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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생충’의 상징물

내 봉준호 감독 첫 영화는‘괴물’이었다. 아니었나?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살인의 추억‘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향숙이 이뻤다.”가 재밌기는 했지만 무엇을 겨냥한 것인지가 썩 명료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강했다. ‘마더’는 어땠던가? 지인들 중에는 주인공의 연기 때문에 너무나 몰입했다는 의견들이 있었지만, 나는 왜? 라는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모성애의 덫을 그린다고 보면 되지만 이 영화는 어딘지 모르게 정곡을 찌른 듯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지나친’ 그로테스크 때문일까?‘괴물’에서는 한강에 괴물을 살게 하는 원인 물질에 관한 서두 부분이 썩 마음에 편치 않았다. 미군 부대에서 어떤 용액을 한강으로 통하는 하수구에 흘려 넣는데, 이것이 괴물을 낳았다면, 미군이나 미국이 한반도를 주름잡는 ‘괴물’의 실체라는 의미일까? 아니, 그냥 유머로 넣은 것이다? 원인이야 어쨌듯 그 후가 중요한 것 아니냐? 상황 설정을 위한 고심책이었다?봉준호 감독의 알레고리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점이 있다. 래디컬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한국 사회의 실체로부터 약간 비껴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으로 거장을 비판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황금종려상 ‘기생충’에서 기택의 아들 기우는 과외를 소개시켜 주는 친구로부터 수석 하나를 얻는다. 무거운 돌이다. 영화 앞부분에 엉뚱하게 수석이 나오니 이건 분명 알레고리나 상징으로 해석해야 할 물건이다. 나중에 수해가 나서 반지하방이 전부 물에 잠길 때 기택의 식구들은 저마다 자기한테 중요한 걸 하나씩 들고 나오는데, 기우는 다른 것 아니라 이 무거운 수석을 들고 나오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수석은 어떤 의미일까. 탐스러운 돌인가? 아름다운 돌인가? 물에 잠긴 반지하방에서 기우는 이 수석을 들고 나와 그것으로 동익의 비밀 지하실에 숨어살던 사내와 그를 남편으로 여겨 살던 전직 가정부를 살해하려 한다. 그러면 자기 식구들의 ‘기생충’ 생활이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일까?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왜 그러한 무모한 계획을 감행했던 것일까? 이 영화는 하루낮의 난장판 살해극이 벌어진 이후에도 엔딩이 내려지지 않는다. 기우는 어쩐 일인지 집행유예로 나오고 아버지 기택이 다시 동익 집의 지하실에 숨어 살며 아들을 향해 모스 부호를 띄우고 그것을 기우가 받아낸다. 살해극 이후의 스토리 전개는 현실성 전혀 없지만 그것을 탓할 여유는 없다. 또 알레고리, 상징 영화에서 무슨 현실성을 찾나? 좀더 그럴싸 했다면 더 좋아겠지만 말이다.그보다 결국 무슨 수단, 방법을 썼는지 돈을 벌어 그 집을 사 아버지와 해후하는 마지막 장면은 일종의 원한 감정, ‘르상티망’의 ‘완성’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럼으로써, 기묘한 수석은 이 원한감정의 상징물의 위상을 확인하게 된다.나는 2018년 10월에 ‘한국의 물질주의에 관하여’라는 글을 쓰면서 물이 차오르는 반지하방의 책장에서 파스칼의 ‘서한집’한 권을 들고 나왔다는 어느 시인의 이야기를 소개한 적이 있다. 그도 숨겨 놓은 금덩이를 가지고 나와야 하지 않았을까? 대신에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는 금욕적으로, 책 한 권을 들고 나오고 ‘말았다’. 그런데 나는 ‘기생충’의 엔딩보다 이 시인의 장면이 더 좋다.한국의 예술은 지금 젊은 작가들의 소설도 거장들의 영화도 물질주의적 상상력에서 충분히 자유롭지 못한 것도 같다. 물론 이 말은 ‘기생충’의 성취를 부당히 낮춰 보겠다는 뜻은 아니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6-27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기생충’은 이 영화에서 누구냐?송강호 분 기택의 가족 기우는 명문대 다니는 친구 소개로 아마도 평창동일 부잣집 여고생 영어과외 교사로 들어간다.평창동 사람들은 이 영화 안 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든다. 느긋하게 보기에는 꽤나 불편한 영화라고나 할까. 나도 옛날에 그 동네 과외 아르바이트 하는 친구 얘기를 들었는데, 집안에 에스켤레이터가 있다던가. 수영장 같은 건 말해봐야 빈축이나 살 것이고, 워낙 흔한 얘기여서 말이다.이 기택 가족은 한 마디로 말해 ‘악’하기 그지없다. 대학 졸업장 위조해서 과외 교사로 들어가 놓고 모자라 자기 동생을 외국 명문대 미대생으로 꾸며 그집 아들 미술 과외 교사로 끌어들인다. 아버지는 운전기사로, 어머니는 가정부로 끌어들이는데, 자신들이 모두 한 가족이라는 사실은 물론 감추면서다.이렇게 해서 기택의 가족은 이선균 분 동익과 조여정 분 연교의 세 식구한테 달라붙은 ‘기생충’ 같은 존재들이 된다. 한 몸에 회충, 촌충, 편충, 간디스토마 등등 여러 기생충이 영양분을 빨아먹듯 빼먹는 셈이다.이참에 사전을 보니, 광절열두조충이라는 희귀종 기생충은 몸길이가 자그마치 10미터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또 한 3미터쯤 되는 이 기생충으로 병원 찾은 남자 얘기도 있는데, 이 얘기를 보자마자 나는 옛날 어렸을 때 회충을 입 밖으로 토해냈던 아이 생각이 났다.여덟 살 때 얘기다. 어린 눈에 그것은 참 기이한 광경이었다. 회충은 다 자라면 30센티미터쯤 된다는데, 나는 그때 꽤나 큰 회충을 만났던 것 같다. 회충이 몸 안에 들어와 살면 복부 팽만도 일으키고 구토도 일으킬 수 있다 하니 그 기생충은 확실히 회충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회충은 소화기관 없이 체표를 통해서 사람으로부터 자양분을 흡수해 들인다나?영화 ‘기생충’으로 돌아가, 이 영화의 기생충은 택시 운전하는 기택의 식구들이냐? 하고 묻는다면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 영화는 한 바퀴를 돌아, 지하실에 숨어 사는 전 가정부 충숙과 그의 남편 근세도 물론 기생충적이지만, 뭣보다 동익의 식구들 같은 사람들도 사실은 기생충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설거지를 맡기고 정원 관리도 맡기고 운전도 맡기고 자식들 교육도 다 맡기고 사는 이 맡김의 사람들이야말로 가난한 사람들의 노동에 기생하는, 이를 위한 재화도 사실은 알고 보면 그들이 부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말 그래도 기생충일 수 있다. 잔뜩들 빨아먹고 산다는 것이다.어지간히 끔찍한 영화라고나 할까. 아무튼 칸 영화제 힘이 크기는 큰가 보다. BTS가 빌보드 차트를 ‘점령’했을 때 환호한 것처럼 이번에는 ‘기생충’황금종려상이 무서울 정도로 스크린을 점령했다. 한국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자기의 존재 증명에 목이 마르다.더이상 미루면 안 될 듯한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어, 급한 대로 작은 영화관 찾아 아무데나 앉아 보기는 봤는데, 며칠 지나 보니 20일자로 누적 관객수 864만 명, 천만 돌파가 멀지 않았다. 나쁘지 않은 일이다./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이철진한국화가

