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사연을 안고 자연과 어우러진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
수많은 사연을 안고 자연과 어우러진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
  • 등록일 2020.06.30 18:50
  • 게재일 2020.07.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6. 아름다운 낭만이 흐르는 병산서원

병산서원 강당.

우리나라 서원 중에서 가장 낭만적인 아름다움을 던져주는 서원이 병산서원이다. 이 병산서원은 속세의 극락같이 저만큼 앞에는 병풍이 두른듯 병산이 펼쳐져 있고 그 아래 강물은 소리 없이 흐느끼며 백사장을 적시고 흘러간다. 화산(花山), 이름하여 꽃의 산에 앉은 병산서원은 크지도 작지도 않게 알맞은 규모로 당당하게 앉아있다. 많은 사연을 안고 기막힌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어 자연과 조화로운 이상적인 건축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준다.

#. 드라마틱한 병산서원

병산서원 가는 비포장 길 입구에 들어섰다. 산허리를 끼고 도는 비포장 길은 고맙기도 하면서 아련한 옛 사연을 던져준다. 저만큼 아래 강물은 흐르지 않고 정지되어 있는듯해 그리움도 멈추어버린다. 주차장 입구에서 병산서원 가는 길에 흙벽집이 아련한 삶의 흔적이 아련 거린다. 복례문을 지나자 만대루가 기다리고 있다. 왼쪽에 조그마한 연못 광영지가 옛 사람들의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天圓地方)의 우주관을 만들어놓았다. 병산서원은 평지가 아니라 산 언덕을 이용한 점층법으로 단을 쌓아 기하학적 구성원리로 자연 속에 있으면서 자연을 온통 끌어당기는 자연과 일체된 건축으로 한국 건축의 백미로 통한다. 서원의 주인공건물은 강당이다.

 

옆에서 본 만대루.
옆에서 본 만대루.

강당 동쪽 명성재는 원장실, 서쪽 경의재는 부원장 겸 교무실인데, 아래 동쪽 동직재는 나이 많은 원생들의 기숙사이고, 서쪽 정허재는 나이 젊은 원생들의 기숙사다. 이 강당에서 과제를 받은 학생들이 보름에 한 번 열리는 강회 때 원장 앞에서 필기시험 아닌 구술시험을 친다. 여기서 합격해야 다음 과제를 받고, 유급되면 통과 못한 과제로 다시 공부해야 된다. 강당 뒷문을 열면 백일홍 여러 그루가 세월의 무게만큼 굵기가 사람을 압도한다. 장판각, 존덕사, 신문, 진사청 건물들 앞에서 호위하듯이 도열해 있다. 선비의 열정을 나타내는 백일홍은 스승 퇴계가 매화를 유독 사랑했듯이, 서애 류성룡(1542~1607)은 백일홍을 많이 좋아했던 모양이다. 목판을 보관한 장판각이 보인다. 책이 귀한 시절 필사본으로 공부하지만 필사는 사람에 따라 오, 탈자가 많이 생겨 책으로 인쇄할 수 있는 목판은 대단히 중요한 출판 기능을 했다. 존덕사는 서원의 선현봉사와 교육의 2대 기능 중 하나인 서애 류성룡과 셋째아들 수암 류진(1582~1635)의 위폐를 모신 곳이다. 강당과 동서재 그리고 제향공간으로 서원의 기능은 족하다. 그런데 병산서원의 압권은 이 중요한 기능도 아닌 휴식과 행사의 부수적인 공간인데 병산서원을 스타로 만든 것이 만대루다. 서원이나 궁궐 누각, 정자 등을 이름 붙일 때 사서삼경의 문구에서 많이 따오는데 조선 유학자들이 그토록 사모하던 주자(주희)의 무이정사(武夷精舍)에 만대정(晩對亭)이 있고, 삼국지의 유비가 최후를 맞이한 곳이 백제성이다. 당나라 시성 두보(712~770)는 그‘백제성루(白帝城樓)’의 시 /강도한산각(江度寒山閣) 강은 겨울 산의 누각을 건너고,/….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 푸른 병풍 같은 산은 늦도록 마주 대할만하고./ 에서 따왔는데 여기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만대루의 위용.
만대루의 위용.

#. 이름만으로 가슴 설레는 병산서원

교회나 성당, 절 등은 종교적 신앙의 대상이라 사람을 유혹하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화려하거나 권위적이다. 서원은 유교적 엘리트들을 교육시키고 선현을 배향하는 엄숙한 공간이라 검소하고 담백하다. 그리고 병산서원은 부분과 집합을 조화롭게 잘 배치하여 자연 속에 있으면서 자연을 끌어들여 자연과 하나 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사상이 접목된다.

이 병산서원의 모태인 풍악서당은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으로 복주(안동)로 가기 전에 풍산 산성에 머물 때 풍산현의 지방유림 자제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감동받아 서책과 땅(지금의 풍산중·고)을 주어 유생들이 더욱 학문에 열중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도 하고(서원총람·1978년), 영가지(1608년)에는 1551년 권경진 등에 의해 창건했다 한다. 세월이 흘러 서당 가까이 집들이 들어서 시끄러워지자 서당을 옮길 궁리를 하다가 서애가 부친상을 당해 하회에 와있을 때 유생들이 자문을 구하자 서애는 병산(지금의 자리)가 적당하다고 하여 풍악서당을 1572년(선조 5년) 병산으로 옮기고 ‘병산서당’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타고 1607년에 중건하고, 1614년 서애와 셋째 아들 류진을 배향한 존덕사 사우를 건립하면서 서원이 되었다. 1620년 여강서원(호계서원)에 서애의 위폐를 모셔 가면서 퇴계의 좌, 우 상석에 누구를 모시느냐의 병호시비가 시작된다.

