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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코로나 선거 독후감

이렇게 큰 사건도 없다면 없다. 정당별 지역구 의석수, ‘더민’이 163, ‘미통’이 84석이다. 비례대표는 더불어시민당이 17, 열린민주당이 3, 합계 20에, 미래한국당은 19란다.지도를 보면 면적으로 보면 핫핑크도 강원도 인근까지 제법 넓어 보이지만 파랑은 인구밀집 지역인 서울과 경기를 전부 도배하고 충청, 호남, 제주까지 ‘일통’했다.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옛날에 민자당이라는 게 생겨서 DJ 호남만 빼고 나머지 전부를 차지했던 일. 나는 충청도 사람이지만 정말 안 좋아 보였다. 이제 근 20년만에 영남만 빼고 나머지 전부를 ‘더민’이 차지한 형세, 무섭다는 느낌이 들 정도. 민심의 크기든 정치적 힘의 크기든 너무 큰 것은 두렵게 느껴지게 마련.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나 하면? 그 하나, TBS 뉴스공장 김어준이 내 생각과 꼭 맞는 부분 있었다. 작년에 일본이 수출 규제 나섰을 때,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라 했던 것이 이번 코로나19 사태에 일본을 ‘넘어선’ 일에 연결된 것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지금의 정부, 그리고 한국의 위상을 재평가 하게 했고, 이것이 표로 연결되었다 본다.또 하나, 역시 코로나19 관련, 경기도 지사를 비롯 현정부가 재난 기본소득을 나누어 주겠다고 하는 판에, 포퓰리즘이다, 근시안이다 하며 반대하고 나선 ‘미통’의 시대착오. 지금 사람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데 근본적으로 보자, 멀리 보자는 말에 누가 귀를 기울이나? 옛날에 무상급식 파동으로 오세훈 서울시장 물러날 때가 오버랩 되는 상황.이번 선거는 무엇을 의미하나? 너무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지만, 뭣보다 DJ 구민주당 계보는 ‘정식’ 해체되었다고나 할까? 아니 ‘더민’의 이낙연을 생각하면 너무 노회한 박지원 대신에 ‘열린우리당’과 합친 그를 호남민이 선택한 격이다.또 하나, 중도정치세력이 갈 곳 잃을 지경이라는 것. ‘이성 상실’ 지경의 위성 비례 정당 싸움에 ‘국민의 당’이 겨우 비례대표 3석에 낙착되고 말았다. 지난번 총선의 ‘국민의 당’을 생각하면 호남을 잃으면 나라를 잃는다는 말 실감 난다.이제 이 나라 어디로 가나? 북한에서 김정은 건강 이상설이 선거 결과를 교묘하게 어떤 형태로든 벌충해 주는 듯한 형국. 코로나에 대응은 이 나라가 제일 잘 하고 있지만 앞으로 닥쳐올 경제위기에 북한의 ‘급변’ 사태는 오리무중이다. 선거가 끝나고 나서 새 이메일 주소를 하나 만들었다. ‘annocovid19’를 넣어서. 원래 서기 몇 년 할 때, 그게 AD, 즉 ‘anno domini’다. 코로나19 ‘이후’는 전과 달라야 한다. 무엇보다 생명이 가장 우선이고, 이 기준에 맞추어 모든 것을 새롭게 조정해 나갈 일. 이것이 정치 사회의 기본 되어야 한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4-23

수업, 양심, 사기(詐欺)!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너는 온다. (….)”과연 여기서 ‘너’는 누구일까, 또 무엇일까? 사람마다 마음속에 이런 ‘너’ 한 명, 또는 하나는 꼭 있다. 인용 글은 이성부 시인의 ‘봄’의 일부이다. 시인의 시상처럼 산을 옮겨놓아도 깨지질 않을 정도로 얼음이 꽝꽝 언 강에도 봄은 얼음을 달래어 버드나무를 타고 온다.곡우(穀雨)가 지난 자연과 들판에는 봄이 한창이다. 봄이 지천인 산과 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분주함이다. 철없는 인간 세계와는 달리 자연은 절기(節氣)에 맞는 일을 하느라 분주하다. 그 모습은 거역할 수 없는 자연스러움이다. 자연스러움의 동의어는 균형감이다. 자연이 영원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균형감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무한한 자연과는 달리 인간은 유한하다. 하지만 개발주의 신화에 도취 된 인간들은 그것을 모른다. 1㎜도 안 되는 바이러스에 숨 쉴 권리조차 빼앗겨 버린 게 인간 현실이지만, 망각이라는 만병통치약을 가진 인간은 바이러스를 정복하겠다며 또 야단법석이다. 인간의 망각은 어제의 기억을 오늘도 아닌 어제에 지워 버리는 힘을 가졌다. 바이러스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유통기한을 앞당기는 인간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인간 몸속에서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완전 멸망(종)의 제일 확실한 방법은 스스로 없어지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자기 멸망(종)이다. 외부에 의한 붕괴는 재건(생)의 여지를 남기지만, 내부에 의한 붕괴는 그런 여지조차 없다. 그러기에 없어져도 흔적도 없이 확실히 사라진다. 자기 멸망(종)의 촉매제는 모든 감각을 자기한테만 집중시키는 자아도취다.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들의 특징은 공감 능력 상실이다.“자기도취적 리더”라는 말을 보고 필자는 선거가 떠올랐다. 필자는 선거 결과에 만취된 이들이 더더욱 자기도취에 빠져 영원히 헤어나지 않기를, 그래서 최대한 빨리 사라져 주길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 그래야 교육을 그들의 편협한 이념의 눈으로 재단하지 않으니까!“EBS 수업만 듣고, 학교 선생한테 배우지도 않은 과제를 하고, 저게 무슨 학교 수업이고. 저렇게 할 거면 나도 선생질하겠다. 저거는 사기다, 수업 사기.”퇴근 무렵 잠시 들른 휴게소 식당에서 “2차 온라인 개학 출석률 99%, 접속 문제 있었지만, 즉각 조치”라는 어느 방송사의 뉴스를 보면서 작업복 차림의 어느 손님이 한 말이다. 수업 사기(詐欺)라는 말이 너무 크게 들렸다. 주문한 음식을 손도 못 대고 필자는 사기라는 말이 양심에 걸려 그 자리를 빨리 떴다. 운전하는 내내 “학교 수업 사기”라는 말이 떠나지 않았다.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많은 학교에서 진행하고 있는 온라인 수업은 학교 수업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학생은 없고, 교사 편의에 따라 진행되는 온라인 수업들! 위에서 하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한다는 교사들의 말은 변명조차 안 된다. 지금 하는 온라인 수업이 출결을 위한 “수업 사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수업 본질에 가까운 수업을 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학생들이 기다리는 학교의 봄이 온라인 수업을 타고 온다.

