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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살처분과 공장축산

김규종 경북대 교수세종은 젊어서부터 고기가 아니면 밥을 먹지 못했다고 한다. 세종실록 2년 8월 29일 기록이다. 하지만 세종은 상사(喪事)를 당하면 짧게는 며칠, 길게는 한 달 넘도록 고기반찬 없는 소찬(素饌)으로 일관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수많은 고기로 넘쳐난다. 소와 돼지, 닭과 오리는 물론 바다에서 잡고 기른 허다한 어류가 밥상에 오른다. 5천년 한민족 역사에서 이토록 먹을거리가 풍요를 구가했던 때는 일찍이 없었다.새옹지마(塞翁之馬)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세상에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는 법. 우리에게 자신의 몸을 내주고 불귀의 객이 되어야 하는 수많은 생명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다. 더욱이 각종 전염병 때문에 살처분된 숱한 생명을 돌이키면 가슴이 먹먹하다.보도에 따르면, 2010년 구제역 발생 이후 2018년까지 여덟 차례 구제역으로 38만 마리의 소와 돼지, 일곱 차례 조류인플루엔자로 6천900만 마리의 닭과 오리가 살처분되었다고 한다. 2019년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살처분된 돼지 47만 마리까지 더하면 지난 10년간 7천만 마리의 생명이 가축 전염병 예방이라는 목적으로 죽임을 당해 이 땅에 묻혔다.어디 그뿐인가. 2010년 이후 가축 전염병으로 인한 살처분에 소요된 비용만 4조원에 이른다. 농가 피해보상 외에도 가축사체와 오염물을 소각-매립하고, 전염병 발생지역의 소독과 매립지 관리에 거금이 소요된 것이다. 여기에 매몰지에서 발생하는 사체 침출수 유출로 인한 토양과 수질오염이 추가된다.요즘에는 살처분 가축을 묻을 매몰지를 구하는 일도 어렵다고 한다.살처분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트라우마도 우심하다.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시한 ‘가축매몰 참여자 트라우마 실태조사’에 따르면 대상자의 76%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유사증상을 보였다고 한다. 2011년 충남의 축협 직원이 살처분 작업으로 인한 극심한 트라우마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태가 벌어진 바 있다.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생명을 산 채로 땅에 묻어야 했던 인간의 비극적인 운명이 눈에 밟힌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대안(代案)을 찾아야 한다. 전염병이 발생할 때마다 수십만 수백만 마리의 가축을 생매장하는 하는 일은 그만두어야 한다. 그것은 생명을 존중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일 것이다. 가축 전염병 창궐은 멧돼지나 야생조류뿐 아니라, 공장식 밀집축산에도 있다. 가축 전염병이 급속도로 전파되는 이유는 공장식 밀집축산에 있기 때문이다. 비좁은 축사 안에 대규모로 가축을 양산하는 방식은 지양해야 한다,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율을 올리는 것도 좋겠지만, 인간과 가축이 공존하는 토양은 마련해야 한다. 인간을 위해 무차별적으로 도살되고 매몰되는 가축이 아니라, 기본적인 동물복지라도 준수하는 환경이 요구된다. 세종이 드신 소와 돼지, 닭과 오리는 평온한 환경에서 자란 가축이었을 터다. 우선 거기까지라도 가면 어떨까.

2020-01-22

게으름에 대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더러 억장으로 취하는 때가 있다. 나이 먹고 몸이 부실한 것도 원인이겠으나, 강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술에 장사 없다는 말을 실감하곤 한다. 주독으로 고단해진 육신을 추스르다 보면 성찰의 시간이 찾아온다. 구토와 오심으로 괴로워한 적도 있으나, 요새는 그런 일이 없다. 그것도 음주 행각으로 얻어낸 작은 지혜이거나 깨달음이려니 생각한다.나른해진 몸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지난 일을 회억하거나 흐뭇한 추억에 잠기는 날도 있다. 아마 그것이 음주 다음 날의 유쾌한 선물일 것이다. 온종일 빈둥거리면서 몸과 마음을 분망한 일상과 격절(隔絶)하는 한가한 하루! 술을 싫어하거나 홀짝거리는 정도의 애주가는 빈둥거림의 미학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마다 세상과 대면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자크 러클레르크의 ‘게으름의 찬양’(1936)을 선물받았다. 버트란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1935)을 인상 깊게 읽었기로, 같은 부류의 서책이려니 짐작했다. 러셀은 모든 지구 거주자가 하루 4시간 노동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견해를 주장한다. 문제는 누군가는 전혀 노동하지 않으면서 부를 축적하고, 어떤 이들은 장시간 노동으로 혹사당하는 것이다.세상에는 온종일, 매달, 매년, 종신토록 놀고먹는 자들이 있다. 그것도 적잖은 자들이 그런 놀라운 행운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다. 아무리 일해도 하루 세끼 배불리 먹지 못하는 인간도 아주 많다.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조국과 부모 때문에 이런 편차가 생겨난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하는 말은 괜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그런 까닭에 우리는 흙수저와 금수저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시대를 살아간다. 그것이 운명이나 되는 것처럼.러클레르크 신부가 게으름을 찬양하는 까닭은 근본적으로 ‘속도’에 있다. 너무 신속하게 변해가는 세상과 거기 편승해서 ‘더 빨리’를 외쳐대는 20세기 초반 유럽의 풍경을 그려낸다. 2차 대전으로 느림이 찾아왔다는 그의 생각은 무척 새로운 것이었다. 수많은 인명살상을 가져온 전쟁의 참화가 아니라, 속도경쟁에서 빠져나오도록 인도한 전쟁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하는 혜안과 통찰! 하지만 2차 대전 직후 인간은 우주로 날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달에 도달한다. 옥토끼가 절구질한다는 항아의 달에 사람이 꿈처럼 발자취를 남긴 것이 벌써 50년 전 일 아닌가?! 결국 그것은 지구 자전속도를 능가하는 속도에서 비롯된 일 아닌가! 오늘날 우리는 300킬로미터의 시속으로 전국을 오가고, 시속 1000킬로미터 내외로 지구를 왔다 갔다 한다. 그야말로 속도에 빠져서 살아가는 인생살이가 현대인의 특징처럼 각인된 시대다.느림은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게 해준다고 러클레르크는 말한다. “우리의 삶이 제대로 인간적이려면 거기에는 느림이 있어야 합니다.” 아주 큰 울림을 주는 구절이다. 올해에는 나도 어느 정도 빠름에서 놓여났으면 좋겠다. 그것이 궁금한 빈들거리는 하오가 느릿하게 지나간다. 여러분의 하루는 어떤가, 궁금하다!

2020-01-15

서향재에서

김규종 경북대 교수겨울비가 촉촉하게 내리던 1월 6일 월요일 저녁. 광주 동명동에 자리한 ‘서향재(書香齋)’에 도착한다. 서책의 훈향이 퍼져 나가는 집, 서향재. 이곳에서 30년 넘도록 시민들이 모여 책을 읽고 소감을 나누고 토론해왔다고 한다. 한 세대에 이르는 긴 세월, 세 번째 월요일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향재 독서모임 이름이 ‘세월회’라고 말한다.그날 모임에서 나는 ‘유라시아와 격동의 20세기’라는 주제로 강연했다.유라시아를 횡단하는 포괄적인 인문학 서책을 기획하고 있던 터라, 그 일부를 파워포인트로 정리해 선보인 것이다. 20세기 전체를 어찌 90분 남짓한 시간에 다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19세기에 강연 일부를 할애하였기로 시간은 더욱 짧아지고 말았으니.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20세기의 고갱이는 얼추 전달한 듯하다. 서향재에 빼곡하게 놓인 의자가 모자라 몇 사람은 마룻바닥에 앉을 수밖에 없는 형국이 된다. 듣는 이들은 불편했겠으나, 말하는 자로서는 퍽이나 고마운 일이다. 그렇게 유명하지도 대단한 인간도 아닌 자의 강연을 함께 해준 그들의 마음 씀씀이가 따스하게 다가온다. 청도의 농가주택에 살면서 붙인 당호가 ‘파안재(破顔齋)’이니, 파안재 주인이 서향재로 마실 나가서 한 마디 전한 셈이다. 그 말은 하지 않았으나 속은 훈훈한 저녁이었다. 돌이켜보면 2차 대전 후에 일제가 패망하고 나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이 20세기 한복판의 일이다. 우리로서는 잊을 수 없는 숱한 사건과 사변이 꼬리에 꼬리를 문 20세기 후반기지만, 세계사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물론 1-2차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커다란 전쟁은 없었으나, 한국동란을 필두로 베트남전쟁과 걸프전이 뒤를 이었다. 중국에서는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천안문사태로 숱한 인명이 살상되었다.20세기를 두 가지 말로 요약한다면 필시 문명과 야만이 되리라. 한편으로는 과학과 기술이 불러온 물질문명과 의약과 보건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삶의 질이 풍요로워진다.다른 한편으로는 1917년 사회주의 10월 혁명과 내전, 1-2차 세계대전과 국지전으로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는 참화가 벌어진다. 그리고 21세기에도 중동의 전운은 전쟁의 참화를 예고한다. 1월 3일 있은 미군의 카셈 솔레이마니 이란 군사령관 폭살(爆殺)이 좋은 본보기다.이라크를 방문 중인 이란의 전쟁영웅 솔레이마니를 처단해버린 미국의 처사에 국제사회가 분노하고 있다. 남의 나라 한복판에서 은밀하고 야비하게 군사작전을 실행하는 나라가 어찌 인권과 민주주의를 운운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2차 대전 이후 세계의 패권국가로 등장한 미국의 악행이야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21세기 스무 번째 벽두에 자행한 행악질은 실로 경악스럽기 그지없다.서향재에 모인 시민들과 함께 차분하게 돌아본 20세기의 교훈은 단출하다. 야만을 경계하면서 문명을 유지-발전시키는 것이다. 묵묵히 자신과 사회와 세계와 역사를 돌이키고 사색하는 시민들의 서향재는 오래도록 환하게 빛나리라.

