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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접붙이기에 관하여

국문학을 하는 나로서는 늘 고민거리가 한국 현대라는 것이 어떻게 해서 ‘나타날’ 수 있었으냐 하는 것이다.요즘은 정치라는 것에 대한 관심도 꽤나 시들해져서 시간을 내서 평소 관심을 갖던 접붙이기, 접목이라는 것에 대해 더 찾아보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접붙이기에 한국 현대의 형성 과정의 ‘비밀’이 숨어 있을 것이라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한 사회에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는 과정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다. 한국 근대를 일본이 가져다주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은 주로 이식(transplantation)과 모방(imitation), 또는 복사(copy)에서 해답을 찾는다.시인이자 비평가였던 임화는 옛날에 순전한 이식이란 아프리카 원주민 사회 같은 곳에나 가능하다고 하였는데, 나는 그조차 아프리카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 믿는다.순전한 이식이란 모래땅, 황무지에 파인애플을 옮겨다 심는 것 같은 것을 말하는데, 사회라는 것에 그런 순전한 이식이란 것이 과연 가능하겠느냐 하고 의심한다. 물론 이식과 모방, 복사는 새로운 문화 형성의 쉬운 방법이자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창조에는 반드시 ‘원래’의 것과 외래적인 것의 ‘접합’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간과한 것이 아닐까 한다.나는 대신에 접붙이기, ‘접목’이라는 식물학적 용어를 어떻게든 활성화해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가지에 토마토도 접붙일 수 있고 벤자민에 귤도 접붙일 수 있고 고욤나무에 감나무를 접붙인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블로그 같은 것을 보면 성경에 고욤나무의 비유가 나온다고도 한다. 그것은 오래된, 버리지 못하는 습성, 생각 등에 비유되며, 감나무와 접을 붙여야만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있기에 사람아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 접붙이기에서 접을 붙이는 나무를 ‘대목’, 붙여지는 것을 ‘접수’라고 한다. 그러니까 접붙이기의 원리를 잘 생각해 보면 이 식물세계의 진실이 인간의 문화 형성 과정에도 아주 잘 들어맞는 ‘비유’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대목과 접수는 서로 접을 붙일 때 나무의 형성층이 서로 잘 맞아야 서로 다른 두 생명이 원만하게 이어져 훌륭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한다. 맞아들이는 쪽만의 의지로도 아니요, 붙어드는 쪽의 의지만도 아닌, 양방, 서로의 ‘뜻’이 조화롭게 어울려야 풍성한 문화를 새롭게 이룰 수 있지 않을까?사회문화의 전환기에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는 방식에는 여러 차원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식도, 복사도, 모방도 다 그 방법이지만 원리주의적 고수, ‘국수’가 아닌 다음에야 접을 잘 붙여 서로의 강점을 살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방법이 아닌가 생각한다.앞으로 나도 한 번 서투른 농사꾼처럼 이 접붙이기의 묘미를 배워 봐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이 식물 세계가 선사하는 인문학의, 문학의 이야기도 엿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9-23

의식보다 기질!

세월이 흘러갈수록 대전에 오가는 횟수가 빈번해진다.어머니, 아버지 만나 뵙고 점심이나 저녁 식사라도 같이 해보자는 것이다. 1, 2주일에 한 번 이렇게라도 하고 나면 그 사이에 장남 된 마음이 한결 안정되는 느낌이다.그런데 이렇게 자주 대전에 가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사실, 대전 집에 들어서자마자 내 마음은 벌써 고등학교 동창생 병수나 또 승진 같은 친구들한테 가 있기 일쑤다.-논산에서 서대전역까지 얼마나 걸려? 오늘 한 번 대전 나들이 할 수 있어?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기 전에 나는 얼마 전에 논산으로 이사 간 승진을 호출한다. 오랜만에 한 번 대전 나들이를 해보라는 것이다. 혼자 살 집을 찾아 논산으로 내려간 지 하마 1년은 족히 넘은 것 같다.흔쾌히 동의해 오는 승진을 대전 옛날 중구청 거리 옆에 진로집으로 오라 하고 이번에는 친애하는 병수를 찾는다.-승진이도 온다구? 그려, 알았어.병수하고는 매일같이 전화통 붙들고 삼십 분씩 떠들어 대는 사이, 오늘 비도 오는데 승진까지 합류한 게 차라리 이색적이다.비 오는 진로집에 모여 앉은 세 사람, 둘은 아직까지 홀아비 신세, 오징어두부 두루치기에 보문산 막걸리 놓고 앉아 우리 셋만 있는 듯 떠들어댄다.승진한테 병수는 꽃씨를 좀 달라 했던 모양이다. 승진은 이 나라 산이란 산은 안 다녀본 데 없는데, 논산 집 마당에 채송화, 백일홍, 해바라기에 사루비아까지 심었는데, 깨며 상추는 또 얼마나 생명력이 드센지 뜯어도 뜯어도 끝없이 솟는단다. 홀어머니 모시고 혼자 사는 병수네 집도 마당 있는 집, 가시오가피 나무가 멋지게 자랐다. 뒷곁으로, 담벼락 밑으로 밭을 일궜는데, 뭐든 병수 손에 걸리면 제대로 안 자라는 것들이 없다.셋이 모여 떠들다 보니 화제가 어느새 정치 쪽으로 향하는데, 승진은 박 전 대통령을 어찌나 좋아 하는지 기가 막힐 지경이고, 병수는 또 현 대통령을 은근히 쎄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또 나대로 생각 없는 건 아니고.밖에서는 휴일의 비가 내리는데, 우리는 갑론을박을 하다 말고 막걸리를 부딪치며 서로 웃는다. 사실 우리 사이에서는 그 견해차이라는 것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다. 우리한테는 그렇게 해서 생기는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으니 말이다.나이가 들면서 의식보다는 기질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을 믿는다. 우리는 의식을 넘어 친구로 남을 수 있다.이런 날, 비가 내리니, 참 좋다. 이 비는 꼭 옛날 우리가 어렸을 때 맞으며 낄낄거리던 그 비인 것만 같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9-16

선인장의 죽음

어째서 선인장은 仙人掌, 신선의 손바닥이라 했나?멀리 라스베거스 가는 애리조나 사막 드넓은 황무지에서 그대를 만났었지. 고국에 돌아와 나는 선인장 그대를 사랑한다고,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다짐했노라. 사랑은 찾는 데서 싹트고 물을 주는 데서 자라나고 병들어 죽어가는 것을 보며 애절해질 수밖에 없다.안성 가톨릭 신자들 숨어 살던 배티 성지 가던 길에 아름다운 선인장 하나를 사고, 또 대전 중앙시장 옆 대전천 천변 꽃집에서 선인장 하나를 또 샀지. 하나는 산호 선인장, 다른 하나는 철갑을 두른 듯 용맹하게 생긴 선인장이었다.두 선인장 모두를 너무나 사랑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여러 해를 살아왔으되 마치 헛 살아온 것처럼 선인장 키우는 법을 알지 못했다.물은 오랫동안 머금을 수 있어 자주 주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고향이 사막인 탓에 더위에도 추위에도 강하다는 것도 알았다. 한없는 어둠만 아니라면 꼭 햇살 따가운 곳이 아니더라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까지도 알았다.하지만 내가 몰랐던 것은 흙이 오히려 수분이 많아 축축해지면 선인장은 뿌리부터 썩어들어가 버린다는 사실이었다. 흙에도 물을 잘 내리는 흙이 있고 잔뜩 물을 흡수해서 진득진득한 상태로 오래 가는 흙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여름 내내 비도 그렇게 질기디질기게 올 수 없고 그 끝에 태풍도 벌써 세 번째 북상 소식이 들리는데, 그 무덥고 축축한 여름이 오래 가는 사이에, 세상은 코로나 천지가 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측정의 도구조차 잃어버린 사이에, 나의 사랑하는 선인장 하나는 물에 뿌리가 젖어 생살이 썩어가듯 잎사귀가 짓무르며 그만 모진 목숨을 끊고야 말았다.물 없이는 길게는 석삼 년씩도 사는 선인장이 있다는데, 이 여름처럼 습한 나날은 오히려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한 포기 선인장을 잃어 버리고 나의 방에는 이제 마지막 선인장 한 포기, 산호선인장밖에 없다. 푸른 머리카락을 길게, 메두사처럼, 그러나 아름답게 뻗어 올린 산호선인장은 사막처럼 바싹 메마른 외로운 방을 깊은 바닷물 속처럼 그윽하게 변모시킨다.선인장 하나와 나 하나. 아주 오랜만에 혼자인 혼자만의 삶으로 돌아온 것 같은 지금, 홀로 남은 강인한, 고독을 견디는 선인장의 삶을 생각한다.홀로 몇 스푼 아주 적은 수분에만 의지하며 적게 먹고 적게 쓰고 말없이 견디는 선인장의 미덕을 생각하며, 나 또한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적게 살고 뜨겁고 차가운 대지 위에 홀로 많이 버텨야 한다.그렇게 속으로 생각해 보는 날이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9-09

