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군과 베트남 리 왕조의 연결고리를 찾아서 (1)
1960~1970년대에 걸쳐 진행된 베트남전쟁의 비극은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게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하지만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끝나고, 냉전체제가 해체된 1990년대 이후 베트남은 한국의 주요한 우방국 중 하나가 됐다.
양국 사이 교류 속도는 하루가 다르게 가속화 돼 이제 한국과 베트남은 사회 전 분야에 걸친 협력을 공고히 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봉화군은 베트남마을을 만들기 위해 힘을 쏟는 중이다.
봉화엔 베트남 리 왕조의 왕족 출신 화산 이씨(花山 李氏) 이장발(李長發·1574~1592)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충효당(忠孝堂)이 자리해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겨우 열여덟 어린 나이에 홀어머니를 두고 전장에 뛰어들어 전사한 이장발은 1226년 고려에 정착한 베트남 왕족 이용상(李龍祥)의 후손.
본지는 5회에 걸친 연재기사를 통해 리 왕조의 흥망성쇠와 현재 베트남인들이 평가하는 리 왕조, 베트남 박닌성 뜨선시와의 교류·협력 속에서 베트남마을 조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봉화군의 오늘을 면밀하게 점검하고자 한다.
글 싣는 순서
1. 한국과 베트남 교류 역사의 시작
2. 동반 성장의 파트너가 된 베트남
3. 봉화군이 조성할 베트남마을
4. 베트남인들이 생각하는 한국과 봉화군
5. 봉화군과 베트남이 함께 꿈꾸는 내일
리 왕조 시대 쇠락하면서 혈족들 학살
나라 떠난 이용상 황해도 옹진군 도착
고려 고종 따뜻이 맞으며 화산군 작위
현재 국내 1천700여 명 화산 이씨 시조
몽골군 침탈 때 앞장서며 고마움 갚아
봉화엔 이용상 후손 이장발 충효당 자리
베트남마을조성사업은 주요 숙원사업
뜨선시와 ‘우호협력 강화 협약서’ 체결
“한국·베트남 역사적 뿌리 공감하며
우의를 넘어 양국 동반성장 기여” 공감
할머니가 들려주던 전설처럼 흥미로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한국에선 고려가 태동해 국가의 기틀을 잡아가던 1009년. 지금의 베트남 북부에 독립된 왕국이 건설된다. 탕롱(현재 명칭 하노이)을 도읍으로 한 ‘리 왕조’다.
1대 왕 태조 이공온은 당시 강위력한 힘을 가졌던 중국의 군대를 격퇴한 문무겸비(文武兼備)의 인물. 베트남인들은 ‘리 태조’를 기리며 하노이 호안끼엠 호수 산책로 중앙에 그의 동상을 세워놓았다.
‘환검’(還劍·칼을 돌려받다)이란 뜻을 가진 호안끼엠은 국가적 재난이 닥칠 때면 거북이가 칼을 물고 나와 나라를 구하게 했다는 설화가 전하는 호수다. 베트남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공간.
그런 곳에 리 태조를 형상화한 거대한 조형물을 만들었다는 건 베트남인들이 리 왕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미루어 짐작케 해준다.
◆베트남 리 왕조 후손 이용상은 왜 고려에 왔을까
리 왕조는 216년 동안 베트남을 지배했다. 과거제도를 도입하고, 국립대학을 만들었다. 동아시아 전역에서 베트남이 안남(安南)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한 것도 리 왕조였다. 알다시피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베트남에서 수확되는 쌀을 ‘안남미(安南米)’라고 부른다.
그러나, 어떤 왕조도 흥할 때가 있으면 필연적으로 쇠락의 시기가 있는 법. 리 왕조의 고종 이용한 시대에 들어서며 이반된 민심이 백성들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진씨 성을 가진 사람이 리 왕조의 마지막 왕 혜종(惠宗)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딸을 왕으로 세우면서 2세기에 걸친 리 왕조의 시대가 저문다.
오늘날과 같은 선거의 형식이 아닌 무력을 통해 정권이 바뀌면 무자비한 학살과 숙청이 잇따르는 게 고대 왕국들의 특징. 리 왕조의 혈족들도 이를 피해갈 수 없었다.
이용상(李龍祥)은 리 왕조 태조의 7대손. 그는 주변에서 친인척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며 나라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1226년 일이다. 리 왕조를 주제로 다룬 여러 논문에 따르면 소수의 측근들만을 데리고 망망대해를 떠돌던 이용상이 도착한 곳이 황해도 옹진군 화산면이다.
당시 고려의 왕 고종(高宗)은 이용상 일행을 내치지 않고 따스하게 맞이했다. 화산군(花山君)이란 작위(爵位)까지 내렸다.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정치적 망명객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 고마움을 잊지 않은 이용상은 몽골군이 고려를 침탈했을 때 앞장서 싸움으로써 은혜를 깊이 새기고 살았음을 보여주었다.
