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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창조’동인들의 ‘독립정신’

삼 년씩이나 묵은 숙제를 해내야 하는 기분은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쓰디쓰다. 그런 숙제 가운데 하나가 동인지 ‘창조’에 관한 것이다. 처음에 근대 ‘초기’ 잡지에 관한 논문 모음집을 내기로 해서 시작한 게 나만 빼놓고 다 썼으니 골치 덩어리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은 없다.그래도 벌써 그 삼 년 전에 쓰기는 한 번 썼건만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다시 꼭 써야 한다고 마음먹고 함께 책 내는 것까지 미루고 미뤄 가며 오늘까지 온 것이다. 그랬더니 어언 세월이 흘러 벌써 ‘창조’가 세상에 나온지 백 년이나 되어 버렸다. 올해는 기미년 3·1운동 백 주년이 되는 해, 바로 그 해에 김동인, 주요한, 김환, 최승만 등이 함께 월간지를 겨냥하고 펴낸 ‘창조’도 나온 것이다. 창간호에 그들이 남긴 말은 뜻밖에도 소박하고 방어적이다. “우리는 결코 도덕을 파괴하고 멸시하는 것은 아니올시다, 만은 우리는 귀한 예술의 장기를 가지고 저 언제든 얼굴을 찌푸리고 계신 도학선생의 대언자(代言者)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또 우리의 노력을 할 일 없는 자의 소일거리라고 보시는 데도 불복이올시다.” 아마도 그들의 예술주의(또는 예술지상주의)는 일제 강점이라는 절박한 현실 앞에서 한가한 태도라는 오해나 빈축을 꽤나 사기는 샀던 것 같다. 그들은 첫 동인지를 내고 일 년을 넘긴 1920년 7월 발간 제7호에 이르러서야 웅장한 포부를 담은 우렁찬 목소리가 되어 지상에 나타난다.“동방에 혁혁하던 우리 반만 년의 문화가 오늘날 당하여 이렇듯 쇠퇴하고 암담함이 이 어이한 일이냐?퇴계, 율곡, 솔거, 이녕(李寧) 등 선배들이 유원(幽遠)한 철학과 불후의 예술을 끼쳤으나 후인이 이들을 알지 못하고 또 배우지 아니하여 그들의 명저는 헛되이 티끌에 묻혀 좀이 먹고 그들의 걸작은 땅 속에 썩어져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도다. 돌아보건대 근대의 문인 재사들이 한갓 희롱과 유흥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지었고. 그중에 특출한 천재가 있으면 관인이 압박하고 인인(隣人)이 시기하여, 마침내 말라 죽어버렸도다. 그리하여 마침내 세계문명사에 한 줄의 기록을 볼 수 없게 되었도다. 이제 세계는 일전하여 과거의 물질적 과학시대를 떠나서 아름다운 문화의 서광이 바야흐로 비취는 신천지로 들어가려 하는도다. 이에 세계 인류는 다투어 이상향을 찾고 문화적 신생활을 동경하는도다. 저들의 처연한 문화의 꽃이 피는 것을 바라보는 오인(吾人)은 내부 생활에서 일어나는 충동과 요구를 참지 못하여 힘없는 주먹을 부르쥐고 소리를 높여 부르짖노니 먼저 반도의 쇠잔한 예술을 부흥케 하여 위로 선인들의 면목을 빛내고 앞으로 우리도 이상적 신문화를 창조하여, 그리하여 세계의 대운동에 보조를 맞추어, 다소의 공헌이 있게 하고 우리 인류 본연의 참생활을 맛보며, 아울러 인생 천품의 행복을 누리자 하노라.”이 목소리는 분명 기미 독립 선언서의 웅장함을 닮아 있지 않은가. 그들은 폐허의 고아들이 아니요, 선배와 선조를 알고 자신들의 역사적, 예술적 책무를 자각한 이들이었다. 그러니 이‘창조’ 동인들의 독립 정신도 결코 단순했다고만은 말할 수 없다./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1-10

사람은 무엇으로 사나

미키 기요시(三木淸, 1897.1.5~1945.9.26)라는 옛날 일본의 비평가가 있다. 말을 듣자 하니 나중에 이 사람은 공산주의자를 숨겨주었다는 죄목으로 일제 말기에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한다. 그는 명문인 교토대학을 나왔는데, 니시다 철학이라고, 동양의 선과 칸트를 연결시킨 학파에서 공부를 배웠다고 한다.이 교토대학에는 니시다 말고도 하타노 세이치라는 신칸트주의자도 있었는데, 그는 내가 이광수 연구를 하면서 한 번 살펴 봤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 하타노는 교토대학에 오기 전에 와세다대학에 재직했는데, 그 시기가 이광수가 이 대학 철학과에서 공부할 때와 겹침을 알수 있다. 나는 이광수 소설 ‘무정’에 등장하는 ‘전인격적’ 인간이라는 문제를 하타노 세이치가 수용한 칸트에 대한 인간학적 해석에 연결지어 보고자 했다.신칸트주의는 여러가지로 해석되지만 어딘가에 따르면 대략 말하여 칸트 사상을 인간학으로 보는 경향을 가리킨다고도 한다.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 ‘실천이성 비판’을 썼고, 나중에 ‘인간학’을 썼는데, 이 ‘인간학’은 인간 정신 영역의 세 구성 부분, 즉 ‘지, 정, 의’에 대한 탐구에 해당하는 ‘3비판서’를 종합하는 의미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독일에 유학했던 하타노 세이치처럼 미키 기요시도 이 하타노의 ‘주선’으로 독일로 가 하이데거에게서도 강의를 듣는 등 독일 현대철학을 두루 섭렵하게 되지만 나중에 프랑스에서 파스칼의 ‘팡세’를 새로 접하고 깊은 감명을 받고 자신의 첫 저서 ‘파스칼의 인간 연구’(1926)라는 것을 쓰게 된다.‘파스칼의 인간 연구’는 모두 여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의 두 장은 ‘팡세’에 관한 것이고 아주 명철한 데가 있다.내게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런데 이 책의 네번째 장 ‘세 가지 질서’ 부분이다. 인간의 삶에는 세 가지 층위가 있다는 것이 그 요지인데, 제1의 질서는 신체요, 제2의 질서는 정신이며, 제3의 질서는 ‘자비’에 의한, 곧 신적인 삶이다.파스칼이 말하기를, 제1의 신체적 삶을 대표하는 것은 왕후나 부자나 장군의 생활이다. 제2의 정신의 삶을 대표하는 것은 학자, 박식한 자, 발명가 등이다. 제3의 신앙적인 삶을 대표하는 것은 그리스도, 바울,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사람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파스칼이 이 세 개의 삶의 질서는 서로 이질적인 것이며 서로 침범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이런 식으로 말한다.“제왕은 권력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행했던 인간이다. 그에게는 그 자신에게 고유한 위광과 영화가 있다. 그는 지식 없이도 한계 없는 힘을 집중시킨다. 학자는 육적인 크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르키메데스가 왕자였다고 해도 그가 그의 기하학 저서에서 왕자로 행동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다.” 여기서 나의 논의는 일단락 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신체로? 정신으로? 신앙으로? 물론 파스칼은 신앙적인 차원의 삶이 가장 고차원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미키의 ‘세 가지 질서’ 장에 따르면 또한 이 세 개의 서로 다른 차원은 각기 다른 영역이다.나는 내 자신에게 새삼스럽게 묻는다.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나는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인가? 이 물음을 나의 삶을 위한 새로운 화두로 삼아보는 날이다.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1-03

