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규열 한동대 교수
장규열 한동대 교수

당신은 잘살고 있는가. 어떻게 해야 잘사는 것일까. 부귀영화를 누리며 만수무강하는 삶, 모두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을까. 1975년에 62세였던 기대수명이 오늘은 83세가 되었다. 일인당 국민소득은 1975년에 600불을 겨우 넘겼었는데 오늘은 3만불에 육박하고 있다. 스무 해도 더 오래 살게 되었으며 오십 배나 더 많이 버는 셈이 아닌가. 그 어떤 잣대로 견주어 보아도 손색이 없는 국격을 지니게 된 오늘, 우리는 행복한가 다시 물어야 한다. 겉으로 보아 모자람이 없는 조건 속에서 어째서 우리는 아직껏 만족하지 못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

어느 산사(山寺)에 큰불이 났다. 까닭을 찾고 보니 어느 여인의 방화였다고 한다. 다른 종교를 믿는 그는 우상을 섬기는 절간을 용서할 수 없었다는게 아닌가. 미움으로 가득한 그 마음으로 남의 종교를 말살할 작정이었는가 보다. 사회 규범과 법적 통제가 있어 제어할 수는 있겠으나, 우리 종교계는 이런 혐오범죄에 어떤 의견을 가지는지 궁금하다. 종교는 미움을 가르치는가 아니면 사랑을 가르치는가. 종교가 혐오를 바로잡지 않는다. 미워하고 배척하는 태도를 종교만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진영을 갈라 싸우는 일에 능한 정치는 백성들을 자기편에 세우기에만 최선을 던진다. 날마다 지지율을 확인하며 세를 불리기에 집중하느라 나라의 마음이 혼란스러워지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정치도 혐오를 바로잡을 생각이 없다.

미움은 자란다. 시간이 지나며 혐오의 수렁은 깊어가고 표현의 강도는 짙어진다. 미워할 까닭을 배우고 익히며 다지고 훈련하여 행동에까지 이른다. 진행 중인 미국의 대선판에도 혐오와 테러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급기야 해외 공관들에게 선거 전후에 있을지도 모를 폭력사태에 대비하라는 훈령이 있었다고 한다. 대통령이 누가 되든 미국 사회가 어떻게 치유와 회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혐오의 늪에 빠진 개인은 위태롭고 미움에 물든 사회는 위험하다.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르기 전에 사회적 각성이 있어야 한다.

국민은 피곤하다. 정치와 종교가 만들고 퍼붓는 사회적 혐오에 지친다. 정치가 편안한 사회를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가 부끄럽다. 종교가 평온한 개인을 회복해 주리라는 희망도 허망하다. 남 탓에만 익숙한 ‘내로남불’이 식상하고 자신은 돌아보지 않는 ‘후안무치’에도 기가 질린다. 부귀영화와 만수무강을 누리면서 선진국에 살아도 행복하지 않은 까닭이 혹 ‘미움’ 탓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좀 부드러운 시선과 따듯한 마음이 필요한 게 아닐까. 각자의 부족함과 허술함에 겸허하며 남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일에 나서야 하지 않을까.

그동안 부수고 깨뜨려 정복하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면, 이제는 보듬고 다독이며 함께 쌓아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완전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며 완벽한 사회는 지구상에 없다. 주어진 환경에 오늘의 최선을 함께 던져야 한다. 미워하여 행복할 방법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