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시대 한반도 문화의 지형을 바꾼 칠포 암각화
청동기시대 한반도 문화의 지형을 바꾼 칠포 암각화
  • 등록일 2020.09.17 20:09
  • 게재일 2020.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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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문화의 상징과 공간 (2) 고인돌과 암각화
칠포리 암각화의 실측도.
칠포리 암각화의 실측도.

영일만을 특징짓는 문화의 시원은 청동기시대의 고인돌과 암각화에서 찾을 수 있다. 장기면 산서 새터마을 같은 구석기 유적이나 신석기시대 유물이 나온 곳도 있지만, 그것을 지역의 특성으로 볼 만한 수준은 아니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墓制)의 하나이다. 유럽에서부터 인도, 인도차이나반도와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 6만 기 정도가 있고, 그중 약 4만 기가 한반도에 분포한다. 그런 까닭에 고인돌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문화유산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우리나라 고인돌 대부분은 서해안을 따라 분포하고 있으며, 영남지방에서는 영일만 일대에서 내륙으로 확산되는 양상이다. 형산강 수계를 따라가며 높은 밀도로 분포된 고인돌을 보고 사람들은 진작부터 영일만을 일러 ‘고인돌의 고장’이라 하여 왔다.

 

선사시대 사람들, 바위의 상징성 자각하면서

조상이 머무는 공간에 소망 담은 ‘어떤 것’ 새겨

‘고인돌 고장’이라 불리는 영일만의 특별함도

암각화의 규모와 상징성 때문이라 할 수 있어

기계면 인비리 고인돌 석검·화살촉 그림 발견

신성구인 비파형 동검 본따 비 내리기를 기원

칠포리선 국내 최대 크기 검파형암각화 나와

‘부분이 전체를 대신’ 청동기시대 유행 드러내

인비리 암각화
인비리 암각화

□ 암각화, 다양한 소재로 이뤄진 상징성 깊은 유물

영일만 일대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 무덤은 기계천 주변을 따라가며 있다. 기계면 성계리가 대표적인 곳이며, 인비리에서 구지리의 들판과 언덕에서도 고인돌은 옛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중에서 빼어난 것을 고르라면 문성리 고인돌을 꼽고 싶다. 가로·세로·높이 480×270×390㎝ 크기의 듬직하고 당당한 모습은 주변을 압도한다. 크기로 치자면 성계리 노당재, 속칭 칠성고개의 270톤이나 되는 고인돌도 볼만하다.

영일만 문화의 시원을 고인돌만으로 다 말할 수는 없다. 고인돌은 영일만 바깥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암각화를 그 자리에 놓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암각화란 자연 속에 있는 바위 표면에 그림이나 조형 이미지를 새긴 것을 말한다. 문헌 기록이 없던 시대, 사람들의 삶의 내용이나 정신적 활동을 보여주는 자료로 암각화만한 것이 없다. 그 내용을 분석할 수 있다면, 선사시대 인류의 잃어버린 많은 것을 되살릴 수 있게 된다.

영일만에서 암각화는 1985년 기계면 인비리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기계면에서 기북면으로 들어가는 길목 초입에 여러 점의 고인돌이 늘어서 있다. 이를 ‘인비리 지석묘군’이라 하는데, 암각화는 그중 한 고인돌에서 확인되었다. 그렇게 크지 않은 고인돌 덮개돌의 남쪽 암면(岩面)에서 석검과 화살촉 모양을 새긴 것이 세 점 나온 것이다. 단단한 석영과 같은 돌을 두드려 만든 석검 모양은 검날보다 훨씬 더 큰 손잡이 모양을 하고 있다. 이 암각화가 발견되면서 인비리 고인돌은 이내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고인돌이 되었다.

칠포리 암각화
칠포리 암각화

□ 칠포리 암각화, 규모와 상징성에서 각별한 의미 지녀

1989년 11월부터 필자가 발견·조사한 칠포리 암각화는 한반도에서 가장 넓게 분포하는 암각화 유적으로, 해발 177m 곤륜산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있다. 칠포리 암각화는 곤륜산의 두 곳을 비롯해 칠포리 마을 뒤 상두들의 고인돌, 제단 유적과 함께, 그리고 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소동천 옆의 농발재 및 신흥리 마을뒷산 오줌바위를 포함하면 이 일대 7개소에서 조사되었다.

이곳에서 나온 암각화는 석검 손잡이 모양의 검파형암각화(劍把形岩刻畵)를 중심으로 석검형, 윷판형, 여성성기형 등이 있는데 이중 검파형암각화가 가장 많다.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검파형암각화 중에는 길이가 100㎝나 되는 것도 있으며, 그것은 우리나라 암각화에서 최대 크기로 기록된다.

칠포리 암각화는 규모와 조형성, 상징성 등에서 다른 암각화 유적과는 차이가 크다. 또한 다른 암각화를 찾아내는 데 자극이 되었고, 우리나라 선사시대 문화에 대한 새로운 연구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

영일만에서는 칠포리 외에 동해면 신정리에서도 같은 형태의 암각화가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암각화는 왜 만들었던 것일까? 한 마디로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간절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하자면 선사시대 사람들의 평온한 삶을 희구하는 지순한 노력이 암각화로 표출되었다고 할 것이다.

