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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보헤미안의 음악정서를 세계화 하다

예술은 과학이나 수학 같은 이공 계열과는 다른 점이 있다. 맞고 틀리다의 정답이 없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로 예술의 역사를 통틀어 보면 많은 대립과 논쟁이 있어왔다. 그리고 이러한 논쟁은 에너지의 낭비로 끝나버린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조의 음악을 등장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예를 들면 음악사 백년전쟁이라고 불리는 브람스의 절대음악파와 바그너의 극음악파의 대립은 말러와 부르크너와 같은 새로운 음악형태를 출현시켰으며 러시아의 민족음악을 고수하던 ‘러시아 5인조’와 차이콥스키를 위시한 ‘러시아 서방파’의 대립은 프로코피에프와 쇼스타코비치와 같은 소비에트를 대표하는 사회주의와 러시아의 냄새가 강한 음악경향들을 만들어 냈다.19세기에서 20세기의 초기까지 외세의 지배를 받던 많은 약소민족의 작곡가들은 민족에서 음악의 소재를 찾아내고자 했으며 민요 등 민속음악의 연구를 통해 그 해답을 찾고자 했다. 우리는 그것을 국민주의 음악이라고 부른다.작곡가들의 이러한 민족주의적인 성향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과 성장배경의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작품에 자연스럽게 배어든 순수한 것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오늘 소개할 드보르작은 후자에 속한 경우이며 그 음악적 힘은 순수함을 등에 업고 있기에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어린 시절 학교의 음악시간에 드보르작을 처음 접하였는데 그 국적으로 되어 있는 ‘보헤미아’라는 지역은 너무나 생소했다. 드보르작은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에서 북쪽으로 30㎞ 떨어진 ‘네라호제베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룹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나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이 ‘보헤미안’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명칭은 사회적인 관습이나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방랑적이며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을 말하거나, 가난하고 하루하루 벌어 사는 노동자나 외국 이민자들을 지칭하기도 하였다.드보르작은 성장기에 다른 작곡가와는 다른 특이한 경험을 한다. 그는 작은 여인숙을 겸한 정육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정육점의 가업을 잇게 하려고 하였다. 그는 음악가의 꿈을 가지고 있었으나 아버지의 뜻을 묵살하지 않고 순응하여 정육점을 경영할 수 있는 ‘정육면허’를 가지게 된다. 드보르작의 부모는 그의 아들을 음악가로 키울 생각이 없었지만 장사를 위한 독일어 교육을 위해 집안에 들인 교사가 음악가였다. 드보르작은 다양한 국적의 손님들이 오가는 아버지가 경영하는 여인숙에서 자주 연주를 하였으며, 이것은 드보르작 자신도 오가는 여행객들의 음악을 자주 들을 기회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다양한 음악을 소화하여 자신의 프리즘으로 흡수하는 것은 이후 드보르작의 음악이 세계화될 수 있는 원천이 된다.16살이 되어 프라하의 음악학교에 진학하며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받게 되지만 졸업 후 34살이 될 때까지는 카페와 술집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등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에게 작곡가로서의 커리어가 시작된 것은 ‘오스트리아 정부 주최의 공모전’에 자신의 작품을 지원한 일이다. 이 공모전에서 당시 유럽 음악계의 보증수표였던 브람스는 드보르작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으며 브람스는 드보르작의 작품을 자신이 잘 알던 출판업자인 짐 로크에게 적극적으로 출판을 추천하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주는 연금도 추천하여 이후 안정되게 자신의 작품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드보르작은 쇼팽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의 작곡가였다. 첫 출판된 그의 작품에 작곡가명이 ‘안토닌 드보르작’이 아닌 독일식인 ‘안톤 드보르작’으로 표기되었는데 이것은 악보를 많이 팔기 위한 출판업자의 꼼수(?)였다고 생각된다. 드보르작은 강하게 항의하여 결국은 원래 자신의 이름으로 다시 정정하였다. 이후 1884년 영국을 방문하였을 때 케임브리지 대학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고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빈으로 이주하여 살도록 많은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한 것도 조국에 대한 사랑과 오스트리아 정부에 대해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던 동포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일제 강점기 말엽, 우리가 알고 있던 많은 작곡가들이 창씨개명을 하고 일제의 강제적인 징병과 차출을 찬양하는 곡을 쓰며 친일행적을 한 것과 애국가의 작곡가마저 친일 논쟁에 휘말려 있는 것을 본다면 드보르작이 한 행동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문양일 포항예술고 음악교사

2020-01-06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리움의 음악

쇼팽은 처음 바르샤바를 떠난 후 비엔나에 정착했으나 러시아 제국주의와 동맹이었던 비엔나 사람들은 쇼팽이 폴란드인이란 이유로 ‘저항한 국가의 작곡가’라며 그의 음악을 외면했다고 한다. 그 후 프랑스 파리로 음악 활동의 근거지를 옮기게 된다. 이 후 쇼팽이 영국을 방문하려 한 적이 있었는데 프랑스 비자가 없어 어려움을 겪게 됐다. 쇼팽은 망명자 신분이었던 것이다. 이에 러시아 정부는 폴란드가 러시아의 식민지이므로 쇼팽만 인정한다면 ‘러시아 국민작곡가’로 선정해 러시아 비자를 발급하겠노라는 제의했으나 쇼팽은 단호히 거절했으며 이에 러시아 정부에 의해 ‘귀국 금지령’이 선포돼 다시는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 것이다.쇼팽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하지는 못했지만 조국에 대한 사랑만은 그의 작품으로도 알 수가 있다. 폴란드의 민속춤인 ‘마주르카’와 ‘폴로네이즈’를 피아노곡으로 활용해 전 세계에 폴란드의 음악을 알렸으며 그가 창시한 피아노 장르인 ‘발라드’는 일정한 형식이 존재하지 않는 서사적이며 스케일이 큰 곡인데 이것은 폴란드의 애국시인 ‘아담 미키에비치(1798∼1855)’의 애국시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쇼팽의 작곡 능력이 절정에 달하던 당시 유럽은 벨리니(1801∼1835)와 로시니(1792∼1868))의 오페라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정치적 이유로 폴란드에서 망명한 주위의 많은 이들이 쇼팽에게 애국적인 오페라 작품을 쓰길 권했지만, “나의 눈과 머릿속에는 오직 피아노건반 만이 보인다”고 말한 그의 말처럼 흥행을 뒤로 한 채 피아노만을 위한 새로운 음악세계를 고집스럽게 만들어 낸 것이다.쇼팽은 그보다 한 해 늦게 태어난 프란츠 리스트(1811∼1886)와 자주 비교된다. 피아노를 전공하는 학생이라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두 사람이다. 리스트는 잘생긴 외모를 과시하기 위해 피아노를 연주할 때 청중들에게 최초로 옆으로 앉아 연주를 시도한 슈퍼스타적 기질이 많은 인물이었다. 리스트의 작품들은 개인 감성의 표현보다는 한계를 뛰어넘는 초인적 연주법으로 일관돼 있으며 여인들과도 숱한 스캔들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쇼팽은 리스트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의 일생을 통해 연주회는 50여회 밖에는 출연하지 않았고, 주로 소규모 모임의 살롱연주를 선호했다. 쇼팽의 음악은 구상된 작품이라기보다 현재의 감정을 표현해낸 즉흥적인 느낌의 곡이 많다. 그런 느낌을 가져야 효과적으로 연주할 수 있다.그의 피아노곡은 오케스트라나 다른 악기 편성을 위해 편곡을 통해 바꿔 놓으면 그 근본적인 악상이 손상되며 그 음악이 지니는 특수한 정서가 없어진다. 쇼팽에게 악상은 음악의 흐름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피아노만이 가장 효과적으로 연주될 수 있게 작곡 되어진 것이다.요즘 유행하고 있는 주크박스 뮤지컬과 비슷한 ‘레 실피드(Les sylphides)’라는 발레곡이 있다. 쇼팽의 피아노곡만으로 구성된 옴니버스식 발레곡인데 편곡은 글라주노프(1865∼1936)가 담당했으며 줄거리는 없다. 이 곡을 감상하면 쇼팽의 작품을 오케스트라로 편곡함에는 한계가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근대적인 형태의 최초의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는 ‘에튜드 op.25 no.11’일명 ‘겨울바람’을 두고 “오케스트라로서 표현할 수 없는 피아노로서의 가장 완벽한 곡”이라 평했다.쇼팽은 에튜드, 프렐류드, 발라드, 왈츠, 마주르카, 폴로네이즈, 녹턴 등의 피아노 형식에 특화된 장르만 창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천재적인 창의성과 감수성으로 피아노만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기법과 ‘템포 루바토’나 ‘헤미올라’ 등 특유의 릴렉스 기법을 통하여 피아노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고국을 떠나올 때 불안해했던 그의 예감대로 쇼팽은 죽을 때까지 고국 폴란드로 돌아가지 못했으나 그의 심장만은 돌아왔다. 그리고 그의 유언대로 장례식에는 모차르트의 ‘레퀴엠’과 그의 위대한 대작 ‘프렐류드의 op.28 no.4, e minor’ 가 오르간으로 쓸쓸히 연주됐으며, 그가 존경하던 J.S.바흐의 평균율 클라이비어곡집을 오마주하며 만들어낸 그의 작품, 전주곡처럼 그의 생도 너무나 짧았다. /문양일 포항예술고 교사

2019-12-16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리움의 음악

필자는 오래된 것을 좋아한다. 길을 걷더라도 잘 정돈된 프랜차이즈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보다 문패가 붙어 있고 대문에 녹이 쓴, 무엇이 나올지 모를 예측불허의 오래된 골목을 헤매기를 좋아한다, 경주의 첨성대 앞을 거닐자면 먼 과거에도 누군가가 나와 같은 자리에 서서 저 건축물을 바라보았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고 이 후에도 누군가 같은 자리에 서리라고 생각하면 세월의 무상함마저 느껴진다.클래식 음악의 매력도 이와 비슷한데 오래전 누군가가 작곡한 것을 악보를 보며 연주한다고 생각하면 그 과정들이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은 ‘무엇을 소유했는가’보다 ‘어떤 것을 경험했는가’를 더욱 중요시하며 자랑의 대상이 된다. 세월이 묻은 건물을 보거나 현재 상연되고 있는 뮤지컬 공연을 보고도 소중한 경험으로 여기는데 먼 과거에 만들어진 작품을 직접 연주하고 그 곡을 만든 이의 생각과 느낌을 공유한다면 일반적인 체험에서 느끼는 간접경험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필자가 피아노를 열심히 배우던 어린 시절, 유난히 만든 이의 감정이 느껴지는 곡들이 있었다. 바로 프레데릭 쇼팽의 음악이다. 쇼팽의 곡은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같은 다른 이들의 곡들과는 달랐다. 귀족적인 우아함과 도도함이 있었고 청년스러운 열정과 모험이 존재하였으며, 밤새 사랑에 이유없이 아파할만한 센티멘털함이 있었다.쇼팽은 여러 가지 고뇌를 가진 외로운 작곡가였다. 그가 연주활동을 위해 폴란드를 떠나 오던 날(쇼팽은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사랑하던 여인(콘스타치아 글라도코프스카)과도 헤어져야 했으며 다시는 조국에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즉 조국을 떠나는 것부터 결심이 쉽지 않았다. 친구들은 떠나는 쇼팽에게 조국의 흙을 선물하였으며 그의 예감처럼 살아생전에 돌아오지 못했다.쇼팽이 폴란드를 떠나기 전 연주회를 열었는데 이때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며 고국과 작별을 고했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그 전 해에 1번보다 먼저 작곡되었지만 출판이 늦어져 번호가 뒤바뀐 것이다. 쇼팽은 ‘피아노 작곡가’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피아노 전문 ‘싱어송 라이터’이다. 쇼팽의 작품 중 피아노곡을 제외하고 나면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곡밖에는 남지 않는다. 그래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두 곡은 매우 귀한 오케스트라 작품의 곡이다.많은 평론가들이 두 협주곡의 관현악 파트가 수준이 낮다고 평가하며 심지어는 ‘누군가에게 오케스트레이션을 의뢰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하지만 필자에게는 두 곡 모두 너무 아름다우며 청년 시절의 쇼팽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필자는 2번 협주곡을 더 좋아한다. 이유는 즉흥적인 쇼팽다운 특징이 더 많이 느껴져서이다. 하나 더 추천할 만한 오케스트라곡은 쇼팽 콩쿠르의 단골곡인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화려한 대폴로네이즈 op.22’인데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는 바로 그 곡이다.쇼팽은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작곡가가 아니었다. 당시 조국 폴란드는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분할통치를 받고 있었으며, 쇼팽이 떠난 지 1주일 후 독립을 위한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난다. 그가 조국으로 돌아갈 것을 고민한 흔적이 그의 편지에서 발견되며 돌아가 독립운동을 실천할 용기와 의지가 없음을 부끄러워한 것 같다. 하지만 다음 해 7월 러시아에 의해 바르샤바가 다시 함락되며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한 소식을 듣게 된다. 그 당시의 감정은 ‘에튀드 op.10 No.12 혁명’을 들으면 느낄 수 있으며 당시 쇼팽이 느꼈던 분노와 독립에 대한 열망이 음악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포항예술고 교사

