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관스러움에 대하여
청관스러움에 대하여
  • 등록일 2020.11.04 19:46
  • 게재일 202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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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하면 거리감이 생기고 오지랖이 너무 넓으면 성가십니다. 인간사 적당한 게 좋습니다. 하지만 적당하기가 어디 말처럼 쉬운가요. 넘치는 상황끼리 상충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패키지여행 팀에 지인 없이 합류했습니다. 그 누구의 간섭도 없이, 그 어떤 것의 영향도 받지 않고 될 수 있으면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습니다. 팀원 중 선희 씨도 혼자였습니다. 수수한 차림만큼이나 털털해 보이는 그녀와 자연스레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고향도 같고 나이도 같았습니다. 통성명이 끝나자마자 선희 씨가 제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말 놓고 편하게 지내자. 우린 친구니까! 움찔 놀란 저는 슬며시 손을 뺐습니다. 만난 지 삼십 분도 되지 않았는데 동향에 동년배라는 이유만으로 친구가 될 이유는 없었습니다. 여행 콘셉트인 무심함의 미덕이 방해 받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습니다.

다정다감한 선희 씨는 가는 곳마다 제 손을 잡았습니다. 뭉툭하고 못 생긴 손을 누군가에게 내맡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핑계였을 거예요. 혼자가 편했던 저는 에돌려 선희 씨에게 말했습니다. 손잡는 것 대신 팔짱 끼면 안 될까요? 선희 씨는 친구끼리 땀 좀 섞이면 어떻노? 하면서 손 깎지를 풀어 순순히 제 팔짱을 꼈습니다. 어색한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타인과의 이상적인 거리는 육십 센티라는 말을 믿고 싶을 정도로, 대책 없이 밀착해오는 그녀가 불편했습니다.

선희 씨는 배려와 관심이 넘쳤습니다. 사진 같이 찍자, 저건 저렇고 이건 이렇지, 화장실 가지 않을래, 등등의 말로 친화력을 자랑했습니다. 악의 같은 건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그럴 수 있었습니다. 받아들이는 제가 불편하다는 게 문제였지요. 언덕마다 오밀조밀하게 내려앉은 집, 이국의 골목에서 풍겨 나오는 야릇한 냄새와 좁은 베란다 밖으로 너울거리는 빨래,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애련한 가락들, 이런 호사의 순간을 선희 씨가 방해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참을만한 친절함이었지만 저는 어느 순간부터 차단막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나 홀로 힐링’을 구하려는 자와 ‘더불어 힐링’을 외치는 자 사이에 작은 균열이 일었습니다. 물론 그런 예민한 저항감은 저만의 것이었습니다. 사람 좋은 선희 씨는 그럴 기미조차 없어보였습니다. 선희 씨 입장에서 보면 운이 없는 거였지요.

여행 막바지쯤 선희 씨가 말했습니다. “자기는 너무 청관스러운 것 같아. 같은 고향이니 청관스럽다는 말은 들어봤겠지?”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그 말뜻을 유추하느라 남은 일정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마음으로 선희 씨를 거부한 짓이 있으니, 제 풀에 ‘까다롭다’는 의미로 쓰였을 거라 짐작만 했습니다. 인정머리 없는 속내가 들킨 것 같아 당황스러웠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언니에게 문자를 넣었습니다. 저보다는 고향에 오래 살았기에 언니는 ‘청관스럽다’는 말을 알고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예상대로였습니다. 언니는 옛날을 더듬어 그 말의 쓰임새까지 친절하게 예로 들어줬습니다. 어릴 때, 밥술을 겨우 뜨는 형편의 서촌댁이 마실을 나오고, 밥 같이 먹자고 엄마가 숟가락을 건네면 방금 먹고 와서 배부르다며 도리질을 한 채 배를 쓰다듬곤 했습니다. 그럴 때 엄마는 “에구, 청관스럽기는!”하고 말했답니다. 또한 오일장 나들이에 나선 방산 할배가 빳빳하게 풀 먹인 모시적삼 차림으로 미루나무 신작로를 꼿꼿이 지나갈 때 “그 어른, 참 청관스럽다.”라고 했다나요.

짐작하건대 청관스럽다는 말은 타인이 주는 물질적·정신적 호의를 사양하거나, 정갈한 품새로 흐트러짐이 없을 때를 표현하는 말 같았습니다. 경북 북부지방에 널리 퍼진 행동 양식인 ‘염치’ 개념과 무관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김살로메소설가
김살로메
소설가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염치인데, 그곳 사람들에게 염치는 곧 자존감을 의미했습니다. 선희 씨의 오지랖이 넓을수록 저는 그녀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다지 순수한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피해를 주지 않겠으니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하는, 일종의 개인주의적 자기방어였지요.

남에게 구하려 하지 않는 자는 남을 들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염치와 분수를 차린다는 명분 뒤에 숨은 제 거북한 마음을 그녀는 읽었던 것이지요. 그걸 청관스럽다는 말로 좋게 포장해준 것 같았습니다.

청관스러움도 지나치면 청맹과니가 됩니다. 털털하고 담백할 때 세상도 그렇게 보입니다. 마음이란 건 덥석 주고받아도 오줄없지만 넌지시 거절하는 건 더 상그럽습니다. 남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제 편하자고 남의 호의를 들이지 않는 건 소견이 좁은 짓이지요. 움찔 밀어내고 슬쩍 털어내는 건 청관스러움과는 거리가 멉니다. 훼방꾼은 타인이 아니라 언제나 제 안에 있습니다. 인정에 호소하지 않는 염치가 무슨 소용이며,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청관스러움이 어디에 쓰일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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