 차고 있다? 그것은 상상이나 모사가 아니라 실제로 신라인과 서역인이 어울려 살았다는 강력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왕릉을 지키는 호위무사라니, 신라에 인종차별이 있었다면 그는 결코 그곳에 서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3월에 왕이 나라 동쪽에 있는 주군(州郡)을 순행할 때, 어디서 온지 모르는 네 사람이 왕의 행차 앞에 나타나 노래를 하고 춤을 추었는데, 그 모습이 해괴하고 옷차림이 괴이하여 사람들이 산과 바다의 정령(精靈)이라 하였다.‘삼국사기’에서 헌강왕 앞에 나타난 정령은 시기상(879년 3월) 황소의 난(874~884) 때 일어난 외국인 대학살을 피해 당나라에서 신라로 도망 온 아랍 상인일 가능성이 높다(이희수). 낯설고 기이한 생김새와 옷차림에 신라인들은 귀신을 본 듯 놀랐지만, 정령 혹은 귀신을 잡아 가두거나 구경거리로 삼지 않는다.‘삼국유사’ 기이편에 기록된 정황은 좀 더 다채롭다.헌강왕이 개운포(지금의 울주)에 나갔다가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길을 잃었다. 동해 용이 조화를 부린 것이라는 일관의 조언에 용을 위해 절을 지으니 비로소 맑아졌다. 선물을 받고 신이 난 동해 용은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나타나서 춤을 추며 풍악을 연주한다. 그리고 용의 아들 중 하나가 헌강왕의 수레를 따라 서라벌로 들어와 정사를 돕게 되는데, 그가 바로…동경(東京) 밝은 달에 밤새도록 노니다가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가.본래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 하리.역사적인 오쟁이를 진 사내, 처용이다. 처용을 울주에서 경주로 데려온 왕은 ‘마음을 잡아 머물도록’ 하기 위해 미녀를 소개해주고 급간 직책도 준다.하지만 명령이나 다름없는 중매로 처용의 아내가 된 미녀는 남편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사람으로 변한 역신(疫神)과 정을 통한다. 통정의 현장을 잡고도 처용은 치정 살인 대신 ‘처용가’를 지어 부른다. 웃는 듯 울며 허위허위 춤추며 노래한다. 칼부림보다 그게 더 무섭다.“(상략)...공이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탄스럽고 아름답게 생각합니다. 맹세코 오늘 이후로는 공의 형상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 문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습니다.”역신을 무릎 꿇리며 사악함을 물리치고 경사스런 일을 맞이하는 상징이 된 처용. 처용설화는 이국적인 용모의 이방인을 신묘한 힘의 소유자로 여기며 존중하던 당시 신라의 분위기를 반영한다.물론 당나라에서 비즈니스를 할 만큼 선진한 문물과 자본을 가졌으니 내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 이면에 이방인의 낯선 문화와 문물을 기꺼이 받아들인 신라인들의 높은 자존감을 인정해야 한다. 열등감이나 패배감을 갖고서는 절대 유연함과 포용성을 발휘할 수 없으니.온정과 혐오, 어느 편의 손도 쉽게 들어줄 수 없을 때는 현실을 들여다봐야 한다. 2018년 교육기본통계를 보면 전국 초등학생의 100명 중 3명 이상이 다문화학생이며 전남(4.3%), 충남, 전북, 경북, 충북 순으로 전체 학생 중 다문화학생의 비율이 높다. 학령인구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국적이 다른 부모를 둔 학생들이 매년 1만여 명씩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낮은 취학률, 높은 학업중단율, 그로 인한 빈부 격차의 심화를 외면한다면 머지않아 새로운 갈등의 요소가 될 것이 확실하다.자욱한 구름과 뽀얀 안개를 감고 덩실덩실 신비와 해탈의 춤을 추지는 않을 지라도, 이제 우리 곁에 바싹 다가온 더 이상 이방인 아닌 이방인들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새끼손가락만 한 이방인, 짐짓 무표정한 그의 두 눈과 벌어진 입을 오래 들여다본다.그에게 물어보고 싶다. 150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21세기 햇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그의 눈에 그때의 신라와 지금의 한국은 얼마나 같고 어떻게 다른지? 과연 서로가 상처 주지 않으면서 공존 공생할 방법은 없을는지?

2019-03-03

신으로 상징되는 자연·운명 앞에 가장 귀한 ‘목숨’을 바치다

공포이기도 하고 미개의 상징이기도 하다. 영화에나 가끔 등장하는 인신공양 혹은 인신공희(human sacrifice·人身供犧) 의식은 현대인들에게는 믿기지 않고 믿고 싶지도 않은 야만이다.그런데 인류의 역사를 두고 보면 인권은 물론이거니와 합리적 이성조차 근대에 이르러 증기기관차처럼 ‘발명’된 개념이다. 수렵시대와 유목시대를 지나 농경시대까지도 고대 문명의 발상지에서는 동서양 가릴 것 없이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페니키아에서는 몰렉 신에게, 마야에서는 우신(雨神)에게, 아즈텍에서는 태양신에게 제의를 올리며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구약에서는 아브라함이 야훼에게 충성을 보이기 위해 아들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하고, 입다는 끝내 자기의 딸을 번제로 바친다. 춘추전국시대 진나라에서는 목공이 죽자 177명의 신하를 순장시켰고, 진시황이 죽자 아들 호혜는 비빈과 궁녀, 무덤을 만드는 데 동원된 장인과 기술자들까지 모두 생매장시켰다.하지만 고대인들이 현대인에 비해 ‘특별히’ 잔인무도해서 생사람을 잡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인신공희는 풍작을 기원하거나, 천재지변을 당해 신의 노여움을 풀거나, 전쟁의 승리를 소원하거나(혹은 패배를 반성하거나), 통치자의 위엄을 보이거나, 죽은 자의 넋을 달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들은 ‘신’으로 상징되는 자연과 운명 앞에서 그들이 바칠 수 있는 가장 귀한 것, 목숨을 바쳤다. 그들은 다만 자신을 둘러싼 어둠 앞에서 턱없이 무력했고, 그래서 어리석은 맹목이었을 뿐이다.2017년 5월 16일, 경주문화재연구소는 월성 발굴현장에서 2015년 3월부터 진행 중인 정밀발굴조사의 중간 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바야흐로 보물창고이자 비밀의 창고가 열린 셈이다. 그때 새롭게 밝혀지거나 최초로 확인된 수많은 출토물 중에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가장 많이 받은 것은 성벽을 본격적으로 쌓기 직전인 기저부 성토층에서 출토된 2구의 인골이었다. 국립경주박물관과 경주문화재연구소가 공동 기획한 특별전시 도록 ‘신라 왕궁 월성’에 실린 ‘성벽 밑에 잠들어 있었던 사람들’ 사진을 들여다본다. 나란히 누운 둘의 머리는 북동쪽을 향해 있다. 한 구는 정면을 향해 팔다리를 가지런히 하여 누워있는 앙신직지(仰身直肢)의 자세이고, 다른 한 구는 몸을 약간 틀어 반대편 인골을 바라보는 자세다. 두 인골 모두 성인이고 외상(外傷)의 흔적 없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전한 형태였다고 한다.발치에는 흙으로 만든 항아리 3개와 손잡이가 달린 컵이 놓여 있고, 머리 주변에 남은 나무껍질로 방사선 탄소연대 측정을 하니 5세기 전후에 묻힌 것으로 확인되었다. 키 166㎝의 인골은 골반과 후두돌기의 모양으로 미루어 남성임이 분명했다. 159㎝ 크기의 인골은 성별이 불분명한데, 인골의 골반에서 채취한 콜라겐으로 체질인류학 DNA 검사를 진행하면 건강상태와 질병, 식생활과 유전적 특성 등이 밝혀질 것이라고 한다.(2019년 1월 4일 확인한 바, 연구 결과 한 구는 50대 남성이고 다른 한 구는 50대 여성의 인골임이 밝혀졌다고 한다.)신라인들은 왜 성벽 아래 사람을 묻었을까? 기자들의 질문에 경주문화재연구소 박윤정 학예실장은 “별도의 매장시설이 없어 사람을 제물로 바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고, 이인숙 학예사는 “인골이 매우 가지런한 형태로 발견되어 산 사람을 묻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답했다.