코로나 서울을 다시 사는 법

광복절 광화문 집회 이후 서울은 온통 ‘코로나밭’이 된 것 같다. 마침 한동안 하루 확진자 수가 많이 줄어들어 마음도 많이 풀린 참이었다. 은평구에 확진자가 심심찮게 나오는 걸 알면서도 몇 사람이 모여 연서시장에서 저녁 먹고 무지개 호프라는 곳에서 2차까지 하기도 했다. 아무리 코로나 시절이라고, 어떻게 좋은 사람들도 안 만나고 사나?학교도 그런 생각이었다. 방학마다 같은 과 교수들끼리 가는 학사협의회라고, 1박 2일도 가고, 한나절도 가는 행사가 있었다. 학과 일 의논도 하고 친목도 다지자는 것이다. 한동안 코로나가 잠잠했으므로 강화도 함허동천 같은 곳이면 조용하니 같은 사람들끼리 제법 분위기도 좋을 것 같았다. 하필 예정된 날짜 사나흘 전부터 그 난리가 없다. 하루 1, 2백 명도 아니고 3백명 넘게 확진자가 나오는 판에, 감염 경로조차 알 수 없는 환자들이 우후죽순이다. 종교집회다, 태극기 집회다 하는 것은 여기서 말하고 싶지도 않고, 그 동안 꽤나 안심하고 지내온 탓도 크리라. 결국은 강화도 나들이는 엄두도 못냈다. 당장 코앞에 닥친 졸업식마저 그냥 넘겨야 할 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티비에서는 연일 코로나 후유증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느냐 한다. 낫는다고 다 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당장 곧 졸업식인데, 정식 졸업식은 꿈도 못 꿀 상황. 급한 마음에 기념품을 준비하기는 했지만 이것으로 텅 빈 마음들에 보상이라도 될까. 마침 학과장이라는 직책이랍시고 앞으로 닥칠 2학기가 걱정이 앞선다. ‘예술주간’이라고 학생들 시낭송회 준비가 한창인데, 이것도 예외 없이 웹으로만 ‘공연’할 수 있다. 올해 입학한 학생들은 캠퍼스 구경도 변변히 해 본 것 없다.상황이 이렇다 보니 인생도 달라 보인다. 요즘 내 건강상태라면 코로나 걸리기라도 하면 그대로 황천길로 가버릴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상황이다. 25년 ‘글쟁이’ 생활에 잃은 것은 건강이요, 얻은 것은 죽을 때까지 이 길을 놓지 않으리라는 일념뿐.오늘은 또 무슨 태풍 ‘바비’라던가? 이름은 귀여운데, 그렇게 바람이 셀 수 없다 한다. 그렇다고 코로나 쓸어갈 것도 아니고. 태풍 예보 속에서 일찍 집으로 돌아와 마음 차분히 가라앉혀 본다. 이런 때니 더는 돌아다니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밀린 글이며, 논문이며, 시 한 편이라도 정성을 들이자.한밤이 되자 안 듣던 고전음악까지 들어본다. 본 윌리엄스의 ‘토마스 탤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 오랜만에 유튜브로 듣는 이 악곡은 모던시대에 영국적 전통을 되살린 것이라고 했다. 앞서 가는 것보다 깊이 침잠하는 것이 오래 가는 것이라는 뜻일까. 장려한 음악 속에서 옛날 소설 ‘몽유록’들을 펼친다. 오늘 단재 신채호와 관련해서 다 못 푼 문제다. ‘원생몽유록’ 속에 무슨 해답이 있을 것도 같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8-27

이 아름다운 아인슈페너

아침에 한번씩 꼭 들르는 곳이 하나 생겼다. 이름하여 아인슈페너를 파는 커피 전문점. 그렇게도 아이스커피를 즐겼건만 몸이 다 식으니 여름에도 뜨거운 커피만 마시게 되었는데. 이 뜨거운 커피 위에 흰 크림 듬뿍 얹은 아인슈페너 파는 곳을 알게 된 것이다.그런데 이 흰빛의 크림 맛이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희한한 것이랄까. 점원께 물어보니 이곳만의 수제, 직접 만든 것이란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 차가운 크림 온도는 싱싱함을 유지하기 위한 냉장에서 온 것일 터. 뜨거운 커피 위에 차가운 크림의 날카로운 대조미가 입안의 감촉을 생생하게 만든다.더욱이 이 크림은 뱃속에 들어가서도 그렇게 편할 수 없다. 토핑 크림 얹은 것이 속을 더부룩하게 하고 입안에서도 눅진한 느낌 남아 있는 경우 얼마나 많던가. 이 집 크림은 그런 속된 맛과는 거리 멀다고 벌써 며칠째 아침마다 마시며 감탄에 감탄.하, 그러고 보면 커피라는 것을 참 어지간히도 마셔왔다.처음 커피 맛을 본 것은 중학생 때 어머니가 손님 오셨을 때만 타 내오시는 ‘코히’ 맛을 본 것. 그때 수입산 커피가 수준 있었더랬다. 대학 와서 5동 앞 자판기 앞에 서서 나한테 담배 가르쳐 준 권영석과 같이 싸구려 믹스 커피 마시며 담배까지 태워 뱃속이 노랗게 변하던 기억도. 아이스커피도, 뜨거운 커피도 연한 맛에 꽤 오래 길들였던 것도 같은데, 한참 나중에 드디어 스타벅스 별다방 커피가 상륙했더랬다. 그 맛이 어찌나 쓴지 혀가 떨어져 달아날 지경.24시 편의점에 원두커피 천 원짜리가 등장하자 비로소 4천 원, 5천 원짜리 커피가 무섭게 느껴졌다. 점심시간에 목에 신분증 패용하고 체인점 커피 하나 사들고 직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정규직의 자부심이라나, 어쩐다나. 그래도 비싼 느낌 어쩔 수 없다.그렇게 나 또한 커피는 하루 세 잔 네 잔도 사양 않는 중증 중독 환자건만. 기가 막힌 커피 맛은 언제 맛봤는지 기억에도 없었거늘. 이제 향미 가득한 아인슈페너 한 잔 앞에 놓고 이것이야말로 커피 중에서도 커피가 아니더냐 한다.아인슈페너(Einspnner)란 사전 보면 비엔나 커피의 한 종류, 오스트리아 것이란다. 원래는 말 한 마리가 끄는 마차를 가리킨다던가 하고. 또 “오스트리아 빈의 마부들이 추위를 이기고자 크림과 설탕을 얹은 커피를 마신 것에서 유래”했다 한다.아하, 오스트리아, 빈. ‘꿈의 노벨레’였던가, 아르투어 슈니츨러.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그리고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리고 또….단념, 체념을 익히면 더 불행하지 않아도 되느니. 나는 어제 한 가지 미련, 애착을 단단히 끊어냈느니.아인슈페너 이 아름다운 커피 한 잔만으로도 한껏 행복을 만끽할 수 있나니./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8-20

