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우화등선

김규종 경북대 교수당송 팔대가 가운데 한 사람인 동파(東坡) 소식은 아버지 소순, 동생 소철과 함께 삼소(三蘇)라 불렸다 한다. 그의 ‘적벽부’에 나오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의 실상을 보고 나니 감회가 적이 새롭다. 본디 ‘우화등선’이라 함은 번데기가 날개 달린 나방으로 변함을 뜻한다. 그러므로 일정한 상태의 근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충분하다.며칠 전 오후의 일이다. 마당에 심은 루드베키아의 크고 노란 꽃잎 하나가 아래로 축 처져 있는 것이다. 다른 꽃잎들은 하늘로 당당히 얼굴 쳐들고 있는데, 쟤는 무슨 일이야, 하고 혼잣말한다. 가까이 가보니 매미 유충이 여섯 개의 발가락으로 꽃잎을 단단히 붙들고 있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녀석의 두 눈이 마치 나를 쳐다보는 듯하다. 오호라, 날개를 달고 하늘로 올라갈 심산이로구나. 부지런히 사진을 찍고 여기저기 살핀다.멀지 않은 곳에 작은 구멍이 나 있다. 그렇군, 저 아래 칠흑 같은 땅속에서 대여섯 해를 살았다는 얘기지. 미국에 사는 어떤 매미 유충은 지하세계에서 15년 넘게 견디는 일도 있다고 한다. 보름 남짓 밝은 세상 구경하려고 장구한 세월 굼벵이로 살아야 하는 매미의 가혹한 운명이 안타깝게 다가온다. 짧지 않은 세월 굼벵이는 땅속에서 무엇을 하며 지내는 것일까?! 몸집을 불리고, 밖으로 나갈 날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견디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해 질 무렵까지도 루드베키아 꽃잎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튿날 아침 동트기가 무섭게 마당으로 나가본다. 어제와 다르게 꽃잎이 빳빳하게 고개 쳐들고 있다. 옆 줄기에 딱딱한 껍데기가 남아있다. 등줄기 한복판에 세로로 찢어진 자국을 남긴 황갈색 껍데기만 동그마니 남았다. 그래, 언제 우화한 걸까?! 그것을 알 수 있다면. 어찌 됐거나 녀석이 성공적으로 날개를 달고 창천으로 날아오른 것은 분명하다.그러다가 생각이 오래전 옛일로 미친다. 백양로를 따라 늘어선 사철나무에서 기괴한 물상(物像)과 만난다. 등껍질을 뚫고 나오려던 굼벵이가 때마침 쏟아진 소나기에 날개를 펴지 못한 채 죽어 있었다. 굼벵이의 몸은 절반가량 껍데기 밖으로 나온 채 화석처럼 굳어 버렸다. 과거를 벗어나 미래로 질주하다가 현재의 족쇄에 걸려 처참한 운명을 맞이한 것이다.해괴한 몰골의 그것, 굼벵이도 아니고 우화를 마친 매미도 아닌 사체를 조심스럽게 들어서 연구실로 데려왔다. 강의자료로 더할 나위 없이 제격이다. 학생들이 어렵다는 ‘그로테스크’ 개념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좋은 재료는 찾기 어렵다. 과거와 작별하고 빛나는 미래를 향해 온 힘을 다했으되, 시운을 만나지 못해 참혹하게 죽어버린 생명체. 그런 까닭에 우리는 과거가 발목을 잡지 못하도록 대못을 소리 나게 내려쳐야 한다.누군가는 과거를 묻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과거는 현재를 규정하고, 현재는 미래와 직결되어 있다. 과거에서 미래가 나온다는 자명한 사실을 우화등선에서 확인하는 아침이다. 현재가 붕괴한다 해도 미래의 토대는 현재와 과거에 있기 때문이다.

2020-07-01

6·25와 남북관계

김규종 경북대 교수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어언 70년 세월이 흘렀다. 오늘날 대다수 한국인은 귀동냥이나 관념으로만 6·25를 체험할 뿐이다. 4·19 시민혁명도, 5·18 광주항쟁도 60년, 40년 전의 일이니 무슨 말을 덧대겠는가. 신속한 시간의 흐름에 무연히 입을 벌릴 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하되 남북관계가 급격하게 냉각되고 있어서 깊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전쟁의 상흔(傷痕)을 딛고,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면서도 대한민국은 30-50클럽에 가입하는 놀라운 쾌거를 이뤄냈다. 그러나 북한의 상황은 여전히 어둡기 그지없다. 2016년부터 실행된 미국의 대북제재가 4년 이상 유지되었고, 코로나19 창궐로 인해 북한경제는 오리무중 첩첩산중이란 얘기도 들린다. 그런 와중에 중국은 북한에 쌀 60만 톤과 옥수수 20만 톤을 지원했다는 보도가 나와 눈길을 끈다.2018년 9월 18일부터 20일까지 북한을 공식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9월 19일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서 15만 군중을 상대로 대중연설을 한 것은 거대한 사변으로 기억된다. 당시 남북한 8천만 민중은 전쟁과 대립, 갈등과 알력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남북화합의 마당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2019년 6월 30일 남북과 북미 정상이 손에 손잡고 판문점에서 회동함으로써 평화를 향한 우리의 염원은 현실로 현현하는 것으로 보였다.화해 분위기로 달리던 남북관계는 미국의 대북제재 연장과 탈북자를 비롯한 일부 단체의 무분별한 대북전단 살포, 날로 가중되는 북한의 경제난 등으로 악화하게 된다. 그런 일련의 사태로 인해 오늘날 우리는 매우 엄중한 남북관계를 보고 있다. 통일부 장관의 사임에 이어 외교 안보 사령탑의 전면적인 교체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인물이 목숨 걸고 남북과 북미대화 복원을 성사시켜야 할 시점이다.아무리 나쁜 평화도 가장 좋은 전쟁보다 낫다. 대체(代替) 불가능한 인간의 생명과 재산을 하루아침에 앗아가는 전쟁의 참화를 우리는 알고 있다. 영화 ‘실미도’는 1968년 울진-삼척지구 무장간첩 사건 이후 남과 북이 어떻게 갈등했는지 보여준다. 청와대를 습격하려 한 김신조 일당에 맞서 박정희는 주석궁을 급습해서 김일성의 목을 따오도록 684부대를 신설한다. 허구와 현실이 공존한다지만, 영화는 많은 것을 생각하도록 한다.이제라도 우리는 돌아보아야 한다. 갑작스레 터져 나온 위기상황의 근본적인 원인과 진행과정 및 대응자세를 숙고해야 한다. 어디서부터 사태가 꼬여서 어떤 계기로 이토록 악화하였는지, 그것부터 냉정히 살펴봐야 한다. 잊어서는 안 될 것은 무조건의 평화와 대화의 원칙 확인이다. 일부 야권에서 구두선(口頭禪)처럼 주장하는 핵무장이나 무력을 통한 대북대응은 사태를 악화시킬 따름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재확인해야 한다.남북의 갈등과 위기상황은 일본의 아베와 우익세력, 미국의 군산복합체와 볼턴, 트럼프, 폼페이오 같은 자들이 기대하고 획책하는 최종지점임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2020-06-24