다시 도록 속의 앙상한 뼈를 들여다본다. 그들은 자연사하지 않았다. 고통에 몸부림치거나 저항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그들을 죽여 월성의 기초공사가 끝나고 성벽을 쌓아올리기 직전에 시신으로 묻었다. 1500년을 뛰어넘어 해골로 발견된 신라인들은 바로 ‘인주(人柱) 설화’로만 전해오던 풍습의 고고학적 증거인 것이다.경술 개경의 도성 사람들 사이에 유언비어가 돌았는데, 왕이 민가의 어린 아이 수십 명을 잡아다가 새로 짓는 궁궐의 주춧돌 아래에 묻는다는 것이었다. 집집마다 경악하여 아이를 안고 도망쳐 숨는 자들도 있었다. 악소(惡小)들은 그 틈을 타서 재빠르게 도둑질을 자행하였다.‘고려사’ 충혜왕4년(1343)의 기사는 이른바 ‘인주(人柱) 설화’에 대한 기록이다. 인주, 말 그대로 사람을 물속이나 흙 속에 파묻어 ‘사람 기둥’을 세우는 것이다. 거대한 토목공사인 성 쌓기, 둑 쌓기, 다리 놓기 등을 할 때 사람을 기둥으로 세우거나 주춧돌 아래 묻으면 제방이나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었다.신석기시대 산동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해대(海岱)는 동방문명이 이루어진 핵심 지역인데, 치평 교장포 유적의 건물과 성벽에 어린아이 혹은 성인을 건물의 기초를 다지는 공사의 희생으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배진영.2009) 기원전 17세기부터 11세기까지 존재했던 중국의 최초 왕조 상(은)나라는 순장을 비롯한 인신공양의 풍습이 만연했던 것으로 유명한데, 수도의 은허 궁전 토단에서 수십 구에 이르는 인신 제사의 흔적이 발견된 바 있다. 일본에서도 성과 제방과 다리를 건설하는 난공사 때 사람을 제물로 바치던 ‘히토바시라(人柱)’의 풍습이 에도시대까지 있었다고 전해진다.고대의 토목사업은 전쟁만큼이나 중대한 나랏일이었다. 사업의 성패가 국운의 흥망을 좌우할 정도였다.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이려면 우선 많은 노동력을 조달할 수 있는 집권력과 막대한 지출을 감당할 만큼의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했지만, 현장에서 직접 쓰이는 측량과 토목 기술 또한 중요했다. ‘삼국시대 고고학개론1’에 실린 논문 ‘토목기술과 도성조영’(권오영)에는 ‘튼튼하고 단단한 성곽을 쌓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애쓴’ 고대인들의 분투가 고스란하다.장비와 제반 조건이 열악한 상태에서는 끊임없는 시행착오와 위험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토질을 개량하고, 중력에 의해 흘러내리는 돌과 흙을 최소화하는 각을 찾고, 경사 진 지형을 이용하거나 주변에서 흙을 캐와 덩어리를 쌓는다. 이때 식물의 잎과 줄기 등을 층층이 까는 부엽공법으로 미끄러움을 줄여 구조물의 붕괴에 대비하고 비와 눈에 의한 누수현상을 막는다.월성의 성벽 또한 점성이 서로 다른 흙을 비롯해 여러 종류의 재료와 다양한 축조공법으로 만들어졌다. 성벽의 최상부에는 사람 머리 크기만 한 돌이 4~5단 가량 무질서하게 깔려 있는데, 이것은 월성의 특징 중 하나로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한 기능으로 보인다고 한다. 이토록 필사적으로 성벽을 쌓은 것은, 왕성이야말로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보존하는 최후의 방어시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당시 최고의 기술력과 막대한 인력과 물적 자원을 총동원했음에도 홍수가 나서 무너졌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유례이사금7년(290) 등에 나온다. 따라서 문헌의 기록과 더불어 C지구에서 다량 출토된 연호명 기와로 미루어 월성 성벽이 여러 차례 수리와 보수를 거쳤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그럼에도 쌓으면 무너진다. 무너지면 다시 쌓는다. 이처럼 도저한 불가항력 앞에서 고대인들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통해 이루려 한다. 토지의 신이든 물과 바람의 신이든 어떤 신령에게든 희생 제물을 바쳐 애써 쌓아올린 성벽과 다리와 건물이 무너지지 않도록 기원하는 것이다. 간절한 만큼 치열했고, 처절한 만큼 끔찍한 사람 기둥의 설화가 월성 성벽 발굴을 통해 국내 최초로 확인되었다.사람이 사람의 값어치를 어떻게 매기는가, 말하자면 ‘사람 값’이 그 사회의 성숙도와 문화 수준의 척도다. 502년 지증왕은 왕이 죽으면 남녀 각각 다섯 명씩을 함께 묻는 순장 풍습을 국법으로 금한다.(그러니까 최소 6명 이상의 순장자가 확인된 황남대총은 지증왕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아들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527)하기 전에 생명에 대한 아버지의 자각이 있었다. 진평왕 때(600)는 수나라 유학파 원광법사가 세속오계 중 ‘살생유택’을 설파하고, 비슷한 때 백제에서도 법왕이 일체의 살생을 금해 새들을 풀어주고 고기잡이 도구를 불사르게 한다.공식적인 인신공희는 사라졌다. 하지만 애당초 인신공희는 공개된 장소에서 공공연하게 행해지지 않고 대부분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2000년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 부지에서 발굴된 통일신라시대 우물에서는 동물 뼈와 함께 8~9세쯤 되는 어린아이의 전신 유골이 나왔는데 그 인골이 제의용인지 여부는 아직 논란중이다. 월성을 방어하는 시설인 해자에서 출토된 인골은 지금까지 전쟁이나 전염병으로 인해 묻힌 사람으로 보고되어 왔지만 인주 설화가 확인된 이상 새로운 접근도 필요해 보인다.‘고려사’에 이어 ‘고려사절요’ 희종6년(1210)에도 최충헌이 대저택을 지으며 “몰래 남녀 어린아이를 잡아다가 오색으로 옷을 입히고 저택 네 귀퉁이에 매장하여 토목의 기운을 물리친다고 한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조에도 성종25년(1494) 군(君)과 옹주가 집을 지으며 주춧돌 밑에 어린아이를 묻었다는 거짓말을 유포한 자를 체포하라는 명이 내렸고, 사관이 덧붙이길 소문이 퍼지자 경기·충청·황해도의 사람들이 아이를 안고 산에 올라가 피하느라 마을이 텅 비는 데 이르렀다고 하였다.물론 후대의 인주 설화 대부분은 유언비어로 밝혀졌다. 부자와 권력가들의 탐욕과 전횡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낭설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이 엄하다고 죄가 없을까? 어두운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인간의 비밀은 계속된다.1500년을 훌쩍 뛰어넘어 인골로 다시 세상의 빛을 본 두 사람, 그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인신공희의 제물은 주로 이민족이거나 노예이거나 죄인이었다. 때로는 ‘순결한’ 처녀와 어린아이이기도 했다. 드물게는 순교자 이차돈과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의 주인공처럼 공동체를 위해 스스로를 보시하는 경우도 있었다.인골에서 추출한 DNA 검사를 통해 우리는 어떤 비밀을 알게 될까? ‘사람 기둥’이 되어야 했던 두 사람의 정체는 어디부터 어디까지 밝혀질까? 죽어 성벽 아래 묻힐 때 그들의 마음이 원한이었을지 희생정신이었을지 아니면 얼떨떨함이나 황망함일지 알 수 있을까?한 쌍의 백골 앞에 넋을 놓고 있노라니, 문득 터널과 댐과 고속도로 인근에 외로이 서 있는 위령비들이 떠올랐다. 언젠가 무심히 비문을 읽다가 ‘순직자’이거나 ‘산업전사’인 그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음에 화들짝 놀란 적이 있다. 누군가의 삶이 희생된 자리에 누군가의 삶터가 지어지는 이치는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니, 인간의 역사란 참으로 슬프고도 잔인하다.