2020-04-22

선거도 끝났으니 평화 세상을

드디어 그 ‘무서운’ 선거가 끝났다. 민주주의 국가의 축제라고들 한다. 그런데, 사실, 어지간히도 으르렁들 거렸다.우리나라 얘기만은 아니다. 미국에서도 트럼프가 대통령 되면 이민 가겠다는 사람들 그렇게 많았단다. 또 일본처럼 평생을 살아도 제 손으로 대통령 한 번 못 뽑아보는 세상도 있다.그래도 선거라면, 지금보다 좀 더 재밌었으면 한다. 싸우는 재미 말고 누가 누가 잘하나 경쟁, 현안을 놓고 깊고 넓게 생각하는 재미, 그런 선의의 다툼, 승자와 패자가 함께 웃는 선거 말이다.아직은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참된 정치 지도자가 없어서? 국민이 슬기롭지 못해서? 어느 하나에 정답이 있는 것 같지 않다.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나는 지금 이 ‘정국’이 어떻게 흘러가면 좋겠다는 생각은 심중에 있다. 하하, 그런데 그걸 공표하기 어렵다. 함부로 발설하지 말자. 세상은 아직 변하지 않았다.‘유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여기서 유 선생이란 ‘유튜브’를 말하는데, 가짜 보수, 가짜 진보는 가야 한단다. 진짜 보수, 진짜 진보가 나서는 세상이 되어야 한단다.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이 보수니 진보니 하는 말이 그런 이분법이 싫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민주주의 하나만 있으면 된다.옛날에는 ‘이쪽’이 민주주의고 ‘저쪽’은 독재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아주 명확해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아니, 그렇게 말하면 정직하지 못하다. 뭐가 뭔지 알겠는데 말하기 어렵다. 말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렇게 쉬운 말을 할 수 없다. 무엇 때문에?예나 지금이나 나는 균형이 좋고 중간이 좋다. 물론 나는 한 번도 그렇게 중심 잡고 살아본 적 없다. 또, 중간을 어중치기나 박쥐 정도로나 여기는 세상이다. 중간을, 중도를 꿈꾸는 일은 너무나 어렵다. 그래서 나 같은 부류는 정치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다들 선의에서 저렇게 안간힘을 쓴다고 믿고 싶다. ‘나’만 선의가 있는 게 아니요, 저 사람도 선의가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다들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잘 되기를 꿈꾼다고, 그래서 자기 방법을, 노선을 고집하는 것이라 생각하자. 그렇게 믿으면, 가정하면, 대화도 타협도 다 가능할 것이다.선거가 끝났으니 그 끝난 나날만큼 조금은 더 평화로워지기 바란다. 의견이 다른 사람들끼리라도 한 뼘이라도 더 가까워지면 좋겠다. 그 무서운 코로나19 때문에 아직 어려우려나?아무튼 패배한 쪽에 손을 먼저 건네라. 함께 가자고 하라. 뭐라도 먼저 드리라.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4-16

코로나19 시대 서울

은평구는 서울에서도 변두리 동네로 취급되는 곳이다. 그렇지 않다고, 이 동네 사람들 아이디어 짜내고 한국문학관 유치하고 정지용 거리 만들고 등등 애들을 쓴다.서울역에서 통일로 문산 가는 길 따라 독립문 지나고 홍제동 지나고 외길로 한참을 나와야 은평구라는 곳인데, 동네 가까운 곳에 이르면 벌써 북한산 남다른 기운이 밀려들어 서울 딴 곳으로 옮겨온 것 같다.그래서 그런지 연서시장이니 대조시장이니 전통시장도 많은 이 동네는 여전히 예스러운 풍취가 느껴진다. 서울 다른 데보다 확실히 정감 넘치고 물가도 싸다.나 잘 가는 연서시장에 ‘똑순이네’가 있다. 이 집 아주머니는 손이 유난히 크다. 밥 한 끼 먹으러 가도, 구운 낱장 김에, 달래 간장에, 간장 게에, 노란 배춧속에, 빨간 김치까지, 여기도 뭐가 남을까 싶게 퍼주시곤 한다. 이 불경기에도 그런대로 버틸 만하다는데 뭣보다 단골손님이 끊어지지 않는다나.그래도 코로나19 시대는 무섭다. 한 번은 자동차 고칠 일이 있어 그 동네 현대카센터를 들렀는데 바로 옆 음식점이 대낮에도 불이 꺼졌다. 손님이 들지 않는 까닭일 것이다. 두 달 전에 생긴 회 센터는 개업할 때 손님이 꽤 드는가 했는데 왔다 갔다 하며 보면 썰렁하기만 하다. 아홉 시 남짓 하면 벌써 사람들 통행이 줄어들어 버리니 길가 행상들, 순대도 팔고 치킨도 팔고 떡볶이도 파는 분들도 어디 갔는지 모른다.보통 일은 아니다. 코로나19 유행 초기에는 이 은평구 성모병원에도 확진자가 나타나 이틀인가 폐원을 하기도 했다. 벌써 그게 2월 하순쯤이었으니 벌써 한 달도 넘었지만 그 직후 시장에 인적이 드물 정도였으니, 코로나 공포증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그나저나 출퇴근 시간이 아주 편해진 것만은 반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서울 중심가로 통하는 외줄기 병목길이 차량 통행이 확 줄어들었다. 음식점에 가도 사람들 띄엄띄엄 앉았으니 시끄럽지도 않고 남의 타액이 날아들어 올 걱정도 없다. 모든 게 인기가 없어지니 아파트 값도 내려앉는 분위기라고도 한다.코로나19가 유행처럼 몰려왔다 가면 모든 게 원상회복 되려나? 사람들은 경기가 브이(V) 자를 그리지 않고 엘(L)을 그릴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면 이 모든 코로나19 ‘평온’이 일상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면 정작 호랑이는 코로나19가 아니라 뒤 따라 오는 경기불황일 것이다.4월이 되자 여기 은평구 불광동 로터리에도 선거운동 차량이 나타났다. 트럭 위에 서서 내 쪽으로 깊은 절 올리는 분들이, 나라 일을 정말로 제대로 해주시기를 바란다. 힘들디 힘든 시절이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4-09

코로나19 속 ‘비례대표’ 난리

지난 24일 하루 76명 증가, 확진자는 총 9천37명. 며칠 사이에 코로나19 감염 증가세가 확연히 둔화 되었다.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프랑스, 미국 등등 한다 하는 나라들이 다들 나가떨어진 사이에 한국만은 대폭발에서 비껴 난 듯한 느낌이다.천만다행이다. 하루에 몇백 명씩 사망자가 나는 참극은 면할 수 있으니 말이다. 여기에 우리는 사재기도 없고, 총을 사두려는 사람들도 없고, 종교적 신념만을 내세우는 사람도 없다. ‘공동체’를 지키려는 마음에서만은 모두들 ‘하나’다.섣부른 전망일지 모르지만 코로나19는 앞으로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 문제를 ‘촛불혁명’에서 ‘코로나19’로 이어지는 ‘삶의 혁명’의 일부로 인식할 것을 생각한다. 삶의 혁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치보다, 경제보다 삶 자체를, 생명 자체를 근본적으로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혁명이다.촛불혁명 때 고등학생, 노인들이 광장에 많이 나왔는데, 이는 삶의 혁명의 징후였을 것이다. 이제 코로나19가 정치와 경제를 뒤바꾸고 있다. 사람들한테 돈을 공짜로 나눠 줘? 무슨 공산주의 사회야? 하는 식의 논란이 경제 대공황 징후 앞에 쑥 들어가 버렸다. 경제성장이라는 구호도 절박한 생존 문제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자영업자들은 대출금 이자 갚을 능력을 잃어가고 있고 월급받는 사람들은 직장을 잃어버리고 있다. 경제, 경제 했지만 그 경제 밑에 생존이라는 삶의 문제가 가로놓여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천만다행, 이 삶의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나의 ‘난장’이 판을 벌리고 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소수정당 보호? 그야말로 언어도단이다. 서로 남 탓 하며 거대 정당들이 자기 몫 챙기려고 별별 수단 다 쓴다. 코로나19 뉴스 밑으로 시민단체들이 위성 비례정당 위헌이라고 들고나왔다 한다.코로나19는 우리들의 삶이 경제며 정치 이전에 삶 그 자체로서 생명이라는 근본적 가치 위에 서 있음을 입증해 주었다. 모두들 여기에 집중하라고 그 바이러스 군단들이 외치고 있다. 그런데, 안 들리는 모양이다. 일단 숫자 싸움에서 이겨보자는 것이다.선거가 끝나면 코로나19도 사그라들려나? 도쿄 올림픽을 물 건너가게 해놓고도 코로나19는 아직 배가 고픈 모양이다. 선거가 끝나고 요즘 벌어지는 일들은 안 잊었으면 좋겠다. 이건 정치 같지 않다. 삶의 경제가 경제 논리를 차버렸듯 삶의 정치는 이런 식 정치를 무효 처리해야 한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3-26

