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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자연인 신드롬

거두절미, 나도 자연인이 되고 싶다. 나도 고향 예산 덕산 가까운 산골에 들어가 계곡물로 세수를 하고 더덕을 캐고 버섯을 따고 뜨는 해 지는 해 보며 황토방 오두막에서 자고 싶다.텔레비전은 지난 십 년 동안 아예 담을 쌓고 지내다시피 했다. 뉴스라는 건 이쪽 저쪽 다 어찌나 잘 ‘만드는지’ 진실 쪼가리 캐는 데 지칠 대로 지쳤는데 요즘에는 유튜브도 범람 지경이 되어 이상한 좌우 자처하는 세력들의 ‘손님끌이’ 장사가 되어버린 느낌이다.며칠 전 경향신문 11월 21일자 1면에 오늘도 세 사람이 퇴근하지 못했다고, 신문 전면을 하단 광고도 없이 산재로 희생된 사람 이름만 빼곡히 적어 놓은 것을 보고 아직도 세상이 변하지 않았음을 알았다.변하지 않은 게 어찌 노동문제뿐일까. 조국 사태는 좌우가 공수를 뒤바꾸어도 세상이 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권력을 가지면 그것을 지렛대 삼아 어떻게든 해보고 싶은 것이 사람의 생리라고 생각된다. 그게 없어지면 갑자기 정의로운 체 하는 것도 사람의 체질 가운데 하나인지도 모른다. 나 자신이 이 생물 그룹의 구성원임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그렇게 쓸모 없어 보이던 텔레비전 화면이 갑자기 환하게 빛이 난다. 이승윤, 윤택 두 개그맨이 방방곡곡 숨어사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데, 이쪽을 돌려도 자연인 재방송이요, 저쪽을 돌려도 자연인 재방송이다. 뭐랄까, 자연인 신드롬이라 할까. 요즘 남자들 로망이 ‘나도 자연인이다’란다.산속에서 손수 밭을 갈고 산약초를 캐고 한 끼 밥을 손수 지어먹는 ‘풍경’이 그렇게 귀해 보일 수 없다.악병에 걸린 사람도 깊은 산중에 들어가면 생명이 되살아나고 부도가 나고 사람살이에 지칠 대로 지친 사람도 산속에 들면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바로 아래 동생이 마음이 좀 나아져 자주 연락을 한다. 십 년 전 대장에 암이 생겨 죽을 고생을 한 동생이다. 삼형제 중 내가 장남이고, 셋째도 서울에 사는데, 이 친구만 대전 부모님 곁에 지내며 내가 치러야 할 고생을 했다. 참 미안하고 염치가 없다.방민호 서울대 교수유튜브에서 시골 집을 하나 봐둔 게 있다 했다. 한번 가보자 해서 서로 못한 이야기도 나눌 겸 같이 갔다 대실망을 하고 근처 절에서 맛있는 절밥만 먹고 돌아왔다.동생은 요즘 자연인이 되고 싶은 모양이지만 돈은 잘 못 벌어도 응급의다. 큰 병원 삼십 분 안에는 도착할 수 있어야 한단다. 나는 그게 대수냐고 응수한다. 마음 속에 ‘자연인’에서 본 산의 놀라운 치유력을 품고 말이다.나도 자연인이 되고 싶다. 너무 오래 ‘좌연인’ 하며 살았다. 산속으로 돌아가 세속 사람 때를 벗겨내고 싶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11-28

단재 신채호의 역사 방법론

‘민족’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다 보니 나의 눈은 다시 신채호로 향한다. 옛날부터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은 외로웠던 모양이다. 단재 신채호는 선생이라 불러 마땅한 선배 선각자였다.‘민족’이란 서양에서처럼 근대에 들어서나 자본주의 상품이 미치는 단위를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 양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달리 신채호는 아주 오래 전부터 형성, 발전되어 온 민족사를 규명하려 한 학자였다. 황당한 역사를 주장했던 사람이 아니요 민족의 이상을 품고 있었고 가려진 진실을 밝히기 위해 투쟁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그는 확실히 잃어버리고 잊혀지고 훼손된 것을 새롭게 일구어 내 본체를 드러내고자 애쓴 사람이어서 『조선상고사』나 『조선상고문화사』는 그 처절한 사투의 기록들이다.예를 들어, 그의 『조선상고사』는 사료의 수집과 선택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옛 비석을 참조하고 각 서적들을 서로 비교하고 진서와 위서를 가르는 제 주의를 기울이고 지명이나 인명 등을 해석하는데 따르는 문제들을 거론하며 이두문을 해석하는 방법, 우리와 가까운 인접 민족들의 언어와 풍속으로부터 추론해 내는 방법 등에 관해 그 나름의 치밀한 사유를 구축하고자 한다.“역사 재료에 대하여 그 사라진 것(亡)을 찾아서 기워 넣고(補), 빠진 것을 채우며, 사실이 아닌 것(僞)은 빼버리고(去), 거짓 기록을 판별하여 완비(完備)를 추구하는 방법”에 관한 『조선상고사』의 사유는 『조선상고문화사』에 오면 유증(類證), 호증(互證), 추층(追證), 반증(反證), 변증(辨證)의 다섯 가지 논리적 방법으로 가다듬어진다.방민호 서울대 교수유증이란, 어떤 규칙이나 유별을 따라서 증명하는 것으로 삼경 제도 같은 것이 있어 둘이 이미 밝혀졌다면 다른 하나도 밝혀야 하는 식이다. 호증이란 사서들에 적힌 사실들을 상호 참조하여 증명하는 것이니, 한국사의 망실된 부분들이 많은 것을 안타깝게 여긴 그는 중국 사서들을 대거 참조하여 한국사의 사실들을 밝히려 했다. 추증이란 “이 사건이 있으므로 저 사건이 없을 수 없음”을 들어 증명하는 것이요, 반증이란 “반면에서 그 사실의 참을 발견”하는 방법이었으니, 사서 안에, 또는 사서들 사이에 서로 모순된 서술들이 공존할 때 진실을 밝히는 방법이었으며, 마지막으로 변증이란 것도 어떤 서술들에 담긴 내적 논리를 따져 이치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따짐으로써 진실 여부를 가리고자 하는 것이었다.단재는 헛된 이야기라도 쓸 수 있으면 좋다는 식의 몽상가는 전혀 아니었다. 그를 알면 알수록 그의 외로움에 대한 나의 사랑도 자꾸자꾸 깊어지는 것 같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11-21

비내리는 인사동 -‘4음 4보격 가사체’로

담양 가서 가사문학 얘기 하는데, 공부도 공부지만 김학성 선생 만나 객지 잠 못드시는 이야기 듣고, “암만” “암만”하는 사투리도 듣고 박현수 ‘5촌 조카’광주 문흥지구까지 나가 무등산 막걸리도 한잔 걸치고, 다음날 아침 일찍 무주로 올라와 김환태 평론상 수상자 최명표 선생 일하느라 생고생 이봉명 시인 만나 네 시간 넘어 걸려 상경 하노라니 일요일에 천근만근 비가 오려는지 왼쪽 목 어깨며 등이며 고질병이 도져 아침에도 정신을 차릴 수 없는데 스마트폰 알려주는 일정표 따르면 김흥식 샘‘ 이기영 연구’일천오백 매 원고 떠들어 봐야 할 약속이 잡혔으니 점심 지날 때까지 마음 초조 몸은 엉금엉금 두 시 넘어서야 겨우 거동하여 걸어야 산다는데 걸을 힘은 없고 털털 자동차 끌고 구기터널 지나 세검정 자하문 경복궁 조계사 지나 공영 주차장에 파킹을 해놓고 컴퓨터 펴들러 커피숍 들어가 아메리카노 한 잔 놓고 원고를 넘기는데 ‘세계관의 형성 기반과 작가적 입신의 전사’,‘초기작의 세 유형과 민중 계몽주의의 한계’, ‘방향전환기 계급 소설의 양상’, ‘작가적 반성과 근대소설의 정점’, ‘전형기 이후의 추이와 명암’, 서둘러 체제를 보아 나가는데, 아하, 한 사람 공부가 사람마다 제각기되 소걸음 느릿느릿 그런데도 전차 걸음 천리 길 걸어 충남 하고도 아산 덕수 이씨 충무공 12대 지손 작가 민촌 이기영 생애와 작품이 여기처럼 자세 정심 알뜰하게 밝혀진 곳 없었으니 새삼 재삼 중병 앓는 선생 무서운 공력에 고개 끄덕이며 제목이며 체제며 이리저리 궁리하다 시간을 잠깐 놓쳐 다섯 시 언뜻 지나 골목 안 사천 이모집 달려가니 홍기돈 유찬열 먼저 와 기다리다 이십여 분 늦으신 선생을 맞아 이 집 명물 불고기에 굴전을 시켜놓고 책 만드는 상황을 점검해 보는데 이야기가 제목을 정하는 데 이르자 ‘한 근대 작가의 초상ㅡ이기영 연구’, ‘이기영 문학의 원점과 지향’등등 거론타가 선생이 직접 나서 ‘작가’말의 유래 밝히시며 ’작가 이기영, 그 생애의 치열성과 문학적 진실의 수준‘이라는 긴 제목을 제안하시니, 그것, 참, 길기는 하다만 1895 출1984 몰 작가 이기영 자취 제대로 담긴 듯하니 드디어 선생 책이 모양 갖추는구나 며칠 전 위출혈로 응급실도 가셨다는 선생은 식욕 없어 부지런 젓가락 놀리는 우리들만 쳐다보며 말씀만 이으시니 이윽고 일이 끝나 이모집 나서는데 때 아닌 늦가을비 기와를 때리나니 이 비 그치면 초겨울이리 엊그제 입동이니 어김이 없으리니 비닐 우산 사들고 제각기 흩어지되 선생 혼자 안국역 쪽 표표히 사라지시니 인사동 옛 거리가 적막하기 그지없어 인생은 오간데 없고 빗소리만 깊어라./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11-14