2019-02-24

건물이 무너지면 짓고 또 지었던, 사람들의 600년 삶의 터전 ‘월성’

“책임감? 월성만큼 크고 무겁습니다.”그 또한 경주에서 나고 자랐다. 1970년에 그가 태어난 황남동은 경주 시내의 주택 밀집지였다. 현재 천마총부터 황남초등학교를 거쳐 황리단길로 이어지는 지역이다. 무덤 위에 지은 삶터, 그의 동네와 그의 집 아래도 전부 신라 무덤이었다.지금 왕성이라고 이야기하는 월성도 학창시절 즐겨 찾던 소풍 장소였을 뿐이다. 유적과 사적은 특별한 관심거리라기보다 공기처럼 익숙한 공간이었다. ‘어쩌다 보니’ 정해진 길을 따르는 듯, 경주에서 초중고를 졸업한 뒤 경북대에서 고고학을 전공했다. 이후 학예연구사로 문화재청에 입사해 조사제도와 관련된 부서에서 일했다. 대전에서 근무하다 경주로 돌아온 것은 2015년이었다.처음에는 월성전담연구관으로 내려왔다가 2017년 연구소장에 취임했다.돌아온 고향 경주에서 월성의 무게감만큼이나 큰 책임감으로 일하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이종훈 소장(50)을 신라월성학술조사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홈페이지를 보니 담당한 일이 매우 다양합니다. 월성뿐 아니라 쪽샘 지구, 황룡사지, 동궁과 월지 발굴조사 등 연구소가 하는 일이 많은데, 소장님이 월성전담연구관이었던 만큼 월성에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계시나요?△연구자인 동시에 경주 사람으로서 관심도 있고 애정도 있습니다. 신라 왕경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곳이 왕이 거주하는 왕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라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궁궐이 가장 중요한 까닭은 궁이라는 곳이 당시의 문화와 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왕성, 왕경, 궁성이라는 표현이 혼재되어 있는데 어떻게 써야 하나요?△저희는 ‘빛의 궁궐 월성’, ‘신라 왕궁 월성’ 등으로 궁궐과 왕성이라는 표현을 모두 씁니다. 왕궁과 궁궐은 같은 표현이고, 궁성은 성벽에 대한 문제로 이견이 있긴 하지만 문헌에 궁성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대궁(大宮)이라고 표현할 때는 남궁과 동궁, 전랑지의 북궁까지 모두 묶어서 씁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논쟁이 있지만 편하게는 왕궁도 좋습니다.- 월성의 특별한 의미를 좀 더 설명해 주신다면?△월성은 다른 어떤 유적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다 떠나가고 했던 게 아니라 그 공간에서 건물을 짓고 무너지면 또 짓는 과정을 반복하며 600년 동안 살아왔으니까요. 경주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월성을 중심으로 도시 계획이 만들어졌습니다. 고고학적으로 어떤 유적도 600~700년의 시간을 하나에 함축적으로 가진 것이 없습니다. 일본 나라에 가면 평성경(平城京·헤이죠쿄)이라고 있는데 그건 기껏해야 100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사용했던 성입니다. 월성은 그의 몇 배에 이르죠.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곳입니다.- 월성 발굴조사 작업은 언제 시작되었고,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주변부가 아닌 월성 내부에 대한 전면적이고 본격적인 발굴은 2014년 12월 12일에 개토제(開土祭·고유제)를 지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올해 12월이 되면 꼬박 5년이 되는 셈이지요.- ‘월성이랑’을 통해 설명을 들었는데,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935년 신라 멸망기의 유구와 유물이라더군요. 시간적으로 가장 후대의 것인데, 그 아래를 또 파볼 수 있나요? 그런데 밑을 파내면 위가 훼손될 텐데….△그렇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발굴 중에도 밑의 것을 확인만 하고 다시 덮습니다. 전공자로서의 욕심으로는 다 파보고 연구 성과를 남기고 싶지요. 하지만 그것을 우리 당대에 모두 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게 저희의 판단입니다. 1979~1980년에 해자를 조사하며 동물 뼈와 씨앗 등을 발견했는데, 기록으로는 남겼지만 그때 기술로는 환경 식생 보고를 할 수 없었고 지금처럼 식생환경을 복원한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불과 20년에서 30년 전의 일인데 그사이 기술이 월등하게 발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알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앞으로는 확인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 당대에 모든 걸 다 한다는 건 과욕이고, 욕심을 부리는 것 자체가 우리가 확인해야 하는 수많은 과거를 우리 손으로 지우는 일이 되어버립니다.경험은 상상을 제한한다. 834년 동안 신라의 왕궁이었던 월성의 가치는 지금 우리가 아는 지식과 정보로 가늠할 수 없다. 신라가 삼한을 통일할 즈음이 되면 규모가 있고 화려한 건물들은 동궁이나 북궁 등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통일 전까지 월성 내부에 머무르며 안전성을 추구했다면 통일 후에는 보다 개방적으로 왕성을 확장했던 게다. 그래서 2017년 가을 현장 공개한 ‘가’ 지구(동궁과 월지 근처로 화장실과 수세식 변기가 발굴됨) 건물에 비하면 월성 내 C지구 건물의 기초부들은 규모와 수준면에서 격이 좀 떨어지는 게 사실이라고 한다.- 중심이 이동한 건가요? 지하레이저로 C지구가 가장 큰 건물지라서 발굴을 시작한 게 아닌가요?△중심이 이동했을 수도 있고 우리가 발굴한 지역이 중심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요. 지하레이저로는 중심으로 보였는데 막상 파 보니 생각보다 격이 높은 건물이 아니고 관청 정도의 건물지가 확인된 것입니다. 왕이 여기서 기거했는지 아닌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성의 효용성이 다한 것은 아닙니다.- C지구가 아니더라도 월성 내 어딘가에 왕의 침전이나 정전 같은 게 있을 텐데요?△그걸 확인하려면 월성이나 주변부에 대한 조사가 앞으로 10년 이상 더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마음은 빨리 하면 좋겠지만 그런 욕심들이 제대로 조사를 못하게 하니까 현재 수준에서 최선의 조사를 하는 게 목표입니다. 지금 데이터를 최대한 만들어두고 후대에 연구하게 돕는 거죠. 미래에 어떤 기술이 나와서 어떤 걸 알 수 있을지 모르니까.- 2025년 기한은 폐기되었다고 들었는데, 앞으로 발굴조사는 어떻게 진행되나요?△시민들에게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려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당대에 보고 싶은 마음도 잘 압니다. 그래서 무작정 기다려달라고 할 수 없으니 월성의 속살을 조금씩 공개하면서 이해하는 공간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예전처럼 동시다발로 한꺼번에 막아놓고 하는 게 아니라 경주 시민들이 이 공간을 쓸 수 있고, 관광객들 또한 들여다볼 수 있도록 옮겨가며 진행할 예정입니다.앞으로 ‘월성이랑’ 옆의 개방 공간은 점점 줄어들고, 언젠가 C지구도 다시 덮어서 정비하고 발굴 결과를 이해할 수 있게 일정 정도 공원처럼 꾸미고 조사 지역을 이동할 것입니다.아득해진다. 시간이 팽창되는 느낌이다. 연구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노라면 ‘이 시대만 사는 사람들이 아니구나!’는 생각이 든다. 당장에 눈앞에 보이는 것들의 밑을 더 파볼 수도 있지만, 지금 발굴하는 층을 모두 끝내고 그에 대한 연구와 합의가 완결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지금 할 수 있는 일 이상은 후대의 몫…. 현재에서 과거의 비밀을 파고들지만 미래 또한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그것이 역사 연구자들의 자세다.월성 발굴조사의 고민은 여러 시기의 유구들이 중복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므로 조사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내부 환경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터이니 ‘어느 시기의 유구를 중심으로 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 고민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다른 한편으로는 개발론을 비롯한 외풍과 개별적인 연구자의 욕심에 맞서 중심을 잡고 ‘버텨야’ 한다. 학계와 시민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고 합의점을 찾아나가는 게 국가기관의 일일 터이니.- 월성 발굴조사의 특이점은 다양한 행사를 포함해 대중적인 홍보나 공유 작업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뜻인가요?△실제로 저희의 고민 중 하나가 그런 것이었습니다. 발굴조사는 당연히 학술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하지만 시민들은 자신들의 생활과 동떨어진, 쉽게 다다갈 수 없는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주의 경우 워낙 유적이 많다 보니 저를 비롯해 경주 시민들은 어릴 때부터 주변에서 발굴 작업을 보고 자랍니다. 지금도 그런 공간이 제법 있지만 현장이라는 곳에 담장을 쳐놓고 들여다보지도 못하게 하다 보니, 경주 시민들은 불신과 함께 발굴조사가 지역 경제에 걸림돌이 된다는 오해 내지는 잘못된 이해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관광지도 실제로 발굴조사를 통해 유적을 정비하고 차후 관광지로 활용하게 된 것입니다.예를 들면 안압지, 지금 동궁과 월지라고 칭하는 지역의 복원도 학술적 논란은 있지만 발굴되고 연구되어 관광 상품으로 쓰이는 순서를 거쳤습니다.그것을 보기 위해 각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고, 발굴 자료들이 역사로 서술되고 교과서에 실리는 과정에 대한 이해를 때로는 못 하기도 하고 안 하려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곳이 문화 공간이 될 수 있다, 또 다른 형태의 문화자원이자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발굴조사 현장을 개방하는 겁니다.- 일반 공개 프로그램은 언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월성 발굴조사가 시작되던 2014년 기본 계획을 세우고,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해서, 2016~2017년 대중적인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학술행사와 별개로 교육과 강연, 체험과 탐방, 전시 등을 꾸준히 진행합니다. 2018년까지 3년 동안 사진촬영대회 3회, 야간 탐방인 ‘빛의 궁궐, 월성’ 3회, 강연 행사인 ‘대담신라(對談新羅)’는 4회가 진행되었습니다. 상시적으로 ‘월성이랑’도 운영하고 있고요.- 경주문화재연구소 인원 150여 명, 월성학술조사단 60여 명으로 할 일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저도 경주를 여행하는 동안 줄곧 중얼거렸습니다. “이거 어떻게 하면 좋지? 이걸 어떻게 다 하지?”(웃음)△경주가 할 수 있는 일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고, 하는 일도 많습니다. 경주가 가진 문화유산은 한국에서 단연 최고이고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습니다. 경주와 교토를 비교하면서 관광객이 교토만큼 와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하지만 비교와 별개로 경주를 찾는 관광객이 연간 천만이니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문제는 경주를 찾는 사람들이 경주에서 누릴 수 있는 프로그램이 불국사나 석굴암 같이 고정된 게 아니라, 신라 문화를 보다 직접적으로 체험할 공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월성 발굴조사 작업이 의미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월성 발굴 작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언제입니까?△2015년 3월 기자간담회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사실 비도 오고 발굴된 것도 거의 없었던 시점인데, 기자들이 40명 이상 와서 열띤 취재경쟁을 벌이는 것을 보고 일반적인 이해와 달리 월성이 갖는 무게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야 학술적으로 월성이 중요하니 조사를 잘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월성의 의미가 받아들여지고 있구나 생각하니 책임감과 함께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월성 발굴조사가 앞으로 50년이 걸릴지 100년, 200년이 걸릴지 모른다고 하셨는데…. 소장님은 여기 계속 계시나요?△저는 계속 있고 싶은데 공무원이라…(웃음) 월성이 가진 무게감만큼 저도 연구자로서 개인적으로 책임감이 큽니다.

2019-02-17

축구장 27개 크기 월성, 더 이상 버려진 언덕이 아닌 ‘현장’

