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이 유화물감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15세기 초반이다. 흔히 ‘아놀피니의 결혼식’(1434년경)으로 유명한 플랑드르 출신의 얀 판 에이크(1390∼1441)를 유화물감 사용의 보편화와 결부시켜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유화물감이 미술가들에게 가져다준 혁신은 무엇이었을까?
유화물감이 보편화되기 전 화가들은 주로 나무판에 템페라로 그림을 그렸다. 템페라는 아주 오래된 회화기법으로 광석이나 식물에서 채취해 분말로 만든 안료를 주로 계란 노른자에 개어 그린 그림이다. 템페라 기법은 건조가 빠르고, 건조된 후에는 변질되지 않아 보존성이 뛰어나며, 생생한 색채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하지만 템페라는 건조가 빠르다 보니 부드러운 붓의 움직임을 통한 세부묘사에 어려움이 있고, 명암처리나 미묘한 색채 표현에 단점을 보인다. 템페라의 가장 큰 단점은 수정이 어렵다는 점이다. 유화물감은 템페라의 이러한 단점을 보완해 주었고 유화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플랑드르 지역(지금의 벨기에와 네덜란드 지역)의 화가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훨씬 더 섬세하고 완성도 높게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서양미술사는 지리적으로 알프스 남쪽의 이탈리아와 알프스 이북지역으로 나누어진다. 알프스 이북 플랑드르에서 사용된 유화물감은 몇몇 미술가들을 통해 이탈리아로 전파되었다. 유럽의 15세기는 지역에 따라 중세와 르네상스가 혼재된 시기였다. 이 시기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르네상스가 꽃을 피웠지만 알프스 너머 북쪽 지역에서는 여전히 중세가 지속되고 있었다. 중세와 르네상스의 가장 큰 차이는 세계에 접근하는 방식과 세계를 이해하는 관점이다. 흔히 중세를 신과 교회 중심, 르네상스를 인간중심의 인본주의와 연결시킨다. 이러한 단순한 관계 맺기에는 많은 오류가 숨어 있다. 중세와 마찬가지로 르네상스 시대의 중심에는 신이 있었다. 결정적인 차이는 신과 신이 창조한 세계와 자연의 질서를 어떻게 접근하고 해석하는가 하는 것이다. 중세시대에 신과 세계를 사유하고 해석할 수 있는 권위는 오로지 교회에만 있었다. 르네상스가 도래하면서 그 채널이 다양해졌다. 논리적 인과관계에 근거한 이성적 판단, 실험과 관찰, 논리적 분석을 통해 지식이 습득되었다.
유화기법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알았던 플랑드르 미술가들은 마치 거울이 세상을 비추듯 눈에 보이는 대상을 엄청난 섬세함으로 그림에 옮겨 놓았다. 반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분석적이고 과학적이며 이성적인 탐구를 통해 세계를 파악했다. 시각적으로 경험하는 현상들 근저에 존재하는 보다 근원적인 규칙과 법칙을 발견하고자 부단히 애를 썼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수학적으로 계산된 원근법이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서양미술사’의 저자 E.H. 곰브리히는 르네상스의 가장 위대한 업적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 째로 2차원인 평면에 공간표현을 가능하게 한 원근법, 두 번째로 완벽한 인체 묘사를 가능하게 한 해부학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고대건축언어의 부활을 꼽고 있다.
눈으로 본 세상을 그대로 모방하고 그림 속에 재현하려던 르네상스 미술가들이 마주한 난관은 어색함과 딱딱함이었다. 아무리 섬세하게 인체의 움직임을 표현하더라도, 아무리 정확하게 원근법적 공간을 구현하더라도 충분한 생동감과 생생함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유화물감이다. 경계를 흐리게 표현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푸마토 기법이나 라파엘로가 그린 성모 마리아의 우아함이 가능했던 것은 유화물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탁월한 발상이 있더라도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기술이 마련되지 않았다면 무용한 것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 있더라도 상상력과 문제의식이 없다면 그 기술 역시나 무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기술 없는 미술은 존재할 수 없고 예술적 상상력 없는 기술은 쓰임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미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