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대수필가
윤영대
수필가

요즈음 중부 지방에는 폭우로 내리붓는 장맛비에 온통 물난리인데 여기 포항은 연일 30도를 웃도는 폭염이 계속되고 열대야가 밤잠을 못 이루게 한다. 코로나19로 답답해진 마음에 밤바다를 거닐고 싶어 영일대 해수욕장으로 산책을 나가본다. 바닷가까지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아 반바지에 샌들을 신고 아파트를 나서면 벌써 시원한 바닷바람이 얼굴에 와 닿고, 골목길 빠져 해변 도로를 걸어보면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예년 같으면 방학에 피서철이라 발 디딜 틈도 없을 인파가 저 바닷가 파도처럼 일렁일 텐데…. 멀리 까만 바다 끝에 반짝이는 불빛은 호미곶인지 떠 있는 배들인지 정답게 다가오고, 수평선에 떠오른 보름달은 바다와 거리두기를 하는지 구름 마스크를 쓰고 하늘 높이 떠 있다.

넓은 모래밭에는 젊은이들이 쏘아 올리는 불꽃 터지는 소리와 물가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산책길에는 가족끼리 또는 연인끼리의 걸음들이 모두 가볍고 길가에 앉아 서로 속삭이거나 혼자 생각하는 듯한 사람들의 모습도 해변의 낭만이다.

사람들과 섞여서 천천히 걷다가 모래밭으로 내려서면 마르고 푹신한 느낌이 좋다. 아예 신고 간 샌들을 벗고 맨발로 걸으니 사각거리는 모래의 감촉이 아스팔트 길에 잊어버린 발바닥의 촉감을 찾아준다. 내친김에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조용히 밀려오는 밤바다의 물결 소리가 종일 TV 소리에 지친 나의 귀를 간지럽히고, 두 발에 전해오는 차가움은 가슴으로 올라와 온몸의 열기를 식혀준다.

바닷물에 세족(洗足)을 하니 생각난다. 8월 4일은 음력 6월 15일, 유두절(流頭節·유둣날)이다.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이라 동쪽으로 흐르는 맑은 시냇물이나 폭포수에 몸을 씻고 머리를 감고 친척들과 떡이나 전을 먹으며 유두잔치를 하면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고 병이 없다는 신라 때 명절인데 잊혀져가는 옛 풍습이 아쉽기만 하다. 그러고 보니 영일만으로 흘러들어 오는 형산강이 동쪽으로 흐르는 물이라 ‘잘 됐구나’ 하며, 오늘 저녁 유둣날의 기분에 한껏 젖어보았다.

바닷물에 발 담그고 돌아서서 해변 야경을 보니 알파벳과 외래 이름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띄어 엉뚱한 생각도 해 본다. 요즘 해외여행이 발 묶여버린 마음에 언젠가 가봤던 기억의 어느 외국 해변 풍경을 그리며 그곳에 와있노라고 상상해보는 것도 나쁠 건 없겠지.

모래밭에는 매년 만들어 놓는 모래 작품들도 볼거리다. 섬세하게 쌓아 올린 이름난 건축물 조각상 앞에서 흐르는 불빛 따라 즐겁게 사진을 찍는 모습 또한 행복해 보인다. 발의 모래를 털고 다시 길로 올라오면 즐비한 스틸아트 작품들이 포항의 얘기를 들려주는 듯 밤의 산책을 즐겁게 한다.

해변 끝에서 높고 좁다란 방파제에 올라 운동하러 나온 주민들의 씩씩한 발걸음을 따라 끝까지 걸어 가본다. 빨간 등대 불이 깜빡이는 어둠의 배경은 7, 80년대 형산강의 기적을 만든 포스코, 옛날 그 힘찬 용광로의 불꽃은 다 어디로 갔는지 옛 함성을 반추하듯 초대형 전광판의 글자가 길게 늘어져 지나간다. 나는 그 전광판에 새기고 싶다. ‘포항의 영광을 되찾자.’ 그리고 등대 벽에 낙서한 연인들의 마음을 읽으며 통통거리며 들어오는 고깃배의 만선을 빌어본다.

돌아오는 길, 200여 그루의 곰솔 숲 앞을 걸으면 풀잎 지붕의 둥근 테이블마다 바닷바람을 쐬며 술이나 음료수를 마시며 이야기를 즐기고 있는 모습도 흥겹다. 그런데 모든 공연이 금지된 버스킹 무대에는 할머니 몇 분이 손주들 재롱을 즐길 뿐이다. 모래밭에 줄지은 천막은 비어있는 듯하지만 길가 술집과 커피숍은 그래도 젊은이들로 북적이는데 실내 금연이라 밖에 모여 피워대는 모습도 안쓰럽지만 그들이 버린 꽁초가 쓰레기 더미와 함께 하얀 애벌레처럼 밤길에 나뒹구는 광경은 하루의 마음을 정리하며 밤 산책하고 돌아오는 마음을 무겁게 한다.

영일대 누각에 올라 보석처럼 반짝이는 해변의 불빛을 가르며 내 달리는 제트보트의 날렵한 질주를 눈에 담고 집에 돌아와 폭포수처럼 틀어놓은 샤워기로 젖은 땀을 씻고 유둣날의 복을 빌어본다. 남은 말복에 더위 먹지 말기를…. 지난 7일이 입추(立秋), 벌써 가을이 오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