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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42) 부지명, 예, 언(不知命, 禮, 言)

선현들이 `우주 제일의 책`이라 칭송하는 논어는 공자의 언행(기원전 552-479)을 기록한 책이다.에는 논의와 語에는 말에 대한 답이라는 뜻이 있다. 정확히 편집한 제자들은 문하생인 증자나 유자라는 학통의 계승자라는 설이 있다. 전편적인 내용은 인생의 모든 면과 가르침은 타당하고 간결하면서 설득력이 넘치는 직관적 사고의 서술이다.논어의 사상은 仁이며 “인을 행하는 사람은 사랑하고 아끼는 것을 인이라 하고, 정치하는 이는 국가를 이롭게하는 것을 인이라 한다”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사상적 측면에서는 천명론으로서 하늘을 신봉했고 학습과 사유에서는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강조하였다. 또한 인격의 완성자로서의 군자는 인, 의, 예, 지, 용을 강조하였고 효제와 충서도 인의 중요한 실천 덕목으로 정리하였다.또한 정명(正名)과 덕치주의를 통한 민생의 안정을 추구하는 논리를 편다. 이러한 장대하고 방대한 사유와 사상들은 끝장(요왈편)에 이르러 리더, 지도자, 선생, 어른에게 “천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고 예를 모르면 사회에 설 수 없으며 상대방의 말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사람을 알지 못한다”라고 장대히 막을 내린다.천명과 예와 말, 어느 것 하나 중요치 않는 것이 없겠지만 공자는 천명은 命이 있음을 안다고 믿는 것이다라고 정자(程子)는 풀이하였고 “예를 알지 못하면 귀와 눈으로 볼 것이 없고 말의 잘못에서 사람의 사악함과 올바름을 알 수 있다” 하였다.우리 모두가 공자의 탁월한 가르침을 이 시대의 내용을 갖춘 통찰의 지혜를 갖추고 언어로 행동으로 사유로 살아갈 수 없다면 논어라는 그 위대한 우주 최고의 고전도 쓸모없는 가르침이 될 것이다.“알고 난 뒤 반드시 실천하라”는 가르침은 `논어, 문자여행`을 통해 나의 무지를 재인식하고 나의 서예공부도 거듭 깊이 새로워질 것을 새길 수 있는 귀한 시간들이었다. 이 시대의 리더, 어른, 스승, 선생 등 모두가 마음의 언어로 읽고 실천한다면 맑고 환해질 것이다.공자께 다시 한번 크게 웃을 수 있는 기회가 반드시 올 것이라 믿는다. 억지로 나의 부족한 모든 것을 채워주면서 같이 한 모두에게 고개 숙인다. 나에게 붓글씨로 작품을 쓰는 일도 힘들지만 원고를 쓰는 일은 나의 무지 덕분에 참혹할 정도로 아픈 일이었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모두가 마음 넓은 분들의 덕분이라고 생각하니 50회에 가까운 `논어, 문자여행`을 마감하면서 공부 부족의 부끄러움을 줄이기 위해 다시 깊게 논어를 읽어야 겠다고 다짐하는 귀한 가르침을 주었다. 그리고 독자 여러분 모두가 고맙고 강령하길 바랄뿐이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끝

2016-12-30

(41) 군군신신부부자자

세상이 요지경이다. 지견없는 몇 사람의 과오로 세상이 참 우스워졌다. 슬픈 일이다. 국민 모두가 복이 없는것인지 대한민국이 복이 없는지 사람들의 얼굴이 편치 않다.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 누구 탓 하기보다 한 번 더 자신을 돌이켜 볼 일이다. 개개인들을 만나 이야기해 보면 도덕적 잣대보다 너무 큰 이익, 즉 사리사욕을 안겨주게 된 것 같다. 이익 앞에는 성인도 어쩔 수 없다고 하였던가. “덕행과 사업은 자신보다 나은 이를 본받는 것이고 명예나 지위는 자신보다 못한 이를 살피는 일이다”라는 최근 가졌던 필자의 전시회 글귀가 생생하다. 제나라 때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경공이 좋은 말이다라고 듣기만 했을 뿐 깊이 알아차리지 못한 탓에 결국 제나라는 망하고 만다. 경공과의 대화는 사람이 살아가는 위대한 최소한의 도이며 이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정사의 바탕이다. 이때 경공은 정권을 잃고 신하인 진씨(陳氏) 가 나라 정권을 잡고 제 마음대로 였다. 어느 정권이든지 사공이 많으면 배는 산으로 가서 뜨지 못하는 경우가 된다.가끔씩 가훈을 작품으로 부탁하는 경우가 있다. 자식을 향한 어쩌면 가장 간절한 기도이며 바람일 것이다. 자식은 가훈을 통해 젖어가고 길들여져 가고 그렇게 되어져가는 것이다.그 가훈 몇 자가 인생을 인도해 준다. 얼마전`답게`라는 글귀였다. 누구라도 아는 내용이겠지만 신라 35대 경덕왕의 시절 이야기이다. 충담 스님께 나라의 정사를 잘하는 법을 물으니 그는 `안민가`를 지어 내어 놓는다.`군(君)답게 신(臣)답게 민(民)답게 할지면 나라 안이 태평 하나이다`라며 역할과 본분에 대한`답게`송(頌)을 바쳤다.안민가 때문에 우리에게 이 귀한 글귀는 본분이며 삶의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살면서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 해보면 모두가 대단한데 어찌 그런 일들이 일어날까 하고 생각해 본다.한동안 잊고 살았던 `답게`라는 두 글자를 가훈으로 부탁한 그 분의 가풍은 어떠해졌는지 그 간절함이 사뭇 궁금해진다.좀 시대감이 떨어진 것처럼 진부해 보이지만 진정한 가훈 갖기 운동이 제2의 가족 정신재건운동이 되면 어떨까. 한번쯤 오래된 가훈의 먼지를 털어 내면서 자신의 현실을 한번 더 만진다면 분명 처음의 생각과 같이 `답게`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한 사람이 한 사람다워 고귀함을 드러내는 일은 답게 사는 일보다 더 큰 위대함이 없을 것이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12-23

(40) 학시(學詩)

그림으로써는 사람의 생각을 다 그려낼 수 없고 글로써는 사람의 생각을 다 적을 수 없다. 그렇지만 몇 줄의 시로써는 흉중에 드러내고자 하는 숨어있는 마음까지 다 감추어 드러낼 수 있다. 논어에서는 시(詩)에 대해 간절히 소상히 제자들에게 일러주고 자상히 시를 배우는 것에 대해 간절히 권고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산문, 수필, 시 중에 시가 아닌 사서의 시경(詩經)을 이야기하며 시경은 시와는 조금은 차원이 다름을 이야기하고 있다.시경은 인륜의 도와 세속의 모든 것들을 설하고 있는 고전이다. 연민, 도덕 등 흥미로운 시대의 풍자이며 BC 12세기 서주에서 춘추 초기까지의 중국 노래 가사집으로 총 305편이다. 공자께서는 시경을 한마디로 “생각에 삿됨이 없는 것” 즉 사무사(思無邪)라 결론하였다.공자는 양화편에서 “너희들은 어찌 시를 배우지 않는가. 시는 의기(意氣)를 일으킬 수 있다며 세상에서의 득과 실을 따져볼 수도 있으며 많은 사람과 사귈 수도 있으며 화목하여 치우쳐 흐르지 않는다. 원망을 해도 성을 내지 않을 수 있으며 조수(鳥獸)와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 수 있다”하였다.양화편에 공자가 아들 백어(伯魚)에게 말했다. “너는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배웠느냐. 사람으로서 주남과 소남을 배우지 않으면 담장을 정면으로 향해 서 있는 것과 같다”하였다.주남과 소남은 시경의 첫머리 편이며 수신제가에 대한 내용이다. 시집이 팔리지 않고 시인들은 좋은 시가 쓰여지지 않는다 하고 소설가는 소설이 읽혀지지도 않는다고 야단이다. 난잡한 세상살이보다 더 좋은 소설을 쓰기가 참 힘들다고들 한다.한 해가 저물기 전 서점에 들러 한 권의 시집을 사서 읽는 일은 자신의 잃어버렸던 영성을 깨워줄 것이다.나에게도 책꽂이에 한 때는 줄쳐 가면서 읽은 몇 백권의 시집들이 먼지만 쌓여 야단들이다. 시를 읽어 내가 바뀌져 가고 한 줄의 시가 쓰여지기까지 시인들의 아픈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래도 소리내어 읽으면 내마음도 옆에 있는 사람마저 시인의 영성을 같이 느낄 수 있어 삶은 아름다운 시가 되고 노래가 되고 세상에 맑음이 되어 남에게 마저도 아름다운 일이라는 위대한 사실에 우리들 모두가 동의 한다면 공자께서 시를 배워야 한다고 하신 그 간절한 가르침이 어슴프레 다가오는 듯하다.이런 날이 오지 않겠지만 공자님의 가슴 따스한 시 낭송이 있다면, 하는 그런 생각에 약간 떨림이 밀려온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12-16