2020-01-08

2020년 새로운 길에 오르며

김규종 경북대 교수다시 새로운 해가 시작됐다. 21세기 스무 번째 새해가 떠올랐다. 해마다 12월 31일이면 수많은 인파가 동해로 달려 나간다. 지체와 서행을 반복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맹렬 기사들이 거리에 차고 넘친다. 그들의 목표는 하나! 새해일출을 보고 소원을 비는 것이다. 길이 아무리 멀고 고단해도 그들의 바람을 꺾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그만큼 절실한 소망과 꿈이 있다는 얘기다.싫든 좋든 2020년은 시작됐고, 우리는 다시 새로운 길에 올랐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이 없으며, 길은 다시 다른 길과 이어지며 확장된다. 길을 걸으며 우리는 자연지리와 인문지리를 배우고, 드넓은 자연과 세상의 풍경에 깊이 감복한다. 우리나라가 좁다고들 하는데, 그들에게 매번 묻고 싶은 말이 있다. “그대는 이 나라 산천을 얼마나 다녀보았는가. 자동차나 열차가 아니라 발품을 팔아서 걸어본 곳이 얼마나 되는가?!”걷는다는 것은 속도의 욕망을 극복하고 사유와 인식과 정서를 극대화하는 일이다. 빨리 달릴수록 우리는 아무것도 보거나 듣지 못한다. 그저 달릴 뿐이다. 그것은 행선지를 향한 유일목표, 즉 도달에만 집중하는 행위다. 과정은 사라지고 결과만 남는 질주의 행렬은 우울하거나 초라하다. 걷는다함은 과정을 중시하는 것이며, 느림에서 비롯하는 새김질과 반성과 성찰이 덤으로 보태진다.얼마 전에 친구 하나는 에스파냐의 ‘산티아고 순례길’ 가는 것이 꿈이라 했다. 나는 즉시 다른 생각을 전했다. 우리나라 곳곳에 자리한 크고 작은 길을 함께 걸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것이다.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 거기서도 다시 이동하여 순례길 초입까지 가야 한다. 아주 멀리 있는 타국의 길보다는 산천경개(山川景槪) 수려한 한반도 남단을 느긋하게 걸으며 상념에 젖거나 지난날을 추억하거나 미래를 기획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다.요즘에는 지자체 곳곳에서 경쟁하듯 길을 제공하고 있기에 발품 파는 일도 어렵지 않다. 부담 없는 일정 짜서 걷다 일상으로 복귀하고, 멈춘 곳에서 다시 출발하면 그만 아닌가. 특별한 목표를 정하지 않고, 이런 길 저런 길, 굽은 길 곧은 길, 언덕길과 산길, 오르막과 내리막, 바다와 강을 끼고 있는 길, 농촌과 산촌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얼마나 유쾌한 일인가.운이 좋으면 ‘길’의 잠파노와 젤소미나처럼 아픈 사랑을 했던 동반자의 구수한 이야기도 함께할 것이다. 문제는 당장 실천하는 것이다. 내일이나 모레, 그 어느 즐거운 날에 혹은 특정기념일을 염두에 두고 시작하는 것은 성사를 늦출 뿐이다. 현재의 수인이 되어 자기만의 성채에 둘러싸인 채 안주하지 않는다면, 2020년에 우리는 장정에 오를 수 있다.돌궐을 건국한 돈유곡의 말이 폐부를 찌른다. “성을 쌓고 사는 자, 기필코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 그가 살아남을 것이다!” 정주(定住)와 멈춤은 부패와 타락의 전주곡이다. 바야흐로 새로운 길을 향한 장정을 시작할 때다.

2020-01-01

2019 기해년을 보내며

김규종 경북대 교수어허! 하는 소리가 내면에서 울려 퍼진다. 한 해가 잠깐이었다는 생각에 화들짝 놀라게 되는 연말이다. 황금돼지띠라 해서 요란스레 시작된 기해년이 시나브로 저물어가는 시점. 누구라 할 것도 없이 커다란 바람과 꿈을 가지고 맞이한 대망의 2019년이 작별을 고하고 있다. 자기 나이만큼의 속도로 세월을 체감한다는 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겠다.1월 달력부터 돌아보니 신년벽두부터 분망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부친기일과 중고차 매매, 근대문화동아리와 설날일정까지 달력에 빼곡하다.그렇게 문을 연 기해년 1년을 광주에서 보내고 어느덧 대구로 귀환할 날짜가 임박해 있다. 조금은 낯설고 설레던 광주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이것저것 배우고 익히느라 발품 팔았던 기억이 훈훈하다. 5월 17일에는 망월동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구 전남도청과 금남로를 누비고 다녔다.돌이켜보면 지난 5월 3일 오후 5시 무렵 시간대가 기억에 삼삼하다. 전남대 인문대학 1호관에서 ‘김남주 기념홀’ 개관식이 있었다. 봄날의 따사로운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던 그날, 시인의 짧았지만 강렬한 삶의 자취를 돌아보았다. 한쪽 손에 담배를 든 채 환하게 웃는 흑백사진 속의 김남주 시인. 그날 모여든 사람들과 주고받은 시인을 향한 추모의 마음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이다.시인과 문사(文士)를 추모하는 것은 유의미한 일이다. 나라와 민족과 역사를 성찰하고 미래를 기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정주를 별로 내켜하지 않는 까닭은 그가 지닌 얄팍한 자존심과 턱없이 부족한 역사의식 때문이다. “나는 일제가 4-500년은 갈 줄 알았어!” 어째서 친일시를 썼느냐는 질문에 그가 답한 내용이다.시 잘 쓰는 기술자이자 장인이기는 했으되, 되돌아선 예언자이자 사가(史家)의 구실을 담당하지 못한 자의 어눌한 변명이니.김남주는 1960년대 김수영과 70년대 김지하와 더불어 한국 현대시사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행동하는 전사(戰士)이자 지식인으로 평생을 살았던 김남주. 그를 영면하게 하는 일은 소박한 가족주의와 부박한 정파주의, 날카로운 이해관계와 권력을 향한 추악한 열망을 내려놓는 일이다. 작은 범주의 나와 우리에서 벗어나 대동의 한마당으로 달려 나가는 것이라 믿는다. ‘동이불화’와 ‘화이부동’의 선연한 차이를 새기는 일이 긴요한 시점이다. “남의 작은 허물을 마음에 두지 말고, 내가 가진 작은 지혜라도 나누는” 자세를 강조한 수운 최제우 선생의 가르침이 새삼스럽다. 21세기 각박한 현실주의의 수인(囚人)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은 타자의 작은 허물에는 눈이 밝지만, 자신의 큰 잘못에는 아주 관대하다. 다들 ‘내로남불’의 방책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기에 하루도 시끄럽지 않은 날이 없다. 남에게 관대하고, 자신에게 철저한 자세를 가진다면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될지도 모르겠다.올해 우리가 갈 수 있는 길은 막힌 셈이다. 그러니 잠시 쉬면서 돌아온 길 살피고, 2020년에 밟을 새로운 길, 생각해봄이 어떠한가?! 독자 여러분의 건승과 행운을 기원한다.