국가가 공인해주는 사액서원은 라이벌 학봉을 모신 임천서원이 1618년(광해군 10년), 호계서원이 1676(숙종 2년)에 사액 받았는데, 이 병산서원은 1863년(철종14년)에 받았으니 퇴계 적통싸움에서 제자군단 많은 학봉파에 밀린 것이다. 새옹지마라고 당쟁의 근원지인 임천서원, 호계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헐렸지만, 병산서원은 소외된 약자의 입장이라 서원의 건강성을 유지하여 철폐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옛날 여기서 공부하던 원생들이 과거에 급제라도 하면 서원에 못 들어오는 광대들은 이 만대루 아래서 풍악을 울리고 유생들은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여흥을 즐겼다. 이 만대루가 신분의 경계선이 되었다. 지금의 복례문은 동쪽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텅 비어있어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지금의 만대루가 좋지만 여기에 방도 넣었다가 없앤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나 건축이나 처음부터 완벽한 것이 아니라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서 완결되는 것이다.

 

그리움이 흐르는 병산 앞의 낙동강.
그리움이 흐르는 병산 앞의 낙동강.

#. 만대루서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코로나19 덕분에(?) 대낮에 혼자서 만대루에 한참을 앉아서 푸른 병산의 절벽을 마주 대하고 백사장을 옆에 끼고 말없이 흐르는 강물을 보았다. 수백 명의 여러 답사객들을 데리고 나름대로 열변을 토했던 지난 일이 주마등같이 스친다. 나는 얼마나 감동을 주었는가? 필자가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초대 총무로 유홍준 대표와 환상의 콤비가 되어 전국을 기행 할 때 병산서원과 백사장 모래밭에서 가슴 벅찼던 밤, 어느 여름 보름날 진주 삼현여고 독서반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이 만대루에서 병산과 강, 허공의 달을 대하면서 안동의 안상학 시인의 이육사 문학과 나의 병산서원 특강이 달빛에 익어 허공에 맴돌다 강물에 젖었던 그 밤이 새록새록 하다.

이 병산서원의 강당이나 동, 서재 그리고 만대루의 청마루 바닥은 언제와도 반질반질하여 신발 벗고 오를 수 있어 고마울 따름이다. 전국에 수많은 고택문화재, 특히 공간이 넒은 누정은 청소가 안 되어 신발을 벗을 수 없다. 여기 병산서원은 30년 넘게 서원 옆에 사시면서 매일 관리해온 류시주 님의 덕분이었다. 40~50명의 단체가 잠잘 수 있는 공간이 마땅치 않을 때 하회식당 겸 민박집이 유일할 때 단체로 몇 번이나 숙식했던 인연으로 인사 드리러 갔는데 출타 중이라 못 뵙고 왔다. 70대 후반인 지금도 이틀은 청소하시고 4일은 하회마을 보존회서 청소하고 있어 생기 도는 병산서원이 되어 만대루에 하염없이 앉아서 흐르는 강물을 볼 수 있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지난봄에 안동산불의 발원지가 저 건너 병산이라 탄 흔적이 보인다. 물은 간을 넘지 못해도 바람은 넘을 수 있는데 남동풍이 병산서원을 살렸다.

사람들은 달빛이 강물에 부서지거나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 저마다 생각을 하게 된다.

 

만대루서 바라본 병산과 낙동강.
만대루서 바라본 병산과 낙동강.

유학자들이 흠모하던 공자도 흘러가는 물을 보고 생각에 잠기자 제자 자공이 “왜 물만 바라보십니까” 물었다. 공자는 “물의 이치만 생각하고 있다. 물은 참으로 위대하다. 물은 만 번 꺾여 흐르지만,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 이것은 사람이 사는 의지와 같다.” 공자가 한국에 살았다면 동이 아니라 남으로 흐른다 했을 것이다. 세상 모든 이치는 자기가 사는 자연환경의 기준으로 사고할 수밖에 없다. 중국은 우리의 동고서저(東高西低)가 아니고 서고동저(西高東低)라서 동으로 흐르기 때문에 공자가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땅 덩어리 큰 중국의 산수는 기상천외한 것이 많다. 중국 사람이 그린 산수화는 실경이라도 그것을 흉내 낸 우리의 산수화는 관념화가 되는 것이다. 조선 후기 영, 정조시기에 조선의 문예부흥인 실학이 잠시 꽃을 피울 때 겸재 정선(1676~1759)의 진경산수화가 나오고 기름기 있는 중국서예가 아닌 원교 이광사(1705~1777)의 동국진채가 나왔다. 연이어 혜원 신윤복(1758~?)은 춘화도를 그려 궁중의 도화서에서는 쫓겨나지만 비디오 없는 시절에 양반들은 끽끽거리며 좋아했던 것이다. 양반들만 갖던 병풍을 거상들 중에 소금장수도 집에 소유했으니 그들의 눈높이로 맞춘 것이 단원 김홍도(1745~1806?)의 씨름도 등등의 풍속화인 것이다. 그때 조선의 깨어 있는 유학자들은 실학을 들고 나왔지만, 대부분의 유학자들은 모든 세계는 중국이었고 공자, 맹자의 자구 하나 가지고 티격태격 했던 것이다. 그 옛날 유생들은 여기 만대루에 앉아서 흐르는 물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강은 산을 넘지 못해 병산 큰 바위에 부딪힌 강물은 하얀 그리움을 토하듯이 병산서원 앞에 은빛 고운 백사장을 쏟아내고 하회로 흘러가는데….

만대루에서 내려와 백사장 강가에 닿으니 물이 정지한 것이 아니라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멈추었던 그리움이 다시 긴 그리움으로 살아난다. 물은 흘러야 된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