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는 ‘드래곤볼’과 함께 1990년대 일본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지만 그 인기는 한국에서도 대단히 뜨거웠다. 우리가 ‘사쿠라기’와 ‘루카’가 아니라 ‘강백호’와 ‘서태웅’을, ‘쇼호쿠’(원작에서 강백호의 소속 학교명)가 아니라 ‘북산’을 기억하고 또 추억한다는 것은 ‘슬램덩크’가 단지 수입된 일본 문화가 아니라 한국 대중문화의 일부분으로 녹아들었음을 의미한다. 강백호를 비롯한 북산고의 주전 5인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스토리는 ‘초심자가 노력을 통해 성장해 나간다’라는 소년만화의 왕도를 따르면서도, ‘모두가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는 없다’라는 스포츠 세계의 냉혹함을 잘 보여주었다. 그 냉혹함은 비단 스포츠 세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독자들이 살아가야만 하는 세상의 속성과도 닮아 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모든 힘을 다 쏟아부어 최강 산왕고를 제압한 북산이 토너먼트의 다음 경기에서 탈락하는 ‘슬램덩크’의 이야기를 가슴 시리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원작자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현명하게도 연재 종료(1996년) 후 27년이라는 시간이 흐를 동안 단 한 번도 산왕전 이후의 스토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수많은 후속작을 쏟아냈던 ‘드래곤볼’과 비교하면 대단히 인상적인 행보이다. 이러한 인내와 절제가 있었기에 ‘슬램덩크’의 이야기는 독자의 상상력이라는 영역에 머물렀고, 덕분에 원작의 메시지와 가치를 훼손하지 않은 채 새로운 생명력을 얻어 2023년에 재탄생할 수 있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산왕전 이후, 혹은 강백호의 재활 성공 이후의 이야기를 섣불리 건드리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오히려 독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산왕전의 스토리라인을 송태섭이라는, 주연 5인 중 하나이지만 원작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캐릭터를 중심으로 재구성하는 전략을 취했다. 송태섭이 현대 일본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지역색을 띠는 오키나와 출신이고, 불행한 가족사로 인해 고통받는 인물이라는 설정을 추가함으로써, ‘열정과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슬램덩크’의 메시지를 수도권 지역(원작의 배경인 가나가와 현은 도쿄 인근에 위치한 지역이다)과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에 한정시키지 않고 사회 보편적으로 확장 시킨 것이다.
이러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스토리텔링 전략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역 스토리텔링, 도시 스토리텔링, 마을 스토리텔링 등 다양한 스토리텔링 사업들이 한동안 유행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스토리텔링은 ‘기존에는 없던 것’,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을 열심히 찾아내어 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제철 도시’ 포항과 같이 강렬한 스토리를 이미 갖고있는 지역이라면 굳이 ‘더하기(+)’ 방식의 스토리텔링 전략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산왕전의 메인 스토리를 건드리지 않고 그 맥락과 배경(context)만을 풍부하게 만들었듯이, ‘제철 도시’라는 스토리를 국가나 기업이 아니라 노동, 여성, 생태, 문화와 같은 다양한 관점에서 보다 풍부하게 이야기해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