(39) 3憂3樂(3우3락)

논어 계씨(季氏)편에 공자가 “이로운 벗이 셋, 손해되는 벗이 셋이다. 곧은 벗과 미더운 벗과 지식이 많은 벗은 이롭고 편벽된 벗과 비위를 잘 맞추는 벗과 말만 잘하는 벗은 손해가 된다”라고 말했다. 살아가면서 숱한 친구들을 만나고 헤어지고 살아간다. 삶의 길목에서 만나는 그 사람들 중에서 친구로 지낼 수 있다는 것도 지고지순한 억겁의 인연이 아닐 수 없으며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은 쉽게 쓰여진다. `벗이 곧 새로운 나`라는 것으로 인식하면 벗은 참 귀한 존재감이다. 벗이 곧으면 자기의 허물을 들을 수 있고 벗이 미더우면 나도 성실한데 나아갈 수 있으며 벗이 지식이 많으면 나도 덩달아 밝아질 수 있다. 귀하고 외경스러운 벗은 만날 수만 있다면 그지 없는 최상의 복이다.벗은 내가 어질게 되도록 돕는 사람이다. 논어 학이편에 “벗은 흔히 친구(親舊)”라고 한다. 즉 `가까이에서 본다`의 의미와 `오래 되었다`의 합성이며 인디언은 친구를 “내 슬픔을 자기 등에 지고가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붉은 주사(朱沙)를 가지고 있으면 붉어지고 검은 옻을 가지고 있으면 검게 되나니 우리 모두는 함께 있는 주변에 대해 다시 살펴볼 일이다.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지는 법이다. 늘 먹을 만지고 사는 나는 얼마나 검어져있을까 한번 웃어볼 일이다.“살아가면서 넋이 추한 이와 벗하지 말며 넋이 악한 이와 어울리지 마라. 넋이 고운 이와 벗하며 넋이 맑은 이와 함께 할지니라. 거대한 바위는 바람에 흔들림 없나니 어진 이는 칭찬에도 비난에도 의연하더라. 삶의 길목에서 나보다 나은 이를 만나지 못하면 차라리 홀로 가도 좋다. 삶은 견디면서 좌충우돌하면서 울면서 웃으면서 가는 것이다”.논어 학이편에 “자기보다 못하는 이는 벗삼지 말라”한 말이 무겁다. 단순한 말씀 뒤에 감춰져 있는 그 큰 말씀을 다같이 새겨볼 일이다.만나고 헤어지고 또 다시 만날 수밖에 없을까. 시절 인연일까. 이해득실의 문제일까.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주는 이는 오직 포숙이라 했다. 관포지교의 고사처럼 내 글씨 알아주는 벗이 있다면 참 좋겠다.나이와 상관 없이 친구하고 싶다. 나는 나를 친구라 하는 그들에게 나는 어떤 친구일까. 공경과 귀함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할까.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나에게는 아마 나인 것 같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나를 환하게 열어주는 친구처럼 나도 그를 닮고 싶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12-09

(38)見賢思齊(견현사제)

선한 것은 무엇이며 악한 것은 무엇일까. “좀 더 선하게 살고 싶다.” 흔히 이런 어려운 말들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선도 아닌 악도 아닌 그 이전에 “너는 누구인가.” 이는 선종에서의 커다란 가르침의 화두이다. 가끔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은 참 선한 사람이다”라고 듣기만 해도 생각이 정제되고 청소되는 것 같다. “선하다”라는 한 마디가 내 생각의 강력청결 청소제인 것이다.논어 이인편에 공자께서는 “어진 사람을 보면 자기도 그와 같아야겠다고 생각해야 하며 어질지 않은 사람을 보면 자기도 그렇지 않은가를 돌이켜 보아야 한다”했다.어진 사람과 똑같아지기를 생각한다는 것은 자기도 그러한 선함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요, 안으로 반성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악이 있을까 두려워 하는 것이다. 공자가 말했다. “부모를 섬길 때에 부모의 잘못을 발견했거든 은근하게 말씀드려야 한다. 그래도 부모가 내말을 듣지 않으시거든 다시 또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부모의 뜻을 어기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느라 아무리 수고로워도 원망하지 않아야 한다. 쉽지는 않다. 공경하는 마음은 효(孝)에서 나온다.”`견현사제(見賢思齊)`라는 이 네 글자는 오래전 우리들의 집안에 잘 쓰여지지도 않는 큼직한 붓글씨로 쓰여져 귀한 대접을 받던 작품 중에 하나였다. 서예인들의 개인전에서 거의 빠지지 않는 고전 글귀 중 하나이기도 하다.누구나 부모는 자식의 삶이 이러기를 바라는 간절함에서 였을 것이다. 준엄한 글씨체가 지금도 막살아 나올 것 같은 기운을 오랫동안 가슴에 안고 산다. 글씨는 그 사람의 생각의 그릇이며 기원이며 바람이며 지침이다. 글씨를 보고 산다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 붓글씨의 묘한 기운인 것이다. 글씨 속에 존재하고 있는 그 위대한 기운은 과학적인 증명 이상 인 것이다.내가 쓴 글씨는 내 정신의 자양분이 만들어낸 새로운 나인 것이다. `견현사제`의 깊은 뜻을 이른 새벽 기운과 같이 나의 격(格)을 높이고 호연지기를 기르는 내공의 언어로 새겨본다.몇 년전부터 나는 호선재(好善齋)라는 당호를 쓰고 있다. 선이라는 유교적인 삶에서는 완벽한 이름을 서술하고 있다. 그저 남들의 아름다움과 선행을 본다면 이 난세에 한 번 만이라도 가슴에 새긴다면 사회는 환해질 것이다.한번쯤 착해져 보는 일은 지구의 전체를 맑게 밝게 불밝히는 일인 것이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12-02

(37)문일지십(聞一知十)

