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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손가락만 한 이방인, 작지만 선명한 존재감 그대로

등록일 2019-03-03 19:49 게재일 2019-03-04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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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재발견 소설가 김별아의 경주 월성을 걷는 시간<br/>⑧ 월성에서 발견된 토우, 원성왕릉, 그리고 처용
월성 1호 해자에서 발굴된 토우(土偶)와 원성 왕릉을 지키는 무인상. 생김새와 복색이 한눈에 이방인임을 알 수 있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미국이 멈췄다. 정당간의 협상 실패로 새해 예산안이 통과 시한을 넘기는 바람에 정부기관이 폐쇄되는 ‘셧다운(shutdown)’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미국은 물론 세계 경제를 강타한 사상 초유의 최장기 셧다운은 ‘반(反)이민정책’이라 할 만한 트럼프 대통령의 이민정책 때문이었다.

트럼프는 후보자 시절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고, 그 비용을 멕시코가 내게 하겠다!”고 공약했는데, 농담처럼만 들리던 그 말이 ‘카라반(Caravan)’을 둘러싼 갈등과 대립으로 현실화된 것이다.

신라시대 흙으로 만든 형상 ‘토우’

월성 해자에서 사람형상 등 32점 출토

재미와 정겨움, 소박·솔직함 고스란히

1천500년 세월 흐른 지금,

외부자·이방인 등에 매혹·공포감 공존

낯선 문화·문물 받아들인 신라 되새겨

미국-멕시코의 국경 장벽에 까맣게 달라붙은 카라반 즉 이민자 행렬은, 2018년 10월 온두라스의 도시에서 모였을 때만 해도 고작 160여 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과테말라를 거치면서 3천여 명으로 늘어났고, 멕시코에 들어설 무렵에는 7천여 명이 되어 있었다.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극과 극이다. 인권 보호와 온정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있는 반면 거부감을 넘어 혐오감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을 ‘탄생’시킨 반(反)이민 정서와 배타주의는 미국만이 아닌 세계적인 현상이 되어간다. 유럽과 남미 곳곳에서 인종과 문화의 충돌이 일어나고, 한국도 제주도에 예멘 난민이 입국하면서 더 이상 갈등의 무풍지대일 수 없게 되었다.

본디 외부자, 이방인, 타자에 대한 내부자들의 심리에는 매혹과 공포가 뒤엉켜 있다. 선진 문물과 문화를 가졌을 때는 신성한 존재로까지 숭배되지만, 수준이 낮거나 빈털터리일 때는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약탈자로 경계의 촉수를 세우기 마련이다. 이러쿵저러쿵해도 곳간에서 인심 나는 법이다. 불황과 경기 침체로 ‘내 코가 석 자’인 지경에 숟가락 하나 들고 달려드는 밥그릇 싸움의 경쟁자를 환대할 리 없다.

그렇다면 수도 서라벌에 35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고(‘삼국유사’), 모두가 기와집에 살며 숯으로 밥을 짓고 땔나무를 쓰지 않는다(‘삼국사기’)던 신라에서는 어땠을까?

딱 새끼손가락만 했다. 신라월성학술조사단 수장고에서 만난 이방인은 작지만 선명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흙으로 만든 형상, 토우(土偶)다. 신라 토우는 1960년대 황남동 무덤에서부터 토기 뚜껑이나 항아리 장식용으로 확인되기 시작했다.

가야금을 뜯는 임산부, 남녀의 성행위, 개구리를 물고 있는 뱀 등 신라 토우는 언제 보아도 재미있고 정겹다.

과시하며 겉멋을 부리기보다는 소박하고 솔직한 신라인의 심성이 흙 인형에 고스란하기 때문이다. 2018년 2월에는 월성에서 나온 토우들을 장난감 ‘레고’와 조합한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는데, 레고로 만들어진 유물을 가지고 노는 동안 아이들은 따분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재미있는 놀이로 역사를 손끝에서 느꼈으리라.