방아쇠 수지 증후군

김규종 경북대 교수마당이 딸린 집에서 살려면 적잖은 노고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6년 넘도록 촌에서 살다 보니 생각지 못한 수고가 곳곳에 필요하다. 처음에는 농촌생활이 즐겁고 행복했다. 층간소음도 없고, 콘크리트와 자동차 경적(警笛)과 온갖 소음에서 벗어난 만족감이 깊이 밀려오곤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흘러가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여 퇴색하고 시들어지기 마련 아닌가.작년에는 전남대 교환교수로 지내다 보니 집안일에 더욱 소홀하고 말았다. 그러던 차에 코로나19가 ‘집콕’을 유도했기로, 기회다 싶어 육체노동을 아끼지 않았다. 오래도록 방치된 유리창을 정성스레 닦고, 현관 데크에는 오일 스테인을, 계단과 가구에는 니스를 칠했다. 뒷마당의 대나무 뿌리 제거작업을 신호탄으로 좁지 않은 대지의 식물 전체를 손보기로 한다.땅속에서 종횡으로 뿌리내리는 대나무를 대적하는 작업은 상상 이상이다. 호미와 전지가위, 삽과 톱을 동반한 작업이 1주일 넘도록 진행됐다. 뿌리의 완강한 저항을 뚫고, 곳곳에 박혀 있는 돌을 캐내면서 구슬땀으로 범벅된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잘 골라진 터에 왜성 체리 세 그루를 심고, 금계국과 안개꽃, 코스모스와 데이지, 구절초와 루드베키아 씨를 뿌린다.그뿐이겠는가! 체리 세이지와 정향초, 사계절 패랭이와 겹물망초를 사다가 심어준다. 장소를 안마당으로 옮기니 일이 더 많다. 30여 종에 이르는 나무를 전지(剪枝)하고, 대나무와 쑥의 뿌리를 캐내고, 사초를 한곳으로 몬다. 오래전부터 대나무에 꽂혀 있었기로 화분의 사초를 마당에 옮겼더니 제 세상 만난 듯 창궐(猖獗)했다. 그것들을 마당 한구석으로 몰아놓고 그 위에는 흑백의 자갈로 덮는 중노동을 감행한다.그러다 어느 날 오른손 세 번째 손가락이 90도로 접히면서 펴지지 않는다.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손가락. ‘햐, 뭐 이런 일이 있나?!’ 정형외과 의사는 그것을 ‘방아쇠 수지 증후군(Finger Trigger)’이라 했다. 방아쇠를 당길 때 의식적으로 손가락을 당기고 펴줘야 하는 것 같은 증상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약물요법과 수술요법 두 가지 치료법이 있다는 설명도 친절하게 덧댄다. 주사기로 약물을 투입하고, 사흘 분량의 약을 먹었지만, 증상은 호전되지 않는다. 옆집 사람들에게 사정을 말하니, 남매가 유경험자였다. 한 사람은 수술했고, 다른 사람은 증상을 버려두었다고 한다. “사는 데 지장 없어예!” 남의 일처럼 말하는 품새에서 안도감 같은 게 느껴진다. 통계에 따르면, 1년에 1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방아쇠 수지 증후군을 경험한다고 한다.나도 그냥 견디기로 한다. 오랜 세월 백면서생(白面書生)으로 살아온 인간이 불과 두어 달 일했기로 겪는 고초가 그리 만만찮다. 하되 육체노동이 주는 쾌감과 성취감은 크다. 집이 모양새가 나고 틀을 갖춰나가는 것을 보면 흥이 절로 난다. 손가락에서는 아직도 소리가 나고 불편하지만, 특별한 경험으로 날로 풍성해지는 초여름날이 깊어지는 시절이다.

2020-06-17

87년, 그해 여름은 뜨거웠네

김규종 경북대 교수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사람과 사건이 있다. 그들 덕에 인생은 풍성하고 화사해진다. 나이 들어서 얘깃거리가 부족한 사람은 사건과 관계가 궁색한 때문이다. 나와 무관하고 이해관계가 없다는 이유로 사람과 관계와 사건을 외면해버렸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대상에 대한 지적(知的) 호기심이 태부족한 때문일 것이다. 지구별이 오직 나를 중심으로 돌아야 한다는 강박증 환자 역시 같은 결과에 도달한다.1987년 6월 서울은 뜨거웠다. 6월에 예정된 평화 대행진은 시민들을 들뜨게 하였다. 피 끓는 열혈 청춘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는 6월 10일, 18일 그리고 26일의 세 번에 걸친 저항운동을 뭉뚱그려 ‘6·10민주항쟁’이라 부른다. 대학원 박사과정생이면서 강사이자 러시아문화연구소 간사에 민족극연구회 회원이었던 나도 1987년 6월의 소용돌이 속으로 합류한다. 80년 5월을 되새기면서!6월 10일 저녁 대학로에서 친구를 만난다. 그러다 불쑥 명동성당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가볼까, 한 마디로 그 자리를 뜬다. 명동성당은 넓지 않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학생들과 전투경찰로 양분되어 있었다. 평온한 분위기에서도 감촉되는 팽팽한 긴장감이 한밤중 어둠 속에서도 느껴지는 상황. 그 순간, 날카롭고 새된 소리가 허공을 가른다. “전투준비!”온몸에 소름이 돋아나고 심장이 격하게 뛰기 시작한다. “어떻게 하지?! 들어가, 아니면 후퇴?!” 친구와 나는 잠시 눈빛을 교환하고 물러선다. 그는 출근해서 아이들 건사해야 할 가장이었고, 나는 시간강사이자 간사로서 직분이 있었다. 오직 그것뿐이었다, 우리가 물러선 이유는. 28∼9세의 호기로운 나이에도 우리는 쫓기듯 자리를 물러 나왔다. 살면서 지난날을 돌이키다 후회하는 일이 있기 마련인데, 그때 일이 간간이 떠오르곤 한다.대학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매일같이 모친은 “데모하지 마라! 네가 우리 집안 기둥이다.”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모질도록 가난하게 살아야 했던 모친에게 둘째 아들은 무너진 집안을 재건하는 첨병이었다. 어떻게 해서 대학에 보낸 자식인데 데모 한 번으로 속절없이 자식을 잃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언제나 먼발치에서 시위대를 보고, 마음속으로나 동조했던 소시민의 전형으로 살았던 내가 늘 우울하고 억울했다.80년 5월 15일 데모하다가 경동시장 부근에서 전경한테 잡혀들어갔던 기억이 80년대의 나를 구원해준 유일한 기억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87년 6월의 사흘을 나는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시위대와 함께했다. 개운사 젊은 승려들과 저녁을 함께 먹고 같은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갔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들은 모두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그토록 뜨겁던 87년 6월 항쟁으로 한국 현대사는 다시 써졌고, 30년 넘도록 87체제는 유지되고 있다. 지금은 한낱 추억이나 영화로 반추되는 6월 민주항쟁기념일이 어제였다. 과연 나는 온전하게 사람과 사건과 대면하면서 우리의 기억과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2020-06-10

트럼프와 미국의 민낯

김규종 경북대 교수1991년 12월 31일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뒤 유일 강대국으로 군림한 미국의 민낯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코로나19의 확산과 국가 경제의 피폐, 여기에 더해진 경찰의 비무장 민간인 살해까지. 이것이 세계 최강 미국의 모습인가, 하는 의구심이 급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다. 이런 상황 악화의 중심에 현직 대통령 트럼프가 있다. 세계 대통령이라 불리던 미국 대통령의 초라해진 모습이 약여(躍如)하다.코로나19로 10만이 넘는 사망자와 4천만이 넘는 실직자가 발생한 나라 미국. 설상가상 백인 경찰이 비무장 상태의 흑인 남성을 무참하게 살해한 사건으로 미국 전역에서 시위가 잇따르고 있다. ‘민중의 지팡이’인 경찰이 어떻게 비무장 국민을 한낮에 살해할 수 있단 말인가?!지난 5월 25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위조지폐로 담배를 사려 한다는 연락을 받고 미니애폴리스 경찰이 현장에 출동한다. 경찰관 4명은 비무장 상태의 조지 플로이드를 체포했고, 백인 경관 데릭 쇼빈은 무려 8분 46초 동안 군화 신은 무릎으로 조지의 목을 누른다. “숨을 쉴 수 없다.” 하고 조지가 애원했지만 쇼빈의 무릎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조지가 의식을 잃은 후에도, 심지어 응급 의료진이 현장에 도착한 1분 후에도 쇼빈은 조지의 목을 계속 짓눌렀다. 경찰차가 현장에 도착한 뒤 17분 만에 흑인 조지 플로이드는 사망한다. 뉴욕타임스가 현지시각 5월 31일 현장 CCTV, 목격자 촬영 영상, 관련 공식문서 등을 토대로 재구성한 ‘흑인 플로이드 사망 사건’의 전모다. 단언컨대 이번 사건은 백인 경찰이 합법성을 등에 업은 폭력으로 비무장 흑인을 악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조지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담은 영상이 SNS로 널리 유포되면서 시위가 시작된다. 하지만 트럼프는 5월 29일 백악관 앞에서 시위가 벌어지자 시위대를 조롱하고 ‘군대의 무한한 힘’을 통한 무력진압을 천명한다. 아울러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대응시위를 벌이라고 제안한다. 국가가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도 트럼프는 오직 재선을 위한 정략적 선택에 집중하고 있다.홍콩의 국가보안법 제정을 둘러싸고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는 한편, 코로나19 문제를 중국과 세계보건기구(WHO)로 돌리면서 무차별적인 비난을 멈추지 않는다.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은 치켜세우면서, 민주당 소속 시장들에게는 악의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는다. 모든 책임이 민주당과 지지자들 때문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 하는 그의 주장이 공허하게 메아리치고 있다.코로나19가 가져온 세계화에 대한 불확실성과 유럽연합의 분열양상, 미국의 신고립주의는 21세기 세계의 혼란과 분열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했던 제국 아메리카의 소멸 혹은 쇠락(衰落)이 목전에 전개되고 있다. 앞으로 어떤 예기치 못한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는 시간대가 지나가고 있다.