2019-12-25

툰베리와 트럼프 그리고 보우소나루

김규종 경북대 교수12·12 군사쿠데타 40주년이던 지난 12일 시사주간지 ‘타임’은 올해의 인물로 그레타 툰베리를 선정했다. 스웨덴 국적의 약년(弱年) 16세 소녀 툰베리는 특별한 이력의 소유자다.그녀는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여성, 영국 ‘비비시’가 선정한 올해의 여성 100인, ‘타임’이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100인으로 선정된 바 있다. 툰베리는 세계적인 기후위기에 매주 금요일 학교를 가지 않고 스웨덴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한다. 그리하여 세계 150개국 청소년들이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각국 정부의 즉각적인 대응을 촉구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툰베리는 말한다.“오늘날 우리는 석유 1조 6천억 리터를 단 하루 만에 사용합니다. 어떤 정치체도 이것을 바꾸려하지 않아요. 석유를 지하에 묶어두려는 법규는 없어요. 따라서 법을 따르면 세상을 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법이 바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시작해야 합니다.”트럼프는 2016년 11월 4일 발효된 ‘파리협약’을 2019년 11월 4일 탈퇴한다고 선언한다. ‘파리협약’은 세계가 기후위기에 한마음으로 대응하기로 한 약정이지만, 탈퇴는 발효시점에서 3년이 지나야 가능하다. 더욱이 탈퇴가 완료되는 데에는 다시 1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미국의 ‘파리협약’ 탈퇴가 실효를 거두는 시간대는 2020년 11월 4일, 미국 대통령선거 다음날이다. 과연 다음 미국 대통령은 누가 될 것인지 궁금한 대목이다. 그러하되 ‘타임’이 올해의 인물로 툰베리를 선정한 당일 73세의 노인 트럼프는 툰베리에게 고약한 트위터를 날린다. “아주 웃긴다. 그레타는 자신의 분노조절에 애써야 한다. 그러고 나서 친구랑 좋은 옛날 영화를 보러 가라. 진정해라 그레타, 진정해!”열여섯 살배기 툰베리의 응수가 재미있다. 그녀는 트위터의 자기소개 공간에 ‘자신의 분노조절 문제에 애쓰는 10대 청소년. 현재 진정하고 친구와 좋은 옛날 영화를 보고 있음’이라고 쓴다. 누가 더 성숙한 인격을 갖추고 있는 교양인이자 어른인지, 가늠하기 어렵지 않다.이것은 보수우익 트럼프에 국한하지 않는다.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도 툰베리를 ‘버릇없는 꼬맹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툰베리는 보우소나루의 방조 아래 아마존 삼림을 불법으로 벌채하는 브라질 당국에 맞서 싸우다가 원주민들이 계속 살해당하는 현실에 침묵하는 세계가 부끄럽다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64세의 환경파괴자 극우파 브라질 대통령에게 맞서 툰베리는 트위터에 자신을 ‘버릇없는 꼬맹이’라고 응수하면서 맞장 뜬 것이다. ‘브라질의 트럼프’ 혹은 ‘열대의 트럼프’로 불리면서 친기업-반환경정책을 밀어붙이는 보우소나루에게도 툰베리는 눈엣가시가 분명하다. 하지만 그녀가 물러설 기색은 없다. 사회관계망 서비스로 세계 전역에서 이들의 흥미진진한 대결을 응시하고 있다. 노년의 남성 정치가들과 소녀티를 벗지 못한 툰베리의 대결이 21세기 지구촌의 운명과 직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2019-12-18

암의 습격

김규종 경북대 교수요즘 마음이 아주 무겁다. 즐거운 일이 있어도 흔쾌하지 않다. 오랜 세월 가까이 지낸 후배교수가 항암투병 중이기 때문이다. 지난 9월 30일 ‘담도암’ 4기로 각종 장기를 제거하는 대수술을 받은 그는 몸무게가 15㎏이나 줄었다고 한다. 그것도 부족해 5개월 예정의 기나긴 항암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요즘에는 10분 앉아있는 것도 힘들다고 한다. 그토록 활달하고 건강했던 50대 초반의 가장이 한순간에 고통의 나락에 떨어지다니?!울림 좋고 당당한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 7월 중순 일이다. 울산에 일이 있어서 전화했을 때, 그는 두 아들과 저녁식사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쾌활하고 명석하며 해맑은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쟁쟁하다. 조만간 한 번 보자며 전화를 끊고, 불과 2개월, 암수술을 받은 게다. 아니, 이런 경천동지할 일이 있나?! 멀쩡하던 사람이 느닷없이 암의 습격을 받고 병상에 누워있다니.지금도 그의 투병생활이 실감나지 않는다.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가장이며, 대학교수이자 교양교육원장 직책을 수행하면서 연구와 교육에 전념하던 창창한 장년의 사내. 언제나 밝은 웃음과 투명한 성정으로 주변을 환하게 밝혀주던 사람이 암에게 불의의 일격을 받아 쓰러진 것이다. 현대의학은 어디까지 인간의 생명을 보장할 수 있는지, 단단히 회의가 드는 것이다. 무의미한 생명연장에 반대하는 자발적인 연명의료 중단노력이 진척됨으로써 의술에 대한 믿음이 커지는 상황에서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나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한편에서는 ‘길가메시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이른바 500세 인생에 도전하는 신기원이 싹트고 있다. 여타 두더지들보다 노화가 훨씬 느리고 4배나 오래 사는 장수 유전자를 가진 두더지에서 단서를 얻은 연구자들이 진행하고 있다는 ‘길가메시 프로젝트’는 극소수 부자들을 위한 것이겠다.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의료비는 하락할 것이고, 그러다보면 호모사피엔스의 평균수명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여지가 충분하다. 하지만 후배교수를 생각하면 앞이 캄캄하다. 언제 어디서 ‘암’을 비롯한 치명적인 질병의 급습으로 생명에 적신호가 켜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현대의학은 아직도 암과 싸우고 있지만, 총체적인 승리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도대체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생각하면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그저 안부를 묻고, 삶을 향한 강렬한 의지를 일깨우고, 생명에 대한 의욕을 고취시키는 일 말고는 애당초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에 무력해지곤 한다. 그를 공격한 암이 어느 날 갑자기 나를 덮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거리를 배회하는 수많은 인총들이 암과 무관하다는 사실마저 새삼 경이롭게 다가오기도 한다.그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외로우며 원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진다. 그래도 어찌 하겠는가?! 끝까지 싸워서 이겨내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 하늘로 날려 보낸다. 이 친구야, 훌훌 털고 일어나시게! 반드시 살아서 인간세상으로 귀환하시게!

2019-12-11

6조를 내라고?!

