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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영일만대교와 자율적 순환경제

김진홍한국은행 포항본부 기획조사팀장지역경제의 성장모델이라고 해서 국가경제의 성장메커니즘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지역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을 정도의 자원이 없다면 외부에서 자원을 가져와 가공하고 지역에서 모두 소비할 수 없을 경우에는 다시 외부로 내다팔면 된다. 그러한 순환과정을 거치면서 지역에서 고용이 늘어나고 소득이 증대됨에 따라 소비경제도 활성화되며 이를 통해 축적되는 자금은 지역 금융기관을 매개로 지역기업에 재투자되는 일련의 과정이 반복되면서 지역경제는 확대재생산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그런데 국가의 경우에는 수출입과 같이 통관과정에서 국내에서 성장단계에 있거나 좀더 보호 육성해야 할 산업이 있다면 이를 보호하기 위해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거나 우리가 과거에 많이 듣던 ‘국산품 애용운동’과 같은 비관세 장벽을 통해서도 일정부분 성과를 거둘 수도 있다. 지금 중국이 사드를 빌미로 한국제품을 기피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역에서는 이와 유사한 방식의 성장모델을 채택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지역 내 경제주체들이 특별한 제재조치 없이 자유롭게 해외를 포함한 역외와의 자금, 물류 등이 이동 가능한 완벽한 개방경제체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지역경제가 외부의 도움이 없이 지역 자체적으로 확대재생산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율적인 성장메커니즘이 어느 수준까지 작동하는가에 달려있다.그렇다면 지역경제의 자율적인 성장은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더구나 관세장벽도 없는 완벽한 개방경제에서 지역의 부(富)가 최대한 지역 내에 머무르며 순환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소재에서 가공품을 거쳐 최종재에 이르는 전 과정을 지역에서 갖추면 된다. 이에 더하여 지역 내 경제주체들의 생산, 소비, 투자활동에 있어서도 지역 산 제품을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일종의 ‘비관세장벽’에 해당하는 ‘지역산품애용’ 행동을 생활화하면 더욱 효과적이다. 문제는 그렇게 하고 싶어도 지역에 그러한 기반이 없는 경우다. 따라서 지역에서는 항상 이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먼저 우리는 도농복합도시의 장점을 살릴 수 있도록 농림수산축산 전 분야에서 6차 산업을 적극 추진할 필요가 있다. 일례로 지역 축산농가가 키운 한우를 시장에서 파는데 그치지 않고 이를 도축하여 식육단위로 소매판매하거나 아예 장조림으로 만들어 파는 것까지를 지역에서 하게 되면 전 과정에서 많은 고용과 부가가치가 지역에서 창출된다. 즉 생산-가공-유통의 전 과정을 생산지가 담당할 경우 부가가치가 극대화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을 농수축산물에 국한하지 않고 다른 산업분야 전반에 걸쳐 확장시키면 그것이 바로 지역의 자율적 순환경제모델이 된다. 최근 수중건설로봇 개발 사업이 완료됐다. 앞으로 수중건설로봇 실증 및 확산사업도 추진될 예정이다.지역 로봇산업의 현실을 생각할 때 개발된 기술을 민간 기업에 이전한다는 것도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일만대교 건설에 대한 논의도 점차 부상하고 있다. 반면 수 년 전 경북의 전략산업으로 지정된 티타늄산업이 조용한 것은 아쉽다.하지만 이것을 각자 다른 분야로 인식하지 않고 지역경제의 순환모델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매우 매력적이다. 영일만대교를 건설할 때 이왕이면 현수교 방식으로 설계하고 지역 철강공단의 강판, 메인케이블, 행거로프 등으로 수상부분을 건설하고, 바다에 접하는 교각은 티타늄소재로, 수중작업에는 이번에 개발된 수중건설로봇을 실증 및 확산사업의 일환으로 활용한다면 어떨까. 그럴 경우 포항은 단순한 다리 하나를 얻는 것이 아니라 지역 내 철강생태계가 확장되고 역내 순환경제가 진일보하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019-01-22

