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경주 안압지(동궁과 월지)의 임해전과 호림정

안압지서 옮겨온 임해전(지금은 호림정).

지금은 너무나 많이 알려져 주말이면 사람으로 미어터지는 동궁과 월지(옛 안압지)는 신라 때 이름인 임해전 건물 한 채만 연못가에 쓸쓸히 서있었다. 그 임해전을 배경으로 갓 쓰고 낚시하는 인상적인 사진 한 장을 보고 이 건물이 어디 갔는지 궁금했는데 활터 호림정으로 옮겨간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 옛 안압지 여러 사진을 보았다. 밀짚모자 쓰고 낚시하는 사람, 지팡이 집고 담소하는 두 사람 뒤에 임해전 누마루에 앉은 사람, 그 앞 댓돌에 앉은 사람과 걸어오는 사람이 한 장의 사진 속에 녹아나 있었다.
 

옛 안압지와 임해전.
옛 안압지와 임해전.

#. 안압지 보름달밤 기행을 회상하며

필자가 경주에 오기 전부터 경주의 문화유적 핵심은 이미 보아왔지만, 25년 전에 경주에 정착하여 경주 곳곳의 문화유적을 스캔하듯이 다양한 시각에서 살펴보았다. 90년대 초부터 보름달밤 기행도 안내해 왔었는데 답사 객들은 왕릉이나 절터에서 잊을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고 하였다. 특히 인공의 불빛 하나 없던 안압지의 보름달밤 기행은 먼 먼 태고의 신비가 감돌아 신라 궁녀들의 하얀 웃음이 달빛에 젖는 듯했다. 지금의 안압지 야경이 좋다고 하지만 잠시의 시각적 유혹은 있겠지만 깊은 울림은 없다. 야간관광을 위해 지금같이 온 유적지에 불 밝혀 놓으면 깊은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아스라한 감흥은 없다. 즉 하향평준화 시킨 것이다.

660년 신라가 당나라와 힘을 합쳐 백제를 평정했던 태종무열왕의 바통을 이어받은 아들 문무왕은 668년 고구려마저 평정한다, 그러나 새로운 복병 당나라가 신라마저 삼켜 버리려는 야욕에 또다시 당나라와 전쟁 중인 674년에 이 동궁과 월지(안압지)를 만든다. 당나라에도 대명월지라는 연못이 있었고 백제도 궁남지가 만들어져 있었다. 전쟁 중에 이런 연못들을 보고 힌트를 얻었을 것이다.

지금 정비가 잘된 동궁과 월지의 이름은 신라 토기 파편으로 알게 되었고 조선 초기에는 기러기(雁)가 하늘을 날고 오리(鴨)가 물위를 헤엄치는 연못이라고 시인 묵객들의 시심을 자극하는 안압지(雁鴨池)라 불러왔다. 지금은 처음 불리었던 신라 때의 동궁(東宮) 또는 월지(月池)로 명칭을 바꾸었다. 1975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 하면서 여기 동궁과 월지는 연못을 정비하다가 배, 주령구, 불상, 출톼근 카드역할의 목간, 등등 3만여 점이 쏟아져 나와 2년9개월 동안 6만 5천여 명의 인원으로 발굴하였다. 27동의 건물터 중에 지금은 3채만 복원해 놓았다. 그때 남아있던 임해전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지었다고 헐게 되어 1977년 황성공원 호림정 활터로 옮겼던 것이다.
 