김규종 경북대 교수‘다이내믹 코리아’는 쉬지 않는다. 나라 안팎의 사정도 그렇거니와,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하고 역동적이며 욕망에 들뜨고 미래를 기획하는 한국인! 그래서 영국의 좌파 저술가 마틴 자크는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에서 2050년 1인당 국민소득 1위로 대한민국을 꼽는다.그가 말하는 세계 1위 한국의 저변에 자리하는 것은 조지 소로스가 말하는 휴전선 철폐와 남북한 단일 경제공동체이리라.그것은 불과 30년 뒤의 일이다. 그것은 꿈도 아니고, 망상은 더더욱 아니다. 1960년대 세계 최빈국에서 2018년 30-50클럽에 가입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니까. 나는 ‘국뽕’ 개념으로 30∼50클럽을 말하지 않는다. 이념갈등, 빈부갈등, 노사갈등, 세대갈등, 종교갈등, 남녀갈등처럼 다차원적으로 작동하는 한국의 갈등기제는 임계점 직전까지 팽창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생각한다. 더 이상 나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747’ 삽질과 ‘우주의 기운’ 운운했던 암흑시대를 지나면서도 우리는 세계가 인정하는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성취하는 저력을 발휘했다. 그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아무리 우심한 내우외환이 얽히고설킨다 해도 난관을 우리는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것은 실패하지 않은 역사문화의 전달에 있다. 실패한 과거에서 배우고, 잘못된 과거를 관 속에 처넣고 대못을 치는 강력한 역사이해와 실천기제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얼마 전부터 한국사회를 요동치게 하는 청구서가 우방이자 동맹이라는 미국에서 날아들었다. 물경 6조를 내란다. 작년에 1조 2천억을 냈는데, 그 5배를 내라는 것이다.2015년에 담뱃값을 2천원 올리자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2천500원을 4천500원으로 0.8배 인상한 것이다. 그것만 해도 엄청난 충격이었는데, 한꺼번에 5배를 인상하라는 통지서를 날리고, 이의를 제기하니까 협상장을 박차고 나가버린다.우리 국민 모두는 알고 있다. 한미동맹이 한미일동맹의 하부구조에 있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일본열도를 지켜주는 미일동맹의 실핏줄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평택에 세계 최대 규모의 미군기지 지어주고, 10조원으로 추산되는 미군기지 정화비용도 청구하지 않은 한국정부 아닌가?! 그런데 그들이 요구하는 6조의 실상을 보면 기도 차지 않는다.기존에 관행적으로 지급한 인건비, 군사건설비, 군수지원비(통상 9천억)는 당연하고, 괌이나 알래스카, 하와이에 있는 미군 순환배치 비용과 전략자산 전개비용도 한국이 내라는 것이다. 주한미군 특별수당은 물론 미군이 동반한 가족에게도 특별수당 주면 안 되겠냐는 게 미국의 주장이자 요구다. 이런 요구에 정부는 물론이고, 정치권 모두 초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때마침 우리에게는 지소미아 카드도 아직 살아 있고, 중국에서는 왕의 외교부장이 12월 4∼5일 이틀 예정으로 한국을 찾는다. 2016년 사드배치 이후 3년 만의 일이다. 우리가 가진 석장의 카드를 지혜롭게 활용해 전례 없는 난국을 풀어나가야 할 때다.

2019-12-04

죽음의 형식과 방식

김규종 경북대 교수야스나야 폴랴나에 있는 레프 톨스토이 생가에 녹음이 한창인 어느 해 7월, 오솔길을 걷노라니 목소리 들린다. “여기가 톨스토이 무덤이에요.” 순간 걸음을 멈춘다. 아무런 표지도 비석도 없이 관 모양의 직육면체가 초록의 풀로 덮여 있을 뿐. 일행은 잠시 숨 고르고, 나는 선글라스 벗고 고개 숙인다. 그것이 톨스토이 무덤임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무심코 지나칠 법한 수더분한 공간에서 인류 최후의 타이탄은 누워 있었다.“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크레타의 이라클리온에 잠들어 있는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묘비명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처럼 바람처럼 물처럼 자유롭게 살다가 영면한 카잔자키스. 이승과 저승 모두에서 아무 욕망도 어떤 두려움도 없이 초월적이고 자유로운 경지에 도달한 시인이자 소설가. 나무 십자가 뒤편 투박한 석관 위의 묘비에 새겨진 글귀는 인생의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다.톨스토이와 카잔차키스 무덤만큼 심금(心琴)을 울리는 무덤은 없다. 지극히 간명하되 폐부를 찌르는 소박함. 살아서나 죽어서도 거대한 족적을 자랑하는 거인들의 단순하고 질박(質朴)한 주검의 그릇!무덤이 죽음의 형식이라면, 임종은 죽음의 방식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문제만은 아니다. ‘길가메시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21세기에도 삶과 죽음의 마지막 경계를 어떻게 넘을 것인가는 여전한 과제다. 주변을 돌아보라. 오늘 받은 부고장의 주인공은 대개 요양병원이나 응급실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다가 세상과 작별한 분들이다. 필시 그들 대다수는 최후의 순간에 자식도 알아보지 못한 채 임종을 맞이했을 것이다.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져야 한다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자료에 따르면, 연명의료를 중단한 환자가 7만을 넘었고, 그런 의향을 밝힌 사람도 43만을 넘었다. 연명의료 결정제도가 도입된 2018년 2월 4일 이후 올해 10월 말까지 21개월 동안 연명의료를 유보하거나 중단한 사람은 7만996명이라고 전한다. 연명의료는 임종과정 환자에게 행하는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착용, 혈액투석 및 항암제투여 같이 임종과정만 연장하는 의학적 시술이다.생물적인 목숨만 남아있는 상태를 지속하는 연명의료는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인간적인 존엄을 지키지 못한 채 죽음과 대면하는 환자. 정신적-물질적인 부담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가족. 그들 모두의 무겁고 수고로운 짐을 덜어주려고 시행된 제도가 차분하게 착근하고 있는 것이다. 짐작하기로 연명의료 중단의향을 지지하는 사람은 계속 늘어날 것이다. 생의 마지막 길만큼은 자유의지로 선택하고 싶기 때문이다.정신이 또렷한 채 가족과 작별하는 임종의 자리는 경건하고 엄숙하며 숙연하다. 인공호흡기를 꽂은 채 맞이하는 처참한 죽음과 천양지차다. 누구나 맞이하는 생물적인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거룩한 표정과 목소리를 온가족이 함께해야 한다고 믿는다.

2019-11-27

유럽과 아시아

김규종 경북대 교수1988년 햇살이 따사로웠던 4월 중순, 로렐라이 언덕을 찾아가는 길에 라인과 모젤, 란 강이 만나는 코블렌츠에서 중년신사와 대화를 튼다. 유럽의 시간은 영원히 사라진 것 아니냐는 나의 질문에 아니라는 답이 순식간에 나온다. “유럽은 한 지붕 아래!” 하고 그가 간명하게 말한다.장구한 세월 유럽은 고만고만한 나라들이 각축을 벌이며 살아왔다. 특별한 절대강자 없이 전개된 피의 역사에서 ‘유럽은 한 지붕 아래’라는 전통이 세워진 것이다.‘유러피언 드림’에서 세계주의자 리프킨은 유럽이 공유하는 두 가지로 기독교와 계몽주의를 제시한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래 유럽은 예수와 마리아의 그늘 아래 있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인류역사에서 최고의 가치를 구현한 4인으로 예수와 마리아, 베드로와 바울을 거명한다. 지리상의 발견과 신대륙 착취에 기초한 17-18세기 계몽주의는 유럽의 과학적 세계관과 제국주의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그런 맥락으로 유럽을 보면 대강(大綱)이 잡힌다. 에르도안 이후 터키는 더 이상 유럽연합 가입에 목을 매지 않는다. 이슬람이자 계몽주의와 무관한 오스만튀르크의 후예가 어찌 유럽연합 회원국이 될 수 있겠는가?! 동유럽 국가들과 달리 제국의 영욕(榮辱)을 역사적인 자산으로 가진 러시아도 유럽연합과 무관하다. 그들은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끼어있는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19세기 중반에 정체성 혼란을 겪은 일도 있다. 그런데 프랑스 대혁명과 결부해 흥미로운 사실이 보인다. 프랑스는 물론이려니와 영국과 도이칠란트, 오스트리아까지 대혁명과 결부한 혁명문학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1837년 뷔히너가 장막희곡 ‘당통의 죽음’, 1859년에 디킨스가 ‘두 도시 이야기’, 1862년에 위고가 ‘레미제라블’을 쓴다.위고가 “예수 탄생이후 가장 위대한 사건”이라고 규정한 프랑스 대혁명을 문학적인 자산으로 공유하는 유럽. 하지만 아시아에는 그런 전통이 없다. 동북아의 절대강자 중국과 남아시아의 패자 인도,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및 서남아시아의 무슬림 국가들과 이스라엘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에는 유럽이 공유하는 종교-문화-예술적인 자산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다채롭고 중층적인 아시아는 커다란 덩어리로 나누어 이해하는 편이 수월해 보이기도 한다.그런 점에서 습근평이 주도하는 ‘일대일로’에 눈길이 간다. 현대판 실크로드 ‘일대일로’가 어디까지 순항할지 궁금하다. 요즘 우리를 사로잡는 홍콩시위는 다른 과제를 던진다. 홍콩의 민주화투쟁이 어떤 의미인지, 숙고해야 할 듯싶다. 유럽 내지 영국식 민주주의의 고수인지, 중국 내정문제인지, 혹은 대만까지 포괄하는 동북아 전체문제인지, 명징한 판단이 쉽지 않다. 막강한 백과사전을 손에 쥐고 있지만, 세계적인 문제의 올바른 인식과 정의는 난맥상이다. 숱한 사건과 전쟁으로 점철된 유라시아 동과 서에 자리한 아시아와 유럽은 특별하게 공유하는 대목이 없다. 그럼에도 유럽과 아시아는 정말 많이 다르다, 하는 것만은 분명한 아침이다!

