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시장에 활기와 평온을 선물하다
오래된 시장에 활기와 평온을 선물하다
  • 등록일 2020.10.19 19:50
  • 게재일 2020.10.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포항 문화의 상징과 공간 (10) 청림시장
청림시장
청림시장

청림(靑林)은 도구, 구룡포로 가는 바닷길의 초입이자 포항공항으로 가는 하늘 길의 관문이다. 해병대 북문을 지나 조금만 속도를 내면 도구와 임곡을 가르는 갈림길에 이르고, 용무가 없다면 굳이 멈춰야 할 이유 없이 통과하게 되는 마을이다. 이곳에 소박한 변화를 통해 사람들이 마음을 내어 찾아오는 공간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푸른 숲(靑林) 사이로 해와 달(日月)이 뜨는 아름다운 고장. 지명 유래를 통해 청림동을 정의하자면 이런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다. 포은 정몽주의 시 ‘북유몰월(北有沒月) 형산(形山) 동망개월(東望開月) 형산(形山)’이라는 구절을 인용해 생겨났다는 청림의 옛 지명은 몰개월(沒開月)이다. 연오랑세오녀 설화와 관련된 일월지(日月池)가 있으며, 노송이 우거진 숲이 있어 낮에도 도적이 출몰했다는 일월동을 품고 있다.

그런 지형적인 특성 때문일까. 높고 넓은 구릉지대와 해변을 낀 골짝은 시대의 필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를 지나며 일부는 중화학공장이 들어서면서 공장지대가 되었고, 군부대와 비행장 건설로 일월동 부락은 철거되어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그 일부가 도구와 경계를 이루는 도로변에 취락을 이루며 살게 되었다. 청림으로 우거졌던 숲은 사라지고, 비닐하우스 단지와 해수욕장, 비행장, 공장, 군부대와 사택단지 그리고 일반 주거지가 뒤섞인, 뭐라 정의하기 어려운 지역이 되고 말았다.
 

연오랑세오녀 설화 관련 일월지 품은 청정지역

1970년대 공장·군부대 등 건설로 숲 사라지고

주거·군사·공장지대 뒤섞인 혼돈의 지역으로

주민 감소로 쇠락의 길 걷던 청림시장 변신 시도

도시재생 목적으로 내딛은 사회적협동조합사업

포스코1%나눔재단·포스코케미칼 등 기업 지원

토박이주민·건축가부부·자활근로자 등 힘보태

마을공유 공간 ‘세탁소커피·청림’으로 탄생

먹거리 제공 ‘아시안푸드·청림’까지 성공 개업

인근 상가들도 새단장 동참 온기 퍼져 나가

아시안푸드·청림
아시안푸드·청림

□ 청림의 옛 지명은 포은의 시에서 유래한 ‘몰개월’

해병대 북문을 통해 군속들이 드나들고, 면회객과 노동자로 활기차고 북적이던 마을은, 영화의 세트장처럼 그 어느 시절에 박제된 골목들, 간판들, 표정들만 남았다. 대체로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기에는 위험한 공장과 인가가 너무 가깝다. 많은 이들이 떠나갔고 마을 인구는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다. 삶의 터전이란 신비한 것이어서 남은 사람들은 무슨 까닭이든 남아서 마을을 지탱한다. 아름다웠던 자연, 호황을 누렸던 기억, 산업화의 질곡을 온몸으로 겪었던 상처까지를 안고 주민들은 살아간다.

필자는 저소득층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자립하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으며, OCI 포항 공장의 담벼락을 마주보는 곳에 사옥이 생기면서 10여 년째 이곳과 인연을 맺고 있다. 사무실을 나와 골목길을 따라 자박자박 걸어가면 청림시장이 시작되고, 상가들이 오밀조밀 모인 거리가 펼쳐진다. 시장 안에 들어있지는 않으나 분명 시장을 이루는 이 길은 10분여 만에 끝나버린다.

