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생겨 먹어서 사람들과 충돌만 일삼는 거지? 왜 선생님과 사이는 좋지 못하지? 왜 급우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서먹서먹하기만 하지? 왜 선생님들 하는 짓이 다 우스꽝스럽게만 보이지? 왜 얌전한 모범생이 되지 못하고 시 나부랭이나 끼적이다가 놀림감만 되지?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청소년기는 저런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의 중편 ‘토니오 크뢰거’는 자전 소설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당황스럽고 내밀한 고백으로 가득합니다. 그 은밀한 고백 밑바탕에는 평범한 시민성과 예술가적 기질 사이의 작가적 고뇌가 숨어 있습니다.

토니오는 기본적으로 아웃사이더인데다 깊이 보고 자세히 봅니다. 토니오는 동급생 한스를 사랑합니다. 안타깝게도 한스는 토니오를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토니오는 한스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습니다.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는 패배자이며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 소박하고도 가혹한 교훈을 토니오는 열네 살이란 이른 나이에 깨칩니다. 토니오는 그 경험을 실용적으로 활용할 강단조차 없었지요. 다만, 학교에서 주입하는 지식보다 이런 체험적 교훈이 훨씬 더 중요하고 흥미 있는 것으로 생각할 뿐입니다.

토니오는 금발의 잉에를 사랑했지요. 웃고 있는 길쭉한 푸른 두 눈에 빠졌고, 수많은 웃음소리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구별하려고 안간힘을 썼지요. 애석하게도 잉에 역시 토니오를 고려해본 적은 없습니다. 악의 없는 무심함의 우정만을 보여줄 뿐이지요. 그녀는 같은 부류인 한스와 사랑에 빠집니다. 잉에와 한스 같은 안정되고, 평화롭고, 정돈된 치들은 애잔한 단편소설 따위는 읽지 않고, 그런 작품을 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아름답고 무심하고 명랑할 수 있는 것이지요. 역시 더 많이 사랑하는 자가 패배자이며 괴로움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토니오는 평온하고 건전한 시민을 대표하는 한스나 잉에가, 예술가적 기질로 길 잃은 시민이 되어버린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음을 자각합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토니오는 자신의 길이 평범한 시민성을 지닌 이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토니오의 슬픔입니다.

유행가 가사처럼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던가요. 누가 사랑이 충만으로 가득한 공정한 게임이라고 했던가요. 토마스 만의 일관된 방향처럼 사랑엔 공평한 저울추가 없습니다. 더 사랑해서 패배하거나, 덜 사랑해서 상처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경우만 있을 뿐이지요. 덜 사랑한 자는 무관심해서 상기할 추억조차 남아 있지 않게 되지요. 그래도, 그래도 말이에요.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건 그 순간만은 승리자가 되기 때문이지요. 곧장 어리석은 실패자로 돌아오더라도 그렇게 사랑의 감정에 충실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랑받는 사람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엔도르핀이 백만 배는 솟구친다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이 마련한 고약한 매뉴얼대로 인간은 백전백패하면서도 사랑이란 문밖을 서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토마스 만은 사랑의 저울추에 대해 누구보다 독자들을 잘 설득하고 있는 셈이지요.

김살로메소설가
김살로메
소설가

사랑에도 구별이 있습니다. 덜 사랑하는 자와 더 사랑하는 자. 사랑만큼 저울추가 확실히 기울어지는 것도 없습니다.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당사자들에게 똑 같이 할당되는 것이라면 애초에 사람들은 사랑 때문에 입술이 부풀고, 이별 때문에 치통에 시달릴 이유가 없습니다. 대상을 객관적·보편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면 덜 사랑하는 쪽이고, 대상에 주관적·감정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면 사랑에 빠진 쪽이지요. 덜 사랑하는 쪽은 그 순도가 탁하기 때문에 덜 다치고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쪽은 순도 백퍼센트이기 때문에 많이 다치고 감정의 파고에 시달립니다.

토마스 만의 이러한 설파에 롤랑 바르트의 전언을 보태봅니다. ‘사랑의 단상’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 한다.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 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배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덜 사랑하는 사람은 철새이고 사라지는 자입니다. 반면 사랑하는 자는 붙박이이자 처분을 기다리는 자입니다. 싱크대 한쪽에 밀려난 더러워진 프라이팬처럼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신세이지요. 부재중이거나 안개처럼 존재하는 그 덜 사랑하는 존재가 사랑인줄 알고 반 쯤 얼빠진 채 열린 창 곁을 서성이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갈망하고 기대하는 것, 이것이 사랑의 속성인 것을. 스스로를 찔러대고 나약했던 그 순간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환상으로 남을 몹쓸 패배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