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 한밤마을 돌담길.

거리두기 하는 시기라 보드게임도 비대면으로 모였다. 줌이라는 앱을 누르니 반가운 얼굴들이 하나둘씩 등장했다. 오늘 함께 할 게임은 라온 확장 편, 내게 주어진 자음과 모음을 이용해 낱말을 만들어서 가지고 있던 것을 먼저 다 클리어 하면 승리한다.

1분 안에 만드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한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 60초. 두 번째로 내가 할 차례가 돌아올 때는 다른 사람이 만든 낱말과 내가 가진 자음 모음을 합쳐서 만들어야 하니 1분이 1초 같은 긴박감이 차올랐다. ㅂ이 두 개 보여서 얼른 ‘비바리’를 외치니, 그런 단어도 있냐고 세 명 모두 물어 본다. 한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고서야 넘어갔다. 고교, 교기, 코로나 같은 예전부터 사용하던 낱말들을 30대 그녀들은 처음 듣는다고 했다.

‘고교얄개’라는 영화가 히트를 쳤고, ‘고교생 일기’라는 드라마가 하는 날에는 야간자율학습을 빼먹기도 했었는데 이들은 처음 듣나보다. 코로나는 코로나19 이전에도 사용하던 낱말인데도 평소에 잘 쓰지 않아서인지 뜨악해했다. 새로운 낱말이라며 따로 적어두기까지 했다. 사람이 나이 들어가는 것처럼 쓰는 말들도 함께 나이를 먹는구나 싶었다.

동아리 회원이 비바리를 발견해서 신나하는 모습에 내 어린 시절의 낱말이 겹쳐졌다. 중1 어느 날, 책에서 ‘흐드러지다’란 표현을 처음 읽었다. 도라지꽃이 흐드러진 풍경을 묘사한 장면을 보고 그 새로운 낱말에 반했다. 그날 이후 흐드러지다를 써먹고 싶어서 친구와 수다 떨다가도, 일기장에도 마구 끼워 넣었다. 흐드러지다에 어울리는 문장을 만들어 연습장에 적어두었다가 아무 때나 꺼내 썼다.

며칠 전 군위로 가족여행을 갔다. 연구실에만 박혀있던 큰아이가 달리는 차안에서 간만에 수다를 떨었다. 방을 옮기는 선배의 원룸을 함께 보러 갔다가 그전에 머물던 이가 두고 간 침대와 옷걸이 같은 가구가 있는 것을 보고 얼른 계약하라고 부추겼다고 했다. 듣고 있던 남편이 “침대 허른 거 아이가?” 큰아이는 킥킥대며 침대가 혓바닥도 아니고 헐었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허른’이라는 말을 나는 값싼 침대로 들었는데 한 세대를 넘어가니 첨 듣는 낱말이 되어버렸다.

김순희수필가
김순희
수필가

도착해 겨울 산수유가 흐드러진 돌담길을 걸었다. 한밤마을이라고 찾아갔는데 밤나무는 눈에 띄지 않고 집집마다 빨간 산수유가 쪼글해진 채로 매달려있었다. 돌담을 따라 자연스럽게 돌아들어가니 현재 주민들이 살고 있는 동네라 아무집이나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되었다. 그 중 남천고택이 열려 있었다. 너른 마당에 들어가 인증샷을 찍었다. 가까이 있는 문화재 대율리 대청도 담장이 없으니 누구나 구경해도 되는 곳이었다.

아들이 갑자기 군위가 무슨 뜻일까요 한다. 다니러가면서도 그 뜻까지 헤아리지 않았던 터라 검색찬스를 썼다. 군위(軍威), 군의 위력, 위신이라고 나온다. 방을 같이 쓰던 선배가 포항이 무슨 뜻이냐고 묻더라고 한다. 자신은 이과생이라 그런지 지명에 대해 풀어서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그 선배는 문과생이면서 교차 지원해 공대에 온 특이한 경우였다. 포구 포(浦)에 항구 항(港)이니 포구항구에서 왔구나 하며 풀이해주더란다. 사실 우리가 사는 포항(浦項)은 그 항구 항(港)이 아니라 항목 항(項)을 쓰는 줄 큰아이의 선배는 몰랐나 보다. 그래도 무슨 뜻일까 생각해 보는 젊은이가 있다니 기특했다.

‘미식예찬’이란 책에서 작가는 당신이 어떤 음식을 먹는지 말해 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다고 했다. 당신이 어떤 낱말을 사용하는지 적어보라. 그러면 당신이 얇은 낱말책의 신세대인지 백과사전만큼 두꺼운 책을 간직한 쉰세대인지 알게 될 것이다.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낱말 책이 저절로 두꺼워지진 않는다. 수집해서 입으로 되뇌고 또박또박 마음에 적어 넣어야 두툼해진다.

아들이 사용하는 말과 동아리회원들이 알려주는 새 낱말도 잊어버리기 전에 얼른 주워 담는다. 순발력도 재치도 앞서는 신세대들과의 다음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한 쉰세대의 안간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