월성은 흙으로 성벽을 쌓은 토성(土城)이다. 동서 길이 890m, 남북 길이 260m, 바깥 둘레 2340m로 총 면적은 22만2천㎡에 이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가 3023척, ‘동경잡기’에는 1023보로 규모가 기록되어 있다. 말하자면 축구장 27개 가량인 셈인데, 한눈에 그 넓이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언덕인데다 발굴조사를 진행 중인 지역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여전히 평범한 소나무 숲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천년의 깊은 잠을 자던 월성이 단번에 눈을 뜰 수는 없다. 그럼에도 발굴조사가 시작된 후로 변화의 조짐은 분명하다. 월성은 편의상 월정교와 인접한 서편부터 A, B, C, D 네 지구로 나뉘어 있는데, 현재는 C지구를 포함해 A지구와 해자 등을 발굴조사 중이다. 월성은 더 이상 버려진 언덕이 아닌 ‘현장’이다.4년 만에 월성을 다시 찾은 날, 발굴조사 현장 귀퉁이에 세워진 팻말 하나를 보았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해설 및 교육팀 ‘월성이랑’에서 진행하는 발굴현장 공개 프로그램을 홍보하는 것이었다. 전화를 걸어보니 발굴 작업이 동계 휴가에 들어가면서 하루 5차례 이루어지는 정기해설(10:00, 11:00, 13:30, 15:00, 16:30 1회당 30분)도 일시 중단된 상태라고 했다. 기사를 쓰고 나서야 전화 통화 중 오해가 있었다는 걸 확인했다. 동절기 발굴조사는 쉬어도 정기해설은 쉬지 않고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추후에 정식으로 취재 요청을 해야겠다 생각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곧바로 다시 전화가 왔다. 정기해설이 아니더라도 요청하면 와서 해설을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때마침 전국에 한파주의보가 발령되고 경주도 건조주의보와 함께 최저 기온이 영하 6도까지 떨어진 날이었다. 그런 날 달랑 두 명의 방문객을 위해 해설사가 나오겠다니, ‘일’로만 생각해서는 절대 보이지 못할 ‘열정’에 이미 감복했더랬다.실제로 ‘월성이랑’ 프로그램에 참가한 건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서였다. 관련된 지역과 유적을 찾고 월성도 세 번쯤 돌아보았지만 혼자 하는 ‘공부’에는 한계가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지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 먼저 보고 오랫동안 흩어진 구슬을 엮어온 길잡이를 따라 쫓으면 더 정확히 풍부하게 볼 수가 있다.경주 곳곳을 다니는 동안 네 차례 해설사의 도움을 받았는데, 모두 무료였고 공짜로 듣기 죄송할 만큼 만족스러웠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동장군도 물리칠 만한 그들의 열정과 헌신성이 나 같은 시큰둥이에게마저 감동적이었기 때문이다. 역사가 강단이나 연구 논문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경계를 허물고 생생해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나의, 그리고 시간의 신비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이상이다.2017년 8월 신설한 ‘월성이랑(月城以朗)’은 월성에 순우리말 ‘이랑’을 붙여서 ‘국민과 함께 하는 월성 발굴조사’를 의미하며 ‘신라 화랑(花郞)’의 젊고 활동적이며 진취적인 이미지를 담았다고 한다. 월성 내 석빙고 바로 앞에 작은 사무실이 있는데, ‘월성이랑’ 전체 인원 8명 중 4명씩 교대로 상주하며 해설을 담당한다.이전까지 ‘문화재 발굴 현장’이라면 으레 높은 벽과 천막에 둘러싸인 비밀스러운 장소로 인식되어 왔다. 일반인의 출입은 당연히 통제되었고 무엇을 어떻게 발굴하는지도 깜깜소식이었다. 그러다가 서울 풍납동 발굴 때부터 현장을 일반에 공개하게 되었고, 이후로는 발굴조사에 지장이 없는 한 현장을 개방하고 조사 결과를 공유하기 위해 애쓴다. 문화재에 대한 마인드가 ‘보호’하는 대상이 아닌 ‘공유’할 가치로 바뀐 것은 우리 사회의 수준이 그만큼 변화 발전했다는 증거이리라.‘월성이랑’은 2018년 한 해 상설 이용자만 3600명, 연간 2회의 대민 행사까지 포함하면 더 많은 수가 이용한 인기 프로그램이다. 발굴조사의 과정 및 성과와 출토 유물에 대한 해설이 주 내용인데, 발굴조사는 계속 진행 중이기 때문에 시시때때로 정보가 교체되거나 추가된다.게다가 해설자들의 전공과 관심 분야가 각각 달라 언제 와도 새로운 해설을 들을 수 있다. 꾸준한 운영에 일주일 간격으로 수시 방문하는 ‘덕후’까지 생겼다니, 주마간산으로 대충 둘러보고 돌아서는 대신 ‘월성이랑’의 문을 두드려보면 어떨까?오늘의 해설은 문헌 전공자인 이성문 연구원이 맡아주었다. 그는 ‘월성이랑’ 사무실 옆 소나무 숲의 ‘숭신전지’부터 설명을 시작했다.월성 내 조선시대 흔적은 석빙고와 숭신전지 2곳 뿐이다. ‘고종실록’ 상소에 등장하는 숭신전지는 석탈해를 모시는 사당으로, 1980년에 현재의 탈해왕릉 옆으로 옮겨졌다.그때까지 C지구 남천 쪽으로는 석씨 후손들이 살며 화전으로 농사를 지었다. 월성은 19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승마장과 국궁장으로 사용되었기에 ‘월성이랑’ 사무실 옆 불룩한 언덕은 신라시대 건물터가 아니라 국궁장 사대(射臺)였다고 한다.파사이사금 때(101) 만들어졌지만 월성이 왕성으로 제 역할을 한 것은 5세기 후반으로 추정한다. 가장 큰 곡절은 백제 개로왕의 죽음에서 비롯되었다. 고구려 장수왕은 남쪽으로 세력을 뻗히면서 한강 유역의 백제 위례성을 공격한다. 왕성이 함락할 위기에 이르러 후일 동성왕이 되는 백제 사신이 신라 자리마립간에게 구원을 요청하러 달려온다. 그러나 구원병이 가던 중 개로왕이 죽음을 맞으니, 백제왕의 최후를 목도한 자비마립간의 위기감은 어느 때보다 생생했을 것이다.그때 자비마립간이 명활산성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월성은 소지마립간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18년 동안 왕이 없는 왕성이 된다. 월성의 진짜 주인은 신라의 체제를 정비하고 우경으로 생산력을 발전시킨 지증왕으로 추정되는데, 이 무렵부터 월성이 왕성으로 역할을 하게 되면서 명실상부한 신라 흥망성쇠의 중심이 되었다.자리를 옮겨 성벽에 올라 해자를 내려다보며 해설이 이어졌다. 토성인 월성의 성벽에 지금 드러나 있는 돌들은 축성 과정에서 비 같은 자연현상에 의해 허물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다. 성벽 해자 바깥의 외부 건물지의 경우 통일신라기 것으로, (육조거리 같은 관청지가 아니라) 내물왕릉 등으로 추측하는 고분들과 가까워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아닐까 추측한다.1979~1980년 시굴조사를 하고 1984년부터 30년 동안 발굴조사를 진행해 완결한 월성 해자는 사뭇 독특하다. 평지성의 해자는 주로 수로(물길) 형태인데, 월성에는 경주국립박물관부터 월정교까지 거리에 수혈(웅덩이)이 6~7개 배치되어 있다. 수혈식 해자의 웅덩이 길이는 긴 것이 150m, 폭은 50~80m에 이른다. 동고서저, 북고남저의 지형을 이용해 수로를 따라 물이 흘러가도록 했으니 월성은 당대의 토목 기술을 총동원한 정교한 성이 분명하다.인간은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면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신라의 삼국통일(삼한통합)은 한반도의 정치사뿐 아니라 월성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통일 이후 가시적인 적이 사라지면서 월성의 해자는 방어용에서 조경용, 혹은 부분 매립해 건물지로 쓰는 등 용도가 변경된다. 깔끔하게 석축을 쌓고 꽃도 심는다. 해자에서 대량 발견된 가시연꽃(현재 멸종 위기 식물 2급, 보존 1순위 식물) 씨앗은 전쟁터에서 꽃밭으로 변모한 월성을 상상하게 한다. 마침 월성에서 첨성대에 이르는 길이 경주시에서 조성한 꽃밭이라니, 겨울이라 그곳에 만개한다는 유채꽃과 핑크뮬리는 보지 못했지만 말 그대로 ‘꽃대궐’인 아름다운 월성을 상상함직하다.월성 발굴조사는 성벽과 해자, 그리고 왕궁 건물지 3부분으로 나누어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중 건물지의 C지구에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전체를 조망하며 해설을 듣기에 맞춤하다.“저 사각형으로 칸칸이 나눠진 구역을 뭐라고 부르나요?”“‘그리드(grid·격자)’라고 합니다.”“저건 유물을 보호하기 위해 덮어놓은 거죠? 저 파란 방수천은 뭐라고 부르나요?”“유물과 유구를 보호하기 위해 덮어둔 게 맞습니다. 속어인데, 현장에서는 ‘갑빠’라고 부르지요.”일정하게 나뉜 ‘그리드’에는 파란 ‘갑빠’가 덮이고 모래주머니로 고정되어 있다. 즉시즉시 떠오르는 궁금증에 답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월성이랑’에 참여하는 즐거움이다.“여기서 뭐가 나왔어요?”“언제까지 발굴해요?”“복원은 어떻게 해요? 왕궁 발굴 복원을 빨리 해서 관광 상품으로 만들었으면….”복원에 대한 일반인의 반응과 주로 나오는 질문들이란다. 그에 대한 문답이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월성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싹튼다.2007년 월성 지하 레이다(GPR) 탐사 결과 14개 구역 내에서 최소 20개 동 이상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발굴조사 결과 중앙부에 자리한 C지구에서만 17개 이상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제일 먼저 드러난 935년 신라 멸망기의 유구와 유물이다. 씨앗과 곡물이 많이 나온 부분은 2개 정도의 창고, 나머지에서는 벼루가 많이 출토되어 관청으로 추정한다.사실 ‘발굴’이라고 하면 ‘보물찾기’로 생각하기 쉬운데, 맨 위층의 통일신라기 유물 유구에 대단한 보물은 없다. 월성에서 발굴된 것들은 대부분 기와편으로 지금까지 40만여 점에 이른다. 이성문 연구원은 문헌전공자답게 월성에 남은 보물이 없는 까닭을 ‘고려사’의 기록에서 찾는다.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항복하러 고려에 갈 때 보물을 실은 수레 길이만 30리가 넘어서 개성 사람들이 모두 구경 나왔다니, 그때 신라의 보물을 깡그리 가지고 가지 않았을까?월성 발굴조사는 2014년 12월 시작해 원래는 2025년으로 기한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한 기한 없이 꾸준히 묵묵히 진행되고 있다. 현장에서는 발굴일수만 따지는데 행정적인 단위로 몇 개년 계획으로 진행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월성이랑’의 해설 대상은 월성을 방문하는 모든 국민들이지만 특히 수학여행, 소풍 등 현장체험학습으로 월성을 찾는 초중고 학생이 많다. 해설자들은 아이들에게 10년쯤 지나 어른이 되어 와도 이 모습 그대로일 수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혹시 관심이 있다면 관련 학문을 전공해서 월성에서 일할 수도 있을 거라고, 월성은 아주 오래 우리 곁에 있어왔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함께할 테니까.마지막으로 역사 전공자로서, 월성 해설자로서 국민들, 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를 물었다. 이성문 연구원은 진지하게 말했다. “오래 걸릴 거니까 서두르지 말고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웃으며 덧붙였다. “월성이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오십시오!”