해오름동맹의 실질적 완성 조건

김진홍한국은행포항본부 기획조사팀장포항~울산 고속도로가 개통된 2016년 6월말 포항, 경주, 울산 3개 지역 간 상호 협력강화를 위한 해오름동맹이 출범한지도 벌써 3년차에 들어섰다. 그동안 문화, 예술, 관광 등의 부문에서는 공연, 여행상품 등 일부 성과를 보였지만 3개 지역 모두 참여할 만한 대형 사업의 발굴은 아직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해오름동맹의 사업청사진을 삼각형 형태로 표현할 수는 있지만 실질적이고도 물리적인 이들 지역의 공간지리적 분포가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여있어 포항~울산, 포항~경주, 울산~경주처럼 2개 지역 간 협력은 수월하지만 3개 지역이 함께 참여해 시너지효과를 내거나 3개 지역 모두 득이 되는 신규 사업의 발굴에는 의외로 제약요인이 많기 때문이다.그런데 굳이 새로운 산업에만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미 포항과 경주, 울산은 자동차산업이라는 하나의 서플라이체인으로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며 이들 3개 지역은 공동운명체인 것과 마찬가지임을 깨달아야만 한다. 최근 포항, 경주 지역 중소기업들이 어려워진 데는 단지 철강경기 부진에만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산업까지도 어려운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포항에서는 철강소재가, 경주에서는 이를 가공한 자동차부품이, 울산에서는 완성차제조 및 판매가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근 외국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은 지금 사면초가라고 한다. 먼저 수출시장에서는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와 사드보복조치에서 시작된 중국내 한국자동차 기피 등에 따른 부진이 지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내수도 마찬가지다. 완성차업체는 노동조합과의 불협화음과 수입자동차와의 경쟁이, 부품업체에서는 최저임금인상과 근로시간단축 등 경영여건 악화를 지적하면서 가격경쟁력에 한계가 왔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처럼 자동차산업의 부진이 철강경기 부진과 통합되면서 포항, 경주, 울산 세 지역 모두 지역경제가 타격을 입고 있는 것이다.자동차산업의 미래 성장 키워드는 경량화다. 자동차 본체(body)에서 사용되는 철강 비중의 감소는 포항도 예의주시해야만 하는 과제다. 본체에서 단순히 철강소재로만 만들어진 부품의 비중은 향후 10년간 현재 40%대에서 20%수준까지 낮아지겠지만, 고장력·초고장력강판을 포함한 고부가가치 철강소재비중은 2040년경에도 60%정도는 차지할 전망이다. 나머지는 최근 비중이 확대되고 있는 알루미늄 등 비철금속이 최대 30%, CFRP(탄소섬유강화플라스틱) 등은 10% 전후까지 확대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측하고 있다. 이처럼 경량화에 유용한 철의 대체소재가 있음에도 전면교체가 되기 힘든 데는 철의 가격경쟁력 때문이다. 자동차 본체에 사용되는 철:알루미늄:CFRP의 가격비는 약 1:4:50 정도로 철이 압도적으로 싸다. 게다가 철 소재는 알루미늄이나 CFRP보다 재활용성이 높고 안정적 공급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큰데다 여타소재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자동차 제조설비를 교체하는 등 막대한 설비투자비용이 요구되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보다 분명한 것은 향후 세계자동차시장의 주도권은 연구개발을 통해 강판과 플라스틱, 강판과 CFRP와 같은 이종소재들 간의 융합, 복합, 접합 등으로 혁신적인 재료기술이나 신개념의 부품을 만들어내는 기업이 쥐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해오름동맹에 속한 포항의 소재, 경주의 부품, 울산의 완성차로 이어지는 자동차산업의 서플라이체인이 공동으로 협업해야할 당위성은 차고 넘친다. 포항의 우수한 연구개발진, 경주의 숙련된 부품기술자, 울산의 완성차 시장전략팀 등이 한자리에 모여 드림팀을 꾸며 독일, 일본을 뛰어넘는 경량화에 적합한 자동차용 소재와 부품을 만들어 내는 순간 폭발적인 시너지효과를 창출하는 해오름동맹은 절로 완성될 것이다.