‘호남’의 딜레마

단도직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면서 ‘새천년민주당’을 깨고 나가자 호남민들은 깊은 소외감에 사로잡혔다.훌륭한 경세가 DJ의 정신이 응집된 당은 ‘구민주’ 세력과 ‘노통’ 세력으로 분할되었고, 그로부터 한나라당, 새누리당의 오랜 ‘치세’가 이어졌다. 선거가 스물 몇 번 있었는데 분할된 ‘민주’ 세력은 늘 참패를 면치 못했다. 정동영 후보의 ‘어마어마한’ 득표 차 패배는 그 정점을 보여준 것이었다.DJ 민주당의 구민주 세력에게는 버려졌음으로 해서 명분이 있었다. 호남들은 따라서 둘로 나뉘었고 약자에게 기울기 마련인 사람의 ‘통성’은 박지원 의원으로 ‘대표되는’ 세력을 동정하게 했다.이명박, 박근혜 두 전임대통령의 실정은 분할된 ‘민주’ 세력에게 천금의 기회로 작용했다. 현 대통령과 박지원 의원과 새로 등장한 안철수 대표의 불안한 동거는 위태로웠지만 어떤 회생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한 번은 세 사람이 합동해서 대통령 선거를 치렀지만 패배했고, 다른 한 번은 중도를 표방한 안, 박 연합과 현 대통령 쪽이 분열된 채 다른 당의 홍준표 대표와 선거를 치렀다.호남민들은 5·18 학살로 연원이 거슬러 올라가는 이른바 보수 세력이 재집권하는 것을 볼 수 없었기에 현 대통령을 지지했지만, ‘열린우리당’이 선사한 소외감과 그로부터 생겨난 동정심에서 안, 박 연합의 ‘국민의 당’을 동시에 떠받쳐 주었다. 그것이 지난 총선거에서의 ‘국민의 당’ 바람이었다.다시 한 번 선거가 치러진다. 코로나19가 중심점이 되면서 다른 모든 접점들은 ‘사라진 듯하다.’ 그러나 살아 있다. 이제 호남은 민주당 치세 하에 안철수 대표와 ‘결별한’ 민생당이 생존을 시험하고 있다. 새로운 ‘국민의 당’은 호남을 잃어버렸지만 코로나19 속에서 대구·경북을 새로 얻은 형세다.호남 내부의 심경 세계는, 이 ‘만주 정치 평론가’가 추론해 보건대 아주 착잡할 것 같다. 무엇을,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꿈은 땅에 떨어지고 결코 패배할 수 없다는 논리만 남은 형국이다.무엇을, 누구를 선택해도 개운치 않다. 시원스럽지 않다. 마음속에 그리던 이상은 실현될 가망 없다. 그래도 투표장에 가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이다.이번 선거는 이 분들에게 가장 참담한 선택으로 남게 될 것이다. 하기사, 언제 이 호남에 바람 잘 날이 있었느냐만은./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3-19

코로나19, 그리고 이재명

코로나19는 바야흐로 ‘팬데믹’, ‘세계적 대유행’에 들어갔다고 한다. 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 WHO 사무국장의 선언은 벌써 늦었다는 비판과 함께 뉴욕증시를 다시 한 번 폭락시켜 버렸다. (이 분 국적은 에티오피아라던가. ‘다음’ 포털에 들어갔더니 사람들은 국적이 그렇게 궁금했던 모양이다.)이 와중에 한국은 다 알 듯 벌써 확진자 8천 명을 넘겼다. 그래도 이탈리아의 걷잡을 수 없는 상황, 일본과 미국의 ‘검사 안 하기’ 전략과는 달리 열심히 방어하고 있는 중이다. 진단 숫자로 세계 어느 나라보다 높고 사망률도 다행히 아직 1퍼센트 미만이다.일본이 한국을 향해 ‘입국 금지’ 조치를 내린 것은 아베가 얼마나 무능한지, 한국을 자기 통치의 값싼 도구로 삼는지 보여준다. 언론에서는 일본이 알려진 것보다 열 배는 더 많을 것이라고들 한다. 올림픽은 세계 잔치니 잘 되어야 하겠는데, 이 상태에서는 장담할 수 없다.이래저래, 이번 선거는 아예 ‘코로나 선거’다. 코로나19, ‘신천지’, ‘마스크’, ‘확진자’, ‘추가경정예산’, ‘입국 금지’ 같은 말들이 숨 가쁘게 언론에 오르내린다.정치는 어떻게 될까? ‘만주 정치평론가’의 시선에 이번에는 이재명이 보인다. 사태가 벌어지자 그는 신속하게 ‘신천지’를 급습해서 명부를 내놓으라고, 안 내놓으면 큰일 날 줄 알라고 으름장을 놨다.그가 ‘원하던 대로’ 지지율이 크게 용트림을 했다. 한 주마다 하는 여론조사, 나는 신임하지 않지만, 암튼, 이번 코로나19에 득 본 사람은 이재명, 안철수, 박원순 등이라고 했다.여러 가지 세평들이 교차하지만 이재명 하면 뭣보다 뚝심, 행정력 같은 말이 떠오른다. 직설적 언사도 온갖 풍파 거치면서 한결 제련되었다. 그나저나 그 여자 영화배우 어디로 갔는지? 그 여성작가는 또 어디로 갔고? 왕년에 장관 지낸 분은 왜 그렇게 집요하게 따지고 들었는지?사실 이재명 목숨은 아직도 ‘간당간당’이다. 벌금 300만원의 ‘죄’라는 게 우습기 짝이 없건만, 그래도 대법원이 그의 ‘명줄’을 쥐고 있다.그런데도 그 ‘뭣이냐’ 비례연합당이라는 걸 비판하고 나섰다나? ‘통합당’ 비례당이든 ‘민주당’ 비례연합당이든 나도 사실은 고개 갸웃이다. 도대체 어쩌자는 말이냐는 말이다.코로나19도, 정국도, 미세먼지 날씨처럼 뿌옇다. 어서 좋은 날 오기만을 기다릴 뿐./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3-12

안철수 ‘기우제’와 코로나19

코로나 19로 온 나라가 난리가 났다. 오늘로 벌써 확진자가 5천명을 넘어섰고,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니 조만간 1만명은 채울 것 같다.마스크가 딸려‘금스크’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진 판이요, 정부가 마스크 때문에 사과를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정부가 노력은 안 하는 게 아닌데 정부든 야당이든 너무 세게 ‘때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안 드는 것은 아니다.이 와중에 ‘국민의 당’ 안철수 대표는 의사 가운을 입고 대구로 내려가 자원 봉사 활동을 벌였다. 언론에서도 모처럼 호의적인 반응들을 보이고 네티즌들은 난리들이 났단다. 보기 좋아 보였던 것이리라.사실‘만주 정치 평론가’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안철수 대표의 오랜 부진은 지난 대통령 선거 토론에서 시원치 못한 솜씨를 선보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두 개의 이유가 있다.하나는, 안철수‘기우제’를 지내는 세력들의 온갖 ‘술수’와 활약 때문일 것이다. 대통령 선거를 전후로 해서 특히 ‘진보파’ 내 비판 세력들은 안철수의 근본은 보수파요, 그러니 보수대연합의 중요축이 될 것이라 메가폰을 들고 선전들을 했다. 지금은 중도처럼 보이고 진보파와 동거하고 있지만 오래지 않아 본색을 드러내고 우파에, 그러니까 독재세력의 후예들 쪽으로 옮아갈 것이라는 것이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도 그런 입들이 어지간히 많아서 안철수는 미래통합당과 손을 잡을 것이라고들 했다. 반드시 잡을 것이고 아직 안 잡고 있어도 반드시 곧, 잡으리라는 것이다. 잡아라, 잡아라, 하고들 기우제를 지내는데, 그것은 잡을 때까지 지내다보면 잡을 때가 올 것이라는 뜻이다.다른 하나는, 안철수 스스로 호남의 정치기반을 허물어뜨렸다는 것이다. 비록 대통령선거에는 실패했지만 ‘국민의 당’은 호남권 구민주세력과 안철수 연합으로 총선에서 많은 지지를 얻었다. 구민주 세력이란 사분오열되어 있으나 박지원 의원에 의해 대표되는 면이 있고, 민주당에서 빠져나온 안철수로서는 이 세력을 버리고는 호남의 손을 놓아 버렸다는 비난을 덮어쓰기 십상이었다. 더구나 이들과 결별하고 손잡은 세력이 겨우 유승민 등 새누리발 탄핵세력이었다니, 그들은 다시 본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는가.이제 호남 구민주 세력과 결별하고 미래통합당과도 선을 그는 안철수는 ‘외따로’ 존재함으로써 자신이 순수한 중도파임을 일단 입증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가 위기의 대구를 찾아가 자신의 의사 면허를 ‘밑천 삼아’ 국민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과연 그가 쓰러질 때까지 기우제를 지낼 세력들의 마타도어를 이겨내고‘중도’라는 새 길을 위한 기반을 확보할 수 있을까?코로나19 덕분에 바보 안철수가 모처럼 쬐그마한 기회를 얻은 것처럼 보여 안쓰러운 마음에 한숨을 쉬어 본다. 세월의 병이 깊으면 의사가 절실한 법이니까 말이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20-03-05