지금까지 월성 해자에서 출토된 토우는 총 32점으로 사람 형상이 19개, 동물은 12개, 그리고 정체를 확인하기 어려운 게 1개라고 한다. 그중 계림 남쪽에 자리한 월성 1호 해자에서 그가 나왔다. 깊은 눈에 오른쪽 팔뚝까지 내려오는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무릎을 살짝 덮은 옷을 입고 있었다. 팔소매가 좁고 허리가 꼭 맞아 활동성을 고려한 옷은 당나라에서 호복(胡服)이라 불리던 카프탄(caftan)으로 보인다. 그래서 월성 해자 속에 천년이 넘도록 잠들어있던 그는 소그드(Sogd)인으로 추정된다.

소그드인은 중앙아시아의 이란계 민족으로 ‘스키타이’ 혹은 중국에서 ‘속특(粟特)’이라 불렸다. 상술이 능해 일찍부터 실크로드 요지에서 교역활동을 벌여 동서 문명교류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한다.

특히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했는데 이를 통해 신라까지 진출했음이 유물로 확인된다. 이미 경주 지역에서는 유리공예품, 장식보검 등 다양한 서역산 유물이 출토되었다. 또 괘릉의 호인상(8세기), 용강동 고분 출토 호인상(7~8세기) 등 서역인의 형상을 한 조각물도 여럿 있다.

월성 해자에서 출토된 터번을 쓴 토우는 6세기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지금까지의 발견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이방인이다.

석굴암에 올랐다가 불국사역 앞에서 점심을 먹고 시내로 돌아오는 길에 괘릉을 들렀다. 돼지갈비와 국수와 김밥의 기묘한 세트 메뉴가 예상보다 만족스러워서 허허벌판의 무덤 앞에 서서도 헛헛함이 덜했다. 경주에는 보물이 너무 많아서 보물이 보물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매력이자 안타까움이다. 평일 한낮의 괘릉도 텅 비어 있었다. 서울의 조선시대 왕릉에는 주변에 CCTV와 함께 접근을 막는 사이렌이 설치되어 있는데, 여기는 없는 건지 보이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 적막지경에 무덤의 주인을 지키는 것은 뜻밖의 이방인이었다.

신라의 왕릉 중 피장자가 확실한 것은 능비가 있는 태종무열왕릉과 비편이 출토된 흥덕왕릉뿐이다.

이외 기록상 위치와 시대적 형식에 맞아 학계에서 인정하는 것이 선덕여왕릉, 문무왕릉, 성덕왕릉, 원성왕릉, 그리고 헌덕왕릉 등 5기다. 원래 연못이 있던 자리라 돌 위에 관을 걸었다는 속설이 있어 걸 괘(掛)자의 괘릉이라 불리는 이곳은 제38대 원성왕릉으로 추정된다.

원성왕 김경신은 선덕왕과 함께 반란을 평정한 뒤 상대등이 되었다가 선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김경신은 자신보다 서열이 높은 김주원을 물리친 것으로도 유명한데,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김주원은 강릉 김씨의 시조인 명주군왕이 되었다.

나는 그의 40세손이다. 시조 할아버지의 막강한 경쟁자이자 승자인 원성왕릉 앞에 서니 기분이 야릇한데, 그 야릇함을 더하는 풍광이 무덤 앞을 지키는 석물들이다.

돌사자가 한 쌍, 문인석이 한 쌍, 그리고 무인석이 한 쌍인데…. 입구를 지키고 선 무인석의 생김새가 예사롭지 않다. 2m가 넘는 키에 부릅뜬 눈과 매부리코, 말려 올라간 콧수염과 주름진 옷이 이국적이다.

그리스의 영웅 헤라클레스처럼 곤봉을 닮은 무기를 짚고 있다.

허리를 살짝 비틀어 몸을 젖히고 단체 사진을 찍을 때 “파이팅!”을 외치는 포즈로 주먹까지 불끈 쥐고 있다. 한눈에 보아도 신라인은 아니다.