2019-01-15

포항을 최고의 여성창업도시로 만들자

김진홍 한국은행포항본부 기획조사팀장매년 쏟아져 나오는 보고서들 가운데 세계 각국의 도시별 랭킹을 매기는 보고서들도 적지 않다. 미국 뉴욕시의 경우 이와 같은 다양한 분야를 다루는 보고서들의 도시 순위에서 거의 대부분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상위권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특이한 보고서들도 많은데 그중 하나로는 미국의 대형 컴퓨터 제조업체인 델(DELL)사가 매년 발표하는 ‘여성 기업가(起業家)의 성장을 촉진하는 도시랭킹(Women Entrepreneur Cities Index)’이라는 것도 있다. 델사는 주요 도시들을 시장, 인재, 자본, 문화, 기술 총5개 부문에 72개 지표를 설정한 후 그중 45개 지표에 성별에 기초하는 요소를 포함시켜 이를 수치화하여 도시별 종합순위를 산출하고 있다. 여기에도 뉴욕시는 2018년 전 세계 주요 도시 중 1위를 차지했다.우리나라는 서울시가 2017년 30위에서 2018년 20위로 많이 개선됐지만 베이징 홍콩 타이완 상하이가 나란히 13위에서 16위를 차지한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여성기업가가 나타나고 성장하기는 어려운 환경임을 알 수 있다. 일본 도쿄는 2017년 서울보다 뒤처진 39위에서 2018년 17위까지 수직상승하며 서울을 따돌렸다.이는 일본 정부가 인구감소시대를 맞이해 그 근본원인 중 하나로 여성 그중에서도 젊은 여성들의 사회경제활동의 여건 개선에 주목하기 시작한 성과의 하나가 아닐까 짐작된다.그렇다면 뉴욕시는 어떤 방법으로 여성 기업가의 성장을 촉진시켰을지 알아보자. 뉴욕시는 2014년 여성 기업가 지원기관인 ‘WE NYC(Women Entrepreneurs NYC)’를 설치했다. 여기에는 뉴욕시라는 행정만이 아니라 금융기관, 기업가, 대학, 비영리단체나 언론기관 등이 산학관연대의 형태로 참여하고 있다. 이 기관에서 여성 기업가들에 대한 교육, 훈련 및 관계자와의 네트워크 형성 지원 등은 물론 자금조달이나 융자에 관한 자문 등 기업이 자립하는 데 필요한 포괄적인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일례로 WE NYC의 운영프로그램인 WE Master Leadership에서는 창업자나 투자가 등에게 자사 제품이나 서비스를 소개하는 비즈니스 스피치에 유용한 비결, 지도력 향상을 위한 워크숍 등을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또한 뉴욕시장은 70% 이상 여성들이 기업 창업이나 성장에 자금조달이 가장 큰 난관이라는 설문결과를 바탕으로 여성 기업가용 크라우드 펀딩(WE Fund Crowd)도 도입했다. 여성창업자들이 대부분 은행 등을 통한 소액자금 대출이 어렵거나 고금리가 적용되는 부담을 이를 통해 저금리로 조달할 수 있도록 해소한 것이다.포항은 물론 다른 지방 도시들 모두 젊은 여성들의 수도권 집중현상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이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지역에 눌러 앉히기 위해서는 육아환경 개선에 앞서 대학졸업 여성들이 경제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환경조성부터 할 필요가 있다. 여성 기업가의 성장을 촉진하는 도시랭킹 산정 항목 5개 가운데 포항시는 남성인력을 중심으로 성장해온 철강도시답게 여성친화적인 ‘시장’과 ‘문화’ 항목 부문의 점수는 아마도 낮을 것이다. 하지만 우수한 연구개발 기반에서 배출되는 ‘인재’와 첨단과학 ‘기술’ 두 개 항목은 전국 어느 도시보다 뛰어날 것이라 생각한다. 마지막 항목인 가장 중요한 창업 ‘자본’ 조달은 전국 모두 비슷한 상황일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지역에 있는 잠재적인 엔젤투자가들이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심의기구의 심사를 거친 여성 기업가의 사업아이템을 대상으로 자금을 모집하는 포항형 크라우드 펀딩의 구상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포항에도 창업을 꿈꾸는 많은 예비 여성 기업가들이 많다. 이제 그들이 굳이 수도권으로 가지 않고도 포항에서 창업을 꿈꿀 수 있는 분위기부터 조성하자.