길고 긴 장마

1984년 여름 끝에 춘천 하고도 중도라는 섬으로 2학기 개강 앞두고 엠티를 갔다. 같은 과 1학년 학생들끼리 친목을 다져 보자고 선배도, 지도교수도 없는 모험을 감행한 것. 저녁에서 밤까지 재밌게들 놀았고 밤 깊어지자 좁은 농가 주택 둘에 각기 나누어 쪽잠들을 청했다. 그런데, 새벽 여섯 시도 안 된 참에 벼락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 밖에 나가보니 우리 한편이 자던 집 옆 마당이 물에 통째로 떨어져 나갔다. 일은 그때부터. 밤새 비가 너무 내려 소양감댐 수문을 열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북한강 한가운데 있는 이 섬이 물에 잠기게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를 구조하러 온다는 헬리콥터를 목빼고 기다린 끝에 드디어 헬리콥터가 날아와 헬리콥터를 타고 문도 안 닫은 채 공중으로 날아오르는데 아래를 보니 과연 물바다라 할 만했다.그게 바로 엊그제 일 같다. 요즘 기나긴 장마 생각에 옛일이 새로웠다.아침저녁으로 오가는 강북강변도로. 서울에서 이 도로는 모든 혈액 순환의 중추 역할을 한다. 이 강북강변도로가 불어난 한강 물로 곳곳에 도로가 통제 되면서 동맥경화 현상을 보였다. 평소 일곱 시 반쯤 출근하는 사람이 열한 시 반이 되어도 출근을 마치지 못했더라는 것이다.그런가 하면 장마 때문에 아주 오랜만에 임진강이 언론에 오르내렸다. 북한에서 황강 댐이라는 것을 남측에 통보도 하지 않고 수문 개방을 한 게 그렇잖아도 큰 피해를 더 키웠다는 것이다. 임진강가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분들이 집도 잃고 농사도 망치고, 그나마 군인들까지 나서 복구를 하던 판에 또 비가 퍼부어 모든 수고를 수포로 돌아게 했단다.비는 또 정치에서도 논란을 부추겼다. 섬진강 제방이 무너져내리고 강물이 대범람을 하여 주변 가옥과 농토를 집어삼켜 버리자 4대강 치수 사업 때 해당 안 된 곳이라서 그렇다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 낙동강이 범람하고 여러 지천들이 흘러넘쳐 피해를 키우자 4대강 곳곳에 설치한 보가 오히려 홍수 피해를 키운다고들 했다.강뿐 아니라 유난히 잦은 산사태는 태양광 발전에 엮여 설왕설래를 낳았다. 산에 태양광 집적 시설을 얼마나 세웠는지 알 수 없지만 원자력 대신 태양광을 선택한 정부 정책이 도마에 오른 것이다.2013년에 장마가 그렇게 길었었다는데 올해는 더 길어 장장 오십 일을 넘어가리라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비가 지긋지긋하다는 말들이 나올 지경, 물난리처럼 마음 심란하고 지치는 일이 또 있을까. 집 잃고 농사 망친 분들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 가눌 수 없다. 난리에 목숨까지 잃은 분들도 여럿이다. 싸우지들 말고 매몰된 새끼를 찾던 어미 개의 마음으로 슬픈 이웃들을 돌봐야 할 때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8-13

마르크시즘 민주주의론 생각

지지지난 정부 시대에 모두들 드디어 민주주의가 정착됐다고들 했다. 어느 시대였던가는 숫자를 따져봐 주기 바란다. 그러나 민주주의 그 자체에 대한 성찰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두들 민주주의다, 독재다 말하지만 정작 민주주의는 얼마나, 어떻게, 어느 정도나 훌륭한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대학 고학년 시절에 마르크시즘에서 말하는 민주주의와 독재의 ‘변증법’에 관한 책을 한 권 읽은 적이 있다. 거기서 이렇게 말한다.부르주아를 위한 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다. 또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민주주의는 부르주아에 대한 독재다. 그러니까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요, 독재는 독재인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독재를 거느리고 있다.흔히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부르주아에 대해 행사하는 독재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이러한 논리는 그럴듯해 보였다, 젊은 날의 내게는 말이다. 뭐든 A는 A일뿐이고 B는 B일뿐이라는 논리는 단순투명하지만 그 대상의 복잡한 양상을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바로 이 복잡함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향해 한 승려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했던 것을 기억해 두기는 하자.민주주의는 언제나 독재일 수 있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다 마코토는 국내에 번역되기도 한 작은 책자에서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관해, 그것은 아테네 전체 인구의 10퍼센트에 불과한 자유민들을 위한 민주주의였다고도 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위대한’ 민주주의 국가는 역사상 가장 호전적인 도시국가여서 전쟁을 그렇게 다반사로 치를 수가 없었다고도 한다.1980년대가 가고 김영삼 정부 시대도 가고 김대중 정부 시대가 열리자 ‘드디어’ 직선제 개헌의 참된 효과로서 정권 교체가 현실화 되었다. 그 무렵 마르크시스트들은 한국에서의 민주주의 확대, 비약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고, 덕분에 ‘절차 민주주의’라는 말이 성행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니 민주주의니 하는 원리론과 구별해서 선거 절차의 개혁이나 혁명을 설명할 필요가 생겨났던 것이다.그렇다면 이 절차 민주주의를 통해 나타난 권력은 민주주의의 진정한 담지자라고 확신할 수 있나? 옛날에 히틀러의 나치즘은 절차 민주주의로 탄생한 야만적 권력이었다고들 한다. 한 마디로 말해 표 많이 얻었다고 다 민주주의는 아니라는 것인데, 요즘 이 나라도 이 민주주의다, 독재다하는 말로 꽤나 왁자지껄할 태세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8-06