대구, 코로나19

대구 사는 박 시인은 내 절친 중에서도 절친, 그래 2월 말에 서울에서 한 번 꼭 만나자고 했다. 한 해 두 해 살아가면서 친구는 점점 더 없어지고 새로 사람 사귀는 일 어려운 것 모르는 사람 없다.만나는 김에 그와 같이 책 쓸 때 함께 했던 황 모도 보자고, 그럼 참 재밌겠다고 해서 우연히 마주친 황 선생에게 약속도 받아냈다.날이 갈수록 사람 사는 일은 점점 더 재미 없어지니 이렇게 세 사람이 서울 은평 하고도 연신내 연서 시장에서 만나 서대구이에 막걸리 한 잔 하면 좋을 것 같다. 거기 똑순이 아주머니 손맛으로 김 구워서 밥도 한 공기씩 하면 더 부러울 것 없을 것 같아 그날은 세상 없어도 꼭 보자고 신신당부 해놓았던 터다.그런데 이 박 시인한테서 연락이 왔다. 대구에 코로나 환자가 발생해서 위험하니 약속을 다음으로 미뤄보자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코로나19 확진 환자 수가 일백 명 안쪽으로 헤아리던 때다. 그게 무슨 얘기냐고, 코로나19 확산세가 주춤해지는 판에 몇 명 되지도 않는 환자수 때문에 뭐 무서워서 장 못 담근다더니 될 말이냐고 펄쩍 뛰었다. 아니란다. 당장 자기 자신이 보균자일지도 모르는데 기차 타고 서울 가서 슈퍼 전파자 되면 어떻게 하냐는 것이다.참, 걱정도 팔자다, 코로나19보다 더 위험한 게 경제 불황이라고, 가뜩이나 자영업자들 생난리에, 가뜩이나 손님들 없어 죽겠는데, 코로나 타령으로 아예 끊겨버리면 어쩔 테냐 말이다. 혹시, 같이들 모여 노는 게 싫어 그런 것 아닌가, 정 떨어진 거야? 하는 농담조 소리를 하고는 올라오지 않겠다는 사람 억지로 청할 수 없었다.친구 중에 정 모라 하는 친구가 실제로 그런 소리를 했다. 코로나19로 죽는 사람 숫자보다 경제난으로 자살하는 사람 숫자가 더 늘어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건 바로 며칠 전 얘기니까 코로나가 한 사백 명 할 때 이야기다. 그때만 해도 나 역시 박 시인 따라 ‘겁’을 배워 목숨이 중하지 돈이 중하냐 하고 반박을 했지만 우리 정 모는 들을 생각을 안 했다.거, 섭섭하다, 하고 몇 개월만에 한 번 만나려다 무산된 약속을 충분히 아쉬워하기도 전에 코로나19가 급격한 확산세를 보였다. 기하급수라는 말이 이런 때 쓴다는 것이 실감날 정도다. 대구 신천지는 말할 것도 없고 대전에도, 광주에도, 서울에도, 나 사는 은평구에도 성모병원 확진자가 나타났다고 했다.낮에 자동차 고치느라 카센터에 갔는데, 바로 옆 식당이 한낮에도 불이 꺼져 있다. 아예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인건비도 감당할 수 없는 나날이니 한 봐도 사정을 넉넉히 알 수 있다. 큰일이다. 보통 일 아니다.대구서 은평까지 어디 하나 안전한 곳이 없다. 최근에는 포항에도 코로나19 확진 환자가 여럿 나와 아리랑횟집도 텅 비어 버렸다. 어떻게들 사나. 어서 썩 물러가기를 두 손 모아 바랄 뿐이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20-02-27

의자왕, 코로나19, 차이나

백제 31대 마지막 왕 의자왕은 젊어서 아주 어진 임금으로 해동 증자라고까지 불렸다고 했다. 이 어진 임금이 나중에 주지육림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나라를 망하게나 한 것처럼 알려져 온 것은 쓰여진 역사의 허망함을 말해준다.연구자 이도학이 쓰신 ‘백제장군 흑치상지 평전’에 따르면 항복한 의자왕이며, 백제부흥운동을 이끌던 흑치상지며, 연개소문의 두 아들이며 모두 낙양 북망산에 묻혔는데, 묘지석들을 보면 그들의 사연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옛부터 배신하는 자, 모반을 꾀하는 자, 숨어 음모를 꾸미고 해괴한 참언을 퍼뜨리는 자는 끝내 파멸해야 하는 바, 이 예식진의 본모습이 죽어 천삼백여년만에 무덤이 파헤쳐지듯 하고 있다 할 것이다.중국‘서유기’를 보면 당 태종은 그렇게 어진 황제일 수 없는데, 이는 다 자기 나라 안에서 권력이 통하니 그런 것이요, 한국에서 이 황제는 침략을 일삼고 나라 망하게 한 배신자를 융숭히 대접한 권력자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이 나라가 중국 옆에 삶의 터전을 잡은 것은 역사의 숙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의 제 민족들이 전부 호혜평등하게 지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만 조선인들은 크고 세게 되는 시대는 많지 않았고 그런 중국과 일본에 어지간히도 시달림을 받았다.중국의 역대 한나라, 당나라가 그랬고, 한족 국가는 아니어도 원과 청도 이른바 ‘중원’을 차지하고는 조선인들을 치고 압박을 가했다. 그렇다면 역사상 가장 큰 한족 국가 중 하나인 오늘날의 중국은 어떨 것인가? 지금 중국은 티벳도, 위구르도 먹고, 만주도 지배하고 있고, 타이완도 한 나라라 한다. 고구려는 중국사의 한 부분이고 윤동주도 중국의 조선족 시인이라고 주장한다.이 큰 나라 손문의 도시 우한에 코로나19가 나타나자 중국 대륙은 물론 이웃나라들도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다. 이것은 ‘유언비어’지만 거기 연구소에서 에이즈 바이러스와 코로나 균이 인공 합성 되어 이 코로나19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믿거나 말거나. 하지만 이런 말을 잘못 퍼뜨리면 당장 실종감이다. 외신을 통해 들리기로, 지금 코로나19 문제를 제기했다 어딘가 들어갔다 나온 의사는 자신도 감염되어 죽었고, 유튜브에 우한 소식을 알린 팡빈이나 천추스 같은 사람들도 연행되었다고 한다. 또 무슨 일을 한 교수도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던가 안다던가.나라가 크면 클수록 민주주의가 더욱 절실하다는 것은 트럼프의 미국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럼 시진핑의 중국은? 나라는 역대 최강이요 사람들은 말조심을 해야 한다. 중국이 감기에 걸리면 한국은 독감에 걸린다. 백제 옛날 일이 남의 일이 아니다. 의자왕도, 예식진도, 흑치상지도 되기 쉽다.어서 코로나19를 틀어막을 일이다. 지역 확산을 막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조공은 어떻게 해야 하나? 중국이 하나가 아니라면, 몇 개라면 한반도도 조금은 편안해 지려는가?아, 그냥 해본 소리다. 나같은 서생이 뭘 알아서 천하를 거론씩이나 한다는 말이냐. 세상이 그냥 어수선하다는 말이다.