공자의 3천여 명의 제자 중에 공문십철(孔門十哲)의 한 명인 자공은 재산을 모으는데 남다른 탁월함이 있었다. 그와는 다르게 묵묵히 스승의 뒤를 따르는 안회는 매우 가난했으나 아성(亞聖)으로 축앙되며 인(仁)에 대한 제 일인자로 인정하였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질문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토론식 수업 방법이다. 질문은 제자들의 능력과 창조의 힘을 심어주고 일깨워내는 탁월한 방법이다. 자상하고 친절한 노파의 가르침은 절대적으로 좋은 가르침이 아니다. 길을 제시하고 생각의 크기를 열어주는 것이 최상의 가르침이라 생각한다. 나를, 뛰어넘는 자를 길러낼 수 없다면 정녕 그것은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단언하고 싶다. 내 자신도 이 부분에서 할 말이 없다내가 아는 것이 부족하기에 그들에게 새 길을 열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부끄럽다. 나의 글씨와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고 수업을 할 때마다 스스로 도취되어 진행하나 문득 이래도 되는 것인가를 반성한다. 솔직히 대안을 찾지 못해 가다보면 옆길이고 샛길이다. 가르치는 사람의 중대한 병은 자신이 잘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인 것이다.자공에게 말했다. “너와 안회 중에 누가 더 나으냐” “제가 어찌 안회에게 감히 견줄 수 있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데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 뿐입니다.” 공자는 자공의 대답에 만족한다.자공은 겸손보다 자신을 솔직히 드러낸다. 자공의 대답에 스승은 “네가 안회만 못하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스스로 인정한 것을 더높이 평가한다. 참 아름다운 묘한 광경이다. 어디 이런 사람(제자) 없을까요? 나의 작은 복이겠지요. 어쩌면 내가 준비되지 않았기에 맞이할 수도 없다.이 질문의 핵심은 사실 인(仁)에 대한 물음 척도였지 능력에 대한 척도는 아니라 지식과 지혜에 대한 물음에 답인 것이다.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아는 것의 차이인 것이다.`사자교인(獅子咬人)`이라는 말이 있다. “흙덩이를 던지면 쫓는 것은 똥개이고 던진 사람을 무는 것은 사자새끼라”는 말이다. 될 놈은 알 수 있다라는 무서운 말이다. 작은 차이가 천지차이다. 신심명에서도 “호리호차면 천리현격”이라 하지 않았던가. 서예글씨 공부도 마찬가지다. 필법에 맞게 쓰고 법의 구속을 벗어나면 언젠가는 인위적인 극을 넘어서 자연에 이를 수 있다. 법은 인간이 지켜아 할 최소한의 도덕이며 서법도 글씨 쓰는 사람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약속이다공부하는 도반들은 스스로 재주 있다, 없다 하면서 스스로 물러설 궁리만 한다. 서로 신뢰하고 믿고 따르는 것만이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위대한 일이다. 30대초반의 나이에 애제자 안회가 죽자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하는 공자의 통곡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11-25

(36)不坐(부좌)

“지금의 그 자리가 당신의 자리인가요?” 살다 보면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이 많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자신의 능력 밖의 행위를 하고 있음을 느낄 때나 남이 하고 있는 모순된 상황도 또한 그러하다. 가끔씩 행사장에 나가보면 더더욱 자리와 명예, 권력, 감투 이러한 허망한 일이 사람들을 착각하게 만들어 놓는 경우를 접하면 참으로 허망하고 마음이 편치않다. 이 또한 세상살이의 흐름이겠지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공자께서도 요왈편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명(命)을 알려면 군자가 될 수 없고 예(질서의식)를 모르면 사회에 나아갈 수 없고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선과 악도 구분할 수도 없고 사람의 됨됨이도 알수가 없다”하셨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가.살다 보면 반드시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모든 일은 그 또한 지나간다. 위대한 사람이 가지는 가장 큰 능력은 망각의 능력, 즉 잃어버림의 힘이다. 지적인 망각은 당연하겠지만 그 큰 기쁨도 하늘이 부서지는 듯한 청천벽력의 순간적 고통도 놀램도 다 잃어버린다. 이것 또한 힘이다.우리 모두 잃어버려야 할 것은 기억하고 평생 기억하고 뫼셔야 할 것은 모두 놓치고 산다는 사실 모두가 제대로 된 좌석이 아닌 자리에 앉아 살기 때문이다. 자기가 앉은 자리가 주인 의식의 자리인지 사악한 자리인지 생명연장을 위한 거짓으로 꾸며 놓은 자리인지 살펴봐야 한다.“연나라 소년이 노나라의 서울 한단(邯鄲)에 가서 서울 사람의 한가한 걸음걸이를 배우라고 익숙해 지기 전에 고향에 돌아가 서울 사람의 걸음걸이도 제대로 걷지 못하고 그 이전의 걸음걸이도 잊어 망신이 되었다”는 고사처럼 자기 본분을 잊고 남을 흉내내고 잘못 앉은 자리에서 하는 망령된 짓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세상은 모두 부끄러워 할 줄 모르고 남의 말씀 귀기울이는 경청의 부족으로 많이 탁해졌고 요절복통이다.자신에게 맞지 않는 직함이 있는지 권력 밖의 남용은 아닌지 우리 모두 살펴보아야 할 일이다. 나도 솔뫼라는 호를 수식하는 몇 단어가 무겁고 아직 나의 명함 뒤에 새겨둔 몇 줄의 약력이 모두 지나버린 일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괜히 웃음이 나온다.감히 내려놓아라. 아니 버려라. 한 줄의 약력을 더하기 위한 나의 욕심도 웃음거리다. 구걸해서 얻은 약력이면 한 줄도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 모두가 잘못을 깨우치는 그 때가 깨우침의 기회이다.살펴볼 일이다. 앉은 자리가 내 자리가 맞는지, 나의 발밑이 바른지, 언행이 자리와 위치에 맡는지, 한 해를 갈무리하는 대자연의 섭리처럼 반성하는 늦은 가을에 나의 마음이 몹시 차갑다. 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11-18

(35)락우

논어를 흔히 천하제일의 책이라 하고 “최상지극우주제일(最上至極宇宙第一)의 책”이라고 한다. 읽을수록 알듯하면서도 좀체 가늠할 수 없는 그 깊이를 가지고 있다. 여름에 읽는 논어와 겨울에 읽는 논어의 깊이가 다르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일까. 맹자는 여름에 읽으면 속이 시원해지고 논어는 겨울에 읽으면 따뜻해지고 대학과 중용은 아침에 읽으면 맑아진다고 하니 참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공자께서도 학문에 대한 즐거움을 이렇게 정의하셨다. “즐거움도 근심도 잊어 자신이 늙어감을 모른다”라고. 즐거움, 얼마나 기쁜 일인가.살면서 가식없이 기쁘고 슬플 때도 있겠지만 기쁨, 슬픔, 근심, 희망도 모두가 작위에 의한 마음의 조작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이른 새벽이 편치않다. 사람의 생이란 기쁨이 한 말이며 슬픔과 근심은 몇 말이나 될까. 작기를 바라겠지만 학문을 탐구하고 지적인 삶을 살고 싶어하는 바람과 노력만큼 사람은 방황하게 된다.그렇지만 모르는 것을 단순히 알게 되는 경우의 기쁨보다 세월이 흘러 더 깊어져서 스스로 알게되는 기쁨은 느껴보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공자께서 솔직하게 “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고 하신 솔직함에 위선으로 사는 우리 모두 대성통곡하고 대오각성해야 할 일이다.학문이란 정진할수록 끝이 보이지 않으며 항상 부족함을 느낀다. 흐뭇함에 젖어들면 배고픈 줄도 모른다 하신 공자의 학구열을 가진 도반들이 가끔 주변에도 있다.잘 배워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바치는 이도 있고 이용해 큰 도둑이나 되는 속된 사람들도 많이 있다. 아는 것이 힘이 되기도 하지만 세상에 독이 되는 경우이다. 아인슈타인도 “안다 해도 다 알 수 없고 알고 있다 해도 다 아는 것 아니다”라는 말에 고개 숙여진다.오직 나는 내 서예술의 더 나아감의 완성과 완벽을 위해 좋은 사람 만나 배우고 시간이 주어지면 몇 권 성현들의 책을 만질 뿐이다. 생각이 많은 날은 동네 시골길을 걸으면서 그들의 가슴으로 파고 들어본다.세상살이 철도 들지않은 채 끝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살다 웃다 슬퍼하다 종지부 찍는 것이 인생이다. 별 것 아니다. 큰 세상을 위해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베풀고 봉사하고 환원하는 것이 가장 큰 공부이다.내 작품 한 점에 나의 인생공부 전부가 실린다고 생각하면 붓질 한 번 나의 진면목인 것이다. 걱정과 근심 즐거움도 가늠할 수 없는 모두 나의 공부가 만들어낸 한 물건인 것이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11-11