유튜브 쓸데 없다

한 두어 주일 전부터 병이 또 도져 버렸다. 무슨 병이냐고? 물으신다면, 일명 검색병이라 해야겠다. 밤 늦게까지, 아니 새벽 가깝도록 휴대폰 속을 헤맨다. 다음, 네이버로는 성이 안 차 구글도 들어가고 줌도 들어간다. 목마름병, 타는 듯한 갈증, 갑갑증 같은 증세가, 소금물은 마셔봤자 더 목이 마르듯 숨통을 죄어온다. 아침에 눈뜨면 도로 또 검색이다. 왜 검색이냐? 하면 답답해서라고밖에 뭐라 말할 수도 없다. 아침부터 가슴에 뭐가 얹힌 듯 또 뭔가를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사실, 이렇게까지 되기 전에는 유튜브를 들었다. 보았다기보다 들었다고 하는 것은 정말로 유튜브를 지난 시절 팟캐스트처럼 쓰기 때문이다. 눈이 아파 유튜브를 보고 있을 수가 없다. 휴대폰 푸른 빛이 안구를 마구 찔러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눈 뜨고 애써 보는 것보다 저절로 들리는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근 1,2년을 이번에는 팟빵 대신 유튜브를 즐겨 들었다. 라디오처럼 온갖 이야기를 들려주는 휴대폰을 베개 삼아 베고 자며 지금, 여기와는 다른 세상을 꿈꾸었다. 뭔가, 이 숨막힐 듯한 갈증 씻어줄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를 고대했다.다른 시대가 오기는 왔다. 그것이 새로운이라는 말에 어울릴 만한 시대이기를 바라마지 않았는데, 마침 팟캐스트 시대가 종막을 고하고 유튜브 시대였다. 너도 나도 유튜브를 향해 내달렸다. ‘새날’ 같은 팟빵 프로도 유튜브로 변신했다. 참, 새롭기는 새로운 유튜브 시대였다. 이것저것 정치 이야기 아니어도 볼 것이 참 많았다. 하지만 내 감각으로는 아주 잠깐, 차 한 잔 마실 시간 정도였다.곧바로 무서운 갈증이 닥쳐오기 시작, 날이 갈수록 이 증세는 심해지기만 했다. 여기에도 예외없이 두 패가 있어 물어뜯고 물어뜯기기에 여념이 없다. 좀비 영화는 상영 시간 내내 마구 떼로 달려들어 물어 뜯고 물어 뜯기기가 ‘전부’던데, 바로 유튜브 속 세상이 ‘좀비장’이라면 심한 말이기는 하다. 뭔가 뷔페 식당의 갖가지 요리들을 한데 모아 엎어 놓은 형국이라고나 할까? 우주나 자연 다큐멘터리 빼놓고는 너무 거칠고 현란하고 막무가내고 공격 본능, 야수 본능들이다. 그러면서도 정작 찾는 것은 없다, 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어디에 진실이 있단 말인가? 어느 파당에, 분파에, 논리에 정의가 있단 말인가?지난 두어 주 동안 이 나라를 무섭도록 달군 메뉴가 있었으나 정작 진실은, 내막은 감춰진 채 비난과 화제 전환과 국면을 틈탄 괴물들의 싸움이 진흙탕 속에 펼쳐졌다. 이제 유튜브를 떠나면 또 무엇을 찾나? 누가 그러더라. 휴대폰 끄면 적막강산이라고. 맞다. 갈증도 함께 사라지리라 한다. 헌데, 이걸 꺼놓고는 살아갈 수도 없다. 기가 막힌 현실이라 아니 말할 수 없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7-30

앞으로도 외국으로 떠날 수 있을까?

드디어 트럼프가 마스크를 쓰고 사람들 앞에 섰다고 한다. 마스크 쓰는 짓을 왜 하느냐는 듯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확 바뀌어 마스크 쓰는 게 애국이라고 했다나? 매일 코로나 감염자가 6,7만을 헤아리니 끔찍한 미국의 현실이건만 정작 트럼프를 움직인 것은 이 엄청난 감염 급증보다 지지율의 추락과 대통령 선거 패배 위기감일 것이다.일본에서도 코로나 감염자가 하루 6백 명을 넘어서고 있다. 오늘도 그렇고 이렇게 된지 벌써 며칠 되었다. 그동안 아베 마스크에, 재난 지원금 교부 문제에 무능력과 부패의 극치를 보이던 아베가 이번에는 밑도 끝도 없이 ‘GO TO’라나 뭐라나, 국내 여행을 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절반씩 지원한다고 해서 또 한 번 ‘사고’를 친 모양이다.한편으로 유럽 각국도 비록 잦아드는 추세라고는 해도 결코 안전한 나라들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각국의 코로나 치사율을 보니 많은 나라들이 10퍼센트를 훨씬 넘는 비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엄청난 급증세를 보이고 있는 인도나 그 옆 나라 파키스탄, 감염자 수 5위인가로 올라선 남아프리카 공화국, 코로나 시대에 종신 대통령제로의 개헌 행사를 치른 러시아, 대통령에 이어 각료들 여러 명이 코로나에 감염된 브라질 등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들이 고도의 위험 상태에 노출되어 있다.그러고 보면 지금까지는 그래도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해야겠다. 1987년의 민주항쟁, 1988년의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은 세계를 향해 활짝 열렸고, 검열이나 사전 교육 없이도 외국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곧이어 1996,7년의 국가부도와 IMF 체제로의 편입은 개방화, 세계화를 더욱 가속시켰다. 비록 경제는 신자유주의 세계체제 속으로 깊숙이 끌려들어갔으나 한국은 여러 노력과 행운으로 용케 지금의 사회적 수준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올해의 코로나 팬데믹까지 30년 동안 한국인들은 부지런히 외국으로 나갔고 세계여행과 에세이 쓰기가 시대적 코드가 되었다. 세계 어느 곳도 한국인들 없는 곳이 없었고, 일본이나 베트남은 한국인들이 없으면 지역 경제가 잘 안 돌아간다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앞으로도 과연 외국으로, 먼 도시나 사막을 찾아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풍토병 같은 것도 아닌 바이러스들이 출몰하는 곳으로, 그 지역들의 부실한 의료 체제를 믿고, 18세기의 모험 같은 외국행을 감행할 수 있을까? 열린 세계에서 닫힌 세계로 급변하는 세계, 한국인들은 과연 적응할 수 있을까? 어서 백신이 개발되기를 기다려야 할 형편, 안으로 침잠하는 새로운 습관을 들여야 할 때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7-23

조선작 단편소설 ‘영자의 전성시대’

김유정 문학촌에 터줏대감이신 전상국 작가를 만나러 간 적 있다. 그때 전상국 선생의 작품을 ‘문학의 오늘’에 싣고자 할 때였다. 참 섬세해 보이시는 전상국 선생께서 당신의 작가 수업 과정을 말씀하시는 중에 조선작이라는 작가가 당신 학창시절인가 사는 데서 만났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때 비로소 조선작을 문학사의 작가로서 인식하는 첫걸음을 뗀 것이다.이 작가의 대표작은 아직은 설익은 내 생각일 뿐이지만 뭐니뭐니 해도 ‘영자의 전성시대’일 것이라 생각한다. 1973년에 ‘세대’ 잡지에 실린 것을 1975년에 김호선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서 상당한 흥행 성적을 거두었던 모양이다. 1975년이라면 내가 열 살쯤 되었을 때인데, 선정적이라 여겨지던 영화 포스터를 눈여겨 보았던 기억이 있다.다시 읽어 보는 ‘영자의 전성시대’는 영화로 된 것과는 스토리가 달라도 아주 다르다. 영화도 나쁘지는 않지만 굳이 손을 들어 보자면 확실히 소설 쪽이 작품성이 좋다. 이는 영화감독을 폄하함이 아니라 조선작 소설의 우수성을 말함이다.여기에는 ‘창수’라는 화자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월남전 참전용사로 현 직업은 목욕탕 ‘때밀이’, 지금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세신사’라 한다. 창수는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러는지 돈이 생기면 젊은 욕망을 사창가를 찾아가 몸 파는 여성과 관계를 맺는 것으로 ‘때우곤’ 한다. 이 창수의 이야기를 작가 자신의 경험이나 세계인식으로 곧장 환원하는 것은 작품 연구의 기본에서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먼저 확인해 두고, 이렇게 해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게, 한쪽 팔을 잃어버리고 창녀로 ‘전락한’ 바로 영자다. 나는 지금 ‘전락’이라는 말에도 작은 따옴표를 쳐 놓았는데 함부로 ‘전락’이라는 말을 액면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녀는 시골에서 상경한 몸으로 식모가 되었다가 버스 차장이 되고 그때 버스에서 떨어져 삼륜차에 치이는 바람에 한쪽 팔을 잃어버리고 말았다.이 영자를 위해 창수가 나무 팔을 만들어 주는 장면, 그리고 청량리 588의 화재와 영자의 죽음 같은 극적인 스토리는 두고두고 이 작품을 시대의 문제작으로 만든다. 월남전 참전용사와 시골 상경 여성의 만남과 사랑, 그 비극적 결말은 이 작품이 얼마나 정교한 상징적 의도 아래 쓰여졌는지 말해준다.조선작은 1940년 대전 출생으로 대전사범학교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그밖에 이 작가에 대해서 나는 부끄러울 정도로 아는 것이 없다. 앞으로 내가 성장한 대전에서 나온 이 작가에 관해 한 번 이것저것 알아볼 생각이 있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7-16