책 나르며 만난 사람

책처럼 정이 가는 물건이 없고 또 책처럼 징그러운 물건도 없다.처음 손에 들었을 때 흔히 ‘그립’감이라고 표현하는 물성의 느낌은 아는 사람만 알지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옵셋 인쇄에서 컴퓨터 인쇄로 바뀌면서 잉크 느낌이 많이 가시기는 했지만 그래도 화면에 띄우고 보는 글씨와는 완전히 다른 안정감을 선사한다. 편안하고도 그윽하다. 책에 고개를 박고 있는 순간들만큼은 세상 어떤 근심도 잊어버릴 수 있다.이 책이 쌓이고 쌓여 자기가 살아가는 공간을 가득히 채우기 시작하면 근심이 비로소 생겨난다. 책이 부피며 무게 같은 물성을 지니고 있다는 게 그렇게 무섭게 느껴질 수가 없다. 때마침 나이도 들어가서 이 많은 책들을 보기는 언제 볼 것이며 두기는 어디에 둘 것이며 나중에는 누구에게 떠맡길 것인가가 전부 고민덩어리일 수밖에 없다.또 다시 숙명처럼 책을 옮겨야 할 때가 되어 화물 용달을 부른다. 카카오 택시처럼 운송차를 주문하면 기사님과 연결해 주는 시스템이다. 무슨 일이든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 이삿짐 나르는 일, 책 나르는 일은 하루나절 걸리는 일이지만 더욱 그렇다고 본다. 그날 운이 좋아야 한다. 비용도 너무 아끼려 해선 안 된다. 일이 일답게 되도록 운수 좋기를 기대하는 수밖에.아침 아홉 시에 사람이 올 거라고 했는데 여덟시밖에 안 됐건만 벌써 신림 사거리란다. 왜 이렇게 일찍 오시느냐고, 저도 아직 못 갔다고 하니, 천천히 오시란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단다. 그렇게 만나 짐을 같이 옮기는데 아무 군말 없으시다 갑자기 당신 살아온 얘기를 꺼내신다.전라도 장흥 사람, 나보다 열한 살 많은, 제대하고 나서 고향의 농사로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더란다. 큰아들이면서 무작정 상경해서 이 일 저 일, 나중에 친척 사업 도와주는 일을 했더란다. 호텔에 횟감을 대주는 일인데, 경기가 좋았단다. 나중에는 집도 장만하고 돈도 꽤나 만졌단다. ‘웬수’의 IMF를 만나 사업 망한 것은 물론, 빚까지 잔뜩 짊어지고 관악산 칼바위에 올라서 보기도 하셨더란다.군에 있을 때 위문편지로 인연을 맺은 아내 생각해서 마음 돌이키셨단다. 도둑질, 살인만 아니면 무엇을 못하랴 하셨단다. 용달차 업체에 취직해서 십 년, 마지막에 사장님이 영업차 ‘넘버’를 하나 주셨단다. 한 번 살아보라고.“세상에서 젤 미련한 사람이 돈에 눈이 뻘건 사람이제.”뼈를 깎는 고생 끝에 빚 다 갚고 두 시까지는 용달 일을 하고 오후에는 아내를 도와 장사 일을 하신다는 ‘사장님’. 차로 한 시간 운송을 하시는데 차선 한 번 바꾸지 않으신다. 원칙대로, 남한테 절대 해 끼치지 않고 기어코 다시 한 번 일어서고 싶으시단다.“다 남이 도와줘서 살았제. 나 힘만으론 여기꺼정 못 왔제.”세상을 어렵게 헤쳐 온 사람들은 왜 그렇게들 마음이 고운지. 세상은 이런 사람들이 바꾸어 간다고 생각한다. 힘 있고 돈 많고 지식 부리는 사람들은 늘 거기서 거기에 있을 뿐이다. 지킬 게들 많아서./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8-12-27

고장난 손전등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참극을 당한 김용균 군은 24세였다고 한다. 꽃다운 나이다. 너무나 아까운 나이다.꿈 못 이루고 떠난 김용균 군 나이만하던 때 나는 무엇을 했었나? 대학에 다녔고 다른 젊은이들처럼 1987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직후였다. 1988년 25세 때는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었고 비록 불안한 생활이었지만 어둡지만은 않게 보냈다.오랜 세월이 흘렀다. 1980년대 전반기에 대학에 들어간 내가 처음 부딪친 서울의 장면은 캠퍼스 시위. 대학 자율화라고 해서 대학 안에서의 시위는 자유로웠고 시위대는 교문을 뚫고 거리로 나아가기도 했다 종로 같은 시내에서 기습 데모를 벌이기도 했는데, 그 무렵 청계 피복 노조 합법성 쟁취 대회라는 것이 열려 참석해 보기도 했다.청계천은 평화시장 젊은 재단사 전태일이 서른두살 젊은 나이로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절규한 역사의 장소였다. 지금 청계천은 인공 물이 흐르는 공원 같은 장소가 되었고 사람들은 거기 노니는 물고기들을 보며 휴식의 한 때를 보내곤 한다. 과연 거기 산책하는 사람들은 청계천의 역사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도시는 많은 것을 감춘다. 보도블럭 한 장만 벗겨내면 과거의 어두운 습지의 기억들이 당장이라도 묻어 올라올 것만 같은데, 현시, 전시되는 대도시 생활의 화려함과 세련됨은 과거를 수몰시키고 현재를 구가하라 한다.세월은 그렇게 오래 흘렀지만 우리는 과연 얼마나 바뀐 걸까? 외화 벌어들이는 배를 건조하기 위해 구둣발로 정강이를 채이며 출근 신고를 하고 안전장비도 변변히 갖추지 못한 채 높디높은 뱃전에 매달려야 했던 시절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리 떠나온 것일까?소문처럼 사람이 캄캄한 어둠 속에 갇혀버리면 용접을 다시 하느니 차라리 보상비를 챙겨주는 게 싸게 먹힌다는 식의 셈법을 우리는 이제는 청산해 버린 걸까?김용균 군의 배낭에는 고장난 손전등과 건건지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거라도 가지고 있어야 어둠 속에서 위험을 그나마 피할 수 있을 텐데 비정규직 노동자인 그에게는 그 값싼 ‘장비’라고 할 것도 없는 것조차 제때 지급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김 군이 처참하게도 몸이 동강이 나 생명을 잃고 말았다는 대목에서 나는 입술을 깨물고 만다. 김 군에게 컵라면은 재미로 먹는 간식이 아니라 그 젊은 피와 육체를 돌게 하는데 쓰는 양식이었던 것이다. 누가 이 청년을 죽음으로 내몰았단 말인가?나는 아니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가? 경제라는 그 괴물이 제대로 돌려면 위험과 죽음을 외주화 하는 것이 필수적이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그렇게 관리, 통제하는 게 없어서는 안된단 말일까?이 나라는 돈의 논리 앞에서 예의도, 양심도, 원칙도, 동정도 모두 옛날처럼 지금도 버리려는가? 무언가 정말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 젊은이들, 아이들에게 어떻게 이 나라를 사랑하라 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당장이라도 우리는 새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명을 돈보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말이다./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8-12-20

중취독성(衆醉獨醒)

굴원(屈原· B.C. 339~278)은 먼 옛날 중국 초나라의 시인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몰락한 귀족의 자손으로 그러나 어려서부터 훌륭한 품격에 고매한 정치적 이상을 가졌다. 그가 살던 시대는 전국 시대 말기로 굴원의 초나라는 제나라와 진나라 사이에서 국운을 걱정해야 하는 곤궁한 처지에 빠져 있었다. 굴원은 제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하자고 하였다. 지금 같으면 미국과 중국 가운데 어디 붙느냐 하는 격일까? 어느 시대나 간신들, 모리배들이 있는 법, 그는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왕의 버림을 받아 오랜 세월을 남쪽 세상을 떠돌게 된다. 중국 땅은 드넓으니 십 년 헤매일 곳도 있으련만 우리 같으면 산수갑산에 처박히거나 보길도 같은 데 숨거나 하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 없으리라.오랜 방랑으로 몸이 상할 대로 상한 굴원이 한 어부를 만난 이야기를 노래한 것이 바로 ‘어부사(漁父辭)’다. 후대 사람이 굴원인 양 지었다는 설도 있다. 여기서 그는 자기를 알아보는 어부를 향해 온 세상 사람이 모두 탁한데 자기 자신만은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취해 있건만 자신만 홀로 깨어 있다고 한탄한다. 꼭 우리네 사람 사는 이야기 같아 낯이 뜨거운 대목이다. 굴원과의 문답 끝에 그 어부가 한 노래를 불러 그를 일깨운다.“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그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이 창랑은 한자 뜻대로면 푸른 바닷물이라 하겠지만 필시 굴원이 방랑하던 남쪽 어느 곳의 물 이름일 것이다. 지금으로 보면 바로 우리 세상을 가리키는 말도 될 것이다. 요즘처럼 탁한 세상도 발을 씻기에는 부족치 않단 말인가? 아, 요즘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 탁한 건지 맑은 건지도 분간이 어렵다.기왕 굴원의 ‘어부사’에 눈길이 갔으니 충정의 노래로 널리 알려진 ‘이소(離騷)’를 찾아본다. 옛날 고등학교 한문 시간에 ‘離騷’를 어느 부분 배운 기억도 있는데, 그 후로는 까마득히 잊었던 작품이다. 서포가 정철의 양미인곡과 ‘관동별곡’을 두고 “동방의 이소”라 했다지만 사실 굴원은 그 넓이와 깊이, 높이 면에서 조선의 ‘굴원’을 넘어선다고 해야 한다. 이 비유조차 헛된 것이라 생각한다.‘이소’에 관한 이야기를 보니, 근심과 이별한다고 해석할 수 있는 이 제목이 오히려 근심을 만난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한다. 굴원의 생애를 살피면 그는 정말로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끝내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게 되고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지자 그는 멱라수(汨羅水)라는 물에 몸을 던져 고단한 생애를 끝마치고 말았다.얼마 전에 이백(李白·701~762)의 시들을 어떻게 읽어 본 적이 있다. 그 또한 굴원처럼 위대한 시인일 뿐 아니라 나라와 세상을 걱정하는 사람이었으니, 시인과 정치는 그렇게 멀면서도 가깝기도 한다. 시인의 신화가 완성되려면 정치에선 비극이 따라야 하는가.나라며 역사며 현실이 다 덧없건만 그 옛날에도 지금도 속세를 떠나려 함에 시인이면서도 그 세상에 발목을 붙잡히곤 한다. 나는 절대로 ‘중취독성(衆醉獨醒)’을 노래하지는 않을 것이다./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8-12-14