(34)한말 두되

세상의 모든 것은 자기의 지적 능력과 생각에 따라 이루어지고 사라지게 된다. 인간의 능력은 타고 나는 것인가, 후천적으로 개발되어 지는 것인가. 천품 즉 천성은 죽어도 변하지 않는다. 운명과 숙명도 마찬가지이다. 태어난 이생에서 운명은 바꿀 수 있어도 숙명은 다음 생에나 가능하다는 말을 보면 참 무서운 것이 사람이 가지는 타고나는 함량이다. 장자도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수명이 짧은 것은 수명이 긴 것에 미치지 못한다” “하루살이는 새벽과 밤을 모르고 스르라미는 봄과 가을을 모른다”라고 했다.타고남과 후천적 성장, 그리고 자신에 대한 혁명이 모든 것들 중 어디까지 나의 영역일까. 깊은 생각과 회한에 젖는다.우리 모두 자식들에게 남을 달 수 있는 저울이 아닌, 담을 수 있는 넉넉한 그릇의 크기를 만들어 주어야 하는 일이 부모로서의 책무이다. 유교적 가풍속이 아니어도 집안을 따져보고 혼사를 치름도 틀린 일은 아닌듯 하다. 세상이 각박하고 무섭고 치 떨리는 일이 매스컴의 첫 소식이다. 텔레비전 켜기가 무섭고 두렵다. 그래도 세상은 따스하고 살 만한 곳이라고 위로한다.도량이 넓은 사람은 탐하고 닮고 싶지만 크기만 큰 차디찬 가옥은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다. 집의 크기와 누추함이 문제가 아니라 그 집에 누가 살고 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권력과 명예가 아니라 능력과 인간 됨됨이다. 즉 인품과 인격이다.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의 인품 없는 행위에 참 슬픈 일이라고 느낄 때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전시장에서 하루종일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과 행동에서 많은 공부를 할 수 있다. 많이 배운다. “잘못을 아는 그 자리가 깨치는 자리”라는 위대하고 매서운 그 말이 오래 남는다. 그들이 모두 나의 스승이다.살면서 나 자신도 나의 공부의 질과 양이 어디쯤일까, 생각하게 된다. 양보다는 질이라 하면서도 내가 가진 짧은 마음의 줄자로 남을 재어 보기도 하였고 나의 작은 그릇에 넘치는 사람도 가차없이 비난해 보았고 나의 저울에 달수도 없는 넘치는 사람들도 가차없이 비난해 보았다. 내가 몰라 부끄러워 남의 작품 앞에 이상하다, 모르겠다라고 했던 그 옛 기억이 참 부끄러운 일이다. 반성하고 용서바라며 참회한다.이런 나의 마음의 그릇 크기는 한 되나 될까. 행동보다 말이 숱하게 앞섰고 하지 말아야지, 하는 일이 또다시 일어나는 것 나의 그릇이 “한말 두되”나 되면 얼마나 좋을까. 남에게 줄 때는 되를 깎았고 받을 때는 고봉으로 받고 싶었던 못난 마음도 이제 내려놓아야 할 나이도 되었다고 생각하니 서글퍼지지만 지금도 늦지 않다.“큰 세계가 생각에 따라 작게 크게 변한다”는 화엄경의 글귀따라 우리 모두 가지고 있는 몇 되의 마음의 그릇을 한번 내어 말려보면 좋겠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11-04

(33)3道

도는 어떤 것입니까? 울타리밖에 있지. 그 道말고요. 그럼 무슨 道. 大道 말입니다. 大道라면 장안가는 길이 있지. 어느 스님과 조주와의 선문답이 조주록에 실려 있다. 한번 크게 웃어볼 일이다. 공자께서도 태백편에 군자가 향해 가야할 도는 3가지가 있는데 나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어진 사람은 근심하지 않고 지혜있는 사람은 갈피를 못 잡는 일이 없고 용기있는 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공은 이것은 선생님만이 할 수 있다 하였다. 어찌 이것만이 도일까. 도는 여러 가지로 서도, 다도, 검도, 예도 모든 삶의 길, 실생활이 바로 도의 수행이며 길인 것이다.도를 道로 표현하면 어렵지만`길`로 해석하면 쉽게 알 수 있다. 불가에서는 득도의 도를 평상심이라고 하고 남천께서는 “도는 知에도 속하지 않고 不知에도 속하지 않는다”라고 알 수 없는 현답(賢答)을 던져준다.또한 공자께서도 “나의 한가지로 꿰뚫었다”고 이인편에 직접적인 말씀하셨고,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셨다. 절실한 도를 구현하는 성인의 절박함에 소스라치는 전율을 느낀다.“나의 도는 만법귀일 일귀하처인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하는 것이 `도`의 참맛을 알려주고 있다.道라는 글자의 어원을 한번 살펴보면 行과 首(머리수)로써 首는 목의 상형인지라 다른 민족의 목을 묻어 정화된 길이라는 뜻이지만 파생되어 사람이 지키고 가야 할 바른길 도리 등으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도는 항상 자기 신변에 있는데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은 헛되어 허공에서 길을 찾고 구하려 한다. 사는 것이 도이고 길이며 그 속에 맑은 답이 있다. 공자의 도는 바로 인(仁)이라는 한 글자에 귀결된다.어질고 지혜 있고 용기를 갖춘 도심을 키워 만나는 모두에게 길이 되어 주고 그로인해 환해질 수 있다면 세상에 참 귀한 일이 될 것이다.가끔씩 번개모임으로 만나 웃고 공부하고 담론하는 도반과의 만남은 나를 일깨워 주는 큰 회초리이다. 어질지도 지혜롭지도 못하고 용기마저 없는 나를 세워주는 도반들은 나를 3가지의 道로써 이끌어주고 깨워준다. 깊은 밤 생각만 해도 가슴이 환해진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10-28

(32)思無邪(사무사)

시경은 고대부터 전해오는 3천여 편의 시 중에서 305편을 뽑아 편찬한 것이다. 공자께서는 시경의 시 305편을 다 읽으면 생각이 사악한 마음, 즉 사특함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내 자신은 논어를 읽으면서 사무사(思無邪)에 대한 여러 해설집을 읽었지만 무엇이라고 정의하기가 쉽지 않았다. 언젠가 전각 작품으로 새긴 기억이 있지만 내용상의 깊은 정리는 솔직히 이루어지지 않은 단계였다. 먼저 邪라는 글자의 어원에서 힘들었다. 옛 글귀에 邪는 正을 이길 수 없다고 하였으며 邪는 본래 땅의 형상을 나타내는 의미로서 바르지 않다, 기우뚱하다의 뜻으로 접근할 수 있어 대략적인데까지 이를 수 있었다. 즉 시는 시대적 해석으로 간사하고 바르지 않고 정직하지 않은 것 등으로 正道가 아닌 邪道가 되는 것이다.공자는 논어 양화편에서 `시` 읽기를 권하면서 그 이익을 소상히 일러 주고 있다. “시는 정서를 일으키며 얻고 잃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무리와 사귀게 되고 원만하되 노하지 않으며 가까이는 아비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기고 금수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게한다”라고 친절히 알려주고 있다. 또한 외아들 佰魚에게 간절히 일러준다.“아들아 시와 예를 배워라. 시(시경)를 배우지 않으면 남들과 말할 수 없다”하셨고 예를 배우지 않으면 세상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가 없다고 꾸중하셨다. 詩는 자연스럽게 익힌 올바른 사상과 조화로 인간성이 모든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다고 자로편에서 또한 설하고 있다.옛 성현들은 조정에서 몰려 집에 들면 붓글씨로 자신의 용모를 바르게 살폈으며 독서와 시를 외우고 짓고 쓰고 가슴속의 번민을 해결하면서 자신을 다듬어갔다.시의 계절도 서예의 계절도 엄동설한이다. 시와 서예 분야에도 따뜻한 봄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시는 속내에 감춰둔 시인의 사유의 고백에 지나지 않지만 시를 읽는 것은 사악함을 없애고 사람을 다듬어가는 위대한 일인 것이다. 시는 예의 기본이다. 시를 통해 사라지는 사특함을 가을에 깊이 느끼게 되었으면 한다. 먼지쌓인 시집 한권을 먼지 털고 읽는 일은 내 자신의 사악한 마음을 털어 내는 일일 것이다.잦은 가을비가 밤 깊은데도 정겹다. 시가 나를 부른다. 소리내어 가을의 시를 읽어 찌든 마음 한 번 씻어야 겠다. 고픈 배를 채워 줄 것이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10-21