2019-11-25

죽음마저 극복한 음악 구스타프 말러(下)

말년의 구스타프 말러.말러는 위대한 작곡가가 되기를 열망하던 친구의 비극적인 죽음을 보며 안정적인 음악가로서의 생활을 위해 지휘자가 되려고 결심한다. 그리고 당시 작곡가로보다 지휘자로서 더욱 명성을 얻는다. 그는 빈 필하모닉과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극장 등 최고의 무대에 서는 지휘자였으며 차이콥스키가 그의 오페라 ‘에프게닌 오네긴’의 초연을 직접 맡아줄 것을 부탁하는 등 지휘자로서의 커리어가 매우 높았다. 말러는 ‘언젠가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자신의 작품이 당시에는 기대만큼 평가받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필자뿐만 아니라 고전적 교향곡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 말러의 교향곡을 처음 들으면 대부분 난해하여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당시의 평가는 약간 달랐다. 오히려 말러가 사용했던 선율은 너무 단순하고 서민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문제는 선율이 단순한데 비해 화성의 메커니즘은 매우 복잡하고 악장의 구성이 확대되고 배치가 철학적 구성을 지니고 있는데다 연주 시간이 매우 길어 보통의 청중들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예술가의 시련은 같은 렌즈를 보더라도 시력에 따라 사물이 다르게 보이듯이 시대에 따라 받아들여질 수 있는 대중들의 스펙트럼이 다르다는 데 있다. 가장 복 많은 예술가는 시대의 스펙트럼과 자신의 작품이 일치하는 인물일 것이다. 말러의 작품도 당시에 외면당했으며 20세기에 들어와 유럽에 불어 닥친 반유대주의의 광풍으로 고의적으로 제외된 측면도 많다. 말러의 음악은 세기말적인 탐미주의가 가득하며 희망과 절망, 죽음과 부활, 열정과 염세주의 등 철학적이고 모순된 내용들로 가득 차 있으며 이전 교향곡 작곡가들의 서사적이고 논리적인 플롯을 완전히 벗어난다.그는 보헤미아의 유태인이었다. 당시 유태인들이 받던 차별에서 그도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칼리슈테에서 태어나 작은 농촌 마을인 이글라우에 이사해 성장했다. 이글라우는 당시 헝가리-오스트리아 제국의 군인들이 프라하에서 빈으로 이동하던 길목에 있었으며 이러한 환경적인 요소들은 말러의 음악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의 음악은 ‘교향곡 7번’ 5악장에 나타나듯 금관악기와 타악기의 ‘군악적인 요소’와 시골 마을에서 성장한 덕분에 ‘농민의 춤곡’인 란틀러(Landler)를 비롯한 민중의 춤과 관련된 요소들이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유태인의 종교의식인 ‘시나고그’의 영향을 받은 ‘유태인의 음악적 요소’들이 목관악기 곳곳에 나타난다. 말러는 아버지가 선술집을 운영해 거리를 떠돌던 장사꾼들이 자주 드나들어 어린 시절 그들이 즐기던 다양한 음악적 요소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말러의 작품에는 위에서 언급한 민중들의 생활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으며 이전까지 들을 수 없었던 새로운 음향으로 표현된다.필자가 가장 사랑하는 말러의 작품이 있다. 바로 말러의 ‘아다지에토’라고도 불리는 ‘교향곡 제5번’의 4악장이다. 말러는 뒤늦은 나이인 40세에 그토록 열망하던 20세 연하의 아름다운 여인 알마 쉰들러와 결혼한다. 그녀는 결혼 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작곡가였던 A.폰 켐린스키 등과 염문을 뿌리던 예술가들의 뮤즈였으나 말러의 적극적인 구애로 결국은 결혼한다. 결혼 6년 뒤 장녀가 사망하는 등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으나 이 곡은 그녀와 결혼하고 난 후 가장 행복한 순간에 작곡된 곡이다. 바그네리안적인 대규모 편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하프와 현악 합주로만 구성돼 사랑을 노래한다. 마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가 계속해 노래되며 사랑을 절정으로 이끌며 행복한 사랑을 노래하다가도 비극적인 운명을 암시한다. 현실적인 사랑을 넘어 죽어서도 계속될 것 같은 불멸을 노래한다.말러는 19세기 말 교향곡이 꺼져가려고 할 때 교향악의 새로운 미래를 제시하며 새로운 생명을 부여했으며. 교향곡의 형식은 전통을 따랐으나 그 음악적 내용은 표제적인 모습을 담았다. 베토벤이 음악에 자유와 정신을 심었다면 말러는 그가 경험했던 인간 본연의 모습들을 음악에 담았으며. “중요한 것은 동시대 사람들의 생각에 휘둘리지 않고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단호하게 가는 것이다”라고 그가 말한 것처럼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교향곡의 마지막 숨결을 이끌며 교향곡의 아름다운 가치를 묵묵히 세상에 외친 사람이다. /문양일 포항예술고 음악교사

2019-10-28

죽음마저 극복한 음악 구스타프 말러(上)

젊은 시절의 구스타프 말러.오시카 마사코가 쓴 ‘누구나 마지막에 꾸는 꿈,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다’란 책을 보면 죽음이란 누구나 한번은 겪어야 할 경험이지만 대부분이 원하지 않음에도 집을 떠나 병원에서 객사(?)하는 사람이 많은 슬픈 현실을 언급한다.필자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골목길에 초상이 났음을 알리는 근조등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죽음을 알리는 근조(謹弔)등은 빨강과 파랑으로 예쁘게 구성되어 기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으며 친구들과 신나게 놀다가도 근조등이 달린 문 앞을 지나갈 때면 본능적으로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어린 날의 기억이 있다.20세기 최고의 교향곡 작곡가로 불리는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1860∼1911)의 음악세계는 ‘죽음’을 얘기하지 않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죽음과 가까이 있었다. 1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으나 그 중 9명이 어린 시절 세상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말러가 15세가 되던 해 바로 아래 동생 에른스트가 세상을 떠난 일은 가장 큰 상처로 남았다.장례의식은 모순된 분위기가 있다. 슬퍼하는 유족의 오열 속에 손님들은 문상이 끝난 후 음식을 대접받고 서로 친목하고 인사하며, 웃고 즐기는 묘한 분위기다. 형제를 잃은 슬픔이 큰 말러에게 이러한 모순된 경험은 매우 특별한 경험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말러가 유년 시절 처음으로 작곡한 곡이 ‘장송곡이 포함된 폴카’였음에도 어린 시절 죽음의 경험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말러의 모든 교향곡에 ‘장송 행진곡’ 풍의 악장이 들어 있으며, 특히 ‘교향곡 1번의 3악장’에서는 동요를 캐논의 형태를 사용하여 장송곡으로 편곡하는 새로운 시도를 한다. 여기서 사용된 동요는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본 익숙한 동요인데 ‘프리레 자크’ 또는 ‘브루더 마르틴’ 등으로 불린다. 영어권에서는 주로 아이를 깨우는 노래로 쓰이며 “Are you sleeping, Are you sleeping”으로 시작되는데 동생 에른스트의 죽음을 애도하며 3악장에 동요를 단조화 하여 아이들의 장르인 동요와 죽음을 결합시키는 모순된 음악의 형태를 만들어 낸다.베토벤과 드보르작, 슈베르트 등은 9개의 교향곡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말러도 8번 교향곡을 작곡한 뒤 9번째 교향곡 착수를 앞두고 죽음의 딜레마에 휩싸였다. 그래서 아홉 번째 교향곡을 9번 교향곡이라 명명하지 않고 ‘대지의 노래’라고 불렀으며 중국의 한시를 텍스트로 사용하여 연가곡과 교향곡의 혼합된 작품을 남겼다. 이후 9번 교향곡을 완성한 후 10번 교향곡을 미완성으로 남겨 놓은 채 세상을 떠났으니 말러는 그가 우려한대로 9번 교향곡을 넘어서지 못했다.말러는 1884년 청년기인 24세에도 가까웠던 친구를 떠나보내는 죽음의 경험을 한다. 가장 친한 친구이자 음악의 동료였던 한스 로트(Hans Rott·1858∼1884)의 죽음이었다.말러의 친구 한스 로트는 작곡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었다. 그의 작품은 말러의 음악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만약 인생이 조금만 더 살았더라도 말러를 넘어서는 작곡가가 되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19세기 말은 베토벤을 계승하고 음악의 순수성을 지향하는 브람스를 필두로 하는 ‘보수파’와 리하르트 바그너(R.Wagner·1813∼1883)와 프란츠 리스트(F.Liszt·1811∼1886)를 필두로 극적인 음악을 지향하는 ‘개혁파’의 팽팽한 대립이 있던 시기였다. 한스 로트는 ‘개혁파’의 음악적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베토벤 대상’에 작품을 응모했을 때 뛰어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심사 위원이었던 보수파의 브람스가 집요하게 선정에 반대하여 탈락시켰다. 그리고 한스 로트가 교향곡 1번을 완성한 뒤 당시 빈 필하모닉을 지휘하던 한스 리히터에게 보여 초연을 추진했으나 브람스는 한스 리히터(Hans Richter·1843∼1916)를 찾아와 교향곡 초연의 반대를 설득했다. 결국 초연은 무산됐으며 이후 한스 로트는 괴로워하며 정신병에 걸려 25세의 젊은 나이에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초연이 무산된 로트의 교향곡은 그가 죽은 지 100년이 넘은 1989년 신시내티 교향악단에 의해 초연됐다고 하니 한 세기가 지난 뒤 빛을 보게 된 셈이다./문양일 포항예술고 음악교사

2019-09-30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본 순수의 음악 - 펠릭스 멘델스존

