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2021년 2월 15일 새벽 백기완 선생이 세상과 작별했다. ‘회자정리’라는 말도 있지만, 있을 것 같지 않은 일로 여겨짐은 비단 나만의 소회는 아닐 성싶다. 그렇다 해서 내가 선생과 각별한 인연을 맺은 것은 아니다. 그저 먼 발치에서 선생을 보고 들으면서 마음에 들어온 두 가지만 회상하고자 한다. 인간사는 작은 기억과 그것의 누적이 희로애락의 원천으로 작용하는 바 크기 때문일 것이다.

1987년 1월 초 ‘민중문화운동연합회(민문협)’ 새해맞이 행사인 단배식이 열렸다. 당시 한국의 민중운동은 ‘민주통일민주운동연합(민통련)’이 주도하고 있었다. 민문협은 민통련을 구성하는 단체였고, 백기완 선생이 의장이었다. 민통련 의장은 1994년에 고인이 되신 문익환 목사였다. 모임 장소에는 20대부터 40대에 이르는 청춘들이 왁자지껄하는 소리로 활기가 돌았다. 백 선생은 그런 우리와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문 목사님 오셨습니다!” 소리가 들린다. 그러자 백 선생은 우리에게 담배 하나 달라고 하면서 자리를 문 목사께 넘기고 슬며시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기실 민중민주 운동판에서 보면 백 선생이 연배는 어리지만, 연륜은 문 목사보다 윗길이었다. 여하튼 그날 문 목사는 한복 두루마기 곱게 입고, 돼지 대가리가 차려진 고사상에 절을 하고, 돼지주둥이에 만원 짜리 몇 장을 꽂아 넣었다. 경이로운 장면이었다, 내게는.

1980년대 한국 민중운동의 두 기둥을 모신 민문협 새해 단배식 자리는 민주와 평화와 통일을 향한 뜨거운 기운이 분출했다. 어쩌면 그런 열기가 하나로 모여 1987년 평화대행진과 대통령 직선제 쟁취가 가능했는지도 모르겠다.

2014년 8월 13일부터 15일까지는 나는 광화문 광장에 있었다. 세월호 대참사 희생자 가운데 한 사람인 유진 학생 부친 김영오씨가 단식하던 곳이다. 그이의 단식에 동조하는 단식을 하려고 2박 3일 여정으로 광화문에 갔더랬다. 마지막 날인 8월 15일 우리는 세월호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대형 현수막을 앞세우고 시가행진을 했다. 그 자리에서 다시 백 선생을 뵙게 됐다.

여든 살의 노구(老軀)를 이끌고 거리에 나선 백 선생의 거동이 몹시 불편해 보였다. 동행한 친구 말로는 당뇨와 신장이 불편하여 일상생활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국가 환란을 맞이하여 일신을 돌아보지 않고 다시 거리로 광장으로 나와 시민들과 구호를 외치는 백두산 호랑이 같은 모습을 보여준 이가 백기완 선생이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백 선생을 뵙지 못했고, 그저 들리는 말로 선생의 안부를 듣곤 했다.

백 선생 부음을 접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그것은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문장으로 요약 가능할 것이다. 나와 함께했던 1980년대부터 2021년까지 어디가 됐든 고통받고 억압받고 학대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백기완 선생이 계셨다는 자명한 사실이 새삼스레 다가온다. 그토록 열망한 통일을 보지 못하고 눈 감으신 백 선생의 영면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