2019-01-08

스마트시티 연구의 세 가지 매력

▲ 곽지영 포스텍 산학협력교수‘쉽지 않은 주제인데 왜 굳이 하느냐?’, ‘학교에서 잘할 수 있는 순수 연구가 낫지 않겠느냐?’ 미래도시 연구를 하고 있다는 내 소개 뒤에는 이런 우려섞인 코멘트를 듣곤 한다. 일리있는 말씀이다. 실제로 일이 잘 안 풀릴 때 등장하는 내 머릿속 악마도 늘 같은 말로 나를 약 올리곤 하니까. 그런데 스마트시티 연구에는 아무리 힘들어도 계속하게 만드는 세 가지 매력이 있다.첫 번째는 ‘공익’을 최대 가치로 여기는 정부, 지자체 사람들과 일하는 기회이다. 기업에서는 실무자도, 임원도, 경영진도 ‘우리 회사의 이윤 극대화’를 궁극의 목표로 일해야 한다. 당연하지만 ‘홍익인간’을 외친 단군의 자손이라 그런지, 마음 한편에 뭔가 아쉬움이 남을 때가 있다.사람들의 니즈(Needs)에서 출발하는 프로세스 초기의 내부 기획 회의에서는 공익성 아이디어들이 적잖이 등장한다. 그것들 중 일부는 단계별 리뷰 과정에 ‘유네스코 직원이냐’는 질문을 받고 좌초되기도 하고, 일부는 ‘상품성’과 ‘수익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화되어 원래의 의도와 사뭇 달라지기도 한다. 단군에서 세종대왕으로 이어져온 사람 중심 정신이 담긴 아이디어들을 변질없이 논할 수 있는 자리가 반갑다.두 번째는 스마트시티를 통해 세상을 더 안전하고 살기좋은 곳으로 변화시키는 일,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산업을 키워내어 나라를 먹여 살리는 일에 동참한다는 뿌듯함이다. 첨단 기술의 손길이 아직 채 미치지 못한 삶의 현장 곳곳을 찾아내고, 성장 정체를 맞은 경제와 그 안에서 자칫 희망을 잃어가는 청년들, 그런 현실을 앞에 두고 내 갈길 가는 마음은 지옥이었다. 세상을 바람직한 모습으로 바꿔가는 그 커다란 소용돌이 어디쯤에서 나도 같이 뛰고 있다는 점이 참으로 짜릿하다.세 번째는 도시재생사업 등을 계기로 공청회나 주민협의체 등을 통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우리 동네 사람들’과 함께 지역의 미래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생긴 점이다.마침 며칠 전에도 포항의 도시재생사업 선정 관련 주민 공청회에 지정토론자로 참석하게 되었다. 지정토론자라고는 하나 내 할 말은 10분이 채 안되게 마쳤고, 오히려 방청석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끄덕거리며 받아적느라 바빴다.아이 키우기 좋은 동네가 되면 좋겠다는 젊은 주부의 울먹거림이 묻은 목소리, 오랜 역사의 북부시장을 경쟁력 있는 시장으로 만들어 달라는 상인의 절절한 당부, 대중교통과 숙박 시설이 좋아져서 서울 사는 친구들한테 놀러오기 불편하단 소리 좀 덜 듣고 싶다는 어느 주민의 바람, 아침마다 조깅 나가시는 송도 근처 송림 숲 공기가 얼마나 좋은지 아느냐며 사람들이 그 가치를 잘 모르는 게 안타깝다는 어르신…. 교육, 경제, 관광, 환경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전문가 뺨치는 도시 속 생생한 삶의 이야기들이었다. 옛 포항항 주변을 경제와 첨단 해양산업의 중심으로 되살려 보자는 무미건조할뻔한 도시재생사업의 목표는 겨우 두 시간 남짓한 공청회 한번에도 생생하게 살아났다.학계와 기업 경험을 합쳐 사용자 경험 분야에 종사한지 25년이 넘어가지만, 사랑받는 제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일, 그 중에도 맨 첫 단계, 즉 사람들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가 뭔지를 정확히 짚어내야 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강의에서 나는 그 비법을 동정이나 연민과 공감의 차이로 설명하곤 한다.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고 겉핥기만 하거나, 동정하듯 강 건너에 멀찍이 선 채로는 절대 답을 찾을 수 없다. 현장에서,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제대로 공감해야만 그 답이 보상처럼 주어진다. 내 연구 의지를 꺾으려 회의적인 멘트를 날려대는 머릿속 악마를 쫓아낼 때면 나는 묻는다. 정답을 찾을 기회가 저절로 생기는 호사를 굳이 피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2018-10-24

도시의 가치

▲ 류영재 포항예총 회장유신(維新)은 낡은 제도를 고쳐서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말 그대로라면 참으로 좋은 제도이다. 우리나라에도 유신시대가 있었다. 이른바 ‘10월 유신’이 그것이다.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안보태세의 확립과 새마을운동이라는 근대화 프로젝트를 통한 부국강병을 표방한 대변혁이었다. 그러나 10월 유신은 역사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유신의 진정성보다 정권유지의 방편으로 일본 메이지유신의 껍데기만을 모방해 온 것으로 해석된 까닭이다.우리보다 한 세기를 앞서서 일본에도 유신의 바람이 불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다. 이는 메이지천황 때 일어난 정치적 변혁으로, 쇼군이 지배하던 막부정치를 무너뜨리고 천황이 직접 다스리는 일본의 근대화였다. 올해가 메이지유신 1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계기로 ‘일본을 바꾼 바다’라는 주제를 가지고 한국해양대 해양문화콘텐츠사업단에서 주관하는 동아시아 해양인문투어에 합류하여 메이지유신의 심장부인 야마구치 탐방의 길에 나섰다. 부산항에서 부관페리를 타고 밤을 달려 도착한 곳이 야마구치의 서단 시모노세키였고, 해양을 통한 기억의 소환은 이렇게 시작되었다.야마구치는 일본열도의 중심인 혼슈 서쪽 끝에 있는 현이며, 현재의 일본 수상인 아베 신조의 지역구이다. 아베 뿐 아니라 근대 일본의 많은 정치인들이 이곳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30년의 짧은 생애동안 일본의 정치와 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요시다 쇼인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는 이곳에 사설학교인 ‘쇼카손주쿠’를 열고 하급무사들을 가르쳤는데, 그의 제자들이 성장하여 바쿠후(幕府)를 전복시키고 왕정복고를 실현한 메이지 유신의 주역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일본 제국의 초대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도 그의 제자이다. 요시다 쇼인은 일본 우익사상의 뿌리이자 야스쿠니 신사의 시초이고 메이지유신이 가능케 한 사상가로 추앙받고 있다. 우리의 영웅인 안중근이 일본의 역적인 것처럼,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은 우리 민족의 원수다. 이런 까닭으로 요시다 쇼인에 대한 정보는 국내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비판하고 대비할 수도 있는 법이다. 어쨌든 이들이 일본의 중앙이 아니라 변방인 바다를 끼고 있는 야마구치의 작은 고을에서 새로운 세계를 꿈꾸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변방의 해양공간으로부터 불어온 변혁의 바람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바다를 끼고 있는 포항은 당연히 해양에 대한 관심을 깊이 가져야 하는 고장이다. 시대적인 상황 또한 그렇다. 정보화시대인 21세기는 지식의 축적보다는 네트워크가 존중되는 시대이므로 보다 유연한 사고와 다양한 감각, 풍부한 상상력이 요구된다. 창의적 상상력과 해양문화를 접목해야 하는 까닭이다. 여정 중에 만난 작은 항구 모지코(門司港)는 여러 부분에서 포항이 오버랩되는 도시였다. 일본의 근대화를 견인하였고, 개항의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모지항은 ‘모지코레트로’라는 명칭으로 주목받고 있는데, 메이지시대에 지어진 건물을 개축한 레트로(추억, 향수의 뜻) 건축이 많으며, 오래된 거리 모습과 새로운 도시기능을 절묘하게 섞어 놓은 도시형 관광지를 구현하고 있었다. 거리에는 관광용 인력거가 달리고 번개시장의 다양한 상품과 넘쳐나는 인파, 맑은 바닷물에 직접 발을 담글 수 있을 정도로 인접한 수변공간의 관리 등 포항의 도시재생 모델로 삼을 만한 곳이었다.뜻밖의 자연재난 이후 도시이미지의 급속한 추락이라는 재앙에 직면한 포항의 현실이 심각하다. 도시이미지의 추락은 인구감소 뿐 아니라 공장의 일감 수주에도 영향을 미쳐 철강공단 내에서 휴폐업 내지는 매각을 기다리는 공장이 수두룩하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절망하지 말자. 재난으로 가치가 하락한 도시를 재생시킨 예는 수없이 많다. 위기가 곧 기회라 하지 않는가!