2020-06-03

인연에 대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까까머리 학창시절 피천득의 ‘인연’은 언제나 가슴 통증으로 다가왔다. 몇 번을 읽어도 그와 아사코의 가슴 시린 사연은 익숙해지지 않는 생채기였다. 어린 아사코와 대학생 아사코, 그리고 점령군의 아내가 되어버린 아사코. 피천득에게 영화 ‘쉘부르의 우산’을 좋아하게 해준 연두색이 고왔던 우산 이야기는 지금도 코끝을 시큰하게 한다. 그와 아사코의 세 번에 걸친 만남은 악수도 없이 절만 하는 것으로 끝난다.뾰족한 지붕에 뾰족한 창문이 달린 집에서 함께 살자 했던 아사코. 하지만 그들의 인연은 허망하고 황망하다. 인연처럼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없다. 불가(佛家)에서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직접적인 원인인 인(因)과 간접적인 원인인 연(緣)을 묶어서 인연이라 한다. 대개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이 관계 맺는 것을 인연이라 말한다.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설정과 진행 그리고 결과를 통칭해서 인연이라 한다.인터넷에 올라온 어느 무녀(巫女)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신내림으로 강신무가 된 그녀의 글은 사람을 아프게 하는 데가 있었다. 무엇보다 전생과 이생 그리고 후생에 대한 말이 그러했다. 원수지간의 전생이 부부의 인연으로 이생에서 구현된다는 말. 왜 하필 전생의 원수가 서로 만나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해로(偕老)를 함께 하는 것일까?!붙잡아도 떠날 인연은 작별을 고하고, 아무리 험하게 대해도 남을 사람은 옆에 남는다는 글을 읽으면서 고개가 절로 끄덕거려진다. 그래서 그녀는 가는 사람 잡지 말고, 오는 사람 막지 말라고 한다. 문제는 거기서 출발한다. 가려는 사람을 붙잡고 하소연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내가 싫은 사람 막아서는 것이 세상 사는 이치 아닌가. 마치 대각(大覺)의 경지에 이른 것처럼 무연(無緣)하게 생각을 전달하는 무녀의 심사가 문득 궁금하기도 하다.사람 하나 보내는 일은 세상 하나와 작별하는 것과 같다. 사랑을 잃은 기형도가 ‘빈집’에서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하고 울먹이는 것은 공감이 간다. 그녀가 떠난 빈집의 문을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잠그는, 홀로 남겨진 시인의 고독과 황량한 내면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혼자 덩그러니 남은 사내의 어깨 주위로 켜켜이 내리는 어둠이 눈에 밟히는 듯하다.하지만 그들의 인연은 필시 거기까지였을 것이다. 한 사람의 의지나 욕망이 다른 사람의 그것과 충돌하고 파찰음을 낼 때, 그리하여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난파할 때 인연은 작별을 고한다.하나의 인연이 혹은 사랑이 또는 관계가 지나가면 크고 작은 흔적이 나이테처럼 생겨난다. 말 못 할 마음으로 흔적과 상처를 돌이키다 보면 그래도 다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가슴을 채우기 시작한다. 영원한 작별 후에도 어디선가 새로운 생은 시작되는 법이므로.인연이 다한 사람 하나 보내고 한밤중 어둑한 방 그늘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다 문득 ‘인연’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래, 여기까지야! 어디서 무얼 하든 부디부디 행복하기를!

2020-05-27

사람과 사람 사이

김규종경북대 교수인간이 인간인 까닭은 인간과 인간의 격의(隔意) 없는 유대관계에 있다는 말을 좋아한다. 무엇보다 ‘격의 없는’이라는 어휘가 좋다. 양자가 속마음을 툭 터놓은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어떤 비밀이나 마음의 장벽이 없는, 문자 그대로 흉허물없이 속내를 모두 드러낼 수 있는 사이가 격의 없는 관계다. 그런 관계를 맺은 사람을 우리는 친구나 동지라고 부른다.하지만 세상살이가 어디 호락호락한가?! 현대 사회에서 격의 없는 유대관계는 희귀하며, 이런 현상은 나날이 심화하고 있다. 집단 따돌림으로 자살을 택하거나. 히키코모리로 자발적인 유폐를 선택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그러하다. 혼술과 혼밥과 혼산을 생각해도 날로 소원(疏遠)해지는 인간관계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인간을 위로하고 대화상대가 돼주는 인공지능 로봇이 나오는 세상이고 보면 그럴 법도 하다.격의 없는 사이가 아니라면 적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인간관계에서 필수적이다. 문화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통해 네 가지 인간관계를 조명한다. 45센티미터 이내의 친밀한 거리 (포옹과 키스), 45∼120센티미터까지 개인의 거리 (악수), 120∼360센티미터까지 사회적 거리 (모임), 360센티미터 이상 공적인 거리 (관람).우리가 누군가와 친구나 연인 혹은 지인 관계를 맺을 때 순서를 생각해보면 홀의 지적에 자연스레 동의하게 된다. 멀리서 바라만 보다가 크고 작은 모임을 통해 거리를 좁히고, 악수하는 관계로 발전한다. 그러다가 소수의 인간은 포옹과 키스하는 친밀한 거리에 도달하기도 한다. 이런 단계를 거치지 않고 단박에 친밀한 거리로 넘어가는 경우는 영화에서만 가능하다.정보통신이 현저히 발달한 현대에서는 인터넷상의 거리도 문제가 된다. 누군가 잘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 개인 블로그나 홈페이지에 무단으로 틈입(闖入)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면서 이런저런 댓글을 달기도 하고, 무언가 충고하는 글을 남기기도 한다. 글 쓰는 본인이야 스스로가 대견하고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읽는 사람에게는 고통이자 공포가 아닐 수 없다. ‘뭐지, 또 들어왔나, 왜 저런 거야, 누구 허락을 받았나?!’본인이야 격의 없는 인간관계를 만들어가고 싶기도 하겠지만, 상대방은 그럴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다면, 거기서 멈춰야 한다. 그것이 예의고 염치다. 격의 없는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다른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옳다. 싫다는 사람을 끈덕지게 추적할 때 인간관계는 피로와 짜증과 분노로 아수라판이 되고 만다.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것은 옛말이다. 그렇게 해도 괜찮았던 시절은 완전히 지나갔다. ‘스토커 처벌법’이 그래서 나왔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스토커로 인해서 상처를 받고 심지어 죽임을 당했다. 인터넷상에서 폭력적이고 살인적인 댓글로 얼마나 많은 연예인이 고통받고 있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적절한 거리를 생각했으면 한다.

