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과 멋, 그리고 단정한 아름다움이 흐르는 송소고택 사랑채
힘과 멋, 그리고 단정한 아름다움이 흐르는 송소고택 사랑채
  • 등록일 2020.09.15 19:02
  • 게재일 2020.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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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청송의 덕천 민속마을과 만석꾼 송소 고택

산 위에서 바라본 덕천 민속마을.

지금의 부자들은 주식, 건물, 예금 등등이지만, 예전의 부자들은 쌀 몇 석을 하느냐에 따라 등급이 매겨졌다. 꼭 만석이 아니라도 쌀이 현금보다 더 위력적일 때 큰 부자를 칭할 때 만석꾼이라 했다. 그 아래는 팔 천석, 오천 석은 없고 천석꾼으로 칭한다.

쌀은 넓은 바다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나기에 어마어마한 넓은 땅이 있어야 가능하다. 전라도 김제평야 같은 넓은 땅이 없는 경상도 그것도 산이 많은 북부 청송지방에서 만석꾼이 가능할까? 경주 안강 평야의 토지를 소유했기에 가능했다. 청송에 덕천 민속마을과 지경리(호박골)에서 옮겨온 만석꾼 송소 고택을 나그네 심정으로 둘러보자.

 

송소 고택 대문의 송소고장  글씨가 정갈하다.
송소 고택 대문의 송소고장 글씨가 정갈하다.


#. 만석꾼은 어떻게 만석꾼이 되었는가

부자는 누구나 꿈을 꾸지만 이루기는 더 어렵다. 또 이루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키기는 더 어렵다. 봉건사회에서는 왕이 거의 절대적인 권한을 가질 때 개국을 도왔거나 반정 같은 쿠데타가 성공하면 도운 사람에게 공신전을 준다. 그리고 조선 중기까지 남자들이 장가들면 주로 처가살이 하는데 아들 없는 집의 사위가 되면 그대로 물려받는다. 재산을 나누어주는 오늘날 상속의 개념인 분재기를 보면 그때까지는 아들딸 구별 없이 나누어 주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란 초유의 국난을 당한다. 유교가 국시인 조선시대는 충과 효는 절대적 가치기준이었다. 그래서 조상을 모시는 제사는 어떤 명분보다 중요하여 국난을 당하자 절손되면 제사가 끊어질 위기상황에서 장자 한 사람에게 몰아주어 집안에 대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우리나라 만석꾼이나 부자들 대부분이 조선 중기 이후부터 이어진다.

또 댐이나 호수, 못 등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 농사란 것은 운 칠(7) 노력 삼(3)이 아니라 하늘이 거의 좌우한다. 가뭄 들고 요즘같이 수해 당하면 땅 외에 담보가 없는 소농들은 부잣집이 금융기관이었다. 먹을 것 없는 춘궁기에 지금의 은행 가듯이 땅문서 들고 부잣집에 빌고 빌어 가을 추수하여 갚겠다고 약속하여 위기를 넘긴다. 다행히 풍년이 되면 갚을 수 있지만 흉년이 들면 갚지 못하고 고스란히 담보물 농토는 부자의 소유가 된다. 다른 대안이 없는 소농들은 소작인이 되거나 그것도 못하면 유랑 걸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원망으로 부자 된 사람들이 많고 아름다운 부자 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서 토지조사 할 때 남북한 통틀어 만석 할 수 있는 토지소유자는 대략 40명 정도였다. 오늘날로 치면 만석꾼은 10대 대기업이고 천석꾼은 100대 기업 정도와 비슷할 것이다.

경북에 대표적인 만석꾼은 경주의 최 부자와 청송의 심 부자(송소 고택)댁이다. 최 부자가 12대로 이어왔다면 심 부자는 9대를 이어왔다. 둘 다 대단한 부의 대물림이다. 최 부자 1대 최진립은 무인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공으로 공신전을 받는다. 벼 직파재배와 하천개간으로 수확량이 많은 것도 있지만, 흉년에 땅문서 저당 잡아 소유했고 흉년에 땅도 샀다. 땅이 없는 사람들은 더이상 살아갈 방법이 없자 밤중에 3대 최국선의 방에 복면하고 문서 찾아 찢고 불태운다. 그래도 사람은 심하게 해치지 않았다. 엄청난 수모였지만 최국선은 법률상 합법이라도 그것이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갖고 있던 집문서를 찢었던 것이다. 수모당한 원한을 갚지 않고 흉년에 땅 사지 않는 것을 실천한 최국선도 대단했다. 흔히 부자가 3대 못 간다는 옛말이 있는데 12대 만석꾼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 뒤부터 최 부자집은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 없게 하라는 육훈과 육연으로 오늘날 극찬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칭송받는 것이다.