대문호 괴테(1749∼1832)는 “음악은 모든 예술 장르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라고 했다.하지만 음악가들에게는 음악이라는 예술의 형태에 늘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음악에는 구체적인 형태가 없는 것이다. 지금은 음향을 저장하는 매체가 있어 음악을 재생하는데 문제가 없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음악은 연주가 끝나면 실체 없이 증발하는 존재였다. 지금은 주로 생략되어 연주되지만 소나타형식의 제시부가 반복되어 연주되는 것도 1주제와 2주제를 기억해 달라는 작곡가의 소망이었다. 생텍쥐페리(1900∼1944)의 소설 ‘어린 왕자’에서 “꽃이 아름다운 것은 지기 때문이다” 라고 했듯이 음악은 화려하게 피었다가 청중들의 마음속에만 남아있는 꽃과 같았다.음악에 구체적인 이미지를 도입하고 싶어 하는 소망은 ‘표제음악’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지만 그 이전 ‘무지카 레세르바타’, ‘뮤직 페인팅’, ‘라이트 모티브’ 등 다양한 시도로 나타났으며 19세기 말에 와서는 ‘인상파 음악’으로 그 정점을 찍는다. 인상파 음악이란 쉽게 말해서 순간적인 영상을 음악으로 표현하려는 시도인데 19세기 말 영화가 발명되고 20세기에 유성영화로 발전하며, 구체적인 영상을 위해 음악을 작곡하게 되면서부터 음악의 형상화를 위한 노력들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작곡자는 펠릭스 멘델스존(J.L.F.Mendelsshon·1809∼1947)이다. 필자가 유년 시절 처음 접했던 멘델스존의 음악은 서곡‘헤브리데스(Die Hebridenop.26)’였다. 이 곡은 ‘핑갈의 동굴’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음악은 구체적인 이미지가 느껴지는 곡이다. 거친 바람이 부는 푸른 바닷가에 물새가 날고 있으며, 안개 낀 해안으로 외로운 배를 타고 황량한 섬으로 다가서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멘델스존은 실제 그림 실력이 뛰어나 훌륭한 풍경 수채화 작품들을 남기고 있으며 그 그림은 풍경의 어떤 특징을 나타내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선과 색의 조화를 추구한 작품들이다.그의 교향곡 제3번 ‘스코틀랜드(Scottish) op.56’도 이러한 회화적인 기법이 잘 표현된 곡인데 그의 나이 20세 때인 1829년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며 에딘 버러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오래된 예배당에 들러 “나는 믿는다. 내 스코틀랜드 교향곡의 시작 부분을 발견했다….”라고 했다. 이 부분을 보면 멘델스존은 시각적인 느낌으로 악상의 영감을 받은 듯 하며 이 곡의 첫 부분을 들어 보면 그 예배당이 어떤 모습을 하였을지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무리가 없다.멘델스존의 음악은 고정적인 음형이나 화음으로 이미지를 표현하려는 시도의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었으며 관현악에서 여러 악기의 조화로운 음색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나기에 더욱 가치가 있다.멘델스존의 어린 시절은 모차르트나 베토벤처럼 고달프지 않았다. 전 유럽을 상대하는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집안은 오케스트라를 운영할 정도로 부유하였고 가정에서 열리는 음악회에 참석하기 위해 철학가 헤겔, 시인 하이네, 작곡가 시포어, 훔멜 등 당대 예술의 거장들이 집에 자주 왕래하여 그들과 교류하며 당대 최고의 학문과 교양을 쌓았으며, 10살 무렵에 이미 정치가 케이사르나 시인 오비디우스의 책을 원어로 읽었으며 인문학뿐만 아니라 기하학, 수학, 지리학 등에서도 뛰어났다고 전해진다.멘델스존은 좋은 환경 뿐만 아니라 다양한 천재적인 지능과 재능을 타고 났으며, 모차르트의 어린 시절과 멘델스존의 어린 시절을 모두 겪은 괴테는 그 둘을 비교하며 “멘델스존에 비하면 모차르트는 혀 짧은 어린애에 불과하다”라며 그의 천재성을 극찬했으며 이러한 특징은 그의 극음악 ‘한여름밤의 꿈(Sommernachtstraum op.21,61-5)’에도 나타난다. 멘델스존은 17세에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을 읽고 깊게 감명을 받아 관현악 서곡을 작곡하는데 지금도 결혼식의 마지막 행진에 쓰이는 ‘결혼 행진곡(Wedding march)’이 포함된 전곡을 완성한 것은 17년 후인 그의 나이 34세 때이다.특이한 점은 극음악 ‘한여름밤의 꿈’ 전곡을 감상해 보면 다른 곡들과 서곡의 작곡 연차가 17년의 차이가 난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부분은 모차르트와 비교해 보면 매우 특이하다. 모차르트는 그의 17세 때의 음악과 30세 이후의 음악을 비교해보면 음악적인 내용이 매우 큰 차이가 난다. 음악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천재 작곡가로 모차르트와 멘델스존을 꼽는다. 모차르트는 ‘음악의 신동’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지만 멘델스존도 ‘19세기의 모차르트’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청소년기 이후 경험했던 세월의 격랑이 달랐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키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과 좌절을 되풀이했으나 멘델스존은 이미 태생적으로만 귀족이 아닐 뿐 최고의 신분에 있었기 때문에 둘의 음악은 확연히 다른 것이다.멘델스존이 겪은 최고의 고난은 자기가 그토록 사랑했던 4살 위 누이인 파니 멘델스존을 잃은 것이었다. 둘은 수려한 외모도 닮았을 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재능도 나눠 가졌다. 아니 오히려 누이인 파니 멘델스존이 더 나은 음악적 재능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훗날 펠릭스 멘델스존은 “누이가 자신보다 더 훌륭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다”고 고백했으며, 나의 ‘칸토르(음악선생님)’라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파니는 평생 400곡에 이르는 작품을 썼다고 전해지는데, 당시의 사회 풍조는 여성은 음악을 취미로만 즐길 뿐 전문적인 작곡가가 될 수 없는 풍토였다. 멘델스존의 아버지는 “여자가 있을 자리는 살롱”이라며 음악의 길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파니는 작곡가의 길을 포기해야 했으며 그녀가 썼던 6개의 가곡들은 동생의 이름으로 출판되기도 하였다. 이 가곡집에 실린 작품 중 동생의 작품보다 누이의 작품이 더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멘델스존 남매는 음악의 동지이자 서로를 가장 잘 이해 해주는 친구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파니 멘델스존은 1847년 5월 피아노를 연습하다가 손에 감각이 사라지는 걸 느꼈고 그 날 저녁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누나가 죽은 6일 뒤 소식을 들은 멘델스존은 실신했으며 장례식과 추도식에도 참가하지 못하였다. 순탄하기만 했던 멘델스존에게는 큰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내성이 없었는지, 이후 얼굴이 검게 변하는 등 늙고 등이 굽은 구부정한 모습으로 그의 모습이 추하게 변해 버렸다고 한다.사랑하던 누이가 죽은 6개월 후 그의 동생 펠릭스 멘델스존도 세상을 떠난다. 그의 나이 38세였다.멘델스존의 요절은 많은 안타까움을 준다. 작품도 뛰어났지만 음악사의 발전에 남긴 업적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는 바흐(1685∼1750)의 ‘마태 수난곡’을 이름 모를 푸줏간에서 누렇게 변색된 채로 발견해 많은 준비를 거쳐 완성된 연주를 함으로써 잊혀졌던 바흐의 음악을 소환하였을 뿐만 아니라 20세의 이른 나이에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면서 그 특유의 호기심과 도전정신으로 베토벤과 슈베르트 등의 숨겨진 작품들을 찾아내어 연주하였다.그리고 다른 작곡가와는 달리 그만이 물려받은 경제적인 능력으로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학교인 라이프치히 음악원을 설립한 음악 교육자이기도 한데 이곳은 쿠르트 마주어(1927∼2015), 레오시 야냐첵(1854∼1928) 등의 뛰어난 졸업생들을 배출해 낸 명문 학교이다. 또 환경이 좋지 않은 많은 음악가들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모차르트가 35세에 일찍 죽지 않고 더 오래 살았더라면 더 많은 걸작을 남겼으리라 아쉬워하지만, 멘델스존의 죽음은 개인을 넘어서 음악계 전체에 큰 손실이었으며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잊혀졌던 더 많은 곡들을 발굴하고 외면당했을 음악가들이 빛을 보았을 것이다.멘델스존은 어렸을 때부터 “시간을 헛되이 쓰지 말아야 한다”는 가문의 율법을 몸에 익혔으며 평생토록 습관처럼 그렇게 살아간 사람이다. 그의 인생은 여러 가지 풍요로 가득 했지만 자만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음악을 위하여 무엇인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자 짧은 생이었지만 평생 동안 노력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음악에는 순수한 시선으로 신이 창조한 위대한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경외의 정신이 있다. /문양일 포항예술고 음악교사

2019-08-26

고전파 시대의 진정한 음악의 하인-프란츠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1732∼1809)