2019-06-20

가토 기요마사

1562년에 나서 1611년에 세상을 떠난 일본 구마모토의 다이묘(大名)다. 우리한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함께 조선을 침공해 들어온 적장으로 악명이 더 높다.원래 도요토미의 먼 친척이라 하며 그가 일본의 패권을 쥘 때 전공을 세우면서 유명해졌다 한다. 그건 일본에서 일이고 한국에 와서는 조선 사람 살상하는 일로 큰일을 했다. 듣자하니 얼마나 공을 세웠나 하는 것은 사람 목을 얼마나 벴나 하는 것, 머리를 베어 보내려면 부피가 크니 귀를 잘라 소금에 절여 숫자를 셀 때까지 잘 보관되록 했다 한다. 제2차 진주성 싸움 때는 기어코 성을 무너뜨려 관군과 의병, 백성들 합쳐 6만 명이나 해쳤다 하니 그 잔인함을 가히 알 만하다.고니시 유키나가는 제1부대 선봉장이었지만 원래 기독교를 믿는 데다 장사꾼 출신이라 그런지 줄곧 화친을 도모했다 하고 애초에도 전쟁에 반대했다고도 한다. 그가 가토 기요마사와 사이가 좋지 않았을 것은 뻔한 이치. 서울에 들어올 때도 고니시가 먼저 들어온 것을 공을 다투려 애매하게 문서를 꾸려 본국에 보냈다 들통 나는 바람에 이를 드러낸 자와 원수지간이 됐다고도 하고. 함경도에 가서는 호랑이 사냥을 즐겨 ‘호랑이 가토’라는 별명까지 붙었다고도 한다. 그 용맹함이 곧 잔인함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구마모토 현에서는 그를 영웅으로 기려 구마모토 성 아래 미유키 다리 옆에 ‘가토 공’의 흉상이 서 있고 성으로 들어가는 초입에도 ‘가토 신사’까지 차려져 있다.이 가토가 그러면 임진왜란 중에 계속 그렇게 조선 사람 죽이는 일에만 신명을 냈느냐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 자신도 죽을 뻔한 고비를 여러 번 넘긴 것도 같은데, 장덕산 대첩의 정문부 장군한테도 꽤나 혼났던 것 같고, 서생포와 울산 학성에 왜성을 짓고‘진지전’을 벌일 때는 우물이 없는 학성에서 명나라 군사와 조선 관군에 포위된 채 굶주림과 목마름에 지친 끝에 죽음의 그림자까지 느낄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다 한다. 그때 너무 혼이 난 바람에 오사카 성과 나고야 성에 이어 일본의 3대 성으로 이름난 구마모토 성을 지을 때 성내에 우물을 120개나 파고 은행나무를 심어 비상시에 먹을 것으로 쓰게 하려고까지 했다니, 가히 알 만한 일이다.그래도 목숨 줄이 길어 조선에서 살아나가 나중에는 세상 떠난 주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을 배신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쓰 편에 서서 복록을 누렸다 한다. 사세가 이미 기울었던 탓도 크겠지만 본래 머리 쓰는 사람들은 손바닥을 잘, 자주 뒤집는 법이다.같은 사람도 이곳에서는 악인이 저곳에서는 영웅이 되는 것이 세상의 어두운 이치다. 이번에 한국전통 시가 시조를 알리는 일로 바다 건너간 구마모토에서 뜻밖에 ‘명장’ 가토 기요마사를 만났기에 하는 생각이다. 그게 어디,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만 그렇던가. 같은 나라 안에서도 지역마다, 정파마다, 세대마다, 이해관계 따라 참으로 위아래가 다르고 옳고 그름이 다르다. 안쓰러운 세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6-13

‘프리 솔로’

2018년에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라고 한다. 프리 솔로 선수라고 해야 하나? 알렉스 호놀드는 드디어 요세미티 공원 암벽한 엘 캐피탄에 도전하기로 한다. 914미터 높이, 해발로 치면 2300미터의 화강암 암벽 덩어리 엘 캐피탄. 여기 어떤 등산 장비도 없이 오로지 맨손과 맨팔로, 등산화만 신은 채 오르고자 하는 것이다.어째서 이렇게 프리 솔로라는 말이 붙었는지 모르지만 어감부터 이런 류의 등반에 딱 어울리는 어휘라는 생각이 든다. 옛날에 어느 등반가가 등반 속에서, 산 속에서 얻는 고독을 흰 고독이라 하여 세속의 외로움 검은 고독에 대비시켰다 한다. 등반은 확실히 인생을 알게 하는, 인생에 너무나 잘 비견될 수 있는 단 하나의 종목인 것 같다.멀리서 보는 엘 캐피탄은 자연의 장관이다. 깍아지른 듯한 한 덩어리의 암벽. 이 바윗덩어리는 뭇사람들의 쉬운 접근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어째서 알렉스는 프리 솔로라는 위험한 도전에 빠져든 것일까?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실물의 알렉스는 말수 적고 자기 표현에 어려움을 겪는 듯한 내성적인 사내다. 사랑하는 사람도 있건만 그는 단 한 순간의 실수나 잘못으로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해 버릴 수 있는 맨 손 오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어느 새벽 그는 암벽을 오르려다 도중에 그만두기도 한다. 뭔가 살벌한 예감에 사로잡혔기 때문일까. 안전 로프를 매단 채 연습할 때는 가능하던 팔바꿈, 다리 바꿈이 로프 없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그는 깊은 좌절을 경험한다. 언제 어떻게 새로 도전할 수 있게 될지 모르는 마음 고름의 시간이 계속된다.이 다큐멘터리를 미래를 알지 못한 채 찍은 드라마다. 이 활사실적 영화를 찍은 감독이며 카메라맨들도 날이 가까울수록 긴장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들은 카메라를 들이대야 하지만 자칫 이는 알렉스의 도전에, 그의 날카로운 심리를 건드려 비극을 야기할 수도 있다.산악 영화를 자주 본다. 산악의 재난 영화는 그것이 가상이며 대부분은 다들 살아날 거라는 것을 아는데도 사람을 긴장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 그런데 이 ‘프리 솔로’는 실제에 토대한 영화가 아니라 끝이 결정되지 않은 진행형 다큐멘터리 영화다.한 발 한 발, 아니다, 한 발가락 끝, 한 손가락 옮길 때마다, 저 아래로는 까마득한 낭떠러지. 0.1초의 순간에 알렉스는 이편 아닌 저편의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끝은 어땠나? 다행히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다. 엘 캐피탄 등반을 준비하는 동안에 알렉스는 어떤 유명한 프리 솔로 선수가 추락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까지 듣는다. 자신도 그렇게 세상을 하직할지 알 수 없었고, 아무런 안전장치도 준비되지 않았다.알렉스가 보여주었듯이, 우리는 유머 없는 ‘프리 솔로’들일까? 나는 요즘 살아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다. 삶과 죽음 사이의 ‘thin red line’위에 서 있는 것 같다. 삶이란 이렇게 위태로운가 한다. 나이를 많이 먹었다. 오늘은 통풍이 도져 등산용 스틱을 짚고 걷는다. 절뚝거리며. 알렉스처럼 무언가 위대한 기록조차 남길 수 없는 길을./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6-06

스탈린의 죽음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칸 영화제 감독상을 탔다 하니, 한동안 잃어버렸던 영화열이 되살아나는 것같다.뭐, 좋은 것 없나? 옛날 옛적에 홍콩 느와르를 좋아했고, 조금 더 돼서는 전쟁영화, 그중에서도 베트남 전쟁 영화 광이었다, 이창동, 박찬욱으로 와 끝이었다. 웬만한 영화는 십 분, 이십 분을 끌어가기 어렵다. 지친 사람의 인내력을 말이다. 얼마 전에는 괜찮다 해서‘극한직업’이라는 걸 봤다가 나는 벌써 완전 가버렸구나 했다.좋은 걸 좋게 볼 수 없게 됐단 말인가? 그래도 얼마 전에는 ‘프리 솔로’라는 것을 꽤나 진지하게 지켜 봤지 않았던가? 좋은 영화였다. 요즘에 나는 다큐멘터리, 르포 같은 것, 사실적인 것이 좋다. 상상력이 메말라서일까? 꿈꾸는 법을 잃어버린 걸까? 아, 나는 지난 몇 년 간 진흙탕 속에서, 악몽 속에서, 어둠 속에서 살았댔다.무슨 영화를 봐야 하나? 볼 수 있는 게 있을까? 이리저리 괜찮을 것 같은 작품을 좀처럼 스톱을 걸 수 없다. 스릴, 추리를 좋아하기도 하건만 이조차도 시간을 따라 흐르기가 쉽지 않다.스탈린의 죽음? 코미디라고? ‘Death of Stalin’이라는데 어떻게 코미디?이 독재자가 1953년에 세상 떠난 것은 안다. 참 지독한 인간이었다 했다. 원래 근엄한 인간, 절대를 추구하는 인간들은 위험천만 일쑤다. 도덕주의자처럼 남을 잘 해하는 족속들도 없다.결코 간단한 코미디는 아니었다.스탈린은 어느 날 밤 심장마비, 아니 뇌출혈로 세상을 하직했다. 한 인간만 없어져 주면 세상은 개벽처럼 달라지는 것이건만.스탈린 다음엔 후루쇼프였고, 그래서 잠시 해빙기가 왔었는데, 경위는 전연 알지 못하던 나다. 영화에 베리야라고, 내무장관인지 비밀경찰총수인지가 등장하고 몰로토프니, 주코프니, 후루쇼프니, 스탈린의 아들이며 딸들이 등장한다. 스탈린의 뒷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최고 위원회에서 다수파가 되어야 한다. 베리야의 비밀 동원력이 장례 준비까지는 힘을 발휘한다. 스탈린이 살았을 때 그는 피비린내 나는 숙청, 살육극과 감금, 강제노동의 화신이었다. 주코프는 2차대전의 영웅, 그가 후루쇼프를 도와 스탈린의 장례 기간을 틈타 전세를 역전시킨다. 모스크바로 몰려든 군중들에 대한 학살 책임을 베리야에게 돌려 수뇌부들의 심리를 바꿔놓는데 성공한 것이다. 사실, 당시 공산당 지도부들은 스탈린 체제 하에서 저질러온 온갖 악행들에 대해 책임을 물릴 자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높은 데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베리야가 적격이었을 것이다.이 며칠 동안의 드라마를 보며 깨달은 것 하나. 술수와 속임수로 권력을 수중에 넣으려는 집요함과 야비함은 어느 사회나 다를 바 없다는 것. 무장이라도 그 실력으로 술수를 성공으로 밀어부칠 만하면 안 그러는 세력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음모를 모른 채 권력을믿고 따르고 움직이는 민중들은 늘 착한, 어리석은 사람들로 영문도 모르고 왔다 간다.앗. 이런 시각은, 나는 한번도 수긍한 바 없건만. 난제, 난제라 아니할 수 없다. 어떻게 이 술수 앞의 무기력에서 빠져나갈 수 있나./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5-30