2020-05-20

5·18 광주항쟁 40주년에 부쳐

김규종 경북대 교수해마다 5월이면 조기(弔旗)를 내걸었다.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열흘 동안 조기를 걸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후에는 4월에도 조기를 내다 걸었다. 작년에는 전남대 교환교수로 파견 나가는 바람에, 올해는 코로나19로 정신 놓는 바람에 4월의 조기게양은 무산됐다. 하지만 5월 광주를 어찌 잊을쏜가?! 더욱이 올해는 광주항쟁 40주년 아닌가!작년 5월 17일 저녁에 광주 국립묘지를 찾았다. 25년 만에 찾은 망월동 묘역은 예전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학회에 갔다가 후배들과 함께 김남주 시인 묘지 앞에서 묵념한 오래된 기억을 더듬었으나, 장소를 찾아내기 어려웠다. 전남대 철학과 김양현 교수께 문의하고 나서야 비로소 묘소를 찾을 수 있었다. 5·18 항쟁으로 산화하신 분들과 다소 떨어진 곳에 잠들어있는 김남주. 나는 그이가 없는 광주와 5월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그날 밤 광주의 옛 도청과 금남로를 떠돌면서 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전남대로 파견 나온 이유는 5.18 광주항쟁 때문이었다. 죄의식과 부채의식이 40년 세월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까닭이다.부산 출신 대학원 선배는 1983년 매운 겨울, 광주와 남도를 떠돌다가 귀환했더랬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버림받으면서도 광주를 찾아갔던 그의 심사는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김남주의 시집 ‘조국은 하나다’를 읽으면서 시대의 비극과 부조리를 깨달아갔던 시절. 60년대 김수영, 70년대 김지하, 80년대 김남주로 이어지는 시대의 저항자들로 희미하게나마 빛났던 시간대.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 아니라, 3김 시인’이었다. 망월동의 시인은 예전처럼 말이 없었다. 5월 3일 전남대 인문대 1호관에서 있은 ‘김남주 기념홀’ 개관식에서 환하게 웃기만 하고 침묵했던 것처럼.1980년 5월 광주에서 40년 세월이 흘렀다. 내 머리에도 허옇게 서리가 내렸다. 기나긴 세월에 우리는 87항쟁과 직선제 쟁취, 1998년 평화적 정권교체, 2017-18년 촛불항쟁과 탄핵을 넘어서 3050클럽 가입까지 수많은 성취를 해왔다.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광주를 모욕하는 극우주의자들의 망동을 단죄하지 못하고 있다. 발포 책임자는 반성하는 기미조차 없다.진정한 동서화합과 국민통합은 발포 책임자와 그 후예가 광주항쟁에서 산화해간 영령들과 유가족에게 석고대죄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40년 세월 광주와 광주 시민들을 능욕한 극우주의자들을 정당하고 엄중하게 징벌해야 한다. 광주와 광주항쟁의 역사를 더럽히도록 더는 수수방관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어린것들과 그들이 마주할 미래와 미래기획을 위해서도 광주와 광주항쟁은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잘못된 과거와 작별하려면 대낮처럼 깨어있는 정신으로 과거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악마 같은 살인자들과 그 후예가 다시는 설레발 치지 못하도록 역사의 관에 ‘탕탕’ 소리 나게 대못을 두들겨 박아야 한다. 미래는 과거의 처절한 기억과 살을 도려내는 고통의 환기에서 비로소 출발한다. 광주항쟁 40주년의 교훈이다.

2020-05-13

BBC가 민족 정론지?!

김규종 경북대 교수한국인들 사이에 ‘BBC가 민족 정론지’라는 말이 유행한다. 코로나19가 지구촌 전역으로 확산하는 가운데 외국의 주요언론은 한국정부의 민주성과 투명성 그리고 강력한 진단역량에 주목하는 기사들을 내보냈다. 반면에 ‘조중동’ 같은 신문은 ‘우한 코로나’와 ‘중국인 입국금지’ 같은 후진적인 행태로 일관해 수준 높은 독자들의 질타(叱咤)를 받았다. 아직도 극우 유튜브 수용자들과 낙후지역 독자들은 이런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한국 독자들이 외신을 신속하게 번역하여 SNS에 올리는 일이 일상화된 세상에 우리는 살아간다. 정보통신 강국의 국민답게 한국인들은 세계적인 문제와 동향 그리고 사실관계를 판단하면서 더는 보수신문을 믿지 않는다. 이런 현상이 강화된 시기는 2019년에 아베 정부가 수출규제를 시작했던 때로 알려져 있다. 한국정부가 강력한 대응에 나서자 보수지들이 앞다투어 일본에 고개 숙이라는 논조(論調)를 펼쳤던 그때 국민은 대거 그들을 버렸다.2020년 한국의 언론자유지수 순위는 세계 42위로 아시아에서 가장 높다. 노무현의 참여정부 시절 31위를 기록했지만, 박근혜 정부 첫해인 2013년 50위, 2014년 57위, 2015년 60위를 기록했다. 2016년에는 70위로 역대 최하위를 기록해 언론자유가 후퇴한 대표국가가 되었다. 한국의 보수언론이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는 ‘선진국’ 미국과 일본의 순위는 45위와 66위다.언론자유지수가 전임정권과 비교해 현저히 상승하고 있지만, 언론인들의 수준은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인 듯하다. 그 결과 ‘BBC 민족 정론지’ 주장으로 나타난 것이다. 참 우울한 일이다. MBC 피디 출신인 정길화 아주대 교수는 한국언론의 문제를 조급성, 전문성 부재, 정파성(政派性)의 세 가지로 설명한다.남보다 앞서 기사를 송출해야 한다는 성과주의가 만들어낸 조급성은 기사의 신뢰도를 낮춘다. 인터넷상에 올라온 기사에서 우리는 비문(非文)과 틀린 맞춤법으로 범벅된 경우를 너무도 자주 찾아낸다. 전문성 없이 글을 쓰다 보니 기사의 내용과 질이 저급할 수밖에 없다. 저질 유튜브나 찌라시 수준을 넘지 못하는 기사도 적잖다는 얘기다.정파성은 정당과 인물 그리고 지역을 특정해서 당위론적으로 기사를 제작하는 행태를 말한다. 기자가 속한 집단과 출신에 기초하여 색안경을 끼고 대상을 바라보는 자세가 나날이 강고해지고 있다. 공정과 신속, 정확성과 무정파성을 전제로 해야 함에도 언론사와 종사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언론의 소명을 소홀히 여기는 것은 아닌가.외신이 늘 옳다는 주장은 당연히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모든 나라에는 고유한 역사와 문화 그리고 민족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론에 대한 한국인들의 불신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언론마저 해외직구 해야 하나’라는 자조적(自嘲的)인 말이 떠돌고 있음은 우려스럽다.그러하되 한국에도 BBC 같은 정론지가 나와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다.

2020-05-06

지구의 날과 코로나19

김규종 경북대 교수4월 22일은 지구의 날이다. 심각하게 오염된 지구환경을 돌이켜봄으로써 인간과 지구의 공동 운명체를 각성하도록 인도하는 날이다. 1969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해상원유 유출사고를 계기로 촉발된 지구의 날이 세계적인 규모로 확대된 원년은 1990년이라 한다. 그해 150여 나라가 참가하여 지구를 보호해야 인류도 생존해나갈 수 있음을 확인한다.코로나19로 인해 인간활동이 크게 제약을 받자 지구대기가 맑아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4월 10일 CNN에 따르면, 극심한 미세먼지로 악명높은 인도 북부 펀자브주 주민들에게 160㎞ 이상 떨어진 히말라야산맥이 보인다고 한다. 코로나19의 세계적인 유행에 따라 인도 정부는 3월 22일 이동제한령을 발령했다. 차량운행이 대거 줄고, 공장 대부분이 문을 닫았다. 그 결과 대기 오염도가 최대 44% 감소함으로써 설산(雪山)이 맨눈으로 보인 것이다.이런 현상이 인도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인터넷에 떠다니는 각종 영상은 세계 곳곳의 하늘이 맑아졌음을 보여준다. 우리도 올해는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의 공습에서 상당히 자유로워졌다. 오늘날 일부 식자들은 21세기를 ‘인간세’라 규정한다. 인간으로 인해 여섯 번째 대멸종이 일어날 수 있음을 경고하는 말이다. 그것을 코로나19가 잠시 멈춰 세운 것이다.노자는 “사람은 땅을 따르고, 땅은 하늘을 따르며, 하늘은 도를 따르고, 도는 자연을 따른다”고 갈파했다. 사단논법은 당연히 사람은 자연을 따르는 것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자연은 스스로 그리하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지구나 자연환경과 똑같은 의미는 아니겠으나, 인위적인 행함으로 인해 야기되는 폐해를 강조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것은 인간욕망의 무한대를 긍정하고 성장해온 현대사회의 맹점을 지적한다.제어되지 않은 욕망의 정점이 자본주의와 물질 만능으로 극대화되고, 그것은 쓰레기로 전락할 숱한 물품으로 이어진다. 주위를 돌아보면 우리는 거대한 쓰레기더미에 포위돼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 하며 쌓아둔 물건이 얼마나 많이 나뒹굴고 있는가.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법정 스님이 ‘무소유’를 주창한 데에는 까닭이 있는 것이다.사람도 과식하면 속이 더부룩하고 고통받기 마련이다. 대략 60조 톤으로 측정되는 지구도 인간으로 인해 끝없이 고통받고 있다. 자연계에서 사라질 위험에 처한 멸종위기종은 얼마나 많은가?! 누가 그것들을 사지(死地)로 몰아넣고 있는가. 현대판 도도새라 할 수 있는 수많은 생명의 숨통을 옭아매고 있는 인간의 거칠고 우악스러운 탐욕이 이제는 멈추었으면 한다.얼마 전 마당에서 일하다가 슬며시 담장 아래로 모습을 감추는 황구렁이를 보면서 한편으로 놀랐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하, 아직은 살만한 모양이구나, 생각한다.지구의 날에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을 상상한다. 코로나19가 인간과 지구 모두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닌 듯하여 입가에 역설(逆說)의 미소가 감돈다.