자동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타이어와 브레이크라고 한다. 타이어는 어딘가로 잘 달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브레이크는 그것이 지나치지 않도록 느려지거나 멈추게 하는 것이니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서로 대조되는 기능을 가졌다고 볼 수 있겠다.필자는 ‘보수’와 ‘진보’의 개념도 이것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진보는 사회가 변화하여 발전할 수 있도록 추진력을 부여한다면 보수는 변화가 지나치지 않도록 과거로부터의 소중한 것을 지키고 중요한 것이 제외되지 않도록 충고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진보와 보수의 절충이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지금의 모습을 보면 그 날이 올 수 있을지 요원하기만 하다.필자는 음악의 역사에서 보수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 음악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요제프 하이든(F.J.Haydn·1732∼1809)이다. 하이든은 모차르트, 베토벤과 같이 고전파 작곡가이자, 비엔나 3인조로 불리지만 생애는 그들과는 매우 달랐다. 하이든의 아버지는 목수이며 어머니는 요리사인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러나 29세가 되던 1790년부터 약 30년간 헝가리의 명문 귀족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궁정악장으로 일하게 되며 자신의 천부적인 창의력과 근면함을 바탕으로 바로크가 물려준 기악형식의 가능성을 실험하게 된다.하이든은 100곡이 넘는 교향곡을 써서 ‘교향곡의 왕’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 교향곡은 명실상부하게 클래식 음악이 이룩해낸 최고의 성과이자 인류에게 주어진 축복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하루아침에 누군가가 발명해 낸 것이 아니었다. ‘심포니(Symphony)’의 어원이 ‘동시에 울리는 음’ 또는 ‘완전 협화음’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하였으며 이탈리아어 ‘신포니아(Sinfornia)’는 초기 오페라의 서곡에서 연주되는 짧은 기악 합주곡을 일컫는 말이었다. 하이든의 교향곡작품을 모두 살펴보면, 누군가의 일생을 어린 시절 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앨범을 보고 그 변화를 알 수 있는 것처럼 교향곡의 발전 과정이 요약되어 있다.하이든의 교향곡 작품은 순전히 그의 창작의지로만 작곡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신분은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하인’ 이었다. 그가 궁정악장으로 봉직하던 시절 하이든이 등장하는 회화 작품들을 보면 하인의 복장을 하고 있으며 이것은 주인의 요구대로 곡을 써야 했음을 의미한다. 에스테르하지 공작이 음악에 조예가 깊었으며 하이든의 음악과 자유의지를 존중해 줬다고는 전해지나 고용인의 음악경향을 따라야 했을 것이다.하이든이 궁정악단에 고용된 뒤 에스테르하지 공작에게 하루를 음악으로 표현해 달라는 명령을 받고 교향곡 6번(아침), 7번(점심), 8번(저녁)을 작곡하게 된다. 귀족이라는 계급이 태생적으로 안정적이며, 급진적인 변화를 거부하기에 음악성향을 베토벤처럼 작품 하나를 기점으로 명확히 진보적, 급진적으로 작곡하기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에스테르하지의 궁정악단을 사임하고 난 뒤인 1791년에 영국으로 건너가 흥행을 위한 교향곡을 쓰게 되는데 93번에서 104번까지의 총 12개의 교향곡이며 하이든을 영국으로 초청한 잘로몬의 이름을 따 ‘잘로몬 세트’ 라고도 불린다. 이 12개의 교향곡은 ‘94번 놀람’, ‘100번 군대’, ‘101번 시계’, ‘103번 큰북연타’ 등 대부분이 자신이 붙인 표제가 아니라 후세사람들이 붙이긴 하였지만, 하이든 특유의 유머와 재치가 듬뿍 들어간 개성 있는 명곡들이 즐비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하이든의 잘로몬세트 교향곡이 나온 시점이 모차르트가 이미 세상을 떠난 이후라는 것이다.우리는 고전파 음악가라고 하면 습관적으로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이라는 출생 순서를 떠올리며 음악양식도 순서대로 변화하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이든의 후기 교향곡이 모차르트의 후기 교향곡보다 늦게 발표된 사실을 인지하는 사람은 드물다. 주목할 것은 모차르트의 작품이 하이든보다 파격적으로 달라진 부분이 많이 있지만, 그런 작품이 발표되고 난 후에도 하이든은 자신의 교향곡 스타일을 고수하였다는 점이다.하이든과 모차르트는 24살의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서로 존경하였으며 상대의 음악에 깊은 경의를 표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모차르트와 그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현악 4중주의 창시자라고도 볼 수 있는 하이든을 위해 1785년 현악4중주를 위한 연주회를 열어 6곡의 작품을 하이든에게 헌정하였다. 이 연주회는 역사에 남을 만한 연주회였는데(당시에 사진이 없는 것이 아쉬울 만큼)연주자를 살펴보자면 제 1바이올린에 하이든, 제 2바이올린에 디터스도로프(K.D.V.Dittersdorf·1739∼1799), 비올라에 모차르트, 첼로에 반할(J.B.Wanhal 1739-1813) 등으로 구성되어 음악사에 기념비적인 현악4중주 연주회였다. 모차르트는 헌정사를 남겨 하이든에 대한 존경을 표현했는데 소개하자면 “당신이 저의 작품을 친절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결함이 있다면 너그럽게 보아달라고 간청합니다. 아버지의 편애 때문에 제 눈은 그런 결함을 못 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연주가 끝난 뒤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아버지에게 말하길 “신 앞에서 그리고 정직한 인간으로서 말하는데 당신의 아들 모차르트는 지금까지 내가 겪어봤거나 이름으로 아는 그 누구보다도 위대한 작곡가입니다.”라고 모차르트 음악에 대한 존경을 표하였다. 그리고 어디에서든 모차르트를 폄하하는 말을 들으면 그를 지지하는 말을 했었다고 한다.하이든의 음악사적인 공헌은 앞서 소개한 교향곡 형식의 확립 이외에 현악 4중주를 기악장르로 정립한 것인데 “심포니로 시작해서 현악 4중주로 마무리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대문호 괴테(J.W.V.Goethe·1749∼1832)는 현악 4중주를 “4명의 현자들이 나누는 훌륭한 대화”라고 표현했고, 저명한 음악학자 알프레드 아인슈타인(A.Einstein·1880∼1952)은 하이든의 현악 4중주를 “하이든 생애의 뛰어난 업적일 뿐만 아니라 음악사 전체를 통틀어 으뜸가는 업적”이라고 하였다. 현악 4중주는 단순히 악기 4대가 이루어 내는 합주일 뿐 아니라 악기 제각각 개성 있는 소리와 완성된 테크닉으로 자신의 음악을 표현해야만 효과적인 울림을 낼 수 있다. 오케스트라와 합창은 구성원이 자신의 소리를 자제하고 하나된 울림을 위해서 최소한의 ‘자기희생’이 필요한 것과는 다른 성격이다.하이든은 70곡이 넘는 현악 4중주를 작곡하였으나 그 중 53번 ‘종달새’의 1악장과 지금 독일의 국가로 사용되고 있는 ‘오스트리아 찬가’ 77번 ‘황제’의 2악장을 추천하고 싶다.하이든의 별명은 아버지라는 뜻의 ‘파파’라고 불렸다. 이것은 그의 성격이 넉넉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하고 아버지처럼 편한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파파’라는 그의 애칭처럼 그는 자신보다 진보적인 작곡가들에게 적대적이지 않았으며 1793년에는 베토벤의 음악을 듣고 그의 스승을 자처하는 등 지지자의 역할을 하였다. 필자는 이것을 천성적으로 타고난 하이든의 성격도 있지만 그의 살아온 과정 속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이든은 신분적,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안에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젊은 시절 ‘포르포라(N.G.Porpora·1686∼1768)’에게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웠는데 그에게 레슨비를 지불할 사정이 되지 않아 각종 심부름을 하는 등 몸종의 일을 자처하여 비용을 대신했으며 에스테르하지 공작에게 고용이 될 때까지 돈이 되는 일은 가리지 않고 하였다. 이런 힘든 배경으로 인해 다른 사람과 친분을 쌓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적대적인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 주의하였을 것이다. 하이든이 유언장을 작성할 때 옛 연인과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던 많은 지인들에게 골고루 유산을 배분한 장면을 봐도 그가 사람을 소중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하이든의 성격은 그의 음악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나며, 그에게 도움을 준 모든 사람들과 평생 동안 음악을 할 수 있는 운명을 부여한 신에게 진정으로 감사하였던 것 같다.그가 작곡한 마지막 교향곡인 104번 ‘런던’은 그를 초청하고 음악에 환호해 준 영국에 대한 감사와 존경이 담겨 있으며 69세가 되던 1801년에 발표한 오라토리오 ‘사계’에서는 계절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기 보다는 수확물을 내리신 신에 대한 농민의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였다.하이든이 인생에서 행한 유일한 실수는 ‘결혼’이었다. 모차르트의 음악 어법을 따라가진 않았지만 결혼한 과정은 모차르트가 사랑했던 여인의 동생이었던 콘스탄체와 결혼했던 것과 비슷했는데, 하이든도 그가 매우 사랑했었던 여인 ‘테레제’와 결혼하지 못하고 그의 언니였던 ‘마리아 안나 켈러’와 결혼하였다. 하이든의 자필 악보를 냄비 받침대나 머리를 마는데 사용할 만큼 음악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자신의 동생을 하이든이 사랑하였던 사실을 평생 동안 분하게 여겼다고 하니 하이든과는 어울리는 여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하이든은 ‘파파’라는 별명과는 어울리지 않게 자식이 없었다. 하지만 하이든은 인류에게 ‘심포니’와 ‘현악4중주’라는 최고의 선물을 주었다. 에스테르하지의 하인이 아니라 진정한 ‘음악의 하인’이었으며 거장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 준 고전파 시대의 진정한 거인이었다. /문양일 포항예술고 음악교사

2019-07-22

광활한 대륙의 우울한 외침? 차이콥스키

학생들에게 음악사를 가르치다 보면 다른 교과에 비해 좋은 점이 있다. 역사를 가르치는 이들은 다 느끼는 것이겠지만 기록된 역사는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어나 영어 등 다른 교과를 가르치는 분들이 급변하는 시사적인 내용이나 새로 나온 문학작품을 탐독하느라 골치를 앓는 모습을 보면 시사를 읽는 능력이 부족한 필자로서는 다행이라고 느낄 때가 많다.하지만 음악사를 가르치면 불편한 점도 있다. 과거의 내용, 특히 음악가의 생애를 다룰 때에는 문헌으로만 확인할 수 있기에 여러 가지 해석과 학설이 있을 수 있어 학생들에게 잘못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닌지 늘 의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작곡가의 어두운 측면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 중 한 명이 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콥스키(Pyotr L.Tchaikovsky·1840∼1893)이다.한 해의 마지막에 이르면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곡이 3곡 있다. 바로 베토벤의 ‘교향곡 9번 4악장 환희의 송가’와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그리고 차이콥스키의 발레음악 ‘호두까기 인형’이다. 앞의 두 곡들은 다소 장엄하며 인류의 평화와 소망을 노래하고 극적이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을 다룬다. 그러나 발레곡 ‘호두까기 인형’은 다른 두 곡들과는 성격이 다르다. 지극히 동화적이고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 음악도 매우 재미있으며 변화무쌍하며 이국적이다. ‘사탕요정의 춤’에서는 동심을 자극할만한 첼레스타 같은 특수 악기들도 나오는데 마치 ‘오르골’과 같은 효과를 내기에 아이들이 좋아할 만하다.차이콥스키 음악의 힘은 매우 강력하다. 선율은 아름답고 선명하여 한번 들으면 결코 잊지 못할 정도로 각인되며, 그 선율의 발전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확대의 효과를 자아낸다. 화성의 사용은 조바꿈이 많으나 지극히 극적이고 자연스러우며, 관현악법도 대규모의 악기 편성으로 압도적이지만 극적이며 효과적이다. 차이콥스키 음악의 주목할 점은 발레음악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는 발레라고 하면 그 발상지가 프랑스임에도 러시아의 키에프나 볼쇼이 발레단을 떠올리는데 그것은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등을 남긴 차이콥스키의 업적이라 볼 수 있다. 발레를 제외하더라도 음악만으로도 훌륭하며 세 곡 다 연주 시간이 길지만 짧게 구성된 하이라이트 음반이 많이 있으니 꼭 감상해보길 바란다.흔히 예술에서 남성과 여성의 특징은 다르게 나타나는데 남성은 감정적이고 열정과 폭발적인 디오니소스적인 에너지를, 여성은 이성적이며 단아한 아폴론적인 에너지를 표현한다 차이콥스키는 동성애자였으므로 이 두 가지 요소를 다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서유럽의 우아하고 지성적인 낭만주의적인 아폴론적인 음악유산과 디오니소스적인 중앙아시아의 야생적이고 광활한 표현의 이미지를 하나의 작품에서 결합시킨 최초의 작곡가였다. 19세기 러시아의 음악계는 루빈스타인(Rubinstein)형제, 안톤 아렌스키(Anton Arensky·1861∼1906)로 대표되는 서구 낭만주의를 따르는 이른바 ‘서구파’와 M. 무소르그스키(Muss orgsky ·1839∼1881), M. 발라키레프(Balakirev ·1837∼1910) 등의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음악적 재료와 감성으로부터 서구의 음악과는 다른 새로운 음악을 창조하고자 하는 러시아 5인조가 대립하는 시기였다.차이콥스키는 이 두 그룹의 어느 쪽에도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의 교향곡 1번 ‘겨울날의 환상’과 교향곡 2번‘소아시아(Ukraine)’‘현악 4중주 제 1번’ 등에서는 민요를 본격적으로 사용하였고 그 이후의 음악에서도 러시아의 정서를 표현하는 대작들을 선보이나 두 가지 양식이 융합되어 어느 한쪽으로의 확실한 색채를 가지지 않은 이유라고 생각된다. 정규적인 음악교육을 받지 않은 러시아 5인조 작곡가들에게는 서구 낭만파 음악에 늘 대립적이었으며 러시아 음악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서구음악은 ‘극복’되어야 할 존재로 여겼다.차이콥스키가 곡을 초연하고 나면 이들에게 신랄한 혹평을 받아야 했고 음악에 대한 냉철한 평가가 아니라 비판을 위한 비판이 쏟아졌다. 차이콥스키는 소심한 성격으로 평소 다른 작품에 대한 언급을 조심하였다 하니 그 마음고생이 매우 심했을 것이다.서구의 낭만파 음악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도 혹평은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피아니스트의 영원한 노스탤지어인 ‘피아노 협주곡 1번’ 은 안톤 루빈스타인(Anton Rubinstein·1829∼1894)에게 ‘바이올린 협주곡’은 레오폴트 아우어(Leopold Auer·1845∼1930)에게 심한 혹평을 당하며 연주불가 판정을 받았다. 특히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음악 비평가인 E.한슬릭 (Eduard Hanslick·1825∼1904)은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사상 처음으로 음악작품에서도 악취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라며 유례 없는 혹평을 퍼부었다. 이러한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두 그룹의 인물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음악양식에 그들이 적대하던 양식들이 복합되어 있었던 것이며 둘째는, 두 협주곡이 독주자에게 익숙한 협주곡의 형식을 탈피하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실제로 두 곡을 들어보면 솔리스트보다 오케스트라의 연주 부분이 더욱 강조되며 솔리스트를 돋보이게 해주지는 않는다.차이콥스키는 동성애자였다고 서두에 밝혔는데, 당시 그리스정교(동방교회)를 종교로 가졌던 러시아는 매우 보수적인 사회였다. 동성애는 받아들여질 만한 사회적 환경이 되지 못했으며, 발각될 경우 심각한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차이코프스키는 동성애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그가 37세가 되던 해인 1877년 9세 연하이며 모스크바 음악원의 제자였던 안토니나 밀류코바에게 열렬한 구애를 받아 결혼을 하기에 이른다. 소심했던 차이콥스키는 당시 오페라 ‘에프게닌 오네긴’을 작곡하던 중이었으므로 밀류코바를 극의 여주인공 타치아나로 투사하여 생각하여 구애를 거절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은 극복되지 못했으며 그는 결혼 2주째에 강물에 몸을 던지는 자살시도를 하였다. 결혼한 지 9주 만에 파경을 맞으며 밀류코바는 후에 정신 병원에서 쓸쓸히 죽어갔다고 하니 오페라 ‘에프게니 오네긴’의 여주인공 ‘타치아나’보다 더 슬픈 운명을 맞는 비운의 여성이었다.그러나 결혼생활이 파국으로 끝난 뒤 차이콥스키의 운명 교향곡이라 불리는 ‘교향곡 4번’과 ‘바이올린 협주곡’등 명곡들이 연달아 작곡되는데 이것은 그의 성정체성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인 후 자신의 정체성을 곡에 제대로 투사하였다고 생각된다. 교향곡 4번에서 운명적인 트럼펫 팡파레와 현파트는 고음을 오가며 끊임없이 울부짖으며 운명의 슬픔을 노래한다.그에게 진정한 인생의 연인은 후원자였던 철도 재벌 미망인 ‘폰 메크 부인’이었다. 그녀는 차이콥스키보다 9세 연상이었으며 차이콥스키 음악의 가치를 이해하고 진정으로 존경하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14년 동안 매년 6천루블의 재정을 지원하였으며 이 액수는 당시 러시아 보통 공무원의 2년 치 연봉에 해당된다고 하니 큰 액수였다. 지원의 조건은 절대 만나지 않으며 마주치게 되더라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것이었다. 실제로 두 번 만난 적이 있는데 두 사람은 눈만 마주치고 지나쳤다. 하지만 14년 동안 무려 1천200통의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그 편지의 내용에서 두 사람의 정신적인 교감을 확인할 수 있다. 고독했던 차이콥스키는 폰 메크 부인에게 정신적으로 크게 의지하였으며 그가 어린 시절 그토록 사랑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연상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매우 강하여 10살이었던 1850년 페테르스부르크 법률학교에 입학할 당시 그를 두고 떠나던 어머니에게 울부짖으며 마차를 따라 뛰어갔다고 한다. 일설로는 그의 동성애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어머니에 대한 어린 시절의 지나친 집착과 14세 때 어머니가 콜레라로 사망한 것에 정신적인 상처를 입어 어머니 이외의 여성을 숙명적으로 거부하는 이유가 되었다고도 한다. 1890년, 알 수 없는 이유로 재정 지원이 중단된 후 차이콥스키는 매우 괴로워했으며 죽는 순간에도 폰 메크 부인을 원망하는 말을 남겼다고 하니 상실감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차이콥스키는 “영감은 게으르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찾아오지 않는다. 게으름은 인간의 강한 습관이지만 그것에 극복하지 않는 것이 예술가의 의무이다”라고 말하였다.19세기의 러시아는 예술적 환경이 서유럽과 달라 매우 척박하였으며 자신의 미래를 음악에 투자한다는 것은 무모한 모험이었다. 하지만 차이콥스키는 엄청난 노력과 운명의 극복으로 이전에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창조하였으며 러시아의 음악어법을 세계에 데뷔시킨 거대한 대륙의 거장이었다. /문양일 포항예술고 음악교사