왕다운 브루나이 국왕

유튜브가 세계로 향하는 창이 되어버린 요즘이다. 티브이는 보기 싫고, 휴대폰으로 유튜브를 혼자 돌아가게 하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린다.문득 보니 브루나이 국왕에 관한 이야기다. 어떤 국왕이냐 하면, 현명하고도 자애롭고도 검소한 국왕이다.작가 김성한은 지금은 세상에 안 계시지만 의미 있는 우화적 소설들을 세상에 남긴 작가였다.그분의 소설들을 가지고 석사논문의 일부를 삼았던 나는 나중에 그분께 전화를 드리기도 했는데, 그때는 일본으로 떠난 작가 손창섭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당신은 몸이 아프시다고 하셨는데,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겠지만 삶의 막바지에 와 계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도 몹시 송구스러웠지만 얼마 후 그분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자 뭣보다 그때 당신의 소설세계에 관해 여쭈어 보지 못한 것이 몹시 죄송스러웠다.그분이 남긴 소설 중에 ‘개구리’라는 것이 있다. 개구리들이 지도자를 얻고 싶어 제우스 신에게 가서 비는 이야기였다. 제우스 신은 처음에 코웃음을 치지만 하는 수 없이 통나무 하나를 내려보내 주는데, 지도자를 원하는 개구리들이 그에 만족했을 리 없다. 더 힘센, 살아있는, 왕 같은 지도자를 원하는 개구리들에게 제우스는 황새를 내려준다.개구리들은 황새에게 잡아먹히고 제우스에게 황새를 얻어온 얼룩이는 그 찌꺼기를 먹고 지도자를 청하기를 반대한 초록이는 수배자 신세가 된다….브루나이는 동남아시아 보르네오 섬 북부 해안에 위치한 인구 43만의 작은 나라로서 이슬람 술탄 국왕이 통치하는 군주제 국가다. 15세기에 이슬람 왕국이 세워진 이래 절대 군주에 의한 통치가 이어지고 있는데, 630년쯤 되었다고 들은 것 같기도 하다.현재의 볼키아 국왕도 즉위한 지 50년 이상 된 듯한데, 그 나라 것은 ‘뭐든지’ 그의 것이 될 수도 있겠지만 백성들을 끔찍히 아끼고 돈도 아예 현금으로 나누어 주고 가난한 사람도 공짜로 대학 다니고 수술도 받을 수 있단다.민주주의가 뭐냐, 현대국가의 지도자란 무엇이냐 하고 따져도 답은 잘 나오지 않는다. 원유와 천연가스가 나오는 나라라서라지만, 부자라고 해서 모두 볼키아 국왕 같을 수 없음은 미국만 봐도, 중국, 일본을 봐도 알 수 있다.왕이 되려면 ‘적어도’ 브루나이 볼키아 국왕쯤 되어야 왕답다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한다. 백성을, 국민을 내 몸처럼 아끼고 헌신할 줄 아는 지도자가 아쉬운 세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11-07

창맹설(倉氓說)

권필이라는 조선 중기 때 문인이 있어 벼슬에 나가지 않고 평생을 자유분방하게 살았다. 나는 그를 한문소설 ‘주생전’의 작가로 먼저 알았다.박희병 선생 등의 논의에 따르면 16,17세기에 한문 단편소설의 큰 변화가 일어났으니,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대규모 전쟁이 삶의 변화를, 그리고 연이어 소설의 변화를 야기한 탓이다.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그는 광해군 때 자신이 쓴 시가 문제가 되어 해남 땅으로 귀양 떠나던 중에 길가의 사람들이 건네주는 술을 너무 마셔 이튿날 그만 세상을 떠나버렸다고 한다.과연 일세의 풍류객이었듯한데, 그가 남긴 석주집의 글들 가운데 하나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이 ‘창맹설(倉氓說)’이라는 글은 관가 창고 옆에 살던 도둑의 이야기다.옛날에 관가 옆에 사는 한 백성이 있었는데 장사도 하지 않고 농사도 짓지 않는데 집에 돌아올 때마다 늘 쌀을 가져 왔다. 덕분에 식구들이 굶지 않았지만 집은 텅 비어 있었다.그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아들을 불러 은밀히 알려 주었다. 관가 창고 몇 번째인가 기둥에 손가락 하나만한 구멍이 있는데, 나뭇가지로 살살 긁어내면 쌀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하루에 다섯 되 이상은 빼내지 말라 했다.아들은 처음에는 아버지의 말을 따랐지만 점차 욕심이 생겼다. 쌀을 더 많이 얻어내고 싶은 나머지 나무기둥의 구멍을 넓히니 마침내 감시하는 눈에 띄어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고 한다.석주 권필은 선조, 광해군 조를 살다간 인물이니 전쟁과 정쟁으로 얼룩져 있어 나라의 어지러움이 한도를 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조선시대가 당파싸움으로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어느나라나 피비린내 나는 내부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오늘날 우리 사회도 어지러움이 극에 달하기는 마찬가지인 상황에 나랏도적도 아래위로 적지 않은 듯하다.생각하기를, 작은 허물은 누구나 있으되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면 그래도 무사할 수 있겠다. 과욕은 그러나 큰 화를 부르는 법, 옛 사람 권필이 일찍이 이를 알아 스스로는 벼슬에 나가지도 않았으면서 벼슬하는 사람들을 경계하여 주었다.세상 삶의 큰 이치는 예나 지금이나 같다. 그리고 어찌 벼슬살이하는 사람들 뿐이랴. 분수를 알고 거기 맞게 산다면,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분들은 못 되어도 큰 화는 입지 않으려니 한다. 가뜩이나 돌, 칼이 어디서 날아들지 모르는 세상에 말이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10-31

어떤 지식을 습득할 것인가?

