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휘 논설위원
안재휘 논설위원

“개념이란 우리가 이것을 실천적으로 검증할 수 있을 경우에만 옳은 것이고, 행동의 결과로 나타낼 수 없으면 무의미하다” 미국의 프래그머티즘 창시자인 퍼스(Charles Sanders Peirce)의 정의다. 실용주의 정신은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능동적인 실천을 통해 미래를 지향해 가는 하나의 원동력으로서 극대화된다는 논리다. 실용주의란 투철한 ‘현실 인식’과 ‘실천력’, ‘미래비전’을 함께 수반할 때 가치가 있다는 얘기쯤으로 의역될 수 있을 것이다.

이틀간의 21대 총선 당선자 워크숍을 마친 미래통합당이 ‘실용정당’을 표방했다. 총선 참패로 최악의 위기 상황을 맞고 있는 통합당은 긴 논란 끝에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기로 하고, 머뭇대던 미래한국당과의 통합도 29일까지 매듭짓는 것으로 결정했다. 주호영 원내대표가 발로 뛰고, 다수의 초재선 당선자들이 힘을 합쳐 밀어준 결과로 해석된다.

워크숍이 끝난 뒤 배현진 원내대변인이 발표한 성명에는 중요한 대목이 많다. 우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눈에 띈다. “언제나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해 싸우겠다”는 선언도 시원하게 들린다. “익숙했던 과거와의 결별 선언을 한다. 오직 국민만 있고 국민 눈높이에 맞는 실용 대안 정당을 만들겠다. 대안과 혁신으로 가득한 미래만 있다”는 맹세도 뜻 깊이 들린다.

실용주의 창시자 퍼스가 말한 세 가지 요소 중에서 일단 첫 번째 항목인 ‘현실 인식’ 측면에서는 꽤 많은 성찰이 이뤄진 것으로 평가하고 싶다. 그동안 좀처럼 탈출하지 못했던 ‘꼴통보수 감옥’에서 비로소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도 든다. 부디 선언문의 약속 조목조목처럼 확 달라지기를 성원한다. 하지만 통합당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리 다사롭지 않다. 형편없이 기울어진 운동장 아래쪽에서 정말 그 모든 걸 실천해낼까 하는 의심도 깊다.

실천력을 담보해낼 응집력과 지혜는 튼튼한 기초체력에서 나온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히딩크는 모든 파벌의 넝쿨들부터 한칼에 잘라냈다. 한동안 기술훈련 대신 기초체력을 키우는 고강도 훈련만 시켰다. 경기에 거듭 대패해 ‘오대빵’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그래도 히딩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프로그램대로 밀고 나갔다.

월드컵 본선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진가는 드러났고, 전무후무의 ‘4강 신화’를 기어이 이룩해냈다.

통합당은 히딩크의 한국축구 월드컵 4강 신화에서 힌트를 찾을 필요가 있다.

권력자들끼리만 주고받는 게임의 법칙부터 깨부숴야 한다. 이제 더이상 낡은 ‘권력’ 편에 서면 안 된다. ‘국민’ 편에 서서 국민이 듣고자 하는 목소리로 국민을 설득하는 기초능력부터 키워야 한다. 시대에 뒤떨어진 공리공론의 늪에서 탈출해야 한다. ‘실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현실 인식’은 실용이 아니다. ‘미래비전’이 없는 ‘실천력’ 또한 실용의 범주 바깥에 있다. 통합당의 미래는 비로소 실험실에 있다.