키스 해링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두 번 가본 적 있다. 유럽을 간다면 파리나 런던쯤은 가봐야 갔다 왔다고 할 수 있건만, 그런 곳은 못 가봤고 비엔나만 두번.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국의 수도였던 비엔나는 우리 귀에 익은 비엔나 모더니즘의 수도. 그리고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가 있다. 클림트의 농익은 사랑의 화폭, 에곤 실레의 비참, 비극적인 육체. 이런 것들을 보는 재미가 좋았다.색채미 뛰어난 비엔나는 전철을 타봐야 얼마나 화려한지 알 수 있다. 빨갛고, 노랗고, 파란, 유럽식의 시원스러운 직선미에 색채의 화려함이 더해지고, 거기에 다시 금발의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살아 움직여, 비엔나는 여름이면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다.여행의 목적 자체가 비엔나 모더니즘을 견학하는 것이었고 여기에는 ‘경성 모더니즘’이라는 개념에 대한 욕구가 작용하고 있었다.장려하고도 웅숭 깊은 예술의식의 본 고장. 프로이트와 비트겐슈타인의 고장이기도 하고, 문학 쪽은 덜 알려지기는 했어도 호프만슈탈이니 ‘밤의 노벨레’를 썼고 평생 쉬지 않고 일기를 썼다는 그 누구더라? 하는 작가도 있고,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같은 건축가를 비롯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웅거했던 곳이다.이 비엔나 ‘한가운데’에 무목(MUMOK)이라는 공간이 있다. 미술 전시를 중심으로 시대와 장르가 다른 서너 개의 전시관을 한데 묶어 언제라도 동시대와 지나간 미술의 쟁점을 실감할 수 있게 한다.바로 거기서 키스 해링(1958~1990)을 만났다. 살아 있는 키스 해링은 아니었다. 그는 퍼포먼스 영상 속에서 어떤 방 하나 그득히 ‘똑같은’ 형태의 ‘낙서’들을 발디딜 틈없이 그려놓고 있었다. 지금 우리는 어디서나 키스 해링을 만날 수 있지만, 나는 거기서 처음으로 그를 만난 것이었다.모든 천재는 일찍 죽어야 한다. 비디오 화면 속에서 키스 해링은 머리카락을 다 밀어냈고 발가벗고 있었다. 아, 팬티는 입고 있었던가?‘무목’에서 나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사이에 비엔나가 온갖 그래피티의 전시장임을 깨달았다. 미술 전시장만 예술이 있는게 아니요 도시 전체가 살아있는 전시들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견문 좁은 자의 소견이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살아 있는 키스 해링들이었다.두번 비엔나에 가서 얻은 하나의 명제. “마르크시스트는 정치를 바꾸어 경제를 바꾸고 그것으로 삶을 뒤바꾸려 한다. 그러나 모더니스트는 삶의 환경을 바꾸어 삶을 뒤바꾸려 한다.”무슨 얘기냐.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전시는 그가 거대 건축물만 아니라 스푼, 포크까지 ‘설계’한 사람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키스 해링은 삶과 미술을 가장 가깝게 근접시킨 ‘화가’였고, 자신의 ‘낙서’로 삶의 배경들을 물들여 삶 자체도 변전시키려 했다. 그의 그림들은 곧 삶의 혁명의 도구였다. 키스 해링 탄생 60주년. 그의 작품들이 이 땅을 찾아온 모양이다. 한 갑자 이전에 태어났으니 ‘제작 연식’이 꽤나 되었건만 그는 여전히 가장 새로운 전위요, 반항가다. 어디 한번 내가 비엔나에서 무엇을 본 건지 가까운 곳에서 확인해 봐야겠다./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8-12-07

담양이라는 곳

새벽 여섯 시에 사당역 공용버스 정류장에 모이기는 또 난생 처음이다. 어디를 가길래, 언제 올라오기에 이렇게 일찍 모이나? 담양이다. 담양에 국제학술대회가 있다고, 발표 좀 해야겠다는 소리를 들은 게 한참 되었는데, 그게 오늘이었던 것이다. 네시 반에 일어나 씻고 준비하고 고민 끝에 카카오 택시 불러 사당역으로 씽 달리니 다섯 시 삼십 분이나 되었나.슬슬 사람들이 올라탄다.차는 달리고 나는 안에서 좋은 소설을 읽는다. 박미하일이라는 한인 5세 작가의 장편소설 ‘헬렌의 시간’(상상, 2018). 아름다운 소설이다. 헬렌은 소설 속 주인공이 체류했던 에티오피아의 젊은 여성의 이름이다. 식민지 경험을 겪은 그 나라에는 유럽식 이름들도 많단다. 이 소설은 강소월이라는 주인공이 아프리카에 갔다 서울에 돌아와서 이번에는 제주도에 가는 이야기다. 작가는 한국에 대한 자신의 ‘그리움’을 표현하기 위해 온힘을 기울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안간힘은 아니다. 아름다움에 안간힘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버스는 이제 볕을 담뿍 담은 광주호를 지나 한국가사문학관이라는 곳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여기서 개회식을 한다나. 가사라면 정극인, 송순, 정철 같은 사람들이 즐겼고, 허난설헌 같은 여성 시인도 쓴 것으로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빼놓지 않고 배우는 문학 장르 가운데 하나. 정철의 ‘사미인곡’, ‘속미인곡’도 좋지만 그것을 충신연주지사라 생각하면 좀 ‘징그러운’ 데가 있고 그보다 ‘관동별곡’은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관동 팔백리의 방면을 맡기시니~”로 시작되는 ‘솔직함’에 자연의 묘사와 찬탄이 어우러지는 명편이다.가사문학을 기념하는 문학관을 마련해 놓은 슬기에 내심 감탄하며 주위 돌아보는데, 보이느니 대나무, 아하, 이곳은 대나무의 고장이다. 죽세공품 유명한 곳이라는 말 어려서부터 수없이 들었는데 오늘에야 이 담양 행차를 했나 보다, 하고 거기 사람들 얘기에 귀를 기울이니 대나무 죽순을 먹으려면 4월에 순 나는 대죽보다 6월에 나는 분죽 죽순을 먹어야 제맛이란다.점심은 한우 전문집이라는 데서, 하지만 전골 정도로 맛있게 먹고 이제 발표를 하러 전남도립대학으로 간다. 담장 없는 대학은 담양 읍내에 안겨 학교라기보다 차라리 공원 같은 느낌이요, 이 동네 명물 메타세콰이아도 몇 그루 서 있고, 연못에 정자로 갖춘 아담한 곳이다. 발표는 해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 맨 첫 발표를 자청해서 ‘적당히’ 의무를 마감하고, 이제 어떡한다?중앙일보 문학 전문기자로 일했던 이경철 시인이 버스에 동행을 하셨다. 당신 고향이 바로 이 담양, 못 담자, 볕 양 자, 못에 볕이 가득하여 담양이라 하고, 바로 몇 걸음 걸어가면 ‘관방제림’이라고, 홍수 막으려고 관에서 쌓아놓은 둑에 나무를 심어 놓은 곳 있단다. 산에 단풍 못지 않게 아름답다는 느티나무 늘어선 둑으로 나가, 어떠냐, 막걸리가.할머니 2대째 국수를 파셨다는 곳에 앉아 드디어 죽순 요리에, 그곳 명물 국수에, 달걀도 여기 달걀은 여느 달걀 아니란다. 냇가에 오후에 앉아 늦은 가을 바람 맞으며 거기 막걸리 한 잔에 죽순 그 부드러운 무침을 한 점 맛보니, 아하, 서울은 여기서 몇 리? 벌써 초겨울 같은 추위인데.담양, 못에 볕이 가득 담겨 아름답고도 따사롭다. 좋은 곳에 사람이 많지 않으니, 이 또한 시대요, 세상 탓이라 할까./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이철진한국화가

