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규열 한동대 교수
장규열 한동대 교수

사람에게 종교는 무엇일까. 살아가는 나날이 버겁고 힘들어 숨구멍이라도 찾는 마음이 아닌가. 힘들게 하는 세상에 눌리고 지쳐 피난하듯 찾는 게 아니었을까. 일상에 쫓기며 살다가 그래도 그 한순간 하늘이 내게 찾아오는 기쁨을 맛보는 경험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종교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 세상이 쫓는 욕심을 벗어야 하고 세상이 재촉하는 경쟁도 그만 두어야 한다. 사찰과 교회는 모두의 피난처여야 하고 평화와 기쁨이 솟아오르는 샘터여야 한다. 종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하늘을 향해야 하고 이 땅의 버거움을 이기고도 남아야 한다. 무소유를 다짐하고 날마다 내려놓아도 이웃을 생각하며 넉넉한 심정이어야 한다.

한동안 서점가를 풍미하였던 베스트셀러 ‘긍정의 힘’을 쓴 미국 목사가 있었다. 열심히 믿으면 당신도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그의 ‘번영신학’은 교계의 대표저술이 되어 성전 마당을 가득 채웠다. 어느 스님이 세상의 평균을 넘는 안락한 처소를 자랑하며 미디어에 등장하였다. 푸른 눈의 다른 스님이 그 모습을 정면으로 공격하다가 이내 생각을 돌이켰다고 한다. 우리는 무엇을 본 것일까. 사찰과 교회를 향하여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 어느 자락에서 세상과 다른 선한 이야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이웃과 세상을 위하여 덕이 되고 복을 끼칠 다짐은 어디서 해야 하는 것인지. 세상을 딛고 일어서 성공에 이를 욕심을 종교에서 배운다면, 어려운 이웃과 세상은 어디에 기대를 걸고 희망을 찾을 것인지.

종교는 달라야 한다. 세상과는 반대편에 있어야 한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위로가 있어야 하고 세상에서 맛보지 못한 용기를 얻어야 한다. 지고도 이길 힘이 생겨야 하며 이웃을 바라보는 배려와 공감을 배워야 한다. 눈을 부릅뜨고 거두는 성공을 겨누기보다 어려워도 함께 누리는 평화에 길들여져야 한다. 세상을 향하여, 꼭 그리 살지 않아도 풍성한 천국과 극락을 경험하는 기쁨이 있음을 가르쳐야 한다. 내려놓고 나누며 살아도 집착하고 경쟁하며 사는 일보다 풍성한 날들이 가능함을 배워야 한다. 불가는 ‘오욕락(五欲樂)’, 즉 인간의 욕심을 충족하여 누리는 즐거움을 경계하였다. 어차피 시시각각 변하여 정신을 병들게 하고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한다는 게 아닌가. 기독교가 돈을 ‘일만악(一萬惡)의 뿌리’라고 규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니었을까.

번영신학과 기복불교는 종교의 본질에서 한참 어긋나 있다.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며 이웃과 함께 애쓰고 노력하는 가운데 선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즐거움을 깨우치고 싶다. 그리하여 개인의 삶에도 미움과 시기는 사라지고 사랑과 평화가 피어오르는 여정이 찾아왔으면 한다. 개인의 성공만 바라는 게 아니라 공동체의 상생을 흡족해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한 사람 영웅의 성공 서사를 기다리기보다 여러 사람이 함께 호흡하는 마을이 돌아와야 한다. 본질을 회복한 종교가 험한 세상에 다리를 놓아주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