우금치 방향으로

‘자연 부여 유스호스텔’이라는 곳은 부여에서 대천 쪽으로 가는 반교리에 있었다. 일하시는 아주머니들이 쬐끔만 더 가면 바로 대천이라고 했다. 유스호스텔은 1999년에 폐교된 반교 초등학교 자리에 세운 것이었다. 우리 3조는 한밤에 건물을 빠져나와 축구장에서 서로 공을 차넘기는 놀이를 했다. 잔디가 두텁게 깔린 축구장은 아침에 조기축구 시합이라고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했다.하지만 아침이 되자 우리는 모두 늦게 일어났고, 아름답게 단장한 유스호스텔을 아쉽게 떠났다. 다음 행선지는 공주, 우리는 우금치로 갔다 공산성을 보고 풀꽃문학관에 들렀다 마곡사까지 가도록 되어 있었다. 전날 우리는 부여에서 신동엽 문학관에 갔다 걸어서 구드레 조각공원에 가 정한모 선생의 시비를 찾았고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고 고란사 아래까지 갔다. 여기서 고란사로 해서 낙화암으로 가면 잃어버린 나라 백제의 하늘을 볼 수 있었다.반교리를 떠난 버스는 한 시간 남짓해서 우금치 고개에 우리를 세워 주었다. 조교가 오늘이 마침 동학혁명기념일이라 했다. 올해 들어 처음 기념일로 지정했다고, 황토현 싸움에서 승리한 날을 기념일로 삼았다더라고 했다. 옆에서 지금까지 기념일이 없었냐고, 놀랍다는 탄성을 발했다. 부패 정치와 외세에 대항하여 일어난 민중혁명을, 그것도 실패한, 좌절된 혁명을 국가가 선뜻 기념하려 했을 리 없다.이제 우리는 우금치 동학혁명군 위령탑 아래 섰다. 1973년 11월 11일에 건립되었다는 이 탑은 아직도 어디 하나 금간 곳 없이 깨끗해 보였다. 나는 학생들에게 동학의 이상과 구한말의 시대상황에 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신동엽 시인의 서사시 ‘금강’에 나오는 해월 선생의 일화를 들어 동학의 만민 평등사상은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주의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철저하다고 했다.손상된 곳 없는 위령탑이지만 비문에는 누군가 훼손한 흔적이 남아 있었고 이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1985년에는 한 사회단체에 의해 동학혁명과의 계승관계 등 이념 갈등 소지가 있는 비문의 일부 문구(5·16 혁명, 10월 유신, 박정희 대통령 등)가 훼손되는 사건이 있었음.” ‘포덕’ 114년 11월 11일에 당시 천도교 대령이던 최덕신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 위령탑건립위원회의 명예회장을 맡아줄 것을, 제자의 휘호를 내려줄 것을 “앙청”하였던 사실이 위령탑 뒤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최덕신은 1986년 4월에 북한으로 가 천도교 청우당의 중앙위원장이 되고 다른 요직들을 거치다 세상을 떠났다.1970년대에 동학혁명을 10월 유신에 연결 지으려는 시도들이 있었음을 이 위령탑은 보여준다. 그러나 기념일은 이제야 마련된 모양이다. 나는 역사의 씁쓸함을 곱씹으며 그날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학살’당한 일만 명 동학군 영령들을 위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우금치는 나 살던 공주 봉황동에서 지척거리다. 일곱 살 때 봉황동 산동네 샘골에 살 때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때 공주고등학교에 김종필 씨가 헬리콥터를 타고 와서 두 살 아래 동생과 함께 구경을 나갔다. 공주고등학교 체육 선생이시던 아버지는 출근하실 때마다 코끼리 저금통에 십원짜리 하나씩을 넣어주셨는데, 동생이 이걸 들고 나갔다 헬리콥터에 넋이 나가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고서는 1970년대와 함께 나는 아버지를 따라 대전으로 나가 초중고를 나왔다. 의식이 생기자 역사가 머릿속으로 들어오고 서울로 대학을 가서는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나의 1980년대였다. 우리는 동학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를 망각하면 똑같은 시련이 다시 닥치는 법이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5-23

현금으로 내는 사람

수원이라면 서울에서는 한 시간 거리다. 두어 주 전에 수원 화성 근처에 갔을 때다. 문학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좋은 봄날에 화성 성곽 둘레길을 걸어 보자 한 것이다. 과연 아름다운 화성이었다. 정조가 임금 자리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거처하려 했다는데, 그럴 만큼 웅장하고도 수려한 성이라 할 수 있었다.봄날도 화창하고 인연 있는 사람들끼리 모처럼 만나 산책을 즐기는 것도 좋았다. 나중에는 시낭송도 했는데, 그 전에 우리 몇 사람은 먼저 자리 잡고 앉아 막걸리라도 두어 대접 마시자 했다.막걸리 사러 슈퍼에는 누가 가나? 하면 응당 나이 어린 내가 가야 하는데, 내가 먼저 커피를 샀다고 막걸리는 당신이 산다고 따라 나선 분이 계셨다.올해 초던가 작년 말이던가 건강이 안 좋아져 학교를 그만두고 양평 쪽으로 낙향해 가신 선배 시인이셨다. 이명이 심한 데다 또 어딘가 안 좋은 곳이 생겨 급기야는 몇 년 먼저 퇴직을 하신 것이다. 요즘은 향리에서 땅을 파다 보니 건강도 회복되시는 것 같다 해서 다행이라 여겨졌다.나는 막걸리라면 온 동네 막걸리를 다 먹어 본 솜씨라, 수원에도 수원 막걸리가 있는 것을 아는데, 정작 그 집에는 장수 막걸리만 있었다. 이제 돈을 내야 할 차례인데, 요즘 물건 값은 어디서도 전부 카드로 결제하기 마련이다.그분이 카드를 빼들고 얼마냐고 묻는데, 아마도 몇 천원 인가 했다. 서너 병 샀으니, 한 병에 천삼백원 정도 한다고 보면 아마도 삼천구백 원이나 사천이백 원 정도 아녔을까? 가게 주인이 막걸리 값을 말하자 그분은,어! 그러면 그건 현금으로 내야겠군요.하고 주머니를 뒤져 천 원짜리 지폐들을 꺼내 세어 내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나를 향해, 작은 돈이라 카드로 내기 미안하다고 하셨다.돈은 그분이 내서 좋았고 막걸리 든 ‘봉다리’는 내가 들고 낭송회장으로 쓰는 카페 자리로 돌아오는데 문득 생각되는 게 있다. 나도 그래야겠다는 것이었다.요즘 경기들이 좋지 않으니, 슈퍼나 편의점도 썩 잘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슈퍼니 편의점에 들러 사는 것은 막걸리 등속이 고작인데, 나 편하자고 늘 ‘알바’생이나 점주에게 카드를 내밀곤 했다.현금이 돌지 않아 작은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더 힘들다고 들었건만 그건 그냥 남의 소식으로나 치부했었다. 사람이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또 어려우면서도 작은 것부터 쉽게 해낼 수도 있다.돌이켜 생각하면 퇴직 선배는 향리로 돌아가시지 전에도 다른 사람들 대하기를 사뭇 신중하고도 조심스러우셨고, 남의 험담 하기를 극력 꺼려하는 면모를 지니고 계셨다. 고향으로 돌아가 봄맞이로 땅을 갈아엎고 있다 하시니, 더욱 흙의 덕성을 태생적으로 가진 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아니 들 수 없다.세상이 정의로워져야 한다고, 원칙도, 상식도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높다.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하기에는 그런 큰 생각만으로 세상은 충분히 살만하게 되는 것 같지만은 않다. 그 빈틈들은 흙이, 흙의 부드럽고 따사로운 알갱이들이 메워 주어야 할 것이다.앞으로 현금을 자주 내는 사람이, 나도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본다. 먼저 우리 집 앞 편의점에서부터 말이다. 봄빛 좋은 수원 화성 나들이 날이었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5-16