2018-11-30

고시원 화재를 보는 마음

서울 신림9동은 지금은 이름이 변해서 대학동이다. 옛날에 이 부근이 산동네에 무허가주택 천지였을 때 귀에 박힌 이름이라 바꾼 것이다. 봉천동, 신림동 두 동네 이름이 너무 익숙해서 새로 붙은 이름이 서러울 지경이다. 이 신림9동은 서울대학교 관악 캠퍼스 학생들을 위한 자취촌, 하숙촌 역할도 단단히 해와서 유난히 다세대 주택에 원룸이 많다. 이 학교에 진학한 타 지방 출신 학생들은 신림, 봉천 두 동네 중 으레 한 곳은 거쳐가게 마련이다.공부와 인연이 있는 동네라 그런지 오랫동안 이곳 일부는 고시촌이라 불리기도 했다. 사법, 행정 고시나 그밖의 직급 높은 공무원 시험을 위한 학원이 들어서고 고시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한 고시원들이 수없이 들어섰다. 지역 경제를 돌리는 원동력이 바로 이 고시원생들이었고 또 서울대 학생들이었다.법과 대학 대신에 로스쿨 제도가 생기면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이 바로 이 고시촌이다. 당장 고시 보는 사람이 확 줄어드니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던 고시원에 빈방들이 생기고 이 사람들 드나들던 밥집, 세탁소, 커피숍, 술집들이 손님이 궁해졌다.궁즉통이라 했던가. 이 동네 어려움을 메우고 나선 것이 이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 하루하루 일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고시원 방들이 얼마나 좁고 다닥다닥 붙었는지는 아는 사람은 안다. 이번에 종로의 고시원 화재로 드러난 고시원 내부 모습은 그중에서도 열악한 편이지만 시설 좋다고 해도 사실상 셀프 ‘감금’을 위한 사육시설 같은 인상을 주기 안성맞춤이다.그러다 보니 월세가 쌀 수밖에 없다. 가끔 돈없는 대학원생들도 들어가 기숙하는 곳으로도 이용되었고, 나도 몇 달은 살아본 기억이 난다. 나이는 들어 부모님께 손 벌리기 어려운 학생들, 고시 공부에 이력이 난 직업 시험생에, 날품팔이로 생계를 이어가는 남자들, 이주민 노동자들이 이 고시원의 단골 손님인데, 이번에 화재 때 보니 의지할 데 없는 노인분들도 주요 고객층으로 자리를 잡았다.나는 가끔 우리나라는 왜 이럴까 하고 절망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런 감정이 강해지는 때는 특히 인재로 인해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했을 때다. 보람있게 살다 가려고 태어난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 와서 온갖 시달림을 받는 것도 모자라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난과 악의와 무원칙과 안일한 행정의 희생양이 되어버린다면 그 사람의 억울함은 무엇으로 풀어줄 수 있나.오랫동안 민주주의가 옳은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말로는 이 세상의 타인들의 아픔을 함께 짊어지는 사람들을 충분히 길러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사랑주의. 종교적 차원의 숭고한 사랑이 초월적 세계에 갇혀 있지 않고 세상 속으로 들어올 때, 그리하여 사랑주의가 세상을 움직이는 근본 원리가 될 때야, 우리 세상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가난한 이, 병든 이는 나랏님도 못 구한다는 틀에 박힌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가난을 나라가 구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지지 않을 때’ 우리 세상은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직 우리는 갈 길이 멀다.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8-11-23

한 벽에 관한 회상 -김윤식 선생 영결식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세상은 더할 수 없이 쓸쓸해진다. 자신이 의미를 부여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자신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그날은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영결식이 있었다.사일장으로 다음날인 28일 발인이 있으신 선생은, 내가 대학 때부터 대학원 시절까지 줄곧 학문을 생각할 때마다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분이셨다. 처음에 인상 하나, 여기는 공부하는 곳입니다. 운동할 사람은 운동장으로 가시오. 당시는 1984년, 제5공화국 시절, 대학 자율화라 해서 경찰은 대학 캠퍼스 바깥으로 물러갔지만, 통제와 감시가 지배하는 현실에 대학생들의 저항이 뜨겁던 때였다.르네 웰렉과 오스틴 워렌의 ‘문학의 이론’과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동거하는 강의는 고등학교 때까지 한가롭게 사르트르나 까뮈, 헤르만 헷세만을 알던 대학생에게는 몹시 낯선 풍경이었고, 경상도 사투리의 냉정한 음정은 갓 상경한 외로움 타는 청년으로는 적응하기 힘들었다.그러나 그 청년은 그 무렵, 또 그후로도 오랫동안, 서울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라면 무엇이든, 누구든 쉽지 않았고, 숨어있던 벽이었다.대학원에 가서, 그러고도 오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차가움, 투박함, 낯섦, 사람을 몹시 긴장하게 만드는 두터운 압기, 그 모든 것들이, 그분의 외로움에서 온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인생 전부를 판돈으로 걸고 투쟁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 한국현대문학을 위해서도 한 사람쯤은 미친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온 것이고, 또 이 신조를 위해 자기를 바쳐가는 사람만이 품을 수 있는 불친절이었다.그를 알지 않고는, 그가 무엇을 알고 싶어 했고, 무엇을 그리려 했는가를 깊이 음미하지 않고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 졌을 때 나는 드디어 그의 연구를 향한 메타적 분석을 시도했다. ‘숙명과 그 극복이라는 문제’라는 글은 1997년 초겨울에 시작된 탐구의 결과였다. ‘운명과 형식’이라는 그의 비평선집은 내게 와서 ‘숙명’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되었던 바, 숙명이란 날 때부터 타고난 정해진 운명 또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뜻을 갖는다.그렇다. 나는 내 숙명을 의식하고 그것을 바꾸려는, 어휘의 뜻에 따르면 그것은 형용 모순, 역설일 수밖에 없는데, 불가능한 것 같은 시도를 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숨은 벽은커녕 눈에 보이는 벽조차 넘을 수 없었다.벽 앞에서 있을 수 있는 네 가지 행동 방식. 벽을 올려다보며 경탄하기, 벽 앞에서 뒤돌아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기, 벽을 벽이 끝나는 데까지 멀리 에돌아 가기. 벽에 머리를 찧든, 맨손으로든 하켄을 박아넣든 기어올라 타넘기. 나는 지금 마지막 방식으로 그를 탐사 중이다. 이 벽은 높고 육중하고 발디딜 데를 찾기 어렵다. 하지만 진짜 벽은 그가 아니라 나, 내안에 있다.영결식은 이근배 시인의 추모사가 있었고 마지막에는 가수 윤시내의 ‘열애’로 끝났다. 사랑에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사랑의 진짜 방법을 안다고 누가 자신하랴./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8-11-16

고흥 다녀오기

전라남도 고흥이 어디 붙었는지, 정말 실례지만, 잘 알지 못했다. 가만 있자, 어떻게 알고 있었더라? 이 고흥이라는 곳은? 우선 고흥은 작가 전성태의 고향인 줄로 안다. 물론 고흥 땅이 전부 전 작가 것은 아니겠지만. 젊어서, 그러니까 삼십 대 중반경에 만나 술도 마시고 당구도 치고 문학 얘기도 제법 심각하게 나누던 댓 살 아래 후배가 바로 전성태 씨다. 성품 좋아 남에게 싫은 소리 하기 어려워 하지만 고집도 있고 의지도 있고 감식안도 있어 귀하게 여겼던 기억이 있다.나혜석에 관한 논문을 쓰는데 고흥이 등장해서 눈여겨 보았다. 수원 여자 나혜석이 일본 유학 가서 소월 최승구를 사귀었는데, 폐결핵에 걸려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혜석이 수원에 있는데 그의 형으로부터 고흥에 와달라는 전보가 왔다. 혜석은 외면하고 부산으로 가서 현해탄 바다를 건너려는데 또 전보가 날아왔다. 이번에는 혜석은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나흘을 걸려 부산에서 고흥까지 갔다니 그때 교통 사정이 어땠으며, 고흥은 또 얼마나 먼 곳인지 가늠할 수 있다. 그때 끝까지 병든 애인을 외면할 수 있었다면 혜석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시집도 안 간 여자가 남자 집에 가서 며칠을 머물렀으니 제대로 시집 가기 어려웠을 것이요, 때문에 김우영이라는 상처한 나이 많은 남자 만나 결혼해야 했다. 지혜롭지 못했다고 해야 하나 정말 외면했다면 예술가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내게 고흥은 다시 프로 레슬러 김일의 고향이다. 고향이 고흥군 금산면 어전리 거금도다. 난 사람은 아무리 막아 세워도 제 갈 길을 간다고 1929년생인데, 1956년에 역도산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가 밀항죄로 형무소 신세까지 진후 레슬러의 길을 열었다. 1970년대가 나의 유소년 시절이었는데, 흑백 텔레비전이 집에 생긴 것은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사한 직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 김일이 일세를 풍미했다 해도 과언 아닐 것이다. 안토니오 이노키도 기억나고 천규덕도 기억나고 나중에 이왕표도 기억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역시 김일이다. 일본 선수 반칙에 이마가 찢기고 피가 흐르는데도 막판에 가서 그 이마로 박치기를 해서 상대를 매트에 눕히고야 하는 신공에 사람들은 열광을 했다. 작가 전성태가 김일을 기려 ‘퇴역 레슬러’라는 소설까지 썼으니 고향 선배에 대한 오마주를 바친 셈.고흥을 너무 쉽게 봤다. 고흥 사람 송수권 시인 관련으로 간다고 간 것이 케이티엑스 타고 여수까지 흘렀다. 아뿔싸. 순천에서 내리든, 아니면 아예 버스라도 탈 것을. 세상에, 서울에서 지금 고흥같이 먼 곳은 다시 없을 것이다.올 때는 어떻게 왔나. 비평 하시다 이명증을 얻은 후 시를 쓰시는 신덕룡 선생 차를 얻어타고 광주까지 오기는 왔다. 광주서 대학 선생 하는 박순원 시인 생각 나 갔더니 옛날 제자 박일우 선생까지 만나 한 잔 하고 정말 오랜만에 심야 고속을 탔다. 프리미엄 버스라는 게 새로 생겼다는데 그걸 탔으면 두 발 완전히 뻗고 누워서 올라올 것을. 고흥. 풍광도 음식도 좋기는 좋은데 고생할 각오쯤은 해야 갔다 올 수 있다.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8-11-09