2020-04-22

선진의 조건

김규종 경북대 교수한국인들은 요즘 ‘국뽕’에 취한 상태다. 날마다 외신이 전하는 코로나19 소식 때문이다.세계 전역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데 유일한 예외가 대한민국이다. 한국산 진단키트를 공급해달라는 국가가 130개가 넘고, 우리의 방역방식을 공유하겠다는 나라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시자 빌 게이츠도 4월 10일 문재인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코로나19 대응에서 한국이 최고라고 찬사를 보냈다.코로나19가 창궐하던 얼마 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극적인 반전에 환호작약하는 것은 이 나라 백성이라면 당연한 일이다. 동시에 저명 학자들과 언론들은 앞다투어 코로나19 이후의 세계상을 예견하느라 여념이 없다.우리가 지금까지 떠받든 ‘선진국’들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는 판국이기 때문이다. 예측 불가의 상황에서 선진의 조건이 무엇일까, 문득 생각한다.해방 이후 지금까지 우리는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이라는 말을 귀에 못 박히도록 들어왔다. 우리의 사유와 행동과 미래기획과 꿈의 절대적인 기준은 늘 선진국이었다. 우리의 기준인 KS는 그저 그런 허울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도 숱한 방송사와 기자들은 ‘미국과 유럽, 일본’ 같은 선진국 타령을 되풀이하고 있다.그런데 하루아침에 선진국들이 대한민국을 배우겠다고 야단법석이다. 그들을 상전으로 모시고 살던 기자들은 어안이벙벙한 모양이다. 세계 각국의 수뇌가 한국 대통령에게 경쟁하듯 전화하고 원조와 조언과 협력을 구하는 상황이 날마다 벌어지고 있으니 말이다.그래서 다른 나라들보다 앞서 나가는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숙고하는 것이다.생존을 넘어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보장하는 나라가 선진국이다. 생명과 안전에 필수적인 보건의료는 물론이려니와 교육과 계몽, 민주주의, 과학기술, 법과 제도, 문화와 예술, 교양과 문명 같은 요소가 선진의 조건으로 거명 가능할 것이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보건의료 부문에서 세계적인 공인을 받고 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지구최강 미국마저 허망하게 무너지는 판국에!코로나19의 침공과 미국의 붕괴는 의료 민영화가 주범이다. 오바마케어를 무산시킨 트럼프가 붕괴의 수괴지만, 미국의 의료보험체계는 부자를 기준으로 한다.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아니라, ‘유전생존 무전죽음’이란 등식이 성립한다. 실제로 미국 코로나19 사망자의 7할이 흑인이다. 빈자는 죽어 나가고 부자만 살아남는 나라를 우리는 선진국 운운하며 천조국으로 모셔왔으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다.이제는 국민을 위한 보건의료 분야에서는 우리가 세계 최강이자 선진이라 자부해도 틀리지 않을 성싶다. 문제는 사회의 여러 부문과 분야에서 선진영역을 확대하는 것이리라. 이래저래 유쾌한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2020년이다.

2020-04-15

긴급재난지원금

김규종 경북대 교수누구에게나 남다른 기억이 있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져도 기억의 사진첩에서 지워지지 않을 아름다운 경험은 삶을 풍성하게 인도한다. 요즘 정부와 지자체, 정치권에서 활발하게 논의되는 ‘긴급재난지원금’은 오래전에 잊힌 사건을 소환한다.러시아 문학을 연구하기에는 말도 안 되는 환경 때문에 서도이칠란트로 유학을 가야 했던 시절의 일이다. 소련과 중국을 적성국(敵性國)으로 분류하여 학문을 위한 최소한도의 자료마저 차단함으로써 반공을 넘어 멸공 공화국을 꿈꾼 박정희-전두환 시대. 그런 이유로 적잖은 연구자가 일본이나 미국, 유럽으로 유학을 떠날 수밖에 없던 암흑기. 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한반도가 세계의 관심을 받았던 무렵의 이야기다.쾰른에서 어학과정을 마칠 무렵 아이가 태어났다. 당시 도이칠란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분단상태였다. 서도이칠란트에 주둔한 미군이 20만을 헤아리고, 국민 1인당 GDP가 2만 달러 부근이었던 때였다. 그런 나라가 10만이 넘는 외국 유학생들을 무상으로 교육하고 있었다. 피부색과 국가와 언어를 불문하고 서도이칠란트 학생과 외국 유학생을 똑같이 대우한 나라.아이가 태어나자 1년 동안 양육비(Erziehungsgeld)로 다달이 600마르크 (한화 27만원), 어린이수당(Kindergeld)으로 50마르크를 주는 것이었다. 속지주의를 채택한 나라의 법률에 따라 아이는 자동으로 서도이칠란트 국민으로 편입되었다. 노동자 자식이든, 재벌 자식이든, 외국인 아이든 간에 똑같이 양육비와 어린이수당을 준 서도이칠란트. 이런 혜택을 일일이 거론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더욱 큰 놀라움은 베를린에서 이어진다.지도교수를 찾아 1989년 초에 서베를린으로 이주한 나는 그해 여름 중소기업 ‘게오르크 렘케’에서 6주 동안 육체노동 아르바이트를 한다. 하루 6-8톤의 물량을 컨베이어 벨트로 처리하는 중노동이었다. 거기서 나는 분단상태의 서베를린 시민에게는 양육비가 2년간 지급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구청의 양육비 담당자에게 에이4 용지 1매 분량의 편지를 쓴다.‘서도이칠란트의 학문발전을 위해 학위논문을 준비하고, 경제발전을 위해 ‘게오르크 렘케’에서 노동한 나에게 양육비를 지급해달라’는 내용이었다. 2주 후에 나는 ‘미지급된 양육비를 다달이 나의 계좌로 송금하겠다’는 담당자의 답장을 받는다. 600마르크의 양육비를 아무 조건 없이 추가 지급하겠다는 편지를 받은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참, 대단한 나라로군! 하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10만이 넘는 외국 유학생들을 공짜로 교육하고, 각종 혜택을 자국민과 똑같이 베푼 분단의 나라 서도이칠란트. 얼마 전 통일 도이칠란트는 코로나19로 인해 곤경을 겪는 내외국인에게 긴급재난지원금 5천유로(한화 673만원)를 지급했다. 지급에 걸린 시간은 단 사흘. 포퓰리즘 얘기는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국가다! 예전의 특별한 기억을 소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나의 조국에서도 실현했으면 하는 바람이 커지는 봄날이다.