2019-11-20

베를린 장벽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1989년 11월 9일 동서 베를린을 차단한 장벽이 무너진다. 1961년 이후 28년 만의 일이다. 유라시아 동쪽의 냉전 상징이 휴전선이라면, 서쪽의 상징은 베를린 장벽이다. 베를린 자유대학에 다니던 나는 장벽붕괴를 실시간 경험한다.유고슬라비아 공용어인 세르보-크로아티아어를 제3슬라브어로 배우던 나는 담당강사 우베 힌리히스 교수와 서베를린 중심가 쿠담에서 역사적인 장면을 대면한다.“오늘 저녁에 특별한 일 있어요?” “아니, 없는데요.” “그럼 나하고 시내 나가서 동베를린 사람들과 이야기해 볼래요?!” “그러죠.” 이런 대화를 주고받고 난 다음 쿠담으로 나간다.거리 곳곳은 이미 흥분과 환희의 물결이 넘치고 있다.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다니며 큰소리로 떠드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이윽고 우리 일행은 큼지막한 레스토랑에 들어선다. 그리고 우베는 동베를린 사람들을 모아서 이야기를 시작한다.“자, 오늘 술값은 내가 냅니다. 자유롭게 마시면서 얘기해봅시다.” 그렇게 우리는 왁자지껄 끝없는 이야기에 빠져든다. 자신을 1961년생이라 밝힌 젊은 친구는 장벽 붕괴 이후 동서 도이칠란트의 재통일과 게르만족의 융성을 염원하는 발언을 남긴다. 왜 당신들은 ‘섹스 숍’에 몰려다니느냐는 물음에 ‘동베를린에는 없어서’, 하는 답이 돌아온다. 40도짜리 독주와 맥주를 섞어 마시면서 나는 휴전선이 무너지고 남북한이 하나 되는 날을 상상한다.장벽설치 이후 5천여명이 장벽을 넘고, 5천여명이 체포되고, 200명 가까운 사람이 사살된다. 동과 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갈라놓은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상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과 자주적인 외교방침, 소련의 재건과 개방정책을 들고 나온 고르바초프의 등장,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동요, 미소군비경쟁 종언 같은 사건들이 맞물리면서 장벽은 서서히 하지만 근본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다.1990년 10월 3일 두 개의 도이칠란트가 하나로 재통일된다. 장벽이 무너지고 불과 1년 지나지 않아서 동서가 하나로 합쳐지는 장면은 극적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그러하되 동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마르크스와 엥겔스 동상에 쪽지가 나붙는다. “우리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Wir haben keine Schuld)!”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억한다. 사회주의 진영의 선두주자가 저렇게 속절없이 무너지다니! 가늠하지 못한 사변이 ‘도둑처럼’ 찾아온 것이다.제2차 대전을 일으킨 당사자도 냉전과 분단을 극복하고 재통일하는데, 악랄한 일제의 식민통치와 대동아전쟁의 피해자인 한반도의 남과 북은 여전히 갈등과 대립을 진행한다. 작은 일 하나도 큰 나라 눈치 봐야하는 나라꼴도 안타깝지만, 역사의식 없는 전임 대통들을 생각하면 울화가 치민다. 그나마 돌아가던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마저 폐쇄해 버린 어리석은 자들! 언제 우리는 휴전선을 무너뜨리고 하나가 되려는가?!분단극복은 공염불이 아니라, 작은 손길 하나 마음 하나에서 시작되리라!

2019-11-13

남의 떡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인간의 이상한 심사 가운데 하나가 “남의 떡이 커 보인다!”일 것이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이 더 크고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다. “내 손의 새 한 마리가 숲속의 두 마리 새보다 값지다”는 서양속담이 있지만, 우리는 숲속의 두 마리마저 욕망한다. 인간이 탐하는 무한욕망을 지적하는 수많은 경구와 거룩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타자(他者) 소유의 대상을 부러워하는 못난이다.얼마 전에 전남대 교수들과 경북대와 전남대를 비교하는 얘기를 주고받았다. 핵심은 어디가 더 좋은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거점 국립대로서 경북대의 문제점을 말했지만, 전남대 교수들은 경북대의 강점을 힘주어 강조했다. 거기서 깨달은 대목이 ‘남의 떡’이다. 명색이 가방끈이 조금 긴 먹물도 ‘남의 떡’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는 자리였다.1년 동안 교환교수로 광주와 전남대에 있으면서 경험하고 있는 것 가운데 나는 대구와 경북대에 부재하는 것을 보고 느낀다. 그 가운데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것을 기록하고 기억하려 애쓴다. 훗날 대구로 귀환한 다음 나의 경험과 기록을 구체적인 일상에 적용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반면에 대구와 경북대에 한 학기 내지 잠시 머물렀던 그이들은 전남대와 광주에 부재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전달한 것이다. ‘남의 떡’에 내재하는 것은 비교하는 마음이다. 나와 타자, 내 소유와 타자 소유, 우리 것과 그들 것을 비교함으로써 가치판단에 도달하는 행위가 ‘남의 떡’에 깔린 사유의 근간이다. 비교는 대상화(상대화)를 통한 가치우열의 기본적인 방법론이다.여기서 출발하는 것이 학생의 성적평정에 활용하는 상대평가다. 학생이 도달한 지적-정신적 수준상승 정도를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다른 학생들의 수준과 비교함으로써 평가하는 방식이다. 지난 세기 90년대를 풍미(風靡)한 이른바 ‘에이 폭격기’들로 인해 대학에 강제된 상대평가는 교수와 학생 모두에게 독약이다. 학생은 자신의 평가를 남들과 비교당하기 때문이고, 교수는 학생들의 학업 수행결과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것을 상대화하는 기술자가 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이런 이유로 전남대의 절대평가 기준은 경북대와 비교해서 관대한 편이다. 전남대 학생과 교수가 상대평가의 질곡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비교는 나와 우리의 위치평가와 미래기획에 필요하겠지만, 비교에도 넘어서는 아니 되는 선(線)이 있기 마련이다. 나와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 역사적인 존립근거와 미래의 청사진을 타자와 끊임없이 비교하는 것은 자살행위다. 나는 내 식대로, 타자는 그에 맞는 잣대로 살아가면 그만이다. 아주 긴 세월 우리는 후진국과 개도국 타령 속에 날밤을 지새웠다. 3050클럽에 가입한 지금 우리는 ‘남의 떡’ 타령과 작별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허구한날 나라경제가 망조가 들었다느니, 곳간이 거덜 났다느니, 국민경제가 붕괴 직전이라느니, 하고 협박하는 가짜언론이 너무나 많다. 일본은, 미국은, 유럽은, 중국은, 하는 ‘남의 떡’ 타령은 그만 둘 때다. 떡 파는 분들에게는 아주 미안한 얘기지만.