가을 서촌 기행

서촌이라. 경복궁 서쪽에 있어 서촌이다. 옛날에 서인들이 여기 많이 살았다고 한다.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로 나오면 요즘에는 연탄불로 밤을 구워 파시는 군밤장수 아저씨가 있다. 굽는데 꽤 시간 걸리는데 굽는 대로 바로 팔려 마음 바쁘시다.몇 발작 나오는 방향으로 걸으면 파리 바케트 골목. 금천교 시장이라는 옛 사라진 다리 이름 딴 시장 골목이 나온다.며칠 전에는 체부동 잔치집에서 강해진 바이올리니스트 공연 뒤풀이를 했다. 마임이스트 유진규 선생, 영화감독 장권호 씨, 칼국수, 파전 등을 놓고 담소를 나눴다.골목 안에는 싱싱한 해물을 파는 계단집을 좋아한다. 저녁에는 줄 서서 기다리는 이 집, 비단멍게나 돌멍게 좋고, 소라를 쪄 내오는 것도 좋고, 해물라면 시원하다. 일하시는 분들 친절 만점인 것은 주인장의 인심도 짐작하게 한다.조금 더 들어가면 김문 기자 단골인 통영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필운동 길 쪽에 ‘통영’이라고 써 붙인 음식점이 있던데 그 집이 이사간 곳 아닌가 한다. 전대감집은 지나치느라 못 본 것 같고, 곧 ‘심산애’라는 이름 멋진 막걸리집이 나온다. 주인 아저씨는 산사람, 대개 가게 지키는 분은 아주머니, 해남 막걸리에 생더덕 갈아 넣어주는 생더덕 막걸리가 일품이다. 마시면 취하는 게 술이라지만 이 막걸리는 취기가 어느 높이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마시면서 깨게 하는 효능이 있는가.이제 필운동 길로 나오면 누하동 쪽 조금 걸어 박미산 시인의‘백석 흰 당나귀’가 나온다. 시집 “숨은 벽”을 내고 여기서 낭송회를 열었는데, 그때 김추인 시인께서 반갑게 오셨고, 강해진, 장권호 두 분도 자리를 같이 했다.한국화가 청전 이상범 선생의 한옥집도 이 길가에 있다. 공주 사람, 오원 장승업에서 심전 안중식을 거쳐 청전과 심산 노수현 등으로 이어지는 현대 한국화의 줄기를 생각한다. 소정 변관식의 산수화에 관심이 갈 때, 청전의 이름 석 자를 얻어들은 게 처음이었지만, 그후 일제 때 신문 연재소설들 삽화들에 이 분의 이름이 많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 금메달 딴 손기정 선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먹으로 없앤 이가 바로 청전, 당시 사회부장이던 작가 현진건은 일 년이나 옥고를 치렀다.더 걸으면 누각이 하나 나오는데 거기 통인 시장 위쪽 입구가 있고 세종대왕 나신 곳이 바로 근처다. 여기서 인왕산 쪽으로 9번 마을버스 가는 길로 좌회전 해서 오르면 옛날 오락실도 나오고 곧이어 ‘우리’ 윤동주 하숙집이다.연희전문 마지막 해 대여섯 달을 보낸 이 하숙집 주인은 소설가 김송, 여기서 윤동주는 후배 정병욱과 함께 아침이면 인왕산 계곡에 올라 세수를 했다. 그리고 그 계곡이 바로 ‘운영전’의 공간 안평대군의 옛집터이비도 하다. 나는 여기서 스물아홉 아름다운 나이에 세상 떠난 동주를 기리며 인생의 비애와 역사의 성쇠를 생각한다. 이제 숲 사이 길 2킬로미터를 오르락내리락 걸어 청운동 윤동주 문학관으로 간다. 숲 사이로 가시거리 좋은 날의 서울 풍광이 펼쳐진다. 시월. 단풍 곱게 든 인왕산 숲속, 시름 잊고 달관 익히기 좋은 곳이다./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8-10-26

음모론 별견(瞥見)

2001년 9월 11일에 일어난 대사건은 지구사를 뒤흔들어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이로써 1990년 전후 동구 사회주의 몰락 이후 지속된 ‘팍스 아메리카나’에 대한 도전이 명확해진 것이다.미국 영화 감독 마이클 무어는 ‘화씨 9/11’이라는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과연 그날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과 펜타곤에 비행기를 충돌시킨 세력은 누구냐를 따졌다. ‘알 카에다’를 이끌면서 테러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빈 라덴은 나중에 파키스탄의 어느 도시에 은거하다 미군 특공대에 의해 사살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마이클 무어는 그날의 쌍둥이 빌딩 붕괴며 펜타곤 충돌이 테러집단에 의한 비행기 충돌만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음을 논증하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세계무역센터 건물은 폭파를 통한 빌딩 해체 공법에서 일어나는 사태와 아주 유사했다는 것이다. 또 펜타곤에 뚫린 구멍은 비행기가 뚫고 나간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 작은 것이었다고도 했다.과연 어떤 소수에 의한 음모에 의해서 역사는 움직여 나가는 것일까? 세월호 참사를 일종의 학살극이었다고 보는 시각을 향해 사람들은 음모론에 물들었다고 비판하곤 한다. 이 참사의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면서 통킹만 사건을 조작했고, 김일성은 일요일 새벽을 기해 전격적인 남침을 감행하면서 북침에 대한 반격이라는 알리바이를 내세웠다. 일본은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반, 류탸오거우에서 철도를 폭파하고는 이를 중국 군벌의 소행으로 몰아붙여 만주전쟁을 일으켰고, 1937년 7월 7일에는 베이징 바깥 노구교, 즉 마르코폴로 브릿지에서 총격 사건을 일으켜 중일전쟁을 이끌어냈다.이것은 하나의 가설이지만 시민들, 민중들은 음모를 꾸밀 줄 모르고 음모 같은 것이 역사를 움직이리라고는 쉽게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랜 역사를 통하여 지배집단, 권력을 쥔 소수는, 음모나 그 밖의 비밀스러운 협상, 거래, 행동 등을 통하여 역사적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어가는 기술을 가꾸어 왔다.1992년 12월 11일의 초원 복국집 사건 같은 것은 이 나라에서 대통령 선거가 어떻게 치러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고, 지난 정부에서도 국가기관을 음모적으로 운영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방영되었다는, 사법 거래에 관련된 프로를 유튜브로 보았다.어두웠던 시대에 죄 없는 사람이 고문으로 간첩 죄목을 뒤집어쓰고, 그 죄 없는 이의 삶을 송두리째 짓밟아 어떤 판사는 자신의 출세의 길을 달렸다. 백주 대낮에 그런 일을 저지르고도 하늘이 무섭지 않았던가. 자기 목숨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 방송에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분이 그를 향해 말했다. 참 불쌍한 인간이라고.죄 없는 사람들은 자기를 해한 자를 향해서도 이렇게밖에는 비난하지 못했다. 오늘도 어떤 음모가 이 세계를 뒤바꾸려 꾸며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8-10-19

따뜻한 마음을 북돋우라

돌아가신 큰 스님이 법석에서 하안거 해제 말씀 하시던 게 기억난다. 당신은 법이 없어 할 수 있는 말이 없으시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어떠어떠하게 해야 불도에 다다를 수 있다는 절차나 방법 같은 게 있을 텐데 당신은 그런 것을 익힌 적 없으시다는 뜻이었다. 내가 문학 공부 하는 것이 바로 그렇다. 비슷한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법식이 없었다. ‘기초’부터 ‘기본’, ‘핵심’을 거쳐 ‘종합’에 이르는 법을 갖지 못한 채 늘 부족함에 허덕였다. 이런 저런 변통과 보수에 시달렸다.이런 상태는 한편으로 딱하고 한편으로 부끄럽다. 이래 저래 발로 뛰고 손으로 헤집는 공부 아니면 소득 없을 공부. 그러면서 최근 관심 갖게 된 선각자 한 분이 바로 도산 안창호(1878년 11월 9일~1938년 3월 10일)다. 다들 알 듯 흥사단을 세운 분이다. 1913년 5월 13일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했다.도산이라는 존재가 한국현대문학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은 그와 춘원 이광수의 관계를 물을 때다. 3·1운동 직후 안창호 선생이 상하이로 와 장차 도래할 민족 독립을 준비하고자 했다. 그때 이광수가 2·8 독립선언을 기초하고 그곳에 가 흥사단 원동 지부에 가입한 첫 사람이 된다.이광수 하면 ‘무정’인데, 최근 십 년 간 국문학계는 도대체 ‘무정’의 이 ‘정(情)이 무엇이냐를 두고 설왕설래 했다. ‘정’은 와세다 미학에서 왔다, 일본 작가 누구들에서 왔다, 칸트에서 왔다, 서양 노블을 이식해 오다 왔다 등등.그런데 안창호 글 가운데 ‘무정한 사회와 유정한 사회’라는 것이 있다. 또 이광수는 안창호와 그의 신민회를 1907년부터 1910년까지, 도쿄의 태극학회 연설회로, 황해도 악양면학회로, 오산학교 선생 등으로 계속해서 접촉해 온 묘한 사실이 있다. 요컨대 이광수는 안창호 사상의 세례를 받은 이다. 이광수의 ‘정’은 안창호의 무정, 유정 사상에 직접 관련된다. 선생은 “정의 돈수(情誼 敦修)”를 말했다. 한 마디로 “따뜻한 마음을 북돋우라”. 그렇게 해서 무정 사회가 가고 유정 사회가 오리라 했다.이광수 소설 ‘무정’을 늘 근대화 하자는 말로 이해한다. 그러나 안창호에 이광수를 비추면 그는 무정한 근대를 넘어 유정한 사회, 근대의 모순을 초극한 사회를 만들자고 한 셈이다.이제 안창호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 보련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모른다. 우리 선배들을 모르기 때문이다. 남의 아비만을 제 아비로 아는 악습 때문이다./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8-10-12