◆800년 전에도 베트남과의 교류는 빈발했다
인하대학교 전임연구원 허인욱은 ‘高宗代 花山 李氏 李龍祥(고종대 화산 이씨 이용상)의 高麗(고려) 정착 관련 기록 검토’라는 논문을 통해 이미 800여 년 전부터 베트남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알려주며, 이와 동시에 이용상에 관한 보다 상세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 방법을 안내하고 있다. 이런 내용이다.
“베트남 왕족 출신으로 고려에 정착한 이용상에 관한 이야기는 화산 이씨 집안의 족보에 전한다. 현재 전하는 화산 이씨 집안의 가장 오래된 족보는 1921년에 해주에서 이승재가 간행한 ‘花山李氏世譜’(화산이씨세보)다. 화산 이씨의 시조인 이용상의 베트남 리 왕조 탈출과 고려 정착 등의 내용은 ‘花山君本傳’(화산군본전)에 기재돼 있다. 이용상과 관련한 사실은 1925년의 ‘개벽’과 1928년의 동아일보에 기사가 실릴 정도로 일찌감치 알려져 있는 내용이었다. 지금도 이 내용은 고려시대에 베트남과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이와 관련해 부산대학교 국제전문대학원 조흥국 교수는 한국인과 베트남 사람들의 유사성과 동질성을 언급하며, 다시 한 번 고려로 이주한 리 왕조의 망명객 이용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전략)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유교적 전통에 입각해 가정에 충실하고 부모를 공경하며 효심이 지극하다. 베트남 사람들의 한국 이주는 오래 전부터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인 13세기 초 베트남의 왕족이 한국에 와서 花山 李氏(화산 이씨)를 창건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화산 이씨의 始祖(시조)인 李龍祥(이용상)이 베트남인이란 것이 밝혀지면서 한국과 베트남의 언론과 학계는 이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후략)”
매우 적은 숫자가 생명을 위협하는 세력을 피해 타국으로의 이주를 결행했던 이용상을 포함한 리 왕조 사람들.
화산 이씨 종친회 이부영 부회장에 따르면 “지금도 한국에 거주하는 화산 이씨는 1천700여 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용상이 고려의 군사들과 함께 원나라 기병대의 말발굽 앞에서도 당당하게 저항했듯, 리 태조와 화산군 이용상의 후예인 이장발도 일본군의 조총과 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봉화 충효당’을 세워줄 정도의 기개였다.
◆이장발의 충효정신 서린 봉화에 베트남마을 조성을
충효당이 자리한 봉화는 베트남에 뿌리를 둔 화산 이씨, 좀 더 의미를 확장하면 베트남과 쉽게 떼놓을 수 없는 고장이다. 그렇기에 ‘베트남마을 조성’은 봉화군의 주요한 숙원사업 가운데 하나였다.
이 사업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박현국 봉화군수는 지난해 12월 리 왕조의 태동지인 베트남 박린성 뜨선시와 ‘우호협력 강화 협약서’를 체결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봉화군과 뜨선시는 베트남마을 건설의 필요성에 공감하며, 서로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을 함께 고민해왔다.
체결식이 열린 날 항 바 위 뜨선시 인민위원장(한국의 시장격)은 “봉화 베트남마을이 한국과 베트남 양국의 역사적 뿌리를 공감할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한다”는 희망을 전했다. 물론 앞으로 전폭적인 협력도 약속했다.
이에 박현국 군수는 “베트남마을의 성공적인 조성은 봉화군과 뜨선시의 우의를 다지는 것을 넘어 한국과 베트남의 동반 성장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화답했다고 한다.
‘코로나19 사태’가 전 세계를 휩쓸기 시작한 2020년 이전엔 한 해 200만 명을 넘나드는 한국인들이 베트남을 오갔다.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여행자라면 하노이를 여행할 때 리 왕조를 떠올렸을 듯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꼬리를 감추기 시작한 2023년 봄. 베트남으로 향하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다시 늘고 있다.
이를 감안해 지난 3일엔 베트남관광총국 응우엔 쭝 칸 총국장이 주한 베트남관광청을 찾았다. 베트남관광청 대표부 관광대사는 화산 이씨 31대손 이창근(베트남 이름 리 쓰엉 깐)씨. 두 사람은 베트남 관광 홍보 활성화 방안에 관한 의견을 나눴다.
한국과 베트남의 교류는 역사와 관광 외의 영역에서도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봉화군 역시 지난 3월 국내 각지에 거주하는 베트남 다문화인들을 충효당으로 초청했고, 거기서 베트남마을 조성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자리를 가졌다.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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