2019-02-10

겨울에 물든 황량하고 적막한 비밀을 깨우다

북극의 한기가 남하하면서 한반도를 꽁꽁 얼린 날이었다. 북극하면 빙하와 에스키모와 새하얀 곰부터 떠오른다. 여름에는 해가 지지 않는 백야 현상이 나타나고 겨울에는 해가 뜨지 않는다는 곳이다.그런데 뺨이 에이고 손이 얼어붙는 것이 ‘북극 한파’ 때문이라니, 공간의 경계가 일시에 사라진 듯 야릇한 기분이 든다.월성 앞에 선 기분도 그만큼이나 기묘하다. 동지섣달 칼바람 속에서 시간의 멀미증을 느끼며 천년 왕성의 흔적을 찾아 헤맨다.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월성의 속살은 비밀 같기도 하고 상처 같기도 하다.맹추위에 중단한 발굴조사 구역의 파란 방수천 위로 까마귀 떼가 검은 날갯짓을 하며 날아간다. 영화의 천년과 폐허의 천년이 한꺼번에 물밀어온다.내가 월성을 찾은 것은 두 번째다. 2014년 1월 고3 엄마가 되기 직전에 잠깐 짬을 내어 혼자 여행을 떠났다. 무작정 잡아 탄 버스가 경주행이었던 건 우연이자 필연이었다. 귀향의 안도감과 여행지의 설렘을 동시에 주는 곳, 졸작 ‘미실’의 무대로 소설 속에서 하세월 뛰놀고도 여전히 미로를 헤매는 느낌을 주는 곳이 경주이기 때문이다.비수기 평일이라 게스트하우스 4인실을 혼자 썼다. 방은 덥고 건조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버스를 잡아타고 여느 관광객처럼 불국사와 석굴암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남들이 모두 하듯 대릉원과 첨성대를 ‘도장 깨기’한 후에 도둑괭이처럼 남몰래 오른 곳이 월성이었다.그때의 월성은 지금의 월성이 아니었다. 그저 석빙고 인근의 도도록한 언덕, 잡풀이 함부로 돋고 오솔길이 맥락 없이 이어진 구릉이었다. 그곳이 신라의 왕성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간간이 지나는 산책객 외에 일부러 발걸음을 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패망한 왕조의 쇠락한 왕성, 외적의 침범으로 잿더미가 된 황성 옛터. 월성은 삼한을 통합한 제국의 수성 따윈 까맣게 잊은 채 초식동물처럼 나부죽이 엎드려 침묵하고 있었다. 내 눈에 새겨진 천년 폐허의 마지막 모습은 그러했다.꼬박 5년이 지난 후, 다시 월성을 찾았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5년이면 절반쯤은 새롭고 절반쯤은 여전하리라. KTX로 서울에서 포항까지 가서 신문사 미팅을 마친 후 시외버스를 타고 형산강을 따라 경주에 닿았다.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경주의 밤은 어두웠다.연말이라 숙소를 구하기 여의치 않아 버스터미널 근처에 미니호텔에 여장을 풀었는데, 아침에 숙소를 나섰을 때는 좀 놀랐다. 동네의 풍광이 요즘 식으로 말하면 ‘혼돈의 카오스’였다. 야릇한 간판을 내건 모텔, 외국인을 포함해 소박한 여행자들이 모여드는 게스트하우스, 단독주택과 빌라, 교회와 식당, 심지어 노인복지회관과 자동차정비소가 한동네에 처마를 맞대고 있었다.“경주가 왜 이렇지?”인터넷 지도가 이끄는 대로 골목을 지나노라니 모텔 창문에서 분명히 보일 풍경에 불쑥 고분이 나타난다. 사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풍경일지라도 외부인에게는 몹시 낯설고 당황스럽다.“어디를 파도 유물이고 유적이니 후손들의 궁여지책이 아닐까요?”이번 여행에 길벗이자 기사 노릇을 할 운전병 만기 전역자 아들의 답이다. 아들은 덕후(마니아) 중에서도 기이한 덕후인 ‘폐덕(폐허 덕후)’이라 “경주에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이 모여 있다!”며 흥분해 따라나선 터였다.그곳이 경주다. 생과 사가, 욕망과 허무가 서로 민낯을 바라보고 섰다. 그것이 경주다.신라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첫날은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 오직 두 발로 월성을 걸어보기로 했다. 숙소에서 길을 건너자마자 불쑥 나타난 고분은 마총과 금관총을 포함한 노서리고분군이었다. 거기서 길을 건너면 동남쪽으로 천마총과 황남대총으로 유명한 대릉원이고, 대릉원에서 길을 따라 가면 첨성대 그리고 계림이 나타난다.이때부터는 발걸음을 늦추고 상상력의 보폭을 넓혀야 한다. 천년 전, 천오백 년 전 그때의 사람들처럼 천진하게 혹은 위엄 있게 주위를 둘러본다. 월성 입구에서 3~4백 미터 앞쯤에는 오뚝하고 어여쁜 첨성대가 하늘을 향해 머리를 열고 있다.거기서 월성 쪽으로 더 다가가면 미추이사금을 시작으로 56명 중 38명의 왕을 배출한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발견’된 계림이 있다.지금은 고목(古木)의 숲이지만 그때는 탄생의 생기를 품은 울울창창한 숲이었을 것이다. 계림을 지나면 주춧돌 자리가 선명한 건물지와 함께 철망을 친 양옆으로 현장 보호를 위한 방수천이 줄지어 있는 구역이 나타난다.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광화문 바깥으로 종로를 향해 6조 거리가 형성되어 있듯 신라의 관아 건물로 쓰였을 것이라 추측되는 외곽의 건물지와, 자연 하천인 남천(옛 이름 문천(蚊川))과 함께 월성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한 해자(垓字, Moat)의 발굴 현장이다. 그 사이로 난 조붓한 길을 따라 가면 아까의 낮은 구릉이 ‘열리고’ 그 안에 편편한 터가 나타난다. 바로 월성이다.바람 부는 월성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다. 차갑게 언 땅 위로 흙바람이 뽀얗게 분다. 발굴지로 주목받은 지 몇 해가 지났건만 2014년 그때와 마찬가지로 인적은 드물다. 지금껏 월성을 찾는 발길은 월성 자체보다 내부에 자리한 ‘석빙고’ 때문이었다.석빙고는 옛 시절의 냉장고다. 요즘도 정전이 되면 어둠보다 냉장고가 멈춰 음식이 상해버릴까 하는 걱정이 앞서는 지경에, 근대 이전의 석빙고는 나라에서 관리할 만큼 중요한 곳이었고 얼음은 임금님이 신하에게 애정의 표시로 내려주는 하사품이기까지 했다.그러니 석빙고가 자리하고 있다는 건 월성이 그만큼 사람이 살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렷다.하지만 월성 내 석빙고는 신라의 유물이 아니라 조선 영조 때 만든 것이다. 남한에 딱 6개, 안동, 현풍, 경주, 청도, 창녕, 영산에 남아있는 석빙고라지만 집집마다 냉장고는 물론 김치냉장고와 냉동고까지 보유한 세상에 대단한 흥밋거리는 아닌 듯하다.내부를 들여다보니 깊은 석굴이 썰렁하다. 때마침 청소년 자녀를 포함한 한 가족이 구경을 왔다가 석빙고를 보더니 탄식을 터뜨린다.“애걔, 이게 다야?”어린 학생의 실망한 목소리에 경주로 떠나오기 전 들었던 목소리가 겹친다.“월성? 그게 대체 어디야?”월성을 취재하러 간다고 말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대개 비슷했다. 나름 식자들이고 경주 여행도 여러 차례 했건만 월성은 잘 모르고, 알아도 역사책에서나 읽었다고 했다. 그들에게 어떻게 월성을 알릴 수 있을까?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들의 숫자만큼, 혹은 그 이상의 것들이 빠르게 지워지는 경조부박한 세상에서 무엇으로 잠시나마 천년의 시간을 돌이키게 할 수 있을까?“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罔羅四方)!”월성에 오르면 바야흐로 신라가 사방에 펼쳐진다. 지증왕이 ‘덕업이 날로 새로워져 사방을 망라한다’는 의미로 국호를 ‘신라’로 정한 뜻이 왕성의 앉음새로도 느껴진다.남산 그리고 남천을 등지고 서면 오른편 동쪽으로 낭산과 토함산이, 왼편 서쪽으로 선도산이, 앞쪽 북쪽으로 소금강산이 우뚝하다.동북쪽에 황룡사지와 분황사가, 서남쪽에 나정과 오릉이, 북서쪽 사선 방향으로 대릉원과 쪽샘, 노동동과 노서동의 고분군이 펼쳐진다. 지금은 도로에 끊겨 나뉘어져 있지만 하나의 궁성이었던 동궁과 월지, 그리고 경주국립박물관이 자리한 남궁과 성동동 전랑지에 자리했을 것이라 추정되는 북궁까지 포함하면 장대함이 더하다.신라의 수도 서라벌은 왕성으로부터 뻗어나가는 일직선대로와 격자형의 택지 조성으로 완벽하게 아름다운 계획 도시였고, 그 모두의 중심에 월성이 있었다.물론, 여전히 황량하다. 아직은 적막하다. 하지만 겨울의 동토가 이미 봄의 생명을 품고 있듯 한때 이곳에서 융성했던 왕조의 비밀이 발밑에서 꿈틀거리고 있다.“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고(故) 황현산 선생은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에서 한 사람의 감수성의 수준이 질적으로 얼마나 높고 낮은가는 현재의 두께감에 좌우된다고 지적했다. 신라, 경주, 그리고 월성. 그곳에서 느끼는 현재의 두께는 천년인가? 아니면 고작 눈앞의 지금뿐인가?월성의 동쪽 끝 성벽, 경북매일신문 이용선 사진부장의 추천을 받아 그곳을 찾았다. 마침 적당히 편평한 돌까지 있어 걸터앉아 기다리기에 맞춤하였다.동쪽 성벽에서 내려다보는 바로 아래 국립경주박물관이 있고, 그 안뜰에 일명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성덕대왕신종이 걸려 있다. 성낙주의 ‘에밀레종의 비밀’(푸른역사,2008)을 통해 성덕대왕신종이 에밀레종의 인신공양 설화보다는 만파식적 기원설(황수영,1982)에 근접한다는 주장을 매우 흥미롭게 읽은 바, 월성 성벽에서도 들린다는 영묘한 종소리를 꼭 들어보고 싶었다.원래는 봉덕사에 있다가 영묘사로 옮겼다가 봉황대에 보호되던 것을 국립경주박물관 경내로 이전한 성덕대왕신종은 문화재 보호를 위해서인지 직접 쳐서 소리 내는 대신 매시간 정각에서 20분 간격으로 녹음한 종소리를 들려준다.시간이 되었다. 과연 종소리가, 시인 김광균이 ‘외인촌’에서 묘사한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가 월성 성벽까지 은은히 닿는다. 3번씩 6번, 18번이 이어지는 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녹음된 소리이니 마냥 감격하기에도 객쩍다. 그렇지만 신비로운 울림만은 부정할 수 없으니, 성덕대왕신종의 종소리가 폐허를 깨우는 장면은 기묘한 떨림으로 오래 기억될 듯하다. 경주, 그리고 월성에 대한 신고식으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이제부터 좀 더 두텁고 풍부한 현재를 위해 천천히 월성의 지난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본다. 암호 같기도 하고 북극성 같기도 한 문헌과, 고고학이라는 과학과, 폐허에서 꽃을 피울 수 있는 상상력을 등롱 삼아.