현대 지식 상황의 특징 하나는 지식의 범람일 것이다. 어느 쪽으로도 찾기만 하면 얼마든지 충분한 양의 지식 정보가 넘쳐난다는 것이다. 무슨 얘기냐 하면?자본주의 메커니즘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 할 때 자본 쪽을 옹호하는 논리를 뒷받침하는 지식들을 찾아 나설 수도 있고, 반대로 노동 쪽을 강조하는 지식들을 선호할 수도 있다.두 방향 다 지식은 넘쳐난다. ‘내’가 어느 방향으로 공부하든 그 선택을 위한 공부거리는 널려 있다. 어느 방향이든 상당한 수준까지는 논리를 구축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은 제공되는 것이다.같은 이야기를 식민지 근대화 문제를 논의하는 데도 적용할 수 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화가 한국의 근대화를 촉진했고, 때문에 일제에 의한 지배를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이 사람을 위한 지식은 그 시대의 통계자료들이나 지금 시대의 연구논문들 가운데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이 사람들은 식민지 근대화론을 부정할 만한 통계자료는 많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그러나 사실은 꼭 그렇지는 않다. 식민지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인의 인간됨을 부정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는지, 그 시대에 한국의 물자와 노동력이 얼마나 많이 유린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자료들도 적지 않다.근대화 과정은 수량중심적으로 계산되곤 하기 때문에 식민지근대화론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더 많고 또 더 많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외형적, 가시적인 것들에 대해서만 측정가능한 근대과학, 근대경제학의 약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이 근대과학, 경제학이 아직 측정하지 못한 인간고통의 양적, 질적 규모를 상상할 수 있다면, 아니 거기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식민지근대화론의 논리를 반박할 만한 사실적 자료들을 보다 성실하게 모아놓을 수만 있다면 일제에 의한 폭력적 지배를 부정할 수 있는 논리는 얼마든지 치밀하게 재조립할 수 있다.진짜 문제는, 따라서, 어느 방향으로 자신의 지식을 쌓아 나가고 무엇을 위해 논리를 정당화 할 것인가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정말로 중요한 것은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 그 자신의 선택이다. 만약 폭력과 차별에도 불구하고 근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길을 따라가면 된다. 그러나 그는 이 근대화가 완숙단계에 접어든 오늘도 여전히 비민주적 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노력하기 쉽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그와는 다른 길이 열려있음을 고려하지 않는다.나는 지배와 폭력을 당연시하거나 정당화하는 논리는 생리적으로 싫다. 나의 이 생리가 학문적으로도 더 많은 올바름을 향해 열려있기를 말할 뿐이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10-24

인텔리겐차의 자유

최근 세태를 보면 인텔리겐차(intelligentsia)는 설 자리가 없다. 옛날에는 지식인 대접을 그래도 좀 했던 것 같고 받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절대 아니올씨다, 다.그럴 만한 이유들이 있다. 먼저, 돈, 자본, 금권이 옛날보다 훨씬 더 세졌고, 이에 따라 지식, 지식계급, 지식인은 이것을 치장하는 용도 같은 것으로 떨어져 버렸다. 지식은 큰 회사 사장 집무실 뒤 서가의 금장 책들처럼 금권을 더 빛나게 하는 장식품 같은 것이 된다.다음으로, 권력이 옛날 같지 않다. 옛날 옛적에는 ‘삼고초려’하는 것이 있어 어디 훌륭한 사람 숨어 있나 찾아다니기도 하고 통치자의 덕성을 드러내느라 일부러라도 학계 사람을 모셔가기도 했다. 다 옛날 말이다. 노무현 정부 이래 통치는 오로지 자기 사람들로나 거행된다. 그룹에 들지 못하면 아무 것도 없다.이런 것들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이 인텔리겐차들 스스로 타락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옛날 옛적이 인텔리겐차들은 자신들의 존재 의미를 자기 자신을 위한 ‘사업’에 두지 않았다. 그들은 지식 자체를 위해 존재해야 했고 나아가 자신들을, ‘민중’ 같은, 비록 추상적이기는 해도 어떤 대의를 위해 쓰여야 하는 것으로 믿었다.1980년대에 한국의 통치체제는 러시아 짜리즘 같은 것으로 상상되었고 많은 대학생들은 자신들이 러시아의 인텔리겐차 계급처럼 민중들을 위해 헌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사상의 훌륭함 여부는 그 내용이 얼마나 올바른가에 의해서뿐 아니라 그것을 밀고 나가는 태도가 얼마나 순수한가에 의해서도 ‘결정’된다.지식인은 몸이 감금되어 있을 때조차 자유로울 수 있으니, 그들은 본래 스스로를 정신적인 존재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물질과 돈과 육체성, 권력에 스스로 거리를 둘 때 그는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그러니, 어떻게, 요즘 지식인들이 자유로울 수 있으랴. 의식이 이미 대부분 금권과 권력의 노예니 몸이 자유로울 수 있을 리 없다.러시아 ‘브나로드’ 운동 같은 것은 얼마나 성스러웠던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쓴 체르니세프스키는 얼마나 고매했던가?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논리를 미워해서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써서 밑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수정궁’ 같은 세계는 인간 세상에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고 했다.하지만 체르니세프스키는 투명한 이상을 꿈꾸었던 것이다! 그는 1862년에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고 1883년에 풀려나 곧 세상을 떠났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10-17

무필을 경계함

문득 생각 나는 말. 이렇게 버티다 갈 때 되면 가면 되지. 이 말씀은 대장암 4기를 앓고 계신 어느 선생의 말씀이다.이 말씀이 두고두고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오랜 시간을 시대와 상황에 대한 감각을 공유하며 지냈던 분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 계신 풍경을 바라보는 일은 가슴 아프기 그지없다.세상 사는 일 본래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을, 힘들다, 힘들다 탄식해 오기를 십 년, 앞으로 십 년은 힘들다 소리 안 내고 참고 참으며 힘있게 살아가기 기약해 본다. 내게 그 십 년이 허용된다면 말이다.삶의 더할 수 없는 무게에 비추어 보면 텔레비전, 인터넷을 장식하는 오늘의 시사적 이슈들은 구름처럼 덧없고 연기처럼 허무하다.지난 정부 시대에 팟캐스트를 베개 삼아 잠들고 깨던 시절 내 가장 ‘열렬한’ 스타였던 김어준씨에게 안녕을 고한다. 윤석열, 김갑수 티비, 유재일의 유튜브, 이해생각, 장기표, 최상천의 사람나라, 김경률 같은 새로운 대안체들을 생각하며 떠나보내야 할 사람은 떠나 보내겠다 생각한다. 아둥바둥 매달리지 말 일이다. 이것이,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 일이다. 서초동에 운집한 ‘허무’한 사람 물결을 생각한다. 지난 광화문 촛불혁명을 부러워하며 새로운 혁명을 조산하고 싶은, 그러나 필시 유산될 백일몽 꾸는 집단들을 생각한다. 백만, 이백만, 삼백만, 심지어 오백만 명이면 무슨 일이라도 벌일 수 있는가. 그 헛된 숫자의 공상을 생각하며 웃는다.이봅시오. 그렇게 큰 ‘관제’ 데모는 박정희, 전두환 때 이후 처음이올시다 그려. 이건 이쪽에 대고 할 말이고. 광화문에 촛불들 모인 게 그렇게 탐나던가요? 그런다고 당장 권력이 바뀐다오? 이건 저쪽에 대고 할 말이고. 허, 참, 지록위마라 하더니, 이 고색창연한, 진나라 때 환관 조고의 고사성어는 어느 호시절 와야 쓸데없이 되리오. 이건 이쪽 저쪽 양쪽 다에다 대고 하고 싶은 말이고.앞을 봐도, 옆을 봐도, 뒤를 봐도 뾰족한 답은, 길은 보이지 않는다. 뒤돌아서 몇 년 전으로 돌아가기도 보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현재를 원칙과 정의 강물처럼 흐르는 때라 믿고 싶지도 않다.작가들이 모여서 성명서를 냈다고 한다. 요즘 나는‘나라’를 수호한다느니 검찰을 개혁한다느니 하는 말들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민주주의니, 원칙이니, 정의니, 공정이니 하는 말도 옛날에는 알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알 수 없다. 아직도 그 뜻을 정확히 알고 있는 무려 일천이백 하고도 칠십육 분이나 되는 문학인들이 계시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를 다시 읽다 보니,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며 무필(誣筆)을 많이 휘둘렀다고 한다. 어느 중국 사람이 쓴 ‘이태백 시선’에 이백은 “애국시인”이라 했던데, 요즘 그 “애국”이라는 말처럼 인플레가 심한 것도 없다.나도 앞으로 살면 얼마나 더 살랴. 그래도 힘들다 소리는 안 하고 살겠다 생각한다. 그리고 모르고 잘못 쓰면 몰라도 알면서 그러고 싶지는 않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10-10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지난 박근혜 정부 시절이 생각난다. 세월이 빠르다더니 벌써 이 년하고도 반이나 흘렀나보다. 돌이켜보면 어지럽기도 어지간히 어지러운 시간이었다. 대통령이 탄핵되던 그 겨울에 우연히 SBS 8시 뉴스를 보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 이름이 열 댓명 이름 속에 들어 있었고 그것도 지금은 작고한 비평가 황현산 씨 옆에 두 번째로 등장하는 것이었다. 이름하여 블랙리스트라는 것이었는데 무슨 무슨 심사위원장을 맡겨서는 안 되는 사람들 목록이라고 했다.온갖 블랙리스트들에 없던 내 이름이 8시 뉴스에 등장한 일은 기이하고도 소름끼치는 경험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은 내 이름을 블랙리스트에 올린 정부 당국의 ‘핑계’였다. 이름하여 그 열댓 명은 제주도 강정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고 경상북도 성주 사드 미사일 배치에 반대하는 서명을 했다는 것이었다.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알 수 없으나 나 자신에 대해서만은 정확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나라에 미군이 주둔하거나 철수하는 일 같이 ‘엄청난’ 일에는 한 번도 의사를 표명한 적이 없다.제주 해군기지 문제나 성주 사드 문제는 미국의 극동 전략에 관계되는 문제이고 아름다운 제주나 성주가 군사기지화 되는 것은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일개 서생인 내가 이 문제를 갖고 왈가왈부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어떻게 ‘감히’ 그런 문제에 서명하는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그러나 지난 정부는 나를 반미주의자로, 있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 씌워 낙인 찍어 마땅한 사람으로 둔갑시켰던 것이다.그 이유는 아마도 세월호 참사의‘비밀’에 관심을 갖는 내가 심히 못마땅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지난 정부의 사나운 심사는 이해가 가지만 한밤에 반미주의자가 된 아들의 이름을 들어야했던 나의 부모님은 무슨 죄를 지었더란 말인가.정부가 바뀌고 이제는 걱정과 두려움 없는 시대를 살아갈 수 있으려니 했다. 소나 말 궁둥이에 낙인을 찍고 죄인의 가슴에 주홍글씨를 새겨 넣는 시대는 지나갔으려니 했다. 그런데 근거는 분명하지 않지만 신문이나 방송에 오르내리는 뉴스나 각종 포털 사이트에 올라오는 ‘실검’ 순위 목록을 보면 뭔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 전개되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지난 정부에서처럼 피부에 와닿는 방식은 아닌 것도 같은데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다르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 같은 이 이상한 기운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이 년 반 동안 ‘새로운’ 세상을 살면서 나쁜 꿈에서 이제는 깨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정녕 바라마지 않는다. 나쁜 꿈에서 이제는 깨어나서 밝은 대낮의 삶을 살고 싶노라고. 이 우려가 기우에 그치기를 바랄 뿐이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10-03