2019-11-06

10·26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 총성이 울려 퍼진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이다. 안 의사가 발사한 세 발의 총탄에 맞은 이토 히로부미는 20분 만에 절명한다.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수행하던 3인의 일본인을 추가 저격한 후 “대한만세!”를 외치며 현장에서 검거된다.안 의사는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3월 26일 ‘여순(旅順)감옥’에서 순국한다. 거사 이후 꼭 5개월 뒤의 일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 총성이 울려 퍼진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와 차지철을 저격한 것이다. 와이에이치 사건, 신민당 총재 김영삼 의원직 박탈, 부산-마산 시민항쟁 같은 사회-정치적인 소요의 와중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10월 28일 전두환이 김재규를 체포하여 내란목적살인과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언도한다. 광주항쟁이 핏빛으로 진압되기 사흘 전인 1980년 5월 24일 김재규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안중근 의사는 수감 중에 ‘동양평화론’을 저술해 한국과 중국, 일본이 서양세력에 공동으로 대항할 것을 제안한다. “한-중-일이 ‘여순’에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한다. 3국 공동은행을 설립하고, 공용화폐를 발행한다. 3국 공동군대를 창설하고, 타국의 언어를 가르친다. 조선과 청국은 일본의 지도 아래 상공업 발전을 도모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동양평화론’은 1929년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대중의 반역’에서 유럽연합 창설을 주창한 것과 견주어 봐도 뒤지지 않는다. 공동은행과 공용화폐, 공동군대와 언어교육은 요즘 생각해도 시대를 앞서가는 사유와 인식이다. 다만, 일본의 지도를 받아 조선과 청나라가 상공업 발전을 도모한다는 내용은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명치유신으로 근대화된 일본은 ‘탈아입구’와 ‘정한론(征韓論)’에 기초하여 조선을 병탄하고자 혈안이었기 때문이다.김재규의 박정희 저격은 영화 ‘그때 그 사람들’(2005)에서 단편적으로 다루어졌을 뿐, 김재규의 사상과 저격배경은 미궁에 있다.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전개된 시민항쟁을 계엄령과 위수령으로 강제 진압한 박정희를 김재규가 저격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1980년 서울의 봄을 짓밟고, 광주학살을 바탕으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일당이 10·26을 신속하게 처리함으로써 사건의 실체는 가려지고 말았다. 김재규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는 말을 남겼다.그는 “만약 내가 복권되면 ‘의사 김재규 장군지묘’라고 묘비에 적어달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다. 그가 묻힌 경기도 광주시 엘리시움 공원묘원 추모비에 새겨진 ‘의사’와 ‘장군’ 네 글자는 심하게 훼손되어 10·26에 대한 상반된 평가를 웅변한다.70년을 사이에 두고 같은 날 벌어진 사건은 역사를 돌이키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안중근 의사 덕분에 한국인들은 일제 강점기를 꿋꿋하게 싸우며 버텨왔다.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김재규는 유신의 종말을 앞당기려 목숨을 던졌다. 일제의 잔혹한 식민통치를 망각해서도, 민주주의를 유린한 유신통치도 결코 되풀이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10·26의 소회다.

2019-10-30

영호남 교류 학술대회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지난 10월 18일 전남대 ‘김남주 기념홀’에서 ‘영호남 지역담론과 대학의 역할’을 주제로 ‘제1회 영호남 교류 학술대회’가 열렸다. 전남대 박구용 교수,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 황지우 시인과 필자가 발제를 맡았다. 오후 1시 반부터 시작한 학술대회는 5시 20분까지 이어지면서 지역감정과 지역갈등에 대한 다채로운 논의가 오갔다.남북이 분단된지 70여 년이 흘렀고, 동서분열까지 더해지니 더욱 고약한 노릇이다. 학술대회에서 지역감정을 논의하게 된 원인 제공자는 여러분도 익히 아시는 한국 제1야당 원내대표다. “문재인 정권은 광주일고 정권이고, 서울 구청장 24인 가운데 20명이 광주, 전남북 출신입니다. 우리 부울경 주민들이 뭉쳐서 심판합시다, 여러분!” 이것이 8월 30일 부산에서 열린 자한당 장외집회에서 서울법대 출신 원내대표가 내뱉은 말이다. ‘광주일고, 전라도, 부산, 울산, 경남’으로 요약되는 지역주의 망령이 선거철도 아닌 시점에 발화(發話)된 것이다.경북대와 전남대는 올해부터 교환교수제를 실행하고 있다. 학생교류에 교수교류를 더해 영호남 교류를 일상화-내실화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일이다. 그 일환으로 필자는 지난 2월 말부터 전남대에 머물고 있다. 5월 초에 이용섭 광주시장의 경북대 강연이, 9월 19일에 권영진 대구시장의 전남대 강연이 있었다. 양교 모두에게 소중한 자산이 되었으리라 믿는다.이와 같은 의미 깊은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부울경 주민이 뭉쳐서 심판하자!”는 원색적이고 망국적인 지역갈등 선동발언이 터져 나온 것이다.4차 산업혁명이 눈부시게 현현하는 21세기에 원시적인 지역갈등을 조장하는 제1야당 원내대표라니. “우리가 남이가?!” 발언은 1992년 12월 11일 대선 직전에 나왔으나, 그들은 꼬리 내리고 어둔 곳에 숨어서 지역감정을 부추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낮 장외집회에서 야당 2인자가 대놓고 지역갈등을 선동한 것이다.지역갈등 조장과 선동이 분명 이득이 있는 모양이다. 아니고서야 반역사적이고 반민족적이며 반국가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지역감정을 부추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992년 대선에서 자한당의 선배격인 민자당의 김영삼은 그렇게 우울하게 승리했다.대선승리의 따뜻하고 화사한 기억이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가장 큰 동인(動因)이자 원동력이 아닌가 한다.‘도덕의 계보학’에서 프리드리히 니체는 주인도덕과 노예도덕을 설파한다. “고귀하고 행복한 자들의 주인도덕은 자신과 외부세계의 긍정에서 생기고, 무력하고 악의적이며 비천한 자들의 노예도덕은 타자와 외부세계의 부정에서 생긴다.” 호남을 ‘타자화’하고, “우리 부울경”의 적대적인 외부세력으로 만든 원내대표의 발언은 문자 그대로 노예도덕의 전형이다.한국정치는 분단극복에 정진해야 한다. 고착화된 남북분단과 고질적인 동서갈등의 해결이야말로 우리의 시대사적 소명이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정치와 정치인들에게 맡겨져 있다. 주어진 소명을 외면하고, 정반대 행보를 보이는 저들을 어찌하랴?! 영호남의 진정한 교류로 노예도덕에 오염된 자들부터 구해내야 할 판국이다.

2019-10-23

설리의 죽음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실제 내 생활은 너무 구렁텅이인데 여기 바깥에서는 밝은 척하는 게… 너무 이게 사람들한테 내가 거짓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든 다 뒤에 어두운 부분이 있는데, 바깥에서는 안 그런 척하고 사는 거다,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살지 말라 해서. 그냥 되게 양면성 있게 살아가고 있어요. 지금.” 10월 14일 스물다섯 나이로 세상과 작별한 설리가 ‘악플의 밤’ 방송에서 남긴 말이다.공감 가는 말이다. 세상에 그늘진 구석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솔직하게 터놓고 살기 어려운 사회가 우리나라다. 다른 사람 눈치 보면서, 안색 살피면서, 비위 맞춰가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의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그러다보니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도 적잖다. 나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입각해서 타자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한국인은 없다.혹은 그럴 여건이 아직 불가능한지도 모른다.가수이자 연기자로서 설리는 강인한 내면을 가진 청춘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사회관계망 서비스에 자신의 견해를 자신만만하고 당당하게 밝히는 면모를 보면서 ‘허, 당찬 친구일세!’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힘차고 용감한 젊은이가 늘어나면 우리도 유럽의 청춘 남녀들처럼 외부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아까운 청춘 설리가 세상을 버린 것이다.본디 죽음은 무겁고 무서우며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삶은 죽음보다 가볍고 유쾌하며 견딜만해야 한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로 나왔으니 허무하다. 빛과 그늘이라는 양면성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죽음의 길로 들어섰으니 말이다. 그런 연유로 설리가 선택한 죽음은 그녀가 견뎌야 했던 삶보다 가볍고, 견딜만하며 무섭지 않은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진정 그러한가?! 한국 사회에서 죽음은 그토록 가벼운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왜 이리들 황망하게 지상의 삶과 인연을 끊어버리는 것일까?!어제 설리가 생을 뒤로 하더니, 오늘 10월 15일에는 거제 단칸방에서 일가족 3명이 목숨을 끊었다는 보도가 나온다. 39세 아버지와 6세, 8세 두 아들이 동반 자살했다는 것이다. 아이들 엄마는 혼수상태로 위독하다 한다.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은 또 무엇인가?!나라 한쪽에서는 권력 잡겠다는 정파(政派)의 대표자들이 태극기 동반한 칼춤을 추고, 정의로운 검찰은 사법정의를 앞세워 장관을 바꾼다. 태극기와 정의가 막지 못하는 이런 죽음을 어찌 하랴. 권력도, 돈도, 대통령도, 감찰총장도, 법무장관도, 서초동도, 광화문도 결국 부질없는 것이다.그 모든 것의 앞자리에 인간과 생명과 자유와 평등과 형제애가 우뚝 서야 한다. 그래야 죽어나가는 청춘과 가족이 생겨나지 않는다.죽음을 가벼이 여기고, 삶을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겁고 한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한국사회의 전면적인 혁신과 재생이 절실하다. 최소한의 생명권을 보장하는 인권국가의 면모를 되살리지 않으면, 이 나라의 미래도, 권력도, 돈도, 검찰총장도, 태극기도, 칼춤도 없기 때문이다.