2018-08-29

내빈 소개, 그리고 축사

▲ 박창원수필가지난 봄, 어느 면지역에서 인기리에 열리는 특산물축제에 가 보았다. 개회식이 시작됐다. 내빈소개부터 했다. 시장, 국회의원, 시의회의장, 도의원, 시의원, 기관단체장 순서대로 소개를 했다. 소개할 사람이 많다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국민의례가 있고 난 다음에 축제추진위원장의 개회사가 있었다. 바쁜 시정, 의정활동에도 불구하고 참석한 시장, 국회의원, 시의회의장 등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이어 시장의 축사가 있었다. 시장은 지역 출신 국회의원에 대한 찬사와 함께 도의원, 시의원이 이 지역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국회의원이 축사를 한 뒤 시의회의장이 단상에 올라왔다. 의장은 이곳 출신 동료 시의원이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치켜세웠다. 시장이든 지방의원이든 이렇게 단상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으면 자기네들끼리 품앗이하듯 서로 칭찬해 주기를 한다. 뙤약볕에 앉아 있는 일반인을 배려하지 않는 이러한 식의 지루한 내빈소개와 축사는 빈축을 사게 마련이다.얼마 뒤 다른 곳의 특산물축제에 간 적이 있다. 앞의 개회식과 비슷한 순서로 진행되었다. 다만 이 행사에서는 시장이 참석을 하지 못하고 구청장이 대신 왔다.사회자는 “시장님을 대신해 구청장님의 축사가 있겠습니다”라는 말을 했고, 단상에 오른 구청장은 “시장님이 직접 오시어 축사를 하셔야 하는데, 사정이 있어 참석을 못하게 되어 제가 대신 하게 되었습니다”라는 양해를 구한 뒤 축사를 했다. 구청장을 비롯한 몇 사람의 축사가 끝난 뒤 사회자는 느닷없이 “오늘 행사에 참석을 못하신 시장님께서 축전을 보내주셨는데,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하고는 축전을 낭독했다. 시장 대신 구청장이 참석했다 했고, 그에 따라 구청장이 축사를 했음에도 시장의 축전은 또 무엇인가? 참으로 희한한 의전이다.작년 어느 달인가 시에서 주최하는 어느 행사에 참석한 일이 있다. 내빈소개 순서가 되자 시장이 먼저 소개됐다. 시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시장이 내빈으로 소개된 것이다. 내빈(來賓)이란 무엇인가? ‘어떤 모임에 공식적으로 초대를 받아 참석한 손님’을 말한다. 이 경우 시장은 내빈이 아니다. 주최자이다. 주인을 손님으로 소개한 꼴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주최자를 내빈으로 소개하는 곳이 꽤 많다.이런 문제점을 의식해서인지 요즘 어떤 행사장에서는 ‘내빈’이란 말 대신 ‘내외 귀빈’이란 용어를 쓴다. 내외 귀빈을 소개하겠다며 한 사람씩 소개하고 박수를 치게 한다. 내외 귀빈은 누구를 말하는가? 보통 내빈(來賓)이라 하면 ‘행사에 참석한 외부 손님’을 뜻하지만 ‘내외 귀빈’이라 하면 ‘내부 귀빈’과 ‘외부 귀빈’, 즉 ‘안 손님’과 ‘바깥 손님’을 아우르는 말로 들린다. ‘손님’이란 말 자체가 ‘외부에서 참석한 사람’을 전제로 한다. 주최측 인사는 어떠한 경우에도 손님이 될 수 없으니 ‘내부 귀빈’이나 ‘안 손님’은 말이 안 되는 용어다. 주최측 인사를 굳이 소개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에서 주관하는 행사에 시장이 참석했고, 시장을 소개해야 한다면 “내빈 소개가 있겠습니다”라고 하지 말고 “오늘 행사에 참석하신 주요 인사를 소개하겠습니다”라고 한 다음에 “○○○ 시장님 참석하셨습니다.” 라고 하면 된다.참석 내빈이 많아 지루함이 예상되는 경우 기념사나 축사 예정자는 소개를 생략하는 재치가 필요하다. 물론 내빈(참석자)소개를 시작하기 전에 양해를 구해야 한다. 그들은 어차피 기념사나 축사를 할 때 소개가 되고, 자신한테 할애된 최소 5분 정도의 시간이 있지 않은가. 내빈소개를 할 때 일어서서 인사를 하고, 기념사나 축사 때 나와 또 연설을 하고, 축사를 하는 다른 인사가 또 이름을 거론해 주고, …. 이러는 사이 행사는 김이 빠지고, 사람들은 지치게 돼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내빈소개나 축사 방식은 개선할 필요가 있다. 내빈을 위한 소개나 축사가 아니라 일반 참석자를 배려하는 소개나 축사가 되어야 한다.