(31)忠과 恕(서)

논어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무엇보다 회자되는 공자의 사상은 충(忠)과 서(恕)라고 할 수 있다. 춘추 좌씨전에서 충은 속마음을 다하는 것(中心)이며 서는 같은 마음(如心)이며 동감, 공감, 동심으로 풀이하였다.논어 이인(里仁)편 제15장에서는 이렇게 서술되고 있다. “나의 도는 하나로 관철되어 있다”하니 증자가 말하길 “예”라고 대답하였다. 공자가 나가자 지인이 묻기를 “무슨말입니까” 하자 증자가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 일 뿐이다”라고 대답하였다.공자의 가장 큰 사람인 인(仁)의 다른 표현이 충과 서이다. 충은 자기의 마음을 다하는 것이고 서는 자기의 마음을 미루어 남을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충은 자신의 참된 마음을 다하는 진력의 정신이며 내몸과 마음 전부로 혼연히 바치는 것이며 서는 내가 하기 싫은 것은 남도 싫어하기에 그 사람의 마음을 미리 헤아려 미움과 실수를 줄이는 일이다.용서하고 이해하며 남을 대할 때 자신을 위로하듯 안아주듯 대한다면 정녕 서로의 만남의 자리는 큰 힘이 될 것이며 신뢰하고 돌아서는 그 순간 큰 힘이 솟아날 수 있을 것이다.恕의 글자는 어원에서 나같은 如와 마음심의 조화이다. 설문해자에서는 어진 것이며 남의 마음과 같은 것이다.(恕仁也從心如) 다른 사람의 마음은 내마음과 같다. `내가 바라는 것은 남도 바란다` 생각하면 우리는 서로에게 어떻게 하여야 할것인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자공이 여쭈었다. 한마디로 평생동안 실천할만한 것이 있습니까”. 바로 恕이다. 내가 하고자 하지않는 것은 남에게 베풀지 않는 것이다.” 위령공편에서 “사람이 평생 지켜야 할 도리는 인이지만 구체적인 덕목은 서인 것이다” 나를 미루어 남을 생각하라, 참 귀하고 큰울림이다.얼마 전 만난 그 사람의 변하지 않은 차가운 모습과 언행을 보면서 `사람은 참 변하기 쉽지 않구나`라며, 그 사람에게 바로 독한 말을 해주고 돌아오지 못한 것이 한동안 나를 괴롭혔다. 감정을 겨우 가라앉힘은 아직 내가 충과 서가 온전히 내 것이 되지 않음을 반성하는 시간이었다.용서는 용기이며 자신의 헤진 가슴자리를 한뜸 한뜸 꿰메어 가는 거룩한 행위이며 놓친 마음자리를 다시 불러세우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위대함인 것을 공자는 가르치고 있다.내 마음 자리가 바로 서야만 남을 받아들이고 안아줄 수 있다. 얼마전 앙칼지게 매차지 못하고 돌아온 나를 공자님은 무엇이라고 가르칠 것일지 사뭇 궁금해진다. 아직까지 내 마음에 따라다니는 그 사람을 이해해 주어야 충과 서를 알았다고 하지 않을까.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10-14

(30)恭寬信敏惠 (공관신민혜)

잘살라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깊이 탐구하고 몰입하면 정녕 자신의 능력과 한계만큼의 답은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글씨를 쓰고 살면서 언젠가 잘쓰고 싶은 단계가 지나면 사람은 스스로 착해지고 너그러워지며 천진난만한 단계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히 내 자신도 법속에 매이지 않고 법칙을 벗어나지 않는 신의 경지와 묘한 이치와 형상에 이를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우리는 잘살고 행복하기 위해 누구나 열심히 살아간다. 행복은 자신보다 남들과의 공감지수도 포함되고 사랑이라는 대명제가 실천될 때 훨씬 더 행복을 느낀다. 우리는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나서는 몰입이야말로 완전 행복이라는 다른 표현이다. 자장이 공자에게 숱하게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는 넌지시 능히 다섯 가지를 행할 수 있다면 仁할 수 있다. 자장이 상세히 듣기를 원하자 ”공손, 관용, 믿음, 민첩, 은혜”다 라며 공손하면 업신여기지 않으며 관용하면 사람을 얻고 믿음이 있으면 남들이 의지하고 민첩하면 공을 세우고 은혜로우면 충분히 남들을 부릴수 있다라고 양화편에서 말하고 있다.참 소중하고 귀하고 아름다움의 표현이다. 가슴 멍멍해진다. 자기 자신을 신뢰할 수 있다면 모든 것에 대한 자신이 생긴다. 이것이 믿음의 가장 큰 힘이며 보배인 이유이며 공덕의 어머니이다. 또한 은혜는 은혜로 반드시 갚아야 한다. 음덕의 귀함은 최대한의 성의로 갚아야 하고 상처는 잊어버려야 하며 은혜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글씨를 가르치고 살면서 숱한 배움의 인연을 만나고 헤어진다. 서로의 관계가 만나지 않음보다도 못한 관계가 되는 경우도 본다. 모두가 자기 자신의 부족한 성찰과 오해이며 이해부족이다. 배우고 가르치고 만날 수 있음은 그리 쉬운 인연이 아니다. 깊이 헤아려야 한다. 그 또한 인연의 관계량이다.사람은 서로에게 의지 되어야 하고 서로 생활하듯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만 못된 사람들도 있다. 자신의 꼴을 모른다. 길 열어주고 돌다리 놓아줌에 대한 몰상식한 사람도 있다. 이럴수록 그 자리에서 한없이 관용으로 관대해 지리라 수행 노력해야 한다. 세상은 좋고 귀한 것을 혼자서 느끼며 살기는 아쉬운 곳이다. 어느 한 글자만 가슴에 안고 살아도 욕먹지 않을 몇 만 근의 가치가 있다. 한 글자가 정신 나간 사람들을 화들짝 정신나게 하였으면 한다. 그런 한 글자 깨우칠 선생을 만나면 무량대복이다. 어느 누구든지 사람은 서로에게 한없이 의미있고 소중한 귀한 손님이다.“공손, 관용, 믿음, 민첩, 은혜” 이 다섯의 위대한 공자의 가르침 중에서 당신의 키워드는 무엇인가.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10-07

(29)博學篤志 (박학독지)