청림시장은 1980년대 개장된 여러 상설시장과 비슷한 운명을 겪는다. 이 인근에서는 맛집으로 유명한 해룡반점과 청림반점이 여전히 분주하고, 영덕상회와 시장식육점의 불이 켜져 있으나 디귿자 형태의 안쪽은 대부분 창고처럼 닫혀 있다. 마을에서도 다방면으로 시장의 변화를 고민하지만, 딱 맞는 해법을 아직 못 찾은 듯하다. 오래된 간판 아래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은 상점의 문을 지나는 이 10분의 거리가 내가 10년 가까이 청림동이라 생각하며 살아온 모든 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주민처럼 살아가지만 아무도 우리를 주민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애써 관계를 쌓아가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던 시간을 지나, 무언가 마을을 위해 우리가 쓰였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생겨났다. 자주 걷다보면 나쁜 공기도 정겹고, 뭐라도 해보기에 만만하고 맞춤한 이 시장과 골목이 활기를 잃고 스산히 저물어가는 것이 못내 아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 변화를 모색하지만 해법 못 찾은 청림시장

마을주민이 원하는 것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막연하게 일자리와 마을의 활력이 조우하기를 기대했고, 우리의 진심이 통하기를 원했다. 반쯤은 숙제를 못한 심정으로 지내던 중, 일터의 위상이 사회적협동조합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시기에 마침 포항시는 도시재생에 몰두하였고, 중앙동에서는 꿈틀로가 자리를 잡아가는 등 외부적인 조건이 우리 활동에 자극이 되었다. 도시재생 지역으로 선정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 스스로 청림시장 재생에 도움이 될 수는 없을지 고민했다.

때마침 선물 같은 기회, 기적 같은 인연이 만나 ‘세탁소커피·청림’이 탄생했다. 포스코 1%나눔재단과 포스코케미칼(당시는 켐텍)의 지원으로 카페 사업이 선정되었는데, 그 조건은 3년 후 사회적기업 설립이라는 단 하나였다. ‘청림 살림’의 단초가 마련되는 감사한 사건이었다. 마을이 환해지고 생기가 돌게 하는 역할을 하는 공간이라면 청림시장 안에 자리 잡는 것이 좋았겠으나, 모든 것이 여의치 않았다. 우리가 찾은 곳은 당시 멀쩡히 잘 운영되던 계명세탁소 자리였다. 정면에 잉꼬프라자가 사라지고 임시 주차장이 훤하게 열려있는 것도, 좁고 낡았으나 운치 있는 붉은 2층 벽돌집인 것도 매력적이었다. 마침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한동대에 강의를 나가기 시작한 젊은 부부가 있었다. 세탁소 건물이 매력적인 공간이라 자신이 꼭 살려보고 싶다고 우리보다 더 들떴다. 평소 우리 이야기에 귀기울여주던 동장님을 괴롭혀 세탁소 사장님을 설득했다. 월세도 조정하고 기한도 넉넉히 하는 등 ‘마을 일’이라는 마음으로 서로 합의가 잘되었다. 선대로부터 30년간 운영하던 계명세탁소는 그렇게 ‘세탁소커피·청림’에 자리를 양보하고 마을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장소를 정하고도 30년간 쌓아두었던 ‘묵은 것’을 어떻게 할지 난감했으나, 그것은 기우였다. 젊은 건축가 내외는 그 좁은 공간을 5개월 이상 공들여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우리가 눈살을 찌푸렸던 굴뚝을 사랑스러운 존재로 되살려 사진에 담아가기 딱 좋은 그림 같은 창을 내었다. ‘원래의 것’을 최대한 살려보려 했으나 바닥 타일밖에 건질 것이 없어 애석해 하였다. 결국 ‘세탁소커피’라는 작명으로 30년의 흔적을 남기며, 큰 공사에서부터 컵받침 하나에 이르기까지 진심과 성심으로 고르고 배치한 정성이 2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스란하다.

 

세탁소 커피·청림
세탁소 커피·청림

□ 세탁소 자리에 커피숍 마련하며 마을에 활기 불어넣어

새롭게 탄생한 공간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했다. 5명 정도의 일자리로 구상하고 참여할 주민을 선발했다. 여기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저소득층으로서 포항시 자활근로 사업비를 통해 임금을 받고, 커피숍을 운영해 생긴 수입은 참여자들의 자산 형성을 위한 펀드, 창업을 위한 자금 등으로 적립해 3년 후 사회적기업으로 독립할 준비를 하게 된다. 기초생활수급자 네 분이 모였다. 한부모 가장, 결혼이민여성, 약간의 장애가 있는 동네 총각이 일부러 맞춘 것처럼 이 사업에 참여하기로 했다. 건물을 리모델링하고, 영업 허가를 내기까지 우여곡절이 없지 않았으나, 결국 1층 커피숍 2층 ‘청림 살림’이라는 마을 공유 공간이 완성되었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주민의 공간이 되도록 열어두었고, 평온을 선물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회의도 하고, 영화도 보고,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기도 하는. 이제 젊은 군인들과 노동자들이 삼삼오오 식사와 차를 즐기러 나오는 점심시간은 골목이 시끌벅적하다.