코로나19 시대의 미국, 브라질 대통령

코로나19가 여전히 기승이다. 일본은 하루 확진자가 200명을 훌쩍 넘어가는데다 큐슈에 대홍수가 나 난리 중이다. 한국은 하루 확진자 50명을 오르내리니 다행이라면 천만 다행이다. 미국에서 통계는 존스 홉킨스 대학이 그대로 정확하게 내는 모양인데, 이 글을 쓰는 오늘로 무려 300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현재 전세계 코로나19 확산을 ‘주도하는’ 나라는 미국, 브라질, 인도 순으로 집계된다. 이들 나라는 3위 인도는 70만명을 넘어섰고, 2위를 달리는 브라질은 무려 171만명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통계는 한 가지 의문점, 코로나 감염 확산이 인도 비례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인도 인구는 13억 명, 브라질은 2억 1천 명, 미국의 3억 3천만 명이니, 인구 비례로 따지면 인도가 단연 가장 많은 숫자를 기록해야 할 텐데 사태는 그렇지가 않다. 그밖에 소득 수준이나 지역 방역 인프라, 위생 같은 문제를 고려하면 인도가 3위인 반면 미국은 1위나 된다는 사실이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문제의 요점이 어디에 있나? 하면 역시 정치 지도자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트럼프는 코로나19 확산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규모 선거 유세를 강행해서 세간의 비난을 샀고, 브라질의 보우소나르 대통령은 코로나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허풍을 떨다 결국 확진 진단을 받고도 발표 도중에 마스크를 벗는 기행을 저질렀다. 그런 와중에도 일찍 환자가 폭증해서 시신조차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던 뉴욕은 지금 많이 안정을 되찾고 있다는데, 쿠오모 뉴욕주 주지사는 마스크 덕분이라 했다고 한다.미국과 브라질의 대유행은 오로지 정치 지도자들의 그릇된 판단과 우행이 낳은 ‘인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코로나19 자체가 천재인지 인재인지는 어디서 바이러스가 발원했는가를 판명하기 어려운 지금 쉽게 판가름하기 어렵지만, 유독 미국, 브라질 등에서 대유행을 하는 것은 정치 지도자들 탓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정도는 다르지만 ‘이웃 나라’ 일본이 코로나 급증세를 나타내는 것도 알고 보면 수상 아베의 한심한 위기 대처 능력 때문이다. 형이 골판지 회사를 운영한다던가, 해서 코로나 확진자 수용에 골판지 처방법을 내고, ‘아베노 마스크’는 유령 회사에서 만들도록 하고, 재난 지원금도 하청에 재하청을 내도록 한 아베였던 것이다.의과대학 교수들에게 들으니 코로나19는 당분간 종식되기 어렵다 한다. 오래 지속될 대유행이라면 지금보다 더욱 바짝 정신 차려야 하리라. 나라의 정치가, 정치 지도자의 인식이 정상으로 유지되기를 바라마지 않을 수 없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7-09

조해일 소설 ‘아메리카’

며칠 전 작가 조해일이 세상을 떠났다. 뉴스에는 났다지만 돌아볼 사람 별로 없는 조용한 타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조해일의 대표작 가운데 ‘겨울여자’라는 게 있어, 영화로 만들어져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필자가 고등학교 때쯤 일이었을 텐데, 거기 나오는 음악 ‘노예들의 합창’ 때문에 두고두고 인상에 남았다.세대를 따져 보면 작가의 위치가 쉽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조해일은 1941년생, 그러니까 필자가 이른바 1940년 전후 출생자 그룹으로 분류하는 작가군의 한 사람이다. 이 그룹에 이청준, 이문구, 현기영, 김원일, 조정래, 황석영 같은 작가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분도 있고 왕성하게 활동 중인 분도 있다.조해일은 중국 하얼빈에서 출생했는데, 이 점에서는 신경에서 출생한 황석영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둘 다 해방 전에 만주에서 출생하여 해방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해방과 6.25 전쟁을 겪은 한국 현실에 적응하며 성장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이었던 것이다.조해일은 지금껏 대중적인 작가, 상업적인 작가라는 말을 굴레처럼 쓰고 있는데, 작품들을 읽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작가라는 사람들 가운데 대중적, 상업적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되나? 그런 ‘순수’ 작가는 안 팔리는 작가거나 실력 없는 작가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정말 ‘순수’ 세계를 구축하는 고독한 작가 정신의 소유자는 많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앞으로 기회가 되면 조선작, 조해일, 최인호 같은 작가들에 덧씌워진 이 ‘금고아’를 시험해 볼 생각인데, 이미 대학원에서는 그런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조해일 작가의 별세를 계기로 필자는 그의 몇몇 대표작들을 다시 읽는다. ‘뿔’이며, ‘멘드롱 따또’며, ‘아메리카’같은 작품들이 그것이다. 다들 수준 높은 작품들이라고 생각된다. 그 가운데서도 ‘아메리카’는 문제작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가족들이 아파트 붕괴로 몰살당하는 아픔을 뒤로 하고 제대 후의 삶을 당숙에게 의탁하러 간다. 당숙이 미군 상대 클럽을 운영하는 곳의 이름은 ‘ㄷ’ 시인데, 이니셜을 살려 말하면 실제의 ‘동두천’쯤 된다.미군이 삶의 ‘원천’이 되어 있는 이곳에서 주인공 청년은 ‘양공주’들의 ‘별난’ 세상을 체험한다. 이 세계에 대한 풍부하고도 현실감 있는 묘사는 이 작가의 작가적 수업 과정이 탄탄했음을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작가는 가고 작품은 남는다. 필자 또한 그 작가의 한 사람임을 생각하며, 과연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다시 한 번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독서였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7-02

‘국뽕’