여기까지는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흙으로 만든 서역인상인 호인용(胡人俑)을 본떴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명교류학자 정수일의 지적처럼, 오른쪽 옆구리에 차고 있는 지름 10㎝ 가량의 복주머니가 문제다. 한국의 고유한 장신구인 복주머니를 서역사람이 차고 있다? 그것은 상상이나 모사가 아니라 실제로 신라인과 서역인이 어울려 살았다는 강력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왕릉을 지키는 호위무사라니, 신라에 인종차별이 있었다면 그는 결코 그곳에 서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3월에 왕이 나라 동쪽에 있는 주군(州郡)을 순행할 때, 어디서 온지 모르는 네 사람이 왕의 행차 앞에 나타나 노래를 하고 춤을 추었는데, 그 모습이 해괴하고 옷차림이 괴이하여 사람들이 산과 바다의 정령(精靈)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에서 헌강왕 앞에 나타난 정령은 시기상(879년 3월) 황소의 난(874~884) 때 일어난 외국인 대학살을 피해 당나라에서 신라로 도망 온 아랍 상인일 가능성이 높다(이희수). 낯설고 기이한 생김새와 옷차림에 신라인들은 귀신을 본 듯 놀랐지만, 정령 혹은 귀신을 잡아 가두거나 구경거리로 삼지 않는다.

‘삼국유사’ 기이편에 기록된 정황은 좀 더 다채롭다.

헌강왕이 개운포(지금의 울주)에 나갔다가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길을 잃었다. 동해 용이 조화를 부린 것이라는 일관의 조언에 용을 위해 절을 지으니 비로소 맑아졌다. 선물을 받고 신이 난 동해 용은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나타나서 춤을 추며 풍악을 연주한다. 그리고 용의 아들 중 하나가 헌강왕의 수레를 따라 서라벌로 들어와 정사를 돕게 되는데, 그가 바로…

동경(東京) 밝은 달에 밤새도록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래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 하리.

역사적인 오쟁이를 진 사내, 처용이다. 처용을 울주에서 경주로 데려온 왕은 ‘마음을 잡아 머물도록’ 하기 위해 미녀를 소개해주고 급간 직책도 준다.

하지만 명령이나 다름없는 중매로 처용의 아내가 된 미녀는 남편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사람으로 변한 역신(疫神)과 정을 통한다. 통정의 현장을 잡고도 처용은 치정 살인 대신 ‘처용가’를 지어 부른다. 웃는 듯 울며 허위허위 춤추며 노래한다. 칼부림보다 그게 더 무섭다.

“(상략)...공이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탄스럽고 아름답게 생각합니다. 맹세코 오늘 이후로는 공의 형상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 문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역신을 무릎 꿇리며 사악함을 물리치고 경사스런 일을 맞이하는 상징이 된 처용. 처용설화는 이국적인 용모의 이방인을 신묘한 힘의 소유자로 여기며 존중하던 당시 신라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물론 당나라에서 비즈니스를 할 만큼 선진한 문물과 자본을 가졌으니 내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 이면에 이방인의 낯선 문화와 문물을 기꺼이 받아들인 신라인들의 높은 자존감을 인정해야 한다. 열등감이나 패배감을 갖고서는 절대 유연함과 포용성을 발휘할 수 없으니.

온정과 혐오, 어느 편의 손도 쉽게 들어줄 수 없을 때는 현실을 들여다봐야 한다. 2018년 교육기본통계를 보면 전국 초등학생의 100명 중 3명 이상이 다문화학생이며 전남(4.3%), 충남, 전북, 경북, 충북 순으로 전체 학생 중 다문화학생의 비율이 높다. 학령인구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국적이 다른 부모를 둔 학생들이 매년 1만여 명씩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낮은 취학률, 높은 학업중단율, 그로 인한 빈부 격차의 심화를 외면한다면 머지않아 새로운 갈등의 요소가 될 것이 확실하다.

자욱한 구름과 뽀얀 안개를 감고 덩실덩실 신비와 해탈의 춤을 추지는 않을 지라도, 이제 우리 곁에 바싹 다가온 더 이상 이방인 아닌 이방인들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새끼손가락만 한 이방인, 짐짓 무표정한 그의 두 눈과 벌어진 입을 오래 들여다본다.

그에게 물어보고 싶다. 150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21세기 햇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그의 눈에 그때의 신라와 지금의 한국은 얼마나 같고 어떻게 다른지? 과연 서로가 상처 주지 않으면서 공존 공생할 방법은 없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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