가끔씩 저녁도 같이 나누고 만남 자체가 공부가 되는 지인이 얼마전 아침 일찍 카톡으로 서울에 인문학 강의를 듣기 위해 왔다면서 강의장의 모습을 보내 왔다. 끊임없이 갈망하고 진리를 찾아나서는 구도와 구학열에 내 자신이 사뭇 부끄러웠다.학문이란 무엇일까? 배운다는 것은 용기이고 희망이며 삶의 지탱제이며 힘이다. 공자는 “배우기를 널리하고 뜻을 독실히 행하라. 깊이 묻고 가까운 것부터 생각하면 인덕이 그 안에 있다(박학독지·博學篤志)” 하셨다.박(博)이라는 한자는 시방(十方) 즉 사방에 부는 논에 모를 넓게 심다의 의미로 새길 수 있다. 공부는 폭넓고 깊으며 반드시 자신의 행동이 지식으로부터 자유로움의 단계에 들 수가 있다. 독(篤)은 목표라는 지점을 두고 천천히 걷다보면 도달할 수 있다. 즉 말이 천천히 걸어서 뜻을 이룬다로 해석한다. 참선 속에 옛날 공부하는 사람은 하루 해가 가면 발뻗고 물었다라는 구절에 가슴이 꽉 막힌적도 있고 졸음에 시달려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렸다는 독한 수행과 구학에 자뭇 반성이 깊어진다.성실과 근면이라는 두 단어가 너무 자주 들어 식상한 언어이고 가벼워져 보이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천만근의 무게이며 나에게 일러주는 한 글자의 대스승이다.공부를 하는 사람은 항상 배고프다. 고민하지 않고 방황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면 죽는 편이 낫다라고 말하고 싶다. 기회는 찾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자의 몫이다. 인생에는 누구나 세 번의 큰 기회가 온다고 한다. 어떻게든지 잡고 싶겠지만 기회는 늘 공부하고 독하게 뜻을 실현한 사람에게만 온다.나에게 공부의 가장 큰 적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 스스로 한정 지우는 속인의 의식에 있다. 그야말로 속좁은 인간일 뿐이다. 중용에서 또다시 강조한다. “널리 배우며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며 분명하게 분별 독실해야 한다”. 즉 이것은 최종적인 학문자의 실천 방법이며 학문의 대 성취를 가져온다, 날마다 모르는 것을 알며 날마다 능한 것을 잃지 않으면 학문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공부하지 않는 한 부모도 스승도 어찌할 수가 없다. 문고리를 잡아 당기면 문을 열어 젖혀야 한다. 학문은 신성한 아름다움이 있고 하면 할수록 좀더 일찍 열심히 했으면 하고 후회하는 가을 날이다.자신을 위한 노력은 100세 시대의 삶을 위한 가장 위대한 방책이다. 넓고 독하게 마음먹고 같이 길 나서자. 모든 길이 새 길이지만 그 길이 인생을 환하게 열어줄 것이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09-30

(28)訥言敏行(눌언민행)

오랫동안 같이 공부하는 도반이 중학생 아들방에 작품을 한 점 걸어주고 싶다고 했다. 논어를 공부하고 있는 중이라면서 자식의 결점을 보완해 주려는 깊은 배려인 것 같았다. 작품의 내용은 `눌언민행`을 선택해 왔었다. 선택의 의미는 깊고 신중하고 소중했었다. 논어의 글귀가 평생 아들 생각의 본(本)이 될 것이라 생각하니 나도 덩달아 기뻤다. 눌언은 말은 좀 더듬어도 괜찮고 민행 즉 행동은 민첩해야 한다는 표피적인 해석보다 숨어있는 그 깊이와 두께는 천근만근이고 말이나 글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관념적 사유이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말보다는 행동의 중요성이다. 자공이 물었을 때 군자는 “말보다는 실천이 앞서는 자”라고 정의했다. 거듭 군자는 자신의 말이 행동보다 앞서는 일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누차 강조하셨다.말은 안으로 농익어야 실하고 맛이 있다. 소가 되새김하듯 하여야 실수를 줄일 수 있다. 그리고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의 낙처(處)를 잘 알아새겨야 다툼이 없고 경청할 줄 아는 힘은 참 귀하고 위대하다 “말해야 할 때 말하는 것은 진실로 굳센 자만이 능히 하고 침묵할 때 침묵하는 것은 대단히 굳센 자가 아니면 능히 하지 못한다”는 이항로 (李恒老) 선생의 글귀가 생각난다. 그렇다고 침묵 만이 능사는 아니다. 공자께서도 “함께 말한 만한데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고 더불어 말할 만하지 않은데 말하면 말을 잃는다”라고 하셨다. 할말은 하라. 그러나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라는 자상한 가르침이다.내 자신도 말 때문에 부끄러운 일이 한 두 번 아니다. 속으로 말하고 실천못한 일도 수도 없거니와 더 황망한 일은 입으로 말하고도 옮기지 못한 일들이다. 아마 나의 지금의 무지와 삶은 말과 행동이 지워놓은 농사의 결과물인 것이다. 매스컴에서 늘 접하고 살지만 시시한 말장난과 억측스럽고 입에 발린 말과 담지 못할 말은 이제 좀 덜하면 좋겠다. 그들의 사악한 추론과 무책임한 행동을 쓸어버리고 싶은 참 속상하고 야박하고 기이한 세상이다.공자는 이인편에서 “삼가면 실패하는 일이 드물다”라고 했다.인간은 어떠한 일 앞에서 삼가고 신중하기 쉽지 않다. 알고 있으면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묘한 기계적 장치가 만들어져 있는 것 같다. 그래도 가끔씩 말을 하기보다 들어주기를 잘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저 고개가 숙여진다. 말은 실천행 일 때 힘이 있고 빛이 된다. 그리고 효력이 되는 것이다.지혜로운 삶은 모든 것은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달려있지, 몇 자 아는 지식에 있지 않다. 옻을 만지듯 드문드문거리는 잘익고 향기로운 말은 이 세상의 특별 구제약 일 것이다. 정의와 선을 위한 행동은 아름다운 실천행이다. 지혜 없는 행동은 안하는 편이 좋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다시 새겨 볼 일이라. “옛 사람이 말을 앞세우지 않았던 것은 실천에 미치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이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09-23

(27) 剛毅木訥(강의목눌)

공자께서는 “굳세고 꿋꿋하며 질박하면서도 말이 적으면 인(仁)에 가깝다”하셨다. `강의목눌(剛毅木訥), 이 네 글자 중 글자 한 자만 하더라도 교과서 100권의 무게보다 더 무겁고 뜻깊은 글자이다. 매년 초에 공부하면서 한 글자를 정해서 일년이라는 세월을 지키려고 다짐하는 글자 중에서 의(毅)와 눌(訥)은 벌써부터 선택해 본 글자이다. `꿋꿋하고 굳세다`라는 의미의 의(毅)는 바늘에 찔린 멧돼지가 털을 곧추세우며 성내는 의미의 글자적 의미도 있다. 정의가 아님에 대한 감정의 표출과 용납할 수 없는 마음의 표현이다. 그리고 눌(訥)이라는 글자는 사람의 입의 말이 어디에 갇혀져 있는 형상에서 왔다. 다시말해 말은 깊은 곳에서 빼내와야지 세치 혀 끝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옛말에 “소에게 한 말은 지켜져도 사람에게 한 말은 지켜지지 않는다”했다.말은 참 무서운 독인 것이다. 그렇다고 입 닫고 살아가라는 말은 아니다. 관조하고 지켜보고 다듬어서 내놓는 말은 세상의 활력소이다. 그로 인해 참선하고 따스해지는 일인 것이다. 공자가 평생을 구애해왔던 인(仁)에 대한 것이다. 공자의 인에 대한 답은 언제나 묻는 학생의 능력과 상황에 따라 진솔하게 설명하고 있다.자로의 물음에 “仁한 사람은 굳세고 질박하고 어눌한 사람은 仁에 가깝다”라고 단정지운다. 그럼 인에 대한 번지의 질문에 공자의 다른 대답은 “어려운 일을 먼저하고 이득 취하는 것을 뒤에 한다”라고 옹야편에 말하였고 안연편에서는 “인한 사람은 말을 할 때에 참으면서 신중하다”라고 하셨다. 또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도 하셨다.산다는 것은 많은 어려움에 노출된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이익을 위해 살고 그 순간을 벗어나기 위해 추하고, 해서는 안 되는 숱한 일들을 하고 산다. 죽음에 이르게 되면 삶은 참 위험한 일이었다고 회고한다.작금의 세상은 어느 곳 하나 바르게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세상 탓할 일이 아니다. 스스로 나의 행동과 말의 견처와 낙처를 살피면서 나아가야 할 일이다. 나에게도 남의 장점을 찾고 나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처절한 노력과 생활수행을 통해서 갈고 다듬고 해야 할 것이다.옛 글귀에 “남의 단점을 지적하지도 말고 자신의 장점도 또한 말하지 말라. 자신의 장점을 말하게 되면 남의 단점을 말하게 된다”라는 글귀가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또한 강의 시간에 말하고 나면 나의 이야기가 자랑으로 여겨지기에 반성 할 때도 많다.오늘 펼쳐놓는 `강의목눌`이라는 네 글자는 사람의 처신을 무게 있게, 이곳에서 저곳으로 안내해주는 정말 보배스러운 글자이다. 질박하고 신의가 있는 무게와 양심과 행동이 따르는 말은 값어치를 가름할 수가 없을 것이다.`목눌제(木訥齊)`라는 현판을 내걸고 살고 있는 지인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스산한 가을의 시골 저녁이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09-09