지금 생각 옛날 생각

요즘 매일같이 조국 교수 얘기가 방송 화제다. 한 사람이 이렇게까지 화제가 되는 일도 따로 없을 것 같다.사실 나는 요즘 정치라는 것에서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려 한다. 뉴스도 자세히 보려 하지 않아서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다.어제는 옆 방 계신 선생님이 무슨 시국 성명을 같이 하자고 하시는데, 깊이 생각해 보겠노라 답하고 나왔지만 이런 성명까지 하다가는 내 이름이 얼마나 닳아 버릴지 알 수 없어 그럴 생각도 없다.며칠 전 청문회라는 것을 할 때가 생각난다. 그날 텔레비전 방송이래야 우연히 보게 된 것뿐이다. 하루 종일 기자 간담회를 하고 청문회를 하니 지나가다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는 것이다.청문회 풍경이라는 게 새삼스러웠다. 사회를 보는 사람은 판사 출신, 질의를 하는 야당 의원들 가운데에는 검사 출신, 또 그 당의 대표라는 사람은 공안검사 출신이었고, ‘심문’을 받는 당사자는 왕년의 ‘사노맹’ 활동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언도 받은 사람이었다. 지나가는 얘기지만 이 사노맹은 내가 알기로 6·25 한국전쟁 이후에 이 땅에서 펼쳐진 비합법적 사회주의 운동 그룹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지속적인 조직이었다. 물론 나도 모르게 생겨났다 사라진 그룹들도 있겠지만 말이다.그때는 사회주의 운동이라 해도 그 실체가 당사자들 스스로에 의해서도 실체적으로 인식되지 못한 면이 컸다. 그러니 그 실체적 현실이 소련이나 중국이나 북한의 그것이라 생각되지 못한 면도 있고, 군사독재 체제나 그 직접적인 후계체제에 대한 저항이나 민주화운동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면이 있었다. 그것이 1980년대에 ‘대중화’ 된 ‘사회주의적 민주화운동’을 정당화 할 수 있는 한 요소일 수도 있었다.물론 나는 이 문제를 그렇게 느슨하게 사고하고 있지는 않다. 지적 무능력이나 게으름 같은 것이 세계사의 추이에 둔감하게 했다면 그 책임을 변명해 줄 어떤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변명에 발빠르지 말아야 한다.세월이 흘러 안기부나 공안검찰이나 정보 경찰에 쫓기던 사람이 전혀 다른 사유로 ‘심문’을 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것이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자본의 탐욕을 비판하던 사람이 바로 그 죄명으로 왕년의 판검사들 앞에 선 것이라고나 할까.나는 매일 계속되는 ‘조국’ 사태에 가급적 눈 돌리지 않을 것이다. 페이스북에서는 문학인들이 조국을 지키느라 난리가 난 모양이다. 문학은 과연 무엇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들이라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9-26

김구 선생의 삭발

이 현재의 삶에서 훌륭한 사람을 찾기는 어렵다. 어딘가에 그런 분들 계시겠지만 텔레비전, 인터넷에 오르내리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가히 모래밭에서 겨자씨 찾기다.이광수에서 안창호로 옮겨가고, 다시 안창호에서 신채호로 옮겨간 끝에 이번에는 백범 김구에 이르렀다. ‘민족의 죄인’ 이광수가 해방 직후에 백범의 일지를 정리하여 ‘백범일지’로 남겼는데, 여기에 얼마나 어떻게 그의 생각이나 판단이 개입해 있는지가 따져볼 일이다.김구는 해주 사람, 김자겸의 후손으로 양반이 몇 대를 내려온 끝에 상민이 된 집안에서 났다.‘백범일지’에 상민의 자식으로 나서 동학당이 되었다가 명성황후 원수 갚는다 하여 왜인을 처단하고 사형수가 된다. 그럼에도 어떻게 하여 천신만고 끝에 살아날 수 있었는데 그 연유가 흥미롭다. 도스토예프스키만 사형 집행 직전에 살아난 게 아니요 바로 김구 선생이 교수형 집행 직전에 살아날 수 있었던 ‘산’장본인이다. 그때 마침 서울에서 인천까지 장거리 전화가 개통되었다고 한다. 이미 김구 교수형이 결정되어 신문에까지 났다. 고종 황제께옵서 어전회의를 열어 김창수가 왜인을 살해한 것은 국제관계이니 나중에야 어찌 되었든 우선 사람부터 살려놓고 보자고 하셨다. 황제가 직접 전화를 걸어 집행 정지를 명령하였다고 한다. ‘백범일지’에서 김구 선생이 술회한다. 만약 이 장거리 전화가 개통되지 않았던들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이른바 신문명의 참 희한한 혜택도 다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목숨 살아난 김구가 파옥을 하고 무주로 도망쳐 세상 방랑에 들어서는데 어찌나 많은 곳을 돌아다녔는지, 아하, 큰 사람이 되려면 그렇게 먼 곳을 떠돌아야 하나보다 생각하게 된다.그런 김구 선생이 공주 갑사쯤 가서 어떤 사람을 만나 마곡사에 스님 되러 간다고, 같이 가서 승려가 되자는 권유를 받고 동행을 하게 된다. 신분을 감추고 이리저리 떠돌아야 하는 신세, 예나 지금이나 절집은 숨어 사는 사람들이 의지하기 좋은 곳이다.“시간이 지나서 사제 호덕삼이가 머리털 깎는 칼을 가지고 냇가로 나가서 삭발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나의 상투가 모래 위에 툭 떨어졌다. 이미 결심을 하였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지지난 해에 학생들과 함께 공주 마곡사에 답사를 갔는데, 거기 김구 선생 사진이 크게 붙어 있고 그 옆에 어딘가에 앉았는 사람은 분명 이광수였다. 영웅과 ‘민족의 죄인’이 함께 동석한 희귀한 사진을 오래 쳐다 봤었다.요즘 삭발이 유행이지만, 그 많은 삭발 가운데 김구 선생의 삭발 같은 삭발은 과연 얼마나 되는가 생각해 보게 된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9-19