2019-01-27

‘신비’와 ‘이적’ 난무하는 고대 판타지로 만나다

육당 최남선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라고 했다. 시인이자 연구자인 고운기는 ‘삼국유사’를 한마디로 ‘길 위의 책’이라고 했다. 사가(史家)들보다는 작가들이 사랑한 책, ‘삼국사기’의 사(史)와 달리 일 혹은 이야기라는 뜻의 사(事)를 쓰는 ‘삼국유사’에는 ‘월성(月城)’이라는 단어가 8회 등장한다.또한 해와 달이 된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신라의 어둠을 걷어내라고 보내준 비단 국보를 간직한 창고 귀비고(貴妃庫)와, 문무왕과 김유신의 영혼이 후대를 위해 보낸 대나무로 만든 국보 만파식적을 간직한 나라 창고 천존고(天尊庫)의 존재도 ‘삼국유사’를 통해 확인된다.궁녀들이 출입하는 궁성 서쪽 귀정문(歸正門)은 경덕왕이 누각에서 차를 마시며 충담사가 지어 바친 노래 ‘안민가’를 들었던 곳이고, 천존고에 보관한 만파식적을 일본 왕이 보여 달라고 자꾸 조르니 그 흉심이 걱정된 듯 옮겨 간직한 내황전(內黃殿)도 월성의 일부이다.경덕왕 때 궁 안의 우물이 마를 정도로 가뭄이 심하기에 대현법사가 ‘금광경(金光經)’을 강론하며 단비를 빌자 일곱 길이나 되는 물이 솟아났다는 금광정(金光井)은 월성의 보배로운 우물이었을 것이다.혜공왕 때 혜성이거나 별똥별이었을 천구(天狗)가 떨어진 동루(東樓), 뜰 안에 별 세 개가 떨어져 땅 속으로 들어갔다는 북궁(北宮), 헌강왕이 잔치를 할 때 지신(地神)이 나와서 춤을 추었다는 동례전(同禮殿)도 등장한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대한 비교는 학교 시험 문제로 나올 정도로 차고 넘친다. ‘삼국사기’의 편찬자인 김부식과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에 대한 비교도 하고많다. ‘삼국사기’가 기전체의 관찬(官撰) 사서라면 ‘삼국유사’는 기사본말체의 사찬(私撰) 사서, 김부식이 유학자라면 일연은 불교의 승려 등등.150년의 간극을 두고 쓰인 두 권의 책을 시시콜콜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고 중요한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김부식과 일연이 역사와 시간, 그리고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랐다는 것은 확실하다.대저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만큼 볼뿐더러 관심 만큼 느낀다. 그 관심이란 결국 자신의 처지와 이해요구에서 비롯될지니, 22살에 관계에 진출해 이자겸과 묘청의 난을 물리치고 승승장구한 정치가 김부식과, 9살에 출가해 국사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세속의 인연을 완전히 끊지 못하고 나병을 앓는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고향 경주로 돌아온 일연이 어찌 같은 눈길로 세계를 볼 수 있을까?그럼에도 1142~1145년, 1277~1281년으로 추정되는 각각의 집필 시기에 김부식과 일연의 나이는 공통적으로 70대 어림이었다. 공자는 70세를 종심(從心)이라 부르니,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시기다. 김부식도 일연도 혼란 세상을 종횡하며 혜견(慧見)과 입관(入觀)의 경지에 이르렀을 터, 참으로 역사를 쓰기에 좋은 때였으리라.‘삼국사기’ 속의 월성이 신라 왕정의 중심이었다면, ‘삼국유사’ 속의 월성은 신라 사람들이 세오녀가 짠 고운 비단처럼 펼치는 꿈과 소망의 무대이다. ‘삼국사기’에서 짐짓 엄격히 다루는 신비와 이적(異蹟)도 ‘삼국유사’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왕들은 알에서 태어나고, 용이 뱀보다 더 자주 출몰하며, 귀신들은 수시로 인간과 통한다.과학적 합리주의에 익숙한 현대인에게는 고대의 판타지가 황당해 보일 수 있다. 좋은 판타지는 거대하고 치밀한 상징이라 빽빽한 나무들에 둘러싸인 채 숲을 보기는 쉽지 않다.단군신화가 천신을 믿는 환웅족과 곰 토템사상을 지닌 웅족의 결합을 상징하는 ‘종족 통합 신화’였다거나, 난생신화는 건국시조에게 초인적인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탄생설이라는 해석으로 근거를 찾기도 한다. 하지만 친절한 과학적 설명 이전에 신비를 그저 신비로 상상하며 느껴 보는 건 어떨까? 아주 위험하거나 너무 불편하지 않다면 말이다.왕이 비형랑을 불러 묻기를 “네가 귀신을 거느리고 논다는 말이 사실이냐?”하자 비형랑이 대답하길 “그렇습니다.”하였다. 왕이 “그러하면 너는 귀신의 무리를 이끌고 신원사의 북쪽 도랑에 다리를 놓아 보도록 하여라.”하였다. 비형은 칙명을 받들고 그 무리들로 하여금 돌을 다듬어 하룻밤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다. 그런 까닭에 귀교(鬼橋)라 한다.비형랑은 ‘삼국사기’에 없는 인물로 ‘삼국유사’ 기이편에 그야말로 기이하게 등장한다. 그의 아버지는 진지왕(의 영혼), 어머니는 도화녀다.진흥왕의 둘째 아들인 진지왕은 4년을 재위하고 물러나는데, ‘삼국사기’에는 폐위의 원인이 나타나지 않고 ‘삼국유사’에는 ‘정치가 문란하고 주색에 빠져 음탕하므로 나라 사람들이 임금 자리에서 몰아냈다’고 나온다. 폐위된 진지왕은 2년 후 죽고, 그 영혼이 과부가 된 도화녀 앞에 나타나 생전에 유부녀라서 포기했던 회포를 풀고 비형을 낳았다는데….일단은 신비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따라가 본다. 아이는 귀신의 자식이다. 아버지가 왕(의 영혼)이었다지만 고아나 다름없으니 궁궐에 살아도 감옥이나 매한가지다. 그는 월성의 담을 뛰어넘어 어둠을 뚫고 달려가 엇비슷한 처지의 귀신들을 만난다.사람이 아닌 귀신이니 하룻밤사이 큰 다리를 놓으라는 얼토당토않은 칙명도 거뜬히 수행한다. 이러쿵저러쿵하여 후일 비형랑은 민간에서 귀신을 쫓는 벽사의 신통력을 가진 존재로 여겨진다.졸작 ‘미실’에도 비형랑이 등장한다. 드라마의 주인공이 가진 출생의 비밀도 밝혀진다. 그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현존하는 사서의 전부인 듯했던 고대사에 뒤늦게 등장한 문제작, ‘화랑세기’다.고운기의 ‘삼국유사 글쓰기 감각’ 목차는 ‘이야기꾼 일연’, ‘시대의 충실한 일꾼 김부식’, 그리고 ‘또 한 사람 김대문’이다. 바로 그 김대문이 자신의 조상을 포함한 화랑도의 우두머리인 풍월주들의 계보를 풀어쓴 책이 ‘화랑세기’인 것이다.1989년 경남 김해에서 발견된 ‘화랑세기’ 필사본이 704년 김대문이 저술한 ‘화랑세기’와 동일한 것인지는 여전히 확실치 않다. 재야사학자 박창화가 일제강점기에 베껴 썼다는 ‘화랑세기’ 필사본에 대한 진위논쟁이 한소끔 달아올랐다 지금은 지지부진하지만, 새로운 금석문과 획기적인 고고학적 성과가 아니라면 앞으로도 ‘진짜파’와 ‘가짜파’ 사이의 접점을 찾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그럼에도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점은 ‘삼국사기’의 역사와 ‘삼국유사’의 신비가 ‘화랑세기’ 필사본의 이야기를 통해 더욱 선명해진다는 사실이다. ‘화랑세기’ 필사본에서 진지왕은 미실과의 약속을 어기고 독주하다 폐위되어 유폐된다. 물론 백성들은 왕이 산 채로 갇혀있다는 것을 모르고 죽은 줄만 알았을 것이다.이때 폐위된 진지왕이 과부가 된 도화녀와 재회하여 낳은 아이가 비형랑이고, 비형랑은 화랑이지만 신분의 제약으로 풍월주가 되지 못한 채 자기와 비슷한 처지의 무리와 어울린다. 하루아침에 다리를 놓을 만큼 능력이 출중했던 비형랑과 그의 친구들, 그들을 귀신으로밖에 치부하지 않았던 신분제 사회의 모순이 설핏 드러난 이야기가 아닌가? 결국엔 비형랑 김용춘의 아들 김춘추가 왕좌에 오르니, 성골에서 진골로 헤게모니가 넘어가는 데는 귀신의 힘만큼이나 절묘한 비방이 필요했으리라.‘화랑세기’ 필사본에는 ‘월성(月城)’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궁주(宮主)들과 대궁(大宮)이라는 표현으로 존재가 드러난다. ‘화랑세기’ 필사본 속의 월성은 신국(神國)에만 존재하는 ‘신국의 도(道)’가 현현하는 사랑과 삶의 터전이다.후세의 기준으로는 음란하고 방종해 보일지 모르나 그들은 자연의 일부분으로서 욕망에 솔직하며 다만 자기의 시대를 힘껏 살아낸 것일지도 모른다.기존의 ‘화랑세기’ 필사본 진위논쟁에서 ‘진짜파’가 내놓은 증거 중 하나는 월성과 관계가 깊다. 5세 사다함 편의 한 대목이다.금진낭주는 평소에 색에 빠졌다. 많이…. 무관랑을 몰래 들였다. 무관랑은 사다함을 대하기가 어려웠는데…. (사다함이)… 위로하여 말하기를 “네가 아니라, 어머니 탓이다. 나와 더불어…. …벗으로 어찌 작은 혐의를 문제삼겠는가” 하였다. 금진이 듣게 되어…. …스스로 도리를 알았다. 나에게 너그러운 것은 곧… 무관랑…. (사다함이) 함께 출입하였다. 낭도들 중에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무관랑은 도망하고자 하여 …밤에 궁의 담(宮墻)을 넘다가 구지(溝池)에 떨어져 다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금진낭주는 5세 풍월주 사다함의 어머니다. 사다함의 부관인 무관랑은 금진의 유혹에 빠져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으나 상관이자 벗을 속이는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도망쳐 관계를 끊고자 한다. 한데 얻어먹을 것도 옆집 노랑강아지 때문에 못 얻어먹는다던가? 하필 결정적인 개심의 순간 월성의 궁장을 넘다가 실족하여 구지에 떨어져 죽고 만다.그런데 1984년 이전에는 월성 주변에 해자가 있었던 사실을 알 수가 없었고, 신라인들이 해자를 구지라고 불렀다는 사실도 뒤늦게 확인되었다. 1962년에 죽은 박창화가 어찌 이런 비밀을 모두 알고 ‘소설’을 썼단 말인가?무관랑이 떨어진 구지에 대한 기록이 ‘화랑세기’ 필사본의 신빙성을 확인해 주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이종욱.1997)는 것이 ‘진짜파’의 주장이다.주류 사학계의 저울이 위작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화랑세기’ 필사본 발견 이후의 신라 연구는 그에 빚진 부분이 아주 없지 않다.한반도에 존재했던 왕조들을 통틀어 신라에만 여왕의 존재가 가능했던 배경이라든가, 14수만 달랑 남았다고 알려진 향가에 새로운 향가가 더해질 가능성이라든가 하는 것이 연구에 활력을 더하는 셈이다. 앞으로 월성의 발굴이 본격화되면 더 많은 쟁점들이 밝혀지고 새로이 충돌할 것임에 천년의 비밀 앞에서 가슴이 설렌다.