다시 ‘고독 공포를 줄여주는 전기의자’

그날 강동 경희대 병원에 다녀 온 후 나는 무크지 ‘소설’ 첫 번째 권에 실린 그의 소설 ‘고독 공포를 줄여주는 전기의자’를 다시 펴보았다. 이 이야기는 사형수들이 앉는 ‘전기의자’를 종이로 제작한 설치미술가의 내면을 그린 것이었고, 이야기 속에서 이 주인공은 마침 암에 걸려 있었다.원래 사형 집행용 전기의자는 발명가로 널이 알려진 토머스 에디슨이 처음 만들었다 한다. 그런데 이야기 속에서 조각가 ‘박원주’는 이른바 고독 공포를 줄여줄 수 있는, 종이로 만든 ‘더블’ 전기의자를 만들어낸다. 일종의 설치 미술 작품이다.왜 전기의자를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쌍으로, 또 그것도 종이로 만들었어야 했을까. 전기의자는 죽음에 이르는 매체, 그러나 사형수 말고도 우리 모두가 사실은 인생의 한정된 시간 속에서 잠시 떠있다 가라앉게 된다. 이 죽음으로 가는 삶의 여행에 전기의자가 하나 아니라 둘이라는 사실은 근본적 고독에 대한 진통제, 모르핀 처방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의자가 종이로 만들어져 있다면 우리는 이 삶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전기의자’ 곧 죽음으로 가는 매체의 위력을 보다 잘 경감시킬 수 있을 것이다.원래 이 전기의자 설치 미술 작품은 최옥정 작가가 문학적인 상상으로 만들어 내기 전에 먼저 그것을 고안한 조각가가 있었다고도 한다. 그것이 이 소설 작품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은 될 수 없다. 설치미술과 문학 사이에는 엄연한 장르상 차이가 있고 때문에이 문제는 일종의 ‘상호텍스트성’ 범주 안에서 다루어져야 할 주제가 된다. 최옥정씨는 이 ‘고독 공포를 줄여주는 전기의자’를 지난 해 연말에 출간된 문학 무크지 ‘소설’ 2호에 실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 이미 무거운 병이 재발하여 마지막 고비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무서운 통증과 싸우며 소설을 썼다. 지난 봄 3월 26일의 사진들이 그의 아름다운 삶을 담은 마지막 장면이었다. 이 날 세계일보 기자 조용호 작가, 이평재 작가, 한겨레의 최재봉 기자 등이 함께 지리산 아래 최옥정 작가의 오두막에 봄맞이를 갔었다. 박남준 시인이 동행해서 함께 남은 사진들은 생명을 가진 존재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문학 작품 현대 한국 소설은 뜨거운 삶의 문학이다. 오늘의 한국문학은 죽음을 모른다. 죽음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최옥정 작가는 투병 생활을 하면서 그 문학이 더욱 깊어졌고, ‘매창’에 이어 ‘고독 공포를 줄여주는 전기의자’에 다다라 삶에 대하여 죽음은 무엇인가를 물었다. 지난달 13일 목요일 새벽 6시 30분에 최 작가는 불과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일요일이 발인이었는데, 그날은 그녀가 세상에 온 생일날이었다./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8-10-05

고독 공포를 줄여주는 전기의자

지난 월요일이었나. 비가 오는 저녁, 강동 경희대 병원으로 향했다. 어딘가 갔다오느라 서울역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었고 먼 길이고 퇴근 시간이어서 지하철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경희대 병원은 지하철 5호선 상일동 방면 끄트머리에 있었다. 서울의 지하철은 9호선까지 있는데, 모르는 사이에 더 생겼는지도 모른다. 병원이 있는 고덕역이라는 곳에 가려면 서울역에서 4호선 타고 동대문역사문화박물관 역으로 가서, 5호선 갈아타야 했다. 하지만 늘 예기찮은 일이 생기는 법이다. 막상 지하철을 갈아 타려는데, 아뿔싸, 공사 때문에 환승 통로 가 폐쇄되었다고 했다. 어떻게 하나. 만일을 위해 병문안을 함께 하기로 한 일행들과 약속시간을 삼십 분 늦춰 놓았지만 그래도 시간이 빠듯했고 이제 본격적으로 늦을 참이었다.당황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한 정거장 옆에 있는 동대문역으로 갔다. 공고판에 동대문역 운운한 것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동대문 역에 5호선 환승은 없었다. 착각이었던 것이다. 울며 겨자먹기로 지하철 1호선으로 갈아타고 종로 3가역으로 가서 5호선쪽으로 가는데, 서울 환승역 중에 이렇게 먼 곳도 없을 것 같았다. 한없이 먼 통로를 걸어 겨우 5호선쪽 내려갔다고 생각했는데 , 맙소사, 이번에는 3호선이란다. 끙끙대며 다시 올라와 5호선 플랫폼으로 오자마자 전철이 들어온다. 타자.사실, 내가 가려는 고덕 역은 마천 방면이 아니라 상일동 방면에 있다. 타고 나서 전광판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마천행이다. 지하철이 강동역에서 갈라지기 전에 내려서 다음번 것을 타야 한다.초조한 마음으로 고덕역에 내려 병원 위치를 물어 물어 마침내 도착하고 보니 벌써 삼십 분 이상 지각이다. 두 작가는 먼저 812호 병실에 올라가 있을 테다. 지금 말기암으로 투병하고 있는 최 작가가 우리를 맞이해 주기로 했다.엘리베이터를 타고 중환자 병동으로 올라가니, 두 사람은 이미 면회를 마치고 바깥에 나와 있다. 최 작가가 몹시 힘들어 해 아마 잠들었을 거라고, 들어가도 잠든 모습만 봐야 할 것 같단다. 그렇군. 안타까운 마음으로 다시 셋이 병실 안으로 들어가 보는데, 최 작가는 뜻밖에 침상 옆 의자에 앉아 있다. 눈 떠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다가가 반가운 얼굴로 그의 야윈 손을 잡았다. 최 작가의 손은 체온이 옅었고 얼굴은 지난 번 3주쯤 전보다도 많이 야위어 있었다.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최 작가는 ‘작가의 말’을 써야 하는데 집중이 되지 않아 생각해 놓은 것도 적을 수 없다고 했다. 통증이 뭣보다 무섭다고, 그냥 안 아프기만 하면 좋겠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작가의 말’이란 이효석 문학상 수상 작품집에 들어갈 말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의 단편소설 ‘고독 공포를 줄여주는 전기의자’가 우수작으로 최근에 선정된 것이다.그의 손을 다시 잡고 작별하고, 바깥으로 나와 문안 온 사람끼리 맥빠진 식사를 하고, 도로 먼 길을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까지 왔다. ‘고독공포를 줄여주는 전기의자’는 죽음에 관한 사색을 담고 있는 작품이었다. 나는 속으로 이 소설은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삶을 걸고 그는 죽음 앞에서 죽음에 관한 탐구를 이룬 것이었다. 나는 그의 이 소설이 이후로도 오래 남아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움직여 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서울역 바깥으로 나오자 비는 더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8-09-14