네바다 주-미국여행 2

캘리포니아 주에서 네바다 주로 넘어가 들어간 곳은 라스베이거스, 도박의 도시였다. 우리가 머무른 곳은 피라미드 모양을 흉내낸 호텔, 그래서 그런지 안에서 길 잃어버리기 딱 좋았다.강행군 여행 탓에 내일이면 당장 애리조나 그랜드 캐년으로 떠난다니 여기서 ‘한 재산’ 날릴 기회는 오늘밖에 없었다.도박도 재미없고 마굴 구경도 재미없고, 그래도 낮밤이 뒤바뀌어 잠은 않고, 새벽에 억지로 일어나 도박장에 내려가 룰렛 게임 구경하다 심심풀이로 울긋불긋 동그란 원판이 돌아가는 기계 앞에서 손가락 튕기다 아침을 맞는다.버스는 또 다시 광야를 달린다. 나라가 아름답다기보다 넓디 넓은 황무지다. 미국은 윤택하다고들 말하는데 그 대신에 끝없이 이어지는 메마른 황야, ‘사보텐’ 선인장 풍경이다. 철 들기 전 어릴 적에 나는 이 일본말 ‘사보텐’을 만화책에서 배웠다. 카우보이들이 마차를 타고 선인장 삐죽삐죽 솟아난 광야를 달리는 만화는 도대체 왜 1970년대 중반의 우리 만화책에 등장했던 것일까. 가이드 분이 갑자기 노래를 틀어준다. “카우보이 아리조나 카우보이 광야를 달려가는 아리조나 카우보이 말채찍을 말아들고 역마차는 달려간다 저 멀리 인디언의 북소리 들려오면 고개 너머 주막집에 아가씨가 그리워 달려라 역마야 아리조나 카우보이” 1959년에 파라마운트레코드에서 찍어낸 유성기판에 가수 명국환의 이 노래가 들어 있었다 한다. 6·25 전쟁으로 미국이 이 나라의 시장과 영화관과 군사도시를 휩쓸고 있을 때 이 ‘이국종’ 노래도 꽤나 인기몰이를 했다는 것이다. 황야를 달리며, 나는, 윤택함보다 이 광활한 황무지, 희박한 인구밀도가 더 무섭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는 나는 너무 나이들고 너무 오래 작은 나라 안에서만 살았던 것이다.잠깐 원고에 한눈 파는 사이에 버스가 그랜드 캐년 지역으로 들어선다고 한다. 어디가? 어째서 그랜드 캐년이란 말이야? 땅가죽이 양옆으로 좍좍 갈라지고 천길, 만길 낭떠러지가 코앞에 박두해 있어야 하는 것을. 그러나 있다. 버스 주차장에서 내려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자 갑자기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단층이 모습을 드러낸다. 육백만 년 동안의 지질학적 활동과 콜로라도 강의 침식 작용이 만들어낸 장대한 결과물. 이런 것이었나? 나는 이쪽 땅끝에 서서 저쪽 건너갈 수 없는 ‘피안’의 땅을 바라본다. 부연 저편 절벽은 무슨 스크린화처럼 공중에 떠 있다. 왔다. 오기는 왔다. 영영 이런 곳에는 못 올 줄 알았는데. 왜 그렇게 생각했던 것일까.낭떠러지 끝에 꼼짝 않고 서서 생각한다. 나는 이편에 아직은 살아있는 것이라고.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9-10

네바다 주-미국여행 1

우리 일행은 오십 명 넘게 들어가는 긴 버스에 올랐다. 이제부터 네바다 주 라스베이거스 지나 애리조나 주 그랜드 캐년까지 가는 2박3일 여정을 시작하려는 것이었다.전전날 우리는 팜프스링스라는 곳에 가 문학캠프를가졌다. 나는 ‘기미년 삼일운동과 안창호’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핫스프링스라는 별명답게 팜스프링스는 밤 늦게까지 뜨거움이 가시지 않았다.다음날은 이십 년 전부터 알던 김준철 시인 안내로 산타모니카 지나 서던캘리포니아 대학의 안창호 하우스에도 가고 말리부 해변까지 나갔다 돌아와 저녁에는 대한항공 73층에서 도시를 내려다 보았다. 로스앤젤레스는 크다기보다 정이 가는 한인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버스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네바다 주로 넘어가 여러 시간을 달렸다. 태평양 건너오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신채호 선생과 관련한 원고를 써야 했지만 아직도 일이 남아 있었다. 버스 안에서 타자를 치는 건 목디스크와 원인 모를 어지럼증으로 아주 어려워졌지만 끈기를 부렸다.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꼭 써야 할 긴 분량의 글이 있었다.간간이 고개를 들어 버스 맨 앞좌석에 앉은 덕에 훤히 펼쳐진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데, 탄식이 저절로 나온다. 고원 지대 가까운 높은 한없이 펼쳐진 땅이 태양 볕에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무 한 그루 서 있지 않은 황원과 산맥은 중국 만리장성 밖 내몽고 가는 길에서나 보았던 풍경이었다. ‘데쓰 밸리’라는 이름의 계곡이 있다고 해서 과장벽이려니 했는데, 버스 엔진 과열로 잠시 선 틈을 타 내려 본 네바다 황원은 단 십 분도 제대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버스는 계속해서 외줄기 길을 말없이 나아갔다. 어렸을 때 ‘새소년’이나 ‘소년중앙’에서 보았던 사막 풍경이, 그러니까 선인장과 자갈돌들, 그리고 근육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산맥이 전부인 모습이 차창 밖으로 펼쳐지고 있었다.준철이 모처럼 나타난 작은 도시를 보고, 이곳에서 업체를 운영했었노라고, 사람들이 라스베이거스에 가다 여기가 그곳인 줄 알고 카지노에 들어가 다 날리고 돌아선다는 유머가 있다고 했다. 과연 길 가에 카지노 호텔 몇 개가 자못 라스베이거스 흉내를 내고 있었고 조금 더 가자 멀리 교도소까지 보였다.나도 라스베이거스에 가면 뭔가 일을 저질러 봐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도 같다. 과연 내게도 행운이라는 게 찾아오기는 할까. 그러나 ‘눈이 덮인’, ‘눈이 내린’이라는 뜻의 라스베이거스까지는 한참을 더 가야 한다고 했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9-05