2020-02-20

코로나19

지난 2월7일 중국 후베이성 병원 의사 리원량이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는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풀려난 후 코로나19 환자들을 치료하다 본인도 감염되어 급성 폐렴을 앓아 왔다고 했다.10일자로 중국의 코로나19 확진자는 4만171명을 기록했다고도 한다. 사망자는 908명에 달한다고도 하고. 하지만 이렇게 홑단위까지 정확하게 나오는 숫자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국의 코로나19 감염자는 그러고 보면 놀라울 정도로 적다고나 할까. 12일 현재 ‘물경’ 28명이나 된다고 하며 그중 7명이 완쾌 판정을 받았다고 하니 말이다. 중국인을 입국 금지를 시켜야 한다는 둥 너무 늑장 대처를 했다는 둥 비판이 많았지만 한국의 코로나19 예방 시스템은 나쁘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정작 한국에서 더 놀라운 것은 코로나 바이러스 유행이라기보다는 코로나를 밤낮으로 문제 삼는 열풍일 것이다. 언론이 밤낮으로 시시각각 감염자 수를 카운트 해가며 이동 경로까지 상세히 밝혀내는 바람에 코로나 바이러스는 저 옛날 콜레라 정도 되는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학교에서도 난리가 났다. 우선 개강일을 전면 연기한다는데, 그게 개강은 해놓고 수업은 안 하는 방식의 ‘절묘한’ 기법으로 15주 학기는 채우되 학생들은 모이지 않도록 하는 방식을 취한다던가.중국에서는 웨이보라는 인터넷에 리원량 타계 소식에 추모 댓글이 10억개를 넘어섰다고 한다. 중국의 정보 통제에 대한 불만, 비판이 추모 댓글로 나타나는 형국이다. 심지어는 시진핑 체제가 흔들린다는 소식마저 들리는 판이니 남미의 나비의 날개짓이 서울의 주가를 떨어뜨리는 격이라고나 할까.한국은 그러고 보면 민주주의가 넘쳐나는 나머지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혹여 뒤집어쓸지 모르는 감염경로 책임을 더 무서워 하는 형편이다. 때마침 선거 때가 가까워 오기도 하고.어제 학생들과 함께 하는 논문 발표 ‘집담회’에 중국 유학생들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한국 사회의 중국 코로나 공포증이 유학생들의 마음을 움츠러들게 한 까닭이다. 나는 학생들 발표 중에 우리 유학생 셋에게 간단한 아쉬움의 메일을 보내 주었다. 공부하러 오고 싶어도 참아야 했다는 여학생의 답신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코로나 열풍이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면 모두 모여 공부를 할 수 있었을 테다.그리고 하나 더. 나와 아주 가까운 처지의 젊은이 하나가 이 코로나 바이러스 열풍으로 3월 실직 예정이다. 여행 스케줄이 200건이나 취소되는 바람에 작은 여행사가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일 년 교통사고 사망자 수, 자살 숫자, 암으로 인한 사망자 수 등에 비교해 보면 아무 것도 아닌 한국 코로나가 회사 문을 닫게 하고 젊은이의 직업까지 빼앗을 판이라니. 민주주의도 좋고, 정보화도 좋지만 사건이나 사태의 무게에 맞게 뉴스도 저울에 달아 생산해야 할까 보다. 마스크 회사라도 이참에 대목을 맞았을 테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나 할까./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20-02-13

가난한 사람들

춥다. 서울의 겨울이 추워졌다. 요즘 겨울은 겨울도 아니라더니 어디 한 번 겨울맛을 보라 한다.겨울을 좋아하던 나인데 디스크를 앓으면서 몇 년씩 겨울이 무섭다가 최근 들어 겨우 겨울이 좋아졌다. 몸이야 아프든 말든 손가락 관절이 쑤시든 말든 겨울은 역시 상쾌한 계절이다.그래도 연로하신 부모님은 걱정이 아니될 수 없다.서울, 대전 사이를 돌아온 탕자처럼 왔다갔다 하다보니 끼니를 제 때 찾아 먹기 어려운 때가 많다.가만 있자, 뭐 먹을 만한 게 없나? 대전역사 안에 성심당 분점이 있지만 맛있다는 튀김소보로도 하루 이틀이지 오늘은 다른 게 먹고 싶어진다.광장을 빠져나와 오른쪽으로 막 꺾어 들면 옥수수며 가래떡이며 군밤을 파는 아주머니들이 계신다. 그중 어느 한 분에게 흰 가래떡을 가리키며 얼마냐고 여쭙는다. 헉. 천원이라 한다. 가래떡 하나에 천 원이 아니라 두 개가 천 원이라는 것이다.옥수수는 두 개 한 묶음에 이천 원 이라 하신다. 서울에서는 삼천 원였다.서울이냐 대전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세상에는 돈을 세는 단위가 다른 사회들이 있다.아파트를 사고파는 곳에서는 10억, 20억이 예사인 경우도 많다.공부하는 사람들이 회의라는 곳엘 가면 십 만원도, 이십 만원도 쉽게 받는다. 택시 운전사들은 미터기에 몇백 원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이 작지 않은 문제다. 역 앞의 행상들은 다들 한 묶음에 천 원, 이천 원, 삼천 원을 매긴다.대전 중앙로역 성심당 본점 앞에 가면 행상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데 닭꼬치도 팔고 오뎅도 판다. 빨간 오뎅이든 그냥 오뎅이든 한 개에 칠백 원인데, 세 개를 사면 이천 원이다. 백 원을 깎아 주는 셈이다.서울 지하철 6호선 불광역 앞에 가면 날이면 날마다 오뎅과 떡볶이를 파는 집이 있는데 1인분에 삼천 오백 원이다. 언젠가 오백 원짜리 동전이 없어 제발 삼천 원어치만 주십사 했다. 그랬더니 절대 안 된다고 고개를 흔들다가 나중에 지나가는 길에 오백 원을 더 내라고 했다.세상에는 확실히 ‘등급’이 다른 사회들이 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더 높은’ 사회에 소속되고 싶어한다. 그런데 간과하기 쉬운 것이 하나 있다. 백 원짜리 천 원짜리를 세는 사회에 무슨 거짓이 있겠으며 설혹 있다한들 그 크기가 얼마나 되겠는가.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성스럽다고 하는 것이다. 성스럽다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나도 그럴 것이다.좋은 옷, 고상한 취미를 가지면 성스럽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성스러운 흉내를 내는 것이다. 그 외투 안에 숨어있는 거짓을 우리는 모두 볼 수 있어야 한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20-02-06