2020-04-08

일본의 두 얼굴

김규종 경북대 교수2020년 동경 올림픽이 1년 연기되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와 일본 정부는 2021년 7월 23일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기로 했다.코로나19의 세계적인 대유행에도 불구하고 올림픽 강행을 주장한 아베 정권에게 적잖은 타격을 안겨준 결정이라 하겠다. 중국에서 발원한 코로나19가 세계 전역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지금도 일본열도는 무풍지대인 것처럼 보인다. 일본의 대응전략이 얼마나 올발랐는지는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혹자는 예정대로 올림픽 개최를 해보려는 아베 때문에 코로나19 검진 수치가 지나치게 작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일본인들의 거리 두기와 손 씻는 습관 덕에 바이러스 전파가 미미하다고 주장한다. 아베 정권의 얄팍한 정치 술수를 경원시하는 한국의 호사가들은 일본의 코로나19 진행이 어떤 양상을 보일 것인지, 적잖은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반면에 지난 2월 중순 일본인들의 트윗은 여러 가지를 보여준다. 몇 가지 인용한다.“신형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격리자에 생활비 지급…. 외국인 포함 = 한국”“어떤 의도를 가지고 ‘한국이 어쩌고’를 해온 일본인과, 그것에 의문을 품지 않고 오로지 동조하며 ‘일본 스고이(대단해)’를 해온 일본인. 자기 발밑을 보지 못한 것이다, 라는…. 당연하지만, 누구를 리더로 하느냐에 따라 이렇게 달라진다.”“한국은 여기서 국민을 버려두면 데모 나지요. 일본은 아무리 국민을 버려도 자민당 압승이니까.”외국인까지 포함하여 코로나19 감염자를 찾아내서 치료하되 무상으로 진행한 한국. 그런 한국을 보면서 올림픽이라는 목표 때문에 검진 자체를 포기하다시피 한 일본. 그러면서도 ‘재팬 이스 넘버원’이라는 신화에 매몰돼 일본이 대단한 나라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일본인. 한국인들이 촛불시위로 무능하고 부패한 권력자를 내쫓은 사례를 언급하면서 자민당에 속수무책 끌려가는 일본 국민의 무비판성과 비활동성을 힐난하는 글이다.하지만 일본은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다. 스기야마 마사아키 교수의 ‘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를 읽으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유라시아를 종횡으로 누비면서 정치하고도 호쾌한 시각을 보여주는 스기야마 교수의 식견은 놀라운 것이었다.그런데 그의 논거는 거의 일본인들의 저서에 기초한다. 수많은 일본인 연구자들이 유라시아 곳곳을 누비면서 필요한 자료와 문헌을 제공해주는 덕분이다.일본의 대표적인 지식인 다치바나 다카시에 따르면, 그는 학부에서 그리스어로 플라톤을, 라틴어로 토마스 아퀴나스를, 프랑스어로 베르그송을, 도이치어로 비트겐슈타인을 읽었고, 학과 이외 시간에 히브리어로 진행된 구약성서 강독까지 참가했다고 한다.경북대에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강의 자체가 아예 없다. 반면에 전남대에서는 30년 가까이 그리스어 원전강의가 이뤄지고 있다니 경하할 일이다.일본은 타산지석이자 놀라운 귀감(龜鑑)의 본보기로 작용하는 가깝고도 먼 나라임을 새삼 실감하는 시절이다.

2020-04-01

사재기 없는 나라

김규종 경북대 교수논어 ‘위령공편’에 “군자고궁 소인궁사람의”가 나온다. 군자는 어려움을 당하면 굳게 지키지만, 소인은 어려움을 당하면 함부로 행동한다는 말이다.사람의 됨됨이는 어려운 지경이나 곤궁한 상황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강인한 정신력으로 무장한 사람은 끝까지 어려움을 견디지만, 대다수는 허둥대기 마련이다. 뛰어난 소수와 그렇지 못한 다수의 나뉨은 여기서도 선연하다.코로나19로 세계 곳곳이 아우성이다. 중국에서 시작된 감염병이 오대양 육대주로 퍼져나간 것이다. 바이러스는 국경도 인종도 빈부귀천도 가리지 않는다. 외견상으로는 평등세상이 구현된 듯하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우리나라처럼 국민 전체가 의료보험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경우에는 평등한 면모가 드러나지만, 그렇지 않은 나라에서는 불평등이 극을 달린다.의료 민영화로 인해 의료적 불평등과 아울러 미국에서는 사재기 광풍이 한창이라는 전갈이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려고 미국인들은 식량과 물, 손 소독제와 마스크, 휴지와 약품을 챙기려고 떼 지어 상점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휴지를 차지하려고 매장에서 주먹다짐하는 사람들까지 있다는 얘기는 예사롭지 않다. 우리를 더욱 경악시키는 미국인들의 행태는 총기와 탄약의 매출이 급신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CNN 보도에 따르면, 최근 3주 동안 총기매출은 68%, 탄약매출은 309% 늘었다고 한다. 미국인들은 코로나19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해 정부기능이 마비되면 물자와 식량이 부족해지며, 약탈이 시작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영화 ‘컨테이젼’에 나온 상황이 재현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생존을 위해 이웃 사람이 나와 가족을 약탈할 경우를 대비해 총기와 탄약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총기류를 제외한 다른 물품의 사재기 현상은 미국만의 얘기가 아니다. 신사의 나라로 한국인들에게 칭송받는 영국도 예외가 아니다. 지상파 보도에 따르면 영국인 간호사가 48시간 교대근무 이후 상점에 들렀지만, 사재기 때문에 텅 빈 매대를 보아야만 했다고 한다. 불과 48시간 생존을 위한 최소한도의 식료품 구입도 원활하지 않은 실정이다 보니 코로나19가 불러온 심리적 공황상태가 얼마나 우심한지 알 만하다.이런 와중에 영국의 BBC를 위시한 외신이 ‘사재기 없는 나라’로 칭송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코로나19가 가장 극심한 대구나 청도, 경산 어디서도 사재기 바람은 찾을 수 없다. 그 까닭을 나는 우리 국민의 상부상조 정신과 이웃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나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대구·경북을 도우려는 전국의 따사로운 손길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다.2천500년 전에 공자가 설파한 ‘군자고궁’ 정신은 세월이 흘러도 인류가 지켜나가야 할 미덕일 것이다.국경과 인종과 역사와 문화를 떠나 우리 모두 한 형제임을 자각하면서 코로나19 사태를 슬기롭고 용감하게 극복해나가면 좋겠다.

2020-03-25

걷기에 대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경북 성주가 고향인 가수 백년설의 대표곡은 1940년에 발표된 ‘나그네 설움’이다.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요즘도 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걸 보면 80년 세월이 무상하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로 시작하는 ‘나그네 설움’은 고향 떠난 자의 한없는 인생역정을 노래한다. 떠돌이로 10년 넘어 반평생을 살아온 나그네는 해거름에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눈물을 보인다.태평양전쟁을 목전에 둔 일제강점기 조선의 나그네는 도보에 의지하여 길을 떠돌았다. 식민지 백성 처지에 승용차나 열차는 언감생심이었으니 말이다. 그가 걸어야 했던 데에는 까닭이 있을 터이나, 우리는 내막을 알지 못한다. 나도향의 ‘그믐달’에 나오는 야반도주한 파락호(破落戶)일지도 모르고, 최서해의 단편소설 ‘탈출기’의 주인공 도배장이 나운심의 후예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걷고 걸었고 걸을 것이다. 인간이 하루에 걸을 수 있는 거리는 얼마나 될까?! 장정 기준으로 30킬로미터 내외가 고작이라는 게 정설이다. 시간당 3∼4킬로미터를 걷는 것이니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해야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진주라 천리길”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과거 보려고 한양 가는 조선의 선비는 편도 보름치 양식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오늘날처럼 탄탄대로나 신작로가 아닌 구불구불한 길과 가파른 산길과 언덕길을 가야 했던 사람들의 행장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그렇지만 당대 지식인들은 자신의 걸음으로 사유와 인식의 지평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호모사피엔스의 첫 번째 조건이 직립보행 아닌가! 영장류 가운데 인간처럼 직립보행이 일상화된 종은 없다. 오늘날 스마트폰 때문에 인류가 고릴라나 침팬지 혹은 오랑우탄처럼 등이 구부정해지는 것은 별도로 쳐두자. 똑바로 서서 걸으면서 우리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각종 상념과 기획을 보듬고 걷는다.누구는 건강을 생각하여 일삼아 걷지만, 우리는 걸으면서 과거와 미래, 행과 불행, 관계와 절연 같은 것을 생각한다. 근대 이전의 나그네는 사유 속도와 걷는 속도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특별한 예외가 아니면 그들은 일상의 속도에 맞춰서 걸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사물을 인식하고 관계를 성찰했다. 시속 300킬로미터 가까운 고속철로 이동하는 현대인은 성찰하지도 사유하지도 않는다.걷지 않는 현대인은 똑똑한 전화기를 들여다볼 따름이다. 만물의 창이자 만능소통의 마당이 되어버린 스마트폰은 사유와 인식, 성찰과 무관하다. 거기서 쏟아지는 숱한 정보와 지식은 이용자를 암담하게 만든다. 급기야 그들은 정보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손쉬운 해결책을 찾아낸다. 정보와 지식의 바다에 일엽편주 돛단배가 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는 이제 비판적인 정신과 영혼을 사상한 채 한낱 엄지족으로 전락해 버렸다.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살려면 정처(定處)가 있어도 걸어야 한다. 구부정한 영장류가 아니라, 직립보행하는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걸으면 살고, 멈추면 죽는다. 거리에 봄꽃 한창이다.