사람 앓이

뭔가 안다고 생각하면 벌써 자만이요, 뭘 모르는 것인가. 한해 한해 갈수록 사람 안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게 된다. 사람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니어서, 자기 원하는 대로 생겨나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법은 없다. 그저 우연이 시키는 대로 광막한 우주의 한 점 티끌만도 못한 존재로서, 그럼에도 자기 자신에 모든 것을 걸고 산다.나는 이 순간 지난 사월에 세상 떠난 후배를 생각한다. 나는 그를 열아홉 살 때 만났고, 긴 세월 뒤에 다시 만난 그는 더욱 또렷한 순수를 간직하고 있었다. 하늘은 그런 사람을 단 일 년여만에 덧없이 거두어가 버렸다.어렸을 때 만난 친구는 그에 대해 뭐라 판단하기도 전에 정들어 버려서 옳다, 그르다 할 것도 없고, 맞다, 틀리다 할 것도 없다. 서로 각기 말못 할 불행이 없는 한 옛날 그대로 정겹게 만나 얘기도 하고 밥도 먹을 수 있다. 친구 집에 숟가락이 몇 개고, 텔레비전 수상기를 뭘 쓰고 있는지, 어머니가 어디가 아프시고 동생 사업은 어떻게 됐는지도 안다.젊어서 만난 친구는 기복이 심하고 요동을 친다. 처음에 만날 때는 우선 기질대로 모인다. 같은 학교 들어온 사람들끼리도 불과 몇 달 지나는 사이에 각자 끼리끼리 모이는 걸 보면 속된 말로 ‘케미’가 맞아야 뭘 해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만난 관계가 십 년도, 이십 년도 가지만 그 사이에 많은 것이 달라지게 된다. 처음에는 작아보이던 차이가 들보만해지고 차츰 만나기 싫고 얘기하기 싫어지고 상대하기조차 싫어지는 수도 있다. 처음엔 좋게 좋게 넘어가고자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거슬리는 일이 한두 가지 아니게 된다.그래도 서로 참고 상대의 약점까지 원래 사람은 부족한 존재러니, 나 또한 저쪽에서 보면 얼마나 거슬리리, 접어주고, 이해하고, 눈 감아주다 보면 한두 사람, 두세 사람 운 좋게 남아 오래 가는 사이가 될 수 있다.하지만 같이 젊을 때 만났더라도 이념 때문에, 이해 때문에 만난 사람들은 더욱 그 부침이 크다. 처음에는, 세상이 이래야 한다고, 저래서는 안 된다고, 서로 어깨 곁고 대의를 위해서는 함께 죽기라도 할 것처럼 굳건한 관계를 맺어놓은 것 같다. 하지만 그 젊음의 뜨거움이 세월의 무게를 견디기란 너무나 힘들다.이념처럼 견고한 것 같으면서도 허망한 것이 없다. 젊어서부터 완성될 수 있는 이념이란 존재하기 어렵다. 성글고 부서지기 쉽고 갖다 내버리기도 쉽다. 젊은 날의 뜨거운 좌파가 이십 년 유전 끝에 반대편에 극에 가서는 경우도 비일비재, 그 역의 사례도 심심찮게 만났다. 나는 사람을 좌우로 나누는 것이 싫지만, 세상은 그 속물적인 ‘가짜’ 척도로 서로를 측정하는 인간들로 넘쳐난다.이념이 같다고 믿었던 친구를 차차 ‘경이원지’하게 되고 안 보느니만 못하다고 느낄 때쯤, 자기와 전혀 다른 인간이라고, 가치관도 다르고 기질도 다르다고 믿었던 사람이 달라 보이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관계가 좋아지려고 그러는지 저쪽에서도 마침 나한테서 일어난 일이 일어나는 것 같다. 서로를 완전히 멀리, 다르게 본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서로를 찾고, 가둬둔 정을 풀고,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기도 한다.세상 산다는 게 뭐냐, 하면 사람 만나 나가는 일이다. 사람을 앓고, 사랑과 미움을 앓는 일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다가도 미워하고 멀리 하다가도 가깝게 찾게 되는, 그 모자람이 늘 안타깝다. 나의 미련함을 하루하루 새삼스럽게 느낀다.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8-09-07

해삼 생각

해삼은 참 흥미롭다. 이름하여 극피동물에 속한다. 극피란 피부가 가시로 뒤덮여 있다는 뜻일 텐데, 그런 것치고는 성게와 달리 부드럽다고나 할까.한국에서는 인삼만큼이나 몸에 좋다 해서 바다의 인삼, 해삼이라 하는데, 일본에서는 이걸 바다 쥐 같다고 해서 ‘나마코, 海鼠’라 하고, 영어로는 이게 다시 ‘바다 오이, seacucumber’라 한단다. 한국에서 나팔꽃이 일본에서는 ‘아사 가오’, 즉 ‘아침 얼굴’이요, 강아지풀이 일본에서는 ‘네코 자라시’, 그러니까 ‘고양이 장난감’이라 하니, 같은 걸 보고도 다르게 상상하는 사람들이다.해삼은 앞뒤로 입도 있고 항문도 있다는데, 한 번도 자세히 보질 못했으나, 구별하기 어려울 게 뻔하다. 또 암수 구별도 있다는데 도대체 무얼 보고 암놈, 수놈 할지도 알 수 없다.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해삼이 여름잠을 잔다는 것, 영상 25도 이상이 되면 얘가 잠을 잔다는 것이다. 달팽이가 여름에 비 안 올 때 여름잠을 잔다 하고, 그밖에 개구리나 무당벌레, 거머리, 악어, 거북, 뱀, 사막 사는 뜀쥐 같은 것들이 여름잠을 잔다는데, 겨울잠은 곰이 자는 것이고, 추위에 대비한 것이라지만 여름에는 왜 또 잠이 필요할까? 하기는 여름도 올해처럼 뜨거우면 견디기 힘들 것이다.들은 얘기로 이 해삼도 기름을 만나면 녹아버리다시피 한다 하고, 백과사전에는 지푸라기에 든 ‘고초균’이라는 것이 산 해삼을 통째로 녹여 버린다 한다. 또 놀라운 것은 해삼의 방어 본능, 얘들은 적을 만나 잡혀 먹을 지경이 되면 국수면발같이 생긴 퀴비에관이라는 것을 쏟아내기도 하고 내장을 통째로 쏟아내기까지 하는 기행을 벌이는데, 그렇게 하고도 내장이 다시 재생된다 한다. 다른 물고기 같은 이물질이 항문으로 들어오거나 하면 독(홀로수린스, holothurins)을 뿜어 막아내기도 한다. 이 해삼 같이 독한 사람들도 많다.가장 놀라운 것은 이 해삼이 수명을 알 수 없다는 것, 얘들은 몸의 어디를 잘라내도 잘라내어진 것들이 각각 완전히 재생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한다. 그러니 불로불사, 진시황이 꿈꾸던 불로초가 바로 이 바다 속 해삼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옛날 스무 살 적에 목포에서 배타고 홍도 갈 때 갑판 위에서 웬 할머니가 해삼 파는 것을 본 것이 처음이었다. 고무 다라이 위에 나무 도마를 얹어놓고 물속에서 징그럽게 생긴 데다 색깔도 절대 먹음직스럽지 않게 생긴 것을 건져 올려 썰어내는데, 그걸 어른들이 맛있다고 쏘주를 한 잔 털어 넣고는 나무젓가락으로 초고추장을 턱 쳐서 입으로 가져 가는데,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이었다.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다./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8-08-31

욕실 파리

벼르고 벼르다 결국 화장실을 한바탕 뒤집어 놓았다. 뜨거운 여름 내내 어느 날이면 뭔가 모를 악취 같은 것이 흐르는데, 냄새만큼 참기 힘든 것이 없다. 비 올 것 같은 날, 기압이 낮게 깔리는 날 또는 뭔가 공기를 자극할 만한 원인자와 섞인 날, 냄새는 언제 사라졌더냐는 듯이 코를 괴롭힌다. 냄새와 함께 더욱 괴로운 것은 파리가 몇 마리씩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파리도 여러 종류인 것이, 이번에 나타난 파리는 내가 줄곧 보아온 파리는 아니다. 보통 파리라면 시골집 밥상 따위에 귀찮게 달라붙는 파리, 집파리일 테다. 집파리는 우리가 늘 보는 파리지만 소화기계 전염병이나 바이러스 등을 전파하기도 한단다. 헌데 이건 확실히 집파리보다 작고 몸 빛깔이 검정보다 차라리 회색에 가깝다. 어찌 보면 연약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파리의 정체는 뭐냐. 사전을 찾아보니 쉬파리인 것 같다. 어쩌다 이렇게 못 보던 파리가 생긴 걸까. 맙소사, 이 파리는 동물의 부육, 그러니까 썩은 고기나 배설물에서 생긴다고 한다. 그렇다면 원인은 고양이 쪽이다.고양이는 꽤나 고집스러운 짐승이다.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생리는 절대로 포기하는 일이 없다. 볼 일 보는 습관 길들이는 것도 결코 쉽지 않아 모래, 인공 모래 같은 것을 아무리 잘 준비해 줘도 결국 낙착된 곳은 화장실 한 귀퉁이. 화장실을 건식으로 유지하려 해도 고양이 배설물을 정기적으로 물로 씻어내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다. 늘 같은 곳에 볼 일을 봐도 하루 이틀 집을 비우면 그 귀여운 고양이의, 냄새 지독한 분뇨 냄새를 맡아줘야 한다.어떻게 하다 생겨난 쉬파리들을 근절하기 쉽지 않다. 얘네들은 쉼없이 교미를 해서 알을 까는지 구더기는 전혀 안 보이는 듯한데도 어떤 때는 서너 마리, 어떤 때는 그보다도 많게 벽에 들러붙어 있다. 차마, 살생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도 잠깐, 뭐라도 잡고 눈에 띄는 대로 몇 마리 잡고 보면 한동안 잘 안 보이는 것 같다. 며칠 후면 또 나타나는데 속도가 놀랍다. 워낙 약하게 생긴데다 느리고 작아 벽에 붙은 것을 손바닥으로 슬쩍 눌러보니 그냥 잡힌다. 살생 같지 않게 싱거운 통에 기회 있을 때마다 잡기는 하는데, 그러다가도 문득문득 저것들도 산 것들인데, 한다.생각해 보면 파리의 일생만큼 덧없는 것도 없다. 과연 얼마나 오래 사는 걸까. 여름에 성충이 된 파리는 보통 두 달을 살고, 가을에 우화한 파리는 겨울을 나고 이듬해 봄까지 산다고 한다. 짧은 삶을 사는 파리는 날개 달고 24시간이면 벌써 교미하고 3일째면 산란을 한다. 가끔 집앞 느티나무에서 시끄럽게 여름을 나는 매미들이 기운이 다해 툭툭 떨어지는데, 매미 목숨이나 파리 목숨이나.손바닥으로 쉬파리를 잡아 누를 때 그 가볍디 가벼운 목숨의 무게가 실감나지 않게 실감이 나곤 한다. 내 눈에 뜨인 파리는 목숨이 몇 일 더 짧고 눈에 안 뜨인 파리는 천장이나 비품 뒤에서 몇 일 더 살 것이다. 사람도 그와 다를 바 없다 생각한다. 이 덧없음 속에서 서로 물고 뜯고 오르고 넘어진다. 기뻐하다 울고 그러다가도 웃는다.몹시 허전한 삶이다.결국 욕실을 일대 수술하자 쉬파리는 오간 데 없이 사라진다. 너무들 괴롭히고 살지 말자. 싸우지들 말자.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8-08-24