아버지

한밤에 찾아 들어간 대전 집은 아버지 혼자 지키고 계셨다. 어머니가 척추 디스크 수술로 입원하신 지 두 주째다.여러번 문을 두드려도 안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는데, 귀가 안 좋아 못 들으신 것이었다. 결국 내가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고서야 문은 열렸다.간단히 씻고 건넌방에 눕는데 전등 둘 중 노란 보조등 하나만 켜졌다. 발밑 쪽을 비추고 있어 그닥 부담스럽지 않았다.고향에 돌아온 탕자 같은 심정으로 전전반측 이런저런 상념에 시달리다 겨우 잠이 들었다.새벽부터 건넌방 바로 앞 주방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잠 없어진 아버지가 팔십팔세의 노구를 움직여 밥을 지으시려는 것이었다. 일어나 만류하려다 그대로 한참을 있었다. 어머니 입원 하시고는 저렇게 혼자 밥을 지어 드시는 것이었다.식탁을 사이에 두고 앉아 아버지와 아들이 맛없는 아침밥을 먹는다. 아버지는 문득 옛날 옛적 인천에서 공고 다니던 시절에 서울로 대학 입학 시험 보러 가던 이야기를 하셨다. 충남 태안에서 공부를 하겠다고 인천으로 가출을 하다시피 올라온 아버지였다. 나와 아버지는 동창지간이었다.식사를 하고 나서야 제대로 씻고자 하는데 어젯밤부터 욕조에 던져져 있는 속옷 한 벌이 눈에 심히 거슬린다.아버지의 속옷을 난생 처음으로 손으로 주물러 빨았다. 기왕 시작한 것, 덤으로 벽에 걸려 있는 수건 두 장도 함께 빨았다.체육학과를 나오실 정도로 건장하셨던 아버지는 십 년 전에 위암 수술을 받으시고 나으셨지만 이제는 몸에 뼈만 남다시피 하셨다.체육을 전공하셨어도 아버지는 문학 지망생이기도 했다. 집에 남아 있는 문고판 영소설들, 펄벅의‘북경에서 온 편지’같은 소설책들은 아버지가 대학시절에 보시던 것들이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응모를 했었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들어보기도 했다.고학생으로 입주 과외를 하며 대학시절을 보낸 아버지는 소설에 당선되지 못하고 대학원에 갈 수도 미국으로 유학을 가지도 못하셨다.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사회에 발을 내딛은 아버지는 홍성, 덕산, 대전, 부여 등지로 전근을 다니다 장학사 시험을 보고 교육청에 들어가 계시다 교감을 거쳐 교장으로 퇴직을 하셨다.지금은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으시지만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엄청 많이 드셨다. 한번은 겨울밤에 마중을 나갔다 눈길에 쓰러져 계신 아버지를 부축해서 모셔온 적도 있었다.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못다 이룬 꿈을 약주로 달래신 것은 아니었던가 한다. 딸 하나를 두고 새로 어머니를 만나 아들 셋을 키우면서 당신의 삶은 무언가에 포박 당하신 셈이었다.이제 어머니 계신 병원으로 가야 할 참이다. 이제는 내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음을 말없이 깨닫는다. 본래 인생의 순환이 그러한 것이리라./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20-01-30

어머니

설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설이라고 해도 어렸을 때 같지는 않아서 나이가 들수록 즐거움보다는 의무감이 앞선다.가만 있자, 내 나이가 얼마나 되었더라? 하고 생각하니 실로 어마어마하다. 수십년전 대학원에 들어가 무서운 선생님 연세가 얼마나 되셨나? 했을때 바로 그 분이 지금 내 나이셨다.그러니 내 아버지, 어머니는 지금 얼마나 연세가 드셨을까. 아버지 서른두살, 어머니 스물일곱살에 결혼해서 이듬해에 내가 세상에 나왔다. 나오기는 부모님 덕분에 나왔는데, 그후로 부모님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때는 물론이고 나이 들어서도 내 좋은 것만 찾아다녔지 부모님 생각에 밤을 지샌 적은 없다.여름 지나서 어머니가 허리가 아프다고 하셨다. 키에 비해서 체중이 좀 되시기 때문에 허리에 부담이 되시는 것이려니 했다. 또 허리 아픈 데는 내가 왠만한 선수쯤은 우습게 보는 처지인지라 아프시면 얼마나 아프시랴 했다.그 사이에 학교 일이 무척이나 힘들고 바빴다. 민족에 관한 국문학 쪽의 논의를 둘러싸고 어떤 절박한 생각이 떠올라 그 일에 쫒기기도 했다. 유월부터 나도 얼마나 몸이 힘든 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고 지낸 것도 같다.십이월이 되자 겨우 정신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에 어머니의 허리 상태는 앉지도 서지도 못 할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이 아플 때 구해줄 수 있는 의사 만큼 귀하고 고마운 존재는 없다. 결국 어머니는 동생 병원에 계시다는 명의로부터 수술을 받으시게 되었다. 어머니가 의사며 수술을 그렇게 무서워 하시는 줄 이제서야 알았다. 기왕 하기로 한 것 마음 놓으시라고 몇번이나 안심시켜 드렸지만 다가올 큰 일이 내내 걱정이신 모양이었다.그동안 내가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잘해야겠다고 대전, 서울을 매일같이 왔다갔다 하는 사이에 수술 날이 닥쳤다.아침 일곱시 반에 어머니는 수술실로 들어가셨다. 아홉시 반까지 수술 준비를 하셨다. 열시 반이 되어서야 나는 아버지와 막내 동생이 기다리는 수술실에 도착 할 수 있었다. 기차 안에서 잠이 든 나는 대전을 지나 동대구 역까지 갔다 되돌아 온 것이었다.열한시반, 열두시반, 한시반, 그리고 두시가 되어서야 어머니의 수술은 끝이났다. 전광판에 어머니의 이름 옆에 회복실이라고 써 있었다. 드디어 수술실 밖으로 참을 수 없는 통증을 호소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나타났다.허리 수술 만큼 아픈게 없다는데.나는 참 못나고도 나쁜 놈이었다. 지금부터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 구제불능, 천하의 불상놈 밖에는 안 될 것이었다. 사람의 사랑 가운데 어머니 사랑만큼 지극한 것이 없다. 나는 그 사랑을 받은 자식인 것이었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20-01-16

자연으로 돌아가면 살 수 있을까?

나이 때마다 인생에 대한 느낌이나 인상은 아주 달라지는 것 같다.스무살 때 같으면 사람은 결코 죽음에 순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될 때가 많다. 젊음이, 생의 기운이 몸과 마음 안에 가득차 흐르는데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으랴.삼십대때야말로 한국인들로서는 가장 의미심장한 시절이라고 생각된다. 십대 때까지는 학교에서 철학조차 가르치지 않으니 이십대 들어서 겨우 인생에 눈뜨는 것이라 할 수 있고, 삼십대 되어야 이제부터 진짜 인생을 살기 시작하는 때문이다.꿈과 욕망은 큰데 자신의 현실적 위치가 그에 상응하지 않아서 괴롭디 괴로운 인생을 곱씹는 때가 바로 삼십대요, 사십대는 어떻게든 자신의 사회적 위치며 인생의 의미 같은 것, 사명이나 운명 같은 것에 눈떠 조금씩 내면화하고 그 의식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그러니 결실을 이루려면 사십 대에 열심히 어느 한 방향으로 내달리지 않으면 안되는 때일 것이다.그렇게 해서 오십대에 이르는데, 이제는 마음도 몸도 평온을 찾을 때가 왔다고 봐야 한다. 철모르는 몽상도, 미친 듯 내달리는 꿈도, 현실에 착근시키려는 실행도 이쯤 되면 가라앉을 것은 가라앉고 인생의 자기 몫이 어느 정도쯤 되는지 스스로 파악할 수도 있는, 바로 그 나이가 오십대라고 할 것이다.이것은 내 생각이지만 이쯤 되면 삶을 삶답게, 그 의미에 치중해서 천천히, 조용히, 차근차근 살아야 할 때이건만, 아뿔싸, 이때처럼 또 다른 인생의 고비가 없다. 이름하여 삶의, 생명의 위기가 뜻하지 않게 불어닥치는 때도 대체로 이 오십대인 것이다.텔레비전이라면 뉴스조차 담 쌓은지 오래인데, 요즘 때아니게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며, 이것저것 인생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많다.자연으로 돌아가면 제대로 살 수 있을까? 건강을 잃어버린 사람들, 생명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마지막 찾아든 산 속에서 새로운 삶을 얻는 경우를 자주 본다. 과연 자연은 인공적 치료 대신에 진짜 회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자연으로 돌아가라고들 한다. 그러나 정작 무서운 병에 걸리면 자연이, 산속이, 피톤치드가, 높은 지대의 공기가 사람을 살릴 수 있을지 의심을 품게 된다.서양의학을 중심으로 발전한 현대의 암 치료법은 세균학적인 시각에서 출발한 한계 탓에 사람을 ‘살리려고 죽이는’ 모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자연 치료만이 살길이라는 말도 들린다.비단 암의 문제만이 아니라, 요즘 들어 이대로는 더 버틸 수 없을 것 같은 위기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세속의 오염된 공기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 깨끗한 공기로 숨쉬며 기름때를 벗겨내야 할 것 같다고나 할까. 올 만큼 왔다고 생각하게 된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야 살 것 같기도 하다. 산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겨울 나날들이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20-01-09

