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

이산하 지음·창비 펴냄
시집·9천원

이산하 시인
‘나를 찍어라./ 그럼 난/ 네 도끼날에/ 향기를 묻혀주마.’(시 ‘나무’ 전문)

제주 4·3항쟁의 진실을 알게 된 이후 27세에 쓴 장편 서사시 ‘한라산’으로 옥고를 치렀던 이산하(61) 시인이 최근 펴낸 시집 ‘악의 평범성’(창비)에 수록된 시다.

‘악의 평범성’은 99년 펴낸 자신의 두 번째 시집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 이후 22년 만에 펴낸 신작 시집이다.

시를 쓰고 발표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으로 옥고를 치러야 했던 엄혹한 시절을 통과한 시인은 어느새 노년을 맞이했다. 자신이 맞닥뜨렸던 불의와 불합리와 부정했던 세상은 이제 한결 보드랍고 온화하고 민주적인 표피를 갖췄지만, 양상과 방식이 달라졌을 뿐 여전한 불의와 불합리와 부정투성이다.

‘적’의 정체가 분명했던 시절에 격렬히 저항했고, 그러면서 안팎으로 상처를 입으며 벼렸던 시인의 날 선 시선과 감성은 겉으로는 안온한 일상으로 포장됐다. 신작 시집에는 그런 그가 오늘날의 ‘적’을 만나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켜 어떻게 다시 빛을 발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시편들이 빼곡하다. 자신을 찍을 도끼날에 오히려 향기를 묻혀주겠다는 ‘나무’의 자세로 시를 쓰는 시인 이산하. “‘희망’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는 그의 이번 시집은 아직도 열렬하게 살아 있는, 저항하는 시 정신의 향연으로 읽힌다.

광주항쟁의 피해자를 비아냥하고, 세월호 사건 피해 학생을 조롱하는 듯한 SNS의 글에 환호하는 이들이 “모두 한 번쯤 내 옷깃을 스쳤을 우리 이웃”임을 알기에 “가장 보이지 않는 범인은 내 안의 또 다른 나”(‘악의 평범성1’)라는 사실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악’은 결코 비범하지 않고 지극히 평범하기에 어쩌면 더 악랄해지고 지독해졌으리라. 이런 ‘악’을 양산하는 사회구조는 비정규직을 차별하고 노동을 천시하는 변질된 자본주의의 모순을 기반으로 한다. “자본주의는 위기 때마다 새로운 가면을 쓰며 폭주하고 있다./맑스의 자본론이 오히려 예방주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엥겔스의 여우사냥’)는 시인의 통찰이 눈을 번쩍 뜨게 만든다.

해설을 쓴 김수이 평론가의 말대로 이산하의 이번 시집은 “최근 시단에서 찾기 힘든, 거시 역사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시집이다. 김 평론가는 이 시집이 세 가지 유형의 바퀴를 그린다고 해석한다.

첫째,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으로서의 수레바퀴로 ‘자본론과 진화론’(‘엥겔스의 여우사냥’)으로 대표되는 바퀴이다. 둘째는 역사를 피로 물들여온 악의 평범성, 즉 인간을 살상하는 끊임없는 폭력의 바퀴로 “한국전쟁 때 미군 지프에 깔려 죽은/북한 인민군들 머리와 몸의 바퀴 자국이 마치 지퍼 무늬 같다고 해서”(‘지퍼헤드2’) 생긴 ‘지퍼헤드’라는 표현으로 상징된다. 셋째, 꿈과 신념이 잿더미가 된 세상에서도 인간이 두 손으로 굴리는 삶의 바퀴이다. “두 바퀴를 두 손으로 직접 굴리는 이 휠체어는/천천히 손에 힘을 주는 만큼만 바퀴 자국을 남긴다”(‘산수유 씨앗’)에서 휠체어 바퀴 자국은 앞세대와 뒷세대,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이어져야 하며, 인간이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알려준다고 해석한다. 타인과 함께하는 발걸음이다.

포항 출신인 이산하 시인은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1982년 필명 ‘이륭’으로 ‘시운동’에 연작시 ‘존재의 놀이’를 발표해 등단한 뒤 시집 ‘한라산’,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 번역시집 ‘살아남은 자의 아픔’, ‘체 게바라 시집’ 등을 펴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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