국뽕, 국뽕 하기에 무슨 말인가 했다. 신조어 같은데, 뭘까? ‘나라 국(國)’ 자에 ‘뽕’은 필로폰의 일본식 발음 ‘히로뽕’의 ‘뽕’이라고 해석된다. 그러니까 나라 사랑이 지나쳐 ‘뽕’을 맞은 것 같은 상태에 다다른 것을 가리켜 ‘국뽕’이라 하는가 보다.요즘 유튜브에 이른바 ‘국뽕’ 방송들이 넘쳐나는 추세다. 일본에 ‘혐한’이라 해서 ‘국뽕’의 왜곡된 형태가 판을 치고 있는데, 한국에도 반일, 염일 감정에 호소하는 방송이 한둘 아니다. 코로나19 유행에 ‘K방역’으로 성공을 거두다 보니 웬만한 선진국도 ‘우리’만 못하다는 인식도 확산되는 추세다.과연 나라나 민족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면 그 존재 가치를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 나라와 민족이라는 ‘대집합’ 공동체의 ‘타자’로 대상화되는 사람들은 언제나 불편과 고통을 느끼지만 그래도 이 ‘집합’의 논리는 강하고 커서 함부로 부정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일제 강점기 대일협력을 변호하고 일본에 의한 강점을 근대화의 필요악이었다 강변하는 ‘태극기 부대’도 시발점은 나라사랑, 민족 사랑에 있고, 여기에 6·25 전쟁을 일으킨 북한 정권의 민족 파괴에 대한 ‘적대감’이 바탕이 되어 있다.심지어는 1980년대의 이른바 진보 학생 운동도 ‘애국’을 내세워 ‘매국’ 세력을 타매하는 애국주의를 내세웠고, 지금도 이런 경향은 여전하다고도 할 수 있다. 진보와 민족 또는 국가라는 집합적 논리를 결합시킨 이 한국적 사상은 현실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을 형성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사실, 한국을 둘러싼 모든 나라들이 지금 ‘국뽕’ 몸살을 앓는 중이다. 일본은 아베의 극우민족주의, 중국은 시진핑의 중국 ‘대민족’주의, 미국은 트럼프의 배타적 미국 제일주의, 러시아는 푸틴 식 제왕주의 등등, 그리고 북한 역시 수령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조국을 옹위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국뽕’ 대세 속에는 불가피하게 사회 현실에 대한 허위적 해석과 은폐 같은 것들이 섞여 들게 마련이고, 특히 다른 나라와 민족에 대한 혐오, 질시, 비하 같은 온갖 부정적 감정들이 혼재되게 마련이다.한국은 어떠냐 하면 우리 역시 ‘국뽕’ 체질을 남들 못지 않게 내장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바야흐로 이 ‘국뽕’이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감에 따라 ‘급고조’ 중이다. 돌아보면 숱한 문제들을 안고 있는 우리들이다.나라사랑은 좋다.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 그리고 소수자들, 하위 계층 사람들은 더 많은 배려를 받아야 한다. 그들 없는 국가는 허위의 이념일 뿐이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6-25

코로나19속 기말시험 풍경

코로나19 ‘재유행’은 학교 캠퍼스를 더욱 썰렁하게 만들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어제는 그래도 ‘교수 발표회’라는 것을 사회적 거리 두기 속에서 치른 날이었다.대학교에는 학기마다 늘 거쳐가는 행사가 있게 마련이다. 3월이 되면 내가 몸담은 곳에서는 첫째 주나 둘째 주에 학과 전체 교수회의를 한다. 비슷한 시기에 학부 학생들과 대학원생들은 학과 설명을 겸한 신입생, 진입생 환영회, 개강 모임 등을 연이어 갖게 되며, 중간고사 끝날 때쯤 답사 여행을 가게 된다. 여름이 다가오면서 다들 지친 기색 역력하지만 한두 주만 기다리면 시험 끝나고 방학이다. 하지만 학생들, 교수들 만남은 끊기지 않는다. 교수들은 학생 ‘지도’ 명목으로 학생들과 점심식사를 하기도 하고 종강모임도 기다리고 있고 시험 끝나면 강의 과목에 따라 뒤풀이를 하기도 한다. 앞에서 말했듯 ‘교수 발표회’라 해서 교수들이 학과의 학생들 앞에서 자신의 공부를 논문 형태로 발표하는 행사도 있다.그런데 기말시험이 문제다. 수업은 줌(zoom) 앱으로 한다고 치는데, 시험은 또 어떻게 한다? 한 학기 내내 그 ‘비대면’이라는 소리를 지겹도록 들었는데, 시험마저 인터넷 화상 시험 형태로 치러야 한단 말이다? 책상 띄엄띄엄 ‘사회적 거리’ 두고 시험 치를 수 있는 ‘작은’ 강의는 그렇다 하지만 대형, 밀집 강의는 한곳에 모이는 것 자체가 무섭다. 결국, 인문대학에서는 기말시험 기간 내내 출입문을 일부 제한하고 출입 가능한 문에는 열화상 카메라와 소독제를 구비하고 시험생을 맞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 전체가 다 그렇게 하기는 어렵다고 봐야 한다.한편, ‘줌’으로 시험 보면 문제가 발생할 소지도 없지 않다. 이 ‘줌’ 앱은 비디오 중지니 음 소거니 하는 기능들이 있다. 회의용으로 개발된 이 앱에서 상대방이 말하는 시간에 자기 쪽의 화면이나 소리가 나가지 않도록 하는 기능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시험 치르는 학생이 자기 쪽 소리가 나가지 않도록 해놓고 화상에 나오지 않는 친구 학생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학생들의 양식에 맡겨야 하지만 시험은 부정 소지를 줄일 수 있어야 하는데, 실로 ‘인지’가 날로 발달하니 반드시 신뢰를 부여한다고 해서 다 되었다 말할 수 없다.아니나 다를까. 조교 선생이 우리 과에서 개설한 과목의 기말시험에 외국인 학생의 부정행위가 있었단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잠깐 생각해 보지만 다른 답은 없다. 시험은 대학생활의 가장 밑바닥 규범이다. 이게 허물어지면 다른 무엇을 얼마나 잘 해 놓아도 결과가 좋지 않다.학생들아, 코로나19 ‘비상시국’이라지만 시험 부정 행위가 웬 말이란 말이냐. 이런 때일수록 ‘정도’를 걸어야 하지 않으리?/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6-18

문제는 ‘나’의 바깥에도 있다

사람은 역시 여러 유형의 기질을 타고 나는 것 같다. 프로이트가 말하기를, 장미꽃 만발한 화원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탄성을 지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저 꽃도 곧 시들겠구나 하고 우울해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이것은 낙천가와 우울증 성향의 차이를 말해 주는 것이겠지만, 같은 현상을 대하고도 전혀 다른 해석에 기우는 경우는 다른 곳에서도 많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한 부류의 사람들은 원인을 여러가지로 따져 이런 원인, 저런 원인, 하고 양적인 비율을 할당하지만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그 가운데 오로지 하나의 근본적인 원인을 반드시 찾아내어 그것과 싸우고자 한다.생각해 보면 나는 2,30대 어디쯤까지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본질적인 원인을 찾아내서 그것만 해결하면 나머지는 얽힌 실타래 풀리듯 저절로 풀릴 것 같은 마법적인 사고에 빠져 있었다고 할까. 그후에는 그런 사고를 버리려 노력했다. 질 대신에 양을, 본질 대신에 문제를 이루는 원인 그룹을 찾아내서 비중이 높은 것부터 낮은 것까지 중요성을 그에 맞게 부여하려 했다.그럼으로써 사실 나는 후자의 사고법에 익숙했을 때 친했던 사람들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으니, 종교적 근본주의 같은 것으로는 현실 문제에 무력할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다.삶을 결코 많이 살았다고 할 수는 없는데도 나는 한때는 문제를 주로 내 안에서 찾는 이른바 ‘반성적’ 체질을 갖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남에게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해 볼 수 없었고 내 자신 아주 약점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공격적인 사람들, 사태를 호도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야말로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문제의 원인을 나와 내 바깥에서 고루 찾고 그 원인자의 중요도만큼 의미를 부여해서 함께 해결해 나가려 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여전히 나는 본질주의적 사고법에 기울어 있는 불균형의 인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간은 원래 그런 불완전, 결핍, 편향을 가진 존재이고, 그래서 조화니 원만이니 원융이니를 이상으로 삼는다. 문제는 나만에 있지 않고 내가 없어져도 문제는 남는다. 또 나에게만 이유가 있지 않기에 내 외부의 문제들과 싸우다 보면 내 삶이 좀더 나아질 수도 있다.며칠 전 파주 자택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는 마포 쉼터 소장님의 소식이 들렸다. 왜 ‘스스로’였나? 어디까지 진실일까? 생각하면서 짓눌리기 쉬운 나의 생명이라는 것을 위해 용기를 내서 싸워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를, 이 사회가 그런 힘 필요한 사람들을 더 잘 지켜줄 수 있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늘 문제에 직면해 있고 어떻게든 견뎌가며 나아가야 한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6-11