임팔 전투의 기억

일본군 최악의 전투 가운데 임팔 전투라는 것이 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가던 무렵 일본이 기울어가는 전세를 만회하고자 한 것이다.때는 1944년 3월부터 7월까지. 장소는 지금 미얀마에서 인도 쪽으로 넘어간 곳. 일본군은 태평양 전쟁 개전 초기에 싱가포르를 3개월만에 함락시키는 등 영국군을 손쉽게 밀어붙인 기억이 있었다. 태평양 일대에서 미군에게 밀리고 밀리던 끝에 생각해낸 전세 역전 방법이 미얀마 쪽에서 성공을 거두자는 것이었다. 그런 연장선에서 영국군이 주둔해 있던 임팔을 공략해서 인도 쪽으로 진격해 들어가자는 발상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전투는 일본군의 지옥이었을 뿐 아니라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가를 인류에게 깨우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이 임팔 전투에 관해 NHK에서 만든 다큐멘터리가 있다. 중일 전쟁의 장본인으로 성공을 거둔 무다구치라는 일본 장군이 이 전투 계획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고 했다. 병참 부분을 고려한 어떤 보좌관이 극구 반대했지만 무다구치는 그를 전격 좌천시키면서 전투 작전을 감행했다.일본군이 주둔하던 곳에서 임팔까지는 줄잡아 470킬로미터 정도. 폭이 600미터에 달하는 친드윈 강을 넘어 야포 같은 것을 수레에 싣고 둘러메고 산맥을 넘어가야 하는 끔찍한 행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큐멘터리에 대한 기억이 맞다면 말이다.보급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은 먹을 것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무지막지한 짓을 벌였는지 몰라도 무다구치의 병사들은 임팔에 다 가지도 못하고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나중에는 무기들마저 짐스럽게 변해 버렸다. 내 기억에 따르면 공격을 시도하기는 했던 모양이지만 이미 영국군은 개전 초기의 영국군이 아니었다.다큐멘터리는 3만명의 절반 이상의 병사들이 어디서 어떻게 죽어갔는지에 대한 기록을 점으로 찍어 살폈다. 이 점들은 이 전투 기간에 죽음을 당한 병사들의 절반 이상이 전투에서가 아니라 후퇴하면서 변을 당했음으로 보여준다. 추격해 오는 영국군에 쫓기던 일본군은 먹을 것이 없어 나중에는 멀쩡한 자들이 부상병을 ‘잡아먹으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대부분의 죽어간 군인들은 일반 사병들이었고, 장교들은 그나마 식량 같은 것을 최후까지 차지한 덕택에 많이들 살아남았다고 하던가.요즘 왜 이 임팔 전투가 자꾸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아베 같은 이들은 자기 신념에 정신 팔린 나머지 자신이 추종하는 그 군국주의 망령들이 일본 국민을 어떻게 죽음으로 몰아넣었는지, 아시아 각국의 사람들을 얼마나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게 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가 벌이는 한국을 향한 ‘경제 전쟁’이라는 것을 보면서 생각한다. 그는 대일본의 재흥을 꿈꾸고 있는지 모르지만 과거를 겸허하게 성찰하지 못하고 교훈을 얻지 못한 채 성급히, 자신의 의지만으로 전세를 바꾸려 한다면, 그를 기다리는 것은 일본의 경제적 쇠락이자 일본인들의 고통뿐일 수도 있다.한국은 이제야말로 일본으로부터 새롭게 다시한번 벗어날 때가 되었다. 한일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에도 일본은 이 나라에 얼마나 오래 ‘빨대’를 꽂았던가. 아베의 국가는 한국에 돈을 빌려주고도 자기 것 아니면 사지 못하게 하는, 그러면서도 시혜를 베푸는 양 ‘거들먹거린’ 것이다. 이번에는 이런 ‘구조’를 어떻게든 바꿀 수도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힘이 들더라도 지금은 버텨야 할 때, 몇 푼에 자긍심을 버리지 말아야 할 때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8-22

기미년 독립운동, 상하이로 간 사람들

아침부터 마음 바쁘다. 오늘은 학술대회가 열리는 날. 하루하루 일수 찍듯 살지만 오늘은 새벽부터 서둘러야 한다. 먼저 도서관에 가서 오후에 잠깐 인터뷰할 소설부터 찾아읽고. 하근찬의 ‘삼각의 집’과 정한아의 ‘할로윈’. 정한아 작가는 다른 작품도 읽어봐야겠다.도서관에서 책을 찾아 복사하고 읽고 하는 사이에 시간은 금방 흘렀다. 아홉시 사십분. 손님맞이에는 늦었다고 봐야 한다.서둘러 행사장으로 가니, 원탁회의식 구상과 달리 책상들이 전부 앞을 향했다. 독일, 중국, 한국, 일본 국기도 어디 갔는지 없다. 파스쿠치에서 커피는 가져온 상태. 팔 걷어부치고 서둘러 행사장 모양 바꾸고 국기도 찾아 앞에 붙이고 한다.운이 좋다. 낙성대에서 올라오는 버스들이 무슨 일인가로 잔뜩 밀려 있다는 문자들. 시작 시간을 조금 늦출 수 있는 명분 제공.올해 초부터 준비한 학술대회. 지금부터 백 년 전은 기미년 삼일운동이 일어나던 해다. 많은 젊은이들이 상하이로 떠났다.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에 연유가 나타난다. 삼일운동 두 달 시위에 참여했던 젊은이들은 사냥개에 쫓기는 토끼들처럼 숨을 곳 찾았다. 일제는 맨주먹의 청년들, 백성들을 총칼로 무자비하게 살상했다.압록강은 이 젊은이들이 목숨을 걸고 건너가야 했던 생과 사의 갈림길이었다. 이때 이 강을 건너 상하이로 간 젊은이들이 있었다. 이미륵, 서영해, 강용흘 등등.그들은 상해에 모였다. 둘은 인도양 건너 유럽으로, 하나는 태평양 건너 미국으로 갔다. 독일, 프랑스, 미국에서 공부하면서도 그들은 어떤 형태로든 독립운동과 관련을 맺었다. 그들에게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안창호가 엿보인다.그리고 이광수와 주요한. 상하이까지 갔다, 가서 독립운동에 관계하다 조선으로 되돌아온. 총독부 체제의 강제적 포섭력이 그들을 기다렸다.중국 중앙민족대학의 이광수 연구자 김명숙 교수, 독일에서 이미륵의 산문들까지 본 박수영 작가, ‘압록강은 흐른다’를 일본어로 번역한 히라이 토시하루 교수, 이미륵을 독일 교양 소설 장르의 맥락에서 고찰한 최윤영 교수.주요한의 상하이 이전과 이후를 논의한 박현수 시인, 그리고 이극로라는 괴물을 상대하느라 몇 달 더 나이 먹어버린 김동식 평론가.살다 보면 운 좋은 때도 있다. 의도는 미미하였건만 그네들은 상상 이상이었다.1919년 3·1운동의 해는 사회역사적 운동만의 해가 아니었다. 현대문학 역시 격동을 맞았다. 다른 세계를 보고 다른 꿈을 꾸었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8-15

장맛비

두 주 동안 서울 가까운 곳에 가 갇혀 있었다. 시험문제를 내는 일이었는데,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것은 물론 휴대폰도 사용할 수 없었다.건물 바깥으로도 나갈 수 없을 뿐 아니라 건물 중앙의 창으로 보이는 뜰에도 출입할 수 없는 ‘감금’은, 몸 아픈 사람의 ‘휴양’에는 더 없이 좋은 약이었다. 아침이 오면 일찍 일어나 식사를 하고 문제를 내다 보면 금방 점심 때가 되고 오후는 조금 더 길게 느껴졌지만 아무 나갈 일도 없고 연락올 데도 없는 두 주일이란 얼마나 귀한 시간이었던가! 바깥 소식은 오로지 텔레비전으로만 접할 수 있었으니, 이 일방통행식 수신도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보고 듣고 생각만 하면 되니 말이다.텔레비전 뉴스는 세상의 소식을 먼데 일처럼 실어다 주었다. 안타까운 죽음의 소식이 들려왔다. 정두언 전 의원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인데, 경찰은 휴대폰의 행방을 찾고 있다고 했다. 지난 번에 노회찬 의원이 세상을 떠날 때도 휴대폰이 없어졌다 나타났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황병승 시인도 자신의 집에서 세상 떠난지 근 보름만에 발견되었다고 했다. 지난 ‘미투’ 열풍 때 안 좋은 일이 있었다는데, 그때부터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삶을 살아왔다 했다. 나는 ‘미래파’라는 ‘소동’ 가까운 ‘유파’에 ‘전혀’ 냉담한 편이었다. 그의 죽음은 지난해 그를 후원해 주던 비평가의 타계와 함께 이 ‘유파’의 ‘치세’가 끝났음을 알려주는 듯했다.세상에서는 폭염이 계속되고 있다고 했다. 벨기에에서는 사상 유례없는 더위로 무슨 조치가 내려졌다고도 하고 서울에서도 관측 이래 최고였다나 하는 무더위 소식이 이어졌다. 갇혀 있기는 해도 문제를 ‘뽑아내기’ 위해서 실내 온도만큼은 적절한 수준에서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당국’의 배려가 고마울 지경이었다. 옛날에는 겨울이 좋고 더운 여름이 싫었는데, 지금은 겨울도, 여름도 다 좋아진 나 자신의 삶을 생각했다. 체온이 내려가고 심장이 느리게 뛰고 사람들을 만나는 활기보다 홀로 주어진 시간이 반가운 나이.갇혀서는 술도 마실 일 없으니, 지난 오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막걸리로 오염된 몸의 독소도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좋은 일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드디어 술을 끊을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출소’해서 나가면 새 삶을 살겠다고 생각했다.몸이 덜 시달리게 하니 잠도 규칙적으로 잘 수 있기는 하지만 이미 두세번은 깨다자다 해야 하는 체질, 새벽이면 저절로 눈이 떠졌다. 검은 창밖으로 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가까이서 비내리는 소리 듣는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도시에서 창은 이중창일 때가 많고 그나마 허공에 뜬 아파트에서 날것 그대로의 빗소리란 쉽게 듣기 어렵다.‘비가 내리는군.’그러고 보니, 장마전선이 북상해서 며칠 동안 수도권 일대에 비가 계속될 거라는 소식을 들은 것도 같았다. 며칠 전에는 태풍으로 제주도 무슨 오름인가에는 사상 초유 천 밀리미터가 넘는 비가 내리기도 했다고도.사람들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날들, 새벽의 장맛비는 내 몸속에 남아있는 소년 시절을 되살아나게 했다. 참 비가 좋은, 비가 오면 몸이 흠뻑 젖도록 자전거를 타고 학교까지 한 바퀴 돌아오고서야 직성이 풀리던 시절이었다. 새벽에 줄기차게 내리는 빗소리를 하나하나 세면서 생각했다. 정말 이번에 출소하면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겠다고. 하루하루가 새로운 삶을./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8-08