2019-01-20

“성의 모양새가 초생달 같다고 월성이라 불러”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쓰노라니 “어떻게 소설을 쓰느냐?”만큼이나 자주 듣는 질문이 “어떻게 소재를 얻고 취재를 하느냐?”는 것이다. 독자들뿐 아니라 연구자들까지 역사를 이야기로 만드는 과정을 궁금해 하는데, 사실 대답은 간단하다.“공부합니다.”졸작 ‘미실’을 쓸 때부터 밑도 끝도 없는 공부가 습관이자 의식이 되었다. 일단 그 시대의 기록에 풍덩 빠져 허우적거리다 보면 짐짓 근엄하고 복잡해 보이는 역사 속에서 이야기의 실마리가 보인다. 그 순간 그것을 거머채면 그만이다.원칙적으로 시작은 정사(正史)를 읽는 일로부터 출발한다. 삼국시대는 ‘삼국사기’, 고려시대는 ‘고려사’, 조선시대는 ‘조선왕조실록’을 기본으로 하고 이어 기타 사서와 연구 논문과 자료들을 읽는다.‘미실’의 배경은 서라벌, 그중에서도 왕성인 월성이다. 하지만 ‘미실’을 책으로 펴내고도 한참 후에야 월성 터를 둘러보았다. 장편 ‘논개’의 배경이 된 진주성 또한 마찬가지다. 소설은 이미 내 손을 떠났는데 뒤늦게 남강 앞에서 처절했던 2차 진주성 전투 끝에 6만이 도륙되어 성안에 시체로 첩첩이 쌓이는 상상으로 전율했다.게으르고 미련한 성격 탓이기도 하려니와 문헌의 행간(行間)을 탐독하는 일이 현장을 둘러보는 일만큼이나, 아니 때로는 더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그래도 월성은 눈으로 보고 발로 그 터를 밟고 싶었다. 일단 기차표부터 끊어놓고 공부를 시작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롯해 논란은 있으나 빈약한 고대의 기록에 향미를 더하는 ‘화랑세기’부터 살펴보기로 했다.쇠와 돌에 새겨진 글이 아니고서야 추정과 비정(比定)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터이니 비전공자의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는 최대한 몸을 낮추고 보수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허공을 떠도는 망상이 아닌 자유로운 상상을 펼치려면 두 발은 굳세게 사실을 딛고 서야 한다.우선 삼국시대의 정사(正史) ‘삼국사기’부터 펼친다. 고려 인종 23년(1145년)경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는 신월성(新月城), 만월성(滿月城)을 제외하고 궁성인 ‘월성(月城)’이 16회 가량 등장한다.(신라본기 12회, 잡지 1회, 열전 3회) 월성이라 명명하는 대신 왕성(王城), 재성(在城)이라 쓰기도 하고, 월성 내 왕의 거처를 대궐, 궁궐, 왕궁, 대궁(大宮)등으로 표현한 대목도 있다. 또한 내전(內殿) 외에도 일본국 사신을 접견한 조원전(朝元殿), 음악 연주를 관람한 숭례전(崇禮殿), 활쏘기를 관람한 강무전(講武殿), 발[簾]을 쳤던 서란전(瑞蘭殿), 정사를 돌본 평의전(平議殿) 등의 전각들과 망은루(望恩樓), 명학루(鳴鶴樓), 월상루(月上樓) 등의 누각, 인화문(仁化門), 현덕문(玄德門), 무평문(武平門), 준례문(遵禮門) 등 문의 이름이 등장한다.특히 ‘삼국사기’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 월성이 왕성으로 자리 잡는 내력이다. 실제로 월성을 쌓은 사람은 신라의 5대 왕인 파사이사금이다.22년 봄 2월에 성을 쌓고 월성(月城)이라 이름했다.(...) 가을 7월에 왕이 월성으로 거처를 옮겼다.파사이사금 22년이면 서기 101년, 신라가 건국한 기원전 57년에서 158년이 지난 후다. 그렇다면 시조인 혁거세거서간, 남해차차웅, 유리이사금, 탈해이사금, 그리고 파사이사금 또한 재위 후 21년쯤은 다른 왕궁에서 사셨다는 말씀이다. 월성 이전의 왕궁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잡지에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혁거세 21년(서기전 37)에 궁성(宮城)을 쌓아 금성(金城)이라고 하였다. 파사왕22년(101)에 금성의 동남쪽에 성을 쌓고 월성(月城)이라 하고 혹은 재성이라고도 하였는데 둘레가 1,023보였다. 신월성(新月城) 북쪽에 만월성(滿月城)이 있으니 둘레가 1,838보였고...(중략)...시조 이래로 금성에 거처하다가, 후세에 이르러 두 월성에 많이 거처하였다.혁거세거서간이 6부의 촌장들에게 왕으로 추대받은 것이 13세이니 34세쯤에 자기 손으로 자신의 집을 지은 것이다. 보랏빛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와 짝이 되려면 용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나온 알영 정도는 되어야 한다.혁거세와 알영의 신혼집에 대한 정보는 ‘삼국유사’에서 찾을 수 있는데, ‘궁실을 남산 서쪽 기슭 지금의 창림사(昌林寺)’에 지었다고 한다. 창림사 터는 혁거세가 탄생한 나정에서 걸어서 20분 남짓 거리에 있는데, 남들이 얻어준 집이라서인지 후대의 가미인지 아직까지는 궁터의 흔적도 별다른 이야기도 발굴되지 않았다.신라의 왕성은 창림사 터의 궁실에서 금성으로, 금성에서 월성으로 이동했다. 월성이 금성의 동남쪽이니 금성은 월성의 서북쪽, 대개 고려 때 석성(石城)을 쌓은 경주읍성지나 황룡사 북쪽의 북천 부근으로 비정(김병모,1984)한다. 금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월성이 현재 경주시 인왕동에 자리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월성은 말 그대로 성의 모양새가 초승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월성을 찍은 위성사진을 보면 낫 같기도 하고 눈썹 같기도 한 초승달 모양새가 선명하다. 알천(북천), 문천(남천), 모량천(서천)의 세 물줄기를 끌어안은 월성은 어섯눈으로 봐도 상서로운 알짜배기 땅이다. 그런데 파사이사금이 그곳에 궁성을 짓기까지는 전왕인 탈해이사금의 역할이 컸다.탈해는 처음에 고기잡이로 생업을 삼아 어미를 공양했는데 게으른 기색이 전혀 없었다. 어미가 말했다. “너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고 골상이 특이하니 배움에 정진해 공명을 세워라.” 이에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고 아울러 지리를 알았다. 양산(楊山) 아래 호공(瓠公)의 집을 바라보고 길지라고 여겨 속임수를 내어 차지하고 이곳에 살았다. 이곳은 뒤에 월성이 되었다.문명의 조명이 없는 고대의 깜깜나라를 밝히는 것은 신비다. 본래 왜국의 동북쪽 1천 리에 있다는 다파나국의 왕자였으나 알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버려져 금관국을 거쳐 진한의 아진포에서 거둬진 석탈해는 2m14㎝(9척)의 잘생긴 이방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풍수지리에도 재능이 있었던 듯, 그 상서로운 땅을 단번에 알아본다.하지만 아무리 땅이 좋아보여도 엄연히 주인이 있는데 속임수를 내어 차지하다니! 천년 왕성의 토지 취득이 비합법적이거나 비도덕적이었다면 좀 찜찜하지 않은가? 그 ‘속임수’가 어떤 내용이었는가는 ‘삼국유사’에 자세히 나온다.때는 남해차차웅 시절, 석탈해는 토함산에 올라 굽어보다 찾은 ‘오래 살 만한 곳’을 얻기 위해 꾀를 낸다.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 근처에 묻고 이튿날 아침 찾아가서는 대뜸 큰소리친다.“여기가 본디 우리 조상의 집이었소!”집주인인 호공으로서는 아닌 밤중의 홍두깨, 청천 하늘에 날벼락이 아닐 수 없다. 이러니저러니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관가에 가게 되었는데 관에서 석탈해에게 묻는다.“무엇으로써 너의 집임을 증명하겠는가?”“우리 집안은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잠시 이웃 고을에 가있는 동안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으니 그 땅을 파서 조사해 주십시오!”마음먹고 속이려는데 속지 않을 재주가 없다. 땅을 파니 과연 미리 묻어둔 숫돌과 숯이 드러나는지라, 석탈해는 호공의 집을 홀딱 집어삼키게 되었다. 그런데 호공은 백주대낮에 속임수로 집을 빼앗기고도 석탈해에게 원한을 품거나 신라왕조에 반감을 갖지 않는다.이 이야기가 선진적인 철기문화를 가진 도래 세력에 의해 토착 세력이 밀려나는 것을 상징화한 것이라는 교과서적 정답 외에도, 일찍이 벽초 홍명희의 아들인 국어학자 홍기문이 의심한대로 호공은 단순한 사기극의 피해자 일인이 아니라 특정 집단을 상징할 가능성이 크다.그는 혁거세거서간 38년에 마한에 사신으로 가는가 하면 탈해이사금 9년에 계림에서 김알지를 발견한다.알지를 발견할 때 호공의 나이는 적어도 100살! 그래서 호공을 개별 인물이 아닌 박[瓠]의 문화를 대표하는 박씨 호공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결국엔 속고 속이는 일이 다 정치적 기술(!)이었던 게다.권력에는 쟁투가 따르기 마련이고 왕성인 월성은 그 혈투극의 주무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진평왕 53년(631) 흰 개가 월성 담장[宮墻]에 올라가더니 칠숙과 석품이 반란을 일으켰고, 진덕왕 원년에는 비담과 염종이 명활성에 주둔한 채 월성에 머문 왕의 군대와 열흘 동안 대치했다.혜공왕 4년(768) 호랑이가 월성 안에 들어오더니 대공과 대렴이 반란을 일으켜 33일간 왕궁을 에워쌌으며, 같은 왕 16년(780) 누런 안개가 끼고 흙비가 내리더니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에워싸고 왕과 왕비를 죽이기도 했다.‘삼국사기’ 속의 월성은 신라의 흥망성쇠와 함께한 왕정(王政)의 중심이다. 사람이 사는 월성에서 느닷없이 설치는 흰 개와 호랑이는 왕권을 위협하는 반란의 징조였다. 신라의 정치는 모두 그곳에서 비롯되었고 마감되었다.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던 여섯 촌락의 사람들이 알에서 태어난 왕을 받들어 나라를 세우고, 성을 쌓고 넓히고 보수하고,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맞서 지켰다. 삼한을 통합하는 위업을 세우며 한때 국제적인 ‘황금의 나라’를 건설했으나, 반란과 실정으로 쇠락하여 끝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그 천년 드라마의 무대로서, 목격자로서, 월성은 묵묵했다. 그리고 다시 천년이 지나 폐도의 황성 옛터인 채로 월성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그가 품은 찬란한 비밀이 얼마만할 지는 아무도 모르고 상상조차 못하는 채.