쥐 이야기

경자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돼지해가 가고 쥐의 해가 돌아왔습니다.쥐하면 저에게는 썩 좋은 기억이 없습니다. 옛날에 아주 어렸을 때 학교에서 돌아오니 안방에 쥐가 한 마리 들어와 있었습니다. 아주 작은 쥐였는데, 우리네 생활에서 쥐란 크든 작든 환영을 받지 못했지요. 저는 어떻게든 이 쥐를 잡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쥐를 한 구석으로 몰았습니다. 저는 이 쥐를 겁도 없이 손으로 잡으려 했습니다.‘아야!’ 하고 비명을 지르는 순간, 저는 쥐한테 넷째 손가락을 물리고 만 것이었습니다. 살갗이 찢기고 피가 났습니다. 아무리 약한 쥐라도 함부로 구석으로 몰 일은 아님을 그때 경험으로 알았습니다.또 한 번은 부모님이 쥐를 잡으려고 놓은 쥐약에 제가 애지중지 사랑하던 치와와 어미 개‘워이지’가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밤새 이 어미 개가 고통을 못 이겨 담벼락 밑을 파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쥐의 해에 너무 무서운 이야기만 했나 봅니다. 안타까운 이야기는 새해에는 가급적 안 하는 게 좋은데 말입니다.제가 멀리 여행을 갔을 때입니다. 아주 더운 나라였는데 그때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가려면 자동차를 타고 기차역이 있는 곳까지 멀리 일곱여덟 시간을 한밤에 달려야 했습니다. 포장도 제대로 안된데다 가로등도 없는 길이어서 한밤을 가는데도 여러날이 걸릴 것같이 힘들고 어려운 여행이었습니다. 한 가닥 위안은 제가 8인승 차의 가장 앞자리에 탔기 때문에 앞으로 다가오는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동차 전조등이 시골 길을 비추는데, 그때, 길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제법 큰 쥐 한 마리가 재빨리 건너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저는 이 쥐가 그만 차에 치일까봐 가슴이 조마조마했습니다. 다행이 쥐는 발을 재게 놀려 무사히 자동차길을 건너갔습니다.차는 계속해서 달리고 그러다가 또 쥐 한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아까 보았던 쥐보다 훨씬 작은 새앙쥐였습니다. 저는 또 겁이 덜컥 났습니다. 무사히 건너가야 할 텐데, 이 새끼 쥐는 너무나 작고 발이 느린 것 같았습니다. 아하, 그래도 이 작은 쥐는 그렇게 느리지는 않았습니다. 자동차가 달려오는 큰 길을 작은 쥐는 드디어 간발의 차이로 무사히 건너갔습니다.서울에 돌아와서 두어달 전에 저는 무슨 일로 파주에 가느라 자유로를 달려야 했습니다. 자유로는 파주, 문산 가는 길이지요. 그런데 쥐가, 또, 그 자동차들 쌩쌩 달리는 아스팔트 도로를 건너는게 아닙니까.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 이번에도 쥐는 무사히 건너는 것이었어요. 무사함이 세 번 겹치는 행운도 세상에는 있는 것이었지요.경자년 새해에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무사했으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삶은 누구나 소중한 것이니까요./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20-01-02

전철 속 휴대폰 풍경

후배가 2년 뒤로 하나 있어 어제는 베트남 가기 전에 한번 만나기로 했다. 요즘 베트남 특수라고 거기 일이 많다는 것이었다. 대학생 시절 이후 그와 나는 오래 못 만났다. 말수 적기는 옛날 그대로, 그때는 ‘노선’이 달라 같이 얘기하기도 힘들었건만 지금은 옛날 정이 새로 돋는 듯하다. 한번은 일 삼아 나를 만나러 학교에 오기도 했다.ㅡ학교 올라가느라 마을버스 탔는데 왜 그렇게 조용한지 정나미가 떨어지드만요.정 많은 사람은 버스도 시골 할머니들 왁자지껄버스가 맘에 드는 격이다. 둘러보니 모두들 핸드폰에 코를 박고들 있었다 한다.ㅡ어디 마을버스뿐? 전철 안에서도 다들 그렇지.후배한테는 이 휴대폰 ‘열정’이 차가운 인정세태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듯했다.ㅡ그렇게 사회성이 없어서야 세상이 어떻게 되겠어요?후배는 아직도 먼 후배들의 차가운 인정세태가 못 미더운 듯하다. 80년대에 대학 다닌 사람들에게는 사회성 콤플렉스가 있다.우리 사이에는 막걸리가 있어 견해 차이는 필요없다. 나는 속으로 이 휴대폰 몰입 풍경을 생각한다.혹시 그건 사적인 삶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해 보려는 안간힘 같은 것은 아닐까.요즘 세상은 ‘자기만의 방’이 없다. 집은 아파트, 모든 문이 거실을 향해 ‘열려 있다’. 직장에 가면 파티션만 쳐졌을 뿐 숨소리조차 골라야 할 ‘사회적’ 공간이다. 버스도, 전철도 모두 타인에게 개방되어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자기만의 공간’은 없는 세상이다.ㅡ베트남은 인구가 얼마나 되나? 한 8천만 되나?ㅡ근 1억이죠. 한국어 배우려는 사람은 3백만쯤 되고. 앞으로 1천만은 되잖을까요?나는 후배의 ‘장밋빛’ 전망을 들으며 한국에서는 나날이 사람 숫자가 줄어들 것을 생각한다.전철 안은 출퇴근 시간이면 발 디딜 틈도 없다. 한낮에 전철을 타면 마음대로 발을 뻗을 수 있어 좋건만.비엔나에 갔더니 그곳 사람들은 서 있는 사람들 잔뜩 있어도 혼자 두 자리씩 차지하고 다리를 쭉 뻗고들 앉는다.배려심들 없는 건가? 아니, 앉은 김에 어디 맘껏 앉으라고, 서 있는 사람들이 앉은 사람들 배려해 주는 중이다.서울에서는 어림도 없다. 공간의 민주주의가 어찌나 드센지 조금이라도‘일인분’을 넘어서면 가차없다. 그러니 모두들 자기한테 몰두하고들 싶다. 이어폰 끼고 화면만 보고 있으면 일인분 세상을 충만히 즐기고도 남을 수 있는 것이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12-26