(26) 爲政以德(위정이덕)

논어 위정 편에 “북극성을 중심으로 은하계가 줄지어지듯 사람들이 덕있는 사람쪽으로 몰려들기 마련이다”고 했다. 공자께서는 덕을 높이려면 “남을 대할 때 성실과 신의를 지키고 정의를 지향하면 도덕의식이 높아진다”라고 안연 편에 말씀하셨다. 정치의 요체는 오로지 바로잡는 일이기에 정(政)은 정(正)의 의미이며 바르게 되라고 채찍질하는 것이다. 정치와 도덕은 하나이며 곧은 도덕을 행하는 것이며 도덕의 참된 실천의 장이 되어야 한다.공자의 정치는 덕치와 인정이다. 특히 형법의 정치를 반대하고 덕과 예의 정치를 주창하셨다. 또한 위정 편에서 “도덕으로 인도하고 예의로써 통솔한다면 수치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또 바르게 된다”라고 하셨다.노나라 대부 계강자가 정치에 대해 물었을 때 “정치란 바로 잡는 것이다. 그대가 바르게 통솔한다면 누가 감히 바르게 따르지 않으리오”라고 하셨다. 백성이 믿음이 없으면 나라는 바로 서지는 못한다. 이 시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앞다투어 이야기한다. 어디서부터 바로 잡아야 이 시대가 건전히 바로 설 수 있을까. 이제 힘과 권력과 오만방자와 양심마저 저버린 그들에게 구할 것이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우리는 아직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농락당하고 있다.어제까지 남들의 비리와 그릇됨을 탓하고 질책하던 그가 오늘 아침 포토존에서 고개 숙이고 성실히 조사받겠다라고 하는 모습은 너무 자주보는 모습이 되어버렸다. 정치에 대해 노자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노자는 무위의 정치를 논하였다. 소극적인 도덕으로써 도를 실현함과 동시에 말 없는 불언(不言), 가르침으로써 가르침의 주치를 이루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정치가 특별한 기교가 없으면 백성은 순박해지고 정치가 너무 자상하면 백성은 오히려 불만스러워진다 하셨다. 제도를 너무 많이 만들고 규제가 많을수록 백성들은 힘들어진다.공자께서도 나의 인재됨을 알아주는 이를 찾아 정치적 이상의 실현을 위해 선택받기 위해 주유천하 하셨다. 불혹으로부터 지천명을 약간 넘기까지 정치적 활동을 하셨지만 그의 포부와 정치적 이상의 실현은 이룰 수 없었다. 크게 보면 나라의 정치이고 세상의 다스림이겠지만 내가 살고 있는 작은 가정만 하더라도 절약해서 몇 평수 늘려놓은 집에 찾아오는 사람 없다면 그 집은 집이 아닌 차디찬 가옥인 것이다. 어찌 그런 집에 신바람이 나고 좋은 기운이 있을 수 있을까. 내 사는 곳이 선하고 귀한 곳이면 사람들이 줄지어 기쁜 마음으로 모이고 흥해질 것이다. 세상의 걱정 다 짊어지고 살지 말고 내 처소나 돌아볼 일이다.정치인들의 정신적 요체의 근본이 덕이 있고 베풀고 봉사와 정직이 그 본령이 되면 좋을 것 같다. 기대해 볼일이다. 우리 모두 “하나만 사랑하고 버리십시오. 그것은 생이 아니라 약속”이라는 것 가슴에 평생 안고 살았으면 좋겠다. 어디 덕성스럽고 탁월하고 성숙하게 정치하는, 우리 모두가 앞다투어 어른으로 뫼실, 그런 분 많았으면 참 좋겠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09-02

(25) 義以爲上(의이위상)

아침마다 보고 사는 글귀가 있지만 실천에 옮기기가 힘들다는 것을 느낀다.“명예와 이익은 성인도 능히 이겨내기 쉽지 않다”라는 장자의 글귀이다.얼마전 예술단체장 출마를 앞두고 찾아온 친구에게 해준 말이기도 하다. 이겨내기 쉽지 않은 이유는 분명 이익 앞에 의롭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의를 바탕에 두고 예로 행동하고 겸손과 신뢰로서 살아가면 모든 것은 대부분 이루어진다.의(義)도 예(禮)도 이익(利)도 실천하고 지키기 쉽지 않기에 늘 강조되는 말씀이다. 특히 이익 앞에서의 의로움은 너무 어렵다. 이익 앞에 자유로운 자는 세상에 귀하디 귀하다. 많은 사람들이 잠방이 속에 들어 이익과 향락에 만족하여 다투고 시기하고 모함하다 한 세상을 마친다.한자의 어원상으로 의(義)는 양(羊)과 아(我)의 구성으로서 我는 들쭉날쭉한 톱니 바퀴 형상으로 희생양을 날붙이로 잡는 모양이며 엄숙한 의식에 맞는 거동의 뜻이다. 들쭉날쭉 세상 사람들을 내 것으로 끌어들이는 형상이다. 義란 이치에 맞도록 통제되어 사사로움에 빠지는 일이 없이 객관적이고 합리적 자세이다. 외적인 발휘의 모든 행위와 표현을 바르게 하고 義에 바를 정(正)을 더하면 이 시대의 진정한 화두 정의가 된다. 공자께서도“사람은 의로움을 바탕으로 하여 행동 하나하나가 예절과 겸손을 하게 하며 성실로써 완성한다”하셨다.의로운 행동이 예절에 맞아야만 주변에 공감을 얻을 수 있고 힘이 되고 본이 되며 겸손해야만 백곡의 왕이 된다라고 노자는 말씀하셨다. 하나를 알면서 자신의 앎을 정의롭지 않게 드러내고 나타내는 일은 예로부터 칭찬의 대상이 아니었기에 말로서 바위를 끄덕이게 할 수 있어도 그것은 능히 선한 일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자로가 물었다. “군자도 용기를 중요하게 생각합니까”라고. “군자는 정의를 가장 중하게 생각한다. 만약 군자가 용감만 하고 의롭지 못한다면 난을 일으킬 수 있다. 또한 소인에게 용기가 있고 정의가 부족하다면 도둑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분별없이 날뛰는 헛된 용기는 정의를 저버린다. 곧 만용이랄 수 있다. 정의 실행에는 자신의 내공속에 갖추어진 용기가 있어야 한다. 양화(陽化)편에 “용기는 정의를 바탕으로 할 때 힘을 발휘할 수 있고 정의로운 바탕이 없는 용기는 오히려 남에게 피해를 준다”라고 말한다.정확히 알지 못함에서 일어나는 실행은 주변을 곤궁으로 몰고 들어가는 문이 된다. 옳은 사람은 용기를 자신의 준비된 속에서 찾지만 소인배들은 남들의 부추김과 무지에서 찾는다.젊은이들에게 “젊음은 다시 오지 않는다. 벼슬자리는 어쩌자고 의롭지 않은 부귀는 뜬구름”이라고 말씀하셨다.義는 오상의 하나이면서 사람이 지켜야 할 반듯한 준칙이며 우리에게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옳고 의로운 도리인 바른 길이다. 이러기에 세상은 의(義)를 맨 위에 올려놓았다. 한 번만이라도 의로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가을 아침이길 바란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08-26