지금의 안압지(동궁과 월지).
지금의 안압지(동궁과 월지).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유적지를 찾을 때는 휴일은 피하고 평일 날을 택한다. 그래야 유적과 온전히 침묵의 대화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같이 금요일 한글날과 겹친 황금연휴가 지난 월요일 아침은 사람 없어 더욱 좋다. 더구나 동궁과 월지는 우리 집 수오재서 차로 5분 정도의 거리라 마음이 홀가분하다. 예상대로 몇 가족 조금 보이고 서쪽 3동 건물을 지나 한 바퀴 돌 때는 사람 하나 없는 자유를 만끽했다. 서편 건물 지 주위에 좁은 돌 수로는 직각으로 꺾이면서 중간에 물을 모으는 구덩이도 있었다. 최근에 위덕대 박홍국 박물관장은 방화용 수로라고 논문에서 밝혔다. 그렇다면 건물에 불이 났을 때 방화용 수로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건물 있는 서쪽에는 완벽한 직선으로 동쪽 무산 12봉은 곡선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 중간 연못에는 섬 3개가 도교의 삼신산(봉래, 영주, 방장)이 떠있다. 옛 이름 안압지대로 하늘에 기러기는 없었지만 물에는 오리들이 한가롭게 노닐고 바람은 나뭇잎과 소리 없는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선녀들이 산다는 무산 12봉 제일 꼭대기에 오르니 세찬 가을바람에 선녀가 옷자락 휘날리듯 나뭇잎이 허공을 맴돌며 떨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이른 낙엽이 떨어지면 월명스님의 ‘제망매가’ 한 구절이 떠오른다. ‘삶과 죽음의 길 여기 있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한 가지에 나고서도 가는 줄을 모르겠구나! 아아!….
 

황성공뭔 정상에 자리한 김유신 동상.
황성공뭔 정상에 자리한 김유신 동상.

#. 황성공원과 호원사지, 호림정과 선정비

호림(虎林), 글자 그대로 호랑이 숲이다. 지금은 황성공원으로 불리지만 예전에는 호림 숲이었다. 호랑이가 나올만한 숲인가. 지금같이 아파트나 건물들이 없었던 신라시대는 소금강산 줄기로 봉긋 솟은 숲을 이루었을 것이다. 먼저 봉긋 솟은 황성공원 산길을 올랐다. 참나무와 산죽 사이로 바위들이 제각각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야트막한 산이지만 사방에 경주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빌딩들이 시야를 가리고 서쪽은 나무가 솟아 하늘만 보인다. 말 탄 김유신 장군상이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건립 문에는 “박정희 대통령각하께서 명각 휘호를 내리시어…. 1977년에 경상북도에서 세웠다”고 새겨놓았다. 그런데 말의 자세를 보니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달리다 멈추는 자세여서 칼 빼어든 김유신이 멋쩍어 보인다.

다시 내려와 남쪽으로 숭고한 호랑이 처녀의 넋을 기리는 호원사를 찾았다. 예전에는 가정집 장독이 석탑 위에 있었던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지금은 집은 철거했지만 아직 정비 안 되어 철망만 둘러져있고 잡풀들이 마음껏 자라나 있었다. 여기가 어떤 곳인가. 신라에는 음력 2월8일부터 보름까지 탑돌이 하는 풍습이 있었다. 38대 원성왕 때 화랑 김현이 탑돌이하다 마지막 남은 처녀와 눈이 맞아 이슥한데 가서 달빛 같은 정을 통하고, 처녀는 호랑이임을 고백하고 악행을 저지르는 오빠 호랑이를 대신하여 죽는다. 한번 정을 통한 사랑의 연으로 호랑이 처녀의 죽음 덕분에 출세한 김현이 호랑이 처녀를 위하여 호원사를 세워주고 명복을 빌었던 곳이다.

1977년 안압지에 있던 임해전을 옮겨온 호림정으로 갔다. 5칸 겹집의 건물 한 칸은 한단 내려 2층 누각으로 하고 좌우 한 칸에 방을 넣었다. 옆에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 존재감이 반감되었다. 건물 난간 옆에는 경주부윤과 벼슬했던 사람들의 비석들이 줄지어 두 줄로 모아놓았다. 비석 앞줄은 14개였고 뒤에는 15개였다. 내 키 177cm보다 큰 비석이 네 개나 되었다. 철비 한 개가 눈길을 끌고 머리 잘린 조그마한 비석에 눈이 간다. 관리로 재임 중에 선정을 베풀었다고 고마움을 영원히 잊지 말자는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인데 진짜 선정을 베푼 관리는 이런 비석 세우지 않는다. 이 단단한 돌을 깨트릴 정도면 얼마나 악행을 저질렀을까. 비석을 살펴보니 잊을 망(忘)자도 푹 파버렸다. 함부로 공덕비 세우는 것 아니다. 하늘은 몰라도 산천초목만 알아주어도 족하지 않은가.