인비리 고인돌
인비리 고인돌

□ 석검 손잡이에 풍요의 의미 담은 작은 홈 새겨

암각화가 처음 만들어진 배경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바위의 상징성에 대한 자각이 있었다. 그동안 무심하게 바라보았던 저 바위가 어느 날부턴가 “사자(死者)의 시신을 가두고 영혼이 머무는 집이 되었다. 그리고 그 영혼의 정화를 돕고, 마침내 재생으로 이끄는 힘이 있는 그 무엇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데블리트 М.А)는 것이다. 그러한 자각은 신석기시대부터 기인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영일만에서는 기원전 7∼6세기 고인돌이 이 지역으로 유입되는 것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후 영일만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바위를 바라보게 되었고 암각화를 새기게 된 것이다.

농경이 크게 발전하는 단계에 와서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신성(神聖)을 갈망하게 되었다. 자연 정령이라는 모호한 대상보다는 실재하는 ‘나’라는 존재의 근본으로서 조상신을 찾게 된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살아생전 영웅적 업적을 남긴 조상이 머무는 신성한 공간에 그들의 소망을 담은 ‘어떤 것’을 새긴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것이 기계면 인비리의 한 고인돌에 석검 모양의 암각화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 석검을 왜 새긴 것일까? 돌을 다듬어서 만든 석검은 처음부터 도구로 쓰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청동기문화의 표본적 유물인 비파형 동검을 모방해 일종의 모조품으로 만든 것이다. 그런 모조품은 광주 신창동 유적과 같은 곳에서 비파형 동검을 본뜬 나무검(木劍)이 저습지에 꽂힌 채 나오기도 했다. 또 한 번의 질문을 할 수 있겠다. 왜 그렇게 애를 써서 석검과 나무검을 만들어야 했던 것일까?

비파형 동검은 도구 이외의 또 다른 기능이 있다. 그것은 비파형 동검을 이용해 하늘의 천둥 번개를 부르기 위한, 궁극적으로는 비를 부르기 위한 제사의 신성구(神聖具)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이다. 그 기능성에 주목해 한반도 남쪽지방에서는 결코 구하기 쉽지 않은 청동검을 모방해 돌을 깎아 석검을 만들고 나무검도 만들었다. 결국 그 모두는 기우제를 위한 것이었다.

특이한 것은 형산강 주변의 사람들은 그것을 복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석검의 손잡이에 풍요 의미를 더하여 작은 홈을 새기는 독특한 스타일을 유행시켰다. 그런 석검이 흥해 초곡리에서도 나온 적이 있다. 바위의 상징성에 눈 뜬 사람들은 의례에 사용되는 석검을 고인돌에 새기게 된 것이다. 실물로서 석검이 바위그림으로 재현된 것이다. 검이 물의 안정적 공급을 빌기 위한 신성구였다면, 그 목적을 더 절실하게 달성하기 위해 조상의 무덤인 고인돌에 새기는 행위로 나타나게 되었다. 영일만에서 암각화의 탄생이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 영일만 암각화, 선사시대 한반도 문화의 표상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인비리에서 발견된 두 점의 석검 암각화에는 손잡이에 작은 홈이 있다. 형산강 주변에서 유행한 모양 그대로이다. 이 석검 암각화는 내재적 발전을 거듭해 칠포리에서 손잡이만을 중점 묘사하는 검파형암각화로 나타났다. 도구적 기능을 완전 제거하고 온전히 상징성만을 강조한 것이다. 칠포리 사람들이 이러한 형태를 만들어내면서 영일만 암각화는 독자적 형태를 갖게 되었다. 우리 지역의 문화사적 가치를 이 새로운 조형물의 탄생에서 찾고자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청동기시대 후기의 조형사조는 ‘부분이 전체를 대신한다’는 양식을 발전시켰다. 그 결과로 등장하게 된 검파형암각화는 영일만 암각화의 전반을 아우르는 용어가 되었다. 경주의 석장동 암각화도 포함하는 이러한 유형이 영일만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검파형암각화는 우리나라 12개 지역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계통적 유형의 첫머리에 칠포리 암각화를 두고 있다. 칠포리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넓은 지역으로 파급되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칠포리에서 동해면 신정리, 경주 석장동을 지나 영천 보성리로 전파되었다. 점진적으로 서쪽으로 이동해간 검파형암각화는 고령 장기리, 안화리, 지산리 암각화에서도 나타났다. 그리고 지리산을 넘어 남원 대곡리 암각화로 발전하기에 이르며, 최근에는 군위 수서리에서도 새롭게 암각화가 조사되었다. 그동안 조사된 10개의 검파형암각화 외에 이 유형의 소멸기 단계 유적으로 판단되는 영주 가흥동 암각화와 경주 안심리 암각화를 포함하면, 한반도 남부지방 동쪽에서 서쪽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 칠포리에서 나온 검파형암각화이다.

이러한 검파형암각화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조사되면서 분명해진 것은 그 원형으로서 선사시대 영일만 문화의 중요성이다. 그런 까닭에 칠포리 암각화는 발견과 동시에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던 것이다. 칠포리에서 처음 만들어진 검파형암각화는 그렇게 그 시대 사람의 정신사적 표상이 되면서 청동기시대 후반기 한반도 남부지역의 문화사적 지형을 바꾸었으며, 지금도 우리 문화사의 중요한 표본으로 남아 있다. 그때의 빛나는 가치를 다시금 증명하여 후대에 잘 전달하는 것은 오롯이 우리들의 책무로 남아 있다. <사진/안성용>

 

글/이하우

울산대 반구대연구소 교수. 화가. 현재 한국암각화학회 이사. 한국·호주에서 개인전 3회, 그룹 기획전 260회 참가. ‘한국 암각화의 제의표현에 관하여’로 문학박사 취득. ‘한국 암각화의 제의성’ 등 다수의 저서와 연구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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