호가호위

세상살이의 신기함.나이가 들수록 어려운 것도 이 신기한 세상살이의 하나일 것이다.하루하루 그렇게 자꾸 반복을 했으니 쉬워질 만도 하건만, 이 세상살이라는 것은 도무지 쉬운 상대가 될 것 같지 않다.무엇이 이렇게 힘들 게 하는 것이냐, 하면, 무엇보다, 그 원인은 자기 잘못에 있다.세상에 완전한 사람이란 없는데, 그중에서도 ‘나’는 절대 완벽할 리 없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모자라지도, 그릇되지도 않다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남들이 그런 오기를 쉽게 봐줄 리 없다. 넘어가 줄 리 없다.다음 원인은 ‘남들’의 냉담함에도 있다. ‘나’ 빼놓고는 다 ‘남’이니 ‘남들’일 수밖에 없는데, 어떤 ‘남’도 ‘나’를 쉽게 받아들여 주는 법이 없다.어느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나’랑 생각이 다르다는 게 재미있지 않아? 그때 아하, 했다. ‘나’랑 다르니까 세상이 재미있는 거다. 그런데 이 ‘나’를 절대 용납하지 않으려는 ‘남들’이란 얼마나 차가운 존재들이란 말인가? 그 ‘남들’도 자기 시점에서 보면 전부 ‘나’들이기 때문이고, 지구가 그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남들에게는 차가울 수밖에 없다.원래 세상이란 그렇게 자기 아닌 사람을 재밌게 여기지 않고 달라서 싸워야 할 상대로 보는 법일까? 그것이 삶의 원칙일까? 하면 그런 것도 같다. 그래서 이 세상은 편안한 날, 평화로운 날, 그러니까 ‘영일(寧日)’이라는 게 없지 않은가 한다.그래서인지, 살다 보면 남한테 무서운 얼굴 보이는 사람들을 본다. 이런 얼굴들은 확실히 무섭다. 이런 무서운 얼굴들 때문에 겪는 무서움은 날이 갈수록 더 커지는 것 같다. 무서움도 세상살이를 어렵게 하는 큰 요인일 것 같다.‘나’란 본디 결함 많은 존재인데, 그 ‘나’를 보는 ‘남들’이 그렇게 무서운 얼굴들을 한대서야 세상을 어떻게 평온히,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재미있는 것은 그 무서운 얼굴 때문에 한참 무섭다가도 이윽고 우습게 여겨지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이다.호랑이 행세를 하는 사람들. 스스로는 호랑이가 되지 못하고, 그럴 능력도 의지도 없고, 다만 호랑이만 되고 싶은 사람들을 보면, 무서워하다가도 우스워지곤 한다.호가호위다. 자기 뒤에 호랑이를 세워 두고 여우가 호랑이인 척 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한참 이 사람이 호랑이 행세를 하다 문득 뒤돌아보니, 정작 호랑이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미 호랑이도 없는데 있는 줄 알고 호랑이 행세를 하는 여우라. 우습다. 우습기 짝이 없다.세상은 재밌다. 나랑 다른 사람들, 그중에서도 이런 호가호위 즐기는 사람들도 있어 더 재밌다. 나랑 다르기 때문이다.누군가 의미 있는 사람이 떠나고 나면 그 사람을 자기 뒤에 세워두고 마치 자신이 그 떠난 사람이라도 되는 양 으스대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죽었다 깨어나도 그 자는 그 사람이 될 수 없다. 그 자는 다만 흉내만 낼 수 있을 뿐이다.진짜 무서운 사람은 우선은 스스로 호랑이인 사람일 것이다.그 다음은 그 호랑이처럼 자신도 호랑이가 되려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흉내도 내지 않고 떠난 호랑이를 뒤세우지도 않는다. 그 사람은 밤길을 혼자 걸어갈 줄 안다. 누가 옆에 없어도 무서워하지 않는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5-02

삼일혁명 백 년, 임시정부 백 년

중국에서 보면 한국은 가까우면서도 멀다. 비행기에 실려, 버스에 실려 왔다 갔다 삼박사일. 상하이에서 항조우로, 그리고 다시 소흥으로.삼일운동 백주년이라고, 삼박사일 학술대회 겸 견학을 온 것이다. 상하이와 항조우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옛 건물이 남아 있고, 소흥에는 루쉰의 자취가 남아 있다 한다. 이쪽으로 건너오기 전에 임시정부 백 주년 기념 원탁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삼일운동은 운동이 아니라 삼일혁명이요, 왜냐하면 바로 이 의거를 통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태동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상하이의 임시정부 선언 날은 1919년 4월 11일, 삼일혁명 한 달 남짓한 때다.전국 방방곡곡에서 삼 개월 계속된 이 혁명에 이백만 명이 참여하여 7천500여 명이 살해당하고 1만6천여 명 부상, 경찰에 검거된 사람이 4만6천여 명, 검찰에 송치된 사람이 1만 9천54명, 이중 유죄판결 받은 이가 7천819명이었다고 한다. 이 혁명이 있고서야 혁명의 힘으로 임시정부는 태동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대한제국식 임시정부 아니라 민주공화제를 표방한 ‘급진’ 정부를 말이다.새벽 네 시에 눈떠 인천공항에 여섯 시까지 가서 수속, 비행기 탑승 후 삼십 분 넘게 기다리다 한시간 사십 분 비행, 단체비자로 수속 밟고 나가 바로 임시정부 청사로. 또 버스 타고 세 시간 가까이 달려 항조우 임시정부 기념관으로.숨가쁜 첫날 일정이건만 마음은 더없이 숙연해진다. 그분들은 1910년 전후로 한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 신민회를 결성, 투쟁하다 해외로들 망명 삼일혁명의 투쟁을 계기로 응집된 정부를 세웠던 것이다. 상해, 항주, 진강, 장사, 광주, 유주, 기강, 중경. 거듭되는 일제의 암살, 체포 기도를 헤치고 그분들은 대한민국의 기치를 내릴 수 없었고, 쫓기면서도 버티며 공격하고, 반격을 준비할 수 있었다. 둘째 날은 아침 여덟시부터 저녁 여섯시까지 하루종일 세미나다. 사회를 보고 발표도, 토론도 한다. 전원발표, 전원 토론이다.삼일운동을 전후로 하여 김동인, 염상섭, 이광수 세 사람은 각기 자신들의 방식으로 싸웠다. 김동인은 순문예지 ‘창조’를 펴내고 히비야 공원의 2·8 독립선언에도 참가, 3·1 운동때는 평양에서 동생이 돌리는 격문을 써주고 3개월이나 옥살이를 했다. 염상섭은 혼자서 재 오사카 조선인 노동자 대표를 자처하며 독립선언을 했다. 이광수는 2·8 독립선언서를 쓰고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참여, 기관지 ‘독립’의 창간으로 나아갔다.이광수는, 김윤식 선생은 말씀하시기를, 고아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고 한다. 열한 살에 양친을 모두 잃은 육신의 고아요. 메이지중학을 졸업하던 해에 나라를 잃은 조국 상실의 고아였다는 것이다. 선생은 1969~1970, 1980년 등 두 차례에 걸쳐 일본에 가 자료를 섭렵, ‘이광수와 그의 시대’를 쓰셨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는 이광수의 일본 체험, 일본 사상과 일본을 통한 서양 사상의 접촉들이 잘 그려져 있다. 다만 모든 일에는 득이 있으면 실도 있다. 일본 근대가 이광수 문학에서 크게 부각되면서 이광수는 사상의 고아로, 그리하여 자신의 친아비와 형의 사상 대신에 ‘털빛깔’(정지용, ‘백록담’) 다른 의붓아비, 양부의 사상을 배육한 존재로 묘사된 점이 없지 않다.셋째 날은 루쉰의 고향 소흥으로 갔다. 18년산 소흥주가 달아 초두부 썩는 내음을 참을 수 있었다. 마지막 날 우리는 또 여섯 시에 길을 나서 ‘고국’으로 향한다.그분들의 희생이 없었던들 어떻게 오늘의 우리가 있으랴./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4-25

벌써, 세월호 참사 5주기

세월은 짧고 소년은 금방 늙어진다고 한다. 서울에 바야흐로 봄이 미쳐 진달래와 개나리, 벚꽃이 흐드러졌다. 목련은 좀더 일찍 피었다 사그러들 지경이고 산수유도 일찍 왔다 다녀갔다.올봄은 그래도 어렵게 왔다 허무하게 간다. 며칠 날씨가 좋지 않아 비 왔다 추웠다 오늘에야 활짝 갰다. 학생들에게 이번 비에는 벚꽃이 지지 않겠지만 한 번 더 비가 오면 그때는 아름다운 벚꽃도 다 져버릴 것이라 했다.그러고 보니 처음 세월호 참사 일을 소식으로 접하던 때가 떠오른다. 그날 나는 관악산을 홀로 오르고 있었다. 몸이 좋지 않은 게 계속되다 보니 어떻게든 회복해 보겠다고 사람 없는 한적한 숲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그 무렵 이미 텔레비전 뉴스를 보지 않게 된 후였다. 전날 무슨 배가 뒤집혔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어렴풋이 들었지만 미디어를 끊으면 세상은 고요한 법, 나는 산속 깊은 곳 꽃나무 잎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었던 것 같다.그러나 곧 비극의 크기와 깊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은 배가 뒤집히고 구조를 못한 무능의 소치려니, 경제와 이익에 눈 먼 사람들이 안전을 소홀히 한 까닭이려니 했다. 그러나 아니었다.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 자디잔 사람들은 국가나 정부에 대해 근본적인 생각을 내놓기 꺼려한다. 그런 큰 존재에 대한 믿음이 깨어져 버리면 삶을 어디에 어떻게 의탁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설마, 나라가, 위정자들이 그럴 수 있을까?그러나 나는 모든 막연한 믿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그때 분명히 경험할 수 있었다. 시시각각 전달되는, 공식 매체들 이면의 소식들은 참사가 어떤 계략이나 음모에 의해 시도된 것일지 모른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국가는, 정부는, 그리고 이 기구를 움직이는 어떤 사람들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지난 1980년에는 군부 인사들이 시민을 상대로 살육전을 벌였는데, 2014년에는 누가 학생들과 오가는 사람들을 향해 무슨 일을 벌인 걸까. 이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의문을 떨쳐 버릴 수 없다.나는 많은 것을 알려 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가 바뀐 지금도 우리는 많이 알면 위험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세상은 바뀌어도 바뀌지 않고 바뀌는 시늉만 하는 경우가 많다.참사 이후 세월호는 두 번 바다 위로 떠올랐다. 한 번은 대선 때, 또 한 번은 지자체 선거 때. 이제 또 언제 세월호는 떠오르려나. 바꿔쳐졌다는 CCTV의 ‘진실’은 언제 다시 무대 위의‘연극’을 펼치려나.김어준 씨, 주진우 씨, 뭐하고 계시는지요? 이상호 기자님, 더 힘을 내주세요. 아직은 봄은 봄이라도 추운 봄이랍니다. 나도 이 추위를 잊지 말아야겠다./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4-18