2020-03-18

문제는 손이다

김규종 경북대 교수코로나19로 ‘마스크 5부제’가 실행 중이다. 차량 5부제는 익숙하지만, 마스크 5부제는 어색하고 떨떠름하다. 고도의 물질문명 세계에서 마스크를 구하려고 5일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마스크를 사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마스크가 필요한 사람을 위해 자기나 가족 몫으로 할당된 마스크를 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쓰임새로 본다면 마스크는 나보다는 남을 보호하겠다는 의미가 강하다. 마스크는 기침이나 재채기를 통해서 침의 분말이 공중으로 날아가지 않도록 하기 때문이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타인의 기침이나 재채기가 날아올 수도 있다. 재채기나 기침할 때는 옷소매로 입을 가리라고 보건당국이 권고하는 까닭은 그래서다.그럴 바에는 마스크를 쓰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고 안전하다. 마스크 대란(大亂)이 일어난 까닭이 거기 있다.청도 화양읍 토평리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마스크를 쓰고 앞마당을 배회하는 풍경은 다소 비극적인 데가 있다. 한 달 넘게 폐쇄된 경로당에도 못가고, 아낙들이 마실 오는 일도 없어진 마당에 마스크를 쓰고 살아가는 양상은 우울하다. 5일 장에 나가야 구할 수 있는 마스크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대처(大處)에서 살아가는 자식들이 보내줬을 터다. 그것은 언론이 앞다투어 보도한 마스크 ‘사재기 광풍(狂風)’과도 관련 있을 것이다.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코로나19가 전염되는 경로 가운데 코보다 치명적인 부위는 손이다. 손은 몸 가운데서 가장 활용도가 높고 가장 더러운 부위다. 손을 묶어버리면 우리는 그야말로 속수무책(束手無策)이 되어버린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손으로 만지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라. 신발 안에 모셔져 있는 발과는 쓰임새가 천양지차다.영화 ‘컨테이젼’은 코로나19와 관련하여 여러 생각 거리를 제공한다. 2020년 코로나19를 빼다 박은 것처럼 닮은 상황도 나온다. 그 가운데서 내가 중시하는 대목은 손이다. 어린 돼지를 다루다가 앞치마에 대충 손을 문지르고 나온 주방장과 악수하는 등장인물. 그녀의 손과 맞닿은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 나간다. 이내 세계 전역으로 감염병이 퍼지고 대혼란이 발생한다.영화 끄트머리에서 우리는 감염병의 근원을 알게 된다. 바나나 서식지를 공격받은 박쥐가 돼지농장에 날아가서 배설한다. 어린 돼지가 박쥐 배설물을 먹고, 돼지는 주방장에게 전달된다.코로나19 바이러스의 숙주(宿主)로 지목된 동물이 돼지와 박쥐였으니 족집게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문제는 바이러스의 숙주가 아니라, 바이러스가 전파되는 경로인 손이다.주방장의 손에서 시작된 바이러스 전파경로는 2020년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만지는 세상의 온갖 물건을 통해서 바이러스는 전파된다. 우리는 하루에 3천번 정도 얼굴을 만진다고 한다. 손은 얼굴을 만지기 전에 무엇을 만졌을까?! 명심하시라. 마스크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손을 잘 씻는 일은 훨씬 더 중요하다.

2020-03-11

늙어감에 대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우르크의 지배자 길가메시는 폭정을 일삼다가 신들이 보낸 엔키두의 공격을 받는다. 일주일 넘게 싸우던 두 용사는 싸움의 허망함을 깨닫고 친구가 된다. 길가메시는 삼나무숲의 수호자 훔바바와 싸우라는 신들의 명령에 따라 훔바바를 퇴치하고, 여신 이슈타르의 구애를 받지만 거절한다. 그 대가(代價)로 엔키두를 잃어버린 길가메시는 영생불사를 염원한다. 우트나피슈팀에게 불로초를 얻지만, 뱀에게 도둑맞고 인생무상을 수용한다.‘길가메시 서사시’의 기둥 줄거리다. 현대의학은 요즘 ‘길가메시 프로젝트’를 작동하고 있다. 인간수명 500세 프로젝트가 가동 중이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최장수명은 120세 전후로 알려져 있다. 그것을 4배로 확대하는 기획이 진행되는 것이다. 어째서 인간은 장구한 세월을 살고자 욕망하는가. 무엇이 그들에게 영생불사를 꿈꾸게 하는가.며칠 전 어머니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서 마음 졸였다. 연세를 생각하면 정신이나 육신이 건강한 편이어서 걱정하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악화하는 것을 보노라니 속이 찡해온다. 언제부턴지 온몸에서 기력이 빠져나가 삶의 의욕도 입맛도 사라졌다는 것이다. 평소의 생동감과 호기심 그리고 잔소리마저 실종되어 다른 사람처럼 돼버린 모친을 보는 것은 아픔이었다.막내는 노인성 우울증 같다고 말한다. 코로나19로 모친이 총무로 있는 경로당이 장기간 폐원한 상태여서 말동무도 없고, 마실도 나가시지 않았다는 게다. 온종일 텔레비전만 보다가 삼시 세끼 쓰디쓴 입맛으로 최저수준의 섭생으로 일관한 지 어언 1개월. 그로 인해 육신과 정신건강이 저하된 상태에서 공간 지각력이 극도로 쇠약해진 것이다.한국 사회에서 오늘날 대가족은 자취를 감췄다. 그 대신 1인 가구는 나날이 늘어만 간다. 나이든 부모를 봉양하는 마지막 세대가 ‘베이비붐’으로 태어난 50∼60대다. 한국전쟁 이후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태어난 711만에 달하는 중장년 세대를 가리켜 베이비붐 세대라 한다. 전체인구 가운데 14.3%에 이르는 베이비붐 세대는 우리나라의 중추를 이루고 있지만 실상 그들은 자녀양육과 부모봉양의 무거운 등짐을 진 마지막 세대다.베이비붐 세대의 일원으로 모친의 노화와 약화에 속수무책으로 두 손만 비비고 있는 형국이니 속이 쓰리다. 그나마 며칠 지난 후 점차 기력을 되찾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안도감이 생겨나기도 한다. 가벼운 실내운동과 따사로운 햇살 아래 동네 한 바퀴 도는 여유로운 산책을 권고한다. 형제들에게 잦은 방문과 대화, 유쾌한 소일거리를 함께 찾아보자는 식으로 모친의 안쓰럽고 아슬아슬한 늙어감과 마주한다. 길가메시도 붓다도 진시황도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탄생과 죽음은 모든 생명 가진 것들의 불가피한 운명이다. 필멸의 존재로 우리는 생로병사의 수인(囚人)이다. 노화와 죽음이라는 필연을 새삼 되새기는 시간이 코로나19와 함께 서서히 지나가고 있다.