2019-06-24

영원한 방랑자의 음악-슈베르트

청춘을 지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젊은 시절을 그리워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돌이켜 보면 젊은 시절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을 동일시하며 밤 세워 이유 모를 아픔으로 밤을 세는 그런 시절이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으로 청소년들이 ‘속앓이’를 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하지만 필자는 젊은 시절, 음악으로 인해 아픔으로 밤을 보낸 경험이 있다. 바로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1797-1828)의 음악 때문이었다. 특히 가곡집 ‘겨울 나그네(Winterreise) D.911’의 24곡으로 구성된 곡들마다 실연으로 인해 방황을 선택한 고뇌하는 영혼의 아픈 모습이 녹아 있으며 그 속에서 구원을 찾고자 하는 희망의 메시지가 보인다. 이 곡은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제목이 잘 못 번역되었다. ‘겨울여행’으로 해석되어야 정확하지만, 곡을 감상해 보면 오역된 제목이 오히려 더 잘 어울린다.이 곡의 가사는 슈베르트의 친구였던 시인 ‘빌헬름 뮐러(Wilhelm Muller,1794-1827)’가 당시에 겪었던 실연의 아픔을 시로 표현한 것을 슈베르트가 책상 위의 원고를 발견하고 연가곡이란 모노드라마로 완성한 것이다. 슈베르트의 가곡은 성악만 노래하지 않는다. 피아노는 반주의 위치를 넘어서 때로는 손을 잡고, 때로는 경쟁하며 극적인 드라마를 표현하는데 24개의 곡 모두가 아름답고 뛰어나다. 특히 1곡인 ‘잘자요(Gute Nacht)’ 와 5곡인 ‘보리수(Der Lindenbaum)’ 11곡인 ‘봄의 꿈(Fruhlingstraum)’ 은 사랑을 아름답게 노래하며 13곡 ‘우편마차(Die Post)’ 18곡 ‘폭풍우의 아침(Der Sturmische Morgen)’은 슬픔 속에서도 영혼의 구원을 갈구하는 희망이 엿보이는 곡이다. 전곡을 감상할 시간이 부족하다면 앞 서 소개한 다섯 곡은 꼭 들어보길 권한다.그의 대표적인 작품이 ‘미완성 교향곡’인 것처럼 그의 인생도 다른 사람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31년’의 짧은 삶이었다. 다른 작곡가에게도 미완성으로 끝난 작품이 많지만 ‘미완성(Unfinished)’이란 제목으로 그의 교향곡이 사랑받는 이유가, 그의 인생 또한 이 교향곡의 제목과 매우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인생에는 빛과 어둠의 양면성이 있었다. 어두운 면은 바로 가난과 열등감이었다. 그는 콤플렉스가 많았다고 한다. 키가 매우 작았으며 시커먼 피부에 외모가 너무나 볼 품 없었다. 그리고 가난하여 평생의 대부분 자신의 피아노를 가져보지 못했다. 1823년 그의 자작 연주회가 성공을 거두어, 적지 않은 돈을 벌어 그토톡 원하던 자신의 피아노를 장만하였으나 그 해 11월 세상을 떠나 그는 일생동안 자신의 피아노를 8개월밖에는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기타로 작곡된 작품들이 매우 많으며 실제로 가곡 작품들 중 기타 반주가 피아노보다 더 잘 어울리는 곡들이 매우 많다.그리고 그의 인생에서 밝은 면은 바로 친구들이었다. 알고지내는(?) 친구들이 아니라 슈베르트의 재능을 사랑하고 미래를 걱정해주는 진정한 친구들이었다. 그의 친구들은 당시 빈의 예술문화계를 이끌어 가던 다양한 장르의 전문가들이었으며 슈베르트의 작품을 이해하고 사랑하였으며 작곡가로서의 슈베르트를 세상이 알아주길 바라는 높은 예술적 소양을 가진 친구들이었다. 당시 출판업이 활발하여 높은 인세 수입을 올리는 작곡가들도 있었으나 슈베르트는 경제적인 수완이 거의 없었다. 이에 친구들은 밤마다 슈슈베르트의 초상.베르트의 사적인 음악회를 열어주기로 계획한다.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즉 ‘슈베르트의 밤’이라고 부르며 일주일에 두어번씩 사교적인 연주회를 열어 어쩌면 발표되지 못하고 사라질 뻔한 많은 작품들이 이 연주회를 통해 발표되었으며, 이 밤의 음악회는 슈베르트에게 삶의 큰 삶의 활력이 되어 다음 작품을 구상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이유를 주었다. 슈베르트의 친구들 중 ‘프란츠 폰 쇼버’는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 문학에 정통하여 모임에서 독일 문학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 덕분에 슈베르트는 새로운 시를 접해 끊임없는 영감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며 당대의 유명 성악가 ‘요한 미하엘 포글’은 슈베르트 보다 24살이나 많았지만 슈베르트의 신작들을 모임에서 꾸준히 연주하여 슈베르트와 작품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슈베르티아데의 모임에 화가들도 참석하여 당시의 그림들이 제법 많이 남았 있는데 그 그림에서 피아노를 치는 사람은 슈베르트이며, 노래 부르는 사람은 포글이다.슈베르트는 감성과 떠오르는 찰나의 영감으로 곡을 만드는 작곡가였다. 그의 작품에는 베토벤의 작품처럼 환희에 찬 승리나 기승전결의 서사적인 구조가 중요하지 않다. 주로 순간적인 악상으로 작곡하였으며 곡을 쓰는 시간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악상이 떠오를 때면 친구와 식사 중 메뉴판에도 음표를 그렸으며 잠을 자던 중 악상이 떠올라 밤새 작곡한 일도 많았다.계획적으로 곡을 쓰지 않았으며, 새로운 곡이 떠오르면 바로 착수하였기에 곡을 쓰다 다음으로 미루는 경우가 많았으며 건망증이 매우 심해 자신이 쓰던 곡을 잊어버린 경우도 많아 미완성 교향곡 이외에도 완성되지 못한 작품이 많이 남아있다.이와 같이 규칙적인 생활이 되지 않았으므로 그가 가졌던 유일한 직업이던 초등학교 교사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교사를 그만 둔 후 가난한 생활은 더욱 심해졌으며, 그가 사랑한 유일한 연인이었던 ‘테레제 그루프’와도 그녀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로 헤어지게 되었다. 이 후 슈베르트에게는 ‘음악과 친구’ 두 가지만 남게 되었다.슈베르트는 베토벤과 거의 동시대를 살았다. 그가 그토록 존경하던 베토벤이 사망한 후 일 년 후에 그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슈베르트의 음악을 베토벤보다 훨씬 이후의 작곡가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베토벤의 음악과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는 것인데 그것을 슈베르트 음악의 ‘여성성’과 ‘감수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당시의 음악에서 베토벤은 대형으로 기획되어 제작된 블록버스트 음악이었다면 슈베르트의 음악은 드라마가 잘 만들어진 독립영화였다.슈베르트가 살던 시대는 정치적으로 안정된 시대가 아니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총리 메테르니히(Klemens F. von Metternich·1773-1859)체제에 의해 정치적 자유에 대한 열망이 억압되고 언론의 자유가 통제되던 독재의 시기였다. 나폴레옹 전쟁 사후 처리가 논의되던 빈 회의가 열렸던 1815년부터 이 후 약 30년간의 시기를 ‘비더마이어(Biedermeier)의 시대’ 즉 자유와 해방 같은 표현은 금지되고 평범한 소시민적 삶을 추구하는 시대라고 얘기하는데 베토벤이 교향곡 9번 4악장에서 쉴러의 시를 ‘자유의 송가(An die Freiheit)’로 연주하지 못하고 ‘환희의 송가(An die Freude)’로 제목을 바꿔 발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시기의 작곡가들은 예술의 주제를 외적인 사회현상에서 찾기 보다는 주관적인 작곡가의 내면의 감정에서 찾았다. 즉 안락하고 안정적인 시민 문화를 찾던 시기였다. 그래서 당시 가장 활기를 띤 장르가 소규모의 음악인 실내악과 예술 가곡이었다.요한 미하엘 포글의 초상.슈베르트는 베토벤을 닮고 싶어했다. 그는 시에 음악을 붙이는 예술가곡을 무려 650여곡이나 작곡하였지만 베토벤과 견줄 만큼 많은 기악곡들도 남겼다. 하지만 감상해보면 베토벤의 음악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슈베르트의 실내악곡은 악기로 연주되는 가곡이라고 보면 된다. 악기의 표현과 효과에 집중하기 보다는 악기특유의 음색으로 무엇인가를 노래하려고 했다. 필자가 가장 즐겨듣는 슈베르트의 가곡은 ‘그대는 나의 안식(Du bist die rhu D.776)’이다. 이 노래를 들을 때면 누군가에 기대어 지친 영혼을 쉰다는 느낌을 받는 편안한 곡이다. 슈베르트의 기악곡에서도 이러한 느낌을 받는다. ‘피아노 트리오 D.929 2악장 Andante con moto’,‘아르페지오네 소나타 D.821’과 같은 실내 기악곡을 감상해 보면 악기로 연주되기 위해 작곡되었지만 듣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가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너무나 아름답고 호소력이 강한 곡이다.슈베르트의 음악은 위로받기에 좋은 음악이다. 그의 음악에는 열광보다는 감동이, 장엄함보다는 부드러움이 있다. 그는 친구들을 좋아했고 친구들과 함께했던 순간만큼은 외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음악을 이해하는 이들이었기에 음악을 같이 할 수 있어 더욱 행복했을 것이다. “벗이 애꾸눈이라면 나는 벗을 옆얼굴로 바라볼 것이다”, “진정한 친구를 만든다는 것을 행복이다. 그리고 아내를 진정한 친구로 만든다는 것은 더욱 큰 행복이다” 이 말은 친구를 좋아했던 슈베르트가 남긴 말이며, 그가 어떤 사랑을 하고 싶어했는지도 잘 녹아 있는 말이다. /문양일 포항예술고 음악교사