일본군 성노예 문제, 그리고 양국의 미래

윤미향 사태를 둘러싼 논란은 세상이 겉보기와는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한다. 또 아무리 좋은 명분을 가진 것도 시간이 오래 가며 상하지 않기는 참 어렵다는 것도 다시 한 번 깨우친다. 비단 윤미향이나 정의연대만의 일이 아니요, 정파적 이해관계를 떠나 우리 모두가 되짚어 볼 일이요, 사람살이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그런데, 이용수 할머니가 윤미향과 정의연대 문제를 제시하며 말한 것 가운데 인상에 남는 것이 하나 있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가 증오를 가르치는 것으로 끝나서는, 일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우리의 아이들, 한국과 일본의 미래는 반목과 갈등보다 평화를 지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이용수 할머니가 위안부라는 전시 성노예제의 피해 당사자이기 때문에 이 말은 함부로 폄훼할 수 없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그가 대리인에 불과하다면, 대리인이란 그 피해 당사자는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어긋남이 있을 수 있다는 당연한 의미에서 그 진정성을 한 번쯤 시험대 위에 올려봄직도 하다고 할 수 있고, 또 피해자가 언제, 어디서나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피해자의 말이라 해도 보편타당함에서 벗어나면 회의해 볼 수 있는 여지도 없지 않다.그러나 결국 사람의 삶이란 투쟁과 반목에서 벗어나 평화와 공존, 다른 말로 말해서 사랑의 마음을 품고자 할 때만 평온과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과거가 지배와 피지배, 착취와 수탈, 살육과 피해로 점철되어 있다 해도 미래는 과거를 딛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는 노력에 의해서만 더 나아질 수 있음은 물론이다.물론 한국과 일본에는 이 미래를 저해하는 인식과 행위들이 있다. 한국에는 가해자의 입장을 두둔하고 가해자의 입장이 자신의 입장이 된 기막힌 코미디를 진지하게 연출하는 사람들이 있어, 있는 것도 없다 하는 가해자의 거짓 논리를 한국어로 포장해 주는데 여념이 없고, 오히려 피해자들이 거짓말을 즐긴다는 마타도어를 유포한다.사실, 진실을 둘러싼 인식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한일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고 어둡다. 그러나 평화와 공존, 사랑이 유일한 해법이라면 이제 우리는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 지배자들과 그들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 논리를 넘어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전망을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의 운동이 배상 요구라는 피해의 물질적 측정 문제를 넘어서 더 넓고 깊은 설계를 해나가는 문제로 직결된다고 생각한다.결코 풀기 쉽지 않은 난제다. 그러나 과거를 딛고 미래를 여는 일은 ‘우리’가 ‘그들’보다 잘해 왔고 잘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이제 ‘탈식민’조차도 넘어서야 한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6-04

코로나19 마스크

그냥 근처에나 돌아다니려던 것이 나도 모르게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습관은 무섭다. 하기는 뭘 쓰려 해도, 읽으려 해도 전철 타고 철커덩거리며 앉아 가는 맛이 나쁘지 않다.그런데, 참, 마스크가 없다. 없으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에 약국으로 향한다. 오늘은 내 주민등록번호 끝자리 날은 아니다. 그래도 요즘에는 급히 살 수도 있다고 했다.과연, 약국에서는 컴퓨터인가에 무슨 기록을 하고 마스크를 선뜻 내어준다. 사천오백 원, 세 장짜리 한 묶음이다. 다행이면서도 약간은 서운한 느낌, 왜냐하면 한 장, 한 장 따로 포장한 마스크 여는 맛이 보통 아닌 것을, 이건 세 장을 하나로 포장한 상품이다.아쉬운 대로 마스크를 확보했다. 전철 역으로 들어서며 내 심각한 건망증을 잠시 탓해 본다. 학교 연구실 책상에도 두 장이 널려 있고 집에도 또 두어 장 걸려 있고 자동차 안에도 있고 가방 안에도 있는데, 또 사버린 것이다.지하철 안은 자못 한산하다. 책을 읽으려 했는데 정작 앉고 보니 책이 유튜브를 이겨내지 못한다. 휴대폰 이어폰을 꽂고 일본 코로나19 상황에 관한 뉴스를 듣는다. 전철 안에 서 있는 사람은 없고 모두 마스크를 엄숙히들 쓰고 앉아 있다.마스크도 참 제각각이군, 하는 재밌는 생각이 난다. 연예인 마스크라나, 얼굴 전체를 복면을 쓰듯 까맣게 가린 마스크도 있고 하얀 것도 있고 하늘색 것도 있다. 헝겊 마스크 안에 필터를 갈아 끼울 수 있도록 한 제법 비싼 마스크도 있고, 한 장에 오백 원씩 그냥 마스크 흉내만 낸 것 같은 마스크도 있다.오늘인가, 어젠가부터 마스크 안 쓴 사람은 버스나 택시, 전철조차 탈 수 없게 되었다. 승차 거부가 가능하다니 말이다. 비행기도 곧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 한다던가.그래도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정은경 씨의 질병관리본부가 살신하고 있지만 어제는 쿠팡과 마켓컬리 물류센터에서도 집단 감염이 발생했다. 학생들이 등교하면 더 큰 일도 일어날 수 있다.바야흐로 무산된 도쿄 올림픽 대신 코로나19 올림픽 시절. 어느 나라가 더 잘 막느냐 ‘게임’이다. 한국은 지금 수위를 달리는 중. 일본의 아베와 나팔수 언론들처럼 요행수를 바라고, 민족이 우수해서 덜 걸리고 있다는 식으로 안심할 수는 없다.다들 마스크를 썼다고 생각하니 뭔가 든든한 느낌이다. 더구나 오늘의 내 마스크는 KF94다. KF라는 말은 ‘Korea Filter’의 약자란다. 이 필터 등급은 KF80, KF94, KF99 등이 있고, KF94 마스크는 0.4μm 크기 미세입자를 94% 이상 차단해 준다는 뜻이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5-28

한국 때리면 저절로 방역 되나?

