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향 사태를 둘러싼 논란은 세상이 겉보기와는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한다. 또 아무리 좋은 명분을 가진 것도 시간이 오래 가며 상하지 않기는 참 어렵다는 것도 다시 한 번 깨우친다. 비단 윤미향이나 정의연대만의 일이 아니요, 정파적 이해관계를 떠나 우리 모두가 되짚어 볼 일이요, 사람살이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용수 할머니가 윤미향과 정의연대 문제를 제시하며 말한 것 가운데 인상에 남는 것이 하나 있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가 증오를 가르치는 것으로 끝나서는, 일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우리의 아이들, 한국과 일본의 미래는 반목과 갈등보다 평화를 지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가 위안부라는 전시 성노예제의 피해 당사자이기 때문에 이 말은 함부로 폄훼할 수 없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그가 대리인에 불과하다면, 대리인이란 그 피해 당사자는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어긋남이 있을 수 있다는 당연한 의미에서 그 진정성을 한 번쯤 시험대 위에 올려봄직도 하다고 할 수 있고, 또 피해자가 언제, 어디서나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피해자의 말이라 해도 보편타당함에서 벗어나면 회의해 볼 수 있는 여지도 없지 않다.

그러나 결국 사람의 삶이란 투쟁과 반목에서 벗어나 평화와 공존, 다른 말로 말해서 사랑의 마음을 품고자 할 때만 평온과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과거가 지배와 피지배, 착취와 수탈, 살육과 피해로 점철되어 있다 해도 미래는 과거를 딛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는 노력에 의해서만 더 나아질 수 있음은 물론이다.

물론 한국과 일본에는 이 미래를 저해하는 인식과 행위들이 있다. 한국에는 가해자의 입장을 두둔하고 가해자의 입장이 자신의 입장이 된 기막힌 코미디를 진지하게 연출하는 사람들이 있어, 있는 것도 없다 하는 가해자의 거짓 논리를 한국어로 포장해 주는데 여념이 없고, 오히려 피해자들이 거짓말을 즐긴다는 마타도어를 유포한다.

사실, 진실을 둘러싼 인식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한일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고 어둡다. 그러나 평화와 공존, 사랑이 유일한 해법이라면 이제 우리는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 지배자들과 그들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 논리를 넘어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전망을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의 운동이 배상 요구라는 피해의 물질적 측정 문제를 넘어서 더 넓고 깊은 설계를 해나가는 문제로 직결된다고 생각한다.

결코 풀기 쉽지 않은 난제다. 그러나 과거를 딛고 미래를 여는 일은 ‘우리’가 ‘그들’보다 잘해 왔고 잘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이제 ‘탈식민’조차도 넘어서야 한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