2019-05-27

겸손과 성실함이 빚어낸 위대한 음악?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학생들과 음악사 수업을 하던 중 다음과 같은 토론 주제를 준 적이 있다.대작곡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가?결론은 첫째, 많은 곡을 작곡하여야 한다. 둘째, 다양한 장르의 곡을 작곡하여야 한다. 셋째, 미래의 양식을 지향할 수 있는 진보적인 형식이 있어야 한다, 등이었는데 조건에 맞는 작곡가를 얘기하다 보니 가장 이 조건에 걸 맞는 작곡가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1685∼1750)였다. 현재 남아있는 작품 번호만 1천100여 개에 달하며 그가 활동하였던 바로크 시대는 출판업이 활성화 되지 못하여 악보의 보존과 유통이 제한적이었던 시대였기에 실제 분실된 악보를 추가한다면 그 곡의 수는 훨씬 뛰어넘을 것으로 예상된다.악보의 출판이 활성화 되고 작곡가가 작품의 인세를 받기 시작한 시기는 베토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시대부터이니 바흐뿐만 아니라 다른 바로크 작곡가들의 유실된 악보도 많을 것이다.바흐의 작품들이 내용적으로 완벽하고 평생 동안 독일을 떠나지 않고 신앙의 힘으로 작곡에만 전념하였던 그였기에 음악에 매료되어 그의 인간적인 부분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바흐도 불행했던 어린시절을 보냈다. 막내였던 그는 10살 이전에 그의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나 장남인 첫째 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Johann Christoph Bach·1671∼1721)에게 양육되었으며 그가 35세가 되던 해 첫째 부인이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두 번째 부인인 마리아 막달레나에게까지 총 20명의 자식들이 있었으나 그 중 절반이 영유아기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그의 나이 38세인 라이프치히의 성토마스 교회에서 활동하고부터는 과도한 교회 업무로 막중한 음악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바흐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주목받지 못했다. 라이프치히의 성토마스 교회의 음악가를 뽑는 경쟁에서 그는 텔레만(G.P.Telemann·1681∼1767)과 그라우프너(J.C.Graupner·1683∼1760)에 밀렸으나 앞의 인물들이 과도한 업무를 이유로 사임하는 바람에 시의회의 ‘가장 우수한 인물을 얻을 수 없어 중류급의 음악가로 임명해야 한다’라는 다소 모욕적인(?) 성명과 함께 비로소 성토마스 교회의 칸토르로 임명되는, 지금으로는 믿지 못할 사실이 있다.1729년에 초연되었던 ‘마태수난곡’이 이후 100년간 잊혀졌다가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1809∼1847)에 의해 다시 무대 위에 세워졌으며, 20세기 최고의 첼리스트 카잘스(Pablo Casals·1876∼1973)에 의해 1889년 바흐의 6개의 무반주 첼로 조곡이 200년만에 발견된 것은 극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이 후 카잘스는 고백하기를 “이 후 12년간 매일 밤 그 곡을 연습했지만 그 중 한 곡이라도 무대에서 연주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결국 25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연주를 해도 되겠다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이 후 이 곡을 발굴한지 47년이 지난 1936년이 되어서야 녹음을 했다고 한다. 현재 이 곡은 첼리스트들의 독주회에서는 절대 빠지지 않는 불멸의 곡이 되었다. 독일의 근대 작곡가 막스 레거(J.B.Max Reger·1873∼1916)는 “작곡가와 돼지는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죽고 난 뒤에야 그 가치를 알 수 있다”라는 재미있는 말을 남겼는데 동시대에 살면서 그 음악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말해주는 문구다.바흐의 인생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버지가 되고자 노력했던 사람임에 분명하다.첫번째 부인을 잃은 다음 해인 1721년, 그의 나이 36세에 새로운 아내를 맞이하게 된다. 16세 연하의 아름다운 여인이라 전해지며 그녀의 이름은 ‘안나 막달레나’였다. 그녀는 궁정악단의 가수였으며 남편의 재능을 존경하고 이해할만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악보를 사보하는 솜씨가 좋아 바흐의 작품을 자주 사보하였다고 전해진다. 바흐는 이 사랑스런 아내에게 두 권의 작품집을 헌정한다. 바로 ‘안나 막달레나 바흐를 위한 음악노트’라는 작품이며 뛰어난 연주 실력을 가지지 못한 그녀를 위한 작품이기에 누구나 연주하기 쉬운 건반 작품집이다. 이 곡 중 영화 ‘접속’의 OST로 유명한 ‘어 러버스 콘체르토(A Lover’s Concerto)란 팝송으로 편곡되어 더 잘 알려진 ‘미뉴에트’도 포함되어 있다.바흐는 자식들의 음악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다. 정기적으로 가정음악회를 열어 음악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그의 장남이 10살이 되던 1720년에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를 위한 소품집’을 작곡하여 그의 아들에게 선사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교육을 위해 작곡된 것이었다. 그의 가문이 200년간 약 60여 명의 작곡자를 배출한 뛰어난 음악가문이기도 하였지만 그의 자식들 중에는 음악사에 남을 만한 걸출한 인물이 세 명이나 있다. 장남이었던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W.F.Friedemann Bach·1710∼1784)’와 특히 둘째였던 ‘칼 필립 에마뉴엘 바흐(C.P.E Bach·1714∼1788)’는 전고전주의 양식을 이끈 감정과 다양식의 대가였으며 가장 유명했던 막내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J.Christian Bach·1735∼1782)’는 런던 바흐라고도 불리며 그의 부친인 J.S.바흐가 재조명되기 전에는 당시 ‘바흐’라고 하면 이 인물이 지칭될 만큼 아버지 보다 더 유명한 작곡가였으며 모차르트와의 우정이 매우 깊었다고 전해진다.J.S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라는 그의 별명처럼 후배 작곡가들에게 성경과도 같은 절대적인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200곡에 달하는 칸타타와 그의 수난곡들은 합창곡 작법의 전형으로 여겨지며, 2권의 ‘평균율 클라이비어곡집’은 각각 24개의 장조와 단조로 된 전주곡과 푸가로 구성되어 피아노곡의 구약 성서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현재에는 24개의 장단조가 모두 자유롭게 작곡되어지나 바로크 시대에는 그렇지 못했다. 일부의 조성들만 완벽하게 인식되어 사용되어 졌는데 바흐는 두 번에 걸친 24개의 클라이비어 곡집으로 모든 조성들을 완벽하게 실험하여 작품으로 만들어 놓았다. 필자는 바흐의 작품을 생각할 때마다 인류 최고의 건축물인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연상하곤 한다. 그 규모의 광대함과 빈틈없는 구조는 현대의 건축물조차 머리를 조아리게 만들며 몇 천년 동안 굳건히 서 있다. ‘세상의 모든 음악들이 없어지더라도 바흐의 평균율 피아노 곡집만 있으면 다시 원래대로 복구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만큼 완벽한 음악적 구조와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바흐 이후 이러한 작품을 흉내낸 작곡가 조차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바흐에 의해 완벽하게 완성된 푸가 기법은 이 후 후대 작곡가들이 푸가 기법으로는 바흐라는 큰 산맥을 넘을 수가 없기에 작품의 일부를 표현하는 기법으로만 제한되어 작곡되는 현상들이 나타난다.바흐의 말년도 그리 평탄치는 않았다. 바흐의 마지막 작품은 특이하게도 개인을 표현한 예술작품이라기 보다 학습서의 성격을 가진‘푸가의 기법(Die Kunst der Fuge BWV.1080)’이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쓰면서 좋지 않았던 바흐의 눈이 완전히 멀어버린 것으로 예상된다. 바흐는 이 작품을 통해 후세에 자신이 구사할 수 있었던 푸가기법을 모두 전수하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되며 이 작품은 결국 끝까지 작곡되지 못하고 미완성으로 남았다. 아쉽게도 그 곡을 다른 사람의 힘을 빌어 완성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소명이 여기까지 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바흐는 신이 자신에게 허락된 그 순간가지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다.바흐는 신 앞에서 겸손했다. 자신이 작곡하던 작품을 끝내고 난 뒤에는 오선지에 SDG란 약자를 적었는데 풀어쓰자면 ‘Soli Deo Gloria’로, 해석하자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신에게서 잠시 빌려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음악에는 구조적인 완벽함 속에 인간적인 따스함과 신 앞에 선 겸손함이 존재한다. 바흐의 작품은 현재 재즈 연주가들이나 락커 등 클래식 이외 다른 장르의 뮤지션에게 가장 많이 편곡되어 다른 버전으로 연주되어 진다. 바흐의 곡은 어떻게 편곡을 하더라도 너무나 잘 어울린다고 하며 실제로 원곡보다 편곡된 버전이 더 사랑받는 특이한 작곡가이다. 이유는 바흐의 음악은 악기가 지정되어 표현되기 보다는 성부자체로 표현되어 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필자는 생각한다. 바흐의 음악은 신이 인간에게 들려주고픈 음악의 모양과 가장 닮아 있는 예술작품이었으며, 신이 부여한 능력을 타고난 권리가 아닌 의무이자 소명으로 생각하고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최선을 다하여 실천한 진정한 음악의 장인이었다./문양일 포항예술고 음악교사