한밤의 독바위역

신촌에 살 때는 그래도 시내 가까워 좋았다. 종로라 해도 지하철로 이십 분이나 걸릴까. 전철역까지 걸어가는 게 시간이 좀 걸리지만 교통이 그만큼 편한 데도 없다.은평 하고도 독바위역이라.북한산 자락이라 공기는 좋다지만 어디 한 번 가려면 시간을 꽤 들여야 하게 됐다.지하철 6호선이 있기는 있는데, 은평 쪽 끝이 고리 모양으로 생겨 응암역에서 역촌, 불광, 독바위, 연신내, 구산 거쳐 다시 응암역으로 나오게 된다. 이 사이에 있는 역들은 일방통행인데 특히 내가 오르내리는 독바위역은 지하철 출구가 하나밖에 없다. ‘1번 출구’가 처음이자 마지막 출구인 것이다.전철 노선 끝에 매달린 작은 고리 한 가운데 독바위역이 있다 보니 한 번 집에서 나오는 것도 일이요 들어가는 것도 일이다. 자칫 밤 열두 시를 넘기면 막차가 응암이나 그 앞의 새절까지만 운행하기 일쑤여서 다시 택시를 잡아타야 하는 고역을 치르기도 해야 한다.그런데 언젠가 보니 독바위역까지 운행하는 심야 막차가 있다. 지하철 시각표가 달마다 달라지는지 인터넷 포털 사이트나 어플에 없던 운행 전철이다.어디서 지체하든 지하철역까지 화급하게 달려가 막차를 잡아타는 기쁨은 나쁘지 않다. 더구나 이 6호선은 합정이나 마포를 지나면 막차인데도 승객이 뜸해진다.텅 빈 객차 안에 어떤 때는 혼자 호젓한 기분으로 앉아 가는 날도 있다.그러면 더욱 이 일 저 일 생각하는 게 많다.반대 방향 차창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며, 나 지금 뭐하고 있나 생각하게 된다.작년에 세상 떠난 후배 웃는 얼굴이 요즘에는 자꾸만 생각난다.백혈병 걸려 항암해서 치유됐다 재발하는 바람에 몇 달 못 버티고 떠났는데, 그때 연세 세브란스 중환자실에 있는 것을 몇 번 찾아가 보지 못한 게 너무 미안하다.요즘에는 혼자 사는 사람처럼 옛 일들을 생각하며 가슴이 콱 막혀오는 통증 같은 슬픔을 느낄 때가 많다.독바위역까지만 운행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전철이 이윽고 마지막 정거장에 서면 내리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지하철 6호선은 깊디깊다. 한밤의 지상으로 올라오는데 몇 층 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다시 절전으로 계단을 생으로 걸어 올라야 한다.힘들지는 않다. 다만, 지상으로 올라오는 시간이 길다는 것뿐.이윽고 하나밖에 없는 출구로 나온다.집으로 가는 길이건만, 외로움이 이렇듯 사무칠 수 있나.‘독바위’의 ‘독’ 자가 홀로 독 자 인 것 같다.깊고 깊은 어두운 밤이다./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4-11

씨, 자 붙이시는 서울

하노이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인천 공항에 내리자마자 밀려드는 공기. 고국의 공기는 정말 정겹더군요. 코를 킁킁거리며 익숙한 바람 냄새 맡아보니 정말 이 나라로 돌아와 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반가운가요? 같이 모여 살 때는 서로 으르릉거리는 게 어지간히 질리기도 했는데, 몇 일 안 봤다고 그립기까지 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그리고 커피. 베트남 커피 맛있다고 원두커피도 몇 봉투 사고, 베트남식 믹스커피도 사마시기는 했지만, 역시 한국식 아메리카노가 아쉬운 여행이었지요. 비행기에서 내려 귀국장으로 나오자마자 프랜차이즈 아무데나 찾아든 한국식 원두 커피의 쓰디쓴 맛!사실,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기는 있었어요. 비행기에서 내려 모노레일 타려고 플랫폼에 서 있을 때였어요. 제 기내용 캐리어가 중심이 잘 안 잡혀서 넘어지곤 해요. 그래도 세워놓고 잠깐 볼 일을 보는데, 그게 그만 앞으로 넘어지며 캐리어 손잡이가 앞에 서 있는 젊은 여성 분의 다리를 친 거예요.ㅡ에이, 씨.화장도 곱게 한 오피스 직원 차림 여성 분이 고개를 휙 돌리며 ‘뱉은’ 말씀이셨어요. 그 분은 다른 일행도 한 사람 같이 있었는데요.ㅡ죄, 죄송합니다.그런데 그것만은 아니었어요. 인천 공항에서 서울로 들어올 때 공항철도 탈 때였어요. 플랫폼에 섰으니, 어김없이 전철이 들어오고 차문이 열려요. 다들 짐이 많잖아요? 저도 캐리어가 있고 앞 사람도 큰 트렁크를 밀고 뒤에는 아주 젊은 커플도 하나씩 트렁크를 끌고 있었어요. 차문이 곧 닫힐 테니, 마음들은 조금씩 급했을 테지요. 그래도 다들 들어오기는 했어요. 제2터미널에서 제1터미널로 온 전철에는 빈 자리가 몇 개밖에 없었어요. 저한테도 다행히 차례가 오겠더군요.ㅡ씨@!엥. 이건 무슨 소린가요. 맙소사. 그건 제 뒤따라 들어온 젊은 커플 중 ‘남자애’ 입에서 나온 소리였어요. 앞에서 거리적거린다는 거였어요. 혼잣말 하듯 했지만 목소리가 결코 작지 않아서 그건 마치 저보고 들으라는 소리 같았어요. 제 행동이 좀 굼떴던 것 같아요. 보통보다도 굼떴던 모양이지요.한 삼 주 지났나 봅니다.밤에 집에 돌아가느라 저는 또 전철 타고 에스컬레이터를 탔어요.제가 사는 곳은 역이 통행인이 적어서인지 에스컬레이터 폭이 아주 좁은 편이예요. 한 사람이 서면 그만인 거지요. 에스컬레이터 마지막 계단까지 저를 데려갔고, 이제 저는 지상에 발을 겨우 내딛었죠.ㅡ에이, 씨.바로 뒤에 섰던 여학생의 목소리였어요. 여학생은 저를 약간 밀치듯 스치면서 아주 바쁜 걸음으로 멀어져 가 버렸어요.아. 세 번째 씨 자 소리를 듣고 나자, 저는 드디어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었어요. 굼뜨면 안되는 것을. 플랫폼이나 전철이나 에스컬레이터 같은 데서는 절대 해찰 부려서도 안되고요.혹시 서울 오시는 분 있으시면 명심하셔야 해요. 요즘 씨, 자 입에 달고 사는 젊은 분들 아주 많거든요. 그리고 다들 제갈길 가느라 엄청 바빠요. 공연히 굼뜨게 다니시다가는 큰 코 다치실 수도 있어요./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4-04