송소 고택도 영조 때 심처대가 어떤 이유로 만석꾼으로 이어오다가 7대손 송소 심호택(1862~1930)은 밤에 복면하고 침입한 도적 떼들이 위협하자 재치 있는 마나님이 “사람을 해치지는 마라”하고는 곳간 문을 열어주고 마음껏 가져가게 했다. 그러고는 남은 재산으로 지은 것이 오늘날 청송의 송소 고택이다. 흔히 ‘부자는 본능을 통제하고 가난한자는 본능대로 산다.’는데 예전에는 본능대로 살았던 사람은 부자 되고 본능을 통제한 사람은 오히려 가난했다.

 

멋진 송소고택 사랑채.
멋진 송소고택 사랑채.


#. 사라질 번한 송소 고택

지금은 청송을 대표하는 고택으로 유명세를 타는 송소 고택이 되었는데 없어질 뻔한 위기상황도 있었다. 필자가 문화유물을 보고 느낀 감동을 세상에 전해주려고 1995년 문화유적이 가장 많은 경주에 정착하여 사라져가는 고택을 1996년부터 옮겨 짓고 있었다. 구미에 미군정 때 수도경찰청장 했던 장택상 고택을 10억에 판다고 하여 가보았다. 인동 장씨 집성촌의 높다란 산언덕에 지었는데 마당도 협소하고 집이 품위와 격이 없었다. 다만 대들보 하나는 필자가 수없이 본 고택 중에 제일 아름답고 멋있었다. 그 뒤 궁금하여 가보았는데 4억 주고 샀는데 수리비가 더 많이 들었다는 한정식하고 있던 주인의 말이었다. 그리고 청송에 송소 고택을 2억(4억에 내놓았다가 팔리지 않아)에 판다고 하여 가보았다. 오래전부터 비워둔 집이라 폐가에서 주는 쓸쓸함이 묻어났다. 여러 채의 큰 규모였지만 품격이 없는 고택이었다. 다만 대문 왼편에 있는 사랑채만은 낭만이 흐르면서 품격도 있어 아름다운 매력이 풍겨 탐이 났다. 그러나 청송에 산다면 모를까 이미 경주에 정착했고 멀쩡하게 있는 집을 옮겨오지는 않고 없어지는 고택만 옮겨오기에 나와는 인연이 아니었다. 그 뒤 송소 고택은 지금의 심재오 종손의 풍산금속동료 박경진씨가 2003년부터 2010년 8월까지 7년 동안 임대하여 전국에 알리는 큰 역할을 했다. 그 이후 서울에 살던 종손이 내려와 이어오고 있다. 이 마을 어느 종부와 잠시 대화했는데 2억은 아니고 경매가 5억이고 계속 유찰 되고 그것을 안 누나가 구입하여 지금은 외동 심재오 동생 소유로 이전했단다. 그때는 100억대의 빚을 진 상태였고 그런 우여곡절 끝에 오늘날 전국적으로 각광받고 덕천 마을도 살아나 천만다행이다.

장마도 아닌데 비가 계속 이어지다가 오늘은 다행히 하늘이 구름을 잔뜩 머금어 비를 막고 있어 고마웠다. 몇 번이나 왔어도 답사 객들 기행안내로 왔고 오늘은 혼자서 찬찬히 마을을 포위하듯이 앞산, 뒷산에 올라 마을 전체를 살피고 송소 고택에 들어갔다.

 

송소고택 안채 담벼락의 기와 구멍.
송소고택 안채 담벼락의 기와 구멍.