2018-08-22

우리가 잊고 있는 것들

▲ 김경준 포스텍 정보통신연구소 연구부교수2016년 구글의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와 세계 최정상급 프로 바둑기사 이세돌 9단의 5번기 공개 대국에서 알파고가 4승1패로 승리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대국의 결과로 인공지능의 가치와 가능성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된 것에는 큰 이견이 없는 듯하다. 이를 계기로 해외 뿐만아니라 국내 일반인들에게 생소했던 인공지능을 통해 이뤄지는 변화상과 산업적인 가치, 그리고 기술을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한 고민을 했던 한 해였다.기관, 단체, 전문가, 인문학자 할 것 없이 인공지능에 의해 촉발되는 사회, 산업, 문화 등의 분야에 수반되는 변화와 문제점을 다양한 시각으로 논의했다. 논의의 핵심에는 인공지능에 의해 인간생활의 변화되는 모습을 분석, 예측해 기술적인 대안을 찾는 데 주목했다. 그리고 알파고가 던졌던 신선한 파문들은 점점 커지고 있다.그동안 정부의 시책 변화나 알파고와 같은 기술의 환경 변화에 새롭고 혁신적인 방안 및 대책 마련을 위해 관계자들이 분주히 노력을 해 오고 있다. 필자도 IT를 전공하고 관련분야의 연구를 수행하고 있어 기관이나 산업계에서 추진하고 있는 정책 및 기술 위원회에 직간접적인 참여를 빈번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이 긴박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사정과 중요성을 알기에 위원회 참여, 자문, 개선안 제시 등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또 여러 가지 현실적인 난관에도 불구하고 성과를 이룬 관계자들께 아낌없는 찬사를 전하고 싶다.4차 산업혁명은 보이지 않는 규칙을 기반으로 자율로 이뤄지는 환경에서 사용자에게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술적인 패러다임이다. 4차 산업혁명의 진입 시기는 학자에 따라 다르게 예측하고 있지만, 자율주행, 의료, 제조 공장 등에서 인공지능이 탑재된 기기나 기계의 성능이 인간과 대등하거나 능가하는 시점으로 보고 있다. 늦어도 2025년경에서는 4차 산업혁명의 초입 단계에 진입할 것으로 조심스럽게 전망하고 있다.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자율주행차, 인공지능 비서, 의료 사진 판독, 그림 그리기, 작곡 등의 영역에서 초기 단계의 인공지능 서비스를 경험하고 있다. 또 현재 반복성이 있는 일부 서비스는 사람의 능력을 앞서는 성과를 보이고 있다. 사람을 능가하는 분야가 점점 늘어날 것이다.다가올 4차 산업혁명은 첨단 기술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식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이 회자되는 지금 지나온 기술 발굴이나 산업 육성 정책들을 생각해 보면 다소 아쉬운 점이 있다. 1995년 마이크로소프트 MS-DOS 7.0이 출시되는 시점으로 기억이 되는데, 정부에는 한국형 K-DOS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했고, 성과에 목말라했다. 다양한 상황들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더라도, 결과론적으로 K-DOS는 제대로 보급되지 못하고 폐기됐다. 이외에도 한국형 리눅스, 위피, 토종 모바일 운영체제, 인터넷 보안 기술 등 유사한 프로젝트들이 다른 시기 방법들로 추진됐다. 결과는 모두 성과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기능이나 기술적인 한계를 보여 사장되고 말았다.구글의 경우 알파고 기술을 기반으로 인공지능 기술의 산업 저변 확대를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기술 진흥 정책에서도 되짚어 봐야할 사항이라는 생각이 든다.우리는 지금 4차 산업혁명 대비를 위한 새로운 기술들에 눈을 돌리고 기술의 확보를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우리의 역량을 결집해야 하는 시기에 즈음해서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우리는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만 집중을 했었다.현재의 역량들을 높이기 위해 어렵사리 개발한 기술을 고도화하고 새롭게 해석하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개발해 놓은 기술에 대해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지 못했던 일들을 돌이켜 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량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2018-08-01