2019-04-22

자유와 투쟁 그리고 성찰의 음악-L.V.베토벤

모리스 바링(1874∼1945)이 두 의사를 등장시켜 만든 가상의 유명한 대화가 있다.의사1: 임신중절에 관한 견해를 듣고 싶소. 아버지는 매독환자이고 어머니는 결핵에 걸렸소. 이미 자식을 넷이나 낳은 경험이 있는데 첫째는 맹인, 둘째는 사산, 셋째는 농아, 넷째는 결핵에 걸렸지! 당신이라면 어찌하겠소?의사2: 임신중절을 해야겠군요.의사1: 그렇다면 당신은 베토벤을 죽였소.위의 이야기는 ‘베토벤 오류’라고도 불리며 많은 버전의 다른 이야기로도 소개된다. 낙태 반대론자들에 의해 주로 인용되는 이야기인데 사실과는 다르다. 베토벤은 다섯째가 아니라 형이 유아 때 사망했기에 장남이었으며 사실보다 과장된 이야기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이 이야기의 사실관계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왜 베토벤인가 하는 것이다. 베토벤은 많은 어려움을 가진 작곡가였으며 그의 작품에는 그것을 극복하고 인류의 창대한 미래를 기원하는 위대한 작품을 썼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우리가 베토벤을 ‘악성(樂聖)’이라 말하고 그의 음악과 삶에 유독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베토벤의 어린 시절은 불운하다 못해 끔찍했다.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긴 하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궁정음악가였다. 아버지 ‘요한 판 베토벤’은 그 아버지의 후광으로 궁정악단에서 테너를 담당하는 성악가가 되었으나 그리 뛰어난 실력을 가지지 못했다. 이 후 베토벤이 3살 되던 해부터 그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 중세를 보이게 되었으며 그의 아들 베토벤보다 14살 많은 신동 모차르트의 소문을 듣고 모차르트 부자를 롤 모델로 삼기에 이른다. 모차르트의 아버지와는 달리 조기 교육에 대한 이론이 무지하였던 그는 술에 취한 채 집에 들어와 습관적인 폭력을 일삼았으며 자고 있던 어린 베토벤을 깨워 밤 세워 피아노 연습을 시키곤 하였다. 요즘 같았으면 가정 폭력으로 고소를 당했을 일이며 웬만한 아이들은 집에서 도망쳤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의지로 버텨냈는지, 도망치지 못했는지는 모르지만 이것이 베토벤의 음악환경이었다.베토벤의 작품을 통틀어 보면 그의 인생이 나타난다. 그의 작품은 시기별로 나뉘는데 시기별 작품의 성격이 크게 차이가 나서 마치 다른 작곡가의 작품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살펴보자면 제 1기는 ‘습작의 시기’로 불리며 그의 나이 23∼32살 정도의 나이에 해당 되는데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작품 등 기존 작곡가들을 모방한 시기이다. 베토벤의 본격적인 작품이 만들어질 준비의 시기라 할 수 있으며 고전주의가 중시하였던 형식의 틀을 충분히 지키며 아름다운 걸작을 만들어낸 시기였다.제 2기는 32∼44살 정도의 시기인데 자신의 음악세계를 펼쳐나가는‘자유와 혁명의 시기’라고 부르고 싶다. 과거 하이든과 모차르트를 통한 고전파 형식의 최고의 결실이었던 소나타 형식을 파괴, 확대하는 과감한 시도가 나타났다. 소나타 형식은 서사적인 플롯을 가진 이야기의 구조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크게는 제시부, 발전부, 재현부의 3부 형식으로 구성되나 1주제와 2주제, 소경과구, 대경과구, 종결부 등 다양한 음악적 프레이즈 들이 인관관계를 가지고 큰 스토리를 만들어 가는 형식이다. 많은 걸작들이 있지만 필자는 ‘교향곡 제 3번 영웅’을 최고의 걸작으로 뽑고 싶다. 음악도 뛰어나지만 소나타 형식의 위대한 혁명이 이루어 졌기 때문이다. 이전 곡에서는 2주제 까지만 구성되던 주제가 5주제 까지 쓰였으며 제시부와 재현부의 경과구로 역할로 쓰였던 발전부를 제시부보다 더 길게 작곡했다. 이전 모차르트의 교향곡에서 조차 발전부를 제시부보다 더 길게 쓴 예는 없었다. ‘장송 행진곡(Marcia funebre)’풍으로 작곡된 2악장은 다이나믹이 음악에서 얼마나 드라마틱하게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변주곡으로 구성된 4악장도 베토벤의 변주의 무한한 세계를 보여준다. 테마를 풀어나가는 고전의 변주방법을 넘어 ‘소프라노 독창 변주’, ‘중창 변주’, ‘코러스 변주’ 등의 방법을 도입하였는데 4악장을 다 듣고 나면 마치 오페라 한편을 모두 감상한 느낌이 든다. 베토벤은 어린 시절 부터 뛰어난 피아노 즉흥 능력을 가졌다고 전해지는데 이 능력은 그의 작품에서 변주적 발전의 능력으로 나타난다.실제 베토벤의 선율 창작 능력은 선율 작곡 능력이 뛰어난 인물들과 비교할 때 다소 의문이 있으나 짧은 악구를 발전 시켜 음악을 확대하여 작곡하는 변주 기법은 가히 최고이며 ‘교향곡 제 5번 운명(한국, 일본을 제외하고는 운명이라는 부제를 달지 않는다)’에서는 딴딴딴 따∼ 라는 음 4개를 1악장을 넘어서 4악장, 곡의 끝가지 활용한다. 이 능력은 작곡가에게 매우 중요한 능력이며 현재 대학에서 작곡과를 지원하는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바라는 능력이다.그는 또 바이올린 소나타 작품을 10개 남겼는데 그 중 9번 크로이처 소나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곡은 그의 나이 33세인 1803년에 완성되었으며 러시아의 대작가 ‘톨스토이(1828∼1910)’는 이 곡을 듣고 자신이 알고 있는 곡 중 “가장 음탕하고 무시무시한 곡”이라 평했다고 한다. 실제 톨스토이는 그의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에서 주인공의 아내와 바이올리스트 트루하체프스키가 이 곡을 격정에 찬 열정으로 연주하는 것을 보며 질투와 불안을 느끼며 자신의 아내를 살해한다는 내용인데 이 곡의 1악장을 들어보면 톨스토이가 왜 그런 묘사를 했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는 광기에 찬 음악으로 몰입되고 피아노는 반주에서 완전히 독립되며 바이올린과 피아노는 서로 독립적으로 맞서며 때로는 경쟁을, 때로는 화합을 하며 거대한 음악의 종지부를 찍는다. 베토벤의 젊은 시절의 격정과 방황을 느낄만한 곡이다.제 3기는 45세에서 만년의 시기인데 ‘내면과 성찰의 시기’라고 말하고 싶다. 그의 청각이 완전히 떠난 시기이며 오히려 바로크의 음악 어법인 푸가 기법을 작품에서 자주 볼 수 있고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음악어법을 많이 사용하여 주위로부터 혹평을 많이 들었던 시기이다. 필자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op.125’ 과 최후의 곡 ‘현악 4중주 16번 op.135’를 강력히 권하고 싶다. 합창 교향곡은 최초로 인간의 목소리를 교향곡에 사용하였다는 시도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말할 것이 너무 많은 곡이다. 베토벤은 이곡을 1823년, 그의 나이 53세에 완성했다.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이다. 하지만 그가 이 곡의 4악장에 사용된 쉴러의 시 ‘환희의 송가’를 처음 만난 것은 27세의 청년 때였다. 베토벤은 이 시를 긴 시간동안 간직하여 끝내는 최고의 작품을 완성해 낸 것이다. 위대한 작품에 대한 긴 열망은 베토벤 작품의 원천이며 최고의 장점이다. 4악장으로 구성된 이 곡은 신과 인간의 장대한 승리와 희망의 드라마가 있으며 1악장의 서주부는 신의 천지창조를 느낄 수 있으며, 후기 낭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구스타프 말러(1860∼1911)’의 교향곡 1번 서주부를 들어보면 베토벤의 교향곡 작품이 왜 교향곡의 신약성서로 불리며 이 후 작곡가들의 관현악곡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베토벤의 최후의 곡은 현악 4중주였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현악 4중주 16번 op.135의 4악장에는 ‘어렵게 내린 결정’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으며 Muss ess sein?(그래야만 하는가?),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라는 수수께끼 같은 메모가 있다. 많은 이들이 이 메모에 대한 창의적인 시도를 하였지만, 필자는 이 메모에 베토벤의 작곡의지가 모두 담겨있다고 본다. 베토벤은 자신의 작품에서 상상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음악의 가능성들을 항상 고민하고 선택하였으며 완벽한 확신이 들어야만 그 작품을 끝낼 수 있었다. 밤새워 한곡을 신이 주신 재능으로 간단히 작곡하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베토벤은 일일이 소개하기 힘들 정도로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으나 늘 더 낳은 영혼을 가지고자 성찰했으며 인류에 보탬이 되는 한 사람이 되기를 갈망했다. 그는 음악에게 ‘철학과 정신’이라는 새로운 옷을 선사하였으며 음악으로 인류에게 구원과 미래의 희망을 보여준 진정한 악성이었다./문양일 포항예술고 음악교사

2019-03-25

음악의 궁극적 질문에 답하다-슈만의 사랑과 음악

인간은 어디에서 왔으며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이며, 결국 어디로 가는가? 예술에서는 그것에 대해 끊임없이 묻는다. 클래식 음악에서도 예외 없이 해당되며,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라는 질문에는 신에 대한 물음과 인간의 탄생과 죽음으로 표현되었으며, 왜 살아가는가? 라는 질문에는 ‘사랑’이란 주제로 그려졌다.우리가 기억하는 사랑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가장 열광하는 사랑은 남녀 간의 순수한 사랑이며, 특히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 불행해 질 것이 뻔한 운명임을 알면서도 마법처럼 이끌려갈 수밖에 없는 사랑을 우리는 기억한다.음악사에서 가장 유명한 힘겨웠던 사랑과 몇 개의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클라라 슈만(Clara Shumann·1819∼1896)’은 행복하게 태어난 여인이었다. 그녀는 당시 최고의 피아노 교수를 아버지로 두었으며 자신도 천재적인 피아노연주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Friedrich Wieck·1785∼1873)’는 딸 클라라의 천재성을 미리 알아보고 어린 나이의 클라라를 음악계에 화려하게 데뷔시켰던, 지난 회에 언급했던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와 유사한 자식에 대한 기대가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한 청년을 만난다. 바로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1810∼1856)’이다. 클라라의 아버지였던 비크 교수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으며 재능이 뛰어났지만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무리한 연습을 하다 손가락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슈만의 교양과 지성은 문학과 음악방면에서는 당대 최고였으며 쇼팽과 브람스를 음악계에 소개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등 인격도 넉넉한 사람이었으나 후에 우울증을 앓는 등 정신적으로 온전치 않았으며 손가락 부상으로 인해 피아니스트로서의 장래도 비관적이었다.비크 교수는 이들의 비극적인 미래를 예측했던 것일까? 1835년 둘은 사랑을 확인한 뒤에 비크 교수의 결혼 반대로 소송까지 휘말렸고 아버지였던 비크는 이들을 떼어 놓고자 4년 동안 클라라를 유학 보냈지만 결국 1840년 결혼에 성공했다. 슈만의 작품 중 뛰어난 걸작들이 결혼한 직후 많이 작곡되었다. 그래서 1840년을 슈만에게 있어서 ‘가곡의 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연가곡집 ‘리더스크라이스’‘시인의 사랑’‘여인의 사랑과 생애’등 많은 명 가곡들이 있지만 특히 슈만이 결혼 선물로 클라라를 위해 작곡한 연가곡집 ‘미르테의 꽃’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연가곡 ‘미르테의 꽃’은 유명한 시인 26명의 시로 구성된 가곡집인데 그 중 뤼케르트의 시로 작곡된 ‘헌정(Widmung)’이 가장 아름답다. 그리고 클라라에 대한 슈만의 마음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가사는 매우 아름다우며 요즘 결혼식장에서 축가로 써도 만족할 만하다. 가사 일부를 소개하자면,당신은 나의 휴식/당신은 마음의 평화/당신은 나에게 주어진 하늘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나를 가치 있게 만들어 줍니다.당신의 시선은 나를 환하게 합니다/당신은 나를 사랑스럽게 존중합니다.나의 선한 영혼을/보다 나은 나를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이며 선율도 독일 가곡 특유의 함축성을 가지며 화려하진 않지만 내면의 사랑을 표현하기에 손색이 없다. 후에 리스트는 이곡을 피아노 독주곡 버전으로 편곡하여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 곡은 성악가와 피아니스트에게 모두 사랑받는 곡이 되었다.슈만이 태어나고 살던 시기는 프랑스에서 일어난 대혁명과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진보와 보수가 격렬히 대립하던 시기였으며 자유주의가 보급되어 시민계급의 자기 권리의 주장으로 나타나던 시기였다. 그 영향으로 나타난 것이 국민주의와 개인주의였는데, 국민주의는 자국어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일깨우는 예술작품을 선호했으며 개인주의는 예술가의 주관적인 개성과 경험들을 표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슈만의 예술가곡 뿐만이 아니라 당시 독일에서 작곡되었던 슈베르트의 작품을 비롯한 수많은 독일어 가곡들은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성악곡뿐만 아니라 슈만은 기악곡에서도 걸작이 많이 있지만 필자는 결혼한 2년 후인 1842년에 작곡된 ‘피아노 4중주op.47’의 2악장을 권하고 싶다. 슈만의 ‘안단테 칸타빌레(Andante catabile)’라고도 부르는 이곡은 차이코프스키의 현악 4중주 안단테 칸타빌레에도 뒤지지 않으며 슈만의 작품 중 최고의 선율이라고 평가된다.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은 심정에 처했을 때 이 곡을 듣는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이들이 결혼한 지 14년이 지난 1854년 운명은 비극이라는 날카로운 창을 이들에게 던진다. 슈만이 라인강에 몸을 던지는 자살 시도를 한 것이다. 결국 자살은 실패로 끝났지만 스스로 정신병원을 찾아갔다고 한다. 암세포는 젊은 신체를 가진 사람에게 더 빨리 전이된다고 한다. 슈만이 숭고하고 높은 교양을 지녔기에 그의 정신에 있던 어두운 그림자가 더 빨리 그를 잠식해 버린 것일까?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클라라를 슈만의 아내, 브람스의 정신적 연인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사실은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다. 당시 시내의 선술집에 가면 리스트와 클라라 슈만을 놓고서 누가 더 우월한 연주자인지 논쟁을 벌이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독일의 통화권이 유로화로 통합되기 전 독일의 마르크 화폐에 클라라의 초상이 그려진 것을 봐도 클라라의 명성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이러한 클라라의 남편이었던 슈만은 작곡자이자 평론가, 저술가로 입지가 있었지만 클라라가 연주 여행을 할 때는 매니저의 역할을 하며 동행하곤 하였다. 연주하는 클라라의 모습을 보며 젊은 시절, 원래 자신의 꿈이었던 피아니스트가 되지 못한 부분에 아픔을 느꼈을 것이다.슈만은 음악작품 외에도 브람스와 쇼팽이라는 음악가를 소개하여 그들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특히 브람스는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해 준 슈만에 대한 존경이 열렬하여 슈만이 1854년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난 뒤 클라라와 함께 슈만을 돕기 위한 연주회를 개최하여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슈만이 3년 뒤 세상을 떠난 뒤에도 클라라와 그 가정의 후견인으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경제적, 음악적으로 도움을 준다. 이 후 클라라와 함께 슈만의 작품을 연주하고 알리는 역할을 함으로서 슈만을 대작곡가의 반열에 올려놓는데 공헌이 있다.세상은 슈만이 떠난 후 브람스와 클라라와의 관계를 의심하곤 한다. 브람스가 별 이유도 없이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독신으로 지낸 것이 의아하긴 하지만, 드라마적인 상상력에 브람스의 작품까지 창의적으로 엮어 다양한 상상을 하곤 한다. 대표적인 예로 슈만이 정신병원에 입원한 후 클라라가 한 번도 남편을 방문하지 않은 것을 예로 들며, 이때 이미 슈만에게서 클라라의 마음이 떠났다고들 말한다. 필자도 이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지만 무너져 가고 있는 슈만을 클라라는 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 열렬히 사랑하고 존경하였던 시절의 슈만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을 것이다.브람스와 클라라는 음악의 동료이자, 슈만 작품의 알림이 역할을 충실히 하였을 뿐 둘의 관계는 아무 일도 없었다. 클라라는 40년을 더 살고 1896년 슈만의 곁으로 간다. 그리고 브람스는 그 이듬해에 눈을 감는다.클라라에게는 슈만과 함께 했던 시간보다 브람스와 함께한 시간이 더 많았던 셈이다. 글의 서두에 클라라는 행복하게 태어난 여인이라고 시작했었는데 어쩌면 슈만, 브람스와 같이 인생의 절반을 나누어 함께한 클라라는 음악적으로 가장 행복하게 살아간 가장 행복한 여인이라 할 수도 있겠다. 슈만은 영혼의 자유를 갈망하는 낭만주의 음악을 실천한 인물이었으며 한 여인과 음악과 문학을 사랑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사람이었다. 그가 말한 것처럼 ‘Frei Aber Einsam(자유로우나 고독하다)’ 자유와 이성의 경계에서 음악에게 물음을 던진 외로운 지성이었다. /문양일 포항예술고 음악교사