하루 분의 좋은 세상

내가 알고 있는 단 한 가지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했다지요. 그런 것 같습니다. 지혜라는 것은 그러니까 내가 아는 것을 믿고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는 데 있지 않겠지요. 모르고도 따라할 수 있고 따라갈 줄 아는 것이야말로 지혜로운 것이겠지요.궤변일까요? 하지만 저는 요즘 갈증이 심합니다. 무엇을, 어느 분을 믿고 따라야 할지 모릅니다오늘은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집에는 나와 내 고양이밖에 없습니다. 캄캄할 때 집을 나설 때는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제 삶은 늘 길 위에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그래도 집에는 괭이가 혼자서라도 기다려 주겠지요. 전철을 타고 있는 시간처럼 한가로울 때가 있을까요. 아무리 바빠도 전철 안에서는 뛰어갈 재주가 없습니다.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고나 할까요. 전철 맨 앞칸까지 뛰어가야 무엇하겠습니까. 갈아타는 곳은 뒤에 앉아 있을 때. 더 빠를지도 모르는 것을요.오늘은 앉아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제가 잘못한 일들, 초조한 일들, 미운 일, 급한 일들 때문에 마음이 고단하지 않아서 좋으니까요. 옛날에는 사람들이 왜 마인드 콘트롤을 배우나 했습니다. 그런 것까지 배워야 하느냐고요. 그런데 이 미련한 소 같은 놈이 어디로 그렇게 바쁘게 돌아다니는지요.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앞에 걸음이 좋지 않은 사람이 하나 비척비척 걸어갑니다. 저 분도 오늘의 저처럼 걸음걸이가 좋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은 저도 요즘은 지팡이 신세를 지는 날이 있습니다. 그런 증세가 꽤 오래 되었지만 차차 나아질 것이라 생각합니다.제가 나가는 전철역 입구 쪽으로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늘 에스컬레이터가 반갑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제 역마다 에스컬레이터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천천히 올라가는 입구 쪽으로 날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이런 때를 미명이라고 하던가요. 지금 빛이 작고 흐리지만 차츰 주위가 환해질 테지요. 새벽에 일찍 길을 떠나면 날이 완전히 밝을 때까지 시간이 길다고 느껴집니다.드디어 지상으로 올라왔습니다. 세상입니다. 오늘 분의 세상을 일찍 맞았습니다.오늘은 깨끗한 공기만 마시고 싶습니다. 맑은 사람들만 만나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안부를 묻지 못하는 것처럼 슬픈 일이 없습니다. 오늘 저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좋은 인삿말을 건네고 싶습니다. 그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요.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12-19

초미세먼지 날

요즘은 몸이 좋았다 나빴다 한다. 몸이 큰일은 큰일이다. 가뜩이나 목 디스크에 통풍인데, 관절도 하루하루 안 좋아지고 있다.그렇게 좋아하던 막걸리, 뚜껑이 흰 마개로 된 장수 막걸리는 파란색 뚜껑보다 거금 200원이나 비싼데도 많이 마셨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사양이다.이번 학기 끝이 불과 두 주도 안 남았는데 이렇게 허덕일 수가 없다. 사실, 대학 선생들 방학 얘기도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다. 눈코 뜰 새 없다는 말보다 더 좋은 말이 있었으면 싶다. 바쁘기로 말하면 재벌 반열에 들어도 부족하지 않을 것 같다.학교까지 줄잡아 한 시간 사십 분, 오십 분이 걸리니 왕복 서너 시간, 아깝기 짝이 없다. 전철 타고 앉아 세월아 네월아 염치 없이 자리 차고 앉아 책을 읽든 뭐라도 끄적거리든 해야 한다. 그래도 꼼짝없이 전철 타는 그 시간이 제일 행복하다면 행복하다. 어디로 도망갈 수도 없고 딴 짓도 하기 힘들다.그런데 사흘씩이나 초미세 먼지라고 한다. 미세도 아니고 초미세라니, 세사도 아니요 극세사, 그냥 고생도 아니요 개고생이라 하는 요즘 세태에 어울릴 만 하다.하지만 전철이라도 타야 좋은 것을 전철역까지 걸어갈 일이 무서울 지경이다. 오늘은 아침에 좀 늦게 일어났는데도 사방이 캄캄해서 아직도 날이 안 샜나 했더니 미세먼지라는 것이었다. 심해도 이렇게 심할 수가 있나.생전 처음으로 방독 마스크를 쓰고 집을 나서는데 을씨년스러운 공기가 아무래도 몸에 좋을 것 같지 않다.가람 이병기 선생 때문에 익산 여산에 갔더니 미세먼지인가 초미세먼지가 전국 수위를 다툰다던가. 새만금 어쩌구 때문에 그렇다는 소리를 흘려 들었는데, 오늘 이 먼지 안개가 그런 것인 듯하다.하루 종일 조심은 하노라고 한 것 같다. 모든 주의에 게으른 나로서는 이런 날도 일생에 꼽을 듯한 날이겠다.초미세먼지는 듣고 보면 황해 바다 건너 중국에서 날아온다고들 하고, 어떤 사람은 한국 땅 안에서 화석 연료를 태워서도 그렇다고 한다. 옛날에는 황사라고 했건만 지금은 초미세먼지라 하니 그럴 것도 같다.저녁이 되자 난방 때문인지 눈이 따갑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부터 조금만 건조해져도 눈이 뜨거워졌다. 헌데, 이건 난방 건조하고는 뭔가 다르다. 아하, 초미세 먼지라더니. 바로 이것이로구나. 옛날에는 눈에 왕방울만한 황사 알갱이가 들어가도 떼굴떼굴 눈동자 위를 구르기는 해도 이렇게 따갑지는 않았다.세상은 좋은 게 좋게만 이루어지는 것 같지는 않다. 글쎄, 언제 이 짙은 안개 먼지가 개일 수 있을까.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12-12

서울의 계단

스무 살 무렵 서울에 처음 올라와서 가장 버겁게 느껴졌던 것 하나가 계단이었다. 국문학과가 있는 1동 계단은 그런 대로 견딜 만 했다. 정말 적응하기 힘든 것은 도서관 쪽 5,6층 사이 계단이었다. 열람실을 이용하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곳이었다.처음에 생각하기로는 설계가 잘못된 게 아닌가 했다. 나라마다 각각 사람의 체형에 맞는 계단 높이라는 게 있다. 혹시 설계자가 한국사람 키높이를 몰랐던 게 아닐까?달리, 혹시 뭔가 장중한 느낌을 주기 위해 일부러 한 계단 높이를 약간 높게 설계한 것은 아닌가 하고도 생각했다. 1975년에 완공되었다는 이 한 세트의 건물들은 모두 고동색 빛깔이었고 도서관을 제외하고는 한결같이 4층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관료적인 인상을 주는 외관이다. 계단 높이도 이런 장중함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였던 것일까? 이 의도된 장중함은 이 학교의 ‘센터’에 해당하는 사각 스퀘어를 통해서도 발현되고 있었다. 이 사각 스퀘어를 둘러싸고 행정관, 도서관이 위아래로 마주 보고, 다시 학생회관과 인문대학의 1동이 양 옆으로 마주 보며 서 있었다. 이 사각의 공간은 대학의 중핵 기관이 행정관과 도서관이라는, 또 학생회관과 인문대학이 대학의 정신을 상징한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단지 학교 도서관 계단만은 아니었다. 그 무렵 내가 겪은 서울의 계단들은 늘 어딘지 모르게 높아서 올라 딛기 불편했다. 그후 서울은 어딜 가나 지하철 계단으로 넘쳐나는 도시가 되었다. 이 지하철 계단들은 어른도 내딛기 어렵게 느껴졌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진 육교 계단도 마찬가지였다.생각해 본다. 정말 서울의 계단들이 그러했던 것일까? 아니면 혹시 서울이라는 적응하기 힘든 세상에 대한 나의 위화감이 작용한 심리적 반응이었던 것일까? 사실, 고등학교 때까지 산 대전에서는 그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 계단이라는 것이 대전에는 없었던 것도 같다. 요즘 아침저녁으로 지하 6층 깊은 곳에 플랫폼이 있는 독바위역을 드나들어야 한다. 꼭 한 층만은 에스컬레이터를 운행하지 않는단다. 절전 때문일 것이다. 늦은 밤 지친 몸으로 계단을 올라가야 할 때면 불편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이제는 계단에 대해 더는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나이가 되었는지도 모르건만, 나는 지금도 서울의 계단이란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고 투덜거리곤 한다. 어쩔 수 없이, 운동 삼아 오르내리며, 심술을 부려본다. 계단을 보면 차라리 고마워해야 한다던 운동 권유자의 말도 별로 듣기에 좋지는 않다고 말이다.계단은 있는 것보다 없는 쪽이 좋다. 물성을 갖춘 진짜 계단 말고도 모든 사회적 계단도 말이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