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별자만큼의 진실
개별자만큼의 진실
  • 등록일 2020.07.08 20:11
  • 게재일 2020.07.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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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출판사에서의 전화. 원고청탁이라면 짐짓 거절 제스처로 만용이라도 부려보겠지만 그럴 리가요. 블로그에 올린 서평을 인용하고 싶답니다. 재발간하는 책 말미에 몇 문장을 인용해도 되겠느냐고 양해를 구합니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닌 걸 보면 편집자들은 자사의 책과 관계 되는 것이라면 구석구석 구글링을 하는 모양입니다. 변방의 글까지 찾아내니 말입니다. 물론 그리해도 좋다고 답했습니다.

따옴표로 묶어 보내온 그 문구들을 들여다봅니다. 소설 ‘파이 이야기’에 관한 단상입니다. <‘있는 그대로’라는 말의 의미는 현실에서는 ‘개별자가 본 대로’가 되기 일쑤이다. 씁쓸하지만 온당한 이 철학적 사유를 우리는 끝내 확인하고야 만다. 삶의 방식과 종교 문제 그리고 인간 본성, 살면서 느끼는 온갖 것들에 대한 개수만큼의 진실이 소설의 도마 위에 오른다.> 동어반복이다 싶게 예나 지금이나 저는 이런 문제들에 생각이 많습니다.

인도 한 도시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 파이네 가족은 캐나다로 이민을 갑니다. 동물들도 함께 화물선에 오릅니다. 배는 난파되고 파이와 벵골호랑이 리처드는 망망대해에서 표류합니다. 그 과정의 여러 에피소드들이 후일담 형식으로 펼쳐집니다. 맹수와의 동거라는 어마어마한 진실은 소년 파이에게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솔한 경험입니다. 하지만 누가 파이의 말을 믿어 줄까요.

보고도 믿지 않는 게 사람입니다. 아니, 본 뒤에 제 식으로 믿는 게 사람입니다. 그런데 본 적조차 없는데 어찌 ‘있을 수 없는 일’을 믿을 수 있을까요. 무시무시한 호랑이와 지낸다는 것, 내 문제일 때는 진실이 되지만 상대의 얘기일 때는 달라집니다. 비현실적인 파이의 경험담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인간의 심리를 감안해 파이는 등장인물들을 동물에서 인간으로 각색한 버전도 들려줍니다. “어느 쪽이 더 나은가요?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인가요, 동물이 안 나오는 이야기인가요?” 밝은 모습으로 말하는 파이의 유머가 슬퍼 보이는 건 왜일까요. 세상엔 너무 많은 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파이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저마다의 진실 즉, 개별자 숫자만큼의 진실을 믿어야 하는 삶이 있는 한, 파이의 유머는 단순한 유머로 그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만 믿으라고 쉽게들 말합니다. 하지만 그 말조차 믿을 게 못 되지요. 있는 그대로의 기준이란 얼마나 모호한지요. 존재하는 그 무엇은 본성 그대로의 형상과 내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별자의 눈을 통과하는 순간, 그 모습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죠. 안 그래요? 뭔가를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뭔가를 갖다 붙이지요. 아닌가요? 그게 인생을 이야기로 만드는 것 아닌가요?”

무엇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언어의 종류에 상관없이 창작의 요소가 깃드는 것이라고 작가 얀 마텔은 말합니다. 뜻하든 그렇지 않든 한 사안에, 보는 이의 소설적 장치가 가미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되면 애초에 존재했던 진실은 별 의미가 없게 됩니다. 저마다의 생각이 새로운 진실이 되어버린 마당에 진실 찾기가 무슨 그리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을까요.

말장난 같지만 진실은 진실만이 알 뿐입니다. 따라서 파생한 진실이 원래의 것과 멀어지더라도 슬픔 속에 갇힐 이유가 없습니다. 호랑이 리처드도 끝내 숲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공포와 공존 속, 최대 생존 파트너로 생각했던 파이를 둔 채. 호랑이 입장에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진실의 세계로 떠날 수밖에 없으니까요. 진실의 실체가 아니라 저마다의 진실을 지닐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이나 한계 같은 걸 사유케 하는 순간이지요. 나를 둘러싼 현상이 온당하다는 아집에 빠질수록 상대의 진실에서 멀어질 수 있음을 아찔한 설정과 유머로써 경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상대에게는 박한 잣대를, 스스로에게는 후한 잣대를 들이민 모든 날들을 소급하고 싶어집니다.

김살로메소설가
김살로메
소설가

마침 효자손이 보입니다. 껍질을 까고 옹이를 깎아낸 뒤 사포로 문질러 반질반질 윤이 나는 수제 등긁이. 무심한 듯 건네던 친구 왈, 산책길에 버려진 오동나무를 모셔 왔답니다. 받을 이를 생각하며 몇날며칠에 걸쳐 손맛을 입혔을 정성을 생각하면 등을 긁는 용도로만 쓰기엔 아깝습니다. 한 가지 진실에만 접근하려 한, 용렬한 어깻죽지가 들썩일 때마다 스스로를 내리치는 죽비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극한으로 치닫지 않는 한, 세상사 진실 찾기로 시간 허비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점점 복잡해지는 세상, 멀어진 실체를 찾으려는 게임보다 내 앞에 있는 모든 것에 유연한 시선을 보탤 일입니다. 혹여 진실의 개수를 줄이겠다고 소견을 좁히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 등 긁는 일 못지않은 쓰임새로 이 죽비를 들어야겠습니다. 파이가 그랬듯이 유머와 이해를 싣는 죽비소리, 아니 동비(桐<7BE6>)소리가 저릿한 술맛처럼 어깻죽지를 타고 심장으로 흘러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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