#. 덕천 민속마을의 이모저모

높다란 대문은 부자나 권력자의 권위의 상징이다. 대문 위에는 송소 고택이 아니라 근대 서예가 위창 오세창의 전서로 깔끔하게 쓴 송소고장(松韶古莊)이다. 송소(松韶)라는 뜻대로라면 심호택은 한 풍류 한 상당히 낭만적인 부자분이란 것을 알 수 있다. 하기야 부자라도 낭만이 있어야 이런 집을 짓지 않겠나. 장이란 대저택을 상징하는데 강릉의 선교장이 대표적이다. 들어서자마자 좌우를 가르는 담이 남녀유별의 상징으로 왼쪽은 남자들이 사랑채로 출입하고 오른쪽은 여자들이 안채로 들어가게 나눈 것이다. 왼쪽의 사랑채는 송소 고택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 올 때마다 옛정 그리운 애인마냥 한참을 서성인다. 야무지고 힘 있고 멋 부리면서 거드름 피우지 않는 단정한 아름다움이 흐른다. 이 송소 고택은 여러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어 담과 문들이 많아 축소한 작은 궁전 같다. 사랑채 우측담장을 끼고 있는 곳에 필자가 처음 왔을 때는 있었다. 그 7칸 건물이 불타고 없어져 99칸에서 92칸만 남았다. 이 집을 1880년에 지었다면 송소가 19살 때이다. 안채 후원 담에는 기와 구멍이 3개인데 사랑채 담에는 6개다. 사랑채서는 안채를 볼 수 없지만 안채서는 기와구멍을 통해 볼 수 있도록 했는데 한 구멍에 사랑채 쪽으로 기와 2개로 구멍을 뚫은 지혜가 대단하다.

안채 들어가는 입구에서 뒤돌아 밖을 보면 대문이 오른쪽에 비켜있다. 경사진 뒷산을 등지고 안채정문에서 앞산을 바라보니 정면에는 봉긋한 봉우리가 마치 공을 올려놓은 것 같아 풍수에서는 밥그릇 뒤집어 놓은 것이라 하고, 좌우로 펑퍼짐하게 솟아있는 것은 곡식 쌓아놓은 것 같은 노적봉이라 한다. 하기야 곡식이 산더미같이 쌓여있으니 만석꾼이 될 수밖에?

 

유청 풍산금속 창업주가 살았던 초가집과 학산정.
유청 풍산금속 창업주가 살았던 초가집과 학산정.

오른쪽 옆문으로 연결된 송정고택은 장작불 때는 연기가 아련한 고향의 정서를 풍긴다. 주인은 불 때고 유난히도 털이긴 덩치 큰 삽살개는 그 옆에서 태평하게 누워있다. 풀 무성한 뒷산 경사진 산길 오르면 벤치가 놓여있고 ‘철기장군 명상 길’이라 해놓았다. 철기 이범석(1900~1972)은 김좌진 장군과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고 해방 후에는 초대 국무총리를 엮임하고 “조국, 이 말처럼 온 인류 각 민족에게 강력과 감동과 영향력을 주는 말은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송소 고택 왼쪽 옆의 ‘백일홍’ 카페가 예쁘게 꾸며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마을중간 쯤에 있는 찰방공 심당(1606~1674)의 종택인데 지금의 집은 1933년에 지어 100년도 안되지만 소뱍하고 검소하여 정감이 간다. 특히 반질반질하게 손질을 잘해놓아 주인을 칭찬해주고 싶다. 초전 댁은 2칸짜리 사랑채가 힘 있고 멋있게 지었다 청마루 위 대들보가 세 개가 나란히 힘 받치고 있고 건물지은 연대를 안채 처마 끝 기와에 가경(嘉慶1795~1820) 11년을 새겨놓아 1806년에 지은 것을 알 수 있다. 마을 끝 부분에 있는 창실 고택은 송소 심호택의 동생 심시택이 1917년 분가하면서 지은 규모 큰 집이다. 다시 마을 반대방향 끝에 풍산금속 유찬우(유청) 창업주가 어릴 때 살았던 초가집에 갔다. 길 다란 초가 본채와 사랑채와 2칸의 별채 등은 정겹고 좋았지만 그 앞에 시멘트로 웅장하게 멋도 맛도 없게 지어놓은 학산정(鶴山亭)은 흉물이었다. 하느님은 공평한지 돈 있으면 안목 없고 안목 있으면 돈이 없는 모양이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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