2019-10-16

광장의 명암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요즘 세간의 관심은 서초동과 광화문이 대표하는 광장이다. 조국 법무장관 임명으로 촉발된 대중과 정파의 대립이 도달한 종점이 서초동과 광화문이다. 그를 둘러싼 찬반으로 진영이 갈린 것은 아니지만, 문제의 빌미가 된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가진 자들의 계급 내리물림이 얼마나 우심한가를 보여준다. 신분제 사회가 아니건만 한국에서 신분상승은 조선시대처럼 불가능해 보인다.그러나 빙산의 일각으로 본질적인 문제를 가린다면 도덕의 잣대로 정치를 가늠하는 우행(愚行)이 될 것이다.대중이 분노하고 허탈해하는 지점은 ‘좌파가 그럴 수 있나’ 하는 것이다. 같은 사안이라도 우파나 극우의 행악질에 대중은 그러려니 한다. 그들의 부패와 무능, 타락과 패거리주의에 관대하다. 하지만 좌파나 운동권 출신이 일탈하면 비난과 욕지거리가 하늘을 찌른다. 이런 이중 잣대는 누가 만들었는지, 궁금하다.하나의 사안을 바라보는 정반대되는 시각의 차이와 그에 따른 정치행위는 살펴야 한다. 그것이 야기하는 대립과 갈등양상이 너무 첨예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세대갈등과 지역갈등에 계층갈등과 정파갈등이 보태져 사회통합이 어려워지고 있다. 일본과 진행 중인 경제전쟁, 난항을 겪고 있는 북한과 미국의 교섭, 하나의 중국문제로 터져 나오는 동아시아의 불안정성을 고려하면 우리의 대립과 갈등은 심히 우려스럽다. 하지만 광장이 열려있음은 행복한 일이다. 어린 시절에 김일성 화형식, 반일 관제데모, 봉고 대통령 환영식에 광장으로 동원된 나로서는 열린 광장이 행복하다. 돈 받고, 종교 때문에, 정당이 동원해서가 아니라,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광장이 넘쳐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더욱이 수백만이 모인 광장에서 사건사고 하나 없는 나라는 지구촌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이 점에서 광화문 광장의 추태와 망동은 부끄럽고 민망하다.광장에 사람들이 모인 이유가 황망하다. 정치의 실종과 검찰권의 비대화가 원인이기 때문이다. 여당과 야당이 벌이는 죽기 살기 식의 대결구도는 분명 문제다. 이 나라 최고 지식인들이 모였다는 국회가 민의를 반영하지 못하고 극한대결로 치닫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는 제3지대의 부재에서 원인을 본다. 여야를 조정하고 아우르는 제3당이 우리나라에는 없다. 그러리라고 기대한 정당은 풍비박산 나있다.문제는 정당의 대립과 대결이 국민들의 일상에 틈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다. 내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주장하는 것은 그래서다. 거대양당이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중소규모 정당이 일정정도 힘을 발휘하는 비례대표제가 자리 잡는다면 극한의 혼란과 대결양상은 치유되리라 믿는다.‘전부 아니면 전무’ 식의 양당구조는 소임을 다했다. 대한민국의 사회적 다양성이 증대한 만큼 정치도 그것에 준해서 바뀌어야 한다.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이 정치검찰을 비판하고, 공수처 설치를 외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가족단위로 어린아이 무동을 태워가며 평화적으로 민의를 드러냄은 치하할 일이다. 그러하되 양당제로 실종된 여의도 정치의 부활이 절실해 보이는 시점이 아닐 수 없다.

2019-10-09

대구시장과 달빛동맹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지난 9월 19일 오전 10시 30분부터 낮 12시까지 전남대 인문대학 소강당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 있었다. 대구시장이 전남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최초로 강연을 펼친 것이다. ‘권영진이 들려주는 달빛동맹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90분 동안 진행된 강연회에 300여 전남대 학생들이 자리를 빼곡하게 채웠다. 휴대전화 한 번 울리지 않는 분위기에서 학생들은 끝까지 경청하는 자세로 권 시장이 전하는 달구벌 대구와 빛고을 광주 강연에 임했다.“대구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게 뭐죠?” 하는 질문으로 학생들의 말문을 틔운 권 시장은 정치학 박사답게 능수능란하게 강연을 인도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유익할 만한 경험을 골라내 인생 선배로서 깨우침을 나누어 주었다. 안동에서 대구로, 대구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다시 대구로 이주한 간단치 않은 인생사는 정치인 이전에 자연인 권 시장을 이해하도록 한다.“나는 왜 대구시장이 되었는가?!” 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제18대 국회의원 이력을 가진 그는 무엇 때문에 대구에 왔을까. 정쟁국회를 일신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그는 정당을 변화시키지 않고는 한국정치의 변화 가능성이 없음을 절감했다 한다.공천권을 가진 자가 여의도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그에게 줄을 대야 국회의원이 되는 정치상황에 절망했다는 권 시장. 대구의 12명 국회의원보다 1명의 시장이 되어 대구를 변화시키는 일이 국회의원 직분보다 소중했다는 말도 보탠다. 청년들이 해마다 대구를 떠나는 비감한 사태를 종결하고, 그들에게 꿈을 주는 시정(市政)을 펼치고자 진력해왔다는 권 시장. 목표달성은 미완이지만, 그것을 향한 여정은 지속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대구처럼 광주 청년들도 서울로 떠나가고 있음을 적시하면서 그는 대구와 광주의 상생과 공존을 피력한다.임란 당시 의병활동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의 광주와 1907년 국채보상운동과 1960년 2·28의거를 경험한 대구의 협력을 언급한다. 의향이자 예향인 대구와 광주가 과도한 수도권 집중으로 피폐해진 지역발전의 견인차 노릇을 하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것을 위해 광주와 대구를 잇는 고속철도건설이 필수적이라고 방법론도 제시한다. 대구와 광주를 오가는 과정에서 영호남의 단결과 시너지 효과가 배가될 것이라고 말한다.서울과 경기도에 특혜와 특권이 몰려있음에도 신도시를 만들고 지하도로를 뚫겠다는 발상은 지방말살을 결과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까닭에 대구와 광주, 영남과 호남이 손을 맞잡고 지역의 상생과 화합과 발전을 함께 도모함은 당연한 일이다. 전남대 학생들에게 넓은 시야를 가지도록 권 시장 강연은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강연을 계기로 영호남 인적교류가 보다 활발해지기를 기대한다.이번 강연은 전남대 인문대학 류재한 학장이 권영진 대구시장을 초청하여 진행되었으며, 정병석 전남대 총장과 대학본부 관계자들의 노고에 힘입은 바 크다. 역동적인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있는 한 우리나라는 오래도록 건재할 것이다.

2019-09-25

경험과 기억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얼마 전 ‘무등공부방’에서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1990)을 쓴 정지아 작가의 강연을 들었다. ‘기억’에 대한 그녀의 생각은 단출하되 선명하다. 빨치산이었던 어머니가 올해로 94세가 되었는데, 그이의 기억에 자리한 장면은 200개 남짓이라 한다. 9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그것도 한반도 남단의 피어린 상처를 경험한 인간이 체화한 기억의 총량이 그것뿐이라니.“여러분도 살아온 날들의 기억을 헤아려 보세요!” 작가의 말이 새삼스레 다가온다. 대단한 기억력은 아니지만, 나는 세 살적부터 경험한 기억에서 출발할 것이다. 문제는 기억이 반드시 정확하지 않으며, 기억이 경험의 총량을 보존하지도 않는다는 자명한 사실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단편소설 ‘덤불 속’에서 인간의 선택적 기억과 경험의 왜곡을 적나라하게 들춰낸다. 그것을 바탕으로 구로사와 아키라는 영화 ‘라쇼몽’을 만들 수 있었다.그럼에도 기억의 힘은 단단하고 강력하다. 설령 왜곡되고 굴절된 기억이라 하더라도 기억이 가지는 힘은 대단하다. 어쩌면 그래서 아흐마토바는 “태양에 관한 기억이 흐려져 간다”고 아쉬워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남자와 엮이지 않은 청춘의 아쉬움과 미련을 감상과 낭만의 영탄으로 교직(交織)한 아흐마토바. 사랑의 올가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20대의 지독하게 아름다운 슬픔과 기억을 앙상하게 남은 나뭇가지 사이로 퍼져 나가는 햇살에 의지한 그녀.무상한 자연이 늦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 무렵 페테르부르크의 운하를 서성대면서 아련하도록 애틋한 지난 일을 추억하는 아흐마토바. 그녀를 둘러싼 자연과 사물의 변화에 눈길을 주면서 자신의 헛헛한 내면세계를 돌이키는 시인. ‘그의 아내가 되지 않았음’을 그녀는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지만, 한여름을 시뻘겋게 달구던 태양에 관한 기억은 점차 시들어간다. 암흑과 겨울이 하룻밤 사이에도 닥칠 것을 예감하는 우울하고 고적(孤寂)한 아흐마토바. 그녀는 어떤 경험을 ‘그’와 공유하고 있을까?! 언제 어디서 그와 만나고, 어떤 과정을 거쳐 그와 작별하여 오늘에 이른 것일까. 그녀가 기억하는 경험의 무게와 색깔은 그가 경험한 사랑의 색깔과 무게와 동일한 것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녀처럼 그 역시 선택적 기억과 그에 따른 독자적인 경험의 세계에 자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기억의 세계에 빠져드는 순간,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은 각자도생의 길을 걷기 마련이다.‘나한테는 얼마나 많은 기억이 내재하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찾아든다. 언젠가 나 또한 켜켜이 쌓여있는 기억의 씨줄과 날줄을 찬찬히 엮고, 상상력과 통찰에 기초하여 기나긴 이야기를 풀어볼 요량이다. 문학은 기억이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기억이 배제된 문학은 없다. 그런 까닭에 공상과학소설과 무협은 아직도 문학의 범주 밖에서 맴돌고 있다.기억을 배제하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죽어도 잊히지 않을 경험과 기억이 있다. 그것의 색깔과 무게가 어떠하든 우리는 최후의 그날까지 기억과 함께한다. 그래서다. 우리가 과거를 물어야 하는 까닭은.