미세먼지 나라

몇 년 전에 일본 도쿄 같은 곳에 가보면 공기가 아주 멀쩡한데도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처음에는 감기 걸린 사람인가 했고, 그 다음엔, 아, 일본 사람들 중에는 폐쇄적인 사람이 많아 저렇게 자기 얼굴을 안 드러내려고까지 하나, 했다.공기가 한국에 비해 결코 나쁠 수 없는 나래기에 사람들 기질 탓으로, 더 예민한 족속들이라고 오해를 한 것이다.이제 한 가지 추측을 더 보태면 일본에서는 더 일찍부터 미세먼지를 경고해 왔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아마도 나는 공기에 아주 민감한 체질을 타고 난 게 아닌가 한다. 옛날에 자동차 꽁무니를 따라 다니면 배기 가스 냄새를 맡아 보려던 아이들이 있던 시절에도 나는 질색 팔색을 했다. 배기 가스 냄새를 조금만 맡아도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던 것이다.조금 커서는 폐렴을 앓는 바람에 아버지가 병원에서 주사제를 처방해 와 매일 엉덩이에 꽂아 주시기도 했다. 열두 살, 폐렴이 무서운 질병으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스무 살 때 두 살 위 권영석한테 담배를 배웠는데 심할 때는 하루에 한 갑 반까지 태우다 서른일곱 살에 일주일만에 끊기고 말았다. 뻐끔담배는 아니었는데, 더 태우다가는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요즘 서울을 돌아다니다 보면 마스크 쓴 사람 천지인 것 같다. 마스크도 일반 마스크 아니라 미세먼지 방지용 마스크니 ‘일회용’이라도 값이 싸지 않다. 그래도 거리의 마스크는 날마다 늘어난다.그러고 보니 서울시는 어제도 오전 초미세먼지 경보를 발령했다 하는데, 벌써 닷새째 계속 발령 중이라고 한다. 낮에 뭔가 삑삑 울렸고 휴대폰 열어보니 미세먼지 경보였다. 그런가 보다 하고 닫았는데 그게 벌써 닷새나 됐다니.공기 상태에 그렇게 예민하면서도 뜻밖에 의식적으로 대처하는 데는 어지간히 둔한 나다.언젠가부터 눈이 빡빡해서 꽤나 비벼댔는데 필경 노안이 심해졌나 했다. 지난 해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기 시작해서 심봉사 될 지경, 안과를 찾아가니 노안에 백내장도 시작했다고 했다. 그러니 나이 든 탓이려니 했고, 소문 난 루테인이라는 걸 먹으면 진행을 좀 지연시킬 수 있으려나 했다.급기야 이번 겨울에는 눈을 비비다 못해 눈병에 걸려 또 안과를 찾아야 했는데, 이제 보니 그게 다 미세먼지 때문이다.처음에 미세먼지 경보가 울렸을 때, 이번 정부는 할 일도 참 없나 보다 했다. 이제는 매일 같이 울려도 타박 주려는 엄두는 나지 않는다. 나도 결국 마스크를 몇 개씩 산 지 오래인 때문이다.옛날에 황사는 모래바람이라도 이렇게 불쾌하게 느끼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미세먼지, 초미세먼지는 몸에 들어와 나가지를 않는단다. 머리 속으로까지 들어와 교란을 일으킬 수도 있단다. 수명을 줄어드는 일도 있을 수 있다 한당하다하다 이제는 사람이 살아서 먼지 인간이라도 되는 걸까? 참, 하수상한 시절이다. 이거, 누가, 언제 걷워가 주나?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3-21

하노이의 밤

하노이의 마지막 날, 며칠째 계속되던 흐린 날씨도 가셨다. 하루는 겨울인데도 꽤나 무덥더니 다시 한국의 초가을 날씨로 돌아왔다.길가의 베트남 음식을 파는 곳에 우리가 들른 것은 밤, 아홉시 반은 되었다. 피곤은 한데, 내일 아침이면 일행들은 하롱베이로 떠나고 나는 이 나라로 돌아와야 했다. 벌써 일주일 넘게 체류하고 있어 적당히 지쳤지만 타향에서 만난 친구들을 이 좋은 밤에 그냥 외면할 수 없다.플라스틱 탁자를 가운데 놓고 서로들 둘러앉았다. 나는 그중 작디작은 의자를 골라 납작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쌀국수 국물 같은 데다 쇠고기에 야채를 삶은 것은 아마도 깐(Canh). 전통 음식이었다. 낮에 찾던 하노이 보드카 대신 엘리게이터라는 술도 맛이 그럴듯했다. 고풍스러운 문묘의 전각들을 담장 너머로 바라보며 서로들 독주를 담은 작은 술잔을 기울였다. 깐은 내 입맛에 딱 맞았다. 베트남 향초를 무서워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십 년 사이에 내 혀는 이제 넉살이 붙었다.ㅡ여기 앉으니 정말 하노이에 온 것 같군.ㅡ그러게요.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입을 맞추었다.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후둑후둑 빗방울이 듣는가 했는데 어느새 퍼붓는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우리쪽 탁자에는 서둘러 사각 파라솔을 쳐 준다. 잠깐 사이에 베트남 손님들은 어디론가 다들 사라져 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건물 안에도 탁자들이 있었다.내 등으로는 파라솔에서 떨어져 내린 빗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앏은 남방 속으로 물이 스며들었다.ㅡ하노이 술도 나쁘쟎네요.ㅡ맞아요.먼저 집에 벌써 일본 소주에 맥주까지 마셔 취기가 꽤나 오른 상태. 그런데 이상하다. 마실수록 술이 깬다.ㅡ다들 어디로 사라졌지?ㅡ집에들 가버렸나 봐요.ㅡ빠르네.빠르다. 비가 마구 퍼붓더니 어느새 딱 그치고 보름달까지 떴다. 그러고 보니 정월 대보름이 바싹 다가온 때다.달이 크기도 하다. 베트남은 깊은 겨울밤도 선선한 정도다. 이렇게 좁다랗게 모여 앉으니 더 친한 사람들 같은 기분도 난다.평소에 김소월 시인의 ‘산’을 즐겨 부르는 선배가 취중에도 목청을 가다듬고 노래를 불렀다.소월은 어쩌자고 이렇게 처연한 시를 썼단 말인가. 목숨은 왜 스스로 끊었단 말이냐.내일이면 서울로 돌아가야 하건만 차마 돌아가고 싶지 않다.인터넷으로 들려오는 ‘고국’의 소식들은 소란스럽다 못해 어지럽기 그지없다. 재작년인가부터는 어느 곳 하나 기댈 곳, 마음 둘 곳이 없다.정든 생각도, 사람도 무서울 지경이면 삶은 막바지에 다다른 것. 타향을 떠도는 것도 나쁘지 않건만.이제 문 닫아야 한다고, 장사하는 사람들이 탁자며 의자를 걷어낸다. 빈 그릇을 잔뜩 쌓아놓고 설겆이를 하고 남정네는 대비로 바닥을 싹싹 비질을 해댄다.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돌아가야 한다. 어지럽고 무섭더라도 고국이니까. 거기 나를 끌고 가는 도구들이 있으니까. 나는 결국 한반도 사람이니까./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3-07

작디작은 의자

하노이 제일경은 호수들이다. 하노이는 한자로‘河內’라고 쓴단다. 두 강 사이에 끼어 있는 도시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한다. 막상 하노이는 강보다 크고 작은 호수의 도시다. 물웅덩이가 자그마치 삼백 개나 된다나.여기 상사에서 십 년 넘게 일하고 있다는 어느 분에게 호수들이 물은 깨끗한가 물었다. 수질 관리가 어느 정도 되고 있는 것 같다고 한다. 만약 호수들이 오염되어 있다면 하노이는 물 썩은 내를 풍길 텐데 그런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워낙 자외선이 뜨거워 물이 자연 정화되는 것 같다고도 한다.지금 여기 시간 아침 7시 반. 42층 호텔 벽면 유리창으로, 나는 지금 그 가운데 하나인 ‘서호’(호 떠이)를 내려다 보고 있다. 안개에 감싸인 하노이의 아침은 아름답다. 높은 건물들이 몇 년 전보다 많이 늘어났지만 하노이는 여전히 붉은 지붕을 가진 높지 않은 집들이 빼곡하다. 서울과는 달라서 산 하나, 언덕 하나 찾아보기 어려운 평평한 도시에 크고 작은 집들과 큰 호수가 함께 어우러졌다.하노이 제이경은 복숭아나무 꽃이다. 홍매화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복숭아나무 꽃이라 한다. 사원마다 건물마다 모셔놓은 복숭아나무 분재들에 겨울에 피어난 붉은 빛 꽃송이들이 사람이 시선을 강탈한다.하노이 문묘라는 곳에 가서도 오른쪽에는 금귤나무 분재를, 왼쪽에는 복숭아나무 분재를 세워 놓은 것을 보고 감탄을 했는데 겨울의 하노이에는 이 붉은 복숭아나무 꽃이 없는 데가 없단다.그럼 하노이 제삼경은 무엇이냐, 하면 작디작은 의자들이다.벌써 다섯 번은 온 것 같은 베트남에 가장 먼저 갔던 곳은 호치민, 그러니까 옛날의 사이공, 거기 가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베트남어를 적는 알파벳, 남국의 빛깔을 띤 건물 외벽들, 그리고 또 하나가 그 작디작은 의자들이었다. 이제 하노이에 오자 알파벳의 충격은 가셨고 호치민보다는 한결 색조 부드러운데, 유독히 눈에 도드라져 보이는 것, 그것이 바로 작디작은 의자다.단체로 따라다니는 여행은 하루만 지나도 버겁다. 어느 사원 문 앞에서 나는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혼자 청계천, 을지로 ‘마찌꼬바’ 풍경 같은 동네를 어슬렁거린다. 호수가 있고 물고기를 잡은 청년이 있고 초등학교도 있는 곳에서 한 번 꺽어 들자 한 없이 펼쳐진 자그마한 제작소들. 자칫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단체 여행에 혼자 길을 잃는 건 ‘범죄’에 가깝다. 더 들어가기를 망설이고 되돌아선 길에 작디작은 의자들이 보인다.이 의자들은 차나 커피 같은 음료를 파는 아주머니가 내놓았고 남녀 한 쌍이 아이스 커피를 의자만큼 작은 탁자 앞에 놓고 나란히 앉아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 나도 무턱대고 그 작디작은 의자 하나에 앉아버린다. 따뜻한 베트남 차가 부드럽고도 강하다.나는 그 작디작은 의자에 앉아 세상 풍경을 구경한다. 평화롭다.어떻게 해서 이 베트남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의자를 발명한 것일까.큰 엉덩이는 앉기가 황송할 것 같은 이 앙증맞은 의자가 작게 보고 작게 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한낮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2-21