2019-01-13

천년을 잠들어 있던 월성을 빼고는 신라를 이야기 할 수 없어

본지는 올해 연중 특별기획으로 ‘소설가 김별아의 경주 월성을 걷는 시간’을 연재한다. ‘신라 천년의 역사 현장’이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는 월성을 둘러싼 갖가지 이야기와 그 속에서 명멸했던 인물들을 현대로 불러올 기사가 모두 20회에 걸쳐 독자들과 만나게 된다. 발굴이 한창 진행 중인 월성 현장 르포와 신라 역사 속 숨겨진 미스터리, ‘월성의 주인’이었던 왕과 여왕들, 석굴암과 황룡사지 등의 유적지 탐방이 게재될 것이다. 이번 특별기획은 2019년 오늘, 천 년 전 신라 사람들의 얼굴을 다시 만나는 유의미한 체험을 독자에게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밤차를 타면아침에 내린다.아아 경주역.이처럼 막막한 지역에서하룻밤을 가면그 안존하고 잔잔한영혼의 나라에 이르는 것을.천년을한가락 미소로 풀어버리고이슬 자욱한 풀밭으로맨발로 다니는그 나라백성. 고향사람들.-박목월의 시 ‘사향가(思鄕歌)’ 중에서.경주로 가는 발걸음은 언제나 설렌다. 여행이든 일이든 목적과 별개로 귀향(歸鄕)의 감상이 깃들기 때문이다. 고향은 기억이자 그리움이며 사라진 시간에 대한 슬픔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가없는 막막함을 온몸으로 견디는 일. 시인이 꿈꾼 영혼의 나라는 어린 날의 안존하고 잔잔함을 지닌 그곳, 바로 고향이다. 긴장이 없고 겉멋이 없다. 딱딱한 구두를 신고 아스팔트 위를 걷는 대신 맨발로 이슬 자욱한 풀밭을 밟으면 족하다. 목월의 시 ‘사향가’가 수록된 시집 ‘난(蘭) 기타’가 출간된 1959년 무렵에는 서울에서 경주까지 하룻밤을 새워 달리는 야간열차가 있었나 보다. 현재는 청량리역에서 경주역까지 직통은 하루 2번 무궁화호로 운행되는데, 아침 7시38분에 떠나면 오후 1시23분에, 저녁 9시3분에 출발하면 새벽 2시18분에 경주역에 닿는다. 아, 새벽 2시18분의 경주역은 어떤 풍경일까? 어쩌면 그토록 낯선 시간의 경주를 그리는 데는 목월보다 동리의 심상이 맞춤할지 모른다.나는 폐도(廢都)에서 태어났다. 나는 얼음장같이 차디찬 폐허를 밟고 무덤 속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자라났다. 나는 폐허 제단에 촛불을 밝히고 화려한 옛 꿈을 찾는 자다. 묵은 전통과 회구의 로맨티시즘은 내 오관에 흐르고 있다. 전통의 아들 폐도의 아들 이것이 나의 숙명이다. 나는 아모리 발버둥치고 애를 써도 이 묵은 전통의 옛 꿈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리라. 내 머리 위에는 무거운 폐도의 총기(塚氣)가 누르고 있다.-김동리의 소설 ‘폐도(廢都)의 시인(詩人)’ 중에서.폐도, 그것은 ‘황성 옛터’다. 이애리수가 부른 노래의 ‘월색만 고요’한 황성(荒城)은 작곡가 전수린의 고향인 고려의 왕도 개성 만월대지만, 한때 영화를 누렸으나 지금은 황폐한 궁터라면 다 같이 ‘황성 옛터’일지라. 동리(東里)라는 이름 전에 스스로 동허(東虛·동방의 허)라는 이름을 지었던 청년 작가 김시종은 유년기의 상처를 고스란히 품은 허무주의자였다. 2009년 발굴된 단편 ‘폐도의 시인’은 등단작 ‘화랑의 후예’에 이어 발표된 두 번째 소설이며, 작가로서 발표한 첫 번째 소설이다.대저 작가에게 고향은 애증(愛憎)의 대상이기 마련이다. 중국의 대문호 루쉰은 나고 자란 사오싱(소흥)을 배경으로 ‘공을기’를 비롯한 숱한 명작들을 쓰고도 때로 “신이 노하여 홍수로 쓸어가 버려도 좋다”고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나 고향에 대한 남루함을 깨닫는 청년기의 방황은 마침내 방황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고향에 대해 새롭고 풍부한 애정을 느끼는 밑천이 된다. 1950년대 서정주, 유치환, 박목월, 김상옥 등을 통해 한국문학을 휩쓸었던 신라정신이 절망 속에 방황하던 ‘화랑의 후예’들에게 자부심의 온기를 불어넣었듯이 말이다.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다.1935년의 김시종, 동리보다 동허에 가까웠던 작가는 치열한 분투 속에 ‘성장’해 1978년에는 자신의 연원인 고향과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문예창작사에서 펴낸 수필집 ‘취미와 인생’에 실린 ‘나의 고향’에서 동리는 자신의 자랑거리로 두 가지 사실을 꼽는다.“내 고향은 신라 천년의 서울로 누구나 알고 있는 경주다. 나는 늘 말한다. 나에게 자랑되는 것이 있다면, 첫째는 고향이 경주인 것이요, 둘째는 성이 김씨인 것이다.”거대한 역사, 그것은 거대한 비밀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신라의 아득한 시간을 어루더듬는 일은 마치 먼눈으로 코끼리를 만지는 일과 같다. 이빨을 만지면 무 같이 생겼다 하고, 귀를 만지면 곡식을 까불 때 쓰는 키 같다 하고, 다리를 만지면 커다란 절굿공이 같다고, 등을 만지면 평상 같다고, 배를 만지면 장독 같고 꼬리를 만지면 굵은 밧줄 같다고 느낀다.맹인모상(盲人摸象)의 우화를 온전히 적용하기는 무리하지만 지금껏 일반 대중이 배워 알거나 느껴온 신라, 혹은 경주는 일면 그런 식이었다. 첨성대, 석굴암, 불국사, 대릉원…. ‘수학여행지’이거나 ‘관광지’로 만난 경주의 첫 인상은 맥락 없이 나열되어 기억 속에 흩어져있기 일쑤이다. 박물관에 전시된 금관과 보검과 금 귀걸이는 휘황찬란하지만 유리벽 너머의 보물,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일 뿐이다. 이빨과 귀와 다리와 등과 배와 꼬리가 모두 코끼리의 일부임이 분명하지만 코끼리를 사실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처럼, 조각과 조각을 이어 맞춰 전체를 그려내는 일은 더디고 막연하기만 하다.그렇다고 비형랑이 하룻밤에 북천에 다리를 놓듯 도깨비놀음을 할 수도 없다. 기신기신 더디게 갈 수밖에 없는 길을 연구자와 예술가들이 조금씩 밟아왔다. 유물과 유적을 관광 상품으로만 여기는 맹목도 시대의 변화와 함께 눈을 떠 문화유산을 새로운 이해와 애정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기실 경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문화재요 보물이다. 코끼리의 본질을 꿰뚫어 한눈에 그려낼 수 있는 안목을 갖지 못한 바에야 일부라도 더듬어 그 신비를 상상함에 감복한다. 그렇다면 코끼리를 가장 코끼리답게 했던 시발점이자 중심은 어디에 있을까?기원전 57년부터 기원후 935년까지 992년 동안 한반도 동쪽과 남쪽 지방을 통치했던 고대국가 신라는 서라벌, 즉 경주라는 빛나는 도읍과 시작과 끝을 함께했다. 서라벌 사람들, 그중에서도 왕국의 주인인 왕족들은 첨성대에서 별을 보고, 석굴암과 불국사에서 기도하고, 죽어 대릉원에 묻혔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에서 살았을까?신라의 천년 왕성은 월성(月城)이다. 월성은 파사이사금 때인 101년부터 신라가 멸망한 935년까지 834년 동안 신라의 궁성이었다.56대 왕들 중 왕궁 건설을 직접 주도했지만 오래 거주하지는 못한 5대 파사이사금을 제외하면 6대 지마왕부터 56대 경순왕까지 50명의 왕들이 살았던 곳이자 통치의 정청(政廳)이었으며 왕조국가 신라의 중심이었다.그런데 이상하고도 야릇하다. 경주를 찾았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첨성대와 불국사와 석굴암은 알아도 월성을 모른다. 학창시절 배웠던 역사 교과서에도 없었다. 월성지는 실제로 천 년이 넘도록 궁성의 흔적조차 없이 완벽한 폐허로 방치되어 있었다. 대릉원, 황룡사, 남산, 첨성대 등이 월성을 둘러싸듯 자리 잡고 있음에도 정작 그 알짬이 없다. 삶터를 외면한 채 무덤과 기도처와 천문대 따위만 들추고 다녔던 게다. 이토록 기이한 부재(不在)와 묵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20세기의 마지막 해인 2000년 12월, 유네스코(UNESCO)는 경주역사유적지구를 세계유산에 등재했다. 석굴암·불국사(1995), 해인사 장경판전(1995), 종묘(1995), 창덕궁(1997), 수원 화성(1997)에 이어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갖고 있는 부동산 유산으로 인정받은 것이다.유적의 성격에 따라 나뉜 남산지구, 월성지구, 대릉원지구, 황룡사지구, 산성지구 등 5개 지구 가운데 월성지구는 국보 제31호인 첨성대를 비롯해 김씨 왕조의 시조인 알지가 태어난 계림(사적 제19호), 왕궁의 별궁으로 짐작되는 동궁과 월지(사적 제18호), 그리고 왕성인 월성(사적 제16호) 등을 포함한다.세계문화유산이자 국가지정문화재인 월성은 신라의 궁성지로서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무궁하다. 그럼에도 월성에 대한 조사는 빈약한 내력을 가지고 있다. 1910년대 일본인들에 의한 조사로 성벽과 주변 상태가 파악되었고, 1979~1980년 동문지에 대한 조사와 1984~1985년 시굴 조사를 통해 해자의 존재와 건물지 여부가 확인되었다. 1985년부터 2010년까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주관으로 3기에 걸쳐 실시된 발굴 조사 중, 2007~2008년 최초의 전면적 지하 레이더 탐사를 통해 생생한 유구의 존재가 마침내 드러났다. 천년 동안 잠들어 있던 월성을 깨우는 일은 달걀 섬 모시듯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월성이 속살을 드러낼수록 정비든 복원이든 개발이든 설정한 계획은 계획대로, 고고학자를 비롯한 연구자들의 고민은 고민대로 깊어진다. 무엇이 역사에 대한, 시간과 사람과 삶에 대한 진정한 예의일까?“삼국 시절에 났나, 말은 굵게 한다!”라는 속담이 있다. 신라와 고구려와 백제 사람들은 정말 굵직굵직한 큰소리로 천하를 호령했었나, 미력한 후대에게는 공연히 큰소리치며 허세를 부릴 때 퉁바리를 주는 쓰임으로 남아버렸다.사뭇 말하기에 조심스럽다. 하지만 월성을 빼고는 신라를 이야기할 수 없다. 시간이 갈수록 더더욱 그럴 것이 확실하다. 앞으로 이어질 연재에서는 월성의 현재였던 우리의 과거, 우리의 현재인 월성의 미래, 그리고 우리가 사라진 후에도 끝없이 새로워질 월성의 시간들을 남은 문헌과 현재까지의 발굴조사, 사람과 상상력을 통해 살피고자 한다. 한계가 번연하기에 두려운 일이다. 영화의 천년과 폐허의 천년이 다시 흐른 뒤, 다만 지금 여기에서 알고 느끼고 깨닫는 편린을 기록할 뿐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람되이 가슴이 뛴다. 신라와 서라벌에 대해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아는 듯하지만 여전히 많은 것을 모른다. 그리하여 월성이라는 비밀의 열쇠를 품고 경주로 향하는 마음은 이미 알고 있는 것들과 여전히 모르는 것들 앞에 달떠 두근거린다.코끼리야, 온전한 너를 만나고 싶다!소설가 김별아는 1969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1994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했고, 2005년 장편 ‘미실’로 1억 원의 상금이 걸린 제1회 세계문학상을 받았다. 소설집 ‘꿈의 부족’, 장편소설 ‘채홍’ ‘탄실’ ‘구월의 살인’, 산문집 ‘톨스토이처럼 죽고 싶다’ ‘스무 살 아들에게’ ‘도시를 걷는 시간’ 등의 책을 냈고, 의암주논개상과 허균문학작가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2019-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