병원 찾아다니기

한 달쯤 전부터 한 동안 버틸 만하던 목 디스크가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어지간하다’라는 충청도 말로도 다 표현하기 부족한 것이 바로 이 고질병. 한 칠팔 년 전 앉지도 서지도 못하게 한 허리 디스크에서 겨우 회복되었더니 삼사 년 전부터는 목 디스크가 대신 들어와 기승을 부렸다.급기야 두 해 전에는 수술은 무섭고 시술이라는 것을 받았다. 영 못 버틸 것 같은 급박감에 속된 말로 당일 입원, 당일 퇴원 같은 플래카드를 내건 병원 같은 곳에서 순식간에 받았던 것. 그렇데 예후가 썩 좋지 않았다. 그래도 며칠 지나 조금씩 차도가 보이기는 보여 그 후 그럭저럭 버텨오기는 했는데 이번에 갑자기 도져 버린 것이다.몸이 안 좋으면 머리라도 좋아야 하건만 어쩌다 허리 디스크 시절 치병 과정을 다 잊어버렸던고. 처음부터 전혀 새로운 병 앓는 사람처럼 허둥지둥하면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통증의학과, 통증을 다스려 준다니 우선 급한 마음에 찾아간 것이다.그런데 통증 병원도 많기도 많고 기술도 갖가지, 약물로 가라앉히기도 하고 신경 차단술도 있는데, 몇 곳 다니다 보니 결국 통증 치료는 임시 처방일 뿐이던가. 차일 피일 미루는 사이에 통증은 더욱 심하기만 하고 어깨며, 등이며, 전문 용어로 ‘상박’이며 계속 욱신거리다가 급기야는 팔이 떨리고 저리면서 힘까지 없어져 가는 것 같다.통증 치료로 헛 시간 보내고 몸 상태 나빠지고 나니 결국 떠오르는 건 지난 번 시술 받았던 곳. 시설도 수술 효과도 썩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금방 시술 해주니 그것만큼 편한 곳도 없었던 까닭이다.아침 일찍 병원 문 열리는 시간 기다려 애써 찾아가 시술 예약을 하기는 했는데, 하고 나자 다시 걱정이 태산이다. 이번에도 지난번처럼 시원치 못하면 어떻게 하느냐 말이다. 아무래도 종합병원이라도 찾아가야겠어, 조금 멀리 떨어진 무슨 병원인가를 찾았더니, ‘제기랄’, 예약을 잡는데 가장 빨라도 팔 월 중순은 되어야 하겠단다.어떻게 하나, 고민하는 중에도 팔은 쑤셔온다. 아, 임시변통 생각나는 데가 있기는 있다. 동네 한적한 한의원에 긴 침 깊게, 그런데 안 아프게 잘 놓는 노인 분이 계셨던 것이다. 침이라니, 약물이나 신경 차단술 같은 것과는 속효가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당장 아쉬운 게 한의원이다.노인 분에게 몸을 맡기고 침상에 눕자 될 대로 되라 싶은 자포자기 심정이다. 아픈 데 준비성 없는 나 자신을 탓해야 할 상황. 도대체 시내에 이렇게 병원이 많은데 왜 필요한 때 바로 찾아가 믿고 맡길 수 있는 데는 이렇게 적나?침을 맞고 나오니 그래도 마음이 안정은 된다. 하나의 교훈. 이번만 한 번 더 낫게 해 주시면 다시는 아프지 않게, 운동 열심히 하고, 술 안 마시고, 절제, 절제 하면서 살겠나이다.짧디나 짧은 인생살이건만 아프지 않게 사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산이 먼 곳에 있더라도 찾아가며 살겠다, 고개 숙여 본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8-01

사람 사는 방법도

한 나흘 걸려 창고 치우는 일을 하다 보니 일하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자기랑 삶이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는 건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아주 좋은 일이다.첫날 만난 일하는 분은 연세가 일흔은 족히 넘어 보이는데, 몇 살처럼 보이느냐 하기에, 글쎄요, 육십은 넘어 보이십니다, 했더니 기분 좋아 하신다.하루 일이면 오전 여덟시부터 저녁 대여섯 시까지인데, 이런 일에는 손에 익지 않으신지 유리를 조각내 자루에 담는데 오전 내내 보내고도 아직도 다 못 끝냈다. 나중에 자원 처리 사장님이, 바닥에 유리가루를 잔뜩 남겨 놓았다고 흉을 보기도 했다.쉬는 시간에 담배를 깊이 빠시는 모습이 보기 좋아 옆에 앉아 얘기를 붙여 본다. 팔뚝에 문신도 있으신 이 분은 젊으셨을 적 이력이 적잖이 화려하셨을 법하다.운전을 했다신다. 무학이라 직업 구하는 게 어려웠을 땐데, 신촌을 무대로 주름잡고 지내다 지프 차 조수가 되어 운전을 배웠단다. 신촌 로터리 옆에 강화버스 정류장이라고 있었는데, 그 길 건너편이 삼표 연탄 공장이 있었다는데, 거기 삼륜차를 운전을 하셨단다. 그 전이었다든가, 그 후였다든가 군대를 갔는데, 최전방 부대로 가 고생을 ‘엄청’ 하셨단다. 한여름에 연병장에 웃통 전부 벗고 두 팔 벌리고 서 있게 하면 모기가 얼마나 극성을 부리는지 온통 가려워 난리가 난단다. 한참을 그렇게 세워 놨다가 포복훈련을 시키는데 그러면 살갗이 다 터져 나가도록 박박 기어도 그렇게 시원스러울 수가 없다던가.사흘째 되자 이 왕년의 운전수 어르신은 나오지 않으시고 아주 바싹 마른 중노의 아저씨가 대신 일을 하셨다. 그분은 워낙 말씀이 없으셔서 말조차 붙이기 어렵고, 대신에 나는 사흘째 함께 부대끼는 자원 회사 사장님께 말을 붙여본다.젊으셨을 때는 무슨 일을 하셨어요? 사실, 자원회사라고 하지만 쉽게 말하면 고물상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 꼭 쉬운 일만은 아니다. 여기까지 온 사연이 없을 수 없을 테다.젊으셔서는 우체부 일을 하셨는데, 앞이 잘 보이지 않으셨단다. 갑갑한 터에 뭔가 새로운 일을 찾다가 원양 어선을 타셨단다. 참치 잡는 배를 타셨다는데 배가 인도양에도 가고 남태평양에도 갔다나. 삼 년을 계약해서 먼 배를 타는데 군대보다 어려운 게 원양 어선 생활이란다. 개중에는 학생운동 하다 배 타러 온 사람도 있고 그 밖의 학생 출신들도 더러 있는데 두고 보면 그렇게 딱할 수가 없단다. 참치 잡는 배에서 물이 바로 앞에서 찰랑찰랑 대는데 한 발자국만 떨어지면 곧바로 저세상 가기 쉽단다. 조류가 없는 것 같아도 한 번 배에서 떨어지면 순식간에 저멀리 밀려나 버린다는 것이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제 일 제가 찾아서 하지 않고는 무서워 못 배기는 곳이 원양어선 일이라고도 한다.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는 다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만하다.어떻게 하다 ‘자원’ 일을 하게 됐는지 당신 생각에도 참 딱할 때가 많단다. 나 하기 싫으면 남 하기도 싫다고 자원 일이라는 게 보통 어렵지 않단다. 재활용할 수 있는 것은 있는 것대로, 없는 것은 폐기물로, 폐기물도 다 같은 게 아니라 까다롭게 분류해야 하는 게 한둘 아니고, 쇠붙이에 비철 금속도 그 무거운 것을 나중에 다 분해하고 자르고 분류해야 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란다.아내한테 참 미안하다 하시는 자원 사장님, 그런데 정말 그 사모님이 일을 남들의 두 갑절은 하는 것 같다. 남일 아니기 때문이리라.사람 사는 일 결코 쉽지 않다. 직업이란 크게 보면 다 살아가기 위한 방편들일 뿐이다. 귀하고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 사는 일에, 사는 방법에 겸허해져야 한다고, 다시 한 번 되새긴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7-18

