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뭐든 잘 버립니다. 안 그래도 좁은 집, 그리 필요치 않은 물건이 여기저기 쌓이는 걸 참아내지 못합니다. 틈 날 때마다 뭐 떠나보낼 게 없나 살피곤 합니다. 보내는 입장에선 홀가분해서 좋고, 떠나는 물건 입장에선 사랑 받을 새 주인이 생겨서 좋고. 버려야만 하는 자로서 저런 변명이나 합니다. 어쨌거나 버리지 못하는 것보다는 잘 버리는 편이 낫다고 말하곤 합니다.

우리가 잘 버리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알뜰 콤플렉스’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저와 동시대를 지나온 이들은 아껴야 잘 산다,라는 말을 캠페인 문구처럼 듣고 자랐습니다. 불필요한 물건을 놓아준다고 해서 가난뱅이가 되는 것도, 그것을 품고 간다고 해서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아깝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쓰레기나 다름없는 물건을 쌓아두는 건 그다지 합리적이지 못합니다.

잘 버리는 자들은 처음부터 잘 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할 것을 알기에 될 수 있으면 물건을 잘 들이지 않습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버릴 물건이 원래부터 그다지 없는 편에 속하지요. 최소한의 물건으로 버티다가 그마저 필요치 않게 되면 떠나보내는 것이니까요. 둘 자리가 넉넉했다면 이런 습관은 들지 않았겠지요. 마당 없는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 공간을 규모 있게 활용하고픈 맘에서 생긴 습관입니다. 코로나 핑계로 바깥 활동을 하지 않은 이유가 있긴 하지만, 올해 들어 새 신발이나 새 옷을 산 적이 없습니다. 알뜰해서가 아니라 뭔가 쌓이거나 넘치는 걸 경계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내친 김에 유행하는 미니멀리즘까지 나아가면 좋겠지만, 그러기엔 특정 물건에 대한 은근한 애정이나 감성적 회고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책방 청소를 하는데 구석 밑자리에 있던 엘피판들이 청소기에 걸려 쏟아집니다. 이때다 싶어 와르르 부려내 한 컷 담았습니다. 삼십여 년 묵은 사연들이 먼지 낀 표지 위로 풀썩입니다. 버릴까 말까 숱한 망설임 끝에 살아남은, 저에겐 골동품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힘겨운 십대와 이십대를 건너는 동안, 감성적 물결로 제 곁을 지켜준 친구입니다. 그때의 청춘들은 라디오나 카세트 테이프 그리고 엘피 디스크로 음악 감상을 하곤 했지요. 추억을 소환하고 시간을 경작한 그 물건들을 누군들 함부로 버릴 수 있을까요.

몇 번의 이사를 하면서 부피가 큰 오디오 시스템 기기를 가장 먼저 버렸습니다. 턴테이블과 카트리지 바늘만은 따로 빼둘까 하다가 몽땅 버렸었지요. 새로운 밀레니엄이 온다고 매체들은 떠들었고, 그 예라도 되듯 엘피판이나 테이프로 된 음원 기기가 속절없이 무너지던 시대였으니까요. 와중에 엘피판들만은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발품을 팔아 사거나 선물로 받은 그 디스크 안에는 청춘을 감내하던 풋것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으니까요. 아무리 버리기 좋아하는 선수라 해도 이어질 듯 끊어지는 한 시절을 소환하는 매개물 앞에서는 망설이게 되니까요.

김살로메<br>소설가
김살로메
소설가

잠시 그 시절을 환기해 봅니다. 카트리지 바늘이 엘피 홈에 스치면서 원판이 돌아갑니다. 기다려도 오지 않을 게 뻔한 소식을 기다리며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었고, 불안한 미래에 대한 사념을 가눌 길 없어 모차르트의 미사곡에 카트리지를 얹곤 했지요. 쓸데없이 성찰하고 불필요하게 막막해하던 스스로를 음악 속으로 유폐시키던 시간들이었지요.

이제껏 버리지 않아서 거추장스러웠던 적은 있어도, 버리고 나서 후회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버리지 않아서 다행인 게 세상엔 얼마나 많은지요. 그간 너무 쉽게 추억이나 향수를 버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일까요. 언젠가부터 복고의 풍경이 아슴아슴 떠오르더니 턴테이블이 갖고 싶어졌습니다. 꼼꼼한 남편은 이게 나아, 저게 좋아 하면서 검색만 열심입니다. 쉽사리 들일 결정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당연히 제게 있습니다. 기왕의 물건들은 자리가 정해져 있고, 아무리 둘러봐도 턴테이블이 놓일 만한 맞춤한 장소가 없습니다. 걸리적거린다고 버림당할 것을 저어해 확실한 공간이 확보될 때까지 주저하게 되는 것이지요. 새로운 하나를 위해 기존의 무언가를 비워야 하는 우리집의 한계, 아니 제 품의 한계만 실감합니다. 그 공간을 만들 때까지는 옛 친구가 해준 말로 위안이나 삼아야겠습니다.

그 시절, 서울로 유학 간 친구에게 엘피판을 선물한 적이 있습니다. 친구 왈, 자취 살림에 잦은 이사가 성가셔 턴테이블을 없애버렸답니다. 제가 건넨 음악을 들을 수 없음을 아쉬워하며 이런 위트 있는 회답을 보내왔었지요. 백문이 불여일견.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나요. 저 음반들 역시 지금은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더 짜릿할 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