상투스 당구장 없는 설날

설 날 때 만날 친구는 어떤 친구가 좋은가? 돈 많은 친구인가, 힘 있는 친구인가?옛날에는 그랬을지 모르겠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기도 하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더라는 게 나의 체험적 진실.돈 있는 친구, 그는 왜 돈 많게 되었는지 깨닫게 해줄 만큼 돈이 굳다. 자기 돈 불리게 해 주는 친구 아니면 상대도 잘 안 해 주는 경우가 많다.힘 있는 친구, 그는 자기를 더 힘 있게 해줄 사람 찾아다니기 바쁘다. 그 힘 가져다 힘없는 사람 도와주는 데 쓰는 법이 어지간히 없다.그러니 무엇이든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끼리 친구 삼는 게 참 좋다. 살다 보면 돈 많고 힘 있어 생기는 근심 걱정도 보통은 넘는 것을 실감할 때가 많다. 아니 할 말로 누구는 그 많은 돈 다 쓰고 갔나? 짊어지고 갔나? 힘도 그 힘이 꼭지까지 오르면 내려가는 비탈이 가파르기 짝이 없고.자부심 섞어 말하면, 나는 참 변함도 없는 친구다. 어른 되고 나서도 삼십 년 가까이를 설날 때 한가위 때면 꼭 같은 친구들만 만나고 다니니 말이다. 하기사, 그 친구라는 친구들도 멤버가 어느 한 번도 변할 때가 없었으니 무던하다면 어지간히 무던하다고나 할까.만나는 곳도 늘 대전 옛날 중구청 자리, 지금은 우리들 공원인가가 되었지만, 그 옆에 상투스 당구장이다. 고등학교 졸업하고야 당구라는 걸 쳐본 나는 워낙 삼각함수를 못하다 보니 지금도 고작 백이나 놓을 처지다. 하지만 두 친구는 경우가 다르다. 감사원 다니는 정 모는 이백오십은 놔야 하는데 늘 이백이고, 무늬만 출판사 대표 최 모는 삼백 오십은 놔야 하는데 꼭 삼백이다. 재작년인가부터 우리 사이에 끼어든 내 동생 방 모도 삼백을 놓으니 ‘사회 당구’ 치고는 실력파들이라고나 할까.-거기서 보지, 네 시에.말 안 해도 거기가 어딘지 다 아는 상투스 당구장. 그런데 이게 웬 일. 시간 넉넉히 맞춰 먼저 올라가 있으려고 가보니, 없다. 사라진 것이다. 명절 때만 되면 무슨 당구회 멤버들끼리 늘 모여 행사까지 치른다고, 플래카드 걸어 놓은 것도 나쁘지 않았는데, 송두리째 없다.돌이켜 생각하니, 지난 몇 년간 손님들이 어지간히 줄어들기는 했었다. 젊은 사람들 가는 당구장도 아니고, 전통적인 녹색 당구대에 당구알도 어지간히 크고 무거웠는데, 세월 따라 이곳도 묻혀버린 것이다.어떻게 해서 근처 다른 곳에 가기는 갔는데, 영 뒷맛 씁쓸하다. 옛날에 상투스라는 커피숍이 브라암스 다음에 생겼고 그 커피숍 이름 따라 당구장도 상투스였다. 가만 있자. 상투스가 무슨 뜻이던가.상투스. 라틴어. Sanctus. 미사의 성찬 전례 때, 감사의 노래 다음에 부르는 기쁨의 노래.그랬나 보다. 그래서 옛날 친구들 만나 어지간히 기쁘게 한 세월 보냈었나 보다.상투스 당구장 주인님, 그동안 고마웠습니다./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2-14

태움

태운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지 며칠 전에 쓰고 나니, 그런 태움 말고 다른 태움을 생각하고 싶어졌다.몇일 전에 쓴 태움이란 무엇이냐 하니, 영혼이 다 타버릴 때까지 괴롭힌다는 간호사 사회의 끔찍한 문화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게 태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병원 사회만 그런 게 아니요 한국 사회 전체가 태움으로 마치 불타는 집에 들어앉은 것처럼 고통스럽다고 쓴 것이다.다른 태움이 있다. 어렸을 때 아이가 귀여워 못 견디겠으면 그 태움이라는 걸 해준다. 아빠가 아이를 등에 올려놓고 방안을 이리저리 기어다니는 태움, 아이를 어깨 위 목에 걸치고 서울 남산을 보이냐고 묻는 태움, 어, 그만 좀 태워, 비행기에서 떨어지겠어, 하고 누군가 잔뜩 칭찬을 받고 기분이 좋아져서 그만 좀 하라고 손사래를 치는 태움, 그런 태움 말이다.생각건대, 우리는 서로 태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꾸 태워주고 또 태워주고 그래서 정말 비행기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스럽게 될 때까지 자꾸 태워주는, 옛날부터 우리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할아버지가 말썽 부리는 손자도 귀여워 못 견뎌, 그래도 저렇게 사지가 튼튼해서 돌아다니니 얼마나 좋아, 하고 없는 칭찬도 만들어 태워주는 문화를 이 메마른 세상에 다시 피워 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그래서 생각하는 게 농담이다. 우리는 농담을 제대로 못하는 세상에 떨어져 버렸다. 진중하고 무거운 것을 좋아하는 분들은 농담 즐기는 젊은이를 못마땅해 한다. 또 남을 깍아내리는 말을 농담이라고 해놓고 자신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을 유머 감각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한다. 그런 뼈 있는 농담, 가시돋힌 농담은 유머가 될 수 없다.유머란 뭐냐 하면, 상대방의 약점조차 관대하게, 따뜻하게 감싸 안은 농담이다. 유머는 풍자와는 용도가 다르다. 풍자는 권위 밑에 숨은 부끄러운 짓, 떳떳하지 못한 짓을 혼내주는 농담이다. 유머는 부족한 사람, 힘든 사람도 부추겨 주는 농담이다. 그렇다. 그런 유머는 바로 태워주는 농담이다.신이 될 수 없는 사람이라서, 사람들은 저마다 부족한 점, 약점, 한계 같은 것을 갖고 있다. 누구도 완전한 사람은 없으며, 자신에게 넘치는 것을 누군가들은 응당 못 갖고 있게 마련이다. 타고나기를 운 나쁘게 태어나서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 같은 사람도 있다. 그러니 누가 남의 탓만을 할 수 있으랴.태워주는 말, 태워주는 행동, 직장에서 동료를 만나서 잘한 일을 짚어내 부축해 주고, 아랫사람 만나서는 좋은 점을, 윗사람 만나서는 고마운 점을 서로 말해주는 관계, 이런 관계라면 많이 부족해도 서로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지 않나.태우지 말고 태워 주자, 우리 서로서로, 이 풍진 세상을 태워주며 살자./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2-07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저는 친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못 뵙고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아주 어렸을 때 할머니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께서도 아버지 젊어서 돌아가셨다 합니다. 계모님 밑에서 자라난 아버지는 어딘지 모르게 늘 외로워 보이시고 저도 그런 아버지를 닮았음을 나이가 들고서야 깨달았습니다.대신에 외갓집에는 외할머니도, 외할아버지도 당당히 계셨습니다. 딸만 다섯에 아들 하나, 전부 학교 선생님한테 시집 장가 보내서 가난한 외손자 외손녀들이 방학 때마다 달려들어 하나뿐인 외숙모를 어지간히 괴롭혀 드렸습니다.겨울에도 외할아버지는 늦게 일어나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외손자들끼리 건넌방에 진을 치고 엉겨서 늦잠을 자다 보면, 대빗자루로 앞마당 썩썩 쓸어대시는 소리가 들립니다. 젊어서부터 늘 부지런만 하셨던 외할아버지는 대놓고 혼내지는 않으시면서도 뭐라고 궁시렁 궁시렁 불만 섞인 소리를 하십니다. 눈 비비며 일어나야 합니다. 더 화나시면 큰일이니까요.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보다 더 건강하셨습니다. 외할아버지가 초파일 앞두고 우물에서 찬물로 머리를 감다 뇌출혈인가로 돌아가시고 나서도 외할머니는 오래오래 삶은 돼지고기 즐겨 드신 덕분에 몸에 살이 다 빠지도록 구순이 다 되어서 돌아가셨습니다. 아주 말년이 되셔서는 손자들이랑 화투 치는 걸 좋아하셨는데요, 한 판 한 판 돌 때마다 어찌나 진지하게 몰입을 하시는지 제가 그만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니까요. 젊어서부터 한 번도 ‘경우’ 빠지는 일은 안 하시던 분인데 저랑 화투 칠 때만 그 경우가 가끔씩 빠졌습니다.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생각이 나는 걸 보니 벌써 설날이 가까웠나 봅니다. 설날 가까우면 돌아가실 때 공교롭게도 두 분 다 찾아뵙지 못한 제 못난 날들 생각이 납니다. 외할아버지 때는 머리에 ‘미친바람’이 들어 집에 연락도 끊고 돌아다니고 있었고 외할머니 때도 또 다른 ‘미친바람’으로 사람 아니었습니다.두 분 살아계시던 북문리 생각이 납니다. 눈이 펑펑 내려 어린 무릎까지 쌓이고 논두렁에 얼음이 얼고 물 가둔 방죽에 썰매 타는 아이들 신이 납니다. 외손자, 외손녀가 두 분 아래로 자그마치 열아홉, 친손자 손녀까지 합하면 자손이 스물 하고도 둘이나 되었습니다. 신나지 않은 때가 한 번도 없었습니다.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살아생전에 한 번이라도 더 찾아 뵐 것을, 후회 막심합니다. 어머니, 아버지라도 계셔서 다행천만이지요. 일가붙이 하나라도 아쉬운 세상입니다.눈도, 흰떡국도, 백설기도 모두 하얀 설날이 옵니다. 하얀 사랑이 그리운 때입니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권정찬한국화가