세탁소와 비스듬히 마주보는 위치에 오락실 간판과 현란한 출입문이 시선을 어지럽히는 빈 점포가 있었다. 너무나 눈에 거슬리는 공간이었다. 세탁소커피가 순항하며 자리를 잡아갈 때를 맞춰 이번에는 이 공간을 탈바꿈하기로 작정했다. 수소문 끝에 건물주와 만나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건물 리모델링 비용 일부를 건물주가 부담하기로 하였다. 생각지도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세탁소커피가 옛것을 되살리며 무채색으로 변신하였고, 사람들에게 ‘마실 것’을 제공하였다면, 이 거슬리는 건물은 자연스레 ‘먹을 것’을 제공하는 공간이어야 했다. 마을 상가와 중복되지 않는 메뉴, 돌아온 군인들과 노동자들의 즐거운 먹거리를 위한 메뉴 공부가 진행되었고, 5명의 자활사업 참여 주민들이 전문가의 조력을 얻어 베트남 쌀국수, 나시고렝 등 조금은 친근한 아시아 지역의 메뉴를 다루기로 하였다. 이름하여 ‘아시안푸드·청림’의 탄생 배경이다.

당초부터 그 ‘거슬림’에 주목한 건물은, 왜 그렇게 거슬렸을까 돌아봤을 때, 마을 한가운데 너무 오래 방치되어 있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다. 주차장과 건물 경계를 이루는 다 허물어진 담벼락, 주인 없이 오래 쌓여온 온갖 종류의 쓰레기, 어느 것과도 어울리지 않는 출입문 선팅, 그 문 앞에 흉하게 삭아가는 통신용 전주……. 커피숍에 그렇게 정성을 들인 것은 이 마을이 환하게 생동하기를 바람기 때문인데, 그 정면의 풍경이 이 지경이어서는 곤란했다.

 

□ ‘세탁소커피’ 맞은편에 ‘아시안푸드·청림’ 개업

버려진 보트의 주인을 찾아다니고, 마당에 풀을 뽑고 쌓인 쓰레기를 치우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갔다. 허물어진 담장을 수선하고, 우거진 잡풀과 쓰레기를 들어내자 크고 잘생긴 대추나무가 제 모습을 찾았고 매력적인 정원이 탄생하였다. 우리는 그 공간을 ‘기다리는 동안’이라고 작명했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정원을 감상하고 여유롭게 보내시라는 뜻과 함께, 이 마을에 사람들이 북적이고, 생기가 돌고, 주민들의 마음이 따뜻하게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소망이 담겨있다.

한번 깨끗해진 공간은 쉽게 더렵혀지지 않았다. 인근 상가들이 표 나지 않게 새 단장을 했다. ‘세탁소커피·청림’과 ‘아시안푸드’가 자리를 잡는 동안, 청림시장 인근에는 커피숍 두 개가 더 생겼다. 칼국수집도 문을 열었고 맞은편 삼계탕집도 다시 문을 열었다. 한숨 자고 난 뒤의 움직임 같은, 어떤 활기가 느껴지기도 하는 걸 보면, 저 시장 안 불 꺼진 점포에서 아직 우리가 모르는 조용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대 변화에 따라 이 정도 규모의 마을과 시장이 쇠락해 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기품 있고 건강하게 잘 늙는 어른처럼, 나름의 매력을 가꾸고 유지하는 수밖에 없고, 이제 ‘청림’은 그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기 시작한 듯하다.

 

송애경
송애경

글/송애경

시인, 사회적협동조합 포항나눔지역자활센터 이사장, 1986년 시 전문지 ‘시인’으로 등단, 포항여성회 회장 및 포항시사회복지협의회 부회장 역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