2019-09-18

한국기자 질문수준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9월 3일자 ‘다음’ 포털 사이트 실검 1-2위를 다툰 제목은 ‘근조 한국언론’과 ‘한국기자 질문수준’이다. 양자 모두 ‘조국 기자 간담회’ 결과 검색순위 1-2위에 올랐다. 청문회가 무산될 지경에 이르자 여당과 후보자가 ‘기자 간담회’ 형식으로 법무장관 후보자에게 쏠렸던 세간의 의혹을 묻고 답하는 자리를 만든 것이다. 휴게시간 포함 10시간 40분이 소요됐다는 1박 2일 기자 간담회는 처음 있는 일이라 한다.‘근조 한국언론’이야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한국기자 질문수준’은 흥미로운 제목이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언론사 기자 150여 명이 8시간 40분 동안 100개의 질문을 던지고, 후보자가 응답한 희대의 기자 간담회. 시종일관 간담회를 지켜본 대중이 제기한 문제는 ‘저러고도 기자인가’ 하는 것이었다.중복질문과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의혹을 제기하는 수준의 질문이 차고 넘쳤다는 것이 대중의 대체적인 반응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기자(記者)’는 본디 ‘쓰는 사람’이다. 한자말을 풀면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기자이거나 기자여야 한다. 자신의 언어를 가진다함은 자신의 사유와 논리를 타자에게 설득력 있게 쓰고 말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 능력은 어디서 오는가?! ‘학이사(學而思)’가 정답이다. 공부하고 생각하는 것에서 기자의 능력이 생겨나고 발현한다. 공부함은 독서를 의미하고, 그것에 기초해 사유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생각함이다.‘학이사’는 지식인의 기본적인 자세이기도 하다. ‘논어’ ‘위정편’에서 공자는 일갈한다. “책을 읽되 생각하지 않으면 기망을 당하기 쉽고, 생각하되 책을 읽지 않으면 위태롭다.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여기서 나온 결론이 ‘학이사’다. 문제는 한국의 기자들이 책을 읽는 것에는, 달리 말하면 공부 잘하는 데에는 특화(特化)되어 있지만, 생각하는 훈련은 태부족하다는 점에 있다. 시험은 잘 치는데, 생각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다.시험 잘 치고 공부 잘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뛰어난 집중력과 암기력이다. 단순암기로 성적 끌어올려 스카이 가서 언론고시 합격하면 기자가 된다. 거기서 끝이다. 공부는 잘하지만, 기자로서 가져야 할 기본 덕목이자 책무인 사유와 인식능력이 결여돼 있다. 그래서 그들은 거기서 거기인 질문을 되풀이하고, 자기가 무슨 질문을 하고 있는지조차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다.기자는 교사와 전문기사, 과학자와 금융가 등과 더불어 최고 지식인 집단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사실을 올바르게 전달하고, 그것에 기초해 인과관계와 필연성을 고려하면서 정확한 분석과 문제제기 능력을 소유해야 한다.언론이 사회 발전단계의 척도이자, 미래기획의 초석이기 때문이다. 사태를 제대로 직시하고, 타자에게 무조건적으로 동조하거나 비판에 편승하는 기자는 기자가 아니다. 그것은 저잣거리 대중의 속성이다.근자에 대중에게 뭇매를 맞고 있는 한국언론과 기자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 금하기 어렵다.스마트폰으로 무장한 21세기 똑똑한 대중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언론과 기자의 소명과 존립근거는 취약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019-09-04

처세보민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세상 살아가는 일은 간단치 않다. 나와 너, 우리와 너희, 우리와 그들이 끓이는 섞어찌개가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흥미진진하고 포복절도할 일도 적잖다. 언어도단의 세계가 펼치고, 일망무제(一望無際)의 도저한 경지가 현현하는 경우도 있다. 세상에는 고수도 많고, 깊이를 측량하기 어려운 인물도 적잖다. 세상은 불가사의한 곳이다.로빈슨 크루소가 다시 인간이 될 수 있었던 소이는 ‘프라이데이’와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혼자 걸머지는 인생은 단출하다. ‘격양가’의 주인공처럼 “해 뜨면 나가서 일하고, 해 지면 들어와서 쉬고, 우물 파서 물 마시고, 밭 갈아서 밥 먹으면” 그만이다. 일하기 싫으면 안하면 되고, 먹기 싫으면 굶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둘이 함께 있으면 다른 세계가 열린다. 그래서 나온 말이 ‘처세’다. 세상에 어떻게 거처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개개인은 각자의 처소와 시간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판단할 것인지, 고민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위정자는 거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백성을 평안하고 넉넉하게 인도할 책무가 있는 까닭이다. 거기서 나온 말이 ‘보민’이다.예로부터 처세보민은 동양사상의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550년 전란이 지속된 춘추전국시대의 종요로운 개념 하나가 처세보민이었다. 처세보민은 당대 지식인들이 깊이 사유하고 실천해야 할 사회적 의무였다.요즘 정치판의 블랙홀은 조국 현상이다. 마치 대한민국에는 그와 그의 가족만 있고, 문제를 야기하는 것처럼 사방에 조국 이야기만 울려 퍼진다. 못내 우려스럽다. 장관 자질을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인적사항을 현미경으로 살펴서 온갖 트집거리를 찾아낸다. 그런 과정에서 인격모독과 사생활침해와 연좌제와 인격살인마저 가능한 염량세태가 두렵다. 우리가 이뤄낸 인권과 민주주의의 쇠퇴가 염려스럽다.다른 편에서 보면 조국 현상은 이른바 86세대의 양면성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한국사에서 선배를 가르친 유일무이한 세대가 그들이다. 7말8초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 그들과 함께할 수 있었음은 축복이다. 진정 몰랐기 때문에 자연스레 ‘불치하문(不恥下問)’이 가능했던 아름다운 시절. 하지만 그들은 물질적 욕망에 포획된 첨단 자본주의 세대다. 돈이 돈을 벌고, 학벌마저 세습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한 세대이기도 하다. 80년대 대학평준화로 입학한 그들은 자유와 민주를 기반으로 하는 변혁과 혁명과 저항을 기치로 내건다. 그들의 이념과 경험이 바탕이 됐던 87년 평화대행진은 한국 민주주의의 정점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 우리는 강남 8학군과 대치동의 발아를 목도한다. 오늘날 처참하게 무너져버린 공교육의 진원지는 “나 이래봬도 이대 나온 여자예요!” 일갈한 타짜세대 아닌가 한다. 조국 현상에서 우리가 성찰할 대목은 ‘도덕경’ 44장에 있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서, 오래 갈 수 있다.” 나의 욕망을 어디까지 몰고 갈 것인가, 하는 최종지점을 확실하게 설정해야 한다는 얘기다. 우리 마음속에 ‘계영배 (戒盈杯)’ 하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19-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