(24) 지인용(智仁勇)

지혜와 어짐, 그리고 용기에 대해 자한편에 공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혜로운 자는 의혹하지 않고 어진 자는 사사로운 욕심이 없어 근심하지 아니하고 용맹스러운 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셨다.세상을 산다는 것 곧 사람의 관계속의 문제이다. 큰일을 성공하거나 그릇되거나 모두다 사람의 일로 인해 일어나는 일이다. 가끔씩 저 사람은 지혜롭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무엇이라고 꼬집어 설명할 수 없지만 같이 있거나 헤어지고 나도 한동안 맑아지는 귀한 경험을 할 때는 말이다.세상에서 어려운 일이 무엇일까? 사는 일 일 것이다. 모르기는 해도 살기 위해 사람의 마음을 구하는 일만큼 어려운 것이 천하에 없을 것이다. 마음 자체가 순간에 오만 번 변하기도 하지만 모두가 자기 중심적 행위 때문이다. 지혜로운 자는 마음을 가지런하게 할 수 있다. 흔히 “지식은 전해줄 수 있어도 지혜는 전할 수 없다”고 했다. 문 앞까지는 데리고 갈 수 있어도 문을 여는 일이 자신의 몫이지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다. 그러기에 “지식은 머리로 아는 일이며 지혜는 가슴으로 아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한 페이지의 책을 읽어 전부를 다 아는 것처럼 또는 자신의 경험담처럼 밤새 늘어놓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구역질이 나기도 한다. 지식을 선함으로 쓸 때 우리는 그를 지혜롭다고 할 수 있다. “어디에서 그칠줄 알고 머무르고 인식하는 것” 그것을 플라톤은 최고의 지혜라고 하였다. 예술에서는 지식보다 더 중요한 재산은 상상력이다. 불교에서 정견과 정사유, 이것 또한 바른 지혜의 덕목이다.공자는 “어진사람은 어려운 일이 있을때는 남보다 앞서서 행하고 소득을 취하는 것 큰 영광을 얻는 일은 뒤로 미룬다” 하셨다. 어질기만하고 선해서야 어려운 세상 살 수 있을까 하고 반문하겠지만 어진사람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것은 어진 사람의 마음이 먼저 안다.진정한 용기는 스스로 자신을 절제할 수 있는 지혜의 힘이며 또한 배움에 대한 도전, 참 아름다운 용기라고 믿는다. 용기는 만용이 아닌 과시와 드러냄이 아니라 나의 존엄과 가치를 찾고 기르는 위대한 지견력이다. 자신에게 확신이 두터운 자만이 진정한 용기를 낼 수 있고 정의를 용기로 실행할 수 있다. 이것이 도의 실천이다.어진자는 바른 도리를 밟으며 널리 사랑을 펴기에 마음속에 근심할 일이 없고 지혜로운 자는 사리판단에 어떤 일에도 미혹하고 의혹되지 않으며 진정 용기 있는 자는 착한 도리를 실행하기에 누구로부터도 두려워하는 법이 없다. 공자께서도 이 세가지 중에 하나도 능한 것이 없다 하셨다. 우리 모두에게 가슴을 무겁게 하는 일이다. 앉은 자리가 요즘 더위처럼 무거워 일어나기 힘든 부끄러운 날이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08-19

(23) 말조심

작품을 할 때면 글제를 정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작품의 수준보다 선구(選句)된 내용이 작가의 지견이요, 견처이며 그의 삶의 방향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글씨는 말과 사상과 삶의 철학을 대신해 나타난 형상일 뿐이다. 도록이 오면 글씨는 물론 글제를 찬찬히 세밀히 치밀하게 살펴보고 작업노트에 옮겨 적는 일이 나에게는 너무 익숙하고 귀하고 고마운 일이다. 특히 좋은 글귀는 반복해서 쓰기도 한다. 즉 출품했던 개인전 글제를 다시 다른 방법(장법:구도)으로 작품을 한다. 시간과 공간, 생각의 능력 차이겠지만 성숙하고 다른 작품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그 중에 귀하게 여기는 글제 중 하나가 “만약 옥의 티는 갈아내면 사라지는데 잘못된 말 한마디는 돌이킬 수 없다”는 글이다. 벌써 몇 번째 썼고 이번에 다시 작품으로 재생산할 것이다. 이 글제는 공자의 사위인 남용이 하루 아침에 꼭 세 번 읽고 새겼다는 말을 듣고 딸을 맡겼다는 이야기는 말의 무게를 새삼 느끼게 한다.공자는 이인(里仁)편에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이유는 몸소 실천하지 못함을 부끄럽게 생각해서이다(言之不出恥躬之不所也)”라고 했다. 얼마전 어떤 분이 좌우명을 부탁해 왔는데 “君子恥其言而過其行(사람의 말이 행동보다 과장될 때 부끄럽다)”라는 내용이었다. 쓰고 한동안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내가 실수를 하면 모든 사람이 알지만 거짓말을 하면 아무도 모른다.”말 중에 거짓말이 어느 정도일까. 거짓말도 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선의의 거짓말은 통용가능한 말인가? 어느 정도의 결점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나이가 들면 사람은 말도 행동도 실수를 하기 쉽다. 알아차리고 금새 평정심을 찾도록 끊임없이 갈고 닦고 수행을 하는 삶은 향기가 있고 아름답다. 말은 침묵을 통해 깊어지고 야물어지고 결실을 맺는다. 말은 존재의 질서이다. 쓸데없이 하고 나면 마음이 더욱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느낄 것이며 말에도 가치와 순도가 있다. 가려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말은 반드시 실천행이 있게 된다. 세상 살면서 너무 말을 많이 하고 산다는 말은 또 말을 낳고 재앙을 낳는 씨앗이 되기도 한다. 성인들 말씀에 “입을 무겁게 하라”고 숱하게 가르친다. 아낄수록 무거워지며 남에게 진실해 보이는 법이며 남에게 행복과 위안 용기를 주는 귀한 일들을 하도록 노력해 볼 일이다. 사람의 입안에 도끼가 들어있다. 사람과 사람사이 헛말과 간사한 말 나쁜 말을 하지 않도록 하는 일은 자신을 돌보는 위대한 일이다.자신을 파멸로 이르는 것이 있다면 그 첫 번째가 거짓말이다. 목숨이 다하도록 거짓말하지 말라는 선인들의 당부의 말씀이 늘 생생하다. 몇 년전 작업실 방문에 내건 함구당(緘口堂)이라는 현판이 나를 다시 돌이켜 세운다. 세상 살면서 입닫고 살기보다 더 어려운 것이 말조심이다. 조심 조심 살얼음 밟듯하고 남에게 아픈 말보다 따스하고 가슴이 훈훈해지는 말로 우리 모두가 어려움을 잘 이기길 바랄 뿐이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