신양아록(新養兒錄)

▲ 이정옥 위덕대 교수두 돌이 채 안된 손자가 올 삼월부터 어린이집을 다닌다. 유달리 사람 좋아하는 아이답게 친구도 잘 사귀고 선생님도 잘 따른다고 해서 집단생활을 대견스럽게 잘한다 싶었다. 그러더니 자주 아프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전까진 잔병치레 한 번 없이 건강한 아이였다. 일주일에 연 삼일은 아프다고 하니 다니지 않는 것이 어떨까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몇 주 전엔 심한 기침으로 나흘간 입원하기까지 하여 애를 태우기도 했다. 여기저기 걱정을 풀었더니 이제껏 하지 않았던 집단생활에서 각종 병원균에 노출이 돼서라고 했다. 면역력을 기르는 이 과정을 거쳐야 튼튼해진단다. 시간이 지나면 점점 나아질 거라며, 도리가 없다니 할미는 그저 안쓰러워 할 뿐이었다. 그런 손자가 일주일 전에 우리집으로 피접(避接)을 왔다. 손과 발과 입에 수포가 생기는 수족구라는 전염병에 덜컥 걸렸단다. 어린이집 아이들이 집단발병을 했고, 다 나을 때까진 어린이집에도 갈 수 없단다. 더구나 연년생 여동생인 손녀에게까지 전염이 될까 염려돼 아들 내외가 궁여지책으로 피접을 생각한 모양이었다. 피접이란 병이 들었을 때 살던 집을 피해 다른 곳으로 옮겨 요양하던 예전 풍습을 이르는 말이다.사정을 말하면서 아이를 일주일 정도 돌봐줄 수 있느냐고 조심스럽게 묻는 며느리에게 흔쾌히 대답했다. 바쁜 직장일이 핑계가 되어 주말에나 가끔 만나는 손자였다. 비록 아파서이긴 하지만 온전히 일주일을 먹고 자며 함께 지낸다는 반가움에 잘 돌보지 못하여 다칠까하는 두려움이 겹쳤다. 손수 삼시세끼와 간식을 제대로 해 먹여서 병을 이겨낼 수 있게 해주고 싶은 마음은 더 컸다. 퇴근길에 서둘러 장을 보며 온전히 손자를 위한 일주일을 살 채비를 했다. 원래 할미를 잘 따르던 손자인지라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생활을 그다지 낯설어하지 않았다.한 주일을 참으로 즐겁고 신나게 손자와 지냈다. 다행히 아픈 기색은 별로 없이 잘 먹고 잘 자고 잘 노는 손자와의 일주일은 더할 나위없이 행복했다. 유난히 신명많은 손자는 병색 하나 내지 않고 온갖 재롱으로 할미의 작은 노고에 기쁨으로 답했다. 눈 마주치면 활짝활짝 웃고, 서툰 말로 할미를 불러댔다. 노래하면서 춤추며 사랑을 만들었다. 아침마다 일어나 밥 달라며 웃고, 해주는 밥마다 잘 먹었고 잘 쌌다. 이따금 투정도 예뻤다. 예쁜 짓 할 때마다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순간순간 모든 것을 잊지 않게 담아두고 싶었다.‘양아록(養兒錄)’이라는 책이 생각난다. 16세기 조선의 양반인 묵재 이문건이 손자를 키우며 직접 쓴 육아일기이다. 손자 수봉의 출생부터 16세가 되던 해까지 시간적 순서에 따라 일기 형식의 시로 기록한 책이다. 묵재는 58세 늦은 나이에 대를 이을 손자를 얻고 매우 기뻤다. 손자가 가통을 잇는 군자다운 인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교육하면서 그의 성장 과정을 기록하고 싶었다. 조선 유일의 할아버지 육아일기에는 육아 과정의 구체적 상황과 체험, 감정 등이 매우 구체적이며 진솔하고 자연스럽게 표현돼 있다. 갓난아기가 젖을 빨고, 일어나 앉고, 이가 나고, 기고 성장하는 생육 과정이 매우 세밀하고 다정하고 또 때로는 엄격하다. 손자가 생후 6개월에 혼자 앉을 수 있게 된 뒤 스스로 일어나고 말문이 트여 할아버지가 글 읽는 모습을 흉내내는 등의 성장 과정을 묘사하는 시구엔 흐뭇함이 배어난다. 천연두나 이질 등의 큰 병에서는 손자의 안위를 염려하는 할아버지의 안타까움이, 다친 손톱이 다시 잘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선 넘치는 사랑이 절절하다. 자라면서 사춘기를 겪는 손자를 훈육하는 할아버지의 한숨과, 학습을 통하여 기울어진 가문을 일으킬 훌륭한 사대부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할아버지의 간절함도 있다. 이문건이 경북 성주 유배지에서 쓴 이 양아록을 모티브로 경북의 ‘할매할배의 날’이 만들어졌다고 한다.포손(抱孫). 아버지는 자식을 안지 않고 조부모는 손자를 안는다는 말이다. 자식보다 손주가 더 사랑스럽다는 것이 고금이 다르지 않음을 새삼 알겠다. 일주일 후 손자는 다 나았다는 병원의 확인증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고, 다시 어린이집을 씩씩하게 다니고 있다. 며느리는 아이가 살이 포동포동 올랐다는 말로 시어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2018-07-18