물건 처분하기

아주 가까운 분이 세상을 떠나신지 7개월이 흘렀다. 그 사이에 그분 계시던 곳 물건들을 정리해야 한다고 벼르기만 했지 정말 몸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사람의 일생이 담긴 ‘유산’들을 정리한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생각되어 결국 폐기 처분해야 할 것들을 시간을 내어 정리하기로 했다. 그 물건들은 생전에 그 분이 운영하던 공장 안과 공장 뜰에 가득 차 있었다. 보기에도 물건들은 무척 많아서 손이 몹시 많이 가야 할 것 같았다.내 손은 보기는 뭉툭해서 막일 깨나 할 것 같지만 언젠가부터는 책이나 보고 글이나 썼던 터라 아무래도 다른 사람 손을 빌려야 했다. 폐기물 처리 업체도, 고물상도 여기저기 많아서 그중 한 곳에 우연히 들렀다가 인상 좋은 걸 믿고 맡겨 보기로 했다.와서 보고는 한 이틀 걸리겠다고, 폐기물은 5톤짜리 한 차에 75만 원 해서 두 차, 여기에 쇠붙이나 비철 금속은 1킬로에 200원씩 쳐서 가져가겠다고 했다. 두 사람 쓰는 것까지 합쳐서 적당히 계산하기로 하고 일을 시작했는데, 맡겨 놓았다 해서 모른 척 할 수는 없고, 그중에는 남겨 두어야 할 것도 있을 것 같아 내내 지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이틀 걸리겠다던 것이 실제로 일을 시작해 보니 이틀 가지고는 어림 턱도 없었다. 이틀에 다시 이틀을 더하여 일을 하는데, 공장 안과 뜰에서 나오는 물건들이 실로 어마어마했다.끝이 없을 것 같다는 말이 어울린다고 해야 했다.‘세상에는 이런 일도’ 같은 프로에 출연해도 좋겠다는 농담까지 하면서,‘자원 회사’ 사장님 부부 두 분에 일하는 분 두 분 합쳐 네 분에 지켜보는 나까지 다섯 사람이 산더미 같은 물건들을 나흘을 걸려 처분하는 일에 매달렸다.나는 목디스크도 목디스크지만 사실 이런 일에 길 든 사람은 전혀 아니기에 옆에서 보다 딴청도 무척 피웠지만 일의 피로는 똑같이 느꼈다고 할 수 있었다. 1990년 정도에 팔린 브라더미싱 기계, 필시 복사본일 청전 이상범의 산수화 한 점, 1992년인가에 만들어진 삼성 완전 평면 티비 같은 것들이 나의 전리품이라면 전리품이었다. 그런데, 이 일을 지켜 본 내 주요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이 분이 남겨 놓은 물건들을 처분하는데 대한 가까운 다른 사람들과 나의 의견은 아주 달랐다. 나는 그분이 공장에서 손수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독창적’발명품들을 그냥 처분하면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살아생전에 식구들 고생만 시킨 그분의 지나친 발명욕의 소산들을 한시 바삐 없애 버리고 싶어 했다. 그 명품 기계들은 당신의 아이디어가 십 분 발휘되기는 했지만 상업적 이득을 남기지는 못한 현대 부적응증을 보여준 것들이었다. 나는 그 분의 노고가 담긴, 그러나 쓸모없는 기계들을 지키기 위해 물건들을 처분하는 공장을 나흘씩 지키고 섰던 것이었다.결국 나는 그분의 발명품 기계들을 열 대 정도 지켜내기는 했다. 대신에 그 나흘 동안 내가 새삼스레 깨달은 것도 있다. 공장 안과 뜰에서 끝없이 흘러나오는 물건들, 그 대부분들은 폐기물, 즉 없애 버려야 할 것들이었다. 뭐랄까, 살아서 뭔가를 자꾸 모으고 쌓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은 아니라는 생각!나흘 동안의 고생을 뒤로 하고 나는 당장부터는 모으지 않고 버리리라 생각했다. 내 것을 내 것 아닌 것으로 자꾸 밀어내야만 나랑 가까운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편할 테니 말이다. 평소에 많이 가졌다고 자부하던 그 책들부터 한시바삐 정리해야 하겠다. 책처럼 무겁고 처리하기 어려운 것도 없는데, 도대체 얼마나 살아 읽겠다고 그렇게 잔뜩 쌓아뒀단 말인가./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7-11

여행에서 돌아오면

여행에서 돌아오는 건 좋은 일이다. 모든 게 달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옛날에 한여름의 일본 도쿄에 가서 주택가 골목을 걷다 절망 같은 것을 느낀 적도 있었다. 그곳에 가득한 정적은 일본은 한국과는 다른 사회라는 것을 실감케 한 것이다. 말하자면 NHK 밤 뉴스 앵커의 전언이 한국 앵커들과 달리 마치 속삭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과도 같았다. 상황은 그러나 상대적이다.이번에는 여행에서 돌아오자 한국의 서울은 정적의 도시 같다. 차들은 경적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내가 신호 없이 차선을 바꾸자 뒤에서 속력을 내며 달려오던 자동차가 긴 경적 소리를 내기는 했다.휴일의 한의원은 여는 곳도 다섯 시까지만 한다는 것을 깨닫고 몹시 아픈 목디스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하다. 하지만 배낭을 들고 다니며 그렇게 아프던 몸도 갑자기 나아진 것 같다.왜 소리들이 들리지 않는 걸까? 한의원은 전통 시장통 입구에 있는데 파라솔을 편 행상 아주머니들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것 같다. 날마다 북적이며 젊은이들이 오가던 골목도 오늘만은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다.장마라고 했는데, 잔뜩 흐린 하늘에선 아직 아무 소식도 없고 어디서 남들과 다른 매미 한 마리 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오기는 한다.나는 내가 늘 오가는 학교 운동장 앞 벤치에 앉아 급하디 급한 박미하일 소설 ‘개미도시’를 읽는다. 일종의 우화다.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하는.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서울의 한 벤치에서 바라보이는 세상은 마치 물속처럼 고요하게 느껴진다. 지금 무슨 소설을 쓴다면 하나의 우화가 탄생할 수도 있을 것 같다.이 사회 한국도 지난 삼십 년 전, 이십 년 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나는 이 세계를 이번에는 다시 내가 금방 여행 갔다 돌아온 세상과 견주어 본다. 일본도, 한국도, 금방 다녀온 세상도 다 ‘상대성 원리’의 지배를 받는 어떤 그릇들에 지나지 않는다.그릇은 더 큰 것 앞에서는 작고 더 작은 것 앞에서는 크다. 소리들에 대해서도 그릇들은 모두 상대적이다. 나는 이 상대적인 사회 속으로 돌아와 소리 없는 것 같은 티비에서 펼쳐지는 어떤 ‘연기’ 행위들을 본다. 한국과 북한, 미국의 정상들이 판문점에 모였다.그것은 한 상대적인 크기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일 뿐이다. 내가 찾아갔던 그 사회에서는 이런 일들은 아무런 관심도 끌 수 없을 사건이다.세상이 달라 보인다는 것, 여행이 주는 효능이다. 내가 이 차원에 놓일 수도 있고 저 차원을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지금 이 차원에 속해 있을 뿐이라는 것, 여행이 선사하는 또 한 번의 인식이다.나는 여러 차원에 속해야 하고 이 차원에 매이지 말아야 하고 그리고 아무 차원에도 있지 말아야 한다. 사람에게는 깊은 자유가 필요할 때가 있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