2019-03-04

외면당한 천재 모차르트

세상에는 많은 음악들이 있고 그 음악 안에 함축된 내용은 사람마다 인격이 다르듯이 모두 다르다. 지금까지 음악을 벗으로 살아오면서 필자의 마음을 움직였던 작품과 그것을 작곡하였던 작곡가의 마음을 되짚어보고, 우리가 음악시간에 미처 배우지 못하였던 작곡가의 인생을 소개하며 글을 읽는 분들의 영혼이 쉴 수 있는 소중한 쉼터를 제공하고자 한다.사람들이 주로 듣는 클래식 음악이 바로크시대부터라고 생각할 때 참으로 많은 작곡가들이 이 세상을 살다 갔다. 그 중 잊혀진 작곡가가 더 많겠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작곡가들은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특별한 작품을 남겼거나 음악사적으로 획을 그을 만한 양식이나 기법을 새롭게 시도한 작곡가들일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와 바로크 시대의 경계에 위치한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1567∼1643)를 시작으로 바로크시대의 마지막과 고전악파의 시작에 서 있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1685∼1750), 그리고 고전악파에서 로맨틱음악의 시대로 인도한 루드비히 판 베토벤(1770∼1827), 그리고 낭만음악에서 근·현대 음악으로 넘어가는 단초를 제공한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 등이 시대를 구분하는 획을 그은 작곡가로 우리는 기억한다.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작곡가는 이 중에 있지 않다. 필자가 오늘 말하고자 하는 작곡가는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이다. 세계 어딘가에서는 반드시 모차르트 음악이 연주되고 있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시대를 구분 짓는 획기적인 양식을 남긴 작곡가는 아니었다. 과연 다른 작곡가들에 비해 어떤 점이 뛰어나서 36년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전 인류에게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사랑받고 있는 것일까?모차르트의 음악은 다른 작곡가들과 분명히 구분되는 점이 있다. 필자는 그것을‘순수함’이라고 생각한다.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나서 당시 궁중 음악가였던 그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1719∼1787)에게서 이른바 조기 교육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궁중 음악가였으며 ‘기본 바이올린 교습법 시론’이라는 이후 오랫동안 사용된 표준교재를 집필할 정도로 음악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아들의 놀라운 재능을 감지하였던 그는 어린 모차르트를 데리고 유럽의 곳곳을 다니며 연주회를 개최하였으며 바로크가 탄생했던 이탈리아를 비롯해 오스트리아의 음악정서와는 달랐던 유럽의 다양한 도시를 누비며 연주여행을 하였다.이 부분은 모차르트에게 글로벌한 음악을 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란 지역도 비록 규모는 작지만 동유럽과 서유럽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융화되어 발화되는 곳이었기에 모차르트는 선천적, 후천적으로 다양한 음악양식을 접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그의 작품에 장점으로 반영되었다.모차르트는 ‘음악의 신동’으로 불린다. 하지만 이 별명은 그에게는 다소 억울한 면이 있다. 이 별명은 그를 타고난 천재로만 각인시키며 모차르트에 대한 이미지를 고정시켜 버리는데 사실은 조금 달랐다.모차르트는 유년기와 청소년 시기를 부모라기보다 매니저와 음악스승의 역할을 하였던 아버지와 연주 여행을 하며 보냈다. 이것은 어린 시절을 그의 또래 집단과 함께 아이답게 보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 건강상태도 좋지 않았을 것이며 자신의 음악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주로 자신보단 계급이 높은 귀족 계급들이었기에 엄청난 격식과 예의범절을 강요받았을 것이니 스트레스도 많았을 것이다.그의 어머니와도 일찍부터 헤어져 지내야 했으며 아들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그의 아버지에게 투정을 부리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음악이었으며 음악은 자신의 전부였을 것이다. 지난 2009년 우리 곁을 떠난 마이클 잭슨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사람을 잘 믿었다고 한다. 그 이유가 그 또한 5살이란 어린 시절부터 그의 형제들과 ‘잭슨 파이브’라는 그룹을 이뤄 음악활동으로 보냈기에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성장할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모차르트의 어린 시절과 공통점이 많은 부분이다.모차르트 대부분의 명곡은 그가 죽기 10년 전 빈에 정착한 후 대부분 작곡되었으며, 작곡의 기량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음악에서조차 순수함이 느껴진다. 여기서 순수함이란 어린 아이의 순수함을 말한다. 그 순수함에는 의도성이 없으며 음악을 듣는 이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들어달라는 요구도 없다. 오직 음악만이 존재하며 그것으로서 모든 것을 표현하고자 한다.모차르트는 36년이란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참 많은 곡을 작곡하였다. 그의 가장 큰 유산은 22곡의 오페라 작품들이다. 그가 다작의 오페라 작품을 쓰면서 쌓인 많은 유산들이 어쩌면 가장 세속적인 음악장르인 오페라와 대조적으로 종교곡의 정수인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인 ‘레퀴엠’(K.626)으로 그의 마지막 작품답게 ‘신 앞에서 홀로 선 가련한 인간’이라는 가장 고귀한 드라마로 표현되었다. 이 곡을 구성하는 모든 곡들이 다 아름답지만 특히 라크리모사(Lacrimosa)가 가장 인상적이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마지막 장면에서 모차르트가 죽고 난 후 공동묘지의 한 구석에 볼품없이 매장될 때 나오던 배경음악이다.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해인 1791년 가장 유명한 오페라 ‘마술피리’와 ‘클라리넷 협주곡’‘피아노 협주곡 27번’을 비롯하여 많은 곡을 남겼다. 그리고 이 ‘레퀴엠’은 건강상의 이유로 모두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일설에 의하면 라크리모사의 8마디까지만 모차르트에 의해 직접 작곡되어지고 나머지 부분은 그의 제자인 쥐스 마이어(1766∼1803)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푸치니(1858∼1924)도 그의 마지막 오페라 ‘투란도트’를 모두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지휘자 토스카니니(1867∼1957)는 1926년에 행해졌던 라 스칼라좌에서의 ‘투란도트’ 공연에서 3막이 연주되던 도중 “마에스트로가 쓴 곳은 여기까지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지휘봉을 남겨두고 무대를 내려와 다른 지휘자가 지휘하여 연주를 끝냈다고 한다. 푸치니를 존경했던 토스카니니가 슬픔으로 지휘를 더 이상 할 수 없어서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가 없다.모차르트의 ‘레퀴엠’은 자신의 죽음을 추모하여 작곡한 것은 아니었다. 발자크 백작이 먼저 떠난 자신의 부인을 추모하기 위해 의뢰한 곡이었지만 이 곡을 쓰며 모차르트는 쇠약해진 자신을 보며 죽음을 예감한 것으로 확신한다. 모차르트는 죽기 전 자신의 제자인 프란츠 쥐스 마이어(1766∼1803)를 불러 곡의 자신이 생각한 악상의 흐름을 지시해 두었다고 한다. 세상을 떠난 자가 시작하고 그를 추모하는 남은 자가 완성한 전무후무한 ‘레퀴엠’이 완성되었으며 산자와 죽은 자의 공동 작품이 되었다.필자는 아직 죽음을 생각할 만한 나이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평소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좋아하는 곡을 늘 일러둔다. 그리고 혹시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그 곡을 같이 듣거나 연주하면서 나를 추모해 달라고 농담 아닌 농담으로 이야기 하곤 한다.모차르트가 가장 힘들어 했던 시기는 빈에 체재할 때부터였다. 빈 체재 초기에는 많은 사랑을 받았으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 ‘돈 지오반니(Don Giovanni)’등 그가 귀족들의 생활을 희화한 작품에 의해 결국에는 그를 지원해 주던 귀족들조차 모두 등을 돌렸다. ‘돈 지오반니’의 2막의 마지막 부분의 “돈지오반니∼ 그대가 초대하여 이렇게 왔도다!” 라고 노래하는 석상의 장면에서 모차르트가 자신에게 등을 돌린 귀족들에게 외치는 분노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불꽃이 돈 지오반니를 지옥으로 내치는 장면에서 신에게 정의롭지 못한 그들의 심판을 요청하는 듯하다.하지만 역시 그가 죽던 해 작곡된 짧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모테트 합창곡 ‘아베 베룸 코르푸스(Ave Verum Corpus K.618)’는 한때는 환호하던 그들이 등을 돌려 결국은 자신을 비참히 죽게 만들었지만 그들을 용서해 달라는 속죄의 메시지와 그의 외롭고 고달팠던 인생이 느껴진다.모차르트는 자신이 천재라고 불리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많지만 그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사람들은 나의 음악이 쉽게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만큼 작곡하는데 시간을 보내고 작곡에 대해 생각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거듭 연구해 보지 않았던 음악의 거장은 없었다.”문양일씨는 1971년 대구생이며 계명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오케스트라 지휘를 공부했다. 현재 포항예술고에서 음악과 전임으로 재직중이다

2019-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