2020-03-04

우한폐렴과 TK코로나

김규종 경북대 교수‘코로나19’가 극성이다. 코로나19는 애초 ‘우한폐렴’이나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불리다가 질병관리본부 건의로 코로나19로 사용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지난 2월 11일 감염증의 정식명칭을 ‘COVID19’로 결정했지만, 영어표현이 길고 생소해 코로나19로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코로나19 확진자가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특히 대구와 경북의 확진자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지역 거주민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신천지 대구교회와 청도 대남병원 확진자가 전체 확진자의 70% 가까운 비중을 점하고 있다는 사실은 적잖게 충격적이다.중국 호북성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19를 막아보자면서 통합당과 보수언론이 줄기차게 주장한 것은 ‘우한폐렴’과 ‘중국인 입국금지’였다. 2015년에 마련된 세계보건기구 명명법 기준에 따르면 특정지역 이름을 따서 감염병 명칭으로 삼는 것은 국제법상 올바르지 않다. 정부는 1월 27일 보도자료를 통해 ‘우한폐렴’ 대신에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라는 명칭을 권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통합당 전신인 자유한국당과 보수언론은 우한폐렴 명칭을 고수했다.대구와 경북에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자 보수언론은 대구 경북 거주민을 우롱하는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2월 20일 ‘중앙일보’에 “파장 커지는 TK 코로나”를 필두로 2월 21일 채널A는 “대구 코로나”, SBS는 “대구 고담시티”, 연합뉴스 텔레비전은 “대구발 코로나”를 줄지어 보도한다. 여당 국회의원과 대구시장이 대구와 경북을 모욕하지 말라고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해야 할 정도로 대경 지역민을 폄훼하고 모독하는 짓을 서슴지 않은 것이다.가관인 것은 ‘우한폐렴’을 주장한 통합당 의원이 “대구 코로나” 명칭에 반대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중국에 혹시나 흠이 갈까 봐 우한폐렴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고 펄쩍 뛰던 사람들이 이제 아예 대구 코로나라고 부르나”라는 희한한 논리를 전개한다. 그에 따르면 정부가 우한폐렴 대신 코로나19를 사용하는 것이 중국 눈치 보기나 사대주의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한폐렴은 되고, 대구 코로나는 안 된다는 논리는 어디서 나왔는지 궁금하다.2월 20일 통합당 원내대표 일갈도 흥미롭다. “국민이 알기 쉽게 맨 처음에 사용했던 우한폐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지금 정부가 중국 눈치를 너무 보고, 제대로 대응조치를 하지도 못하면서 중국 심기만 살피고 있기 때문에 이를 부각하기 위해서라도 일부러 지금 우한폐렴 명칭을 쓰고 있다.” 국민의 낮은 눈높이를 고려하고, 정부의 대중국 저자세를 비난하려고 우한폐렴 명칭을 고수한다는 것이다. 코로나19 초기에 중국을 오가는 항공기 운항을 금지한 이탈리아에서 확진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국인 입국금지를 주장하는 자들의 단견을 웅변한다. 바이러스가 행정적인 국경을 따라 이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엄중한 환란을 맞이하여 정쟁을 중단하고 국민과 더불어 현명하게 대처하는 자세가 절실한 시점이다.

2020-02-26

기록영화 ‘위로공단’

김규종 경북대 교수한국사회의 불평등과 모순을 담아낸 ‘기생충’이 오스카 작품상을 받은 여운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듯하다. 여전히 한국인들은 코로나바이러스와 함께 ‘기생충’을 화제로 삼고 있으니 말이다. 코로나로 인해 우울하고 답답한 우리의 내면을 활짝 열어준 ‘기생충’이지만, 영화가 전달하는 주제는 무겁고 우울하다.세상의 부조리와 모순과 상처를 보듬는 장르로 나는 기록영화를 꼽는다. 그것은 필시 ‘송환’의 김동환 감독의 지론에 동의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록영화가 세상을 바꾼다!” 2004년 개봉된‘송환’은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기록영화다. 자생적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수십 년 수형생활을 견뎌온 장기수들의 일상을 잡아내면서 분단으로 고통받는 인간군상의 내면을 천착한 ‘송환’.2003년에 개봉돼 화제를 모은 기록영화 ‘영매’는 다른 차원의 삶을 그려낸다. 세습무와 강신무의 일상과 고뇌를 담아낸 ‘영매’는 무당들의 세계를 세밀하게 포착한다. 대를 이어 무당일을 하는 세습무와 신내림으로 무당이 되어야 했던 여인들의 고단한 행장(行狀)을 보여준다. ‘송환’이든 ‘영매’든 기록영화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군상의 다채로운 면면을 드러내는 까닭에 여기저기 눈물바다가 만들어진다.임흥순 감독의 ‘위로공단’ 역시 영화를 보는 동안 왼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2015년 개봉된 ‘위로공단’은 1970년대 동일방직과 와이에이치 사건 그리고 1985년 구로공단 연대투쟁, 2005년 기륭전자 사태, 2013∼14년 캄보디아 유혈사태까지 다룬다. 40년 남짓한 시간대를 포착하는 감독의 시선은 과거를 거쳐 미래를 향한다. 영화가 제기하는 문제는 단순하되 정곡을 찌른다. “우리는 노동과 노동자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고 있는가?!”‘다산 콜센터’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말이 끝내 잊히지 않는다. “1970년대가 공순이의 시대였다면, 요즘은 콜순이의 시대일 뿐,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요.” 산업화의 시대라 일컬어지는 1970∼80년대 수출역군으로 불렸던 공장 노동자들의 일상을 대표하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우리는 동일방직과 와이에이치 사건을 거명한다. 여공들에게 똥바가지를 뒤집어 씌우고, 대량해고를 일삼은 사업가들. 그들 배후에서 이득을 취한 정치인들.와이에이치 사건으로 촉발된 부마항쟁과 10·26은 유신의 숨통을 끊는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그것은 1985년 구로지역 연대투쟁으로 발화한다. 극단 ‘천지연’의 ‘선봉에 서서’ 공연이 이뤄진 것은 1987년 영등포의 ‘성문밖교회’였다. 얼마나 많은 노동자와 대학생들이 모여 ‘선봉에 서서’를 열창했는지, 지금도 가슴이 떨려온다.‘위로공단’ 끄트머리에서 한국인 노동자와 같은 임금과 상여금을 요구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요구에 우리는 무엇이라 답할 것인가. 노동 없는, 노동자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식부터 바꿔야 하지 않을까?!

2020-02-19

오스카와 블랙리스트

김규종 경북대 교수2020년 2월 10일 아주 반가운 소식이 태평양을 건너왔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제92회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과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한 것이다. 온종일 한국언론은 야단법석 북새통으로 시끌벅적하여 잔칫집 분위기가 물씬 풍겨 나왔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세계가 신음하고 있던 와중에 들려온 낭보(朗報)에 한국인 모두가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참 좋았다.2003년 ‘살인의 추억’으로 재능을 선보인 봉준호는 ‘괴물’(2007)과 ‘설국열차’(2013)로 관객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문학교수, 영화 속으로 들어가다’ 연작(連作)을 7권까지 출간한 나는 일찍부터 그의 놀라운 성실성과 꼼꼼함에 감복한 터였다. 1980년대 전두환 군부독재를 영상으로 고스란히 살려낸 ‘살인의 추억’은 정말로 살 떨리는 ‘봉테일’의 극치였다. 당대의 사건사고와 시대상황을 손에 잡힐 듯 그려내는 치밀함과 준비자세는 실로 놀라웠다.‘괴물’의 도입장면은 특히 인상적이다. 주한미군이 독극물을 한강에 무단으로 방류함으로써 괴물이 태어났음을 보여주는 기막힌 장면. 이 나라 금수강산을 무참하게 도륙하는 강대국의 정복자 이미지를 간명하게 포착하는 장인의 솜씨. 근미래 인류의 처참한 양극화와 계급투쟁을 그려낸 ‘설국열차’ 역시 호모사피엔스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짚어낸 수작(秀作)이다.오스카 4관왕 소식에 정치권도 부산하게 움직였다. 나는 자유한국당 논평이 궁금했다. 봉준호 감독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불이익을 제공한 정치인들의 집합소가 자유한국당 전신 새누리당 아닌가! 그들이 작성한 블랙리스트에 이런 문구가 나온다. “대중이 쉽게 접하고 무의식중에 좌파 메시지에 동조하게 만드는 좋은 수단인 영화를 중심으로 국민의식 좌경화 추진.”문화를 통한 국민의식 좌경화를 꾀하면서 반미와 정부의 무능을 부각한 대표적인 영화로 그들이 꼽은 영화가 ‘괴물’이었다. 당시 집권당이자 이명박-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받들어 모신 집단의 의식수준이 그 정도였다.‘기생충’을 바라보는 자유한국당 인사들의 의식 역시 다르지 않다. “체제전복의 내용을 담고 있는 전형적인 좌파영화”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그런데 2월 10일 자한당 대변인 논평은 전혀 달랐다. “봉준호 감독의 오스카 수상은 세계에 한국영화, 한국문화의 힘을 알린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공당의 입장이 이렇게 조변석개해도 괜찮은지 궁금하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감독을 국민의식을 좌경화하는 인물로 낙인찍고 불이익을 준 장본인들이 갑자기 희희낙락하는 저의는 무엇인가.더욱이 자유한국당 대변인은 “오스카상 수상을 우한 폐렴으로 침체와 정체, 절망에 빠진 대한민국에 전해진 단비 같은 희소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우한 폐렴으로 절망에 빠진 나라가 우리나라인가, 중국인가, 그것을 묻고 싶다. 우한 폐렴이란 말 대신에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을 써야 한다는 것도 알려주고 싶다.

2020-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