2019-01-31

‘무(巫)’

유튜브는 오늘 같은 세상에 참 쓸모가 많다.유튜브가 선사한 새 세상 가운데 하나가 무당들 세상이다. 무당이라면 신비롭기도 하지만 무섭기도 하고 그보다 미신이라거나 천하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어느 곳에 가도 무당 없는 곳 없지만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 아니면 별종 세계 사람인 듯 취급하기 일쑤인 것이다. 그런데 유튜브가 이 세계를 세상 속으로 들여왔다. 어느 날 이것저것 검색을 하다 보니 용하다는 점집 찾아가 점 보는 과정을 고스란히 유튜브에 올려 놓는‘채널’이 있더라는 말씀이다.주위에도 사주 명리를 공부한 사람들은 꽤 많았다. 당신들 인생에 뭔가 답답하고 막힌데가 있다고 생각하던 끝에 ‘운명’에 관심이 꽂혀 도대체 왜 그런가를 골똘히 궁리한 끝에 명리학적 사유에 도달한 것이다. 그분들 말씀, “사주 도둑질은 하지 못하는 법”이라던가. 그런데 이렇게 ‘철학’으로 운명을 보는 것과 ‘신점’은 아주 다르단다. 명리는 연월일시, 사람이 세상에 날때 가지고 나온 네 기둥을 가지고 보는데 반해, 신점은 그야말로 ‘신’이 영매라 할 무당에게 그가 누군지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바로 알려준다는 것이다.카메라를 도중에 끊고 편집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런 일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세상에는 과학이라는 것으로 못 보는 게 많은데, 칼 융에 의하면 그것은 아직 전모를 모르는 것일 뿐,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무당은, 아니 ‘무’는 “귀신을 섬겨 길흉을 점치고 굿을 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이것처럼 세속화 된 뜻도 다시 없을 것 같다. 무당은 귀신을 섬기는 게 아니라 ‘신’을 섬긴다. 귀신과 신이 뭐가 다르랴 하겠지만 확실히 무당들은 영험한 능력을 보유한 초월적 존재로서의 신과 죽음 이후에도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산 자에 기대거나 괴롭히는 귀신을 구별한다. 또 옛날부터 ‘귀’와 ‘신’을 구별해 보는 전통이 있었음을 상기해 볼 수 있다.서양에서 들어온 종교는 ‘무’를 한갓 미신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한국인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무(巫)’를 숭상했으며 무당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이어주는 신령스러운 존재였다. 근대 국학자들은 무당에서 제정일치 시대의 지혜로운 통치자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는 바, 그들은 신을 통하여 인간 세계가 처한 상황을 예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과연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마음은 한갓 육체에 깃들인 것, 뇌수의 작용일 뿐인가, 아니면 육체와 다른 초월적인 기원을 갖고 있고 또 사후에는 다시 육체와 분리되어 초월적 세계로 돌아가는가? 어렸을 때는 전통적 사고에 따라 귀신을, 신을 믿었다. 젊어서는 인간을 물질적으로 인식하려 했다. 이제 또 생각하면 정신이라 부르는 것, 마음, 또 혼, 영혼은 어쩐지 육체에 기생한다기보다 이원론적 기원을 갖는 것 같기도 하다.삶은 신비롭다. 삶 너머도 신비롭다. 유튜브가 끌어들인 ‘무’를 통해 삶과 그 저편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1-24

겨울나무

요즘에는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뒤돌아 볼 짬 없이 앞으로만 내달리고 내달리며 한 6개월 이상을 버텨온 것 같다.여섯 달이라고 했으니 생각해 보면 지난 해 6,7월 경이다. 방학이라고 했고 또 쉴 수도 있는 여유가 있었는데 그럴 계획이라고는 제대로 짜보지도 못했다.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랄까, 다른 사람들은 내가 워크홀릭이라고도 하지만 중독도 아닌 시달림에 하루하루 불안과 초조로 하루하루를 살았다.일이라 해야 주로 글을 쓰는 것이고, 그것도 지난 해는 논문에 어느 만큼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에세이와 논문의 차이는 크다. 수필 같은 것, 심지어 평론 같은 것은 생각나는 대로 쓸 수 있고 생각의 흐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릴 수 있지만 논문은 그런 ‘장르’가 될 수 없다. 일정 시간을 들여 일정 분량만큼 자료를 소화하지 않고는 한 문장도 제대로 나갈 수 없는게 논문이다. 이 논문들이 지난 게으름 탓으로 줄을 이어 서 있을 때 앞이 그 장벽들 때문에 어떻게 해도 멀리 볼 수 없었다. 하나를 쓰면 또 하나, 그 다음에 또 하나. 논문 쓰느라 공부 못하겠다는 우스개 소리처럼 여섯 달이 그렇게 흘러간 것 같다.며칠 전에도 어쩔 수 없이 일 때문에 도서관을 찾았다. 3·1운동에 관한 책들을 잔뜩 찾아 대출해야 했다. 말이 3·1운동이지 그 앞에는 2·8 유학생 독립운동도 있었고 둘 사이를 연결해 가며 김동인이니 이광수니 이돈화니 하는 글들을 찾아보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도서관 순례를 하고 책을 열댓 권 겹쳐들고 도서관 통로를 나오다 보니 책이란 왜 그렇게 무거운지 팔이 끊어질 것 같다. 도서관 통로 바깥에 있는 벤치에 책들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는 찰나, 바로 그때 겨울나무가 눈에 들어왔다.아하. 겨울나무로구나. 벤취에 앉아 이파리 하나 묻히지 않은 고동색 겨울나무의 앙상한 줄기, 가지들을 쳐다보려니 감탄이 저절로 난다. 세상에 겨울에 아름다운 게 하고 많지만 저 겨울나무처럼 아름다운 게 또 있을까 싶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것처럼 호사스럽게 아름다운 게 있을까.탈피로구나. 저렇게 벗어버리는 것이구나. 그러면 사람도 새롭게 태어날 수도 있겠구나. 한 생을 살아도 다생을 사는 것처럼 해마다 한 번은 벗어버리는 의식을 거행하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겠구나.캠퍼스는 언덕 위에 있어 그쪽에 가만히 서 있는 겨울나무 뒤로는 올려보면 바로 하늘이다. 텅 빈 하늘을 배경 삼아 침묵 속에 고요히 서 있는 나무를 나 역시 말없이 바라보자니 마음 저절로 숙연해진다.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내달려온 것일까. 논문이라는 일 속에서 과연 나는 나라는 존재를 얼마나 깊이 있게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것일까.저 겨울나무는 그런데 사실은 내가 하루에도 한 번씩은 꼭꼭 바라보며 지나친 나무였건만.오늘은 이 나무가 그렇게 달라보일 수 없다. 벌써 일 월도 보름이나 지났다. 빨리 이 무거운 일들을 벗어버리고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으로 이 벤취에 멍하니 앉아 있고 싶다. 저 옷 벗은 나무처럼 지난 날들은 어떻게 살았으며 앞으로는 무엇을 해야 할 지 생각해 보고 싶다.책을 쌓아들고 일어서는 일을 잊고 나는 겨울나무가 내게 말이라도 걸어올 것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오래 그렇게 앉아 있었다.세상에 겨울나무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었다. 그는 이 겨울 저녁 상념에 잠겨 있었다./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