코로나19가 대유행을 하면서 ‘U 선생’들 가운데 한일 관계를 말하는 채널이 부쩍 늘었다. ‘애국주의’에 호소하는 방송들이다. 나라 사랑 열정에 불을 붙이는 데 일본 비판만큼 쉬운 방법이 없다. 누구라도 쉽게 ‘구독’과 ‘좋아요’에 손이 가 닿을 테다.덕분에 요즘 일본의 코로나19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다. 이 U선생들이 마치 올림픽 경기를 중계하듯 한일 간의 코로나19 상황을 비교해 주기 때문이다.그런데 이렇게 자주 일본 사정을 접하다보니 아베라는 일본 아저씨를 자꾸 만나게 됐고, 이윽고는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해 버렸다.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고나 할까.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라는 자가 이웃 나라와 국민을 향해 대놓고 온갖 마타도어를 일삼다니 말이다.일본 방역에는 한없이 게으르고 무능력할 뿐 아니라 온갖 은폐, 축소를 밥먹듯 하는 아베 아니던가. 그런 주제에 티비 앞에 나와서는, 긴급사태를 해제하더라도 일본은 한국처럼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자기 국민들을 점잖게 ‘훈계’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경솔한 저들과는 다르지 않냐고 말이다. 이태원 집단 감염 사태가 그렇게도 반가웠던 모양이다. ‘친절한 금자 씨’가 뭐라고 했던가. 아저씨, 너나 잘하세요. 그 넓은 안면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그 마스크나 좀 어떻게 해보시죠.그 자에 따르면 한국 사람들은 참 그렇게 약속도 안 지키는 족속인 모양인데, 그런 한국인들이 2011년 3월 11일 도호쿠 대지진 때는 재난 당한 일본인들을 위해 천억 원이나 성금을 보냈더란다. 정말 그랬었나? 그렇다면 이런 바보천치들이 있나. 사실을 말하면 그때 유튜브로 지진, 해일 장면들을 보며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 일본인들 또한 다 귀한 생명을 받고 이 세상에 온 게 아니던가.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일본 가 있던 조선인들은 살육 당하고 살육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아, 어둡고 괴로워라, 그 캄캄한 어둠 나날.이제 나도 아베와는 다른 도그마를 하나 넌지시 제출해 보련다. 한국인들은 약한 이들을 보면 돕지만 일본인들은 아예 짓밟으려 드는 족속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 좋은가? 진실이라고 생각되나?사실, 우리는 아베의 마타도어를 논박할 수 있는 근거를 역사적으로 정말 얼마든지 갖고 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인들은 아베 류의 식민주의적 거짓말을 논박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아베 씨, 우리는 당신들 얘기 따윈 아무 관심도 없소. 어디 그 비뚤어진 입으로 맘대로 떠들어 보시구랴. 그리고 말한다. ‘좋은’ 일본인들과 함께. 아베 씨, 한국을 때리면 일본은 저절로 방역이 됩니까? 그 시간에 뭔가 그럴 듯한 대책을 좀 마련해 보시지요.아베, 침묵. 그의 마스크가 성능이 너무 좋은 모양이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5-21

포스트 포스트콜로니얼,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법

코로나19 ‘이후’는 우리로 하여금 삶에 대한, 정치와 경제에 대한 감각과 정서를 뒤흔들어 놓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세계 상황’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나는 한 마디로 말해 ‘포스트, 포스트콜로니얼’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포스트콜로니얼’이란 ‘탈식민’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우리가 1945년 8·15 이후 겪어와야 했던 역사적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동안 우리는 일제에 의해 훼손된 우리말을 회복해야 했고, 문화와 전통을 되살려내야 했고, 대일 청구권을 확실히 행사할 수 있어야 했고, 또 일제 말기 강제 동원 노역을 당한 사람들,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간 여성들의 대가를 받아내야 했다.코로나19는 그러나 제국과 식민지의 변함없는 우열체계라는 모델을 무너뜨리고 있다. 그러니까 일본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허상과 달리 낡았고 무기력했고 뒤져 있었다. 우리는 새롭고 민첩했고 앞서 나가고 있었다. BTS가, ‘기생충’이, 반도체가 앞서 가듯이 방역체계도, 의료보험도, 위기에 대처하는 시민의식도 우리가 ‘앞서’ 있었다.이런 때에 이용수 할머니가 ‘정의기억연대’를 향해 어떤 매서운 일갈을 하고 나왔다. 그는 말했다. 그 돈 다 어디 갔느냐고. 그리고 지난 30년 투쟁은 증오를 키우는 투쟁이었지 않느냐고. 연이어 구차한 변명들이 줄을 잇고 심지어는 자녀 유학 비용까지 들추자 하고 고발까지 서슴지 않는 사태가 이어진다.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야 하나? 나는 포스트 포스트콜로니얼을 생각한다. 자신은 죄 지은 적 없다 발뺌으로 일관하는 범죄자를 향해 돈으로 죄값음을 하라는 방식이 이제까지 해법이었다면, 새로운 해법은 이런 것이다. 당신들의 범죄를 부인으로 일관하고 근본적 책임을 지지 않겠다면, 좋다. 당신들은 영원히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은폐하고자 하는 범인들로 남으라. 우리의 딸들, 우리의 할머니들은 이제 당신들보다 나은 국가를, 사회를 만들어가는 우리들이 보살피련다.‘정의기억연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백’하기 바란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우리의 포스트콜로니얼을 내려놓고 포스트 포스트콜로니얼을 향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우리가 즉각 식민지의 기억을 끊어버려야 한다. 아베와 그의 부끄러움 모르는 일본인들과 이 나라의 괴상한 동조자들을 저 어두운 과거 속에 묻고 역사의 새 장을 열어젖혀야 한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5-14

코로나 캠퍼스 풍경

5월 초까지 ‘비대면’수업을 하자던 방침은 이번 학기 내내 비대면을 유지하자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처음에는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나라들 상황 보면서 모두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5월 첫 날은 메이데이다. 그래도 학교에 나가 뭔가 일을 해보려 한다. 점심 지나 학교 캠퍼스에 당도하니, 녹색 5513번 시내버스 몇 대가 외부 차량 출입을 막고 있다. 5월 5일까지는 외부 출입을 제한하겠다는 것이고, 그 다음부터는 생활방역으로 옮겨가겠다 하던가?예년 같으면 3월부터 학생들로 붐볐어야 할 캠퍼스다. 그러나 모든 것이 스톱에 가까워졌다. 신입생 환영회도, 개강 모임도, 전체 교수 회의도 생략, 외국인 유학생 심사도 화상으로, 답사 행사도 2학기로 미루었다. 학교에 나와도 어딘가 쓸쓸한 기운이 감돌곤 했다.공휴일의 캠퍼스를 천천히 걸어본다. 오늘은 캠퍼스에 붙은 산 계곡을 올라가 볼 작정이다. 산은 언제라도 좋다. 벚꽃, 목련꽃, 진달래꽃 다 지고, 철쭉 한창인 위에 산복숭아꽃 수줍고도 옅은 빛이 그늘진 산 계곡에 하늘하늘 드리웠다.코로나19와 함께 시작된 비대면 수업은 별로 좋지 않았다. 비대면이란 얼굴을 직접 맞대지 않는 것이니, 화상 회의 어플을 가지고 수업들을 한다. 내가 사용한 것은‘줌’이라는 것인데, 다들 이걸 쓰는 기색이다. 미국 것인데 뭔가가 중국을 경유한다던가? 위험하다, 보안이 취약하다, 말들 많다.인터넷 인공 세계는 쏠림이 심하다. 한국산 ‘구루미’도 있다지만 한번 밀리면 상황 바꾸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더러 ‘스카이프’도 쓰기는 쓰는 모양.산 그늘진 계곡 따라 걷는 길이 호젓해서 좋다. 아직 몹시 가물다. 물 마른 계곡 바위 사이로 건너 건너 오른다. 요즘 일들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선거는 끝났고, 그러고도 어딘지 개운치 않고, 코로나19가 확진자 0에까지 다다른 게 천만다행이고, 북한의 수령은 살아 있었다던가? 이천에서 일어난 끔찍한 화재는 이 나라가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비대면 수업은 말 이상의 의미 전달이 어려운 방식. 듣고는 있는지, 의사는 통하는지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다른 친교 표현들, 유머조차 여간해서는 배제될 수밖에 없다. 2,30분만 지나도 긴장과 스트레스가 차는 것이 꼭 요즘 세상 같다고나 할까.계곡을 내려오니 마음은 나아졌건만 하늘은 아직도 잔뜩 찌푸렸다. 비라도 왕창 내리고 다 새로 시작해야 할 테다. 그러면 하늘이 새로 열릴 것 같다고 생각한다. 천만다행, 코로나19에서 벗어나고 있건만 뭔가 어딘지 석연찮기만 하다. 이 돌아가는 세상이 말이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