‘광인일기’처럼

안드레이 예피므치 라긴이라는 인물은 체홉 소설에 나오는데 정신병을 치료하는 의사다. 소설 속에서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 정신병동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정상인이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또는 스스로 미친 척하지 않고는 한밤중 같은 대낮을 살아갈 수 없다. 이 라긴이 등장하는 소설을, 나는 하필 늘 서정작가로나 오해 사는 이효석 때문에 보았는데, 왜냐, 그가 말년에 체홉을 즐겨 봤고, 또 ‘6호실’이라는 소설 얘기가 그의 글 속에 나오기 때문이다. 요즘 옛날 소설은 안 읽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한번쯤 찾아봐도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눈 크게 뜨고, 세상 밝게 보려는 사람은 스스로 미치기 전에 세상이 미쳤다 생각하기 쉽고 다음엔 세상이 그를 미쳤다 하여 외진 데 가둬놓으려 하게 마련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알고 가만히 있으며, 또 가만히 있지 않아서 감당해야 하는 고통이나 공포보다 차라리 미치는 것도 좋다.그래서 루쉰도 그의 명철한 의식을 정신병자에 의탁해서 ‘광인일기’를 썼고 나아가 ‘아큐정전’에서도 제 정신은 아닌 주인공을 등장시켰으며, 이 소설에 필시 영향 주었을 고골의‘광인일기’도 기억 희미하지만 그런 류의 소설, 어찌 착란과 광기와 환각 아니고 미친 듯한 현실을 참아낼 수 있을까. 염상섭의 문제작 ‘표본실의 청개고리’에 등장하는 광인 김창억, 그는 동서 평화를 주창하는 광인인데, 미치지 않고야 그런 것이 어찌 가능하냐 이 말이다. 일본이 대동아를 주장하며 결국 서구, 미국과 혈전을 벌이고서야, 그 모든 살육 끝에 평화는 왔다.세상이 바뀌어 정상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허나 역시 착란이었다. 유튜브를 보면 정신착란자들이 아직도 태극기를 휘날리며 열연을 하고 있는데 연기자들은 자신이 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정말 현실 속을 살고 있다 여길까. 그러나 착란은 비단 태극기에만 있지 않다. 우리는 혹시 세상이 바뀌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닐까. 물론 세상은 바뀌었고, 그런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지 않은 줄 모르고 바뀌었다 믿는 착란자들도 많고, 세상을 바꾸는 축이 어디며 자신이 어디 서 있는지 아는 이들은 차라리 많지 않다고나 해야 한다. 또 바꾼 사람들도 사실은 바뀐 사람들 비슷하다고 말하면 그 사람은 참으로 미친 사람이라 할 것인데, 그렇다면 그 시람은 광인 흉내라도 내야 한다.세상이 바뀌면 바뀐 세상답게, 그런 사람답게 살아야 할 것 같은데, 요즘 티비도, 인터넷도, 팟캐스트도 무섭다. 시도 무섭고 시를 쓰는 사람들도 무섭다. 남보고 미쳤다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도 무섭고 이러다 내 자신 정말 미친 사람 되는게 아닌가 해서 더 무섭다. ‘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하고 김수영은 물었다. 그러고 보면 그게 벌써 일천구백육십년대였다. 물경 오십 년 지난 지금도 그런 싱거운 질문이 가능하다니, 놀랍지 않은가? 늙은 좀비가 백주에 제 집에 있지 않고 거리에 풀려 나오고 창공을 비상해야 할 독수리는 날개를 잃고 추락해 버렸다. 사람 사는 세상이 이러기도 힘들다. 누가 도대체 이런 무대를 꾸미는가? 맙소사. 이 난장판에 정신 멀쩡한 사람도 있다. ‘사람나라’ 같은 것을 꿈꾸는 사람. 이름은 모른다. 벌써 잊어버렸다.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8-08-17

세상은 달라졌나

슬프다. 이런 탄식으로 시작하는 글을 써야 하는 것을 넓은 마음으로 헤아려 주시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는 것 같았는데 불쑥불쑥 솟아나는 아픔이 있다.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 영화 속 슬픈 장면들 같은 것.다시는, 세상에 나서, 국민이라는 무거운 레떼르를, 번호표를 부여받은 사람들이, 무엇을 해달라고 아우성치며, 울고불며, 땅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 몇날 몇일을 기약없이 헤매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 다시는, 자식 잃은 부모들이 왜 내 자식이 그렇게 바닷물 속에 수장되어야 했는지 알 수도 없고, 알려 해서도 안된다는 듯이 ‘종주먹질’을 당하고, 신문 방송이 나서서, 슬픈 부모들을 돈이나 탐내는 이들로 몰아부치고, 진실을 밝히고 싶은 사람들을 향해 이념 전쟁을 벌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된다. 누가 왜 죽었는지, 정말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 스스로 죽었는지, 영문도 모른 채 오로지 그가 죽어버렸다는 사실 하나만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고 향불을 피우고 누구 연출 누구 각색인지조차 모른 채 시나리오의 이름없는 엑스트라들처럼 할당된 연기나 벌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그리고 또 없어야 한다. 국민이라는 그 무겁고 어려운 이름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언제라도 총칼에, 탱크나 군홧발에 짓밟히는 일들은, 딱딱하고 날카롭고 뜨거운 것들에 얇은 살갗이 터지고 이마에 피가 흐르는 학살 같은 역사 따위는, 죄없는 이들, 잘못된 것들을 잘못 되었다 하는 이들, 막다른 골목에 내몰려 발악한 이들이 붉은 칠을 당한 채 묶이고 끌려가고 갇히는 일들은 없어야 한다.세상에 날 때 사람들은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보송보송한 발가벗은 갓난아기로 세상에 나, 처음 만난 엄마 뱃속과는 너무나 다른 세상에 놀라 울음을 터뜨린다. 엄마, 아빠는 차라리 그 아이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말았어야 했다. 출생 신고를 어디에 할지 고민했어야 한다. 사람의 생명을 여기보다 더 소중히 아끼고 사랑해 주는 곳, 여기보다 목숨 값이 훨씬 더 비싼 곳, 사람이 날 때와 돌아갈 때를 그 몸서리치는 기쁨과 슬픔답게 챙겨줄 수 있는 곳, 이유 모르게 죽지 않고 왜,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지고, 마음 놓고 울면서 보내드릴 수 있는 곳. 그런 세상의 국민으로 ‘내’ 자식을 등록할 수는 없었을까?한밤에 유튜브로 “6411번 버스를 아시나요?”라는 연설을 들으며 그는 왜 그렇게 되었어야 했나 생각한다. 6411번 버스는 새벽 네 시에 잠에서 깨어야 하는 사람들의 버스, 이 버스는 한강을 가로질러 북쪽에서 남쪽으로 간다. 이 버스를 늘 타는 사람들을 사랑하던 사람은 지금 세상에 없다. 무서운 것은 세상이 바뀌지 않은 것 같다는 이 느낌이다. 섬뜩하고 음습하고 누군가 처분되어야 일이 일단락되고 마는 것 같은 이 느낌. 아주 많이 겪어 다시는 겪어보고 싶지 않은 어두운 과거의 장력.이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내가 잘못된 걸까? 마음껏 슬퍼할 수도 없는 이 공포와 숨막힘, 두근거림은 나이보다 너무 빨리 노쇠해 버린 약한 자의 만성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인 것일까?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8-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