 

경북 최초의 여자5단 김현지 사범과 궁사들.
경북 최초의 여자5단 김현지 사범과 궁사들.

#. 활의 역사와 경주 호림정

일본이 칼을 휘두르는 무사의 민족이라면 우리나라는 옛부터 활을 잘 쏘는 민족이라 동이(東夷)라 불렀다. 특히 단단한 물소 뿔과 참나무, 단단하면서 유연한 대나무와 산뽕나무, 자작나무로 만든 각궁은 사정거리가 145m로 35m인 일본, 120m인 유럽에 비해서 세계최고 수준이다.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활을 쏘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구려 고분 무용총의 수렵도는 힘차게 달리는 말위에서 뒤돌아보면서 쏘는 파르티안 궁법을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단원 김홍도의 활 쏘는 코치의 그림도 등장하듯이 우리 민족은 활쏘기가 일상화되었다.

조선의 활쏘기는 문과 무과 모두 과거시험의 필수과목이었고 선비들은 활쏘기가 육예의 하나로 교양으로 삼았다.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시험 자체가 없어져 국궁도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활쏘기 금지령을 내렸다.

활 잘 쏘는 사람을 신궁 명궁 강궁이라 하는데 고구려의 주몽은 한 여인이 물동이 이고 가는데 어떤 사람이 활을 쏘아 구멍이나 물이 쏟아지자 주몽이 활을 쏘아 구멍을 막아버리는 일화가 있다. 고려 말(1380년 9월) 이성계는 남원 운봉 황산에서 20살 전설의 왜장 아지발도(阿只拔)의 투구꼭지를 쏘아 투구를 떨어트리고 이지란이 얼굴을 쏘아 죽인다.

활로 인생 역전하는 경남 함안의 설화도 있다. 기골은 장대한 천하장사였지만 천애 고아로 아무리 일해도 별 희망이 없어 한양으로 떠나 세상물정을 알아본다. 가식으로 척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활 통을 매고 활량으로 가장하여 전국을 돌다 경주에 이르니 활 잘 쏘는 사람을 찾는 방이 붙어 있었다. 경주 큰 부잣집에서 밤마다 귀신 새가 나타나 귀신 새를 잡을 사람을 찾은 것이다. 총각은 죽을 각오를 하고 호언장담 한다. 나무 위에 숨었다가 새를 걸터타고 뛰어내려 죽였다. 그리고는 새의 목에 화살을 꽂았다. 그리하여 부잣집 딸과 결혼하여 꿈같은 세월을 보내는데 장인은 사위의 활솜씨를 자랑하고파 상품을 내걸고 활쏘기 대회를 한다. 안절부절 하던 사위의 차례가 되었다. 활시위를 당긴 채 허공만 바라보는데 보다 못한 아내가 재촉하며 시위 잡은 손을 비틀었다. 때마침 하늘을 나르던 기러기 한 쌍 중 한 마리가 화살에 맞아 떨어졌다.

경주에는 해방 전부터 신라정이라는 활터가 있었다. 서천, 북천가 에서 활을 쏘았다. 1957년에 지금의 서편에 정자도 없이 호림정 현판을 걸고 활을 쏘았다. 1971년부터 1976년까지는 반월성에서 과녁만 두고 쏘았다. 1977년 지금의 자리에 안압지의 임해전 건물을 옮기고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필자도 이곳에서 잠시 활을 배운 인연이 있다. 호림정 출신으로 최고인 9단은 없고 8단은 다정 김헌우 한 분 있고, 전국에 여 궁사는 5단이 18명인데 경북 최초의 5단은 배운지 7년 되는 김현지 사범이다.

/글·사진=기행작가 이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