뉴스가 보기 싫은 사람들

▲ 박창원 수필가요즘 내가 아는 대구·경북 지역 인사들 중에 뉴스가 보기 싫다는 사람들이 많다. 이유인즉 기분 나쁜 뉴스만 나와서 볼 때마다 속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떤 뉴스가 이들을 속상하게 할까? 촛불시위, 전직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 제19대 대통령선거, 6·13 지방선거 같은 것이다. 최근의 남북대화마저도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 최근 2년 동안 진행된 일련의 정치적 사건에서 느끼는 감정의 일단을 뉴스 안 보는 것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좀 더 구체적 이유를 들어 보면 박근혜 전 대통령이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영어의 몸이 됐는데, 재판 소식을 전하는 뉴스가 자주 나오고, 그때마다 초췌한 얼굴에 수의를 입고 등장하는 모습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고 한다.이번 지방선거에서 대구·경북은 다른 지역의 거센 민주당 바람과는 상관없이 자유한국당을 선택했고, 그 결과로 나타난 선거지도에 이쪽만 섬처럼 빨간색으로 남았다. 선거가 끝난 후 한 지인은 “보수는 완패했는데 나는 완승했다.”며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전국적으로 보면 한국당이 참패했지만, 자신이 찍은 후보들은 다 당선되었다는 건데, 이분의 선거 관전평은 참으로 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이 지역 사람들의 뉴스 기피 현상이나 지방선거에서 드러낸 표심을 보면서 대구·경북 지역민의 독특한 정치적 정서를 일컫는 말인 ‘TK 정서’를 떠올리게 된다.‘TK 정서’란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문민정부 때였다. 1960년대 이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진 30년 간 이 지역은 정권의 산실이었고, 권부의 핵심을 이뤘다. 하지만 1992년 대통령 선거 때 이 지역은 후보를 내지 못했다. 대신 부산·경남 출신인 김영삼 후보를 지지해 당선시키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초기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도입 같은 굵직한 개혁을 밀어붙인다. 이로 인해 이 지역 출신 실력자들이 대거 실각하게 됐고, 이 지역 유권자들이 배신감을 느끼면서 문민정부에 등을 돌리게 됐다. 이때 나온 용어가 ‘TK 정서’다.그러고 나서 1997년 15대, 2002년 16대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지만 김대중 후보, 노무현 후보가 당선됐고, 이로 인해 이 지역은 한동안 중앙권력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박정희의 분신과도 같은 박근혜가 정계에 화려하게 등장하면서 새로운 기대를 가지게 됐고, 결국 대통령으로 만드는 저력을 뽐냈다.그렇게 만든 대통령이 탄핵을 당했고, 결국 구속되어 재판을 받는 사태에 이른 것이다. 정권에 충성을 바친 인사들이 적폐청산이란 명분 아래 줄줄이 묶여 들어가고, 그 불똥이 전임 이명박 대통령에까지 튀었다. 두 전직 대통령의 구속은 이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야 말았다.그 동안 절대적 지지를 보낸 지역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전직 두 대통령의 잘못을 상당 부분 인정하면서도 그 충격과 상실감은 타지역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기에 촛불집회, 대통령 탄핵과 구속, 문재인 정부의 탄생, 민주당에 압승을 안겨 준 지방선거 등 주요 정치적 사건에서 이쪽과 대립되는 세력이 주도하는 정치 전반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면서, 대구·경북은 독특한 정치문화로서의‘TK 정서’를 다시금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하지만 고립은 TK를 위해서도, 대한민국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어느 정치세력을 지지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 정서라는 것이 단순히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맹목적 결집이어서는 안 된다. 한 지역의 정서가 공감을 얻으려면 대한민국, 나아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부합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정서’를 넘어 ‘정신’으로 승화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대를 읽고 변화를 주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보수라고 언제나 추억을 먹고 살 수는 없다.

2018-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